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6일 목요일

씨름의 대상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엡6:12)

씨름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갖추어야 할 무장의 종류와 질이 달라진다. 바울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며 기존의 그릇된 시각부터 교정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대체로 혈과 육을 씨름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일그러진 현실의 진단이고 우리의 그런 경향성에 대한 애두른 고발이다. 이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온 교회가 씨름의 대상을 선정함에 있어서 오랫동안 심각한 헛다리를 집어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 바울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언사를 내뱉는다.

바울은 교회를 육신적인 공동체로 여기는 자들의 비방에 익숙하다. 이는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의 중다함을 언급한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두번째 서신에서 확인된다. 유대교의 보존을 위해 무력 사용을 승인한 유대인 분파들이 빌미를 제공했을 법한 비방이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는 않는다"고 강하게 항변한다.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무기로도 입증된다. 우리가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어떤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진지도 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용하는 무기를 보면 그가 싸우는 싸움의 대상도 파악된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거기에는 신경도 있어서 다양한 것들을 감지한다. 신경에 감지된 것을 따라 육신이 반응하는 것은 인간에게 전혀 이상하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 반응에는 근육도 동원되고 논리적인 두뇌도 동원되고 영리한 혀도 동원되고 피붙이 친인척도 동원되고 두툼한 사회적 인맥도 동원되고 빵빵한 경제적 신용도 동원된다. 이러한 수단들을 무기로 즐겨 동원하는 이들에게 싸움의 대상은 혈과 육임에 분명하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대응하지 않는다. 대상이 달라서다. 문제는 혈과 육 너머의 대상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한다는 거다. 나의 감정을 건드리면 감정적인 반응에 민첩하고, 나의 재산을 되로 건드리면 말의 보상을 청구하고, 나의 따귀를 건드리면 나의 손바닥도, 심하게는 주먹이 상대방의 따귀로 신속히 이동하고, 나의 가족을 건드리면 상대방의 지인들을 집단으로 매도하고 위협하는 게 인간의 성향이다. 이는 다 혈과 육을 대상으로 싸우는 현상이다. 개인도 육신으로 씨름하고 교회도 육신으로 씨름한다.

자기부인 없이는 혈과 육의 멱살을 거머쥐는 씨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전쟁과 싸움과 씨름은 다 하나님께 속하였다. 우리는 거기에 영광의 소환을 받는 하나님의 군사다. 군사의 상대는 우리의 주변에 운집한 혈과 육이 아니다. 혈과 육을 총알받이 삼아 그 뒤에 교활하게 숨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다. 우리가 상대하는 적수의 위력이 만만치가 않다. 육신을 따라 대응하는 순간 칼도 뽑지 못하고서 필패한다. 육신에 속한 모든 무기들을 다 동원해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혈과 육을 대상으로 싸우느라 늘 분주하다. 육적인 승리를 위한 각종 무기류 장만에 대부분의 생애와 에너지를 탕진한다. 자신의 감정과 재산과 조직의 피해에 반응이 민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군사가 아니다. 자신을 영주로 모신 노예이다. 종노릇의 대상이 다 자신의 감정이고 기분이고 논리이고 판단이다. 이를 위해 이빨을 갈고 주먹을 날리고 독설을 쏟아낸다. 이는 싸움의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빈곤에서 비롯된다. 시무이의 저주를 들으면서 육신 시무이를 적수로 보지 않았던 다윗이 떠오른다.

주변을 돌아본다. 내가 육신을 따라 씨름하고 있는 상대방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등골이 오싹하다. 내가 육신을 따라 대응해 왔던 분들이 많아서다. 분하고 괘씸하다. 은밀한 대적인 사탄에게 오랫동안 알면서도 속아서다. 속으면서 영적인 무장도 서서히 해제되고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해서다. 사도의 가르침을 가슴의 아랫목에 간직해야 하겠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교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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