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7일 금요일

사모하는 하나님의 궁정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죽을 정도이며 (시84:2)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는 시인의 마음은 너무도 애절하다. 죽을 지경까지 사모했다.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도 좋을 그런 사모함이 이 시편의 정신이다. 그런 정신으로 시인은 궁정에서 보낸 하루를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고백하며 악인의 장막에서 어떠한 고위직에 있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밑바닥 문지기로 있는 것을 더 선호한다. 이런 심정으로 시인은 여호와의 성전 건축을 그렇게도 소원했다. 거기에 들어가 항상 주를 찬양하고 싶어했다. 이는 자신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자의 본래적인 의도에 충실한 갈망이다. 여호와의 궁정에 대한 사활을 건 시인의 사모함은 아름답고 향기롭다.

여호와의 궁정은 가시적인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가능한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 축조를 갈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차가운 거절에 부딪혔다. 그 거절은 전쟁의 왕이었던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렸다는 이유 때문이다. 전면에 내세워진 이유의 합당함 배후에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했다 할지라도 영혼마저 쇠약하질 정도로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했던 그가 과연 만족했을 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런 맥락에서 다윗에게 성전건축 부적격자 판정을 내리신 듯하다. 이것은 거절보다 더 깊은 복으로의 초청이다.

다윗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전을 자기 손으로 축조하진 못했으나 항상 찬양이 쏟아지고 경배가 올려지는 시인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보행하는 성전이다. 신약이 명료화한 성전의 개념에 이미 이르렀다.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어딘가에 예배할 곳이 있다는 그녀의 습관화된 생각을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라는 말씀으로 수정했다. 주님은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도 그런 하나님의 속성에 걸맞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거다. 예루살렘 같은 물리적인 공간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특정한 민족과 나라와 지역에 종교적 우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배당 건축을 위해 우리도 시인처럼 우리의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로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해야 한다는 건축헌금 독려는 궁색하다. 아니 우리의 신앙을 변질되게 만들 소지가 농후한 방식이다. 지금 드리는 건축헌금 액수가 장차 하늘에서 받을 보상의 규모와 비례할 것이라는 주장은 심지어 사악하다. 이는 고가의 면죄부를 구매하면 연옥에서 받는 탕감의 년수도 그만큼 늘어날 것이라던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저지른 교리적 변질과 종교적 타락의 개신교적 재연이다. 시설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시설의 과도한 강조와 집착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뒤틀지는 말라는 이야기다.

예배당과 예식은 화려한데 진리와 영으로 드려지는 경배와 찬양이 없다면 그 자체로 회칠한 무덤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속으로는 썩은 악취가 진동하고 있는데 겉으로는 호화로운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듯하여 마음이 심히 씁쓸하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악취를 멀리하기 위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경고다. 목숨을 건 예배당 건축에서 하나님을 진리와 영으로 찬양하며 경배하는 내 마음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 더 시급함을 알리는 경종이다. 우리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로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 시인의 심장이 우리 안에서도 박동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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