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무지한 치리자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잠28:16)

상대편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자신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이해한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게 된다.

국가의 최고 책임자가 국민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이해를 국민에게 강요하게 된다.

무지한 치리자는 짐승적인 포학이 의사표시 수단이고
겁박의 주먹이 의사관철 방편이다.

권세가 많을수록 높은 차원의 이해력이 요구된다.
책임이 커질수록 이해력 의존도도 높아져야 한다.

국가나 교회나 가정이나 다른 어떤 공동체나
치리자의 몰이해와 포학이 늘 문제의 원흉이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측량되지 않는 하늘의 통치자는
길이 참으시고 널리 품으시고 포학이 없으시다.

그런 치리자에 향한 고대와 갈증이 갈수록 증대된다.

2015년 10월 26일 월요일

현세적인 복의 약속

현세적인 복에 대한 약속도 주신 이유는 4가지다.

1) 하나님과 창조에 대한 지식을 위해서다. 현세적인 복들, 즉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 주관자다.

2) 교회를 현세의 삶 가운데서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현세적인 삶이 필요하고 삶의 유지를 위한 필수품이 필요하다.

3)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행사하고 기도하며 현세적 도움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감사의 마음은 그런 식으로 보존된다.

4) 현세적인 약속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상기하게 하며 영원한 약속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모든 현세적인 복은 그리스도 때문에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현세적인 복을 구할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를 상기할 수밖에 없어진다.

멜랑히톤, [신학통론], 285-286 요약.

2015년 10월 24일 토요일

종교개혁: 인격과 삶의 신학

1.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신다.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보복의 칼을 뽑으면 월권이다. 그렇다면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원수를 축복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당하는 피동성이 아니라 적극적인 능동성의 표출이다. 우리는 그렇게 저항한다. 이는 마치 오른뺨 맞고 왼뺨 돌리는 격이겠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대응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의 해법이다.

2. 종교개혁 기념하는 시기에 우리가 엄밀하고 순수한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그 신학의 품격만큼 고품격 대응이 가능한 인품과 삶의 준비를 숙고해야 한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대체로 개혁주의 신학을 바르게 아는 것도 빈사상태 수준이며,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도 안하무인 수준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원래 입술의 작용이 아니라 치열한 인격과 삶이었다. 어떤 신학자는 신학을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르고 복되게 사는 삶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그런 속성을 가진 신학을 정보로 취득하고 입술로 출고한다. 이건 아니다. 원래는 신학을 인격으로 흡수하여 삶으로 표출해야 했다.

3. 올바른 신학은 늘 성경으로 돌아갈 발판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대한 갈증을 일으킨다. 그러나 고착된 제도나 교리나 의식에 안주하면 성경을 대체하고 성경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던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필히 답습하게 된다. 성경에 지문 한번 묻히지 않고서도 사제직을 수행함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로마 가톨릭의 문제는 중세만의 현상도 아니고 특정한 집단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온 교회가 늘 경계해야 할 교훈으로 오랜 역사 속에 지속되어 온 하나님의 섭리적 허용이다.

4. 나는 다양한 신학적 경험을 가졌지만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 기원과 발전과 체계화의 시대를 연구했다. 그런데 연구하면 할수록 진리의 엄밀성을 추구하게 되고 그 진리의 샘인 성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오류와 실수의 늪에서 허덕일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준비와 서곡 차원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그런데 인격이 그리스도 예수를 품고 삶이 십자가의 도를 담아내지 않으면 진리의 엄밀성은 결코 추구되지 않으며 성경은 아무리 다가가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먼 당신임을 늘 확인한다. 신학은 원래 경건을 요구하고 인격의 변화를 요구하고 삶의 혁신을 요구하고 실제로 수반한다.

5. 종교개혁 정신을 따라 진정 성경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경건하고 검증된 신학의 계보를 따라 믿음의 선배들이 때로는 실수로 때로는 본으로 남긴 신앙의 역사적 자취를 분별하고 가장 좋은 유산만을 선별하고 계승하고 순전하고 명료하고 충분하고 온전하고 무오류한 하나님의 신적인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되 인격과 삶의 방식으로 그리해야 한다. 인격과 삶 없이는 결코 성경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인격과 삶의 변화와 혁신과 거듭남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 요청에 부응하지 않고서도 올바른 신학을 배우고 익혔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이다.

