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30일 수요일

박사학위 논문 출간

괴팅겐의 출판사 Vandenhoeck & Ruprecht에서 나의 부족한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하게 되었다. 누가 선지자들 및 사도들이 가르친 기독교 진리의 정통성과 보편성을 계승한 적통인가? 물론 미국의 학계는 이런 물음에 큰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학계가 요구하는 격식을 적당히 차릴 필요성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나의 본심은 그 물음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물음에 대한 궁구와 역사적 객관성 확보에 몰입했다. 그런데 그런 전략과 논지가 괴팅겐 출판사에 먹혔나 보다. 정말 감사하다. 특별히 해당 시리즈의 책임 편집자인 Herman Selderhuis가 호평을 해 주었으며 나아가 당시 로마 카톨릭의 최고 논객이던 로버트 벨라르민 입장과의 대립각을 보다 예리하게 세우면 좋겠다는 달가운 조언까지 추가했다. 약간의 편집을 거치면 내년 초까지는 출간될 것 같다. 논문이 출판까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주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러야 할지 모르겠다. 논문 작성도 은혜로 했는데 출간의 은혜까지 덤으로 주시다니...ㅜ.ㅜ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로 아직도 가슴이 먹먹한데, 주께서 이렇게 소박한 힐링을 제공해 주셨다고 생각된다. 주님 감사합니다~

2014년 4월 23일 수요일

생사의 미묘한 교차

어제 점심을 먹고 양화진 산책길에 올랐다. 백색으로 물든 양화진의 한 묘비명이 걸음을 붙잡았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일가족의 고결한 생명을 바친 분인데도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것도 모두 한국에 희사하고 싶다는 내용이다. 수백의 젊은 목숨을 등진 어떤 분과 절묘하게 대비된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씀의 사실성이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 앞에서, 국민의 기억에서...그렇게 생사는 교차한다.

2014년 4월 22일 화요일

사실에 대하여

역사를 공부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사실을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에서 말미암지 않았다는 바울의 진술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고려되지 않은 사실규명 자체가 얼마나 진정한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은밀한 거짓일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속성까지 소급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실도 제대로는 규명되지 않았다고 함이 정당하다. 그런데 초등적인 사실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면 역사는 그만큼 어두워질 수밖에 없겠다. 바다 바닥만큼 캄캄하다.

2014년 4월 20일 일요일

부활의 역사성

도둑질 하여 갔다고 하여라 (마28:13)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부활은 그 시대의 그들에게 아니 오늘날의 모든 사람에게 생소한 개념이다. 정보로는 전두엽의 한 귀퉁이에 보관해 둘 수는 있어도 전인격 속에서는 머리 둘 곳이 없는 개념이다. 두 마리아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체의 악취가 진동하는 무덤으로 슬픈 걸음을 옮겼었다. 그런데 그 무덤에서 큰 지진을 맞아 땅과 몸과 의식의 두렵고 유쾌한 진동에 휩싸였다.

그녀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신속한 재보를 위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재보의 달음질 도중에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면서 두려워는 말라고 타일렀다. 이제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큰 기쁨"만을 가지고 제자들을 향해 걸음을 이어갔다.

같은 시각에 이러한 부활의 실재적인 상황을 접수한 경비병 중 몇 사람은 직속 상관에게 알리지 않고 대제사장 무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들에게 사실 그대로를 재보했다. 말씀대로 늘 행하셨던 예수님이 부활할지 모른다는 짐작에 근심의 목덜미가 잡힌 종교계가 사전에 경비병의 일부를 매수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대목이다.

