1. 오늘 저는 “성경이 말하는 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세상에 저주나 멸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아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복입니다. 문제는 복의 개념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국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 수(壽):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과, ㉡ 부(富): 살아 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 ㉢ 강령(康寧):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 ㉣ 유호덕(攸好德):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 ㉤ 고종명(考終命):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이 있습니다. 이러한 복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2. 그런데 시편 73편은 사람들이 복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것을 복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 개념을 가진 시인은 하늘과 땅 전체에서 하나님 외에는 사모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73편 25절에서 시인은 하늘과 땅에 주님 이외에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חָפֵץ) 어떠한 대상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주님만이 우리가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 대상이 되시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 온전히 돌리지는 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우리의 애착이나 열정의 지극히 미소한 부분(minimam partem)이 피조계에 돌려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할 영광의 전부를 횡령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치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만 어겨도 율법 전체를 범한다는 말과 어법이 같습니다.
3. 하나님만 사모하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늘과 땅에는 몰골이 흉하고 악취가 지독한 것들이 아니라 참으로 탐스럽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관심과 애착을 노리는 유혹의 촉수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무섭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미혹의 종류와 양태가 세상에는 무수하고 날로 진화하고 있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도 쏟을 우리의 관심과 애정을 적당하게 분배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는 매혹적인 대상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4. 본문을 기록한 시인 자신도 이러한 홍수에 휩쓸려서 미끄러질 뻔 했다고 말합니다. 실족하게 하는 원인들이 사람마다 다양할 것인데, 시인이 열거하는 미혹의 원흉들은 특별히 우리를 현혹하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분노와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게 만드는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인은 오만한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있습니다. 형통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4절에, 오만하고 악한 자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오히려 건강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악하고 오만한 자들이 살 때에는 괜찮게 살더라도 생의 마지막 순간 만큼은 비참하고 억울하고 불쌍할 정도로 망가져야 일반인의 가슴에 쌓인 억울함이 풀어지는 법인데 그러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지막 호흡을 들이키는 순간까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시인은 목도하고 있습니다.
5. 그리고 5절에서 타인이 보통 당하는 고난과 재앙을 악인들은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자신이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닥치는 재앙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하고 오만한 자에게는 그런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살찜으로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크다고 말합니다. 눈이 솟아날 정도로 살이 찐다는 것이 현대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이지만, 고대에는 풍요와 평안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은 사업을 해도 아주 악질의 사기꾼을 만나 패가망신 당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들이 계획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이윤을 취한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이사야는 ‘악인에겐 평강이 없다(사48:22)’고 했는데, 아삽은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게다가 그들의 재물은 나날이 증대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답니다. 실족의 이유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6. 지금까지 열거된 부조리는 신경을 끊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부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성전에서 하나님 섬기는 일만 일평생 해 온 아삽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14절)는 것입니다. 아삽의 관찰에 의한다면, 그의 시대는 마치 공법이 인진으로 전락하고 불법과 부조리가 처처에 횡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시대상을 현실로 부딪히며 진리로 저항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나 아삽이 경험했던 실족의 벼랑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7. 오늘 시편 73편을 함께 생각하는 이유는 아삽이 결국은 실족하지 않고 승리했고 그 비법을 소개하고 있기에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는 불법과 거짓의 악취를 호흡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비결을 진리가 실종된 자기 시대의 부패와 싸워 승리했던 아삽의 고백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삽이 그런 문제들을 극복한 비결은 복의 기준이 바뀐 것에 있습니다. 무엇이 복이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향기롭고 눈부시고 탐스러운 것들을 취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님을 안 것입니다. 아삽은 세상이 돌아가는 병적인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게다가 잠시 있다가 썩어 없어지는 땅의 복들이 기준이 될 때에는 그런 상황이 신앙의 근간마저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기준을 찾았고 그 기준으로 그간 실족을 부추겼던 모든 원인들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해법은 바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8.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장 좋은 것을 뜻합니다. 우리 편에서 본다면,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바로 그것을 복이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복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엉뚱한 것을 기대하게 되고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은 구하지 않는 신앙의 불균형이 초래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마땅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9.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해도 해석의 차원에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조건형) 복이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 그 자체(규정형)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 것을 마치 자신이 원하는 복을 초래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복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구제하고,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잘 살고 건강하고 형통하기 때문에 그런다면, 그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열심들은 모두 어떤 이득을 취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열심들은 그 자체가 이미 복입니다.
