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30일 월요일

과제의 위력

둘째 녀석이 환경 특성화 학교에 출석한다. 곤충채집 및 낙엽수집 류의 과제들이 때때로 주어진다. 그러면 아부지는 아들만큼 바빠진다. 최소한 과제가 완료될 때까지는. 그런데 초등학교 재입학한 필름 끊어지는 듯한 아찔함도 이따금씩 엄습한다.

어제는 연못과 잔디밭과 산책로를 누비면서 곤충들을 수색했다. 한 마리도 못잡았다. 그런데 오늘 교회 가는 길에 지나가는 자동차가 무색할 정도로 벌레들의 움직임이 꿈틀꿈틀 감지된다. 벌레를 쫓다가 경로도 이탈했다. 별일이다.

지금은 캄캄한 밤인데도 유독 벌레들의 음파가 앞다투어 창틈을 비집는다. 별일이다. 평소 가볍게 생략하며 살았던 미물들의 존재가 의식의 그물망에 굵직하게 걸린다. 과제가 의식과 지각의 촉수에 미치는 영향이 이리도 큰 것일까나. 그러다가 문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인생의 최우선 과제가 떠올랐다. 이러한 과제가 나의 모든 의식과 지각을 장악하면 좋으려만 이미 다른 과제들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무엇보다 긴급하고 우선적인 과제에 소홀한 나를 돌아보게 된다.

2013년 9월 29일 일요일

내향적 엄밀성과 외향적 포용성

다양한 교단에서 다양한 신학을 경험했다. 신학적 다문화 경험이 좋은 것만도 아니고 자랑할 일도 아니다. 다만 교파주의 우물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심히 안타까운 교훈은 짭짤하게 건졌다.

여러 신학교를 출입했다. 신학을 배우러 가는 교단의 교실마다 타교단 비판에 무슨 애국심 수준의 '교파심' 발휘가 콘테스트 현장을 방불했다. 하여 까칠한 비판을 토하는 분들의 면면을 나도 까치한 눈을 부릅뜨고 살폈었다. 그러나 그분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보존하고 선포하고 퍼뜨리는 일에 각고의 노력과 특심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자신의 신학적 존재감을 타교단 신학의 부실과 허술과 부조화와 유아성 확인과 지적에서 찾으려는 참으로 가난한 신학자와 목회자가 적지 아니하다. 나도 이런 부류에 몸을 담았었다. 지금도 개가 토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는 자세의 지향점은 그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다.

나는 개혁주의 신학이 성경에 가장 가깝고, 가장 좋은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고, '전성경'(tota Scriptura)과 '오직성경'(sola Scriptura) 정신을 가장 잘 유지하고, 하나님 자신만을 높이고 하나님이 전부이며, 진리와 사랑의 조화 및 이론과 실천의 융합에 가장 충실하고, 신구약의 통일성에 가장 민감하고, 통합적인 신학을 가장 잘 구현하는 신학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성 제고를 위해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의 정도를 더하고자 하루하루 성경을 묵상하고 글을 읽고 대화하고 실천하는 일에 개개인이 전심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최소한 자신을 향해서는 가장 좋고 좁고 엄밀한 신학 추구에 매서운 회초리를 들어야 하겠으나 타인을 향해서는 그렇지가 않다.

타인에게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며 기준치의 미달을 지적하고 신학적 못난이로 매도하고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기며 개혁주의 신학에 싸늘한 반감만 불러 일으키고 결국 사람도 잃고 좋은 신학에도 어두운 이미지를 드리우는 비판 일변도를 질주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허물고 훼방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사랑하고 전파하길 원한다면, 자신을 향해서는 가장 좋은 신학의 가장 높고 깊은 엄밀성을 추구하되 타인을 행해서는 원수라도 기도하고 축복하며 사랑하는 가장 길고 넓은 포용성을 추구함이 마땅하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면서도 가장 답답하고 해롭고 거칠고 무례한 것을 주는 것처럼 오해하고 거절하게 만드는 건 증인의 모습이 아니겠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길 원한다면 내향적 엄밀성과 외향적 포용성의 조화를 어느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하는 배타적 택일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되겠다. 문제는 이것이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성향이 담아질 수 있는 큰 인격과 신앙을 구비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사위는 각자에게 던져졌다. 

2013년 9월 27일 금요일

투기의 기염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잠27:4)

분노는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부모가 자녀를 분노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바울의 권면도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책망하고 훈계한다 할지라도 마음을 스스로 추스리지 못할 단계까지 자녀들을 내몰지는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류 최초의 살인도 원인은 분노였다. 아벨을 찍은 돌은 가인의 분노가 움직인 것이었다. 물론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는 가인을 원하였고 가인은 동생의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망이 세상에 출입하는 도상에 분노가 삐끼처럼 실질적인 충동의 원흉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오늘 지혜자는 그런 분노를 투기의 잔인성과 통제불능 속성의 들러리 정도로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간다. 투기의 실체가 궁금할 수밖에 없어졌다. 이사야 14장 13절의 기록이 힌트를 제공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겨누려는 무례하고 교만한 맞장이 문제의 본질이다. 사단은 그런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태초의 사람에게 하나님과 맞장의 어깨를 겨누라고 유혹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명령에 굴종의 고개를 수그리는 것부터 단호히 걷어찰 것을 촉구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을 정도로 하나님을 시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속성은 물론이고 그분의 존재마저 지우고자 한다. 생명도 임의로 주관하고 미래도 단순한 예측을 넘어 조작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하나님껜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을 견디지를 못한다.

