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든 짐승이든 집단이든 개인이든 생업이든 학업이든 신학이든 목회든 그 어떤 것이든지 기본기의 중요성은 재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기본기의 부실이 양산하는 전방위적 폐단의 불가피한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마땅하고 모두가 알고 재언할 필요도 없기에 더더욱 부지불식 간에 집단적인 최면과 망각에 빠지기 쉬운 지점이 또한 기본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전은 모두가 좋은 책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한 어느 애서가의 한탄처럼 기본기도 모두가 필연적인 것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필요성에 상응하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의 발로로서 소자(Paul, 필자의 영어이름)는 이곳에서 주기적인 일필을 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두 개의 동사로 축약해서 말한다면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맹신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을 알고 확신하고 하나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만약 여기에서 멈춘다면 일종의 개인적인 득도나 황홀경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믿는 대상을 행위라는 가시적인 형태로 밀어내는 것까지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고 행하신 일은 작정과 창조와 섭리를 뜻합니다. 즉 기독인인 우리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풍기는 인격과 보이는 삶으로 표상하는 증인의 자리까지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할 때에 기독교의 기본기에 충실한 개인이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공로에 단 일인치의 공간도 할애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후의 됨됨이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돌립니다. 게다가 교육을 대단히 강조해서 배우고 아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마치 기독교는 입술만 분주한 종교로 규정해도 반박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우리의 자랑이 인기척도 할 수 없도록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일평생 자라가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구현함에 있어서는 인격과 삶의 입체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인격이요 삶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정보의 비대한 분량 확보로 만족하는 종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가난한 비교급에 구걸하며 여전히 지식에 과도한 애착을 갖는 분이 계시다면, 그는 아직도 기독교의 기본기가 부실한 분입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궁핍한 기본기의 실상을 올바르고 종합적인 안목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스스로를 내감하는 창문이 없다고 함이 옳은 듯합니다. 사회적인 화두 지각에는 민첩하고 개인의 이해와 관계된 현안에는 광속의 순발력을 보이지만 정작 부실하면 해결할 대체물이 없는 기본기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신경한 태도를 보이고, 급기야 위기감이 무르익어 막상 실태를 파악하려 해도 어디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는 막막한 난관에 부딪히고 맙니다. 이러한 경험은 기본기에 대한 상식의 부족이 빚어낸 결과인 듯합니다. 기본기가 튼튼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고 문제의 원인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신속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본기가 건실하면 문제가 생겨도 두렵지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통해서 생각지도 못한 지혜와 교훈까지 얻습니다.
기독교의 기본기에 대해 말하면 마치 도의 초보로 회귀하는 듯하여 예수님에 대한 교리의 초보를 버리라고 한 히브리서 기자의 입장과 충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의 이 말은 기독교의 기본기가 필요하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 단단한 음식까지 먹고 남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이 되었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기독교의 초보마저 다시 배워야 하고 연한 식물만 먹어야 할 정도로 신앙이 무너져 있는 실태를 고발하고 책망하는 맥락에서 던져진 말입니다. 히브리서 본문의 등뼈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교리로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신약과 구약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가 가장 선명하게 그려진 책입니다. 기본기를 결코 경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본기가 튼튼하지 않으면 성경을 읽어도 독법이 깊어지질 않고 아무리 왕성하게 활동해도 곧장 공허함에 빠집니다. 기본기는 무엇을 담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부실하면 열심을 부려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습니다.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습니다. 쌓을수록 무너짐만 커집니다. 잘하는 듯해도 늘 불안해 보입니다. 기본기의 중요성은 단순히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장기적인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은 기본기의 건실에 관심을 쏟습니다. 기본기가 건실하면 세월의 표피에서 발생하는 경박한 변덕에 쉽게 나풀대지 않습니다. 그는 바다의 수면에서 미풍만 불어도 촐랑대는 물살에 반응하지 않고 바다의 저변에서 도도히 흐르는 대류를 읽습니다. 남들이 당황해도 덩달아 편승하지 않습니다.
