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6일 토요일

창조는 계시다

창조 자체가 계시의 행위요 이후에 뒤따르는 모든 계시의 시작과 원리라는 입장에 근거하여 바빙크는 동물들도 인간의 도덕과 부도덕을 상징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개는 충성의 상을, 거미는 산업의 상을, 사자는 용기의 상을, 양은 양순의 상을, 비둘기는 순결의 상, 곧 하나님을 갈구하는 영혼의 마음을 그려주고, 여우는 계교의 상을, 벌레는 빈곤의 상을, 호랑이는 잔인의 상을, 돼지는 비열의 상을, 뱀은 사악한 속임의 상을 그려주고, 인간의 형상과 가장 가까운 원숭이는 위로부터 온 영이 없는 육체적 기관의 독특성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원숭이를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풍자를 직관하게 된단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근원이 성경 밖에서 과학적 추론과 근거를 통해서는 증명될 수 없으며 인간 본연의 고유한 가치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세상의 사색이 지쳤을 때 겨우 내리는 결론은, 그따위 근원은 없으며 원래 세상이 영원하며 진화 혹은 변화의 꼬리를 물고 또 물어서 오늘날의 세상이 되었다는 맹랑한 공상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태양이고 모든 피조물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지나가는 섬광일 뿐이라는 사유는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주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일인치도 개입할 수 없는 전적인 은혜다. 그런 하나님을 아는데도, 그를 경외함과 감사함과 순종함도 없다면 그 불경함이 얼마나 큰 것일까? 혹 진멸되지 않고 있다면 그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기 때문이란 사실만 증거하고 있다고 봄이 옳다. 창조가 하나님의 계시인 이상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예외일 수 없는 진리라 하겠다.

2012년 6월 15일 금요일

삼손의 교훈

오늘 새벽에는 삼손을 재해석한 설교를 들었다.

거두절미...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구한다는 거창한 간판을 걸고서도
뒤에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분출할 수 있고
가장 합당하게 널리 승인된 수단들과 방법들도
동일한 욕망이 출고되는 방편일 수 있다는 메시지가
전두엽 안에 잔뜩 꼬여있는 간사한 이성에
계엄령을 발효하는 듯하였다.

이른 아침에 테니스 벽치기로 흘린 비지땀과 더불어
내 마음과 머리에 누적된 욕망의 찌꺼기도 밖으로 떠밀었다.
허나 나 자신이 분류한 욕망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은
보다 은밀하게 바닦에 저자세로 납짝 엎드린 우두머리 욕망은
감지될 리도 만무하고 제거될 리는 전무한 일이겠다.

사람의 깨달음과 결단은 수명이 짧고 쉬 만족한다.
돌이키고 이룬 것도 없는데 정체 모를 포만감이 급습하여
실질적인 돌이킴과 성화의 신경을 무디게 만들기 때문이다.
은혜 앞에 엎드리는 것 외에 다른 묘책은 없어 보인다.
이렇게 인간의 구린 내면에 정직하면 할수록
은혜의 효용과 절박성은 고개를 든다. 이게 인생이다...

2012년 6월 14일 목요일

십자가의 한 의미

사람은 간사하다.
피를 보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대중적인 목적이면 그것도 헛수고다.
나 자신에게 명시적인 유익과 직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감동적인 희생 스토리도
삽시간에 사라지는 물거품일 뿐이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인간의 간악함을 극도로 보이면서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은 한이 없으심을 드러낸다.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합당한 복음증거

시편 50편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하나님이 악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나님은 입술이 악하고 혀에 궤사가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법도와 언약이 증거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복음 증거하는 일에 전무하기 전 반드시 물어야 할 물음이다.
내 입술은 여호와의 언약 증거에 합당한지 말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태도와 올바른 행실로 준비된 자에게
주님은 당신의 구원을 보이시고 증인의 소명을 주신다.
복음증거 수단은 입술이 아니라 인품과 삶이라는 얘기도 되겠다.

오하이오 찍고

오하이오 찍고 왔다. 온 가족이 함께...
지난 주에 휘청거린 남편과 아버지를
홀로 보내지 못해 내린 가족들의 애틋한 결정이다.

