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2일 일요일

성경의 예언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1:21)

베드로는 성경을 예언으로 규정하고 그 예언의 속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즉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았고 1)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2)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경의 기록자는 분명히 사람인데 예언의 출처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을 건드린다. 그렇다면 예언의 해석이 기록자의 인간적인 뜻을 해명하는 것으로는 확보되지 않는다는 말이겠다. 그러므로 기록자의 습성이나 문체나 뉘앙스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환경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해석학은 금물이다. 그러나 경건을 빙자하여 기록자의 인간적인 여러 조건들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보기에 흉한 극단이다. 오히려 부작용만 양산한다.

하나님은 성경 기록자의 모든 조건들을 결코 배제하지 않으셨다. 시간의 특정한 시점에서 괜찮은 수단들을 급작스레 골라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장구한 섭리적 준비가 있었으며 시간의 한 시점에 이르러서 활용의 형태를 취했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활용의 사실을 구실로 삼아 인간의 무지와 실수와 연약과 제한까지 성경의 속성에 그대로 전이되어 성경도 무지와 실수와 연약과 제한이 있다는 식으로 성경의 신적인 속성을 제거하는 논법은 온당하지 않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해명처럼 성경의 예언이 그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이 포괄되어 있는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아서다. 

성경이 성경이기 위해서는 사람의 뜻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발화된 것이어야 한다. 기록자의 고유한 조건은 "성령의 감동"이다. 사유가 깊고 어휘가 중다하고 수사학에 능하여 기록의 적격자로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감동이 없다면 성경 기록자의 자격에는 미달이다. 성령의 감동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다"는 뜻으로서 기록자의 사사로운 뜻을 제어하는 동시에 기록자의 모든 조건들을 하나님의 뜻 전달에 적절히 동원하고 활용하는 감동을 의미한다. 성령의 감동이 있었다면 인간의 뜻은 배제되고 인간의 조건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한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감동은 예언이 전달되고 기록되기 위해 성령이 행하시는 기록자의 준비이다. 

나아가 성경의 예언은 그렇게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내용의 출처에 관한 조항이다. 즉 성경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 자기의 말을 활자화한 것이 아니다. 즉 기록자의 준비가 있으나 그렇게 준비된 기록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입에서 출고된 모든 말이 무조건 예언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나님으로부터" 말한 것이어야 예언이다. 베드로의 설명에 의하면, 성경의 모든 예언은 이렇게 두 가지의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의 감동에 의한 기록자의 준비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신적인 출처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예언일 수 없다. 

이렇게 기록된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운 해석을 거절한다.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이 예언의 출처시기 때문에 기록자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의 기록이기 때문에 예언을 기록자의 주변적인 상황에 대한 반작용인 것처럼 역사적인 환경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증거에 의존하여 이해해야 한다. 물론 기록자의 인간적인 조건들을 수단으로 쓰셨기 때문에 도구적인 차원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겠다. 그러나 해석의 주도성과 궁극성을 그런 인간의 조건들에 부여하면 사사로운 해석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의 조건들에 대해서는 도구적인 성경만 고려해야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