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7일 목요일

어리석은 자와의 대화

어리석은 자와 같아지지 않도록 그의 우매함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지 말고, 어리석은 자가 자기의 눈에 지혜롭게 되지 않도록 그의 우매함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잠26:4-5).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이는 우매한 자에게 대답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가 뚜렷하지 않은 탓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말씀이 대답을 하라는 것과 말라는 것 사이의 양자택일 문제를 거론하고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두 가지 모두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대화할 때에는 그가 설정한 논지와 논리의 우매한 프레임이 있습니다. 지혜자는 우리에게 그런 우해함을 따라 대답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우매자와 같아지는 것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단서가 있습니다. 물론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지혜자는 대답을 "하라"는 말에 뒤이어 대답하지 "말라"고도 권합니다. 그러나 우매자가 자신의 기준과 판단으로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로 여기도록 방치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매자와 그의 우매한 프레임이 싫다고 입을 다물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우매자가 소통할 수 없는 고매한 기준을 따라 대답하는 것은 그에게 대답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매자의 논법을 따라 답하되 그 논법에 동화되는 것은  피하면서 우매자가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여기지는 않도록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매자의 기준을 따라 대답하지 않는 것은 그와 같아지지 않을 수 있는 쉬운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무반응이 우매자가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로 여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지혜자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대답하지 않는 것은 지혜일 것입니다.

어떠한 행위 자체가 지혜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매한 자와 소통할 때에 그의 우매함을 따라 대답을 하고 안하고가 지혜인 것은 방향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우매하게 되는 방향과 우매자가 스스로를 지혜자로 여기는 방향을 피하는 반응이 지혜일 것입니다.

대답을 하고 안하고의 목적과 방향은 어리석은 자와 같아지지 않으면서 어리석은 자가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로 여기는 도취에 빠지지는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매함을 멀리하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나 우매자의 자아도취 방지만을 추구하는 반응은 다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추구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어법을 존중함이 이 사안에 대해서도 최고의 지혜인 것 같습니다. 비록 생뚱맞은 비약으로 보이지만 전체를 조망하면 잠언의 키워드인 여호와 경외가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포획하는 비법일 것입니다. 

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영혼을 제어하라

자기의 영혼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무너져 성벽이 없는 성과 같으니라 (잠25:28)

제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괜찮은 영혼의 소유자는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죄악된 본성을 가졌기에 제어될 필요가 있습니다. 제어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지혜자는 성과 사람을 비교하고 영혼의 제어가 없는 것과 성벽이 없는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성벽이 없는 성은 성의 기능을 못합니다. 영혼의 제어가 없는 사람은 사람의 구실을 못합니다. 인간은 선하지 않고 악하기 때문에 제어가 없으면 죄악만 저지를 것입니다. 성벽이 없으면 원수들의 공격에 벌거벗은 것처럼 노출되듯, 영혼의 제어가 없으면 우리의 원수인 죄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성벽이 없으면 성의 모든 것들이 위험에 빠지듯이, 모든 정신적인 활동의 원천인 영혼도 제어되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것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말 것입니다. 감정도 제어되지 않고, 판단도 제어되지 않고, 생각도 제어되지 않고, 언어도 제어되지 않고, 몸도 제어되지 않고, 행실도 제어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발산하여 달성한 성의 탈환보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제어해서 이루어진 마음의 다스림이 낫다는 지혜자의 말에 수긍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 집니다. 영혼의 제어는 사실 자기를 부인하되 피흘리는 수준 그 이상의 싸움을 치루는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영혼을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도록 어렵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혀를 다스리는 것도 심히 어려운데, 보이지 않는 영혼을 다스리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일까요?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비법은 은혜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의 기록처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영혼을 제어함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은혜의 일입니다. 물론 마음을 다스리고 이성을 다스리고 혀를 다스리고 몸을 다스리는 훈련과 연습에 매진해야 하겠으나 은혜가 가득해야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제어를 주님께 맡깁니다. 내 안에 까칠한 성질이 움직일 조짐이 보이면 곧장 주님을 찾습니다.