6. 역사 속에서 구현되고 오랜 세월 검증된 바른 신학을 배우고 계승하여 인간의 고질적인 오류를 걸러내고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을 성경답게 존중하고 성경 안에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삶이 올바른 신학이다. 엄밀한 신학은 온 세상과 역사를 다 품어낸다. 신비롭다. 엄밀성과 포용성의 동행은 가능하다. 물론 그 방식은 타협과 변질과 타락의 형태가 아니라 안으로는 진리의 엄밀성을 고도로 추구하되 밖으로는 진리에 역행하는 자들의 까칠한 광기도 참고 그런 광기의 지속도 인내하는 사랑의 극한 아픔과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이다.

7. 진리의 엄밀성, 그것을 담아내는 바른 신학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마치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율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고스란히 드러내신 죽음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길을 가는 도상에서 부득불 그런 고통이 떠밀어낸 신음 차원에서 신학적 의분을 격발할 수는 있겠으나 그러한 때에라도 나의 신학적 후련함을 추구하지 않고 혹시 모를 진리의 훼손과 거부감 유발을 의식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때로는 비겁하게 보이고 때로는 무기력해 보인다. 그러나 진리의 부흥, 인격과 삶의 바른 회복은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늘 인정하며 진리의 단 한 조각이라 할지라도 바르게 증거됨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각오로 묵묵히 인내의 걸음을 옮기는 게 우리의 도리이고 우리의 최선이라 생각한다.

8. 언어적인 방식이든 문헌적인 방식이든 신학적인 사안이든 문화적인 사안이든 보복은 월권이다. 그러나 보복의 중지는 여전히 소극적인 대응이다. 축복하고 기도하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런 대응의 방식으로 신학의 엄밀성을 전인격과 삶 전체로 추구하되 온 천하와 만민과 온 역사가 다 품어질 때까지 그리해야 한다. 급하게 변론의 칼을 뽑거나 비판과 정죄의 검을 휘두르는 건 승부의 포기이며 패배의 자인이다. 올바른 신학의 길은 초인의 길, 하나님만 바라보는 승부, 진리만이 위로와 만족이 되는 행보이다. 

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소요리 4-5 하나님의 지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저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싶습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이러한 본성적인 지혜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는 신적인 지혜가 오묘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창조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묘사하되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분”(시136:5)이라고 하였으며, 바울은 새로운 창조물인 교회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하늘의 통치자들 및 권세들 모두에게 알리고자 원하셨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각종 지혜”(엡3:10)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영원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일”(엡3:11)이라고 말합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부터 창조의 시대와 그 이후의 재창조 시대까지 펼쳐져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지혜가 번뜩이지 않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의 지혜가 개입하지 않은 역사는 한 순간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양적인 부요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단순히 분량의 차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질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히 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사람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사람의 머리가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단순히 사물이나 사태나 사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쉽게 추적되고 헤아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골2:3). 그렇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발견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이가 인간문맥 안에서 약간 더 지혜롭고 박식하면 그에게로 가서 지혜와 지식을 구합니다. 그러나 보석 수준의 지혜와 지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석학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제공하는 땅에서의 지혜가 아닙니다. 시대와 장소를 따라 변동되는 세상 통치자의 임시적인 지혜도 아닙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감취었던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인데 그 지혜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1:23, 2:7). 이 지혜는 너무도 심오해서 이 땅에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이 세상에는 없다고 선언하고 입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지혜에 비하면 이 세상의 지혜는 미련한 것일 뿐입니다.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십시오. 로마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촘촘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영원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작정에서 창조와 섭리에 이르는 구원의 모든 경륜사는 하나님의 지혜가 펼쳐지는 장입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으나 결국 타락하여 죄악과 저주와 절망의 사슬에 결박되어 있었을 때에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람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다윗을 부르시고 선지자를 부르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고 사도들을 보내셔서 인류의 회복을 이루시되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으로 자신의 백성이 택자임을 보이시고 율법을 주셔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죄 아래 가두시고 인간의 혈통에 따른 편협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택하심을 따라 보편적인 교회의 구원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온 천하와 역사와 만민에게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범세계적 구원에 있어서 혹시 모른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 믿음의 조상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시되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의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셔서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 되셨다고 바울은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비록 인간의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지만 믿음이 결코 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과 완성과 성취가 되셨으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개념에 모든 율법을 함축시켜 천하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단 하나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이방인, 할례와 무할례, 율법과 복음의 조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경륜은 단순히 땅에서의 인과율에 뿌리를 두지 않고 시간 이전의 영원으로 그 원인이 소급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지적하며, 사도는 위의 본문에서 아구의 개패가 조절되지 않을 정도의 메머드급 감탄사를 격발했던 것입니다. 한 인간의 구원은 땅에서의 변동적인 원인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소급하고 소급하여 더 이상의 상위 근원으로 소급할 수 없는 구원의 마지막 인자라고 할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됨됨이나 사람의 지식과 행실도 고려되지 않았기에, 바울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리브가를 향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기 위한”(롬9:11) 것이라는 진단을 내립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이나 논리나 추론에 의해서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질문하고 답하는 문답법이 백기를 들고 투항해야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을 책잡을 수 없고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이 뜻하신 것이니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자들은 하나도 없게 되는 것 아니냐’는 힐문 투척자에 대해 “이 사람아 네가 누구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을 던지느냐…토기 제작자가 진흙으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반박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서 인간의 그 경솔한 아구를 닫으라고 했습니다.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만드신 토기장이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의 섭리는 인간에게 이성의 논리적인 동의를 구걸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과 능력이 창조만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도 분명히 증거되어 모든 입술이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부르게 만듭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경외의 탄성을 지르며 항복의 백기를 올립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여!” 