결국 종교계의 주류는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의 헐거운 지갑에 거액을 찔러 주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그의 제자들이 야밤에 "도둑질해 갔다"는 위조된 정보를 흘리라고 명하였다. 혹 이 일이 총독에게 알려져도 뒷탈이 없을 것이라며 안심시켜 주기까지 했다. 이건 종교계 인사들의 수상한 범정치적 오지랍 사이즈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정치권과 교계의 주류가 취한 반응은 부활을 감추고 왜곡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삶과 신앙에서 고립과 탄압과 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언로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봉쇄되고 제자들은 시체 도적질을 일삼고 거짓을 살포하는 비도덕적 처신의 주범으로 내몰렸다. 게다가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할 목격자인 여인들의 증언은 당시 법적인 효력을 가졌을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지금까지 부활의 종교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간에게 가용한 모든 권모와 술수를 동원해도 부활의 역사성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는 증거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응하는 당시 종교계의 유치한 작태는 고작 손바닥 몇 개를 동원해 하늘을 덮겠다는 시도였다. 하늘의 땅의 창조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의 역사를 안개와 같이 사라질 인생이 뒤틀고 덮으려는 시도 자체가 경악할 오만이요 무지요 패악이다.

부활은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선포한다.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증거한다. 죄에 대한 고발 및 참소에 대한 공의와 자비의 승리를 확증한다. 인간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성공을 공포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크고 놀랍고 기쁜 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계는 이것을 사람의 비열한 도모로 남루한 금품살포 비책으로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나귀도 웃을 일이고 돌들도 증언의 입술을 벌릴 일이겠다.

진리는 사람이 가린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사람이 탁 트인 무대에 올린다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전달은 기적이고 은혜이다. 오늘날 부활의 명확한 역사성이 숨쉬고 있다면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숨결로 간주함이 마땅하다. 

2014년 4월 19일 토요일

영음사 방문

합신 채플은 세월호의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눈물의 기도로 질퍽했다. 기도가 끝나도 신학교의 흐느낌은 멈추지를 않았다. 예배가 끝나고 나는 영음사에 계신 조주석 목사님을 만나뵈러 핸들을 잡았다. 영음사에 계신 귀한 분들과 다같이 점심을 먹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점심을 전후로 끊임없이 쏟아내신 조 목사님의 특강이다. 노트를 챙겨가지 않아서 후회가 될 정도로 귀한 통찰과 교훈이 가득했다. 가슴에 오래 새겨 두어야 할 교훈들...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푸짐한 선물까지 주셨다. 최근에 출간된 박윤선 목사님의 책이었다. 폭풍흡입 들어갔다. 박 목사님 특유의 담백한 어법과 묵직한 교훈과 짙은 경건과 깊은 통찰이 알알이 박힌 책이었다. 4시간의 강의까지...슬픔과 기쁨과 흡족과 피곤이 두루 버무려진 하루다...

종교개혁과 스콜라주의 역서출간

개혁파 정통주의 시리즈 세번째 역서 [종교개혁과 스콜라주의]가 연구소에 당도했다. 표지가 갈수록 예뻐진다. 색상도 은은하고. 내용도 상당히 흥미롭다. 본서는 중세신학, 종교개혁 신학,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연관성을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었다. 특별히 안토니 보스의 글을 강추한다. 서구 지성사의 광활한 문맥에서 종교개혁 신학을 읽어내는 안목이 탁월하고 몰역사적 접근법의 부작용도 다소 아프도록 꼬집는다. 다른 학자들의 글맛도 나쁘지가 않다. 종교개혁 신학의 속살을 학문적인 각도로 응시할 전문서적 차원에서 일독을 권한다!!! 국수 말아서 삼키듯 후루룩 넘어가는 책은 아니지만...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기독교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1. 인류에게 가장 큰 복을 제시하고 제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성과 시대성과 당파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특정한 목적과 특정한 집단과 특정한 시점과 결탁하는 순간 섬김의 영역은 그만큼 좁아지고 왜곡과 편협의 소지는 커져간다. 스스로도 편협의 노예로 전락하고 인류에 대해서도 불이익의 무의식적 원인을 투척하는 셈이 된다. 인류 전체에게 복의 근원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의 망각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집단적 이기주의 망령은 정치권과 경제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온 천하의 만민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는 부르심을 제치고 특정한 집단의 충복을 자임하는 일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행되고 있어서다. 인류를 향한 복의 전달자 신분은 길바닥에 던져진다.