10. 정직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도 정직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정직하면 친구가 생기고 신용이 쌓이고 엄청난 고객을 유치할 수 있고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건강한 사회의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는 요즘 세상에 이런 정직만 갖추어도 사회는 눈이 부시도록 밝고 투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정직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직의 결과가 달콤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정직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발휘되기 때문에 우리는 정직의 결과보다 정직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정직이 조롱을 부르고 불이익을 낳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정직을 고집하지 거짓으로 삶의 전향을 꽤하지는 않습니다. 결과의 유무에 관계 없이 정직을 고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 뿐입니다.
11. 구제하는 것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이 큰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되돌아올 보상을 기대하고 구제하는 것은 구제가 아니라 투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제자는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 것에 탐욕의 군침을 흘리지 않습니다. 구제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의 가치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친구와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도 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발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의를 구하는 차원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죽더라도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를 구하면 좋은 결과가 뒤따르기 때문에 의를 구하지 않고 의 자체가 복이기에 의의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12. 두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진정한 복이 대체로 명령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명령의 방식으로 되어 있지만, 독재자의 억압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명령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고 선택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좋고 궁극적인 복이기 때문에 그렇게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원을 표현하기 위해 명령의 방식을 취하였을 뿐입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큰 복입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정죄하고 파멸로 몰고가는 걸림돌이 아닙니다. 우리의 옳고그름 시시비비 따질 필요도 없이 너무도 좋은 것이어서 명령의 옷을 입었을 뿐입니다. 십계명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교단에서 최고의 고백서로 간주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부는 감사의 항목인데 십계명을 바로 거기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13. 진실로 복은 우리의 동의나 승인을 생략하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우리의 판단이 개입하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얻을 수는 있겠으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자연은 우리의 개입과 무관하게 주어진 것으로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그 필요를 알지도 못했는데 주어졌고 청구한 적도 없는데 이미 내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참여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것이 은혜로 주어진 복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게 문제기는 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존재와 생존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연이 주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복의 서곡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주기를 원하시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 필요를 알지도 못하였고 구한 적도 없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주어진 자연의 복이 들러리에 불과할 정도로 우리에게 궁극적인 복으로 주어지신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14. 복은 조건을 충족시킨 결과가 아니라는 것과 명령의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염두해 주면서 한번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우리에게 진실로 하나님이 주고 싶으신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하는 최고의 복이라는 차원에서 ‘먼저’ 구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명령문을 복의 조건으로 오해하고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평서문 혹은 결과문을 복으로 간주하고 결과를 추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하신 복보다 그 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의식주의 문제에 병적인 갈증과 집착을 보입니다. 설혹 그런 결과적인 복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의 은밀한 성격이 담겨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복을 부수적인 것과 바꾸는 주객전도 신앙을 아무런 갈등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격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그냥 안심하고 있을 뿐입니다.
15. 사람들은 무엇이 궁극적인 선물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마땅히 구해야 할 것과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을 혼돈한 대표적인 인물이 에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뜻도 고려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인 형태의 복으로 주신 출생적인 장자권을 멸시하고 배고픔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자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행동한 에서를 음행하는 자와 같은 범주로 묶어서 ‘망령된 자’라고 했습니다(히12:16). 사람의 눈에는 지나친 혹평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에서가 간음자 만큼이나 망령된 자라는 것입니다. 복은 마땅히 구해야 하는 것이면서 하나님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에서 벗어나면 간음하는 것이요 망령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16. 또한 사람들이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멸시하고 다른 것을 구하면 단순한 우매함을 넘어서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욕심은 단순한 욕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기 원하시고 구하라고 명하신 그것 이외에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욕심이 잉태하면 죄가 되고 그 죄는 사망에 이르도록 자라날 것입니다. 사망의 어두움이 드리워진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신 그것을 구하지 않고 땅의 썩어 없어지는 것들만 잔뜩 구하고 있습니다. 허탄한 것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죽도록 싸웁니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멸적인 약육강식 방식이 독버섯과 같이 온 세상에 퍼져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사망의 악취가 풍깁니다. 교회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싸움과 분리는 교회의 전유물로 보일 정도로 심각해져 있습니다. ‘싸움을 하려거든 교회나 가서 싸워,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싸우는 이유는 대체로 진리에 대한 저항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무엇이 복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면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필연적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할 진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우리 각자에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16. 복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근원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이 노력하고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입니다.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건강하고, 좋은 집을 구입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얻고, 자식이 잘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구경할 수 있는 복입니다. 복 맞습니다. 전도자도 사람이 해 아래서 땀의 소득으로 먹고 마시고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선물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물들은 주신 자를 찾으라는 사인으로 주어진 일시적인 방편일 뿐입니다. 영원한 것으로 인도하고 결국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엄밀한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전정한 복이 아닙니다. 아삽이 고백한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진정한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신 것은 육체로 떠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최상의 복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함께 있을 것이다,’ 즉 여호와를 가까이 함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17.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 그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여호와를 실제로 가까이 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리적인 거리 좁히기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멀리' 혹은 '가까이'와 같은 거리 개념의 의미론적 전환이 필요한데, 시편 본문에는 "가까이 함"의 의미가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라는 표현으로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믿음의 조상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상당부분 겹치는 말입니다.
