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31일 화요일

최고의 배우자감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31:30).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성은 뭇 남성들의 배우자감 일순위다.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지나간다. 그러나 진정한 칭찬과 보상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성에게 돌아간다. 결혼은 평생에 최대의 안건이고 당연히 최고의 판단력이 요구된다.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남성이나 여성 만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요즈음, 결혼을 고민하는 청년 기독인은 판단력을 여호와 경외의 여부에 전적으로 양도하라. 

2016년 5월 30일 월요일

형제비방 금지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약4:11). 이는 판단이나 정죄가 입법자와 재판관의 몫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말씀이다.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면 율법의 집행자가 된다. 그러나 그럴 자격이 안되는데 판결봉을 휘두르기 때문에 문제라고 야고보는 지적한다. 야고보에 의하면, 만물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절대자가 유일한 자격자다. 율법의 제정과 집행은 그분의 고유한 권한이다. 능히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 그분만이 판결한다. 우리가 판결하면 월권이다. 우리는 형제의 잘잘못을 보면 회개를 독려하고 불쌍히 여기고 돌이키게 하고 사랑으로 보듬어야 한다.

2016년 5월 29일 일요일

하나님을 아는 사랑

사랑하지 않는데도 깨달음의 심연으로 가겠다는 것은 무모한 탐학이다.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그와의 간격이 제로인 사랑의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은 그 사랑에 살을 입히는 과정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방법과 첩경과 비책은 바로 사랑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비로소 읽히도록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지식과 친밀과 사랑은 의미상의 동의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한 실체의 다른 형식이다. 하나님 사랑에는 권태기가 없다. 사랑하고 사랑해도 끝이 없어서다. 뭐...이런 사랑이 다 있다!!!

2016년 5월 27일 금요일

시기 선용법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약3:16)

야고보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의 원흉으로 시기와 다툼을 지목한다. 지혜자는 아마도 같은 맥락에서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라 하였다. 이는 시기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고 그러니까 시기하면 안된다는 의미이다. 시기하면 행위의 기준이 시기하는 대상에게 빼앗긴다. 그 대상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기준과 중심의 변질에서 혼란과 모든 악한 일들이 초래된다. 시기의 원흉을 알아야 시기 해소법이 보인다.

시기의 원흉은 빈곤이다. 하나님에 대한 빈곤이 타인과의 비교를 유발한다. 비교에서 상대방의 우월이 확인되면 열등감에 빠지고 시기에 돌입한다. 시기는 뼈를 썪게 만든다는 지혜자의 교훈은 시기의 일차적인 피해자가 바로 자신임을 가르친다. 그러나 주님으로 충만하면 비교할 필요도 없고 열등감의 이유도 없어지고 뼈의 썩음도 예방된다. 비교와 열등감과 시기는 우리의 영적 빈곤을 고발한다. 동시에 영적인 회복의 독촉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공존한다. 시기의 막대한 에너지를 선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나보다 잘 난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시기한다. 그때마다 주님의 충만에 적신호가 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영적 회복을 촉구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알람이다. 시기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

2016년 5월 22일 일요일

나의 도움은 어디에?

사람의 도움은 헛되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런데 늘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민망한 손을 뻗으려고 한다. 사람의 도움을 성패의 기준으로 삼아서다. 사람의 대체적인 근성이다. 그러나 나의 진정한 도움은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가 도움의 유일한 근원적 출처시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회이든, 국가이든, 세계이든 단위를 불문하고 도움의 동아줄은 하나님 뿐이시다. 어디이든 위험한 기운이 감돈다면 아마도 그건 하나님의 작심하신 호출이다. 간단하다. 도움의 근원이신 그분에게 나아가면 된다...

2016년 5월 18일 수요일

자기부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고려되고 존중되고 수용되는 삶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삶을 자아의 좁은 공간에 스스로를 강금하는 교묘한 속임수다. 넘어가지 마시라. 내 생각이 무시되고 내 기호가 거절되고 내 계획이 무산되고 내 견해가 배제되면 견디지를 못하는 사람들은 무시와 거절과 무산과 배제가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것들을 경험하는 것이 좋다. 성경은 죽고자 하면 산다고 가르친다.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교훈한다. 이 교훈이 죄악된 우리를 파고들면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인내해야 한다. 성경이 명시한 것은 만물과 만사의 항구적인 질서요 규범이다. 무시하면 인내의 고통보다 더 혹독한 대가를 필히 지불해야 한다. 경건의 마지막 장벽과 관문은 자기 자신이다. 눈 딱 감고 자신을 지나가야 한다. 자기애에 빠져 경건의 발목이 잡히는 일 없도록 자기를 부인하는 지속적인 연습에 몰두해야 한다. 

