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삼상15:23)
우리는 우상숭배 행위를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는 계명을 우상숭배 조항으로 여깁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나머지 계명들에 대해서는 우상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무엘이 사울에게 정죄의 말을 내던진 근거에 대해 밝힌 내용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의 의미를 새로운 각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점쟁이 집을 출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점치는 죄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상숭배 행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물리적인 점쟁이집 출입의 유무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그게 바로 점치는 죄에 해당되는 것이고 마음이 완고한 것 자체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사무엘은 말합니다. 여기에는 왠지 논리적인 비약이 있어 보이는데 그런데도 성경은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불순종과 사술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보다 높은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그 기준을 따라 인생이 움직임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점치는 인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모든 기준은 다 "점괘"입니다. 말씀과 무관하게 어떤 행운이나 운명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는 모두 점치는 사술과 같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것은 자신이 세운 어떠한 뜻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마음을 뜻합니다. 즉 완고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든지 적응하는 유연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만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우상인 셈입니다. 누구를 따른다는 것 자체가 숭배인데 자신을 따르니까 자신이 우상인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 대상은 사실 자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완고함은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은 아말렉왕 아각을 살려 두었으며 괜찮은 양들을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용 제물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고 아각을 죽이지 않아 자신의 위용을 보이고자 했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의미가 고작 양이라는 수단에 달렸다고 생각한 신지식의 결핍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황급한 변명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사울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황제적인 채면을 기준으로 행동했고 자신의 완고함을 따라 인간적인 예배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상을 백성에게 풍기고자 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사울의 행실을 간단히 "말씀을 버렸다"는 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버리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사울은 왕이지만 자신의 칼로 자결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습니다. 말씀을 버린 "왕"은 이름 뿐이었고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행위 일체가 우상숭배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이 얼마나 긴밀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계명들을 다 지키다가 지극히 사소한 계명 하나만 어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 전체를 범한 것이라는 성경의 '어거지' 같은 산법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말씀의 속성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의 말씀은 주어지신 하나님 자신과 직결되어 있으며 당연히 하나님의 계명 하나만 범하여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고 전부를 범하여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며 지극히 사소한 조항 하나를 범하여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기에 그의 말씀 전체를 짓밟는 행위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하나 낱개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계명의 저자를 중심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다 이룬다는 말씀도 맥락의 결이 같습니다. 결국 율법을 생각하고 대면할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께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계명은 한결같이 그리스도 예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몽학선생 같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런 통일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각의 율법을 낱개로 여기고 서로 독립된 행위로만 번역하려 할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파 사상의 부활일 것입니다.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삼상15:23)
우리는 우상숭배 행위를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는 계명을 우상숭배 조항으로 여깁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나머지 계명들에 대해서는 우상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무엘이 사울에게 정죄의 말을 내던진 근거에 대해 밝힌 내용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의 의미를 새로운 각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점쟁이 집을 출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점치는 죄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상숭배 행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물리적인 점쟁이집 출입의 유무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그게 바로 점치는 죄에 해당되는 것이고 마음이 완고한 것 자체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사무엘은 말합니다. 여기에는 왠지 논리적인 비약이 있어 보이는데 그런데도 성경은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불순종과 사술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보다 높은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그 기준을 따라 인생이 움직임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점치는 인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모든 기준은 다 "점괘"입니다. 말씀과 무관하게 어떤 행운이나 운명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는 모두 점치는 사술과 같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것은 자신이 세운 어떠한 뜻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마음을 뜻합니다. 즉 완고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든지 적응하는 유연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만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우상인 셈입니다. 누구를 따른다는 것 자체가 숭배인데 자신을 따르니까 자신이 우상인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 대상은 사실 자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완고함은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은 아말렉왕 아각을 살려 두었으며 괜찮은 양들을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용 제물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고 아각을 죽이지 않아 자신의 위용을 보이고자 했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의미가 고작 양이라는 수단에 달렸다고 생각한 신지식의 결핍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황급한 변명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사울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황제적인 채면을 기준으로 행동했고 자신의 완고함을 따라 인간적인 예배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상을 백성에게 풍기고자 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사울의 행실을 간단히 "말씀을 버렸다"는 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버리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사울은 왕이지만 자신의 칼로 자결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습니다. 말씀을 버린 "왕"은 이름 뿐이었고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행위 일체가 우상숭배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이 얼마나 긴밀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계명들을 다 지키다가 지극히 사소한 계명 하나만 어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 전체를 범한 것이라는 성경의 '어거지' 같은 산법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말씀의 속성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의 말씀은 주어지신 하나님 자신과 직결되어 있으며 당연히 하나님의 계명 하나만 범하여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고 전부를 범하여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며 지극히 사소한 조항 하나를 범하여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기에 그의 말씀 전체를 짓밟는 행위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하나 낱개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계명의 저자를 중심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다 이룬다는 말씀도 맥락의 결이 같습니다. 결국 율법을 생각하고 대면할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께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계명은 한결같이 그리스도 예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몽학선생 같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런 통일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각의 율법을 낱개로 여기고 서로 독립된 행위로만 번역하려 할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파 사상의 부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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