2. 인류에게 최고의 복을 전하는 자로 있으려면 다양한 한계들이 제거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제거의 일순위는 인간 자신이다. 모든 한계의 출처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기에 유일하게 인간의 한계가 침투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절대적인 뜻과 확고한 계획과 정교한 섭리와 전방위적 통치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인간의 편협성과 유한성과 유오성과 편파성과 부패성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제거된 현장이 성경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일들이 목숨을 걸고 진리를 추구한 믿음의 선배들이 일평생 매달렸던 일이었다. 그렇게 일구어진 깨달음의 유산이 역사에 펼쳐져 있는데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자신의 노선을 선택했다.

3. 성경은 특정한 시대나 민족이나 인물이나 주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고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만도 아니고, 서구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의 영원성 때문에 특정한 시대를 불문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어느 시기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의 근원이다. 성경은 보편적인 속성 때문에 특정한 문화권의 독점적인 유산이 아니라 동서남북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 일체를 막론하고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기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차원에서 특정한 교단이나 가시적 교회라는 담벼락 안에 가두어질 수 없는 범인류적 소명이 있다.

4. 신학은 기독교의 이러한 범역사성, 범인류성, 범교회성 이상을 의식하고 구현하는 방향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죄성이 가장 잘 제거된 신학적 유산을 발견하고 계승하며 보다 엄밀한 죄성을 제거하여 보다 순수한 신학적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는 우리의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성경론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작정론과 예정론과 섭리론과 은혜론에 각별한 신학적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과 뜻과 역사만이 순수하게 남도록 하여 오직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 복음의 범인류적 유익의 극대화를 도모하기 위함이다. 각 나라와 단체는 자신들의 입장을 지원할 기대감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유익을 위해 신학의 계보와 가르침을 선별해야 한다.

5. 사람들의 탐욕적인 군침을 닦아줄 요량으로 유행성 이슈에 뛰어들어 선정적인 해법 생산에 과도한 지성과 에너지와 재원과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도록 늘 주의와 경계의 안테나를 쫑끗 세워야만 하겠다. 올바른 것을 가르쳐 주면 저절로 해소될 부차적인 일들에 집착하여 기독교의 체질을 저하시키고 호기심의 간지러운 부위만 긁어주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교회의 저항력을 무의식 중에 떨어뜨려 좌우에 날선 어떠한 검보다도 예리한 성령의 검을 맡았으나 썩은 무우만 자르면서 범우주적 증인의 소임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부끄러운 꼬라지를 후대에 보여서는 아니된다. 역사의 한 토막이 우리에게 맡겨진 이상, 앞으로 이어질 역사의 유익을 위해 우리는 없고 그리스도 예수만 남아 최고의 범인류적 복이 최상의 상태로 전해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분여된 소임에 전무하면 좋겠다.

2014년 4월 14일 월요일

아침의 신비

아침의 신비가 안구를 스밀고 들어온다.
그건 낮의 선명한 구체성이 윤곽을 잡기 직전
몽롱한 운무의 휘장이 채 걷어지지 않은 장면이다.

양화교를 지나는 순간에는
교각을 장식하고 지탱하는 일렬로 선 물상들이
차창을 양쪽으로 할퀴고 급하게 지나가다.

아직 햇살은 운무의 철벽을 허물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태양이 중천을 누빌 무렵에도
아침의 뿌연 신비는 지속될 전망이라 한다.

그런 전망에 미세먼지 마스크가 먼저 떠오른다.
도시에 진열된 아침의 신비는 문명의 찌꺼기다.
그런 찌꺼기 틈에서도 다른 신비의 숨결이 느껴진다.

2014년 4월 12일 토요일

성경신학회 후기

신구약의 통일성에 대한 토마스의 중세적 입장을 발표했다. 교부들과 칼빈을 비롯한 정통적인 입장과 크게 다르지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고 정교하다. 안드레 울지가 칼빈의 통일성 개념에도 토마스의 흔적이 보인다고 할 정도였다. 난 토마스의 장점을 논문에 충실히 옮기면서 동시에 구원과 관련하여 토마스가 내세운 세례의 필연성 주장에 교리적 안다리를 걸었다.

1) 홍해를 건너는 것이 죄에서 해방되는 일이었고, 2)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쏟으신 물과 피는 세례와 성찬이며, 3) 더러운 손은 물로 씻어서 깨끗하게 되듯이, 세례도 죄를 깨끗이 씻어주는 기능을 한다는 토마스의 근거는 나름 성경과 상식에 부응하는 듯하나 정작 그것을 제정하신 예수님 자신과 사도들의 의도와 설명과는 무관하다.

