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5일 금요일

축복과 저주의 혼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잠27:14)

축복과 저주가 동전의 양면처럼 개념의 등짝을 맞대고 있는 구절이다. 동시에 내용과 방법의 긴밀한 연관성도 드러내는 지혜자의 금언이다. 축복은 귀하고 좋은 내용이다. 그러나 축복을 전달하는 방법이 축복의 고귀함에 상응하지 않으면 비록 축복 자체가 변경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주처럼 여김을 받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세포는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한 이후에 비자기 세포를 파괴하는 기이한 면역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잘못 구분하여 자기를 비자기로 여기거나 비자기를 자기로 간주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자기를 비자기로 착각하여 파괴하는 경우가 비자기를 자기로 착각하여 용인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태라고 한다.

지혜자는 본문에서 저주를 축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저주로 여겨 배척하는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즉 보다 위험한 상태를 경고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진리를 전하면서 마치 거짓인 것처럼 전달하는 것은 거짓을 전하면서 마치 진리인 것처럼 전달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이는 거짓을 소유한 자들이 아니라 진리를 소유한 자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최고의 복을 소유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고 복을 나누면서 마치 거짓을 증거하고 저주를 퍼뜨리는 원흉으로 오해를 받는다면 세상에 그것보다 위험하고 안타까운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편만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가장 지고한 진리를 알고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 자신이 선물로 주어진 바 된 우리가 세상에 가장 심각하고 끔찍한 위험의 원흉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소름이 온 몸을 급하게 뒤덮는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의 인격과 삶은 그 자체가 축복을 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는 우리에게 복음에 합당한 인격과 삶을 요구한다.

우리는 축복이 타인에게 저주로 둔갑하는 일들의 원흉으로 발견되지 않도록 값없이 받은 복음을 값없이 전달하는 삶을 경주해야 한다. 축복을 축복으로 여기는 일에 우리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이른 아침의 경박한 큰 소리 방식'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길을 뒤따르지 않으면 무엇이든 합당하지 않다.

복을 복으로 전달하는 유일한 방식은 주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다. 지금 세상은 기독교를 마치 더러운 버러지인 양 불쾌한 눈길로 쳐다본다. 복이 저주로 여겨지고 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복을 저주의 옷으로 뒤덮어서 버려지게 만든 우리의 실상을 인정하고 정확한 타이밍과 최고급 어조로 복을 전하는 인격과 삶의 준비가 시급하다. 주의 은혜를 부르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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