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2일 일요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잠12:20)

이 구절에 표현된 하나님의 섭리가 심오하다. 만물을 다스리고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은 선을 원하시고 화평을 원하신다. 그래서 선과 화평은 하나님이 조성하고 붙드시는 질서이고 악과 다툼은 그 질서를 파괴하고 지우려는 무질서다.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면 정직과 희락이 필연적인 결과이고, 하나님의 질서를 거슬러 무질서를 조장하면 속임과 괴로움이 필히 뒤따른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땅에서의 관찰과 추론의 결론이 도달하지 못하는 답변이다. 대체로 현상과 답변 사이의 연쇄적인 인과의 사슬이 생략되면 사람들은 승복을 주저한다.

악을 꾀하고자 하면 인간의 내면에는 묘한 기류가 조성된다. 무엇보다 내면의 콘트롤 타워에 자아가 그 중심을 장악한다. 이것이 악을 꾀하는 첫번째 수순이다. 자신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고서도 악이 도모되는 일은 없다. 악은 언제나 자아가 자신의 중심이길 요청한다. 자아가 자신의 중심을 손아귀에 넣으면, 다음 수순으로 가장 예민하게 반발하는 양심의 수족부터 결박하고 교묘하게 설득한다. 이는 양심의 동의가 없으면 악을 도모하는 내내 자아가 분열되는 불편함과 쓰라림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하는 양심마비 수순이다. 그러나 양심은 합바지가 아니다. 양심으로 수긍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려면 고도의 속임수가 필요하다. 악의 영향력이 이처럼 막대하다.

악을 꾀하고자 하면 사람의 양심은 서서히 마비되고 가치관은 은밀하게 변경된다. 이는 속임이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셈이다. 이러한 준비가 끝나면, 다양한 종류의 속임들이 일사분란하게 마음 속에서 협력한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악의 도모는 과연 속임들이 마음에 내집처럼 출입할 최고의 준비이다.

그러나 화평을 의논하면 우리의 마음이 신적인 섭리의 결과 겹치면서 하나님의 뜻에 역류하지 않을 때에 찾아오는 희락으로 채워진다. 희락은 신비로운 현상이다. 대체로 코드의 일치에서 찾아온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과 코드가 일치하는 경우에도 희락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진정한 희락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발생한다. 화평은 하나님의 뜻이다. 당연히 화평을 지향하고 도모하면 하나님의 뜻과의 조화에서 비롯되는 신비로운 희락을 경험하게 된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악의 도모로 말미암은 속임이나 화평의 의논으로 말미암은 희락은 그것의 단계적인 인과가 추적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 인과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속임을 피하고 희락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분명하게 안다. 우리의 마음이 속임으로 가득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악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정직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리고 희락을 누리고자 한다면 화평을 도모해야 한다. 화평을 도모하지 않는 자는 결코 신적인 희락을 경험하지 못한다. 늘 불안하고 늘 격분되어 있다.

악은 미워해야 하고 화평은 의논해야 한다. 그런데 지혜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을 도모하는 것과 화평을 의논하는 것은 선과 화평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정직과 희락이 주어진다. 다른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도 취득되지 않는 선물이다. 화평에 대해 약간의 해석학적 비약을 하자면, 바울은 둘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화평으로 여겼다는 사실에서 화평을 의논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전도자가 "슬데없는 것"이라고 혹평한 인간적인 희락과는 다른 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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