끝으로 자기의 영혼을 제어해야 한다는 말을 타인에게 적용하고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 못된 습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로 아이들을 권면한 이후에 오늘의 예배를 접었는데 녀석들이 숙연해 졌습니다. 대충은 알아 들은 모양입니다. 영혼이든 마음이든 주께서 지키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일 것입니다...

묵상집 머리말

더 깊은 묵상을 고대하며: 누가 먼저 주께 드려 갚으심을 받겠느냐?

묵상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두렵고 떨리는 일이면서 놀랍고 황홀한 일입니다. 물론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측량을 불허하는 거룩의 무한한 격차 때문에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날마다 순간마다 대면하는 가장 안전하고 지속적인 방식을 주께서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소통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땅에서 어떤 조건을 구비하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주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면서 지성소를 가리던 휘장을 찢으셨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면 무시로 출입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는 십계명만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궤 위에 임하셔서 당신의 백성과 소통을 하셨으며, 나중에는 말씀이신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친히 소통이 길이 되셨으며,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신 이후에는 기록으로 남기신 말씀을 성령의 증거와 믿음의 들음으로 수납하게 함으로써 지금도 소통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록된 말씀의 묵상은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던 지성소의 일입니다.

지성소 출입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시고 위하여 휘장을 찢어주신 모든 하나님의 사람에게 허락된 일입니다. 그런데 이 특권을 누리지 않는 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어쩌면 특권을 특권으로 알지 못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저도 묵상의 깊이에 있어서는 여전히 초보의 어설픈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묵상이 지극히 영광스런 특권이며 지극히 감미로운 선물이며 하루라도 거르면 생존이 위태로운 지극히 기본적인 영혼의 끼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묵상을 했습니다. 주어지는 깨달음의 수효는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과 비례하여 늘어나고 있습니다. 해가 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과의 무수한 반복 속에서도 그 새로운 깨달음의 샘은 좀처럼 마르지를 않습니다. 아침마다 그 신적인 성실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묵상법에 있어서 처음에는 제 자신이 묵상의 그물망이 되어 자아 중심적인 깨달음을 건지고 그것을 축적하는 것이 마냥 좋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묵상의 입맛이 바뀝니다. 묵상의 짬밥이 쌓일수록 교훈을 건지는 주체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깨닫기를 원하시는 진리의 본질에 제가 참여하고 그 진리를 수납하는 식으로 말씀을 대하는 그런 묵상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주님의 주도성, 주님의 우선성, 주님의 기준성, 주님의 방향성, 주님의 방법론, 주님의 최종성이 인정되면 될수록 묵상은 깊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뒤집어서 본다면, 묵상을 방해하는 가장 치명적인 인자는 바로 제 자신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은 클수록, 저의 존재감은 적을수록 묵상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는 더해지는 듯합니다.

묵상이 생각의 세계에 머물면 특유의 높은 휘발성 때문에 삽시간에 망각되고 말 것입니다. 흩어지기 전에 언어의 옷을 입히고 지면에 활자의 닻을 내려야 오래 보존될 수 있습니다. 묵상에서 나온 선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위탁된 것이기에 수령자는 청지기의 책임을 갖습니다. 위탁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을 하다가 진리의 극미한 조각이라 할지라도 망각으로 인해 흩어짐을 면하고자 서둘러 조촐한 블로그에 활자의 체인으로 묶어두려 했습니다. 어느 새 분량이 두툼해 졌습니다. 저의 신학과 삶의 뼈대와 살쩜은 이러한 진리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맞추어진 결과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묵상의 나날 속에서 조금 익힌 어설픈 묵상법과 묵상의 초라한 배설물을 엮어서 책으로 낸다는 결정에 이르기까지는 몇 차례의 망설임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묵상집 출간은 제 사유의 꾸며지지 않은 민낯과 속살을 공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탄탄하고 정갈한 조직과 체계가 구비되기 이전에 한 신학자의 머리와 가슴에 나날이 고인 내용물을 주께서 베푸신 그대로 공유하는 것도 무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묵상집을 출간하게 된 것은 세움북스 강인구 대표님의 적극적인 관심과 배려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묵상은 저를 둘러싼 인간문맥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가족들과 동료들과 친구들과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의 사랑과 어울림이 없었다면 묵상의 내용들이 산출되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묵상의 궁극적인 주체요 대상이요 목적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Soli Deo Gloria!