2015년 10월 21일 수요일

정의 행하기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 (잠21:7)

악인은 정의를 싫어한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그들의 범법은 정의 혐오자의 삶이요 일상이다. 그들의 범법으로 말미암은 피해의 일차적인 대상은 타인이다. 그러나 지혜자는 악인의 강포가 자기의 소멸을 낳는다고 가르친다. 범법은 자기 학대라는 이야기다. 그들은 범법으로 자멸을 자초한다. 정의의 불이행과 악인의 강포와 자신의 소멸은 이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정의를 사랑하고 정의 행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를 보존하는 첩경이다. 자기를 보호하는 것은 탈취로 부를 축적하고 주먹으로 원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를 사랑하고 법을 준행하면 된다. 여기서 정의는 하나님의 판단이고 법은 하나님의 질서이다. 창조자가 내리는 판단과 설정해 놓은 질서는 나 자신의 보존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주어진 복이다.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복이 아닌 복처럼 보이는 것에 가볍게 이끌린다. 복이 아닌 것을 추구하면 그게 불법이다. 그 불법을 좋아해서 이루어진 모든 행실도 불법이다. 그래서 복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고 그 복을 추구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복은 추구하지 않아도 문제이고 알아보지 못해도 문제이다. 다시 말하지만, 복은 하나님의 정의이고 그 정의를 추할 때에 우리에게 복이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에게 유익이다.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에도 불법이 자행되고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훼손하고 내리신 판단을 거북하게 여기는 일들이 교회 곳곳에서 자행된다. 성도의 머릿수에 집착하고 헌금의 액수에 연연하고 교회의 성공적인 모양을 연출하고 하나님의 나라보다 교회의 건물 축조에 집착하고 사람의 부패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혼탁하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함과 무관하다. 그런데도 집단으로 앞다투어 매달린다.

교회를 위한다고 생각하며 실행했던 것들이 자멸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불법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도 시급하고 바르게 이해된 의를 준행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하다. 악인의 강포는 겉으로 드러난 과격함 이전에 정의 행하기를 싫어함의 결실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싫어함의 해법은 좋아함에 있다. 하나님의 정의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야 한다.

교회를 참으로 사랑하고 보존하여 세상의 영속적인 빛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내리신 판단과 정하신 질서로서 정의 행하기를 좋아하고 소원하고 실제로 실행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위해 신학한다. 인간적인 의의 세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적인 의의 성경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익히고 실행하기 위해서 신학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이 본분에 충실하지 않은 모든 행실은 악인의 강포로 분류된다.

2015년 10월 19일 월요일

고통과 죄의 차이

고통은 육신에 작용할 뿐이지만 
죄는 거기에 더 나아가서 마음을 더럽히고 감정을 흩뜨려 놓습니다.