이러한 투기의 촉수는 하나님만 겨냥하지 않고 타인들을 향해 사방으로 내뻗는다. 상대방은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현실을 견디지를 못한다. 공부도 더 잘해야 하고 돈도 논문도 책도 명예도 활동도 외모도 직위도 언어와 생각도 남들보다 더 좋고 높고 많아야 직성이 풀어진다.

투기는 결코 지치지 않고 막아설 사람도 없다. 주변이 완전히 정복될 때까지 시기와 질투가 토하는 기염은 사그라들 수가 없다. 투기가 강한 사람의 주변에 그보다 더 유능하고 수려하고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포착되면 곧장 표적으로 낙점된다. 뭐든지 그와 비교한다.

주변에 괜찮은 모든 사람들을 꺾고 자신의 우월성이 만천하에 입증된다 할지라도 인간의 투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는" 것이 인간이다. 정곡을 찌르는 전도자의 통찰이다.

주님이 나의 만족이고 주님이 나의 기쁨이고 주님의 나의 소망이고 주님이 나의 전부이지 않으면 투기에 놀아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때때로 투기의 기운이 감지되고 그 투기에 휩쓸린다. 그때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최고의 상급이란 사실이 안팎으로 확인된다.

분노보다 잔인하고 억수 같은 독성을 지닌 투기에도 해독제가 있어서 안심이다. 이는 여호와 경외를 지혜로 규정한 지혜자의 투기 진술에 창세기 15장 1절이 투영되고 있어서다. 이렇게 심플한 진리가 만능열쇠 같다는 생각이 오늘은 강하게 밀려온다. 가을처럼...

2013년 9월 26일 목요일

집을 지키시는 여호와

여호와가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시127:1)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가정으로 세우신 '집'의 창시자다. 집의 존재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집이 보존되는 것도 이유가 동일하다. 주님께서 터를 닦으시고 기둥을 세우시고 음부의 권세도 흔들지 못하도록 붙드시기 때문에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주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이른 기상과 늦은 취침도 헛수고다.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며 장사의 수중에 화살과 같으며 결실한 포도나무 같은 아내가 안방에 있고 어린 감람나무 같은 자식들이 식탁에 둘러 앉은 것도 다 주께서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시편들은 가정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이 인자하신 분이라는 것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과 관계된 것임을 주목한다. 부를 축적하고 각 구성원이 가족의 복지를 최고의 우선으로 똘똘 뭉치는 방식과는 아주 상이한 방식이다.

집이 세워지는 여호와 의존적인 방식은 교회와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주께서 지키시지 않으시면 교회도 국가도 무너진다. 지키는 수고도 헛수고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지키시니 그럼 우리는 손 놓고 뒤로 빠지자'며 뒷짐지는 분들의 방관자적 태도는 합당하지 않다.

여호와의 집 지키시는 의지에 우리는 수종으로 반응해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 방식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죄를 뉘우치며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이기에 우리는 집을 지키는 주님의 뜻에 열심으로 동참해야 한다. 교회도 그러하고 신학교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열심의 봉쇄 차원에서 인간적인 수고의 헛됨을 말하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가정과 교회와 신학교와 나라를 세워가야 하겠다. 타인을 비방하고 배척하고 짓밟은 결과로서 반사이익 챙기는 방식의 열심은 지양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성경적인 방식은 반드시 고수해야 하겠다.

2013년 9월 25일 수요일

영혼을 지키시는 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시121:5)

지킴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주님께서 우편에서 우리의 그늘이 되시기에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우리를 상하게 하지 못한단다. 모든 악에서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며 우리의 영혼을 지키실 것이며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출입을 지키실 것이란다.

보이지도 않는 영혼을 지킨다는 말씀에 관심이 쏠린다. 영혼은 우리가 어떤 물리적인 힘을 행사해서 임의로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영혼의 실체도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위치도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상태와 움직임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영혼의 존재에 대해 인간이 추적할 수 있는 내용은 사람이 죽은 이후에 근수가 조금 줄었다는 물리적인 측량이 고작이다. 영혼의 움직임과 그 역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더라도 생각하고 의식하고 탐구하고 평가하고 반응한다. 참으로 신비롭다.

영혼은 죄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죄가 들어오면 괴롭고 답답하고 두렵다. 그러나 회개하면 영혼이 맑아지고 환한 평화가 찾아온다. 이 세상에서 영혼을 좌우하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해질 수 있는 최대의 위협은 몸의 죽음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신다. 세상에 있는 이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가는 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일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늘 범사에 감사함이 마땅하다.

인맥과 건강과 재물이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주님께서 나의 하루를 가능하게 만드신다. 오늘 아침에도 깨었으니 주께서 지켜 주셨음이 분명하다. 지켜주신 그분의 뜻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없었을 인생의 유일한 지향점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나를 지키시는 분의 뜻과 내 인생의 목적은 무관하지 않다. 현실의 해석과 판단이 복잡하고 애매해도 결코 흐려지지 않을 삶의 분명한 방향은 하나님의 뜻이다. 생명이 주어지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생이 마감되는 것도 주님의 뜻이겠다.

성경을 성경대로 말하는 방법

1) 성경이 말하는 것은 반드시 말한다.
2)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3) 성경이 속삭이는 것은 나도 속삭이듯 말한다.
4) 성경이 외치는 부분은 나도 외치듯이 말한다.
5) 성경이 선포하는 것은 나도 선포하듯 말한다.
6) 성경이 권유하는 것은 나도 권유하듯 말한다.
7) 성경이 암시하는 것은 나도 암시하듯 말한다.
8) 성경이 반복하는 것은 나도 반복하듯 말한다.
9) 성경이 추론하는 것은 나도 유추하듯 말한다.
10) 성경이 보여주는 정도와 들려주는 분량만큼 말한다.

