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1일 토요일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

여호와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신다 (시146:7)

"자유를 주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주어의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주어와 동사의 이러한 관계성을 존중하면 자유의 의미는 신적인 차원까지 소급되고 확대된다. 그러나 "갇힌 자들"을 주목하면 자유의 의미가 대체로 사람에게 맡겨진다. 인간의 "갇힌" 양태를 주목하고 인간적인 자유의 개념을 따라 이 싯구를 이해하면 투옥된 자의 물리적인 족쇄가 발목에서 풀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거나 혹은 하나님에 의해 노예가 신분적인, 문화적인, 경제적인, 정치적인 족쇄의 제도적인 해방을 맞는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내용도 싯구에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러한 내용을 자유의 주도적인 의미로 혹은 궁극적인 의미로 여긴다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하나님의 적응계시 은총을 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적인 언표이며 인문학적 도구로 풀어야 할 텍스트일 뿐이라고 여기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연히 해석은 인간문맥 안에서 설정된 사람들의 통념을 맴도는 수준에 안주하게 된다. "갇힌 자들"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신체적 약자들을 의미하고 "자유"는 약자의 굴레를 벗어나 강자의 대열로 진입하는 것이겠다.

하지만 주어이신 "여호와"를 존중하면 해석이 달라진다. "갇힌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갇힌 사람들을 가리킨다. 죄에 의지와 지성과 감정이 중독된 자들, 일평생 죽음에의 종노릇을 끊어내지 못하는 자들, 하나님의 진리에 감격하지 못하고 마귀의 속임수에 흥분하고 헐떡이는 자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결박된 자들, 그리하여 여전히 세상의 관능적인 풍조를 흠모하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공중의 권세자를 추종하고 욕심을 따라 마음과 육체의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 진노의 자녀들 등이겠다.

하나님은 우리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하시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사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시인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될 것이라고 말한 이후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소개하고 있다.

아무리 유력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은 해결해 주신다는 맥락에서 "여호와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는 인간문맥 안에서의 자유를 뜻하기도 하겠지만 보다 궁극적인 의미는 영적인 자유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의 언급에서 시공간적 자유만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적인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 마땅하다. 믿음의 선배들은 육체의 갇힘 중에서도 이 영적인 자유를 갈구했고 누렸으며 그리하여 어떠한 것에도 매이지를 아니했다.

하나님은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분이시다. 어떠한 결박도 풀어진다. 영혼과 마음과 생각과 습성과 언어와 행동을 사로잡고 있는 어떠한 종류의 족쇄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박의 효력을 상실한다. 참으로 하나님은 놀랍고 능하고 위대한 분이시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의 첫 소절을 "찬양"으로 채색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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