그래서 아내와 아들이 듣는 설교가 되고 말았다.
나의 부족함과 속사정을 낱낱이 아는 식구의 귀에
복음의 정직한 증거로 들렸을지... 궁금하다.

설교단에 설 때마다 주님은 언제나 듣고 계시겠지.
가족보다 마음의 속살까지 더 은밀히 아시는 주님 앞에서
복음을 정직하게 증거하는 설교자가 될 수 있을까?
오가는 6시간 운전보다 더 힘겨운 물음을 가지고 온 셈이다.

설교자의 길은 만만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너무도 지장한 표정으로 다가온 하루였다. 

2012년 6월 10일 일요일

톨리도에 간다

오늘은 톨리도에 가 설교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 설교의 주제다.
3시간 거리다. 왕복 6시간을 운전해야 한다.
지난 주에 쓰러졌다. 주께서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아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함께 가잔다.
아이들도 당연히 함께 움직여야 하는 여행이 되어 버렸다.
먼 곳에 가서 주님을 예배하고 돌아오는 이 시간이
아이들에게 예배의 기쁨과 감격을 선사하면 좋겠다.

2012년 6월 9일 토요일

다윗이 수상해

아들도 아침마다 시편과 잠언을 묵상한다.
뭐 강요된 QT에 가깝고 자발적 묵상이라 말하기는 곤란하다.
가끔씩 읽은 소감이나 배운 교훈이 무엇인지 물었다.

곧장 하나님의 맘에 쏙 들었다는 다윗에 대한 의구심을 쏟는다.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이기적인 인물로 비쳤단다.
원수로 낭패와 수치를 당하게 해 달라는 보복의 기도가 많아서다.
하나님의 기쁨이 자기 원수의 망함에 있다는 묘한 논리도 펼친다.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는 슬픔에 빠졌을 때에는 하나님께
'어찌하여 자신을 잊었냐'며 항변의 격한 언사까지 내뱉는다. 
패배할 경우에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되
주께서 자신을 버려 욕을 당하게 하였고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원수에게 넘겼다는 
책임전가 식의 어설픈 이유까지 운운한다.

아들의 나름 '정당한' 의구심 해소가 필요했다.
시편 전체에서 뛰고 있는 시인들의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듣고
다윗의 경우에도 그가 내뱉은 격한 시어들의 얕은 지표가 아니라
저변에 깔린 다윗의 사랑과 신뢰와 의존과 기쁨과 소망이란 
주님과의 깊고 견고한 관계성을 더듬어 보라는 생각이
목젖에 걸려 나오지를 않았다.

이는 간단하고 즉각적인 정답 제시로 
묵상의 땀과 고민의 기회를 박탈하고 싶지 않아서다.
밖에서 주입된 교훈의 짧은 수명을 경험한 바 있었고
교훈의 그런 취득도 아들의 것이 아니라
아비가 걸어준 장식용에 불과한 것일 테니까...

우리를 주야로 모든 만물로 최고의 교훈으로 먹이시는
주님은 어떠한 양육의 고민을 하고 계실까? 그거이 궁금하다.

2012년 6월 8일 금요일

시편 39편 허리에 등장하는 문구

사랑하는 주님,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며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 뿐입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며
썩어 없어지는 일에 분주하고 요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만 있습니다.

꽃가루가 무서버

미시건은 꽃가루 문제가 심각하다.
엊그제는 바깥출입 경계령을 내려야 했다.
10년이면 각종 알레르기 질병을 하나 정도는 챙긴단다.

유학생활 연수가 어느새
알레르기 발병기에 접어들 정도로 길어졌다.
꽃가루 알레르기 걸리기 이전에 정리해야 할텐데...

2012년 6월 7일 목요일

식기도

시편 33편이 향기롭다.

여호와는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신다.
반면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어진 탓이다.

논리가 간단하다.
그런데 세상을 만드신 저자만의 위엄이 배여 있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조성하고 보존하되
지금도 살아계신 창조자가 그렇게 하실 거라는 의지의 표명이며
형설을 불허하는 모든 신비까지 유일하게 벗기는
만물의 모든 이치를 지탱하는 신적인 진리이며
영원하신 분의 언표이기 때문에 시간에 매이지 않는 예언이다.