2013년 9월 20일 금요일

통합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요일4:8)

요한은 우리에게 영분별을 권면한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도 유사하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영이라는 표준 변별법을 귀띔해 주었다. 예수님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는 친절한 뜻풀이도 빠뜨리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도들의 말을 듣는 자이고 그러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설명을 이어가며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안다"고 요한은 기록한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에 대한 주제로 넘어간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안다고 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사랑에서 확인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는데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사랑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한다. 

결론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결과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 하나님께 속하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그런 사랑으로 당신을 알리신 것, 그런 사랑의 수혜자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당위라는 것이 연결된다.

상대방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먼저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그렇게 사랑의 선제공격 행보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먼저 그러셨다.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구하지도 않았고 달가워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고통스런 원수의 뾰족한 창과 난폭한 채찍질과 역겨운 침뱉음 앞에서 그러셨다.

하나님을 안다는 지식과 하나님께 속했다는 신분과 예수님을 시인하는 고백과 서로 사랑하는 실천은 서로 다르지도 않고 분리되지 않고 나누어질 수 없도록 유기적인 통합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가시적 증거는 사랑이다. 사랑의 열매로 나무의 진가를 가늠한다. 교리적 이견 제시로 도피할 사안이 아닌 듯하다. 

2013년 9월 19일 목요일

해석학적 순환

해석학적 순환은 18세기 말 아스트(Friedrich Ast)에 의해 처음으로 초석이 닦인 개념으로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인 관계성을 가리킨다. 신학적 체계화에 대한 모든 질문들과 교회의 지속적인 해석학적 활동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경의 모든 부분들은 단어와 문구의 자구적, 문법적, 역사적 의미만 벗겨지면 해석되지 아니하고 부분이 비로소 의미를 얻도록 해석학적 에토스를 제공하는 "전체"에 의해서 벗겨진다. 이 "전체"는 문서의 전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전체의 범위는 인간 문맥에서 의식되고 수집된 내용만이 아니라 궁극적인 맥락인 하나님 자신까지 포함한다. 하나님을 생략해도 해석학적 갈증의 해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식의 논리적 기재만 적당히 달래어도 되니까. 허나 하나님 없이는 인문학적 해석학에 그친다.

씨슬턴이 지적한 해석의 두 '지평'도 놓치지 말아야 할 통찰이다. "텍스트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 이 두 지평들이 조우할 때 해석이 발생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해석자의 지평으로 해석의 지속적인 주체인 역사적 신앙 공동체의 해석학적 공헌에 대한 것이다.

신조와 신앙 고백서와 교리문답, 텍스트의 지평과 역사적 신앙 공동체의 지평이 조우하여 발생한 해석이다. 이는 역사의 짧은 토막을 살아가는 우리의 왜소하고 불안정한 지평을 보다 넓고 안전한 전체로 확대하며 인간의 실수와 오류까지 걸러내는 진리의 진일보도 약속한다.

종합하면, 하나님과 텍스트와 해석자와 역사는 서로 해석학적 순환에서 필히 고려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4가지의 순환적 요소들 중의 균등한 하나로 간주하면 곤란하다. 텍스트의 생산과 해석자의 지혜와 역사의 흐름을 모두 주관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해석학적 순환에 신론적 접근법이 필히 고려된 해석학의 핵심에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성경 해석학의 중심으로 간주한 이유가 조금씩 감지된다. 물론 해석의 종착지는 삼위일체 하나님 되시겠다.

리차드 멀러, [신학공부 방법], 239-257 참조.

16-17세기 불어사전

2013년 9월 18일 수요일

2013년 9월 16일 월요일

홀로 행하시는 분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시72:18)

기이한 일들의 발생은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행하여진 것이고 그 행위의 유일한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이 강조된 구절이다. 이 구절을 둘러싼 문맥은 왕에 의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통치의 내용도 포괄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기이한 일들의 항목은 자연법 혹은 사회법에 의해 해명되지 않는 초자연적 현상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상식에 익숙한 것들로도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신데 거기에 탐욕의 숟가락을 올리고 소정의 영광을 챙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간혹 기적이 일어나면 자신이 출처라는 인식을 은근히 풍기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신령한 능력의 출구라는 궁색한 명분 챙기기는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나아가 영혼을 움직이는 설교와 마음을 달래는 상담과 부흥의 가시적인 리더십이 확인될 때에도 건질 영광에 군침을 흘린다.

"홀로"라는 부사의 중요성을 허무는 영광의 부당취득 문제는 언제나 기독교 부패의 일등급 원흉이다. 주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기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요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였다는 고백만 남기고 조용히 형체를 감추는 안개의 '고매한' 자태를 고집하는 것이 지혜롭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을 최대한 투명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에 투영하고 온 땅의 영광은 하나님께 고스란히 돌리는 사람이다.

중간에서 부당한 유통마진 챙기는 삯꾼 목회자가 되지 않도록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무시로 묵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의 지극히 큰 보상이란 사실도 놓치지 않으면서...

인식론적 사망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 (롬6:23)

사망과 영원한 생명이 대조되고 있고 각각의 원인들인 죄와 하나님의 은사도 대조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 했다.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이 연결되어 있고, 죄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사망이 하나의 범주로 묶여졌다. 여기서 나는 인식론적 사망을 주목하고 싶다.

