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3일 화요일

가슴이 뛴다

한 학기동안 20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들이 노트에 남긴 강의의 흔적들을 설레이는 시선으로 더듬는다. 짧은 한 학기동안 변화된 아이들의 마음이 투영된 문자들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눈물이 눈시울을 서서히 적시더니 급기야 둥글고 묵직한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이렇게도 감사할 수가...아이들의 생각이 변하였고 마음이 변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 믿겠단다. 성경이 보여준 교회, 가겠단다. 그리고 타인을 위해 섬기고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겠단다. 자신의 출세를 위한 이기적인 계획들을 접겠단다. 무수히 많은 증인들이 부를 챙기고 축적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나누고 선용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았다는 사실이 이기적인 성공을 위한 맹목적인 질주의 발목을 잡았단다. 하나님을 알든 모르든 청년들의 가슴에 진리가 들어가면 변화가 일어난다. 진리가 만드는 기적이다. 사람의 조작과 강요로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결과를 이번 한기에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2016년도 2학기를 마감하는 지금, 가슴이 뛴다.

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소통이 복이다

오늘 교직원 종강예배 설교자인 임기수 목사님은 언어의 분열로 말미암은 소통의 부재 자체가 바벨의 저주라고 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는 것 자체가 벧엘의 복이라고 했다.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소통이고 저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불통이다. 인간사 속에서도 이것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즉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이, 직장에서 CEO와 직원이, 국가에서 지도자와 국민이 서로 소통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이며 재앙이며 불행이며 저주라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들음에서 믿음이 나오고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2016년 11월 27일 일요일

탐욕과 강도

"누가 탐욕스런 사람인가? 충분함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누가 강도인가?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을 빼앗아 가는 사람이다. 관리하도록 너에게 주어진 것을 너의 소유물로 여긴다면 너는 탐욕스런 사람이며 강도가 아니겠나? ... 너가 거머쥐고 있는 빵은 굶주린 이의 것이며 너가 옷장에 보관하고 있는 옷은 벌거벗은 사람의 소유이다. 너의 신발장에 썩어가는 신은 맨발로 다니는 사람의 것이며 네가 금고에 숨긴 은은 빈곤한 사람의 소유이다."

- Basilius, <내 곳간을 헐리라>(Destruam horrea mea), Vi.iv.

통치와 공직자의 약점

악하고 독재적인 권력자는 약점이 많은 공직자를 좋아한다. 왜?
그래야 그 공직자가 소신대로 일하지 않고 권력자의 눈치를 보게 되니까.
공직자가 약점이 없으면 권력자는 공직자를 다루기가 어렵다.
공직자들 중에 "혼이 비정상"인 분들이 많은 이유는 권력자의 지배력 강화 때문이다.

훌륭한 권력자는 약점이 최대한 적은 공직자를 선출한다. 왜?
국민들의 유익을 극대화할 사람들이 공직에 적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서로 충돌하고 대립하고 분열되는 모습이 간간이 발견된다.
하지만 그것은 적당하고 필요한 권력의 견제와 균형 현상이다.

2016년 11월 23일 수요일

2016년 11월 22일 화요일

이것이 궁금하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시106:2). 신적인 권능의 분량은 인간의 언어로는 담아질 수 없는 무한대 수준이다. 주님께서 받으셔야 할 합당한 찬양은 단 한 순간도 침묵하지 않고 온 인류의 입술로 줄기차게 선포해도 다 커버할 수 없는 분량이다. 이러한 생각을 시인은 어떠한 하나님을, 하나님의 어떠한 것을 경험하고 보았길래 마치 지나가듯 표출할 수 있었을까? 