정치나 예술이나 운동이나 사업이나 학업이나 교육이나 목회나 문제의 근원은 언제나 기본기에 있습니다. 그때그때 붉어지는 문제의 이면을 관찰하면 기본기의 부실이 표면화된 가시적 증상에 불과하고 서둘러 복구해야 한다는 경고와 같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제의 근원을 소급하다 보면 추적이 불가능한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지각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는 문제의 근원에 가장 근접한 마지막 단계까지 파고드는 것이 다른 어떤 대안보다 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표면화된 문제에 피상적인 해법만 부지런히 제시하게 될 것이고 무시된 문제의 근원은 반드시 그 다음 단계의 심각한 증세를 의식의 표면으로 밀어낼 것입니다. 이러기를 수없이 반복해도 지각하지 못한다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멸망으로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심각한 정체성 위기의 벼랑끝에 서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의 무리인데, 교회에서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라 할 그리스도 자신을 목격할 수도 없고 그의 향기를 맡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적 코드가 맞는 사람들의 사사로운 동우회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아가 다툼과 불의와 분열과 도덕적 타락으로 오히려 사회적 근간에 위협을 가하는 자들의 리스트에 기독교를 올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세상의 거짓과 불법을 방조하고 나아가 낯 뜨거운 편까지 들면서 야비한 정당성도 종교의 이름으로 부여하는 일에 다른 어떤 종교보다 앞장서고 있다는 가슴 오싹한 지적도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맛을 잃고 빛을 상실하면 세상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힐 수없에 없는 듯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고 무너져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에 소망의 빛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타락을 보면서 지적과 비방과 정죄의 목청만 높이는 것은 대단히 비겁한 행위일 수 있습니다. 타인의 무너짐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일그러진 이미지를 관리하고 은밀한 차별화를 도모하는 비겁자의 시커먼 속을 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물론 저도 그런 비겁자의 대열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만 대안을 제시하고 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비판은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오해되고 오용될 가능성이 높은 법이기에 대안과 본이라는 비판의 기본기는 최소한 갖추자는 차원에서, 저는 기독교의 위기를 공감하는 여러분과 함께 여기에서 대안도 펼쳐보고 할수만 있다면 본도 보이자며 제 자신을 설득하고 여러분께 그렇게 한번 해 보자고 권유도 드리는 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두 개의 동사로 축약해서 말한다면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맹신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을 알고 확신하고 하나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만약 여기에서 멈춘다면 일종의 개인적인 득도나 황홀경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믿는 대상을 행위라는 가시적인 형태로 밀어내는 것까지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고 행하신 일은 작정과 창조와 섭리를 뜻합니다. 즉 기독인인 우리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풍기는 인격과 보이는 삶으로 표상하는 증인의 자리까지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할 때에 기독교의 기본기에 충실한 개인이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공로에 단 일인치의 공간도 할애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후의 됨됨이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돌립니다. 게다가 교육을 대단히 강조해서 배우고 아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마치 기독교는 입술만 분주한 종교로 규정해도 반박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우리의 자랑이 인기척도 할 수 없도록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일평생 자라가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구현함에 있어서는 인격과 삶의 입체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인격이요 삶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정보의 비대한 분량 확보로 만족하는 종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가난한 비교급에 구걸하며 여전히 지식에 과도한 애착을 갖는 분이 계시다면, 그는 아직도 기독교의 기본기가 부실한 분입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궁핍한 기본기의 실상을 올바르고 종합적인 안목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스스로를 내감하는 창문이 없다고 함이 옳은 듯합니다. 사회적인 화두 지각에는 민첩하고 개인의 이해와 관계된 현안에는 광속의 순발력을 보이지만 정작 부실하면 해결할 대체물이 없는 기본기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신경한 태도를 보이고, 급기야 위기감이 무르익어 막상 실태를 파악하려 해도 어디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는 막막한 난관에 부딪히고 맙니다. 이러한 경험은 기본기에 대한 상식의 부족이 빚어낸 결과인 듯합니다. 기본기가 튼튼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고 문제의 원인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신속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본기가 건실하면 문제가 생겨도 두렵지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통해서 생각지도 못한 지혜와 교훈까지 얻습니다.