토마스는 주체의 통일성과 칭의의 통일성과 성화의 통일성과 약속의 통일성과 은혜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신학적 결함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구원의 방식에 있어서는 세례의 필연성을 주장하며 세례가 원죄를 비롯한 모든 죄들을 씻어주고 그런 죄들로 말미암는 모든 형벌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입장을 천명한다. 이는 분명 우리가 걸러야 하는 부분이다.

구원의 방식도 신구약 통일성의 실체로 여긴다면 토마스는 비록 입술로는 신구약의 통일성을 주장하나 내용은 심각한 결함을 가졌다고 이해해야 하겠고, 만약 구원의 방식을 제거하고 본다면 정통적인 입장과 너무나도 유사하여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체를 따라서 신구약이 같다면 결국 실체의 항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토마스 평가의 관건이다.

나는 구원의 방식도 실체에 포함시켜 토마스의 견해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했다. 발표한 이후 내 입장이 강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대체로 토마스 비판은 구원론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좋겠고 신구약의 통일성에 대한 정통적인 고백은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견해였다. 일리가 있었다. 내가 지나친 통합적 사고를 시도했나 싶기도 하다.

암튼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던 학회였다. 특별히 나와 견해가 다소 다른 분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의 필요성도 많이 느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이르러서 특별히 유익했다.

2014년 4월 9일 수요일

그레고리 글귀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깨끗케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깨끗케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하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가까이 해야만 합니다.

그들을 거룩하게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2014년 4월 8일 화요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출 20:17)

우리가 계획하고 숙고하며 결심하며 시도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그것은 이웃의 행복과 유익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특별히 "탐내지 말라"는 어구의 개입을 칼빈은 "하나님이 놀랍도록 안정된 마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사랑의 원칙에 어긋나는 자극은 바늘 끝만한 것이라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사랑과 욕망은 서로의 존재가 불편하다. 욕망은 자신을 향하는 것이고 사랑은 타인을 향하는 것이다. 단 한 방울의 욕망이 우리의 마음에 번지면 사랑은 숨통이 조여온다. 단순히 욕망 한 방울의 분량이 사랑의 영토를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를 변질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마음속에 탐심이 있는 이상,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고도 하였다.

이웃의 범위도 중요하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그것은 사랑을 빙자한 이방인과 세리 수준의 집착일 뿐이라고 꼬집으신 바 있다. 그러면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할 것"을 명하셨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이웃의 범위가 원수까지 포함된 것이라면 친구의 처만이 아니라 원수의 처도 넘보거나 첩으로 삼아서는 아니되는 것이었다. 도둑질 금지령도 단순히 친구의 집만이 아니라 원수의 집까지도 전리품 명목으로 챙겨서는 아니되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수의 몰락에서 괜찮은 물품도 불을 태우거나 외면했다.

"집"은 이웃의 소유 일체를 다 포괄하는 개념이다. 여기에는 물리적인 것도 당연히 들어갈 것이지만 지식이나 통찰의 무형적인 것들도 해당된다. 타인의 저술이나 논문이나 발표나 설교나 강의도 탐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권력, 경영인은 자금, 직장인은 진급 등등 어떠한 분야에 있더라도 탐심에 결박되지 않도록 늘 스스로를 경책해야 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탐내지 않으면 준수되는 계명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율법 수여자인 예수님의 해석이다. 탐심을 제어하는 방식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그런 삶으로 십계명 해석을 보이신 분이시다. 열번째 계명은 우리를 그런 예수님의 삶으로 초청한다.

2014년 4월 7일 월요일

율법과 영의 관계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ὅτε γὰρ ἦμεν ἐν τῇ σαρκί, 롬7:5) 죄의 정욕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지체 안에서 역사한다. 당연히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수순이 이어진다. 그러나 과거에 얽매였던 법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육체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율법 조문의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논지를 율법 폐기론 혹은 율법 무용론 방향으로 몰아가면 안되겠다. 사유의 일반적인 흐름이 그런 식으로 흘러갈 것을 의식한 바울은 곧장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타협의 여지를 불허하는 논박의 쐐기를 박는다.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율법의 속성도 가지런히 열거한다. 이런 율법으로 우리는 죄를 제대로 깨닫는다.

