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4일 금요일

은밀한 일의 누설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잠25:9)

이는 다툼의 상황에서 상대방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자의 조언이다.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란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는 거" 모르는 바 아니다. 더군다나 남의 "은밀한 일"의 누설은 별식 중에서도 최상급 식단이다. 청중의 시선 집중력과 구미 흡입력이 대단하다. 당연히 파급력과 파괴력도 상상을 초월한다. "남의 은밀한 것" 누설에 한번 맛을 들이면 헤어나올 자가 없어진다. 남의 은밀한 일에 관심을 쏟고 누설로 존재감을 확보하고 존재하는 동안 누설을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 안팎의 기대와 은근한 강요에 휩싸인다.

그런데 지혜자는 남의 은밀한 일 누설에 입맛을 들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단순히 심심풀이 땅콩 맥락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누설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피해가 속출하고 위기가 엄습하고 패배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다툼의 상황 속에서도 그러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이유는 듣는 자들의 꾸지람과 악평이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논쟁의 상황 속에서도 말의 수위를 조절하지 않으면 비록 겉으로는 이겼어도 속으로는 패배를 자초한다. 아무리 상대방의 깊은 취약점을 간파하고 있더라도 까발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상대방도 파괴하고 나도 그런 파괴자가 되어 스스로 파괴되는 사탄의 함정일 수도 있다.

하나의 다툼에는 거기에 얽힌 다양한 관계성이 중첩되어 있고 얽힌 양상도 대단히 복잡하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은밀한 치부를 드러냄에 있어서도 그것이 다양한 관계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누설의 적정선을 유지해야 한다. 누설은 언제나 상대방의 몰락이나 파괴를 지향하지 않고 상대방의 돌이킴과 회복을 겨냥해야 한다. 그러나 공격을 받고 상처를 받으면 이성보다 감정의 지배를 받아 상대방의 가장 은밀하고 치명적인 약점 추적에 몰입하고 그러다가 찾으면 그 약점을 분노와 보복의 출구로 삼는다. 그러면 다툼의 상대방은 꺾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패배자로 발견된다.

아이들을 양육하며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의 은밀한 악들도 훤히 읽혀진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스리슬쩍 넘어가려 한다. 그때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나는 때때로 무의식 중에 악의 가장 은밀한 부위까지 건드리고 꼬집는다.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악의 뿌리를 지적하면 아이들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하며 곧장 반발한다. 그게 아이들의 기준이다. 그런데 그런 기준에 적응해서 교훈하지 않고 아버지의 기준을 따라 대뜸 생각지도 않은 악의 뿌리를 건드리며 책망하면 대화가 단절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아이들의 잘못을 다룰 때에도 누설의 적정선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은밀한 치부 드러내는 것을 마치 승리의 열쇠인 것처럼 집착하는 아버지의 꼴은 참으로 민망하다. 그런 아버지를 경험한 아이들은 커가면서 그런 아버지를 닮아 다툼의 상대방을 향해 그의 보다 깊고 은밀하고 근원적인 치부의 공공연한 노출에 매달린다. 상대방의 은밀한 치부는 알아도 적당히 침묵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상대방의 은밀한 일을 알았다는 것은 은밀한 만큼의 사랑과 돌봄의 책임을 수반한다. 비록 다툼의 맥락이라 할지라도 '드디어 승기를 잡았다'는 쾌재가 아니라 상대방이 이런 연약함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측은히 여기며 보살피는 긍휼의 마음으로 대함이 더 아름답다.

사람마다 감지력의 깊이가 다르다. 타인의 깊숙한 속을 투명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겉으로 드러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이 감지한 자에게는 그에 버금가는 많은 책임이 뒤따른다. 깊고 은밀한 것의 감지력은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을 사용할 때에는 주신 자의 의도를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재능을 분열과 파괴의 도구로 주시지를 않으셨다. 상대방의 은밀한 허물을 덮어주고 품어주고 스스로 깨닫도록 장구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구현하길 원하신다.

공익을 명분으로 남의 은밀한 일은 무조건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경솔하다. 모든 인간은 다 불쌍하다. 돈과 권력과 성취와 인기로 부풀려진 이미지는 대체로 거품이다. 돈이 많아도 헛되고 없어도 헛되고 권력이 많아도 헛되고 없어도 헛되고 이룬 업적이 많아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고 인기가 하늘을 찔러도 헛되고 바닦을 기어도 헛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침묵을 강요하는 것도 동일하게 경솔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하되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처신해야 하고 동시에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늘 책임지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상대방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는 것보다 누설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은 더 깊은 경건과 신앙과 인격을 요구한다. 수위의 조절은 터뜨리고 까발리고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의 직접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파생적인 결과들과 제2의 파생적 결과들도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에는 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모습은 역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경건과 신앙과 인격의 현실을 누설하고 있다. 어쩌면 형제의 범죄를 발견하면 직접 찾아가서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두 세 증인을 증참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적법한 치리에 들어가는 권징의 필요성과 회복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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