충성된 종의 아름다운 고백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눅17:9-10)

2016년 11월 10일 목요일

브라운의 설교법

1. 모든 심령과 모든 몸짓으로, 즉 눈과 눈, 얼굴과 얼굴, 마음으로 마음으로 청중과 직접 소통하라.
2. 설교는 청중과 나누어야 하는 진지하고 신중한 교류이자 대화이다.
3. 설교를 준비하는 단계부터 청중이 자신의 눈앞에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4. 마치 설교원고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설교원고 사용하라.
5. 더 좋은 방법은 종이에 텍스트화 되지 않고 내면화된 원고이다.
6. 설교는 청중의 마음 깊은 곳까지 이르러 그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말씀으로 휘젓는 사역이다.
7. 청중과 직접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적절하고 다양한 표현법을 엄선하여 노트하라.
8. 전체 심령을 반영하는 설교 대지의 기억과 판단과 감정을 통합하는 훈련에 몰입하라.
9. 묵상되고 정리된 말씀의 표현들을 통해 속으로 생각하고 논쟁하고 훈계하고 호소하고 간구하라.
10. 가장 탁월한 설교의 형식은 쉬움이며, 청중과의 엄숙하고 진지하고 직접적인 대화여야 한다.
11. 성경의 표현들이 입술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숙지하고 암기하고 무수히 발화하라.
12. 경건한 사람의 설교는 설교에 성경 텍스트가 적고 올바른 형식을 따르지 않더라도 탁월하다.
13. 초라한 설교를 가리려고 동원되는 현란하고 전문적인 수사들의 남발을 경계하라.
14. 동일한 단어의 기계적인 반복을 피하고 다양한 형용사의 적절한 활용에 능숙하라.
15. 생동감을 가지고 청중의 관심을 끌어내고 설교자와 관계를 맺는다고 느끼도록 하라.
16. 말씀의 영으로 설교하는 법을 배우시라.
17. 주제의 통일성 속에서 접근과 표현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설교여야 한다.
18. 선택된 본문보다 다른 본문에 주제와 시간의 더 많은 분량을 할당하지 말라.
19. 능력 있는 설교는 물론 하나님께 의존하나 하나님은 설교자의 인품을 수단으로 삼으신다.
20. 설교단에 오르기 전에 드리는 깊고 집중적인 기도로 설교를 주님께 맡기는 심령을 가지라.
21. 저급하고 비열한 자랑이나 이윤을 의식하고 추구하는 설교가 되지 않도록 목적을 점검하라.
22.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내고 영혼의 구원과 성장이란 목적을 지향하는 설교여야 한다.
23. 설교자가 먼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내리는 명령의 통제에 따르고자 하라.
24. 증거이든 예화든 적용이든 최고의 재료는 영적으로 노련하게 엄선된 성경 텍스트다.
25. 간결한 서론으로 설교를 열고 설교의 반복 없이 청중의 가슴을 움직이는 적용으로 끝맺으라.

2016년 11월 5일 토요일

비통하고 부끄럽다

의인이 융성하면 백성이 기뻐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한다 (잠29:2).

1.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총체적인 비탄에 빠졌으며 매머드급 탄식을 쏟아내고 있다. 지혜자의 진단에 의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권세의 칼잡이가 악해서다. "비선실세" 문제는 본질적인 원인이 아니라 악한 지도력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정부든 기업이든 학교든 종교 기관이든 탄식의 일차적인 원흉은 악한 지도자다. 지도자의 변화 없이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다.

2. 당연히 백성의 탄식을 해소하는 무엇보다 우선적인 단계는 악한 권세의 제거겠다. 나는 악한 권세의 조속한 제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의인의 융성도 병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지도자의 공백을 더 악한 지도자가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민적인 탄식의 순환을 끊으려면 의인들이 나타나고 융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그런데 의인의 배출은 정치의 영역과 기능과 능력을 벗어난다. 그것은 종교의 영역이며 종교의 책임이며 종교의 기능이다. 교회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정치는 사악한 권세의 제거에 집중해야 하고 종교는 의인의 융성에 골몰해야 한다. 칼빈의 생각처럼, 하나님은 세상에 당신의 은총을 수여하는 두 가지의 외적인 수단으로 교회와 정부를 세우셨다.

4. 각 기관에게 부여된 고유한 권한과 기능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가지지만 하나의 기관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합당한 것도 아니다. 각 기관이 저마다의 책임에 충실해야 국민의 탄식은 일소되고 사회는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게 된다. 기독교가 주목하고 진력해야 할 문제는 의로운 사람들의 왕성한 배출이다.

5. 지금 대한민국 전체가 신음하고 있는 국가의 총체적인 부실의 배후에는 기독교의 고질적인 직무유기 문제가 있으며 나에게는 이것이 일차적인 관심사다. 대한민국 정치계는 교회의 장로와 집사의 신분을 가진 상당수의 정치인이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국민의 탄식을 촉발하고 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것이 교회의 직무유기 현상이다.