그러나 죄에 대한 깨달음이 신앙의 종착지일 수는 없다. 그런 깨달음은 절망의 출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망의 입구로 이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소망의 문을 만드셨다. 흉물스런 뼈다귀가 나딩구는 절망의 골짜기에 만들어진 문이다. 지성소를 가리던 휘장도 찢어졌다. 다른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밖에서 노려보는 율법의 눈짓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율법에 무지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레미야 및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새 마음과 새 영"으로 다스림을 받게 되어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영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의 예속과 연결된다.

성령의 법으로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율법과의 단절이나 결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ἵνα τὸ δικαίωμα τοῦ νόμου πληρωθῇ ἐν ἡμῖν τοῖς μὴ κατὰ σάρκα περιπατοῦσιν ἀλλὰ κατὰ πνεῦμα)이란 바울의 정교한 이해와 진술에서 공히 확인된다.

바울의 논지는 이제 율법을 버리고 우리의 감정과 느낌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이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도 향방이 없어서는 아니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며 그 말씀의 방향을 따라 몸의 행실을 죽이되 육신이 아니라 영으로서 그리하란 이야기다.

여기서 "영"이라는 말은 선지자가 언급한 "새 마음과 새 영"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다시 우리에게 대하여 여전히 밖에 있으면서 책임과 의무를 독촉하는 돌판에 새겨진 율법의 몽학선생 기능이 아니라 심비에 새겨진 율법과 관계하고 그 율법의 성취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율법과 영은 서로에게 배타적인 양자택일 대립항이 아니다. 율법은 바울이 명시한 것처럼 살리는 법이며 그 살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이다. 이는 힘과 능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고백한 아모스의 진술과도 무관하지 않다. 육신과 영의 대립을 율법과 영의 대립으로 오인하면 율법과 영에서 어느 하나를 버리는 과격한 극단만이 묘책으로 채택될 것이다.

말씀과 성령은 대립이나 충돌을 불허하고 조화하며 병행한다.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2014년 4월 6일 일요일

죄의 자유, 의의 노예

"나는 사람의 예를 따라서 말한다"(Ἀνθρώπινον λέγω). 이는 바울이 사람들의 연약함 때문에 취한 어법이다. 자유와 노예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그런 어법의 일환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당시 "자유"와 "노예"라는 용어의 문맥적 의미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런 노력은 해석학적 작업의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 텍스트의 해석이 이르러야 할 종점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의 예를 따라" 한 말이라는 바울의 고백에서 찾아진다. 즉 이해의 용이성을 위해 사람의 예를 따랐을 뿐이지 거기에서 해석학적 안식을 가지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사람의 예는 도구이다.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나를 얽어매던 것에서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것에 대한 종됨의 준비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사망에 이르는 죄의 종이 아니라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 되었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이는 노예사회 속에서의 종과 자유 개념이 다 포섭하지 못하는 내용이다.

바울이 지금 사람의 예대로 설명하는 내용은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문맥에서 주어졌다. 즉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거룩, 그 거룩에 이르는 의, 그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기에, 결코 사망에 이르는 불경, 그 불경으로 질주하는 불의, 그 불의에 이르는 불순종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사람의 예대로 해명하고 있다.

누구에게 순종하든 순종하는 것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원칙이다. 즉 인간은 본질상 무엇에의 노예이다.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노예이고 의에 순종하면 의의 노예이다. 그런데 죄에서의 해방을 방종에의 준비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죄에서의 자유와 의에로의 노예 사이에는 개념적 비무장 지대가 없다. 방종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죄의 자유는 의의 노예이고, 의의 자유는 죄의 노예이다. 기독교는 이것을 가르친다. 죄에서 자유롭게 되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방종의 면죄부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에겐 순종만 있고 무엇에 대한 노예의 신분만 가능하다. 비통해 할 거 없다. 자유라는 것은 순종의 대상에 의해 좌우된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의에 대하여 노예가 될 때에 주어진다.