믿음의 학교

내 연구실은 믿음관에 있다. 기독교 사학 전주대는 믿음으로 살리라는 사실을 아침마다 읊조린다.

2016년 5월 17일 화요일

하나님 의존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84:12)

의지하는 것은 비굴함과 연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영원토록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하나님 의존은 창조의 질서이고 존재의 본질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자. 모든 일에 항상 영원토록 하나님을 의지하자. 이것이 가장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이며 그런 모습에서 인간의 참된 정체성은 확립된다. 

2016년 5월 16일 월요일

시대의 표적을 읽는 교회

한병수/전주대학교 교회사 교수

어떤 블로거는 오늘날 시대의 키워드로 O2O, IoT, Big Data, AI, Cloud 등을 언급했다. O2O (Offline to Online)는 오프라인 서비스와 사물들이 온라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이고, IoT (Internet of Things)는 모든 것들이 인터넷에 연동되는 현상이고, Big Data는 가공되기 이전 어떠한 맥락과 방향도 없는 순전한 1차 데이터를 가리키고, AI(Artificial Intelligence)는 기계에 정신적인 기능이 주입된 인공적인 지능을 일컬으며, Cloud는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가상의 온라인 공간을 가리킨다. 이는 인터넷 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이며 오늘날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최근에는 구글의 대표적인 인공지능 컴퓨터인 알파고와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이 대결해서 인간이 기계에게 패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인간의 유익과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기계가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졌으며 이제는 인간이 기계에게 배워야 하고 지능적인 주도권을 기계에게 양도해야 하는 상황의 도래를 입증한 것이어서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이에 대하여 한 히브리대 사학과 교수는 “2100년 이전에 현생인류 종말”이 올 것이고 나아가 새롭게 등장하는 인류는 고도로 발달한 기계와 인간의 조합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로 사람에게 불가능한 많은 문제들이 과학의 최첨단 인공물에 의해서는 해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리도 사라지고 인간의 존재감도 감소되고 생존의 위협은 증대되고 있다. 사실 인공물에 의해 인간이 위축되는 현상은 우리에게 새롭지가 않다. 인간보다 뛰어난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인지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력은 매보다 초라하고, 청력은 박쥐보다 떨어지고, 이빨은 사자보다 연약하고, 발톱은 독수리에 못 미치며, 다리는 치타보다 부실하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공물에 있어서도 잠수함과 비행기와 계산기와 레이더와 자동차가 인간보다 여러 부분에서 뛰어나다. 그러나 아무리 인공물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우주의 장엄함에 비하면 찻잔 속의 미미한 태풍이다.

시편 8편의 시인은 “주의 손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보고서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도대체 뭐라고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경탄을 쏟아낸다. 오늘날 눈의 기능을 확대한 과학의 도구로 관찰하고 추론한 결과에 의하면, 우주에는 천억 개의 별들을 가진 은하계가 천 억 개나 존재한다. 즉 10의 22승 개의 별들이 있다는 이야기다.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다”(렘33:22)고 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주장은 진실이다. 이토록 무수한 별들 중의 하나인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에 과도한 찬사와 경악과 공포와 예단은 금물이다. 아무리 사람들을 놀라게 할 과학도 이사야가 표현한 것처럼 기껏해야 하나의 물방울(사40:15)에 비유되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문맥 안에서는 그렇게도 높임을 받는 신비나 기적이나 혁명도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에 비교하면 그 수준이 너무나도 미미하다. 사실 인간의 참된 존엄성과 존재감은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자신의 가문이나 신체적인 조건이나 사회적인 지위의 높낮이나 빈부의 크기나 영향력의 다소나 권력의 강약은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인자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마지막 시대의 표적들 혹은 징조들(σημεlα)을 거론하는 문맥에서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할 것”(마24:4)을 당부했다. 인간문맥 안에서 조율되고 가치화된 기준과 해석과 판단에 쉽게 휘둘리지 말라는 권면이다.

