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일 금요일

중서울노회 신년하례회


오늘은 중서울 노회에서 신년 하례회로 모였는데 2가지가 나의 새해를 사로잡을 전망이다. 첫째는 설교이고 둘째는 경건이다. 1부 예배시간 설교를 맡으신 서호 목사님은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법 요약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정암에 의하면, 교부들은 선포적인 설교에 집중했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강의식의 설교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설교법이 네러티브 설교여야 한다고 외치셨다. 물론 네러티브 방식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기에 신중한 분별이 필요하다. 나로서는 선포와 강의와 이야기가 적당히 버무려진 설교법을 선호하고 청중과 상황에 따라 강조점을 조절함이 좋다고 생각한다.

2부는 박영선 목사님의 특강이 백미였다. 핵심은 기독교가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종교가 죽음의 십자가를 지면서 따르라고 말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되 정작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이를 주님이라 부르는 그런 종교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게 기독교다. 죽었는데 이기는 종교가 기독교다. 부족해도 괜찮은 종교가 기독교다. 실수하고 실패해도 괜찮은 종교가 기독교다. 부족과 실수와 실패에서, 어떠한 것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 전적인 무가치와 무기력과 무능에도 불구하고 승리가 주어지는 전적인 은혜의 종교가 기독교다.

인간의 비전이 결과를 초래한 게 아니다. 조용기 목사를 통해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결과가 발생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도 하나님 앞에서 살려 달라고 부르짖은 사람이지 무슨 거대한 비전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회개는 우리의 자책을 제거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본받아 죽음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는 바울의 언급에서 무슨 비장함을 도출하는 정서적 추상화는 금물이다. 죽었는데 이겼다는 기독교 진리의 역설로 보셔야 한다. 성경 구절에서 교훈의 살쩜을 예리하게 발라내는 장인의 능숙함이 돋보이는 교훈들이 아닐 수 없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무언가 자신의 위대한 일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무자격한 자가 전적인 무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존재가 되었냐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가정이 파탄하는 끝모를 추락을 거듭한 다윗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이 다윗을 다윗되게 한 은혜를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실패도 사역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왜 그랬어?"의 추궁이 아니라 "밥은 먹었냐?"는 물음으로 편들어 주는 종교가 기독교다. 특강시간 내내 웃고 울고 감격하고 진지했다. 지루할 틈이 없도록 선언과 강의와 이야기가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법은 우리의 시대에 참으로 탁월한 모델이다. 연세가 드실수록 설교의 내용은 깊어지고 방법은 절묘해져 간다. 신년 하례회에 출석하여 이루 설명할 길 없는 은혜와 감격과 도전에 제대로 휩싸였다. 귀한 스승이요 선배님이 계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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