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그: 역사학의 하부분과 중에서 교회사와 같이 각각의 특정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역사 전체를 사려해야 하는 압박이 가해지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 블로흐: 과거의 보다 완전한 재구성에 대해, 연구가 깊을수록 증거의 빛이 보다 다양한 종류의 보다 많은 자료에서 축출되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가가 다루는 주제의 광범위한 범주는 필히 방법론의 절충과 연관되어 있다.
교회사는 교회의 과거를 다루는 모든 학문분과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과목이다. 교회사는 교회의 행습만이 아니라 교회의 사상도 포괄하며 교리만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 혹은 보다 넓은 세상과의 상호작용 부분까지 취급한다.
교의사는 교회에서 규범적인 정의를 취득한 특정 교리들의 역사를 다룬다. 대체로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 등으로 요약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삼위일체 교리의 완성을 향해 질주했고 칼케톤 공의회는 기독론의 정통적인 개념을 교회에 제공했다. 구원이 은혜와 무관하게 인간의 의지적 작용으로 생성될 수 있다고 하는 펠라기안 억견을 격파하기 위해 은혜론 혹은 구원론이 참여하게 되었다.
하르낙과 제베르그: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에 초점을 둔 기독교적 진리의 정수들의 역사를 교의사의 과제로 구축했다. 교의사는 이러한 기초적인 교리들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교리사는 교리적 체계 전체를 취급한다.
사도적 교부들: 이들의 신학적 논의는 단순히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의 범주를 넘어선다. 교리사의 주제는 보다 광범위한 교리적 요소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18세기 중반 이전에는 교회사 연구가 비판적인 성격을 띄지 않았다. 고백적인 관점에서, 초탈한 어떤 것이었다. 특별히 로마 카톨릭 안에서는 교회의 전통이 교리와 신학의 규범적인 기능을 차지했다. 권위는 고대성과 결부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신학적 전제는 학문적인 탐구에 지대하고 장구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과거에서 의미를 찾는 작업은 의문에 붙여지지 않았다. 모든 관점이 전통의 지배적인 섭리와 확일성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유수기]는 교회가 스콜라 사상에 포로가 되어 있었다는 직격탄을 날렸다. 히페리우스와 더불어 시작된 개신교 교의학자들은 스콜라주의 시대에 사유의 퇴락이 있었다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그러나 중세와 정통주의 시대의 스콜라 사상은 서로 달랐다.
극단적 종교개혁자들은 150년에 교회의 타락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시대 이후의 3세기동안 교회 전체는 병들었고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약속도 가볍게 무시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16-17세기 교회 사가들은 교회의 과거를 정통과 이단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18세기 중엽의 역사해석: 1) 원문의 분석에 대한 학문적 관심사가 증대됨, 2) 특정한 목적에 공헌하는 방식으로 사료들을 해석하지 않는 자유도 증대됨.
가블러와 뮌셔(Gabler and Munscher): 성경적 역사이든 교회적 역사이든 과거의 문헌들은 그 자체의 관점으로 이해된, 현대적 관점이나 범주나 견해로 마사지가 가해지지 않은 이해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오늘날의 교회를 섬기기에 유용하다.
낭만주의 운동: 과거는 그 자체의 고유한 용어에 의해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고 역사적 환경이 개인을 형성하고 있다는 관점에 대한 보다 중점적인 인지가 그 특징이다.
August Neander,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Boston, 1872)가 유명하다.
