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1일 일요일

논문 발표회

오늘은 학교에서 복음주의조직신학회 논문 발표회가 있었다. 우리학교 조직신학 분과 교수님들 전부와 상당수의 학생들이 섬김의 팔을 걷어 부치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고의 땀을 흘리셨다. 점심에는 바베큐의 구수한 향이 캠퍼스에 자욱했다. 섬기는 분들의 아름다운 협력과 연합이 풍기는 향기는 더욱 구수했다. 참석하신 분들의 표정에는 흐뭇한 포만감이 빼곡하게 번져 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이 뒤로 밀렸으나 참석하신 분들의 눈에는 귀가의 조급함이 아니라 쇠하지 않는 학구렬이 타올랐다. 발표자의 주제들도 다양해서 신학의 푸짐하고 다채로운 섭취도 가능했다. 복수의 새파란 2015학번 새내기 학생들도 참석하여 끝가지 자리를 지켰다. 두고두고 기억될 신학의 향연이다. 수고하신 교수님들 및 학생들께 진심으로 솟구치는 감사를 전한다...

2015년 5월 30일 토요일

복음주의 조직신학회

설교: 김영욱 총장님 (엡5:15-21)

매주 5일동안 박형룡 박사님의 조직신학 강의를 들었다. 질문도 받지 않고 "지나 갑시다"로 차단한다. 딱딱하고 교조적인 교리, 어떻게 목회에 적용하나? 박윤선 박사님께 매주 5일동안 주경신학 강의를 들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우리를 향한 바울의 바램이다. 늘 생각하라. 내가 지금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오직 지혜 있는 사람처럼 자세히 주의하여 행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주목하라. 충동적인 동기로 경박하게 행하는 일이 없도록 늘 주님의 영광과 여호와 경외를 의식하라, 이런 말이겠다.

세월을 아끼라. 세월은 기회이다. 분초가 기회라는 말이다. 멍하니 분초를 보내면 무수한 기회들을 허비하는 것이다. 분초가 어떤 기회여야 하는가? 찰나적인 시간의 맹목적인 흐름에 영원을 담아낼 수 있는 상황이 바로 기회이다. 시간을 그런 기회로 만들고 선용하는 게 세월을 아끼는 일이겠다.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감사하라." "항상" 감사해야 하기 때문에 감사 이외의 다른 반응은 입출을 불허한다.

기조강연: 김영한 박사님, "케직운동의 영성"

조직신학자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기우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판의 학문성에 대한 관심사가 희석되고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 한국교회 영성의 배후에는 청교도 영성이 있다. Keswick Movement로도 소급된다. 이 운동은 1875년 성공회 목사에 의해 일어났다. 사경회가 이 운동의 출발점. Evan H. Hopkins가 사경회의 첫번째 주강사다. 이 운동은 중류층과 상류층을 겨냥한 것이었다. 영성의 모임이다.

이 운동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강력한 파급효과 일어났다. D. L. Moody, A. J. Gordon, A. T. Pierson, R. A. Torrey 등이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피어선은 평택대한 전신인 피어선 성경학교 설립한 인물이다. 그는 케직운동 교사와 지도자로 활동했다. John Stott가 1965-2007년동안 케직 사경회의 설교자로 활동했다. 케직 사경회는 성령의 활동을 강조한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모임이 아니라 영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강사로는 학위를 취득한 학자들이 아니라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성령의 역사에 민감한 분들이 세워진다.

케직의 단계: 죄포기, 주의 뜻 순종, 하나님 섬김, 하나님과 사귐, 하나님에 의해 소유됨, 성령의 채우심, 교회적 사회적 봉사로 진행한다.

학자들은 분리하고 발라내는 분열의 학문성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통일성을 도모하면 좋겠다.

자기부인 자기복종: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 포기, 탐닉으로 의심받는 것 포기.

케직이 추구하는 것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 것, 중심의 왕좌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그리스도 예수를 앉혀 드리는 것, 아무리 작은 죄라도 일절 타협하지 않는 것, 우리의 목표는 하루종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매시간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과 그분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날마다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는 것, 환난 중에 평안을 잃지 않는 것,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는 것, 날마다 순간마다 모든 쓴 뿌리와 원망과 악한 말을 버리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2015년 5월 24일 일요일

사랑의 교회 설교

사랑의 교회에서 "다윗과 사울"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가슴에는 눈물이 흘렀으나 말씀만 전달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기교나 사람의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다. 주께서 가장 선한 방식으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2015년 5월 22일 금요일

자랑해도, 된다!