18. 시인이 말하는 “피난처”는 나 자신의 일부만 보호하고 가려주는 곳이 아닙니다. 나의 전부가 완전히 그 안에 파묻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것도 물리적인 주거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거룩과 순종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단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룩과 순종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맞물려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서도 거룩해질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행위이고 거룩은 상태라는 관계성을 갖습니다.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행위와 상태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19.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기에 시인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피난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거하는 방식은 물리적인 거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신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는 또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20. 사실 시인의 글에서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복"의 구체적인 개념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보다 명료한 개념은 신약에서 바울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방법이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심지어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것까지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보다 강렬한 그리스도 연합을 추구했던 다른 인물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생명과 죽음까지 상대화할 줄 알았던 분입니다.
21.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게 복이지만 그런 삶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쾌하고 설레이고 매혹적인 길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자의 구체적인 상태와 삶이라고 할 예수님의 복개념을 주목해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의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온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 전체를 그렇게 긍휼히 여기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러할 때에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22. 성경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가장 합당하고 구체적인 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요10:30).’ 이는 가까움의 가장 깊은 경지를 묘사한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사이의 관계보다 더 긴밀하고 분리할 수 없는 하나됨의 관계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라는 말은 ‘사랑’이란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하나됨을 표현할 때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라는 문맥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그런 하나됨을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23.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계명 순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낭만적인 콧노래를 부르며 설레이는 발걸음을 옮기는 분위기 좋은 산책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고통과 절망의 잔을 기울여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걸어가신 삶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와 같이 사람의 형체를 입으신 분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시고 처참한 고통을 당하시고 조롱과 멸시의 침을 받으시며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처럼 아무런 저항도 않으시며 결국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입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속았다는 분노와 원망의 시선이 이미 채찍질로 파이고 뜯겨진 등짝을 찌르고 또 찌르는 골고다의 언덕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는 아무런 보상도 영광도 취하지 못하시고 오히려 죽는 순간까지 억울함과 통증만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험하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없는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의 걸어가신 발자취는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성경에 뚜렷한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선뜻 그 길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24. 이들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면 복이 복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이 무엇인가? 그냥 돌밭의 자갈처럼 던져진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란 피조물 중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인간에게 부여하는 낙관적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판단을 보십시오. 인생은 지렁이와 같습니다. 마른 막대기와 같습니다. 이사야는 온 세상이 공중에 날리는 먼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인생의 길이를 언급하며 ‘밤의 한 경점’과 같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경점과 같으니이다, 시90:4). 점이라는 것은 무게도 없고, 부피도 없고, 냄새와 색깔도 없고, 의미와 가치도 담을 수 없고, 그냥 존재와 위치만 표시하는 수학적인 기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생이 선물을 받는다면, 상급을 받는다면, 가치와 의미를 담는다면 도대체 어떤 것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생에게 지극히 크시고 높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도, 교환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당신 자신을 값없이 주신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런 복만을 구하는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시대와 사회와 세상은 복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다는 증겁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과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삶 속에 구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의 죄악된 질서와 가치관을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25. 아삽은 자신의 시대에 편만한 불법과 불의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극복할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은 아삽의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공법은 인진으로 전락하고 불의는 합법적인 제도로 둔갑하고, 불법을 휘두르는 무리들이 처처에 횡행하되 제어할 장치가 없는 무질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도 그 정도가 심해서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나도 그냥 그런 방식으로 살자’는 생각과 남루한 거래를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적이 한 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보십시오. 그 길을 따라간 구름떼와 같은 허다한 증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십시오.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전정한 영광의 길인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만 흥하고 나는 철저히 쇠하여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만 기념되는 인생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만 증거하고 우리는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다 마친 이후에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는 그런 인생을 영광과 복으로 여기고 그런 길을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 그런데 시편 73편은 사람들이 복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것을 복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 개념을 가진 시인은 하늘과 땅 전체에서 하나님 외에는 사모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73편 25절에서 시인은 하늘과 땅에 주님 이외에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חָפֵץ) 어떠한 대상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주님만이 우리가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 대상이 되시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 온전히 돌리지는 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우리의 애착이나 열정의 지극히 미소한 부분(minimam partem)이 피조계에 돌려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할 영광의 전부를 횡령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치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만 어겨도 율법 전체를 범한다는 말과 어법이 같습니다.