6. 교회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들을 배출해야 한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인생관의 소유자를 산출해야 한다. 삼일운동 시기처럼 불의에 분노하고 의에 굶주린 경제인과 정치인과 예술인과 교육자를 길러내야 한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 이러한 인물들이 희귀한 것은 기독교의 책임이며 무엇보다 목회자의 책임이다.

7.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의로운 인물들을 배출하여 사회와 국가의 기강을 바르게 확립하지 못하는 부실한 목회자 문제의 배후에는 신학교가 있다. 신학의 건강과 깊이보다 지연과 학연과 혈연을 따라 교수진을 구성하고 금력과 정치력의 동원 없이는 불가능한 신학교의 운영 실태가 바로 국민적인 탄식의 진원지다. 그래서 신학교의 개혁이 가장 시급하다.

8. 백성의 탄식은 지도자의 악함에서 나오며, 지도자의 악함은 의인의 부재에서 비롯되며, 의인의 부재는 기독교의 부패와 나태의 결과이며, 기독교의 부패와 나태는 목회자의 과오이며, 목회자의 전인격적 부실함은 신학교 교수들의 책임이다. 그래서 무당과 주술과 독재와 사익이 국정을 붕괴시킨 현실의 구체적인 실체를 보면서 더더욱 고개가 숙여진다. 참으로 부끄럽다.

9. 코람데오 정신으로 신학교 이사회는 올바른 신학과 경건을 골고루 구비한 교수들을 발굴하고, 신학교 교수들은 성실하고 진실하고 경건한 목회자를 배출하고, 목회자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옷입은 각 분야의 의로운 성도들을 양육하고, 성도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와 예술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의로움을 수혈해야 한다.

10.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온 국민은 각자가 선 자리에서 수습의 팔을 걷고 때로는 탄식을 쏟아내고 때로는 분통을 터트리고 때로는 시국선언 낭독하고 때로는 담당자를 찾아가고 때로는 단독으로 혹은 집단으로 국민의 견해를 표명하고 때로는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고 자복하는 기도의 자리에 엎드리고 때로는 불의를 질타하고 의를 촉구하는 집회로 합력해야 한다.

11. 우리의 총체적인 부실로 말미암은 초유의 비통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긍휼을 잊지 않으신다. 각 분야에서 소수의 의로운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고 활동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는 약자와 빈자를 외면한 채 "권력자를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는 성경의 교훈을 외면하고 권력에 빌붙어 명성과 이권을 챙기려고 했던 모습부터 자백하고 돌이키자. 그리고 개혁의 시선은 의인의 융성을 견인하는 신학교의 회복에도 이르기를 소원한다.

2016년 11월 3일 목요일

20대를 위한 조언

수업 중에 한 학생이 질문했다. 20대에 반드시 해야 할 지성인의 준비는 어떤 것이냐고.

1. 책벌레가 되라. 정보의 시대에는 정보를 취득하고 정리하고 분석하고 활용하는 일에 능숙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일간지의 순발력, 주간지의 분석력, 월간지의 비평력, 베스트셀러의 동시대적 감각, 고전의 은은한 깊이를 모두 골고루 구비해야 한다. 그러면 어떠한 종류의 사고를 가진 사람과도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고 각자에게 긴급하고 긴요한 필요들을 채워주는 사람으로 준비된다. 신문지만 펼치는 사람들의 사고는 민첩하나 경박하고, 주간지만 펼치는 사람들의 사고는 신중하나 자신의 고유한 분석력은 무뎌지며, 월간지만 보는 사람들의 사고는 다소 원숙하나 시세를 따라가는 순발력이 떨어지며, 베스트셀러만 보는 사람들의 사고는 세련되나 현장감이 둔해지며, 고전만 읽는 사람들의 사고는 은은하고 심오하나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뜬구름 지식인의 헛기침 내뱉기에 민첩하다.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골고루 섭렵하고 섭취하고 종합해야 한다.

