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1일 수요일

인자와 잔인의 역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잠11:17)

인자함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바로 자신이다. 잔인함의 직접적인 피해자도 바로 자신이다. 인자함과 잔인함은 외부로 발산되기 이전에 이미 자신에게 먼저 작용한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만든다. 타인의 유익과 행복이 싫어서 인자함을 접고 잔인함을 선택하는 우매자가 있다. 타인에게 위협이나 손실을 가하기 이전에 자신의 영혼이 먼저 잔인함의 희생물로 내몰린다. 참으로 자해적인 우매자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래서 영혼을 관리하고 윤택하게 하는 일이 막막하고 난해하다. 그러나 지혜자는 인자를 영혼의 관리자로 지명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인자한 사람이다. 그런 마음의 소유자는 자신의 영혼을 유익하게 만든다는 거다. 반대로 타인을 겁박하고 위협하고 매몰차게 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학대하는 사람이며 그의 몸도 해로움에 내던지는 자라고 꼬집는다. 통찰력이 깊고 예리하다.

이로움과 해로움이 구현되는 방식이 참으로 흥미롭다. 이는 자신을 유익과 해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지 않고 타인을 유익하게 하고 윤택하게 해야 비로소 자신의 영혼을 이롭게 하는 방식이며 타인을 해롭게 하고 위협하면 그 위협과 해로움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되 더불어 살도록 지으셨고 더불어 살아가되 상대방의 유익이 나의 유익이 되게 하고 상대방의 해가 나에게도 해가 되는 방식이다.

지혜자의 이 금언은 산상에서 전하신 예수님의 복 개념과도 상통한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 혹은 인자한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는 그가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 하시었다. 이는 타인에게 인자와 긍휼과 자비를 베풀면 그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복이 된다는 이야기다. 나아가 타인의 복과 자신의 복이 동시적인 현상임을 의미한다. 타인을 대하는 것은 자신을 대하는 것과 동일하다. 자기 양심보다 타인의 양심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이 받고 싶은 것으로 타인을 먼저 대접하는 것이 기독교 진리의 황금률인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에게 사랑과 공의와 위로와 평안이 임하기를 원한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동일한 것을 타인에게 대접하면 된다. 물질의 계량적인 손익을 기준으로 이 원리를 판단하지 마시라. 우리에게 진정한 유익을 제공하는 것은 땅에 썩어 없어지는 것들보다 하나님의 속성 혹은 성품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 머물고 발산되는 유익은 이 세상의 물량적인 척도로는 가늠되지 아니한다. 인자한 자가 받는 영혼의 이로움은 우리의 영혼에 이질적인 어떤 물질의 증감이 좌우하지 못한다. 진정한 이로움은 우리가 인자할 때 신적인 속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인자한 자들의 중다한 출현으로 하나님의 향기로운 성품이 진동하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고대하게 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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