2014년 끝자락에 선 양평에서
한병수

2014년 11월 21일 금요일

준비되는 것이 관건이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 하느니라 (잠20:21)

오늘은 단계별 질문을 던지며 아이들이 말씀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는 자가학습 메시지를 시도해 봤습니다. 여기서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탐욕에 기초한 행위로 말미암아 이른 시기에 취득된 유산'을 뜻합니다. 본문은 그런 유산이 결국에는 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른 시기에 취득된 유산은 왜 복이 되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이른 시기'라는 말에서 유산의 취득자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유추가 가능하고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어떠한 것이 주어져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복이 되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복은 주어지는 유산의 내용에도 의존하고 있지만 동시에 수납자의 준비에도 의존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유산의 내용보다 그것을 수납하는 자가 유산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올바르게 대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복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유산을 복으로 알고 받아들일 준비보다 유산의 분량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유산은 준비된 만큼 주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산에 의존하고 되고 유산에 휘둘리게 되고 결국 급기야 유산의 조정을 받습니다. 이것은 복이 아닙니다.

복은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산이 주어질 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단적인 복으로 간주할 줄 모르면 그 유산에 만족하게 되고 소망을 걸고 갈망하게 되고 매달리는 수순이 이어질 것입니다. 복은 유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받을 준비의 부재로 인해 소멸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향해 말씀의 이러한 의미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답변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다려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복은 복의 근원이고 최고의 복 자체이신 하나님과 무관하면 더 이상 복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려주길 원하시는 유산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나님의 유산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천상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겐 땅에서의 유한하고 일시적인 것에 집착의 코를 박고 탐욕의 군침을 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른 시기'의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유산을 무한하고 영원하고 천상적인 복인 줄 알고 받아들일 준비에 만전을 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된 때가 상속의 적기인 것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유산은 늘 준비되어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미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고귀한 생명으로 값주고 사신 바 된 우리는 어떤 자이며, 하나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이며, 우리의 존재와 삶은 어느 방향으로 가며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최상의 준비인 듯합니다.

미비된 상태로 급하게 취득된 무엇에 현혹되지 않고 늘 자신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로 준비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들이 된다면 정말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2014년 11월 19일 수요일

분노의 지나감

사람의 슬기는 분노를 유보하고
공격을 지나가는 것은 자기에게 영광이 되느니라 (잠19:11)

오늘은 가정예배 시간에 자식들과 분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이 너에게 있지만 너는 그것을 다스리라 했습니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죄가 그 빈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선행과 죄는 그렇게 등짝을 맞대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분노에 민첩하지 않습니다. 분노에 압도되는 것은 죄를 다스리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노를 유보하는 자에게는 죄의 소원이 머물 빈자리가 없습니다. 분노를 유보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어떤 유형의 죄도 다스릴 수 있는 자입니다. 분노의 유보는 선한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하고 비방하고 헐뜯는 말과 행동과 상황에 우리는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지나갈 수 있다면 슬기로운 자입니다. 그에게는 영광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든 행위든 공격을 그냥 지나가지 않고 보복을 가하면 영광이 그냥 지나갈 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은 땅에서 챙긴 유익에서 비롯되는 지상적인 보답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창조하고 백성으로 택한 자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하신 주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신 그런 영광과 유사한 것입니다.

아이들을 향해 준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공격을 당하는 상황은 영광이 주어지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지나갈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 사람의 능으로는 안되기에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베드로의 칼을 책망하신 것처럼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습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분노를 제거하는 방법은 지나가는 것이며 이는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으로 가능한 일임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되시면 참 좋겠습니다~~

기쁨이 실력이다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 퍼뜨리는 것을 기뻐한다 (잠18:2)

가정예배 시간에 이 말씀으로 아이들과 3가지의 교훈을 나누었다. 첫째 자신의 의사 퍼뜨리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 무엇을 기뻐하고 있느냐가 나를 진단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셋째 기쁨의 체질은 인간이 스스로 변경하지 못하므로 명철을 기뻐하는 체질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간구는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까지다.