2. 무수한 인격체와 접촉하라. 책벌레의 문제는 독자의 일방성에 있다. 텍스트는 반응하지 않고 그저 독자의 눈길이 머물면 그때서야 정해진 반응을 보인다. 그저 순응적인 텍스트에 길들여진 책벌레와 대화하면 답답하다. 그에게서 태도의 독선과 주장의 일방성이 느껴진다. 이는 예측이 불가능한 타인과의 인격적인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정해지지 않은 언어와 생각을 섞기 때문에 상대의 입장을 예단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고 경청하게 된다. 경청의 태도는 소통의 영순위 기본기다. 경청의 태도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성품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부지런히 교류한 사람들은 소통의 감각이 남다르다. 대화의 완급과 경중과 명암 조절에 능숙하게 된다. 이렇게 준비된 사람들은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떻게 다가가고 대화하고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신속하게 파악하고 능숙하게 대처한다.

3. 문화가 다른 지역에서 살아보라. 언어와 민족과 문화가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총체적인 학습이다. 좋은 성적이나 졸업장을 취득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타지에 체류하는 기간동안 경험한 모든 것들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청년의 재산이다. 소통을 위한 공통의 토대가 전무한 곳에서도 소통을 연습한 사람은 기본적인 공감대가 깔린 한국 안에서는 어떠한 사람과도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시간이 흐를수록 타지에서 살 기회는 줄어들고 체험의 효과도 떨어진다. 청년의 푸르른 때에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인종과 언어와 문화와 지역을 경험하라.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후회가 없으며 경험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유익하다.

2016년 10월 30일 일요일

오~~ 주여!!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기강이 완전히 무너진 대한민국 상황을 모두 아시고 허락하신 만물의 통치자 우리 주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한 무속적인 자연인이 오랫동안 국가의 최고위 직분을 이익의 방편으로 삼아 국정을 농단하고 유린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온 국민의 참담한 마음은 이보다 더 추락할 수 없는 비참의 맨 밑바닥에 내동댕이 쳐져 있습니다. 주여,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을 드러낼 정직하고 공의로운 공직자를 세워 주옵소서.

이러한 현실을 조정한 다수의 어두운 정치적 경제적 원흉들이 곳곳에 있겠지만 저의 가슴을 더더욱 아프게 만드는 것은 주술이 국가의 규범으로 둔갑하고 사욕이 국정의 방향을 좌우하는 조국의 현실에 대한민국 교회의 추악한 실태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작금의 무속적인 대한민국 정치는 마치 돈과 권력과 섹스라는 삼중적인 주술에 홀린 교회의 적나라한 치부를 고발하는 듯합니다. 주께서 아담을 중심으로 6일간의 창조를 이루시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만물과 역사를 이끄신 것처럼, 지금도 주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를 중심으로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저는 믿습니다. 교회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주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교회를 섬기고 양육하는 목회자가 먼저 자신의 부패성을 자복하고 돌이키게 하옵소서. 온 교회가 상하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혼의 무릎을 꿇게 하옵소서. 기독교 학교들을 비롯한 각종 기관들도 거짓과 횡령과 음란과 탐욕을 자복하며 통회의 눈물로 기도의 무릎을 적시게 하옵소서.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대한민국 교회와 국민의 허물을 덮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순교자의 격

고신대의 이상규 교수는 1) 스스로 받아들인 자의적인 죽음, 2) 복음과 직결된 죽음, 3) 복음과 진리에 반대되는 집단이나 개인들에 의한 죽음을 순교의 조건이라 했다. 과연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죽음의 형벌이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지 않고 죽음의 이유가 순교자로 만든다"고 생각된다. 모두가 고난과 역경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이유가 우리의 죄악된 본성과 관계된 것이라면 증인의 삶과는 무관하다. 복음을 위해 복음 때문에 복음과 더불어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면 순교자의 격에 어울리는 삶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삶을 갈망하자. 단 하루라도...

2016년 10월 26일 수요일

왕성한 복음전파, 소망한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묵직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복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제대로 안다면 사도들의 모습처럼 잠잠할 수 없는 게 복음이다.
학생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졌다.

2016년 10월 13일 목요일

청부의 아름다움

세계적인 면세점 CEO "척 피니"의 회계장부 공개되다.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의 영웅 "척 피니"의 이야기!!! 아름답다.