네안더는 역사학의 낭만주의 운동에 일조했다. 특별히 제1권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1) 지극히 작은 겨자씨를 필두로 여러 세기의 과거를 관통하여 지구를 가릴 정도로 성장하는 엄청난 나무에 이르되 그 가지에서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거처를 얻는다는 개념적 틀을 가지고 연구해야 한다. 학문적인 탐구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삶 사이에는 내면적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의 필연적인 순환적 고리를 갖는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용하는 원리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ㅎ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에게 올바른 검증을 제공하는 것, 즉 원리가 올바르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을 제공하는 것도 역사이다. 원문에 대한 연구와 정교한 문헌적 검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건과 교리를 구별했다. 신학적인 동의 없이도 어떤 대상을 평가할 수 있었다. 역사가의 자세 1) 역사가는 원문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2) 역사가는 스타일의 개체성을 가지고 개별적인 사실을 진술해야 한다. 역사나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이 아니라 구체적인 진술을 해야 한다. 3) 부분적인 선호는 중요할 수 있겠으나 부분적인 편견은 금물이다. 부분적인 선호의 불가피성은 관점이 없으면 역사가 무색하고 생명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필립샤프: 미국 교회사의 아버지다. 미국 교회에 대해 다작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교회사 발전에 현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표준을 제공했다. "A Vindication of the Idea of Historical Development" 논문을 필독하라. Herder, Neander, Tholuck을 의존하고 있다. 헤겔의 역사관 때문에 나타나는 샤프의 약점들: 1) 기독교는 참된 가치의 어떠한 것도 상실하지 않았고 상실할 수도 없다는 생각, 2)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을 참되게 이해할 수 있고 플어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 3) 역사가는 기독교 역사의 주도적인 정신과 섭리의 손을 식별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
일차자료, 자료수집 열정, 문헌비교 통한 비판력, 해석에 있어서의 초탈 면에서는 과거 100여년의 역사학 발전을 지금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Henry Boynton Smith, "The Nature and Worth of the Science of Church History" 읽어볼 것. 1)
역사가의 첫번째 도리는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사실 자체를 진술하는 것, 2) 과거를 규명하는 것, 과거라는 것은 역사적인 페이지 위에서의 삶이다, 3) 자체의 원리나 법칙에 의겨하여 사태를 발견하고 설정하는 것, 4) 역사가는 일반적인 법칙과 원리들이 산출하는 목적들을 식별하는 것이다.
학문적 객관성의 포박은 19세기 후반의 역사학 특징이다.
1900-1930년대 미국의 역사학: 사실적인 사료에서 연역된 일반적인 법칙이나 섭리에 대한 논의를 중단했다.
1933-1950년대 미국의 역사학: 모두 교회사 안에서 의미를 언급하는 것의 중요성을 변론했다. 우리가 학문적인 역사로 이해하는 사실들에 대한 벌거벗은 기록 더미들을 발굴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Cyril Richardson).
1950-1990년대 미국의 역사학: 1) 역사 속에서의 여성에 대한 연구가 출범, 소수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
마르크 블로흐: 과거의 보다 완전한 재구성에 대해, 연구가 깊을수록 증거의 빛이 보다 다양한 종류의 보다 많은 자료에서 축출되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가가 다루는 주제의 광범위한 범주는 필히 방법론의 절충과 연관되어 있다.
교회사는 교회의 과거를 다루는 모든 학문분과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과목이다. 교회사는 교회의 행습만이 아니라 교회의 사상도 포괄하며 교리만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 혹은 보다 넓은 세상과의 상호작용 부분까지 취급한다.
교의사는 교회에서 규범적인 정의를 취득한 특정 교리들의 역사를 다룬다. 대체로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 등으로 요약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삼위일체 교리의 완성을 향해 질주했고 칼케톤 공의회는 기독론의 정통적인 개념을 교회에 제공했다. 구원이 은혜와 무관하게 인간의 의지적 작용으로 생성될 수 있다고 하는 펠라기안 억견을 격파하기 위해 은혜론 혹은 구원론이 참여하게 되었다.
하르낙과 제베르그: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에 초점을 둔 기독교적 진리의 정수들의 역사를 교의사의 과제로 구축했다. 교의사는 이러한 기초적인 교리들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교리사는 교리적 체계 전체를 취급한다.
사도적 교부들: 이들의 신학적 논의는 단순히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의 범주를 넘어선다. 교리사의 주제는 보다 광범위한 교리적 요소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18세기 중반 이전에는 교회사 연구가 비판적인 성격을 띄지 않았다. 고백적인 관점에서, 초탈한 어떤 것이었다. 특별히 로마 카톨릭 안에서는 교회의 전통이 교리와 신학의 규범적인 기능을 차지했다. 권위는 고대성과 결부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신학적 전제는 학문적인 탐구에 지대하고 장구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과거에서 의미를 찾는 작업은 의문에 붙여지지 않았다. 모든 관점이 전통의 지배적인 섭리와 확일성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유수기]는 교회가 스콜라 사상에 포로가 되어 있었다는 직격탄을 날렸다. 히페리우스와 더불어 시작된 개신교 교의학자들은 스콜라주의 시대에 사유의 퇴락이 있었다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그러나 중세와 정통주의 시대의 스콜라 사상은 서로 달랐다.