죄의 삯은 단순히 생명의 시공간적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로 하여금 살았으나 죽은 것과 진배없게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도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거룩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의 연관성이 도출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성경을 이해하고 싶어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 결단의 허리띠를 졸라맨 사람들은 거룩을 제쳐서는 안되겠다.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마음에 죄가 있으면 진리가 인식되지 않는다. 정말 신비롭다. 물론 일상에는 아무런 지장도 초래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를 진리에 대해 무뎌지게 만드는 죄의 맹독성은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죄는 있다가도 없고 회개하면 그만이고 얼마든지 삭제와 수정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벗처럼 친밀하게 지낸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영적 감각은 점차 마비된다. 차츰 사람들의 폭넓은 수긍에 힘입어 일상의 레벨에서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처신하는 습관에 빠진다. 나아가 성경을 읽고 지식을 얻더라도 앙상한 논리와 명제만 취득하고 고유하고 다채로운 현실에 획일화된 기준을 들이대는 종교적 폭력을 휘두르며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반감만 부추기게 된다.

이렇게 마음의 죄는 아무짓도 안하는 듯 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은밀한 것을 탈취한다. 죄의 가장 무서운 기능은 생명의 저자시며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무뎌지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준하는 지식을 차단하는 것에 있다. 회개가 그렇게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올바른 지식에 이르는 것은 신학을 회개의 눈물로 적시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개인이든 교회든 죄를 돌이키는 회개, 즉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결연한 투쟁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주어지는 거룩을 회복하지 못한다. 거룩의 회복이 없으면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에도 이르지 못한다. 당연히 그런 개인이나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향기보다 사망의 역하고 유독한 악취의 온상으로 필히 전락한다. 세상의 매서운 발길질은 필연적인 삯이겠다.

죄는 결코 머리에 괴기스런 뿔을 부착하고 날카로운 괴성으로 우리를 위협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곧장 달려가게 만들 정도로 어리석은 단선적 존재가 아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머리털 수효보다 많다고 고백한다. 능히 깨달을 수 없어 자신의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도 했다. 거룩,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필히 싸워야 할 싸움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지각으로 쉽게 헤아려질 수 없을 만큼 은밀하고 교묘하고 중다한 죄를 다스릴 정도의 수준까지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나는 그에게 거룩이 보이지 않는데도 신학적 지식의 방대함은 자랑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를 대가라고 부르고 싶지가 않다. 거룩의 통로를 거쳐 이르른 하나님 지식만이 하나님의 사람을 대가로 만든다.

믿음의 선배들은 신학을 Theologia sacra라고 했다. '거룩한' 신학이다. 신학은 주체와 대상과 내용과 방식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 할 신학은 거룩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런데 신학자들 안에서 거룩의 정수를 쉽게 목격하지 못한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큰 비극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을 알고서도 돈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 추구가 급급하다.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그런 현실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 은혜가 필요하다. 그게 유일한 대안이다.


2013년 9월 15일 일요일

성경이란

     1) 명료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모든 삶과 신앙의 불변적인 규범이며 절대적인 원리이고,
     2) 반드시 믿고 순종해야 하는 성경의 권위는 소수의 천재성 및 다수의 보편성과 같은 어떤 사람이나 단체 나아가 교회의 증언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며,
     3) 내용의 거룩함과, 가르침의 효력과, 문체의 위엄과, 모든 부분들의 영적인 조화와, 전체저인 범위의 광대함과, 구원의 유일한 방법에 대한 명시와, 성경의 명료성과 충분성과 완전성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자증한다.

2013년 9월 14일 토요일

바빙크의 경구

"기독인의 마음은 존재의 전부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귀속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우리의 생각과 삶의 중심에서 역동하기 전까지는 만족되지 않는다" Bavinck, RD II.330.

2013년 9월 13일 금요일

진리의 봉사자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고전13:8)

이렇게 바울은 스스로를 진단했고 모든 기독인도 그래야 한다는 일침을 날리고 있다. 진리를 거스리는 일이라면 차선책이 아니라 안하는 게 상책이다. 아니 할 수 없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바울은 진리를 위하지 않고 거스르는 것을 행위능력 자체가 동결되는 사안으로 이해했다.

진리를 거스르는 것과 진리를 위하는 것이 나란히 대비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그러나 바울은 진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소극적인 처신을 넘어 진리를 위하라는 적극적인 태도를 촉구한다. 모든 순간과 모든 삶이 진리를 위하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교회의 목회자는 진리의 봉사자(ministri veritatis)요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덕과 올바른 교리의 권위(Dei gloriae, ecclesiae aedificationi et sanae doctrinae autoritati)를 훼방하지 않고 위하는 자라고 하였다. 진리를 거스르는 유력한 주범으로 로마 카톨릭을 지목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고, 명예로운 이미지를 관리하고,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고, 비대한 세속권력 앞에 눈도장 찍기에 바빠 발바닥에 땀이 맺히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은밀하고 어두운 수단과의 결탁에는 주저함이 없는 목회자가 되어 진리를 거스르는 원흉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진리를 위하지 않으면 할 일이 없어지는 백수 목회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2013년 9월 12일 목요일

인생의 무게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라 (시62:9)

심지어 저울에 달면 입김의 무게보다 가볍단다. 나의 지각이 짧아 흡족한 저울질이 안되지만 시인의 정확하고 명료한 통찰에 수긍의 고개를 끄덕이지 아니할 수 없다. 깨끗한 양심을 말하는 와중에도 지저분한 거짓에 최면이 걸린 상태일 뿐인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공존하는 것이 인생이다. 늘 웃고 즐거워 보이는 인생도 의지할 대상이 아니고 부러워 할 이상형도 아니다. 잠간의 우아한 표정관리 위해 수면 밑에서는 결사적인 발버둥이 이를 떠바친다.