내가 기뻐한다 할지라도 행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들은 자제해야 한다. 행함으로 인해 자신과 타인에게 피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기뻐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보증이 없다. 만약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면 안심해도 되겠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다 자제의 대상이다. 내가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내가 누구이며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확인된다. 나의 지식,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소유, 나의 유익, 나의 논리만 사방으로 발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무진장 기뻐한다. 그의 생은 그 기쁨을 추구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가 무엇을 기뻐하고 있느냐가 실력이다. 신령한 것을 기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 기쁨이다. 일평생 기쁨으로 하나님을 지향한다. 명철을 기뻐하는 자는 지식과 지혜가 즐거움 중에 축적된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과 지혜의 습득이 고역이다. 글쓰기를 기뻐하는 자는 책과 논문을 생산하는 일이 고단하지 않다. 소통이 기쁨인 사람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에너지의 고갈이나 정신적 탈진으로 이어지지 아니한다. 사람들을 만날수록 기쁨이 증폭된다. 물론 분기점은 있다. 꿀도 족하리만치 먹어야 하듯이.

부모는 자녀들의 그릇된 행실도 교정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녀들이 어떤 것을 기뻐하는 것에 대해 부모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호가 교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녀들과 싸우는 건 감정만 상하게 하고 갈등의 골만 깊어지게 한다. 기쁨이 관건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은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로 하루를 시작하자.

2014년 11월 18일 화요일

예정론 탐구

예정은 비록 피조물을 대상으로 삼지만 시공간이 마련되기 이전의 영원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이어서 참으로 신비롭고 난해하다. 이렇게 신적인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한하고 부패한 지성의 소유자인 인간이 무흠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칼빈의 경계는 과장이 아니겠다.

하나님의 예정을 인간의 헛된 호기심과 상상으로 접근하면,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고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미로로 진입하는 것이라는 그의 설명도 참으로 진솔하다. 예정론 탐구는 하나님의 신적인 지혜의 거룩한 심연으로 들어가는 일이기에 최고의 적정과 절도가 요구된다.

주께서 깊이 감추어 두시기로 정하신 사안을 인간이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거나 영원하고 숭고한 지혜를 인간이 억지로 파헤치려 하는 것은 결단코 올바르지 않다. 사안의 정도가 엄중하고 고결한 그 만큼의 깊은 겸손과 경건으로 겸비하지 않고 무작정 경박하게 뛰어드는 인간의 고삐풀린 기질을 우리는 철저히 거절해야 한다. 

2014년 11월 17일 월요일

선한 싸움을 싸우라

삶은 싸움이다. 그러나 싸움에도 차원과 격이라는 게 있다.

1. 건강 싸움이다. 오늘날 건강보다 치열한 싸움의 대상은 없다. 그러나 시간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이 누리는 승리감은 시한부다. 시한부 집중력만 투입하면 된다. 그 이상은 우상이다.

2. 재정 싸움이다. 먹거리의 확보는 모든 생물의 본능이다. 생계의 유지는 삶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단연 일순위다. 그래서 모두들 치열하게 일하고 치열하게 번다.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위장의 풍만에 모든 것을 걸기에는 인생이 너무나도 아깝다. 부하지도 않고 빈하지도 않은 정도로만 덤비면 되는 싸움이다.

3. 시간 싸움이다. 촌음을 쪼개는 건 현대인의 기본이다. 이유는 24시간의 제한적인 시간에 인간의 욕망을 다 담아낼 수 없어서다. 시간은 늘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관리 방식은 욕망의 질과 양을 조절하는 수밖에. 욕망의 단순화와 선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4. 스펙 싸움이다. 이력서에 한 줄을 넣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런 부산한 움직임이 고작 한 줄이다. 우리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어쩌면 단 한 문장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스펙의 두께가 몸값을 좌우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스펙이 주님의 호주머니 안의 저울추에 달리우면, 무게값이 달라진다. 땅에서의 스펙은 고작 사람들을 설득하는 수준이다. 적당히만 싸워도 된다.