"너는 내일에 대하여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내일"은 미래와 가능과 설렘과 희망의 언어다. 지혜자는 그런 내일에 대하여 자랑하지 말란다. 내일에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랑은 확고한 실현에 근거한 행위이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에게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실현의 여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의 입술을 연다면, 자랑의 발은 구름을 내딛는 격이겠다. 이는 현상에 기초한 생각의 실타래다.

자랑의 주체인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면, 우리는 내일의 확정자도 아니고 구현자도 아니기에 당연히 예지자도 아니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내일에 대해 자랑하지 말라는 지혜자의 권고는 그런 인간에게 주어졌다. 우리처럼 유한한 자에게는 내일에 대한 자랑이 합당하지 않고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합당하지 않은 것에 눈길을 돌려서는 안되겠다. 우리는 자랑이 불가능한 인간의 자리에 서 있다.

그렇다면 "내일"과 우리는 무관한가? 그렇지는 않다. 그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지혜자의 모든 금언들은 여호와 경외를 지향한다. "내일에 대하여 자랑하지 말라"는 것은 자랑의 근거가 우리에게 없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는 "내일"을 통제하고 조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랑의 적격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내일을 작정하고 예지하고 다스리고 통제하고 구현하는 하나님 편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랑에 대한 신구약의 다른 구절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하라 즉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9:24)는 말씀에서 우리는 자랑이 주 안에서는 가능하고 자랑의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과 아는 사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임을 확인한다.

자랑해도,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이 사실은 변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랑의 주체를 따라서는 자랑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리스도 안"이라는 자랑의 근거와 "하나님과 그의 행하시는 일"이라는 자랑의 내용을 따라서는 자랑해도 된다.

이러한 자랑의 근거와 내용은 염려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즉 "내일의 일을 염려하지 말라"(마 6:34)는 예수님의 염려 금지령도 염려의 주체인 우리에게 근거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성취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만 있기에 염려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 자신과 그의 행하시는 일들로서 사랑과 공의와 정의의 필연적인 실현성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일의 일들에 대해 자랑하지 말자.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분변적인 사랑과 공의와 정의의 필연적인 실현에 대해서는 실컷 자랑하자.

2015년 5월 21일 목요일

내일은 내일이다.

내일일을 자랑하지 못하는 게 인생이다.
참으로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하겠다.
인생의 반전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이는 여호와 경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전도자는 가르친다.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에 이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고통의 분량,
참으로 막대하다.

스펙의 품격

사람들은 몸값을 높이려고 스펙 쌓기에 골몰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가까운 주변의 스펙 선호도에 맞추어진 내용물만 축적하려 한다. 시야가 조금 넓은 사람들은 대한민국 전체를 의식하고 보다 넓게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스펙 겨루기에 뛰어든다. 그러나 보다 더 고매한 스펙은 하나님을 의식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령한 스펙 높이기에 맞추어진 일과를 날마다 경주하고 싶다.

2015년 5월 20일 수요일

자득의 초청

[선인들의 공부법]에 "학문을 깨우쳐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깨우쳐 주는 것은 스스로 깨닫는 것보다는 못하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성경은 모든 것들을 다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스스로 깨달아야 할 지적 여백이 있습니다. 진리로의 신비로운 초청이 성경의 본질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적당한 침묵과 적당한 희미함은 보다 넓은 안목에서 보면 항복과 탄성을 유발하는 엄청난 복입니다.

성경은 정답 제공자와 전달자의 기능이 아니라 하나님을 계시하고 그 지존자의 은밀한 곳으로 자기의 발걸음을 스스로 디디며 들어올 수 있도록 초청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어법과 디테일이 색바랜 구시대의 골동품 정도로 여기는 것은 성경의 깊은 배려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논리보다 훨씬 예리하고 우리의 척도보다 훨씬 정교하고 우리의 분석보다 훨씬 정밀하고 우리의 판단보다 훨씬 앞선 의로운 판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혜는 그런 성경의 속성을 수용하고 나 자신의 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배움에는 언제나 깨어짐과 부서짐과 낮아짐과 무너짐과 소멸됨과 거부됨이 있지만 성경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거듭남도 있습니다.

2015년 5월 12일 화요일

고단함의 보상 추구

몸이 피곤하다. 주께서 건강을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연구하고 가르치고 가사까지 돌보니 몸에 과부하가 걸린다. 잘 조절해야 되겠다. 주께서 허락하신 시간이니 고단함에 준하는, 아니 그 이상의 깨달음을 건져내지 않고서는 이 시간을 고이 보내지는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