고통은 개선하지만
죄는 파괴합니다.

고통은 목숨을 빼앗을 뿐이지만
죄는 영혼을 탈취합니다.

고통에 시달리다 해도 양심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방주가 파도에 흔들려도 노아는 그 안에서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육신이 고통으로 흔들려도 기독인은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죄를 범하면 양심이 끔찍한 두려움에 눌립니다.

[회개], 76.

2015년 10월 14일 수요일

종교개혁, 현대적 의미

개혁주의신학연구소: 종교개혁 세미나 특강 (2015.10.13)

종교개혁, 그 현대적 의미 (김영규 목사)에 대한 한병수의 개인적인 요약

1. 종교개혁 운동은 성경으로 돌아가되 성경 텍스트로 돌아가는 운동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의 진정한 본질과 자유 그리고 진정한 나 자신을 알아가는 "진실의 회복"을 추구했다. 성경 텍스트의 문헌적인 회복으로 좁혀서 종교개혁 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리고 "오직은혜" 및 "오직믿음" 개념도 종교개혁 운동의 고유한 공헌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어거스틴 신학의 회복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 이는 "오직은혜" 및 "오직믿음" 사상의 공로를 종교개혁 인물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경건한 교부에게 돌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2. 루터는 종교개혁 깃발로 여겨지는 95개조 반박문 안에서도 밝혔고 자신의 저작들 전집의 서문에서 또 다시 강조했던 것으로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마치 종교개혁 정신의 결산처럼 강조했다. 이는 지식이 없고 명예가 없고 권력이 없고 재물이 없다는 이유로 제한과 압박과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그런 진정한 자유의 회복에 대한 외침이다. 루터의 이런 가르침을 따라 무지한 자의 배움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연약한 자의 치유를 위해 병원을 세우고, 가난한 자들의 생존을 위해 복지관을 세우는 일들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본성적인 공동체 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올바른 내용으로 그 시대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3. 르네상스 운동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의 문제점은 그 운동을 고대의 희랍 사상으로 돌아간 운동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사실 르네상스 운동의 발흥은 1277년으로 소급될 수 있다. 그리고 14세기에 잘 정립된 근대 과학의 DNA에 해당되는 실험정신 및 운동 개념들은 희랍철학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한계를 허물고 오류를 제거하고 극복하는 르네상스 운동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다시 말하면, 어거스틴 사상에 의한 희랍사상 극복이 바로 르네상스 운동의 요체라는 것이다. 물론 15세기 말렵과 16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원전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구호는 고전의 문헌적인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로의 사상적인 회귀는 아니었다.

4. 종교개혁 사상은 잘못 이해된 르네상스 운동의 극복이 아니었다.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조금 더 발견하고 인간의 본질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각성을 보다 진지하게 시도하고 자유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신장을 성경 안에서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선언했고 구현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르네상스 사상과 종교개혁 사상은 대립이나 대체의 관계가 아니라 운동의 결이 유사하다. 다만 종교개혁 사상은 르네상스 운동보다 성경의 보다 깊은 비밀을 발견하여 드러냈고 이로써 자연과 인간과 사회의 진실을 보다 부요하게 확증하고 실현했다.

5.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에 1) 자신은 열렬한 교황주의 학자였고, 2) 교황 자체를 싫어하고 부정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3) 오히려 교황을 높이면서 면죄부에 대한 오용을 지적했고, 4) 이웃에 대한 사랑에 더 강조점을 두고 붓길을 옮겼다는 점을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고백했다. "관습은 저항하지 않으면 필연성이 된다"(consuetudo, si ei non resistitur, fit necessitas)는 어거스틴 문구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오랜 습관에 의한 오류들과 싸우되 홀로 싸웠으며, 그런 맥락에서 "신적인 법에 의거하여 교황은 교회의 머리일 수 없다"(papam non esse iure divino caput ecclesiae)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출처가 하나님이 아니면 마귀일 수밖에 없다는 필연"(quod enim ex Deo non est, necesse est ex diabolo esse)을 알면서도 오래동안 교황을 마귀에게 속했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다. 루터 자신은 평화를 열망했고 임종의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섭리론을 붙들었다.