3. 하나님만 사모하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늘과 땅에는 몰골이 흉하고 악취가 지독한 것들이 아니라 참으로 탐스럽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관심과 애착을 노리는 유혹의 촉수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무섭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미혹의 종류와 양태가 세상에는 무수하고 날로 진화하고 있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도 쏟을 우리의 관심과 애정을 적당하게 분배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는 매혹적인 대상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4. 본문을 기록한 시인 자신도 이러한 홍수에 휩쓸려서 미끄러질 뻔 했다고 말합니다. 실족하게 하는 원인들이 사람마다 다양할 것인데, 시인이 열거하는 미혹의 원흉들은 특별히 우리를 현혹하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분노와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게 만드는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인은 오만한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있습니다. 형통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4절에, 오만하고 악한 자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오히려 건강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악하고 오만한 자들이 살 때에는 괜찮게 살더라도 생의 마지막 순간 만큼은 비참하고 억울하고 불쌍할 정도로 망가져야 일반인의 가슴에 쌓인 억울함이 풀어지는 법인데 그러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지막 호흡을 들이키는 순간까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시인은 목도하고 있습니다.
5. 그리고 5절에서 타인이 보통 당하는 고난과 재앙을 악인들은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자신이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닥치는 재앙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하고 오만한 자에게는 그런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살찜으로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크다고 말합니다. 눈이 솟아날 정도로 살이 찐다는 것이 현대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이지만, 고대에는 풍요와 평안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은 사업을 해도 아주 악질의 사기꾼을 만나 패가망신 당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들이 계획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이윤을 취한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이사야는 ‘악인에겐 평강이 없다(사48:22)’고 했는데, 아삽은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게다가 그들의 재물은 나날이 증대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답니다. 실족의 이유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6. 지금까지 열거된 부조리는 신경을 끊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부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성전에서 하나님 섬기는 일만 일평생 해 온 아삽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14절)는 것입니다. 아삽의 관찰에 의한다면, 그의 시대는 마치 공법이 인진으로 전락하고 불법과 부조리가 처처에 횡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시대상을 현실로 부딪히며 진리로 저항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나 아삽이 경험했던 실족의 벼랑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7. 오늘 시편 73편을 함께 생각하는 이유는 아삽이 결국은 실족하지 않고 승리했고 그 비법을 소개하고 있기에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는 불법과 거짓의 악취를 호흡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비결을 진리가 실종된 자기 시대의 부패와 싸워 승리했던 아삽의 고백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삽이 그런 문제들을 극복한 비결은 복의 기준이 바뀐 것에 있습니다. 무엇이 복이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향기롭고 눈부시고 탐스러운 것들을 취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님을 안 것입니다. 아삽은 세상이 돌아가는 병적인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게다가 잠시 있다가 썩어 없어지는 땅의 복들이 기준이 될 때에는 그런 상황이 신앙의 근간마저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기준을 찾았고 그 기준으로 그간 실족을 부추겼던 모든 원인들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해법은 바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8.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장 좋은 것을 뜻합니다. 우리 편에서 본다면,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바로 그것을 복이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복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엉뚱한 것을 기대하게 되고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은 구하지 않는 신앙의 불균형이 초래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마땅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9.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해도 해석의 차원에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조건형) 복이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 그 자체(규정형)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 것을 마치 자신이 원하는 복을 초래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복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구제하고,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잘 살고 건강하고 형통하기 때문에 그런다면, 그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열심들은 모두 어떤 이득을 취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열심들은 그 자체가 이미 복입니다.