기독교의 기본기에 대해 말하면 마치 도의 초보로 회귀하는 듯하여 예수님에 대한 교리의 초보를 버리라고 한 히브리서 기자의 입장과 충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의 이 말은 기독교의 기본기가 필요하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 단단한 음식까지 먹고 남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이 되었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기독교의 초보마저 다시 배워야 하고 연한 식물만 먹어야 할 정도로 신앙이 무너져 있는 실태를 고발하고 책망하는 맥락에서 던져진 말입니다. 히브리서 본문의 등뼈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교리로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신약과 구약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가 가장 선명하게 그려진 책입니다. 기본기를 결코 경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본기가 튼튼하지 않으면 성경을 읽어도 독법이 깊어지질 않고 아무리 왕성하게 활동해도 곧장 공허함에 빠집니다. 기본기는 무엇을 담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부실하면 열심을 부려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습니다.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습니다. 쌓을수록 무너짐만 커집니다. 잘하는 듯해도 늘 불안해 보입니다. 기본기의 중요성은 단순히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장기적인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은 기본기의 건실에 관심을 쏟습니다. 기본기가 건실하면 세월의 표피에서 발생하는 경박한 변덕에 쉽게 나풀대지 않습니다. 그는 바다의 수면에서 미풍만 불어도 촐랑대는 물살에 반응하지 않고 바다의 저변에서 도도히 흐르는 대류를 읽습니다. 남들이 당황해도 덩달아 편승하지 않습니다.
정치나 예술이나 운동이나 사업이나 학업이나 교육이나 목회나 문제의 근원은 언제나 기본기에 있습니다. 그때그때 붉어지는 문제의 이면을 관찰하면 기본기의 부실이 표면화된 가시적 증상에 불과하고 서둘러 복구해야 한다는 경고와 같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제의 근원을 소급하다 보면 추적이 불가능한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지각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는 문제의 근원에 가장 근접한 마지막 단계까지 파고드는 것이 다른 어떤 대안보다 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표면화된 문제에 피상적인 해법만 부지런히 제시하게 될 것이고 무시된 문제의 근원은 반드시 그 다음 단계의 심각한 증세를 의식의 표면으로 밀어낼 것입니다. 이러기를 수없이 반복해도 지각하지 못한다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멸망으로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심각한 정체성 위기의 벼랑끝에 서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의 무리인데, 교회에서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라 할 그리스도 자신을 목격할 수도 없고 그의 향기를 맡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적 코드가 맞는 사람들의 사사로운 동우회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아가 다툼과 불의와 분열과 도덕적 타락으로 오히려 사회적 근간에 위협을 가하는 자들의 리스트에 기독교를 올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세상의 거짓과 불법을 방조하고 나아가 낯 뜨거운 편까지 들면서 야비한 정당성도 종교의 이름으로 부여하는 일에 다른 어떤 종교보다 앞장서고 있다는 가슴 오싹한 지적도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맛을 잃고 빛을 상실하면 세상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힐 수없에 없는 듯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고 무너져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에 소망의 빛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타락을 보면서 지적과 비방과 정죄의 목청만 높이는 것은 대단히 비겁한 행위일 수 있습니다. 타인의 무너짐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일그러진 이미지를 관리하고 은밀한 차별화를 도모하는 비겁자의 시커먼 속을 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물론 저도 그런 비겁자의 대열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만 대안을 제시하고 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비판은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오해되고 오용될 가능성이 높은 법이기에 대안과 본이라는 비판의 기본기는 최소한 갖추자는 차원에서, 저는 기독교의 위기를 공감하는 여러분과 함께 여기에서 대안도 펼쳐보고 할수만 있다면 본도 보이자며 제 자신을 설득하고 여러분께 그렇게 한번 해 보자고 권유도 드리는 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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