그럴듯해 보이는 게 가장 은밀한 가짜인 경우가 태반이다. 범사에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함이 옳다는 게 아니다. 시인의 권고처럼 자신을 비롯한 어떠한 인생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무시로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는 것이다.

남들보다 더 효과적인 힘도 의지하지 말고 경제력이 타인의 손에서 내게 옮겨진 것으로 허망하여 지지도 말고 관심과 의식의 코뚜레를 재물의 증대에 내맡기지 말라는 권고의 이유로서 시인은 입김보다 경한 인간의 가벼움과 인생의 속임수를 언급했다.

인생이 코의 호흡일 뿐이라던 이사야의 기록도 떠오르며 이런 의미의 저울질이 다소 슬프지만, 왠지 인생의 본질과 총화를 제대로 가늠해 보았다는 흐뭇한 느낌도 든다. 하나님과 인생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상식의 뿌리가 뽑히는 구절들도 묵상해야 하겠다.

2013년 9월 11일 수요일

여호와의 복과 근심

여호와의 복은 부요하게 만들고 근심을 덧붙이지 않는다(잠10:22)

복과 근심 중에서 복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근심과는 연결되지 않는 복을 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언제 어떻게 무너지고 박탈될지 모르는 물질이나 건강이나 출세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복의 개념적 전환을 요청한다. 재물이 심히 많았던 청년이 근심하며 구원마저 등진 이야기가 떠오른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렇게 땅에서 언제 소멸될지 몰라 근심만 더하는 흉물이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도둑들도 넘보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 하나님의 복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든단다. 인격에 부요하고, 진리에 부요하고, 지혜에 부요하고, 긍휼에 부요하고, 의와 자비에 부요하고, 화목에도 부요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복은 식별하기 쉽구나. 땅에서 누구도 박탈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이지. 나는 복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복에서 동떨어진 사람인가? 복된 사람이고 싶다. 이런 종류의 기복주의 옹호자가 많아지면 좋겠다. 그러면 교회의 체질도 변하고 교회가 머무는 사회의 체질도 변하겠지...

근심에 짓눌리지 않은 교회를 고대하게 된다...

조깅의 유익

1. 몽롱한 의식과 몸과 의욕의 심기일전 효과 만점이다.
2. 읽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확보된다.
3. 수영과는 달리 몸에서 노폐물이 배출된다.
4. 장기능, 신진대사, 혈액순환 강화되니 건강이 좋아진다.

2013년 9월 10일 화요일

사랑이 모든 허물을 덮는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 (잠10:12)

허물 한 조각만 가리는 것도 어렵다. 가린다는 것은 치솟는 분노와 복수심을 잘 다스리고 짓눌러서 현실로의 돌출을 간신히 모면하는 살얼음판 평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셨듯이,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타인의 죄과를 멀리 옮기는 것이고 타인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내던져 영원히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주님께서 당신의 흘린 피로 우리의 허물을 가리시고 찢기신 살로 덮으시는 사랑의 선행적 경험과 충만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겠다. 참으로 신기하다. 주님의 그 사랑에 압도되면 타인의 허물이 덮어진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한다. 관점이 달라지고 기준이 달라지고 시점이 달라지고 입장이 달라지고 반응도 달라진다.

허물은 노력으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허물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허물을 대하는 나 자신의 문제이다. 내가 바뀌어야 가능하다. 나의 기준을 따라 나의 수단으로 바뀌어진 나 자신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나 자신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 십자가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허물의 정복자가 되지 못한다.

나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렇게 편만한 허물의 목적은 우리에게 분노의 게이지를 높이고자 함이 아니다. 십자가의 필요성을 무시로 설파하는 섭리적 장치이다. 허물이 의식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나에게 피해와 상처를 가져오는 허물에 반응하는 나 자신을 면밀히 돌아본다. 거기에서 영적인 상태가 모두 진단된다.

분노로 반응할 때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는 말씀이 사랑의 부재를 고발한다. "사랑"이 "모든" 허물을 가린다. 사실이다. 진리이다. 메시지가 강력하다. 분노와 보복의 되물림을 단절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은 노력이 아니다. 꾸며지고 연출되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동원되는 수단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주님의 영원하고 불변하고 신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동시에 바로 그 사랑으로 죽기까지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하다. 나도 용서되고 타인도 용서된다. 이런 신비로운 비약의 갭은 논리적인 설명으로 매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기적을 생산한다. 사람의 민첩한 조작이 개입할 수 없도록 인식에 있어서도 가시적 인과율이 가리워져 있다.

사랑이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것은 주님만을 떠올라게 하는 말씀이다. 십자가를 응시함이 없이는 이해를 불허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나보다. 뭐 조금 과장하긴 했다.

아내는 남편의 자아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2:23)

아내는 남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가 담긴 구절이고 이후에는 남자가 여자의 출처라는 말이 이어진다. 아내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노예적인 종속의 굴레를 아내에게 뒤집어 씌우는 건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말씀에 분명히 기록된 것처럼 아내는 남편 존재의 노른자에 해당된다.