이런 말씀은 내 영혼의 식도를 출입하고
의식의 모든 기관들이 에너지를 흡수하는 양식이기에
성경을 펼칠 때마다 주님께 식기도를 드림이 마땅하다.

2012년 6월 6일 수요일

성경이 좋다

성경이 좋다.

인간의 글은 의미의 바닥이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언어의 저자가 하나님인 이상 그 의미의 분량은 무한하다. 타자화가 불가피한 인간의 언어 특성조차 속박하지 못하는 성경의 언어는 영원토록 하나님이 주어로 계신 살아있는 계시이다. 성경의 언어는 그 의미가 독자에게 맡겨지지 않았다. 계시하신 분도 그분이요, 그것을 해석하는 것도 그분의 조명이요, 해석된 의미의 성취도 그분의 일이요, 그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성경은 영원히 계신 그분이 모든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기록이라 하겠다. 특정한 인물이나 계급이나 환경이나 시대적 풍조에 얽매일 수 없는 영원하고 무한하고 불변하신 하나님의 언어이다. 

아무리 탁월한 해석의 열반에 이르러도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 주어로 남는 기록의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원문을 읽고 분석하는 경험의 축적이 우리가 해석의 주체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인간의 자신을 향하는 경향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자체의 해석자요(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는 방식(collatio locorum) 속에서 성령의 조명(illuminatio spiritus sancti)으로 자체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는 종교개혁 해석학의 기본을 망각하는 것은 의식의 감시망도 은밀하게 허문 인간의 죄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신비롭고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없을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선물이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신비보다 그것을 언어로 표상하고 설명하되 하나님이 궁극적인 저자요 주어로 되셔서 창조의 가치와 의미와 목적과 방향과 본질을 밝히는 성경이 나에게는 더 신비롭고 큰 선물로 보인다.

결혼 기념일

결혼 13주년이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이마에 패인 주름이
그 세월의 순탄치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무지하고 어리석고 가벼운 남편을
믿고 인내하며 지금까지 동행해 준 아내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3명의 아이들은 전통의 화살과 같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건강하고 상식이 통하는 아이들로 자란 듯하다.
물론 나의 부끄럽고 연약한 부분을 거침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 기능도 제대로 하지만
무엇보다 주님께서 가정을 붙들어 주셨다는 증거이다.

공부만 하며 살아가는 남편과 아비를
불평도 없이 더불어 살아온 아내와 아이들,
오늘은 이들에게 감사하는 하루이고 싶다.

2012년 6월 5일 화요일

주님 걸어가신 길

"나는 쏟아진 물처럼 기운이 빠져 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 졌습니다.
나의 마음은 촛농처럼 녹아내려 절망의 늪지로 합류하고
나의 입은 옹기 조각처럼 말랐으며
나의 혀는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님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로 매장되게 하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가 나를 에워싸고 내 수족을 묶었으며
뼈마디는 하나하나 다 셀 수 있을 만큼
앙상하고 하얀 이빨을 드러냈고
이러한 나를 원수들도 보고 즐거워 하나이다.
나의 겉옷을 원수들이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집니다."

이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술을 빌어 묘사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의 시적인 표현이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삶의 내용이다.
주님을 알고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정작 주님이 가신 좁은 길은 요리조리 피하고
그 길과 무관한 대로(大路) 걷기를 좋아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프랑스 철학은 통합이다.

프랑스 철학의 특징은 이정우 박사의 지적처럼
'언제나 자신의 철학을 사회 전체와 문화 전체의 장 속에'서 전개하되
과학에서 유리된 관념의 늪으로 빠지지 않으면서
현실 문제와의 집요한 결합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맥을 같이 한다.

과학적 기초와 사회적 실천을 아우르는  프랑스 철학은
'과학사의 철학적 이해'로 정의되는 인식론과
구조주의 이름으로 압축되는 프랑스의 인간과학 전반과
현대의 문화 및 예술에 대한 소양을 겸하지 않고서는
그 세계의 정수를 결코 만나지 못한다.