극단적 종교개혁자들은 150년에 교회의 타락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시대 이후의 3세기동안 교회 전체는 병들었고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약속도 가볍게 무시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16-17세기 교회 사가들은 교회의 과거를 정통과 이단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18세기 중엽의 역사해석: 1) 원문의 분석에 대한 학문적 관심사가 증대됨, 2) 특정한 목적에 공헌하는 방식으로 사료들을 해석하지 않는 자유도 증대됨.
가블러와 뮌셔(Gabler and Munscher): 성경적 역사이든 교회적 역사이든 과거의 문헌들은 그 자체의 관점으로 이해된, 현대적 관점이나 범주나 견해로 마사지가 가해지지 않은 이해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오늘날의 교회를 섬기기에 유용하다.
낭만주의 운동: 과거는 그 자체의 고유한 용어에 의해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고 역사적 환경이 개인을 형성하고 있다는 관점에 대한 보다 중점적인 인지가 그 특징이다.
August Neander,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Boston, 1872)가 유명하다.
네안더는 역사학의 낭만주의 운동에 일조했다. 특별히 제1권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1) 지극히 작은 겨자씨를 필두로 여러 세기의 과거를 관통하여 지구를 가릴 정도로 성장하는 엄청난 나무에 이르되 그 가지에서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거처를 얻는다는 개념적 틀을 가지고 연구해야 한다. 학문적인 탐구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삶 사이에는 내면적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의 필연적인 순환적 고리를 갖는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용하는 원리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ㅎ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에게 올바른 검증을 제공하는 것, 즉 원리가 올바르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을 제공하는 것도 역사이다. 원문에 대한 연구와 정교한 문헌적 검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건과 교리를 구별했다. 신학적인 동의 없이도 어떤 대상을 평가할 수 있었다. 역사가의 자세 1) 역사가는 원문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2) 역사가는 스타일의 개체성을 가지고 개별적인 사실을 진술해야 한다. 역사나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이 아니라 구체적인 진술을 해야 한다. 3) 부분적인 선호는 중요할 수 있겠으나 부분적인 편견은 금물이다. 부분적인 선호의 불가피성은 관점이 없으면 역사가 무색하고 생명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필립샤프: 미국 교회사의 아버지다. 미국 교회에 대해 다작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교회사 발전에 현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표준을 제공했다. "A Vindication of the Idea of Historical Development" 논문을 필독하라. Herder, Neander, Tholuck을 의존하고 있다. 헤겔의 역사관 때문에 나타나는 샤프의 약점들: 1) 기독교는 참된 가치의 어떠한 것도 상실하지 않았고 상실할 수도 없다는 생각, 2)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을 참되게 이해할 수 있고 플어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 3) 역사가는 기독교 역사의 주도적인 정신과 섭리의 손을 식별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
일차자료, 자료수집 열정, 문헌비교 통한 비판력, 해석에 있어서의 초탈 면에서는 과거 100여년의 역사학 발전을 지금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Henry Boynton Smith, "The Nature and Worth of the Science of Church History" 읽어볼 것. 1)
역사가의 첫번째 도리는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사실 자체를 진술하는 것, 2) 과거를 규명하는 것, 과거라는 것은 역사적인 페이지 위에서의 삶이다, 3) 자체의 원리나 법칙에 의겨하여 사태를 발견하고 설정하는 것, 4) 역사가는 일반적인 법칙과 원리들이 산출하는 목적들을 식별하는 것이다.
학문적 객관성의 포박은 19세기 후반의 역사학 특징이다.
1900-1930년대 미국의 역사학: 사실적인 사료에서 연역된 일반적인 법칙이나 섭리에 대한 논의를 중단했다.
1933-1950년대 미국의 역사학: 모두 교회사 안에서 의미를 언급하는 것의 중요성을 변론했다. 우리가 학문적인 역사로 이해하는 사실들에 대한 벌거벗은 기록 더미들을 발굴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Cyril Richardson).
1950-1990년대 미국의 역사학: 1) 역사 속에서의 여성에 대한 연구가 출범, 소수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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