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2일 수요일

사랑의 건덕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1)

지식과 사랑의 기능을 사도는 예리하게 구분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단다. 경험자는 망설임 없이 이러한 구분에 긍정의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 바울은 반지성적 태도로 지식 자체를 교만의 원흉으로 내몰려는 게 아니다. 사랑으로 제어되지 않은 지식의 끔찍한 결과를 경계하고 있다. 지식이 사랑을 지향하지 않으면 필히 교만으로 치닫는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아도 무익하다. 지식이 사랑을 위하지 않으면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심히 유해하다. 지식은 예리한 검이이서 사랑의 다스림이 없으면 외상만이 아니라 깊숙한 내상까지 유발하는 끔찍한 흉기로 둔갑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왜 그러한가? 왜 사랑은 덕을 세우는가? 왜 사랑으로 제어된 지식은 교만이 아니라 덕의 수단으로 쓰이는가? 이에 대하여 심리적인 분석과 현상적인 관찰과 생리학적 실험이 주는 도움은 극미하다. 신학적인 풀이가 필요하다. 결로부터 말하자면, 지식과 교만이 쉽게 결탁하고 사랑과 덕이 필히 연합하는 것은 창조의 원리이며 하나님의 섭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작동되게 지으셨다. 그렇게 지어진 마음이 지어진 그대로 되어지는 작동의 실현과 지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관여한다.

이는 태초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주님께서 계시하지 않으신 것을 알고자 했을 때에 아담과 하와는 교만하게 되었었다. 계시 이상의 것을 알고자 하는 그들의 지식욕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제어되지 않았었다. 계시가 아닌 다른 출처에서 공급된 지식이 그들에게 주입되자 그들은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어하는 교만의 극치를 표출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치로 규정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덕을 세우지 않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으며 치졸한 책임 떠넘기기 하극상을 연출했다. 이에 뾰족한 가시와 거친 엉겅퀴가 자연의 지표를 뚫고 돋아났다. 그렇게 하나님과 자신과 타인과 자연과의 화목은 모두 깨어졌다.

왜 그런 식으로 전개된 것일까? 창조의 질서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지식은 교만을 유발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창조의 질서를 주께서 붙드셨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자.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세우고자 하는 의지가 발동한다. 신기하다. 그런데 그게 실재이다. 경쟁자에 대해서도 그를 사랑하면 그가 어떤 식으로든 잘 되기를 소원하게 된다. 지독하게 증오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을 품으면 그렇게도 불쌍하게 보이고 눈물이 흐르고 긍휼이 솟구치고 축복하며 기도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을 세우려고 한다. 원수도 경쟁자도 없어진다. 원수와는 이런 식으로 싸워야 하고 이런 식으로 승리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을 세워가는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자랑할 수가 없다. 사랑하고 덕을 세웠다면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지으시고 섭리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그런데 지식의 분량과 정확성을 앞세우며 건덕이 아니라 교만끼를 발산하는 분들을 이따금씩 목격한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보란듯이 꺾을 지를 고민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방편을 발굴하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몰입한다. 적당한 지점에 불가피한 덫을 놓고 적당한 시점이 포착되면 회심(會心)의 어퍼컷을 날린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표출하는 괴로운 신음을 듣고 처절한 몸부림을 보며 짜릿한 쾌감에 젖고 음흉한 쾌재를 부른다.

참으로 잔인하다. 그런데 사랑이 빠진 지식의 광기는 제법 괜찮은 볼거리다. 그래서 관객도 몰려들고 박수와 갈채도 짭짤하게 쏟아진다. 본인은 서서히 거기에 중독된다. 이제는 사랑을 곁들이면 사태가 싱거워져 사랑의 출입을 철통같이 봉쇄하게 된다. 결국 스스로 헤어나올 수가 없어진다. 그런 식으로 패망한다. 그런데 왜 지식은 교만으로 이어지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일까? 이것도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때문이다. 사랑을 지향하지 않는 지식의 종국은 교만으로 다시 패망으로 치닫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성정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지으신 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렇게 통치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를 수가 없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학업에의 태만을 방조하고 나아가 그것을 지향하는 우매자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을 추구해야 함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온갖 지혜와 지식의 보고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우리는 목숨이 닳도록 배움의 길에 정진해야 한다.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사랑이 안내하는 건덕의 방향을 따라 질주해야 한다. 사랑의 건덕은 신비롭고 위대하다. 주께서 창조하신 선물이며 지금도 그 효력을 붙들고 계신 섭리이다. 사랑하는 것은 진실로 창조의 원리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하고 교회를 올바르게 세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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