5. 진리 싸움이다. 옳고그름 문제를 말한다. 이 싸움은 대단히 치열하다. 여기에서 지면 회복의 다른 대체물이 없을 정도로 사활을 거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그러나 제대로 안다고 할지라도 땅에 계시된 진리의 분량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 부분이며 게다가 명확하지 않고 희미하게 아는 수준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심판이 내려지는 진리의 싸움은 땅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땅에서는 진리의 적정선이 있다. 계시가 기준이다. 더 알려고도 말고 덜 알아서도 안되는 기준 말이다.

6. 성품 싸움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싸움의 최고급 차원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 발휘되는 사람이 되고 삶을 사느냐의 싸움이다. 삶은 언제나 내가 기준이 되어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이 때, 우리는 대체로 주변 요인들을 바꾸는 싸움에 몰입한다. 아니다. 싸움의 대상은 성품이다. 성품이 바뀌면 기쁨과 슬픔과 분노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2014년 11월 14일 금요일

미련의 정체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잠14:9)

자신의 미련함을 진단하는 척도는 죄를 심상히 여기느냐 아니냐에 있다. 죄는 죄의 대상인 하나님과 죄의 주체인 인간이 맞물린 용어다. 죄를 심상히 여긴다는 것은 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죄는 본질상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의미하며, 경중을 무론하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겨냥한다. 사람이나 다른 피조물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더라도 궁극적인 면에서는 하나님과 관계한다. 죄를 심상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다는 의미이다.

죄는 사실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거처도 없고 흔적도 없다. 그런 대상을 심상히 여기지 않으려면 죄 자체와의 소극적인 씨름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식이 보다 적극적인 상책이다.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죄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죄와의 지속적인 씨름보다 하나님 경외와 하루종일 뒹구는 씨름이 정신적인 건강에도 유익하다. 여호와 경외가 어떤 곳에서는 "주의 인자를 바라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주의 인자를 자신의 생명보다 바라는 것이 여호와 경외이며 죄를 미워하는 것인 셈이다.

사람의 미련은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어도" 벗겨지지 않는다고 지혜자는 판단한다. 이는 죄를 심상히 여기는 자의 습성이 좀처럼 제거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여겨진다. 이런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그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인자를 갈망하는 경건의 지속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이 단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으로 굳어지기까지...

2014년 11월 12일 수요일

하나님께 반응하는 다윗

하나님께 반응하는 다윗 (삼하16:5-13)

상황: 다윗은 왕이지만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 쫓기는 신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 가문의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다윗과 그의 모든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주저했다.

시므이 저주의 내용: 1) 다윗은 사울 및 그의 족속들을 피흘리게 한 자다, 2) 벨리알의 사람이다, 3) 하나님이 압살롬의 손에 왕국을 넘기셨다. 즉 다윗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화를 자초한 것이라는 진단이다.

시므이의 변화(삼하19:19-20): 전에는 시므이가 다윗을 ‘피 흘린 자, 벨리알의 사람’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내 주여, 내 주 왕께서, 내 주 왕’이라 부르고, 본인을 ‘종, 왕의 종’으로 지칭한다.

시므이의 청원: 1) 자신에게 죄를 주지 말라; 2) 자신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말며 마음에 두지 말라; 3) 자신의 범죄한 것을 인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이스라엘(요셉의 온 족속) 중 가장 먼저 내려와 다윗 왕을 영접했다.

분석 1: 다윗은 사울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와 그의 족속의 피를 흘리게 하지도 않았다. 죽여도 마땅한 원수였고 죽일 기회도 있었으나 옷자락에 칼만 살짝 대었으며 그런 행위에 대해서도 심히 괴로운 마음으로 회개해야 했던 인물이 다윗이다. 이처럼 시므이의 저주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

분석2: 다윗이 돌던짐을 받았다. 과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며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물리쳤던 용맹한 믿음의 소년이요 영웅의 모습을 보였던 것(삼상 17:43∼49)과는 극적으로 대조된다. 만감이 교차했을 듯하다. 원수를 넘어뜨린 돌이 이제는 저주와 조롱의 돌맹이가 되어 자신에게 날아왔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장대한 적장을 무찌르던 영웅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드는 자리에서 폐족의 찌끄러기 인물에 의해 터무니 없는 조롱을 당하고 있다. 참으로 깊은 회개의 상황이다.