6. 칼빈의 종교개혁 정신과 개혁주의 신학도 상당부분 루터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1530년을 기점으로 신학적 입장의 차이가 선명하게 확인되자 개혁주의 내에서 다양한 고백서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개혁주의 신학의 의미는 대체로 루터를 수용하되 루터가 이룬 자연과 인간과 자유와 자아에 대한 진실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넒이를 성경에 대한 보다 엄밀한 의존성과 더불어 더욱 진전시켜 나갔다는 것에 있다.

7. 종교개혁, 그 현대적인 의미는 종교의 개혁은 단순히 종교계 내부의 변혁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의 해석학적 신장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제도적인 관습의 철폐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과 인간과 사회와 온 인류에 성경이 말하는 보다 근원적인 진실을 부요하게 드러내고 누리고 구현하고 증거한 종교개혁 인물들의 행보가 우리의 시대에 우리의 행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실을 탐구하고 발굴하고 정립하고 살아내고 드러내고 증언하는 것이 종교개혁 기념의 본질이다.

2015년 10월 4일 일요일

종교개혁에 대한 단상

종교개혁 기념하는 시기가 다가온다. 곳곳에서 펼쳐질 종교개혁 행사들이 기대된다. 아름다운 결실을 맺고 그 모든 결실들이 협력하여 주님의 교회에 은혜롭고 따끔한 선지자적 목소리가 들려지길 소원한다. 짧은 단상을 정리한다.

1. 종교개혁 신학은 교리 몇 조각의 수정이 아니라 종교 일체의 변화였다. 물론 표면상 구원론을 둘러싼 일이지만 보다 본질적인 면에서는 신본주의 v.s. 인본주의 사이의 대립과 교체였다. 종교개혁 필요성이 고조되는 상황이란 대체로 사소한 겉모양을 취하지만 이면에는 기독교 진리의 본질을 훼손하는 속임수가 도사리고 있다.

2. 종교개혁 신학은 교회 안에서의 개혁만이 아니었다. 중세의 유럽은 대부분의 국가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기에 교회의 개혁은 범국가적 변화에 영향력을 발휘했고 때때로 현저한 변화까지 수반했다. 이로 보건대, 16세기의 개혁은 교회의 물리적인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의 회복까지 의식한 개혁의 시도였다.

3. 종교개혁 운동을 지나간 과거의 사건으로 추억하는 것은 종교개혁 정신의 현재적인 역동성을 제거하는 태도이다. 종교개혁 운동을 과거의 시간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무의식적 오류이다. 특정한 시대에 국한된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인 접근법일 수는 있겠으나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이 반영된 이해는 아니다.

4.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 슬로건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제대로 온전히 개혁된 교회가 있었는가?" 만약 지금까지 제대로 온전히 개혁된 교회가 없다면 우리는 이 슬로건의 앞부분도 구현되지 않은 교회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직시해야 한다.

5. 이 슬로건은 진행형 개혁을 요청하고 있다. 먼저는 최소한 종교개혁 시대에 이루어진 개혁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렇게 개혁된 교회는 보다 성경에 가깝도록 이후로도 지속적인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이처럼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 개혁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개혁에 있어서는 어떠한 지점에 이르러도 "다 이루었다" 탄성은 불가하다.

6. 개혁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고 나부터 시작해야 하고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자신이 선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 진정한 개혁은 하나님의 진리 한 조각이 나의 인격에, 나의 생각에, 나의 행동에, 나의 삶에 새겨져 보다 온전한 증인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동원된 사람들의 머릿수가 개혁의 크기를 좌우하지 않고 구호를 외치고 떠들썩한 행사를 벌인다고 개혁이 미소를 보내는 건 아니다.

7. 개혁의 성패를 외부의 반응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반드시 개혁의 본질을 벗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긍정적인 추임새를 넣는다는 것이 교회의 올바르고 온전한 개혁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혁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개혁이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개혁을 시도했고 개혁을 이루었다. 이단으로 정죄되는 길이었다.

8. 개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람의 소원과 사람의 노력과 사람의 인내와 사람의 협력으로 산출하는 인위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주께서 한 시대에 부으시는 은혜의 결과이고 누군가가 그 개혁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무한한 은혜이다. 물론 교회의 회개와 정직과 겸손이 대체로 가까운 원인으로 동원되는 모양새를 취한다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