어설픈 '평등'이란 말로 아내는 남편의 노른자요 남편은 아내의 출처라는 성경에 명시된 '불평등'해 보이는 본래적 질서를 묵살하는 일은 금물이다. 아내의 실수와 잘못은 남편에게 가장 치명적인 실수와 잘못이며 당연히 책임은 남편의 몫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의 죄를 방조했고 게다가 자신이 저지른 죄의 책임을 하와에게 떠넘겼다.

부끄럽고 치졸하고, 정말 실망이다. 아담이 하와의 출처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하와는 아담의 일부이다. 부속품 혹은 악세사리 같은 평범한 일부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존귀한 노른자다. 하와가 지은 죄의 궁극적인 책임은 아담에게 있다. 피하지 말았어야 했다. 책임을 아내에게 돌리는 것은 어떻게든 피했어야 했다.

아내는 남편의 가장 소중한 일부이다. 당연히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일인치의 오차도 없는 진리이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은 마땅하다.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고 달과 달의 영광도 다르지만, 성경은 유독 아내는 남편과 더불어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할 자라고 증언한다.

그런데 나는 수시로 옛사람 아담이다. 치졸하고 부끄럽고 실망스런 모습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아내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인데 나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지 않는다.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주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고 싶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에 있어서는 결코 지나침이 없을 듯하다. 

2013년 9월 9일 월요일

영혼의 갈망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42:3)

이는 '사람들이 종일 다윗에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란 뾰족한 물음 때문이다. 범인들에 의한 신존재 부정이 그로 하여금 눈물로 음식을 대신하게 된 배경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그의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기' 때문이란 이유를 놓쳐서는 안된다. 단순한 신지식의 대조상태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도 가세했다. 

슬프고 안타까워 식음의 의욕마저 상실할 정도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가 하나님의 존재가 지워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심리적 상태를 이 구절보다 더 절절하게 보여주는 곳이 드물다. 하여 지나칠 수 없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세상을 향한 긍휼이 씨줄과 날줄처럼 한 사람의 정신세계 속에 촘촘히 교차하며 이렇게 아름답고 애절하고 절박한 노래가 될 수 있다니.

나는 뭘 먹고 사는지 돌아보게 된다. 눈물이 음식이 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마음의 동기는 다윗을 따라잡지 못한다. 나 자신도 영혼의 위장에 고인 눈물의 실체가 궁금하다. 억울해서, 분하고 원통해서, 시기하고 질투해서, 초라하고 비참해서, 아니면 정말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갈망과 긍휼이 배합된 액체가 음식의 자리까지 장악하게 된 결과일까? 후자는 너무나도 희귀하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무리들과 동행하며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발하는 중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자신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무리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상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상처를 받고 명예가 실추되고 입지가 흔들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마음이 상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나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갈망으로 이해한다.

다윗의 마음에 투영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읽으면서 그 갈망이 오늘은 심히도 목마르다...

소통의 달인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4:6)

은혜로운 언어의 구사자는 참으로 지혜롭다. 평화로운 소통에 찬물을 끼얹는 언폭의 소유자가 얼마나 많은가. 말에 실수가 없는 자를 완전한 자라 하였던가. 지난달 어떤 선생님은 30분만 대화를 나누어도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 무엇을 할 사람인지 읽어낼 수 있다신다. 언어라는 매체에 담기는 삶과 인격의 함량이 많다는 뜻이겠다.

지혜자는 '경우에 합당한 말이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라 했다. 개밥그릇 속에 음식 찌꺼기 같은 어법도 있다는 얘기겠다. 타이밍이 화법의 질을 좌우한다. 이런 타이밍을 기본으로 깔고 바울은 지금 소통의 은혜로운 태도를 권면한다. 나아가 상대방을 이기고, 설득하고, 지적하고,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높이고자 하는 태도도 소통의 극약이다.

화법의 개혁과 원숙은 "은혜" 없이 단순한 다독과 수다의 분량으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맛깔스런 소통의 구현은 은혜의 열매이다. 소금이 맛이라는 열매만 산출하고 자신은 종적을 감추듯이 자신이 전면에 전혀 부각되지 않으면서 만남을 윤택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 어떠한 상황이든 마땅히 대답할 말을 깨닫는다.

하여 소통의 진정한 달인은 달변가가 아니라, 대화의 주도권을 거머쥐지 않고 말수도 적으면서 여전히 마땅히 할 말을 발설하여 소통의 참맛을 더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마땅히 할 말"의 내용이 생략되면 대화의 처세술 이상의 의미는 파묻힌다. "마땅히 할 말"은 "그리스도 예수의 비밀"이란 골로새서 전체의 주제가 바로 은혜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처럼 은혜로 소금맛을 내는 소통의 참맛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달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비약인가? ^^

2013년 9월 6일 금요일

본보기 리더십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5:3)

사람을 움직이는 리더십의 스타일이 다양하다. 대체로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발산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떤 사람은 리더십의 수단으로 분노를 사용한다. 어떤 행실에 노를 격발하면 상대방은 이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된다는 판단에 급속하게 도달한다.

노를 두어번만 반복하면 상대방의 처신에 각인된다. 눈치가 9단인 사람의 경우에는 노의 단일한 격발로도 학습효과 만점이다. 문제는 이 짭짤한 효과에 중독되어 분노는 서서히 인격으로 스며들고 영혼을 결박하여 분노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다는 거다.

눈물과 슬픈 목소리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인 리더십도 있다. 주체할 수 없도록 쏟아지는 눈물과 슬픔을 말하는 게 아니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출된 방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문제는 연출이 신속하고 매끄러워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거다.