척 피니의 회개장부

2016년 10월 1일 토요일

목회자 검증 7단계 (북미개혁장로교회 경우)

1. 교회의 추천으로 신학생이 되어 요구되는 교과목(100여학점)을 이수해야 한다.
2. 졸업 후 여러 신학자로 구성된 신학검증 질의응답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3. 지금까지 목회자 후보생의 살아온 삶에 기초한 인성검증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4.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검증(해석과 전달)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5. 총회에 목회자 후보생 명단에 올라가고 총회의 목회자 후보생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6. 개교회의 청빙을 받고 교회를 대표하는 컨시스터리에서 인터뷰를 통과해야 한다.
7. 개교회가 속한 노회의 검증단 앞에서 목회적인 소양과 협력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2016년 9월 28일 수요일

예수님은 누구신가?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6:35)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9)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
"나는 참 포도나무요"(요15:1, 5)

도덕경 43장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단단한 것을 이깁니다.
"없음"만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함이 없음"의 유익을 알고 있습니다.
말없는 가르침, "함이 없음"의 유익에 미칠 만한 것이
세상에 드뭅니다.

2016년 9월 21일 수요일

들음의 직접성

거짓 증인은 패망하나 확실히 들은 사람은 일관되게 말한다 (잠21:28). 이는 들음의 직접성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증인이 패망하는 이유는 거짓된 증거 때문이다. 거짓된 증거의 원인은 확실하고 직접적인 들음이 없어서다. 직접적인 들음이 없으면 출처가 불분명한 '카더라 통신'의 범람으로 분별력과 판단력이 흐려진다. 그러면 비록 거짓의 의도가 없더라도 부지불식 중에 거짓 증인으로 전락하고 패망의 쓴 맛을 경험하게 된다.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과도한 침묵으로 몸을 사리는 것은 소극적인 처신이다. 주께서 조성하신 입술은 증거의 도구로서 적극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성경 자체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성경의 해석을 좋아한다. 우리의 기호는 후자의 도움을 받아 전자로 이동해야 한다. 타인이 묵상하고 분석하고 정리하고 해설한 것은 아무리 은혜롭고 감미로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씀의 직접적인 들음의 유익에는 못미친다. 공부할 때에도 비록 산더미 분량의 2차자료와 3차자료를 두루 섭렵한다 할지라도 한 권의 1차자료를 읽은 사람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서의 쥐다. 믿음의 거인들은 대체로 탁월한 스승의 도움을 받되 성경과 직접 사투를 벌이며 진리를 흡수했고 고난과 시련의 바다에도 기꺼이 뛰어든 자들이다. 지금 정보의 홍수는 간접성의 과잉이다.

2016년 9월 20일 화요일

인간의 길, 하나님의 길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20:24). 사람이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걸음이 여호와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양한 교훈들이 감지된다. 첫째, 우리의 걸음이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걸음의 방향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걸음의 가까운 문맥을 파악하고 자신의 길을 해석하면 삶에 왜곡과 오류가 빚어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우리의 길도 깨닫는다. 둘째, 자신의 길에 대한 전적인 무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이유이며 싸인이다. 앞길이 캄캄할 때마다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어쩌면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셋째, 삶의 출처이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왜 살아가야 하는가를 사람들은 묻는다. 이러한 물음은 태초부터 삶의 화두였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 물음을 던지며 답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간다. 인류의 역사에서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며 삶의 모든 국면들을 경험한 전도자가 내린 인생의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 결론은 지금도 유효하다. 인간은 자신의 길에 무지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길에 대한 무지의 껍질을 벗기려고 분투한다. 그러나 이 무지는 하나님의 길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자신의 길에 대한 무지, 어쩌면 합당하다.

