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악인의 존재에도 목적은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지으시되 심지어 악인도 악한 날에 그렇게 하시었다 (잠16:4)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위해 지어졌다. 악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입장을 지혜자는 피력한다. 함의가 심오하다.

먼저,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사건과 사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유쾌한 일이든 불쾌한 일이든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올바르게 이해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모든 것을 사려할 때 그것의 가장 정확한 가치와 의미에 도달한다. 이는 나의 가치관과 나의 기호와 나의 유익에 근거한 자기 중심적인 눈으로는 무엇을 보더라도 굴절된 의미와 왜곡된 가치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가치관에 충돌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의 기호에 거슬리는 것은 거침없이 거절이나 증오로 응수한다.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유로 사물과 사태와 사건에는 무질서가 초래되고 왜곡이 조장되고 갈등이 형성되고 다툼이 유발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문제의 원흉은 결코 자신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해서는 문제의 매듭이 풀어지지 않는다. 먼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운영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존재의 가치를 신적인 목적에의 기여에서 찾고 사태나 사건의 의미를 그런 관점으로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면 문제의 핵심이 파악된다. 문제의 근원은 우리의 가치관과 유익과 기호가 죄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하나님의 목적과 가치관과 기호를 나의 것으로 삼는 게 최상의 해법이다.

이런 지혜를 가지고 시련과 풍랑과 아픔과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 어디를 가도 나를 너무나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학교든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제거하는 것은 기독인의 해법이 아니다. 세상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대체로 이혼이나 호적을 파내거나 파면이나 퇴직이나 퇴학이나 투옥이나 이사 등의 일시적인 처방을 동원한다. 그러나 기독인의 접근법은 다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생각한다. 문제의 가까운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먼저 더듬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즐거운 상황도 함정일 수 있고 괴로운 상황도 선물일 가능성을 수용하게 된다. 심지어 악한 사람들의 사악한 행동들이 사방을 우겨싼다 할지라도 악한 날에 하나님의 계획이 수행되는 수단들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으나 이유를 불문하고 그게 최상의 해법이다.

아무리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어도, 아무리 조화되기 어려운 배우자를 만났어도, 아무리 고약한 상사가 괴롭혀도, 아무리 순종하지 않는 자식들이 말썽을 부려도, 아무리 난폭한 급우가 옆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는 경우는 없기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알려지는 계기가 아닌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맞이할 기대와 설레임이 절망과 좌절을 대신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