'과학, 철학, 문학이 한 덩어리로 용해되어 있는 프랑스 철학'에 대한
선이해 없이는 어떠한 프랑스 철학자도 소화하기 힘들다.
작고하신 박홍규 교수님이 강론하신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수학과 물리학과 생물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학자들과 더불어
번역해야 할 정도로 제학문적 통합의 산물이다.

프랑스 철학에 지나치게 중독되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지혜라 하겠다...

안철수 원장의 부산대 강연

1. 8년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
2. 최근 50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었다. 최빈극 당시 산업화로 가난을 해결하고, 자유에 대한 갈구로 민주화를 추구했다. 이런 것이 선진국은 200년이 걸렸으나 우리는 50년 정도가 소요된 결과이다. 대단한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의 심정과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는 통계수치, 두 가지다. 자살율과 출산율, 자살율은 우리가 지금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준다. OECD국가 중에서 자살율은 1위이다. 매일 40여명 정도가 자살하고 있다. 1300여명 정도가 자살하고 있다. 각박한 현실을 대변한다. 출산율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내가 낳은 아이가 미래에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가 출산율을 좌우한다. 미래를 전망하는 지표 되겠다.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자살율이 가장 높고 출산율이 이렇게 낮은 상황, 지금 가장 불안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장 암단한 사회가 한국이란 의미이다.

3. 사회의 양극화, 계층간의 이동단절, 개천에서 용이 안나는 현상, 청년실업, 비정규직, 갚을 능력이 줄어드는 가계부채 등이 문제이다.

4. 10대는 대학입시, 20대는 대학 등록금 부담과 취업문제, 30-40대는 자녀의 사교육비 및 집값, 4-50대는 자녀들의 취업걱정 및 노후문제, 60대 이상은 경제와 건강문제. 특정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이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게 우리의 상황이다.

5. 어떤 사회가 되면 좋겠는가? 지금과 반대인 상황을 원한다. 행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이다. 모든 사람의 바램이다. 어떤 것들을 해야 하는가?

6. 세 가지의 키워드: 복지, 정의, 평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이다.

7. 복지: 복지는 단순히 분배와 소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일자리와 복지가 긴밀하게 연결되고 선순환이 되는 넓은 의미의 복지이다. 50년간, 산업화를 통해 가난을 해결하고 민주화를 통해 자유를 얻었다. 가난과 자유가 해결된 경우, 이제 우리에겐 불안이 있다. 복지의 역할은 미래 불안의 해소이다. 주거, 건강, 보육, 교육, 일자리, 가계부채, 노후...한 가지도 빠짐없이 불안하다. 중산층의 경우도, 가족 중 하나가 중병에 걸리면 한 순간에 하층으로 전락한다. 불안하다. 개인이 불안하다 보니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가 속한 집단만 생각하는 의기주의 만연한다. 사회 공동체 의식의 급락이 이어진다. 정부가 돕지 못하여 개인이 생존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이기주의 동원된 거다. 안전한 선택만 하고 조그마한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도를 않하려고 한다. 지식정보 산업, 10번 시도해서 1번 성공하면 이전의 실패를 갚고도 남음이 없는 분야인데, 아무도 뒷수습이 보장되지 않으면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8. 정의: 세 가지가 필수다.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 경쟁할 때에 특권과 반칙이 없는 것, 결승전에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질 때 패자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1)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출발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도만 보면 중학교까지 의무교육/평준화를 시행한다. 제도상으로 보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좋은 예) 말콤 글레드웰, 메튜효과, 카나다에 가보면 아이스하키를 좋아한다. 모든 부모들의 바램은 그 종목의 국가대표 되는거다. 어릴 때부터 훈련한다. 유치원생 시절에 선수선발 대회한다. 가장 잘하는 아이에게 훈련의 기회를 준다. 전국 학생들이 경쟁한다. 초중고대, 이렇게 진행된다. 국가대표 되는 아이들은 부모와 지역과 빈부와 인종에 상관 없이 정말 실력있는 사람들만 선발된다. 공평한가? 문제가 있다. 1-3월생이 많다. 10-12월생이 적다. 선수선발, 1월생부터...1월과 12월생 사이에는 비록 나이는 같지만 유치원생 때 큰 차이가 난다. 1월생이 재능이 떨어져도 12월생이 재능이 뛰어나도 1월생이 경쟁하면 이긴다. 1년 뒤에는 재능이 있는 12월생이 아무리 노력해도 재기할 가능성이 사라진다. 처음에 조그마한 불평등 제도 때문에 어떤 아이가 특권을 받으면 끝까지 간다. 성경말씀, 마태복음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섬짓한 말이다. 이것을 매튜효과다. 우리 주변에 많이 발견되는 현상이다. 지방 명문대의 1등이 서울소재 대학의 꼴찌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한국사회, 이런 현상을 대변한다. 좋은 학교들이 특정한 곳으로 옮겨가고 특정한 지역에 사는 아이들과 특혜를 받는다면, 사교육을 시키며 다른 노후대비 포기하고 달려갈 수밖에 없어진다. 20대는 실패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수가 있을 뿐이다. 20대에 도전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20대에 도전할 수 있는 신분변화 방식은 고시 뿐이라고 한다. 대학입시 뿐만이 아니라 진로를 정할 때에도 출발선이 같아야 정의로운 사회이다. 어느 지역이냐, 어떤 집안이냐, 이것이 학교와 직장을 좌우하는 사회는 출발선에서 이미 불공평이 시작되는 사회이다. 절망적인 사회이다. 특정한 대상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본다. 내 아이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옆집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거다.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방향으로 노력은 해야 한다.