주로 약자들이 구사하고 아쉬울 게 없는 강자들은 매료되지 않는 방식이다. 물론 약자나 강자라는 말은 고정된 상태나 신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 아쉬워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절박한 상황에 처한 모든 이들이 약자의 자리에 있고 나머지는 강자인 거다.

강하고 부한 자들의 리더십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에게 가용한 권력이나 금력 의존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사람의 마음이 가볍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적인 속성을 가졌는데 인간적인 수단으로 정직하고 진실한 움직임이 유발될지 의문이다.

상대방의 정서적 신경을 움직이기 위해 상처 받기에 급속하고 눈물과 슬픔을 조장하는 것은 비록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어도 본인에게 돌아오는 피해는 막심하다. 물론 타인에게 상처나 슬픈 눈물을 유발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자의 행동을 자제하게 만든다.

몇 번은 제대로 먹힌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눈물이나 슬픔이란 영혼의 섬세한 작용과 아름다운 향기까지 얼마든지 언제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인상을 해프게 남발한다. 결국 타인으로 하여금 나의 가장 깊은 은밀한 영역까지 불신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감수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의 버릇을 고치고 뜻을 관철시킬 때에 주로 심리적인 위협을 동원한다. 아이들은 무서워 겉으로는 부모의 의도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속으로는 상처를 받고 부모의 어그러진 방식을 모방하고 타인에게 신속히 적용한다. 못난 성격과 습관이 대를 이어간다.

가장 좋은 리더십은 가장 좋은 방법을 요청한다. 타인으로 하여금 되기를 원하는 됨됨이와 삶을 스스로 본보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아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기도의 횟수가 밥그릇의 수만큼 많았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이 되도록 내가 먼저 그런 경건한 사람이 되고 삶을 살아내는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절감한다. 내가 안되니까 아이들의 됨됨이와 삶을 움직이는 다른 인위적인 수단에 호소하게 된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본보이는 리더십의 부재가 늘 아쉽다.

2013년 9월 5일 목요일

인생은 안개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4)

사도는 오랜 발전의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이루어진 유구한 문명의 생산자라 할 인간의 존엄을 가볍게 생략한 채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안개의 덧없는 운명으로 묘사한다. 당연히 실체도 없고 수명도 짧은 안개와 비교되는 기분이 유쾌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햇살 앞에 자신의 뿌연 존재감을 급히 상실하는 안개는 인생의 군더더기 없는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도의 입술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인간이 안개에 불과하다. 땅에서 무엇하나 움켜잡을 손이 없는데도 욕심의 운무는 온 지면을 다 덮을 기세다.

사도 야고보가 우리에게 권하는 삶은 악하고 허탄한 자랑을 중단하고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선을 행하란다. 안개와 같은 인생이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 바로 선행이다. 그러나 그 선행은 자랑의 빙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드러나는 통로이다.

태양이 떠오르면 안개는 자취를 감추듯이 하나님의 찬란한 속성을 드러낸 후 우리의 존재와 자랑으로 뿌엿게 가려서는 안되겠다. 안개가 안개이길 고집하면 스스로 안개의 덧없음에 머물지만 사라지면 비로소 가치와 의미를 확보하는 역설의 존재가 바로 안개 되시겠다.

스스로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부서지고 산화되는 존재라며 탄식의 바닥, 두들기지 마시라. 오히려 인생의 본질에 더욱 가깝도록 떠밀리고 있음에 감사하자. 인생의 실상을 가장 선명하게 관찰하는 곳이 바로 바닥이다. 우리는 원래 안개였다. 높은 구름은 태양만 가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높은 구름에 부러움의 시선을 빼앗긴 채 원망의 생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

2013년 9월 4일 수요일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마시라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시62:10)

칼빈의 말이 떠오른다. 가진 자를 시기하는 사람은 가졌을 때 자랑하게 되고 가졌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없을 때 불평하게 된단다. 변동될 것들은 변동이 생리다. 부화뇌동 마시라는 이야기다. 재물은 변동될 것들의 총칭으로 영향력, 능력, 군사력, 금력 등을 의미한다.

시인이 그러한 재물의 증대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권면한 것은 단순히 그런 증대를 추구한 이후 마음의 지혜로운 처신을 요구하는 사후처리 주문이 아니다. 재물의 증대에는 아예 마음의 도모도 접으라는 보다 근원적인 태도까지 내포되어 있다. 뜨끔하실 게다.

재물의 변동에 대한 마음의 상습적인 요동은 결국 일시적인 것에 중심이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많은 성과를 올려 급여가 상승하고, 직위가 올라가고, 거주지와 차종의 고급화가 이어지고, 그런 나를 부러움의 눈동자가 집단으로 응시해도 마음에 두지 마시라.

반대로 재물의 다양한 감소가 쓰나미 수준으로 덮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 없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이 변함없이 계시니까. 세상에는 원래 우리의 항구적인 소유물로 거머쥘 수 있는 것이 없다. 대체로 실상이 과장된 거품이나 가식이나 허영일 뿐이다.

모든 가변적인 상황에서 무엇보다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오는 마음을 지키는 게 상책이다. 재물의 변동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처방은 변동되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의 뜻과 진리에만 마음을 두라는 보다 적극적인 해석의 여지를 우리 각자에게 남기고 있다.

오늘은 내 마음이 무엇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지 그 세미한 진동을 살피고자 한다.