10. 정직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도 정직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정직하면 친구가 생기고 신용이 쌓이고 엄청난 고객을 유치할 수 있고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건강한 사회의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는 요즘 세상에 이런 정직만 갖추어도 사회는 눈이 부시도록 밝고 투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정직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직의 결과가 달콤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정직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발휘되기 때문에 우리는 정직의 결과보다 정직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정직이 조롱을 부르고 불이익을 낳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정직을 고집하지 거짓으로 삶의 전향을 꽤하지는 않습니다. 결과의 유무에 관계 없이 정직을 고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 뿐입니다.
11. 구제하는 것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이 큰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되돌아올 보상을 기대하고 구제하는 것은 구제가 아니라 투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제자는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 것에 탐욕의 군침을 흘리지 않습니다. 구제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의 가치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친구와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도 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발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의를 구하는 차원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죽더라도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를 구하면 좋은 결과가 뒤따르기 때문에 의를 구하지 않고 의 자체가 복이기에 의의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12. 두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진정한 복이 대체로 명령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명령의 방식으로 되어 있지만, 독재자의 억압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명령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고 선택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좋고 궁극적인 복이기 때문에 그렇게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원을 표현하기 위해 명령의 방식을 취하였을 뿐입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큰 복입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정죄하고 파멸로 몰고가는 걸림돌이 아닙니다. 우리의 옳고그름 시시비비 따질 필요도 없이 너무도 좋은 것이어서 명령의 옷을 입었을 뿐입니다. 십계명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교단에서 최고의 고백서로 간주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부는 감사의 항목인데 십계명을 바로 거기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13. 진실로 복은 우리의 동의나 승인을 생략하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우리의 판단이 개입하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얻을 수는 있겠으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자연은 우리의 개입과 무관하게 주어진 것으로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그 필요를 알지도 못했는데 주어졌고 청구한 적도 없는데 이미 내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참여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것이 은혜로 주어진 복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게 문제기는 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존재와 생존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연이 주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복의 서곡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주기를 원하시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 필요를 알지도 못하였고 구한 적도 없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주어진 자연의 복이 들러리에 불과할 정도로 우리에게 궁극적인 복으로 주어지신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14. 복은 조건을 충족시킨 결과가 아니라는 것과 명령의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염두해 주면서 한번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우리에게 진실로 하나님이 주고 싶으신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하는 최고의 복이라는 차원에서 ‘먼저’ 구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명령문을 복의 조건으로 오해하고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평서문 혹은 결과문을 복으로 간주하고 결과를 추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하신 복보다 그 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의식주의 문제에 병적인 갈증과 집착을 보입니다. 설혹 그런 결과적인 복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의 은밀한 성격이 담겨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복을 부수적인 것과 바꾸는 주객전도 신앙을 아무런 갈등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격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그냥 안심하고 있을 뿐입니다.
15. 사람들은 무엇이 궁극적인 선물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마땅히 구해야 할 것과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을 혼돈한 대표적인 인물이 에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뜻도 고려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인 형태의 복으로 주신 출생적인 장자권을 멸시하고 배고픔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자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행동한 에서를 음행하는 자와 같은 범주로 묶어서 ‘망령된 자’라고 했습니다(히12:16). 사람의 눈에는 지나친 혹평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에서가 간음자 만큼이나 망령된 자라는 것입니다. 복은 마땅히 구해야 하는 것이면서 하나님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에서 벗어나면 간음하는 것이요 망령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16. 또한 사람들이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멸시하고 다른 것을 구하면 단순한 우매함을 넘어서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욕심은 단순한 욕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기 원하시고 구하라고 명하신 그것 이외에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욕심이 잉태하면 죄가 되고 그 죄는 사망에 이르도록 자라날 것입니다. 사망의 어두움이 드리워진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신 그것을 구하지 않고 땅의 썩어 없어지는 것들만 잔뜩 구하고 있습니다. 허탄한 것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죽도록 싸웁니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멸적인 약육강식 방식이 독버섯과 같이 온 세상에 퍼져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사망의 악취가 풍깁니다. 교회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싸움과 분리는 교회의 전유물로 보일 정도로 심각해져 있습니다. ‘싸움을 하려거든 교회나 가서 싸워,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싸우는 이유는 대체로 진리에 대한 저항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무엇이 복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면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필연적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할 진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우리 각자에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16. 복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근원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이 노력하고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입니다.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건강하고, 좋은 집을 구입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얻고, 자식이 잘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구경할 수 있는 복입니다. 복 맞습니다. 전도자도 사람이 해 아래서 땀의 소득으로 먹고 마시고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선물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물들은 주신 자를 찾으라는 사인으로 주어진 일시적인 방편일 뿐입니다. 영원한 것으로 인도하고 결국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엄밀한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전정한 복이 아닙니다. 아삽이 고백한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진정한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신 것은 육체로 떠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최상의 복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함께 있을 것이다,’ 즉 여호와를 가까이 함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17.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 그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여호와를 실제로 가까이 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리적인 거리 좁히기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멀리' 혹은 '가까이'와 같은 거리 개념의 의미론적 전환이 필요한데, 시편 본문에는 "가까이 함"의 의미가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라는 표현으로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믿음의 조상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상당부분 겹치는 말입니다.
