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8일 토요일

바벨론 강변의 노래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137:1)

하나님의 사람은 교회 생각에 눈시울이 늘 축축하다. 기억의 촉수가 시온의 그림자만 건드려도 눈물이 와락 쏟아지는 시인은 교회를 아는 사람이다. 울음이 없이는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사람이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다. 이방인의 땅 바벨론에 사로잡혀 조롱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의 향기는 진동하고 영혼의 미는 눈부시다. 마치 가시밭의 백합화가 찔리고 상하면서 평소보다 더 짙은 향기로 대응하는 것과 유사하다. 과연 시인은 존재의 상실 속에서 존재의 진가를 발산하는 사람이다.

그는 바벨론 강변의 버드나무 위에 자신의 수금을 걸었단다. 자신들을 위해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는 사로잡은 자의 요구 혹은 조롱에 대한 거절의 표시였다. 거절이 곧 죽음을 의미했을 터이지만 시온의 노래를 포악한 자의 유흥을 돋구는 수단으로 전용되는 것보다는 목이 달아나는 거절을 선택했다. 이는 목숨을 담보로 거절의 자유를 행사한 참 자유인의 모습이다.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한 것은 시온도 이방인의 손에서 지켜내지 못한 신에게 더 이상 시온의 노래는 어울리지 않으니 그 신의 보호망도 보란듯이 뚫고 예루살렘 담벼락을 허문 바벨론의 승자에게 돌리라는 것이었다.

시인은 분하고 서러웠다. 하여 바베론의 파괴자를 위해 시온의 노래 부르는 것을 거절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를 노래하는 역방향을 질주했다. 여호와를 위한 시온의 노래는 평범한 상황 속에서의 곡조와는 현저히 다른 농도로 극히 애절했다. 노래를 넘어 절규였다. 울음을 쏟으며, 예루살렘, 너를 잊지 않겠단다.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는 일은 혹 있더라도 예루살렘 망각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오열로 표명했다. 예루살렘, 네가 망각되어 버리거나 우리에게 차선의 희열로 머문다면 우리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도 좋겠단다. 아예 노래와 무관한 인간이 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이야기다.

이어 여호와의 이름을 거명하고 그의 의로운 보응을 노래한다. 예루살렘 멸망의 주범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것은 여호와의 몫이며 거기에 수단으로 동원되는 자가 복되다는 말로 노래를 끝맺는다. 축축한 바벨론 강변에서 포로의 부르튼 입술에서 출고된 서글픈 노래가 처절함을 딛고 비장함을 넘어 애절한 설레임과 희망의 언덕에 이른 시인의 노래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의 축소판이 투영되어 있다. 교회가 기억만 스쳐도 사무친 오열을 쏟아내는 땅의 나그네, 사망의 왕노릇 권세가 곳곳에서 휘두르는 횡포의 썩은 악취가 진동하는 세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노래를 포기하지 않는 나그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닌 것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는 압박과 비아냥이 하나님과 시온 따위는 잊고 바벨론의 강변을 즐기라고 속삭인다. 때로는 가공할 주먹으로 위협하고, 때로는 요염한 입술로 꼬득인다. 이 땅의 나그네가 아니라 땅의 주권자요 영구적인 거주자로 살라고 설득한다. 그래서 몽롱한 하늘의 명목적인 시민이 아니라 영광스런 바벨론의 자발적인 포로로 머물라고, 파괴된 예루살렘 노래는 빠진 거품일 뿐이라고, 그것을 수호하던 신 여호와는 찌질한 실패자일 뿐이니까 시온의 노래는 그냥 강변에서 바벨론을 위해 부르라는 체념과 낙심의 소리를 고루한 레코드판 돌리듯이 연일 반복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시온을 기억하며 오열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독생자의 보혈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떠올리며 시온의 노래를 눈물로 적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삶으로 거명하며 극도의 희열에 빠지는 사람을 온 땅에 두루 다니시며 찾으신다. 찾으시는 하나님께 나는 포로의 옷을 입고서도 시온을 젖은 곡조에 담은 시인처럼 발견되고 싶다. 교회를 기억하면 눈물부터 쏟아지는 사람이고 싶다. 주권이 박탈되고, 타협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다 강렬한 목소리로 보다 애절한 리듬으로 시온의 노래를 부르던 시인이고 싶다. 시온을 떠나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가 바로 이 시인이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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