2013년 9월 3일 화요일

갚을 것이 없으므로 복이다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눅14:13)

나에게 유익을 끼칠 가능성이 높은 사람과의 밀착교제 유혹이 수시로 고개를 드리민다. 가난하고 연약하여 어떠한 면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들에 대해서는 의식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유력자의 행보에는 민감하고 그를 향한 대접의 손길은 민첩하다.

풍성한 식탁과 유쾌한 오락을 수반하는 잔치는 주로 청탁과 사례가 막후에서 벌어지는 자리이다. 당연히 주인의 근거리 초대석은 부하고 유력한 각종 실세들의 독차지가 상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의 필름이 끊어지는 명령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다.

"너희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는 준행이 난감한 명령이다.

그렇게 명하시는 이유는 연약한 자들에겐 갚을 능력이 없으므로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이라 하신다. 땅에서 어떤 보상을 되돌려 받는다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진술되고 있음과 부활의 때에 주님에 의한 갚음이 있을 것이라는 대목이 특이하다.

이는 믿음과 맞물린 발상의 전환이다. 우리의 보상은 땅에서 결국은 썩어 없어지는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과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신다고 믿음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에서 찾아진다. 땅에서의 보상에 대한 기대는 접으라는 이야기다.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보상이란 진리가 우리의 삶을 결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된다"는 주님의 교훈은 소의 귀에 들린 무의미한 경이겠다.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태도에도 신앙의 상태가 짙게 묻어난다...

2013년 9월 2일 월요일

삶의 소중한 계기들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 (히4:12)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다. 자신의 어떠함을 반듯한 거울에 비추어 날마다 점검하지 않으면 신처럼 스스로를 높이거나 짐승처럼 스스로를 폄하하는 지극히 가변적인 존재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가장 온전한 성경의 거울을 통하여 여호와를 신으로서 알고, 인간을 인간으로 알고 자연을 자연으로 아는 지식의 가장 건강한 질서가 성경으로 확립된다. 

삶에는 말씀의 거울에 나 자신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다양한 계기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평소에 의식하지 않았던 자신의 치부까지 구석구석 확인하고 교정할 수 있는 계기들로 대립과 갈등과 손해와 억울과 부당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을 듯하다. 물론 그러한 상황이 펼쳐질 때마다 서둘러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세우지 않으면, 가까운 원인을 궁극적인 원인인 것처럼 반응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제거하는 비극이 빚어진다. 

사람에게 반응하는 순간 사람에게 비추어진 나의 과장되고 축소되고 왜곡되고 어그러진 자아만 확인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나의 있는 그대로를 만날 기회는 상실하고 하나님은 무시된다. 하나님께 반응할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 앞에서의 나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삶의 문맥을 생략하고 폐쇄된 동굴에 들어가 자기만 홀로 남은 상황에서 스스로를 관조하면 자아도취 가능성만 짙어진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삶의 계기들이 중요하다.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시장에서 가정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알고, 나 자신을 만나 나를 알아가는 계기들로 충만하다. 세상에서 떠나는 방식으로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지 않고 삶의 정황들 속에서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야 하겠다.

Melanchthon의 간략한 신학 공부법

Brevis discendae theologiae ratio (1530)

1) 성경을 통독할 것 (tota Biblia ordine legenda): 난해한 구절이 발견되면 주석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면함

2) 성경의 중요한 구절들은 선별하여 신학적 논제들 속에 배당할 것(excerpendae praecipuae sententiae, quae sunt in locos communes digerendae): 특별히 신학적 용어에 대해서는 자신의 Loci communes 사용을 권함

3) 기독교 교리의 총화를 담아낼 어떤 방법 혹은 체계를 생산할 것(informes methodum aliquam): 이를 위하여 칭의와 율법의 사용과 율법/복음의 차이에 대하여 논하는 로마서가 적격이라 한다.

2013년 9월 1일 일요일

신입생 환영회

이제 초가을 문턱에 막 들어선 그랜드 레피즈의 한적한 공원에서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다. 학생회 임역원이 쏟은 사랑의 수고로 마련된 즐겁고 상쾌하고 화목했던 자리였다. 칼빈에서 누적된 짬밥수를 기준으로 설교자를 세우려는 학생회의 새로운 방침을 따라 난 설교단에 일순위로 서야 했다. 다음 타선으로 박사과정 학생들은 긴장하고 계시라는 회장님의 '무서븐' 광고도 뒤따랐다.

나는 신입생의 새로운 유학생활 첫걸음을 격려하는 따뜻한 언사나 낯선 언어로 시작될 학업 걱정으로 팽팽해진 그들의 긴장을 해소하는 유쾌한 유머어 한 토막도 삽입하지 않고 그냥 생명과 죽음조차 수단으로 삼으신 예수님의 복음전파 및 섬김의 본보기를 따라 날마다 죽음을 지불하는 섬김의 사역자가 되자는 뭉퉁한 교훈만 격하고 묵직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을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로 보셨다는 사실도 어색할 정도로 거듭해서 꼬집었다.

그런데 단에서 내려올 때 미안한 마음이 썰물처럼 밀려 왔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는 타이밍의 적시성이 중요함을 지적한 지혜자의 말씀이 마음에 걸려서다. 복음을 위해 주님처럼 죽음을 수단으로 삼자는 말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타국에서 만만치 않은 학업의 첫출항을 앞둔 신입생들 귀가에는 버거웠을 듯해서다...ㅡ.ㅡ 하여 말씀이 신입생의 마음을 더욱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오더라. 

이번에도 칼빈의 신입생들 면면을 살펴보니 귀한 분들이 많이들 오셨다. 신앙과 학업과 인격과 삶에 큰 진전과 건승 있으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