분석 3: 시므이는 다윗을 벨리알의 사람이라 하였다. 한글 성경에는 “사악한 자”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단순한 사악함을 넘어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란 뉘앙스가 짙게 풍기는 단어이다. 시므이는 기분이 몹시도 나쁠 언어만 골라서 다윗을 저주했다. 고후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벨리알은 그리스도 예수와 나란히 대조되는 존재이다.

분석4: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칼로부터 도망치는 신세에 처하였다. 그러나 그 원인은 사울의 피를 흘려서가 아니다. 시므이의 진단은 엉터리다.

충복들의 반응: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 하였다. 아비새의 눈에 시므이는 “죽은 개”였다. 아비새의 개인적인 견해만은 아니었다.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들”을 언급하며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묶어서 아비새의 이해와 처신을 지적했다.

다윗의 반응: 1)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다. 2)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3)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감히 시므이의 저주에 대해 힐문할 자가 없다. 4) 원통한 상황인 것을 다윗도 안다. 하나님이 감찰하고 계시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시므이의 저주를 오히려 하나님의 선이 베풀어질 기회라고 생각한다. 5) 19장 22절: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사탄)가 되느냐?

의문: 어떻게 “죽은 개”로 간주되는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해하고, 충복들의 충성스런 반응은 “사탄”의 행위로 이해될 수 있는가? 다윗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하나님과 사탄이란 먼 원인들을 사려했다. 하나님 중심적인 이해와 처신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것과 결부되어 있다.

교훈: 1) 우리는 삶 속에서 너무도 가까운 원인들을 주목하고 거기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심지어 원수의 입술에서 저주가 쏟아져도 하나님의 명령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2) 이 땅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임을 인정해야 한다. 참으로 믿음의 선배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반응하며 살아갔다. 욥의 삶을 보면 그의 엄청난 고난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의 개입이 목격된다: 하나님, 사탄, 갈대아 사람, 대풍, 여호와의 불. 그러나 욥은 이 모든 사태를 이해할 때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언사로 정리했다. 요셉도 참으로 끔찍한 형제들의 배신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가 애굽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허락 없이는 수족도 놀리지 못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어도 형들에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말로 사태의 전모를 이해하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아버지의 원대로 되어지는 일로 여기셨고 죽음의 쓴 잔을 자원하여 받으셨다. 

고난의 방식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8:17)

어떠한 종류의 고난이든,
고난은
깊은 세계로의 초청이다.

그런 고난의 초청을 거부하면
경박에의 안주는
불가피한 결과겠다.

고난을 만나거든
급한 해결책 추구에
허덕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단순한 생각으로 내려진
깔끔한 결론의 유혹도
경계해야 한다.

고난은 고통을 수반한다.
깊은 진리는
그 고통의 틈새를 파고든다.

그것은 잊을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도록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질서를 다 아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존중하며 끝까지 인내하자. 

2014년 11월 7일 금요일

무해석 묵상의 묘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해석에 관여하는 몸의 기능들이 급하게 작동한다. 묵상은 해석을 지향한다. 이의가 없다. 그러나 해석 일변도의 묵상은 다분히 지성적인 요소의 과장일 수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어떤 날에는 성경을 묵상하며 해석 모드를 해제하는 경우가 있다. 묵상하며 말씀의 있는 그대로에 인간의 어떠한 생각도 섞지 않으려고 그냥 말씀 그대로가 남도록 하는 경우이다. 이는 무해석 묵상론을 두둔하려 함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의 우를 범하지 않고 저자의 본래적인 의도에 이르려는 엄격한 자기부인 독법의 추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미에 있어서나 가치에 있어서나 권위에 있어서나 인간의 어떠한 가감도 불허하는 최적과 최고의 계시이다. 이 땅에서 주어질 수 있는 영혼의 가장 좋은 양식이다. 양념을 치고 기교를 부리고 요리를 해서 더 좋아지는 무엇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재료가 아니다. 그 자체로 최종적인 요리이다. 이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먹는 자가 지혜로운 이유이다.

