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7일 토요일

경외함과 친밀함

여호와의 친밀함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시25:14)

여기서 "친밀함"은 서로 비밀을 지켜 주어야 하는 둘 사이의 은밀한 소통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소통을 소원한다. '굿모닝 성령님'과 같은 말랑한 표현으로 주님과의 친밀감을 과시하는 분들도 적지 아니하다. 그런데 그분들의 언어와 태도는 눈으로 보기에도 민망하고 경박하다.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주님과의 친밀함 도모를 반대하고 타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친밀함에 도달하는 접근법에 대해서는 면밀한 숙고가 필요하다.

주님과의 친밀함, 그렇게 고상한 명분을 빌미로 자신의 천박한 종교성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뿌듯한 표정으로 마구 발산하는 행보의 창궐이 기독교 내에서는 물론이고 비기독교 안에서도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여호와의 친밀함은 때때로 닭살까지 오르게 하는 겉모양에 의존하지 않는다. 시인의 표현대로 여호와의 친밀함은 그를 경외하는 것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취한 태도들이 이를 입증한다.

모세의 경우는 주님께서 "내 목전에 은총도 입었고 너의 이름도 안다"고 하실 정도로 친밀함의 정도가 기준치를 훨씬 상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마다 "심히 두렵고 떨었다"는 심정을 밝힌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던 다윗도 시편의 전반적인 논조를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라"는 말로 채색했을 정도다. 나아가 성경 자체도 여호와 경외를 인간의 창조적 본성으로 묘사하며 지혜와 거룩과 생명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여호와를 경외함과 친밀함의 균형이 요구된다. 그 균형은 경외함이 우선이고 친밀함은 그 열매라는 다소 인과적인 관계성에 의해 확보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의 도리이고 친밀함은 그런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이라 할 자비로운 친밀함을 우리가 통제의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 하려는 생각과 태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심각한 수준의 교만이다. 경외함과 친밀함은 역순을 거부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경외여야 한다. 우리에게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이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가 곳곳에서 뒤집혔다. 우리는 '친밀'이란 이름으로 하나님께 너무나도 당당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치를 보는 본말전도 현실을 살아간다. 우리에게 지극히 가깝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경외하게 함이라는 말라기의 기록이 우리의 모양까지 취하시며 가까이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전 우리의 마땅한 태도를 가르치고 있다.

* 이는 C국에서 만난 어떤 분에게 받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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