인간이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며 씨앗을 심고 열매를 거두어서 연명하는 농사의 시작이나, 씨앗 자체를 개량하여 변종의 양식을 생산하는 GMO 기술이나, 운신의 폭을 넓혀서 하늘을 나르고 바다 위와 아래로 움직이고 땅 속으로도 다니고 심지어 대기권도 출입하는 과학의 발달이나, 나아가 정보의 분량과 정보처리 능력 및 속도를 높여 인간보다 많이 알고 보다 객관적인 데이터에 의존하여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로봇의 제조가 뭐가 그리도 놀라운가! 하나님은 하루만에 아궁이에 들어갈 모든 들풀도 입히시고 까마귀도 먹이시며, 광야에서 재료도 없이 200만인분의 만나를 날마다 무로부터 생산하신 분이시며, 모든 곳에 거하셔서 이동의 필요조차 없으신 분이시며, 지식과 지혜에 있어서는 그 부요함을 측량할 수 없어서 땅에서의 최대 지식과 최고 지혜도 우매함일 뿐이라고 평하시는 분이시며, 주먹 사이즈의 전두엽에 2억 5천의 단백질을 만드는 뉴런을 약 1천억 개나 넣으시되 하나의 뉴런에 1천 개 이상의 경이로운 연결망을 만드신 분이시다.

사람의 발견은 다 사람들 사이에 합의된 기준을 따라 사람들의 눈에 놀라운 뿐이다. 교회는 “사람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인간의 존재론적 무게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존엄성은 창조자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것은 인공지능 로봇을 비롯한 신체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환경이 함부로 변경하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모든 부분에서 확인되나 그 근원은 제거하지 못하도록 가리워져 있다. 이는 인간적인 조작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도록 신적인 지혜로 이루어진 의도적 은닉이다.

시대의 표적은 무엇인가? 앞에서 몇 가지 살펴본 것처럼 사람들이 열광하는 최첨단 과학의 현란한 표적들이 세상에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자 그들의 기호와는 달리 보여줄 것은 그저 “요나의 표적” 뿐이라고 응수했다. 이 표적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처럼 인간에게 진실로 필요한 표적들 중의 표적은 사람들의 기호와는 무관하다. 교회도 각 시대마다 등장하는 사람의 미혹 혹은 혼미한 징조들에 휘말리지 말고 교회가 마땅히 세상에 보여야 할 표적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것을 꿋꿋이 증거해야 한다. 현대의 급속한 문화적 변혁에도 무지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나아가 그 변혁의 파고에 휩쓸려 표류하지 않고 견고하게 교회에 맡겨진 표적 증거자의 고유한 사명에도 충실해야 한다.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시대의 불변적인 표적이다. 인간의 유사 표적들이 창궐하면 할수록 참된 표적의 진가(眞價)와 갈증은 더욱 증대된다. 이 사실을 교회는 늘 응시해야 한다.

출처: 신앙세계 2016년 4월호 

2016년 5월 14일 토요일

스스로 숨어계신 하나님

"스스로 숨어계신 하나님"(사45:15)을 생각한다. 스스로 보이시는 분이라면, 그 보여짐 때문에 인간은 신을 향한 본래의 태도를 수정하고 다듬는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수한 태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감추셔서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보이지도 않고 우리가 타인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비로소 속살을 드러낸다. 스스로 숨어계신 하나님은 사람들에 의한 하나님의 인위적인 보여짐을 우상으로 여기신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대체물은 진실로 우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그 어떠한 가시적인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감추시는 이유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그대로 드러나고 동시에 가장 깊고 순전한 신뢰로의 초청을 위함이다. 그 신뢰는 다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견인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구축된다. 그러하기 때문에 가장 깊고 순전하다. 하나님의 의도적인 감추심이 어떤 이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로 여겨지고 어떤 이에게는 신뢰의 절정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스스로 감추심은 우리에게 깊은 차원의 유익이다. 

2016년 5월 13일 금요일

2016년 5월 7일 토요일

미세먼지 측정 사이트

오늘날 사람들은 날씨를 맑음이나 흐림이나 눈이나 비의 유무보다 미세먼지 혹은 초미세 먼지의 농도를 근거로 이해한다. 우리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날씨의 상태를 평가하는 잣대로 삼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미세먼지 농도는 사실 인간이 지금까지 발전시켜 온 문명의 민낯이다. 전자파 농도와 방사선 농도와 변형된 호르몬 농도와 미세먼지 혹은 초미세먼지 농도는 자연의 지나친 인간화가 초래할 위험에 대한 경고이고 어쩌면 본격적인 재앙의 예고편에 불과하다. 이처럼 천기와 시대의 표적이 연동되어 있는 지금의 상황은 다소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