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7일 금요일

형제의 아름다운 동거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133:1)

연합하여 동거하기 위해서는 형제가 머물러도 될 인격과 삶의 여백을 각자가 갇추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서 동거할 때에는 악하고 추한 참상이 벌어진다. 상대방을 제거해야 나의 존재와 삶이 확보되고 이를 위해서는 온갖 거짓과 술수를 동원해야 내가 제거되지 않는 적자생존 원리가 지배한다. 그러면 형제와의 연합과 동거는 죽는 것보다도 싫은 생지옥을 방불한다. 이는 역사가 증인석에 있고 경험도 내부 고발자다. 가장 선한 것이 극단적인 반대편의 악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정반대의 추함으로 얼마든지 반전된다.

형제의 동거는 "어찌 그리"라는 감탄사를 격발하게 하는 선과 미의 원천이다. "함께 거한다"는 동거는 결코 만만치가 않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용납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찢어질 수밖에 없는 게 동거이기 때문이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가장 사랑하는 남편이 동거해도 관계의 잡음이 생기고 때로는 결별의 법적인 매듭도 불사하는 부부의 중다함이 이를 입증한다. 형제와의 동거는 상대방의 인격과 삶의 습성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위만 골라서 인정하는 마춤형 동거가 아니다. 상대방의 전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동거의 의미는 동일한 공간에의 물리적 공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연합"까지 이르러야 동거다. 이는 서로의 마음과 뜻과 생각이 같아서 동거해도 괜찮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내면의 동거는 단순히 서로를 용납하고 존중하는 정적인 상태를 넘어 각자가 삶의 고결한 일치점에 이르려는 역동적인 협력을 요구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하며 생떼쓰는 자세로는 고작해야 동거의 무늬만 연출한다. 진정한 동거는 내가 먼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본을 보이는 자세에서 구현된다.

동거를 위한 삶의 고결한 일치점 확보는 특정한 개인에게 돌려지지 않고 하나님이 그 출처시다. 시인은 시의 끝자락에 "거기에서 하나님이 영생을 복을 주신다"는 문구로 끝맺는다. 즉 형제의 동거과 영생이 연결되고 있다. 형제와의 화목한 동거는 하늘에서 누릴 영생의 맛배기다.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형제의 화목한 동거에 의해 증거된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되리라"고 하시었다. 형제의 동거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천국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시온에 떨어지는 헤르몬의 이슬, 시온을 시온답게 만드는 신비로운 매체로 비유되는 형제의 연합과 동거는 모든 시대가 회복해야 할 참된 교회상을 가리킨다. 교회를 볼 때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십자가와 천국의 삶을 목격해야 마땅하다.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참된 이상의 예고편을 교회가 제공해야 한다. 천국의 향기가 아니라 지옥의 악취로 외부의 자발적 접근을 차단하는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는 다툼과 분열이다. 연합과 동거는 그 해법이다. "어찌 그리 아름답고 선한가!" 시인의 시어에 투사된 하나님의 마음이다. 

거룩한 공교회 의식의 필요성과 회복이 절실하다. 밴댕이 속의 고수를 기독교적 순결의 일환으로 여기며 '좁고 협착한 길'을 명분으로 연약하고 가난하고 무지하고 유아적인 무리와 섞이는 걸 극도로 거부하고 무조건 회피하는 종교적 결벽증은 해결책이 아니다. 가라지가 섞여 있어도 알곡의 파손을 기준으로 마지막 날까지 거룩보다 사랑을 선택하고 우선시한 교부의 판단이 지금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 물론 여기서의 논점은 사랑의 띠를 붙들기 위해서는 거룩의 끈을 놓쳐도 괜찮다는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사랑과 거룩을 다 고수함이 마땅하나 어거스틴 할배의 교훈처럼 이 땅에서는 완전한 거룩보다 완전한 사랑이 판단의 아랫목을 차지함이 더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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