2) 과정의 공정함. 예) 골목상인/재벌. 불필요한 규제가 철패되는 건 좋지만, 감시기능 강화해야 한다. 야구경기 보라. 규칙이 너무 복잡하면 선수들도 위축, 관중들도 따분. 간소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심판까지 빼버리면 혼돈과 무질서가 만연하게 된다. 기득권 과보호가 기득권에게 독이 된다. 별다른 노력도 없이 1등하면 노력이 사라진다. 기업의 체질이 약화되고 세계 업계에서 무너진다. 구글을 보라. 검색업계 1등이다.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런 노력으로 1등이 유지되고 있는거다. 공정의 반대말? 불공정? 특권이다. 특권없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이다. 국가의 감시와 견제가 필요하다. 의무이다.

3) 패자에게 재도전 기회부여. 패자 부활전이 가능해야 한다. 실리콘 벨리, 여러가지 생각들이 있다. 당시 언론에서 성공의 요람으로 표현했다. 그건 아닌데 생각했다. 실패의 요람이다. 100개 중에 소수가 성공한다. 성공을 위해 성공한 기업들만 조사해서 한국의 실리콘 벨리를 만드려고 했다. 그러나 본질을 잘못본 거다. 실베의 본질은, 대부분은 실패하나 실패한 기업주가 도덕적 결함이 없다면 재도전 기회를 제공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성공 확률이 높은 사람으로 재도전의 기회가 제공된다. 서너번 실패하다 성공한다. 한번 성공해서 이전의 실패를 다 갚는다. 개인 실패의 사회적 자산화가 이루어진다. 미래 산업에 대해 그런 실패의 토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보자. 산업화의 성공을 보라. 추격자 전략, past following. 남들이 한 것 중에 성공확률 높은 것에 전력으로 질주했다. 우리 가진 자산을 투자하여 전력을 뛰었다. 일으켜 세우는 동안 1등은 저만치 달아난다. 그래서 넘어진 자를 돌아보기 어려웠다. 이런 전략을 사용한 나라의 경우,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가 굳어졌다. 성공한 전략은 추격자 전략이고 그에 따른 문화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2만불에서 정체된다. 중국이 추격하고 있다. 더 이상 옛날의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선도자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때이다.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한 시도이다. 세계적인 천재가 1/10개 성공한다. 한번 실패로 천재가 사회에서 외면되는 현장을 목격한 모든 자들에게 합습효과 나타나고 아무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지 않게 된다. 미래의 불안을 해소하고 새로운 산업 출범의 계기가 마련된다.