18. 시인이 말하는 “피난처”는 나 자신의 일부만 보호하고 가려주는 곳이 아닙니다. 나의 전부가 완전히 그 안에 파묻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것도 물리적인 주거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거룩과 순종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단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룩과 순종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맞물려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서도 거룩해질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행위이고 거룩은 상태라는 관계성을 갖습니다.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행위와 상태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19.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기에 시인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피난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거하는 방식은 물리적인 거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신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는 또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20. 사실 시인의 글에서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복"의 구체적인 개념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보다 명료한 개념은 신약에서 바울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방법이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심지어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것까지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보다 강렬한 그리스도 연합을 추구했던 다른 인물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생명과 죽음까지 상대화할 줄 알았던 분입니다.
21.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게 복이지만 그런 삶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쾌하고 설레이고 매혹적인 길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자의 구체적인 상태와 삶이라고 할 예수님의 복개념을 주목해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의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온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 전체를 그렇게 긍휼히 여기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러할 때에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22. 성경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가장 합당하고 구체적인 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요10:30).’ 이는 가까움의 가장 깊은 경지를 묘사한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사이의 관계보다 더 긴밀하고 분리할 수 없는 하나됨의 관계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라는 말은 ‘사랑’이란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하나됨을 표현할 때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라는 문맥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그런 하나됨을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23.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계명 순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낭만적인 콧노래를 부르며 설레이는 발걸음을 옮기는 분위기 좋은 산책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고통과 절망의 잔을 기울여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걸어가신 삶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와 같이 사람의 형체를 입으신 분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시고 처참한 고통을 당하시고 조롱과 멸시의 침을 받으시며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처럼 아무런 저항도 않으시며 결국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입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속았다는 분노와 원망의 시선이 이미 채찍질로 파이고 뜯겨진 등짝을 찌르고 또 찌르는 골고다의 언덕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는 아무런 보상도 영광도 취하지 못하시고 오히려 죽는 순간까지 억울함과 통증만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험하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없는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의 걸어가신 발자취는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성경에 뚜렷한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선뜻 그 길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24. 이들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면 복이 복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이 무엇인가? 그냥 돌밭의 자갈처럼 던져진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란 피조물 중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인간에게 부여하는 낙관적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판단을 보십시오. 인생은 지렁이와 같습니다. 마른 막대기와 같습니다. 이사야는 온 세상이 공중에 날리는 먼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인생의 길이를 언급하며 ‘밤의 한 경점’과 같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경점과 같으니이다, 시90:4). 점이라는 것은 무게도 없고, 부피도 없고, 냄새와 색깔도 없고, 의미와 가치도 담을 수 없고, 그냥 존재와 위치만 표시하는 수학적인 기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생이 선물을 받는다면, 상급을 받는다면, 가치와 의미를 담는다면 도대체 어떤 것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생에게 지극히 크시고 높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도, 교환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당신 자신을 값없이 주신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런 복만을 구하는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시대와 사회와 세상은 복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다는 증겁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과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삶 속에 구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의 죄악된 질서와 가치관을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25. 아삽은 자신의 시대에 편만한 불법과 불의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극복할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은 아삽의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공법은 인진으로 전락하고 불의는 합법적인 제도로 둔갑하고, 불법을 휘두르는 무리들이 처처에 횡행하되 제어할 장치가 없는 무질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도 그 정도가 심해서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나도 그냥 그런 방식으로 살자’는 생각과 남루한 거래를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적이 한 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보십시오. 그 길을 따라간 구름떼와 같은 허다한 증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십시오.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전정한 영광의 길인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만 흥하고 나는 철저히 쇠하여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만 기념되는 인생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만 증거하고 우리는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다 마친 이후에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는 그런 인생을 영광과 복으로 여기고 그런 길을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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