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일 목요일

고품격 기호와 즐거움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우매함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잠1:22)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저질렀던 도둑질의 실상을 이렇게 고백한다. "도둑질한 물건이 아니라 도둑질이 즐거워서 저지른 일입니다." 친구들과 더불어 있어서 죄악도 즐거움이 된다는 맥락에서 더듬은 기억이다. 악행이 즐거움의 중독적인 대상일 수 있을까?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우매함을 좋아하고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향유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지혜자는 기록한다.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진술이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악한 것과 좋은 것을 어느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는 말인데, 과연 악한 것을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이 사실일까?

죄악과 우매함과 거만에도 즐김의 경지가 있다. 물론 인정하기 싫고 인지하지 못하는 경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나는 사람의 느낌이나 상식보다 성경의 진술을 더 신뢰한다. 죄악과 우매와 거만을 즐긴 대표적인 사례를 나는 사울의 불순종 사건에서 목격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취약점만 골라서 괴롭히던 아말렉 족속의 모든 소유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노소 및 가축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엄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적장인 아말렉의 왕 아각은 죽이지 않고 생포했고 괜찮아 보이는 가축들도 죽이지를 않았다. 이 사건의 진상은 사울의 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평가에서 확인된다. 즉 사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탈취"에 급급했고 그가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다.

그런데도 사울 자신은 죄를 죄로 여기지를 않았으며 오히려 즐김의 대상으로 여겼었다. 그는 승전한 이후에 "갈멜로 내려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기쁨과 자랑에 취했었다. 적장을 생포하여 백성들의 눈에 확인시켜 기념의 극대화도 도모했고 괜찮은 양이나 소와 같은 전리품을 수거하여 백성들의 열렬한 호응도 이끌었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종교적 명분으로 자기를 위하여 이루어진 이 모든 행실의 양심적인 거리낌도 지우려고 했다. 이에 사무엘은 이 모든 일련의 사태를 "탈취"라는 정확한 표현으로 진단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의 승전을 전용하여 자신의 치적을 치장하고 기념하는 계기로 삼았기에 그것은 "탈취"였다. 자신의 것이 아닌데 함부로 건드렸던 것이다.

사울은 자신의 죄를 죄로 여기지를 않았고 그 죄를 기념과 즐김의 대상으로 여겼다. 왜 그랬을까? 지혜자의 진술에 의하면, 어리석고 거만한 죄인들은 자신의 기호와 즐거움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아서다. 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과 코드가 맞고 그 마음에 흡족하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기호와 즐거움 자체를 의심하는 거, 불쾌한 일인 줄 안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을 점검의 대상으로 여기고 객관적인 판단과 교정을 시도하는 것, 어른의 모습이다. 그러나 적잖은 사람들은 나의 즐거움이 곧 선이라는 등식의 기만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어른이길 거부한다. 어린 아이의 유치함을 털어내는 것인데도 그것을 무슨 굉장한 억울함과 희생으로 여긴다.

나의 기호와 즐거움은 사실 온전한 순종의 필수적인 항목이다. 억지로 떠밀려서 행하는 타율적인 어거지 순종보다 안쓰러운 게 또 있을까? 없다. 하지만 기호와 즐거움은 그 자체로 선하지는 않기에 품격의 질적 승화가 필요하다. 기호와 기쁨에도 격이라는 게 있다. 어리석은 자가 우매함을, 거만한 자가 거만을 좋아하고 즐기는 저질의 기호와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좋으심과 즐거움이 나의 기호와 기쁨이 되는 그런 고품격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좋아 보이고 죄가 즐거운 게 우리의 성정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시기에 기호와 즐거움에 있어서도 거듭남이 가능하다.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우리의 성정을 농락하지 못하는 경지가 심히 목마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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