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3일 금요일

부득불의 경지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고전9:16)

복음전파 열의에 있어서 바울은 참으로 못말리는 사도였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기에게 자랑이 아니란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자타가 공인한 전도의 왕이었다.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가 움직인 전도의 발걸음이 남긴 족적의 길이는 20,000 킬로를 육박했다. 그는 자랑해도 결코 과대포장 위험이 없는 성실한 전도자의 삶을 살아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과는 결별했다. 자랑을 위해 인위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행보에 천착하는 사람과는 얼마나 판이한가!

바울에게 전도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필연적인 직무로 간주했다. 하지만 종의 의무이기 때문에 전도를 경홀히 여기거나 눈가림 정도의 적당한 시늉으로 떼우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주의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결사적인 태도와 행실을 본보였다. 그래서 제자들과 동료들의 애틋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진 고통과 죽음 가능성이 농후했던 예루살렘 입성까지 감행했다. 나아가 무익한 종에게 주어진 일이기에 감격과 감사 속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했다고 진술한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숨까지 건 의무감을 가지고 전력으로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의 신앙이 불편하고 거북하다. 그걸 감격으로 여기는 건 더더욱 불쾌하다. 전도를 일생의 사명과 의무로 간주하는 이론적인 시도는 모두에게 가능하다. 실제로 그런 시도가 주는 정서적인 위안이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그것을 가슴에서 솟아나는 삶의 원리로 간주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여 필연의 차원까지 의식하며 살아내는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 전도를 필연적인 사명으로 여기고 그런 필연성을 자발적인 마음으로 수용하는 바울의 상식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강력한 도전이다.

바울에 비해 복음을 전파하는 나의 태도와 행보는 유아적인 수준이다. 종이라는 의식부터 빈약하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복음을 증거한 이후에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필연적인 직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여기지를 않는다. 복음증거 이후에 오히려 나는 스스로도 가슴이 뿌듯하고 알아줄 사람의 칭찬에 목마르고 민망한 자화자찬 언사가 입술에서 때를 가리지 않고 무더기로 출고된다. 종의 경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상태이고 현상이다. 전도를 불가피한 일로 간주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살아내되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도 않은 바울의 경지에 진실로 도달하고 싶다.

물론 이단적인 사상에 경도된 열심으로 전도를 마치 천국행 티켓이나 천국의 최고급 주택을 확보하는 방편으로 여기며 기형적인 방식으로 전도의 역기능만 부추기는 분들의 살벌한 행보가 마치 바울이 보여준 전도의 본보기에 부응하는 것인 양 호도하는 것은 금물이다. "부득불 할 일"에도 격이라는 게 있다. 외형의 유사성을 담보로 본질의 현저한 이질성을 묵살하는 무리들의 억견은 사절이다.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그럴싸한 모양새가 아니라 바울의 신앙과 삶 전체가 실린 부득불의 경지가 지금도 곳곳의 교회에서 뜨겁게 재연되길 진심으로 고대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