꼼꼼한 논리적 분석력과 깔끔한 정리력과 화려한 수사력이 없더라도 묵상에는 큰 지장이 없다. 물론 말씀을 맡은 교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방위적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묵상이 누군가를 가르칠 꺼리 마련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선명한 거울에 비추고 성찰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이끌림을 받는 것이라면 묵상은 모두에게 열린 광장이다.

그러나 검증된 방법론의 동원 없이도 능숙하게 묵상의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할 실력자는 오늘날 희귀하다. 몽학선생 정도의 도우미가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묵상의 깊은 세계를 출입하는 분들의 노하우는 유용하다. 그러나 외부에서 짜준 틀 속에서의 묵상은 묵상의 최종적인 경지는 아니기에 형언할 수 없는 독생자의 영광이 읽어질 때까지 진전해야 한다.

오늘은 해석모드 해제의 맛이 유난히도 달콤했다. 말씀으로 만나는 하나님 자신이 묵상의 백미라는 결론으로 하루를 연다...

2014년 11월 4일 화요일

깊은 신앙의 테스트와 초청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17:1)

자녀를 주겠다는 약속은 이미 24년 전에 주어졌다. 그러나 자녀의 소식은 없고 하나님은 그저 자신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밝히신다. 약속도 지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전능은 과연 어떤 속성일까? 왕주먹 같은 막강한 에너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휘감았을 법한 상황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사람들 앞에서의 완전이 아니라 의와 진리와 거룩에 있어서 제한이 없으신 전능의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이다.

믿음의 조상도 심기가 많이 뒤틀렸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는 말은 이미 24년간 귓가를 맴돌던 상투적인 문구였다. 아브람의 아내로 하여금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라는 공약도 24년째 쳇바퀴만 맴도는 문구였다. 이에 믿음의 조상은 하갈을 통해 낳은 서자 이스마엘 삶이라도 형통하면 좋겠다며 말뿐인 하나님의 24년째 출산공약 불이행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중요한 믿음의 은밀한 테스트요 깊은 신앙에의 초청이다. 믿음의 조상에게 주어진 믿음의 테스트는 자신에게 어떠한 지각이나 경험이나 구체적인 선물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오로지 하나님 자신 때문에 행하여 완전함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테스트다. 만만치가 않다. 더군다나 아브람은 심기도 불편하고 마음의 서운함도 극에 달한 시점이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어떤 차원까지 이르러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초청이다. 땅의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근거를 둔 신앙에의 초청!

태가 끊어지고 자녀에 대한 소망의 씨가 완전히 말라버린 상황 속에서도 한 아이의 아비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전능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땅의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이나 사태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비록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수십년째 성취되지 않고 성취에 대한 기대감의 기미도 종적을 감춘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처신에는 흠이 없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도록 믿음의 조상을 부르셨다. 이는 본문이 신앙의 깊은 테스트요 깊은 신앙에의 초청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삭이 주어지고 자신의 신앙을 뒤따르는 무리들이 중다하여 바닷가 모래의 수효보다 많고 하늘의 별들보다 더 헤아릴 수 없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믿음은 여전히 땅에서의 현상에 의존한 땅의 신앙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루신 일들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루어진 일의 유무가 우리에게 신앙의 근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은 경험 의존적인 신앙, 논리 의존적인 신앙, 이해 의존적인 신앙, 환경 의존적인 신앙이 아니라 계시 의존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되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보다 더 강하고 향기로운 신앙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테스트와 초청이 때때로 주어진다. 그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전능하신 분이시며 우리는 그런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삶의 여정을 주님 오실 그때까지 고수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속성은 땅의 일로 인해 좌우되지 않는다. 혹 하나님의 속성과 상치되는 일이 땅의 현상으로 펼쳐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여 그 현상을 해석함이 정당하다. 이는 인식의 등뼈를 통째로 교체하는 일이기에 믿음이 없는 분들에겐 상식의 숨통이 막히는 일이겠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속성이 땅의 현상에 언제든지 선행한다. 그걸 고수함이 교회와 세상 모두에게 유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