교회에서 의를 찾아보기 어렵다면 그건 방종의 간교한 올무에 걸려든 결과이다. 어쩌면 죄에서의 자유가 의에로의 종됨이란 사실의 자발적인 망각에서 저질러진 자작극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다. 그건 아니기를 바라지만...

2014년 4월 5일 토요일

죽음에서 살아난 자처럼

바울은 "죽음에서 살아난 자처럼"(ὡσεὶ ἐκ νεκρῶν ζῶντας)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란다. 무에서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이 창조이다. 그래서 존재는 이미 은혜를 전제한다. 존재하게 된 것 자체가 이미 은혜의 결과이며 은혜의 충만이다. 그래서 존재는 선하다는 어거스틴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죄는 그런 은혜의 충만 속에서 저질러진 일이었다. 파렴치한 일이었다. 극도의 배은망덕 행위였다.

그 죄로 말미암아 결국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 존재 이전의 "무"의 상태보다 더 깊숙이 추락했다. 죽음에서 살아난 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에서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보다 더 큰 은혜의 개입을 증거한다. 측량할 수 없는 은혜 속에서의 죄는 창조 속에서의 죄보다 위중하다. 창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라는 바울의 권고가 오늘 하루치의 의식을 통째로 장악한다. 

2014년 4월 3일 목요일

튜레틴의 성경기록 필연성

비베스(Juan Luis Vives, 1492-1540)가 잘 조언한 것처럼 “모든 학문들은 마치 보물창고 같은 문자 안에 보존되어 결코 소멸되지 않는 반면 손으로 전수된 전통은 공교롭지 않다”(Vives, De disciplinis...de Corruptis Artibus (1636), 1:5). 퀸틸리안 표현을 빌리자면, 문자의 신적이고 경이로운 이점은 “문자가 말씀을 호위하고 그 말씀을 위탁된 화폐처럼 독자에게 전한다”(Quentilian, Institutio Oratoria, 1.7.31 [Loeb, 1:144-45])는 것이다. 공적인 법률과 법령과 왕의 칙령과 백성의 규정이 청동에 새겨지고 공적인 서판에 각인되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들을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하고 사람들이 공적으로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이란 기억을 여러 세기동안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certissima ratio)이기 때문이다. 

탈북자 이해와 사역

어떤 탈북자 목사님의 설교: 로마서 9장 1-3절

성령에 인도함을 받은 바울의 고백이다.
동족에 대한 애끓는 사랑이 표현된 구절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다. 그러나 동족 유대인의 복음화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영생까지 반납할 각오를 표출할 정도로 뜨거웠다.
이스라엘 민족: 복을 받았으나 복음을 거절했다.

하나로 교회를 개척했다.
주체사상: 자기 운명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UDT에 들어갔다. 힘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4시간의 수면으로 버티었다.
좋은 성적을 받았고 좋은 대학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날고 뛰는 학생들 틈바구니 속에서 또 4시간을 자면서 승부했다.

결국 북한의 CIA에 들어갔다. 김현희가 같은 공작원 출신이다.
중국 대학으로 위장해서 들어갔다.
거기에서 한국 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김치를 비롯하여 많은 것들을 나누고자 하였다.
공작원의 자존심이 구겨졌다. 그래서 주는 것마다 쓰레기통 처분으로 응수했다.

그러다가 고추장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맛을 보았다. 쥑이더라.
중국대학 한국 유학생이 160명이었다. 일부는 엘리트, 일부는 달랐다.
엘리트는 논쟁을 좋아했다. 북침을 주장하며 대화를 걸어왔다.
알고보니 데이터가 다 일본과 영국과 미국이 출처였다.
다음날에 중국과 소련의 데이타를 가지고 북침의 객관성을 인정했다.

한국 학생들, 정말 똑똑하고 꼼꼼했다. 그들에게 논쟁의 백기를 들어야 했다.
어떤 학생들이 계속해서 옷을 갇다 주었다. 한사코 거절했다.
그런데 영한사전 (에센스), 그것은 뿌리칠 수 없었다.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은 누숙자가 북한의 고위 공직자 이상으로 잡순다는 거다.
한국이 정말 좋다고 생각된 대목이다.