9. 평화: 평화 없이는 복지와 정의가 무용지물. 모든 것의 근간이다. 북한과 60년간 정전상태 유지하고 있다. 평화체제, 통일을 요청한다. 아무도 평화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기간의 문제가 아니다. 평화를 유지하고 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을 바탕으로 복지와 정의의 사회가 가능하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 우리가 꿈꾸는 사회 되겠다. 미래는 복지, 정의, 평화가 실현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럼, 복지, 정의, 평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1. 소통과 합의가 필요하다. 선진복지 국가들을 보라. 스웨덴, 거기는 진보당이 정권을 잡았다. 사민당. 자기들 생각만 고집하지 않았다. 장기적인 집권을 하며 야당과의 대화를 통해 사회적인 대타협을 이루었다. 독일도, 스웨덴과 반대로 보수당인 기민당이 집권했다. 야당과 힘을 합쳐 복지국가 만들었다. 이런 국가들을 보면, 극한 대립이 아니라 소통과 합의가 있어야만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보수/진보, 적이 아니라 상호보완 관계이다. 원시시대, 부족인 계곡에서 살고 있다. 다툼이 붙었다. 괭장히 힘들다. 산을 넘어가 다른 곳으로 가보자. 여기서 살자. 이런 두 파가 다투었다. 보수는 사회를 안정되게 만드는 기반이다. 진보는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간다. 서로 인정하지 않으면 도퇴되고 만다는 건 인류의 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이다. 전쟁과 정치의 공통점과 차이. 적과 싸운다는 공통점, 전쟁에는 적을 믿으면 안되지만 정치는 상대방도 국가의 궁극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는 신뢰라는 차이이다. 반응: 듣기에는 마음이 훈훈해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한다. 무슨 말인지 안다. 싸우는 걸 필수다. 그러나 1)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가? 2) 어떤 주제로 싸우는가? 3) 그 싸움의 결과는 어떤 사회적 유익을 갖는가? 합의까지 도달하는 싸움은 건강하다. 정말 정치에서 해야 할 싸움이다. 권력쟁취 목적으로 상대방의 나쁜 점을 드러내고 서로에게 피해가 되고 사회도 몰락하는 그런 싸움은 소모에 불과하다.

2. 민주주의/다수결주의. 혼돈하지 마라.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의 의미는, 소수의 존중에서 다수가 움직이는 사회이다. 다수독식, 승자독식 반복되는 게 문제이다. 우리사회 모습이 여야나 이기면 국민의 절반은 절망한다. 결국 증오의 악순환에 빠진다. 낡은 프래임이 극복되지 않았다.

결론, 우리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안철수 개인도 그런 상황에 있다.


2012년 6월 4일 월요일

가정교육

등교길에 아들과 잠언 4장을 나누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지혜를 얻으라는 내용과 함께
부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방법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방법론이 추천되는 이유가 중요하다.

세상에서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부모다.
어떠한 조건이나 대가를 고려하지 않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사람도 부모다. 그런 부모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소중한 것, 가장 긴급한 것, 가장 유익한 것들을
주고 권하고 가르치되 자신이 이루지도 이르지도 얻지도
못한 것까지 전해 주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부모에게 귀를 닫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자식은 없다.
이러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보다 더 우매한 바보는 없다.
가정교육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정 밖에서는 모든 것이 남루한 거래 방식으로 통한다.
조건이 충족되고 대가의 기대치가 맞아 떨어질 때에만
소통과 교류가 가능한 사회는 약간 고상한 정글일 뿐이다.
그런 환경에서 의식과 사유와 습관과 가치가 형성된 세대는
이러한 패턴을 다음 세대에도 전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교회는
올바른 가정교육 강화의 필요성이 절박한 벼랑끝에 서 있다.

2012년 6월 2일 토요일

새벽의 풍요

지난 1주일을 설레이고 풍요롭게 만든
새벽 설교자 세 분에게 감사를 표한다.

로마서의 규모 있는 기독교 신앙,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가 행하신 일의 경륜
거기에 대한 성도의 마땅한 도리의 교훈을 접한 이후에
맞이한 사사기 시대의 혼란을 대하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과 실패의 너무도 간단한 이유는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는 거다.

