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일 토요일

스스로의 지혜부인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잠3:7)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신뢰도가 높을수록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희락의 유무도 자신에 의해 좌우된다. 삶이 자신을 기준으로 형성된다. 삶 전체가 자아의 연장이다. 입술에서 나온 언어나 수족에서 주조된 행실이나 머리에서 다듬어진 생각이나 가슴에서 빚어진 감정이 모두 자아의 표출이다. 이렇게 자신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는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해야 한다는 바울의 다짐에 위배된다.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그런 여김의 부재를 요청하는 '말라'보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라' 라는 강한 '하라'의 역설적인 표현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는 순간 스스로의 지혜로 똘똘 뭉친 자에게서 하나님의 지혜는 머리 둘 곳을 상실하게 된다.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겨 자신을 신뢰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멸시하고 그를 신뢰하지 않는 자여서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면 다른 것을 의뢰할 마음의 여력은 없어지는 게 정상이다. 의뢰는 마음의 분할을 용납하지 않는다. 전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심신을 다스리는 종교적 장신구가 아니다. 목숨과 마음과 뜻과 힘 전부가 동원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범사에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은 또한 높은 차원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하나님 인정과 자기 부인은 동전의 양면이다.

사실 나의 지혜가 부인되지 않을수록 우매함의 정도는 더해간다. 왜냐하면 땅의 터는 여호와의 지혜로 놓여졌고, 하늘도 그의 명철로 견고히 세워졌고 깊은 바다의 갈라짐도 그의 지식으로 이루어진 일이며 공중에서 내리는 이슬도 신적인 지식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의 존재와 사건과 사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와 무관한 것들이 하나도 없는데도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따라 읽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무지의 소치인가! 지혜자가 아니라 우매자다.

만약 온 세상을 우리의 지혜로 만들고 하늘과 땅의 움직임이 인간의 명철에 의해 유지되고 역사가 사람의 도모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면 인간이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고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만이 천지를 지으시고 보존하며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말씀과 판단과 행하심은 그 자체로 지혜이다. 인정하고 존중하고 경외하고 경배함이 마땅하다.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는 말보다 더 우리를 진정한 지혜로 돌이키게 하는 노골적인 경책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징계와 꾸지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권고한다. 물리적인 징계와 도덕적인 꾸지람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가 구현되는 고도의 섭리적인 장치이다. 신구약을 빼곡하게 채운 무수히 많은 '말라'와 '하라'의 율례들은 우리가 마땅히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하나님의 지혜이며 당연히 순종은 그런 신적인 지혜의 습득이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망각하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는 지혜자의 기록은 하나님은 지혜 자체시며 지혜로 만물을 지으시고 명철로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기에 그러한 분의 말씀은 그 모든 것들이 고려된 지혜의 총화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을 지혜롭게 여기고 마음을 다하여 신뢰하며 살아가는 자의 가슴과 머리와 입술과 수족은 이제 더 이상 부패한 자아를 연장하는 흉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구현되고 발산되는 의로운 병기들로 사용된다.

진실로 말씀이 우리의 감정과 생각과 말과 행실을 주장하게 함이 지혜이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으신 그리스도 예수만이 증거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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