1997년 IMF가 터졌다. 나라가 망한다는 패색이 짙었다.
망하는 나라를 떠나서 한국에 왔는데 여기도 망한단다.
그런데 놀랍게도 망하지를 않았다. 지혜롭게 대처했다.
그러나 재기의 비법은 북한에 없는 것 때문임을 깨달았다.
한국에는 교회가 있었다. 이는 성경도 보증하는 내용이다.

성공하는 남한을 보면서 북한의 처참한 현실이 가슴을 후볐다.
교회가 회복되지 않으면 북한의 회복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합신에 입학했다. 어떻게 북한을 선교할 것인가가 과제였다.
백방으로 뛰었다. 신학적 결이 다른 순복음 교회도 사역을 요청했다.
탈북자 성경교육 담당자로 불렀으나 그들을 만날 수가 없어 실패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불 받으면 끝이다는 판단 속에서
성경을 등한히 여긴다는 인상도 받아서 결국 사임하게 되었다.
하나로 축구단을 창설했다. 24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그러나 회심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아 해산하게 되었다.
6년동안 전전긍긍했다.

탈북자 자녀들에 대한 회심에 관심이 기울었다.
학교를 세우자고 결의하게 되었고 결국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설립.
4/6이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해법은 아니었다.
함께 신앙생활 들어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결국 1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그러나 6년동안 고작 1명이란 생각에 실망감에 젖었다.

그러나 스데바나 집이 아가야의 첫열매란 바울의 언급에서 일어섰다.
첫열매에 대한 바울의 애틋한 감격과 감사가 배어 있어서다.
무슬렘 지역에서 선교하는 한 선배 선교사가 찾아와
일평생 선교해서 한 사람의 회심자를 얻는다면 일평생 선교사로 산다는
그런 결심을 듣고 감격과 부끄러움 교차 속에서 다시 결심했다.

하나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지금 이곳에는 한국에서 공부하는 탈북자 학생들의 1/3이 출석한다.
이제는 복음의 종들을 길러내야 할 때이다.
그들을 잘 훈련시켜 북한으로 보내야 할 시점이다.

북한의 전략을 주목해 보라. 탁월한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200명의 노동당 충성파를 각 지역으로 파견한다.
그들은 각 지역의 실권자로 활동한다.
이런 통치술 때문에 북한은 김일성 1인 체제가 지금까지 유지된다.
200명의 탈북 선교사가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사랑으로 그들을 길러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요셉, 에스더, 다니엘과 같은 각 시대별로 예비된 하나님의 사람들.

크림 사태를 보라
러시아와 크림이 병합했다. 배후에 어떤 작업들이 있었는가?
오스만 터키가 장악했다. 이후에 러시아가 크림을 차지한다.
20세기 10월 혁명으로 소련 연방으로 복속된다.
그러나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의 대통령이
크림을 우크라이나 행정구역 안에 배정한다.

1990년 구소련이 무너지고 연방은 해체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가 떨어져 나가면서 크림도 놓치고 말았다.
크림에는 부동항이 있다. 놓쳐서는 안되는 전략적 요충지다.
그래서 러시아는 그때부터 20년간 공작에 들어갔다.
크림에 사는 주민에게 경제적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크림 주민에게 존재감이 사라지고 없어졌다.
결국 국민투표 절차에 들어갔고 97%가 러시아와의 합병을 찬성했다.

지금 북한은 중국과 친하다. 북한은 지정학적 위치이다.
경제권의 80% 이상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은 예전부터 오래동안 북한에 투자하고 있다.
정권이 무너졌을 때에 북한은 어디로 병합하고 싶어할까?
중국에 넘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크림사태 재연일 수 있다.

남북한의 정세는 하나님의 손이 있다.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서는 남북한의 통일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교회가 준비되지 않았다. 세상보다 더하다.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고 먹을 것을 예비해서 보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준비를 기다리고 계신다.