그러나 이런 진단이 표현은 간명해도
표현의 내용은 다양하고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악의 실체가 하나님의 명령를 거스르는 행위의 실패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넘어 그 배후에 죄의 본질이
어떻게 버티고 있으며 그것이 해결되지 않은 채
실을 바늘의 허리에 매는 식의 급조된 처방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만 축적하는 우매함은 어떤 것이며
소망의 빛 한 줄기라도 합당하지 않은 그들의 죄와
그 죄의 지칠 줄 모르도록 뻔뻔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시고
완전히 진멸되는 일은 없도록 긍휼의 우수로 붙들고 계신
신실하고 자비로운 언약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끄러운 실패와 실족의 반복이
과거의 먼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를
사사기는 독특한 어법으로 거침없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혼돈과 무질서가 하나님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설이다. 이는 마치 험한 세월을 살아온 야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열조의 어떤 거인에게도
뒤지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맥락을 공유한다.
형통의 반듯한 길밖에 모르는 분들이 더 무지할 수 있고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일평생 먹고 마시는 분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더 박식할 수 있어서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이라면
고난의 떡도 유익이며 그 끝자락에 있는 죽음의 잔도 유익일 것이다.

눈꺼플의 은혜

아침에 눈꺼플을 들어 올리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그것을 닫으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너무도 평범한 일이어서 그것조차 불가능해 지기 전까지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오늘은 어떤 분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한쪽 눈꺼플이 올라가지 않아서 입원하게 되었다.
최첨단 기계와 최고급 지성을 동원해도 원인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은 채 다들 신기한 듯 눈동자만 굴린다.

정작 당사자는 눈꺼플 작동거부 현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수효의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얼굴은 기쁨과 평강으로 잔뜩 채워져 있었다.
나도 간접적인 은혜에 흠뻑 잠길 수 있었다.
손을 붙잡고 기도를 드린 후 병실을 나섰다.
병문안 발걸음이 이렇게 가벼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머리털 하나라도 새신 바 되었다는 말씀이
주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로
가슴을 벅차게 채운다. 한번도 파업하지 않은 심장이 고맙고
지칠 줄 모르고 산소를 흡입해 준 허파도 감사하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함이 합당하고 합당하다.

철학의 원리

알스테드 및 케커만은
철학의 존재 원리(principia essendi philosophiae)로서
1) 인간본성의 결핍
2) 앎과 이해에 대한 본성적인 욕구 두 가지를 언급한다.

이는 아리스토 철학에 도입한 것인데
'모든 기술과 학문은 본성에 결핍되어 있는 것을 제공하려 한다'는 것과 
'모든 인간은 본질상 알기를 원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두 개혁주의 신학자는 철학적 경구를 넘어
신학적 윤색을 가하면서 인간의 본성적인 결핍을
'모든 재능들의 본래적인 완전성 상실의 지각'으로 
지식의 욕구는 '본성의 저자께서 설정해 두신 내적 성향이며
이는 타락 이후에도 명백히 잔존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연금술이 육체의 질병과 결핍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철학은 영혼의 모든 질병과 별핍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만큼
그들은 철학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이해한다. 

2012년 6월 1일 금요일

성경이 낯설다

성경에서 때때로 낯선 언급들을 만난다.
상식의 선에서도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럴 때마다 내면에는 지적 갈등이 일어난다.
세 가지 반응이 멱살을 잡고 격한 씨름을 벌인다.

1) 말씀이 언제나 옳으니까 무조건 동의해라.
2) 시대가 다르니까 오늘의 잣대로 걸러서 이해해라.
3) 기록 당시에만 적용되던 낡은 시대성은 무시해라.

얼굴을 붉히는 대립의 기운이 누그러들 즈음이면
성경과 문화적인 갭과 제한적 시대성 문제는 흐려지고
문제의 근원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직시하게 되는
다소 냉정하고 정직한 순간이 겸허하게 찾아온다.
성경의 진리에서 많이 멀어져 있는 '나' 문제 말이다.

창조자요 주인이요 아버지인 하나님의 말씀인데
동의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고 적용도 안되는 건
성경 편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에서 내가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고발하는 거북한 반증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이 아니라 자신을 부인함이 옳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과 가치와 방식과 방향은
나의 죄악된 실상을 보여주는 율법적인 기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그러한 것들이
구현될 수 있도록 은혜 베푸시는 복음적인 기능이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의 모든 진리가 산소처럼 아무런 저항감 없이
호흡처럼 편하게 섭취될 정도로 친밀해질 날이 올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