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5일 월요일

원수들에 대한 기도

죄악되고 사악한 자들의 팔을 꺾으소서 (시10:15)

이 기도문은 악인들이 교만하고 가련한 자들을 심히 압박하며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들을 처형하고 있으며, 그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고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도사리고 있으며, 급기야 그들이 하나님은 없고 당연히 하나님의 감찰과 심판도 없기에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상황 속에서 시인의 가슴에 고여 있던 의협심이 입술로 분출된 탄식이다. 참으로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가 쏟아내는 기도이다. 나도 그렇게 기도했고 지금도 그렇게 기도한다. 이러한 동의 속에서도 복음의 관점에서 과연 최적의 기도일까? 질문하게 된다.

이런 기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일한 상황에서 얼마든지 터뜨릴 수 있는 사회적인 공분이요 개인적인 경건의 표출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이것이 가볍게 발설하기 어려운 내용임을 확인한다. 이는 '죄악되고 사악한' 성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다. 자신도 자유롭지 않아서 심판과 형벌의 대상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들의 팔을 꺾어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칫 '너 죽고 나 죽자'는 공멸를 주문하는 것과 유사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이 싯구는 인간의 연약한 성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을 추구하는 자는 비록 자신이 형벌의 리스트에 올라 있더라도 신적인 공의와 정직의 구현을 갈망할 수 있어야 하고 갈망해야 한다. 그러나 원수에 대한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원수들이 밉고 싫어서 그들의 패망을 주문하는 감정표출 수준의 속풀이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원수와 우리가 모두 불의하다. 본인도 똑같이 의롭지 않으면서 원수들의 불의를 고발하는 것으로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 반사이익 챙기려는 성향을 다스리지 못하면, 기도를 원수들로 인해 축적된 분노와 감정을 쏟아내는 속풀이의 출구로 오용하기 쉬워진다.

물론 시인의 기도문에 긍정적인 의미가 없지는 아니하다. 첫째는 죄악되고 사악한 자들을 죄와 사탄과 그 졸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정하면 이 기도는 너무도 정당한다. 특정한 사람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신적인 권능의 집행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와 사탄에 대해서는 피흘림을 불사하고 끝까지 싸우는 게 마땅하다. 둘째는 자신이 원수의 팔을 직접 꺾겠다고 나서지를 않고 하나님께 원수 갚는 것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자신이 스스로 원수를 갚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을 묵살하는 월권이요 세상적인 보복이며 또 다른 보복의 씨앗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는 무언가 달라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수들의 죄악되고 사악한 상태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우리 자신도 그들 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심정으로 늘 기도에 착수해야 한다. 그러면 원수들에 대해서도 속이 후련해질 판결과 형벌과 파멸에 대한 요청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 달라는 기도, 돌이켜 달라는 기도, 그래도 복 주시라는 기도가 쏟아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원수였고 유다와 같은 배신자를 방불하는 자였음도 기억하게 된다.

사실 원수들은 우리의 본래적인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주변에 원수들이 눈에 거슬리고 때때로 뾰족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면 우리의 부패한 죄성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용서와 긍휼을 확인할 절호의 기회이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멱살을 거머쥐며 존재도 부인하고 신성도 무시하고 능력도 조롱하고 뺨도 갈기고 창으로 찌르고 멸시의 침도 투척하던 우리의 원수행각 및 사악한 풍조의 맹목적인 추종의 때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는 찬양과 감사가 입술에서 번진다. 급기야 인간 원수들에 대해서도 기도하고 축복하며 사랑하는 마음까지 솟구친다.

사회적인 정의는 원수들이 멸망하는 방식보다 그들이 돌이키는 방식으로 구현됨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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