지금 한국은 중국의 정책과는 달리 북한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다.
북한을 적대하고 비방하고 싸우는 대상으로 원수처럼 여긴다.
교회가 그런 흐름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 비참한 현실이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눈에는 눈으로'의 방식은 세상 방식이다.
교회는 북한을 향한 사랑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

탈북자 목회자가 100여명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을 발견하기 어렵다. 민망한 말까지 한다.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은 생계를 위해 취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탈북자 세계에서 복음이 조롱을 당하고 있다.

1) 무엇보다 복음과 거룩의 회복이 시급하다.
2) 탈북자 목회자가 성경적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북한에 보내는 '떼려 잡자' 전단지 풍선 살포는 그들이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는 원수도 사랑하고 먹을 것도 주어야 한다.

한국의 상황은 원수를 사랑하고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명이
구현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그 진리가 심겨질 상황은
반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복음을 복음답게 증거해야 한다.
탈북자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북한의 정권을 악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갈면서 미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교회의 마땅한 도리이다.

삐라를 보내는 풍선 계발자를 만나게 되었다.
전단지 대신에 쌀과 양식을 보내고 있다.
1000개의 풍선을 더 띄웠다. 주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2014년 4월 1일 화요일

모순 해소법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상호 보완적인 해석학적 어울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우리의 사유가 마비될 정도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어법들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은 왜 이것을 명하셨고 왜 선지자의 입술로 그렇게 말하셨고 세상에는 왜 그런 방식으로 계시하신 것일까의 의문에 멀쩡하던 전두엽이 휘감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눈을 돌리면 성경의 모순적인 어법이 얼마나 깊은 진리와 실재에 기초한 것인지를 알고 탄복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에는 감추어진 의지도 있고 교훈적인 의지도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몰라도 오해가 빚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명령들이 나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다 준수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주신 계명들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스스로 어떠한 것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며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약속을 거기에서 발견하게 하며 결국 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요 마침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감사와 영광의 자발적인 무릎을 꿇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명하라"는 말씀을 하신 동일하신 분께서 사람들은 너를 "청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왠만한 지성의 꼭지가 돌아가는 모순적인 어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청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필연에 "명하라"는 순종의 여지를 곁들이는 것은 아마도 세상이 아무리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따라 되어진다 할지라도 불순종과 죄악의 원인은 명령에 대한 자신들의 거역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하나님께 어떠한 책임도 전가할 수 없음을 교훈하기 위함인 듯합니다.

"실체"라는 용어에 대한 단상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참으로 난해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벗겨준 지식의 분량만큼 깨닫을 수밖에 없다. 실체의 개념도 만만치가 않다. 헬라어 "οὐσία"는 단순히 "εἶναι"의 현재 분사형에 기초한 명사로만 보는 것은 지극히 문법적인 발상일 뿐이다. "οὐσία"는 닫혀 있으며 어떠한 술어의 부착도 불허하며 그 자체로 계시되지 않으면 알려질 수 없다는 독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다. 이러한 개념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한국말로 "실체"라는 언어를 사용하면 그 언어의 중국문헌 안에 나타난 용례들을 꼼꼼히 살펴야 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하는데 작업이 너무 방대하고 지난하고 헬라어의 의미에 부응하는 개념적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보증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실체"라는 용어를 쓰면서도 라틴어와 헬라어 원문으로 돌아가 개념의 누수나 왜곡이나 변경을 방지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헬라어 "οὐσία"를 "실체"(substantia)라는 라틴어로 표현하는 것이 라틴 교부들의 눈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나 헬라 교부들의 눈에는 거슬렸다. sub-stantia는 ὑπό-στᾰσις 즉 특정한 위격을 나타내는 말의 라틴어 명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라틴 교부들과 헬라 교부들 사이에는 용어상의 불일치로 인한 교리적 혼돈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아우구스티누스는 essentia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나도 같은 입장이다. 그리고 위격에 대해서는 헬라어의 "위격"에 해당하는 라틴어 명사를 쓰되 persona보다는 칼빈이 사용했던 sub-sistantia가 더 유용한 듯한데 후대에는 persona가 빈번하게 쓰였다.

이는 성경의 표현도 보존하고 라틴과 헬라 교부들 사이의 교리적 혼선도 정리할 수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