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73:25)
논지는 하늘과 땅에 주님 이외에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חָפֵץ) 어떠한 대상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 돌려지는 때라고 칼빈은 강조한다. 그의 주석에 의하면, 우리의 애착이나 열정의 지극히 미소한 부분(minimam partem)이 피조계에 돌려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할 영광을 횡령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현상은 모든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불경이라 한다.
"하늘과 땅"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가리킨다. 나아가 그 구절은 시인이 하나님 외에는 자신의 "사모할" 자가 없다는 말에 근거할 때 하늘과 땅을 매혹하여 사모하게 만드는 모든 거짓들과 환영들도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은 미혹으로 충만하다. 미혹의 종류와 양태가 무수하고 날로 진화하고 확장되어 간다. 하나님 이외에도 쏟을 관심과 애정을 적당하게 안배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는 매혹적인 대상들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이러한 홍수에 시인 자신도 휩쓸려서 미끄러질 뻔 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미혹의 원흉들로 시인은 2절에서 14절까지 '악인이 형통하는 것'과 '악하고 오만한 자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오히려 힘이 강건하여 지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재앙도 그들에겐 없다는 것'과 '생이 부요해서 눈이 튀어나올 정도이고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는 것'과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 것' 등인데 이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내용은 일평생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루종일 주님만 섬기는 자기는 '종일 내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다는 것' 등이 있다고 진술한다.
"마음의 반석이요 영원한 분깃이라."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이해이다. 하나님은 시인에게 몸과 마음이 무너질 때 존재와 상태의 보존을 가능하게 하시는 반석이다. 시인 자신을 보존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원수들의 공격도 무력하게 할 정도로 안전하고 견고한 안식처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은 눈으로 관찰되지 않고 손으로 수리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와 본질을 정확하게 아시고 최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기에 외부의 것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그 필요의 전부라고 말하는 듯하다.
"주를 멀리하는 자...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을 기준으로 한 거리의 원근이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망하고 가까이 하는 자는 복되다는 결과적인 대조도 이어진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가까이 함이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며 최고의 복 자체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복된 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받고 멸망을 당한다.
이는 밤의 경점과 같이 짧은 인생이 고려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 1천년의 기간도 고작 하루에 불과하신 분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무리 화려하고 존귀하게 살아도 안개처럼 곧장 사라지는 환영에 불과하다. 측정이 불가능한 영원 속에서의 상태가 중요하다. 시간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상태를 영원히 누린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화려함과 쾌락에 취하여 영원에 비추어진 자신의 실상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가장 비참한 멸망의 내용은 아닌지 모르겠다.
문제의 관건은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하느냐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물리적인 거리 좁히기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멀리' 혹은 '가까이'와 같은 거리 개념의 의미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본문에는 "가까이 함"의 의미가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라는 표현으로 암시되어 있다. 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믿음의 조상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상당부분 겹쳐진다.
피난처는 나 자신의 일부만 보호하고 가려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전부가 완전히 파묻히는 장소이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도 물리적인 주거를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5장에 의하면, 거룩과 순종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단이다. 거룩과 순종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맞물려 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서도 거룩해질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순종은 행위이고 거룩은 상태이다. 그러나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행위와 상태가 구분되지 아니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기에 시인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 피난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거하는 방식은 물리적인 거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신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이고 싶어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시지만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하지도 않는다.
시인의 글에서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복"의 구체적인 개념이 선명하지 않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심지어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것까지도 주님을 따르고자 하였다. 이보다 강렬한 그리스도 연합을 추구했던 다른 인물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생명과 죽음까지 상대화할 줄 알았던 사람이 바울이다.
논지는 하늘과 땅에 주님 이외에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חָפֵץ) 어떠한 대상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 돌려지는 때라고 칼빈은 강조한다. 그의 주석에 의하면, 우리의 애착이나 열정의 지극히 미소한 부분(minimam partem)이 피조계에 돌려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할 영광을 횡령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현상은 모든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불경이라 한다.
"하늘과 땅"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가리킨다. 나아가 그 구절은 시인이 하나님 외에는 자신의 "사모할" 자가 없다는 말에 근거할 때 하늘과 땅을 매혹하여 사모하게 만드는 모든 거짓들과 환영들도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은 미혹으로 충만하다. 미혹의 종류와 양태가 무수하고 날로 진화하고 확장되어 간다. 하나님 이외에도 쏟을 관심과 애정을 적당하게 안배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는 매혹적인 대상들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이러한 홍수에 시인 자신도 휩쓸려서 미끄러질 뻔 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미혹의 원흉들로 시인은 2절에서 14절까지 '악인이 형통하는 것'과 '악하고 오만한 자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오히려 힘이 강건하여 지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재앙도 그들에겐 없다는 것'과 '생이 부요해서 눈이 튀어나올 정도이고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는 것'과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 것' 등인데 이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내용은 일평생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루종일 주님만 섬기는 자기는 '종일 내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다는 것' 등이 있다고 진술한다.
"마음의 반석이요 영원한 분깃이라."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이해이다. 하나님은 시인에게 몸과 마음이 무너질 때 존재와 상태의 보존을 가능하게 하시는 반석이다. 시인 자신을 보존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원수들의 공격도 무력하게 할 정도로 안전하고 견고한 안식처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은 눈으로 관찰되지 않고 손으로 수리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와 본질을 정확하게 아시고 최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기에 외부의 것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그 필요의 전부라고 말하는 듯하다.
"주를 멀리하는 자...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을 기준으로 한 거리의 원근이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망하고 가까이 하는 자는 복되다는 결과적인 대조도 이어진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가까이 함이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며 최고의 복 자체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복된 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받고 멸망을 당한다.
이는 밤의 경점과 같이 짧은 인생이 고려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 1천년의 기간도 고작 하루에 불과하신 분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무리 화려하고 존귀하게 살아도 안개처럼 곧장 사라지는 환영에 불과하다. 측정이 불가능한 영원 속에서의 상태가 중요하다. 시간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상태를 영원히 누린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화려함과 쾌락에 취하여 영원에 비추어진 자신의 실상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가장 비참한 멸망의 내용은 아닌지 모르겠다.
문제의 관건은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하느냐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물리적인 거리 좁히기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멀리' 혹은 '가까이'와 같은 거리 개념의 의미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본문에는 "가까이 함"의 의미가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라는 표현으로 암시되어 있다. 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믿음의 조상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상당부분 겹쳐진다.
피난처는 나 자신의 일부만 보호하고 가려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전부가 완전히 파묻히는 장소이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도 물리적인 주거를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5장에 의하면, 거룩과 순종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단이다. 거룩과 순종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맞물려 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서도 거룩해질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순종은 행위이고 거룩은 상태이다. 그러나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행위와 상태가 구분되지 아니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기에 시인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 피난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거하는 방식은 물리적인 거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신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이고 싶어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시지만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하지도 않는다.
시인의 글에서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복"의 구체적인 개념이 선명하지 않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심지어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것까지도 주님을 따르고자 하였다. 이보다 강렬한 그리스도 연합을 추구했던 다른 인물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생명과 죽음까지 상대화할 줄 알았던 사람이 바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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