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6일 금요일

사고의 깊이

대가들과 부딪혀야 한다. 부딪히는 만큼 깊어진다. 그러니 역사 속에서 치열했던 사유의 대가들을 선별하고 그들의 글들을 탐독하되 그들보다 한발짝만 더 내미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는거다.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사유에 근육이 오르고 사유의 방향과 추진력과 규모도 마련된다. 그러다 보면, 씨름해야 할 사유의 선수들이 점점 줄어든다. 이런 식으로 우리 시대의 인식론도 극복하고 지구상에 등장했던 다수의 유력한 사상들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방향과 질을 조정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지난한 작업이다. 그러나 대체물이 없다. 사유의 깊이는 아무도 대신 다져주지 않는다.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쓴 글들을 읽다 보면, 왠지모를 공허함이 느껴진다.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인간의 글에는 생명력이 없어서다. 생명력의 유무는 주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결과다. 예수님은 내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 하시었다. 예수님이 생명 자체시기 때문에 그의 입술에서 출고된 말씀도 당연히 생명의 표상이다. 인간의 언어도 동일하다. 인간이 지닌 생명의 기운이 말의 생명력을 좌우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동일한 생각에 동일할 언어를 입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어시면 모든 게 달라진다. 사유의 깊이도 그러하다. 동일한 말도 하나님이 주어시면 깊이는 신적인 차원까지 이른다.

사람의 글과 하나님의 글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사람의 글이 하나님의 진리를 담아내는 만큼 그 글은 깊이가 더해진다. 그 이전에 하나님의 권위가 그 사람의 사고를 주장하는 만큼의 생명력이 그 사람의 글에서 작용한다. 그 이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 사람 안에 거하셔서 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안에 사시면 그 만큼 강력하게 하나님의 권위가 그 사람의 사고를 주장한다.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사로잡힌 사람의 글과 씨름하면 독자의 사유도 깊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역시 사유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은 주어를 선택하는 문제이다. 말씀의 묵상은 깊은 사유에 이르는 첩경이고 유일한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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