2016년 9월 18일 일요일

여전히 아들로!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신1:31). 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방식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온 그 크고 두려운 광야의 길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아들로 대하셨고 그들을 안고 친히 걸으셨다. 하나님은 그들보다 먼저 그 길을 가셨으며 장막 칠 적합한 장소도 찾으셨고 잘 따라올 수 있도록 밤에는 불로 걸음을 밝히셨고 낮에는 구름으로 감싸서 이끄셨다. 이는 그들이 광야에서 40년간 걸었어도 결핍이 없었고 의복이 낡아지지 않았고 신발이 해어지지 않았던 이유였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총애와 은택의 충만 속에서도 애굽의 죄악된 삶을 추억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모세는 고발한다. 그래서 광야가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출애굽 1세대 전부의 무덤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상황은 모세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르지가 않다. 지금도 교회가 걸어가는 길은 광야를 방불한다. 지금도 하나님은 교회를 자신의 아들처럼 안으시고 친히 걸으신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군침을 흘리며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교회를 광야로 내모시고 역경과 고통을 주시냐며 원망하고 불평한다. 나아가 불신으로 불경을 저지른다. 끔찍한 현실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돌이켜야 할 상황이다. 

2016년 9월 17일 토요일

하늘과 땅의 격차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사55:9).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인간의 길과 생각보다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높다는 이야기다. 사실 하늘과 땅의 무한한 격차는 측량 자체를 불허한다. 땅에 있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어찌 알겠는가! 이사야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깊음과 부요함에 압도되어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하나님의 길은 추적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바울의 이러한 경외와 겸손의 고백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은 생각과 길에 너무도 잘 어울리고 지극히 마땅한 인간의 태도이다. 그러나 인간은 대체로 하늘처럼 높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거북하여 거부하고 증오한다. 땅이 하늘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규정하려 든다. 하늘이 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면 땅은 하늘을 기소하고 정죄하고 결박한다. 인간에게 익숙하고 때때로 변경하고 조작할 수 있는 땅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면 하늘의 질서를 따르는 자들은 곧장 죄인으로 혹은 적으로 분류된다. 게다가 하늘의 숨통을 조이는 일에 세상은 대체로 미친듯이 열광한다. 이는 하늘에 대한 땅의 거부와 정죄와 공격이 하나님을 대하는 타락한 인간의 보편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가정과 결혼과 법률과 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다. 그렇다면 나의 삶을 주장하는 태도는 과연 어떠한가? 땅을 편드는 것에 민첩한가? 아니면 하늘을 위하는가?

2016년 9월 10일 토요일

겸손의 위력

22장은 겸손의 위력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휘면 온전할 수 있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움푹 파이면 채워지게 되고,
헐리면 새로워 지게 되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고 세상의 본보기가 됩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기에 돋보이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갑니다.
겨루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휘면 온전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어찌 빈말일 수 있을까요?
진실로 온전함을 보존하여 돌아 가십시오.

<도덕경>의 "물처럼"

오랜만에 <도덕경>을 다시 펼쳤다. 눈에 걸린 대목(8장)이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려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서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겨루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 받을 일도 없습니다.

2016년 8월 25일 목요일

삶이라는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25:17). 천국의 비유로 언급된 달란트 이야기의 일부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전체가 달란트다. 각자가 받은 분량은 다양하다. 주께서 결산의 때에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기 때문에 분량의 차이가 어느 정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분량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 결산의 때에 각각의 다양한 분량은 모두 "적은 일"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야기의 초점은 남김과 남기지 않음, 혹은 착하고 충성됨과 악하고 게으름의 여부에 맞추어져 있다.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인생에 충실해야 한다.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유쾌한 일들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남기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난도 달란트고 환란도 달란트고 고통도 달란트고 심지어 죽음도 유익으로 분류되는 달란트다. 그런 용광로 속에서 황금의 인격과 경건이 빚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주께서 "충성"으로 여기시는 무언가를 남기도록 최고의 지혜와 경건을 발동해야 한다. 가난하고 불편하고 억울하고 답답한 나의 상황을 불평과 원망의 구덩이에 파묻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면 죽음을 인자의 영광이라 하셨던 주님과 고난을 유익이라 했던 다윗과 죽음도 유익이라 했던 바울 앞에서 한 마디의 변론도 내뱉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길 가능성이 높다. 삶은 어떤 이에게도 녹록하지 않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것을 남기려는 전투적인 자세가 모두에게 늘 요구된다. 그런 자세에서 나오는 경건의 빛은 더욱 찬란하고 교훈의 향기는 더욱 진동한다.

2016년 8월 21일 일요일

사랑의 역설적인 명령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막12:30). 벼룩의 간을 꺼내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위의 말씀은 모든 것들을 다 가지셔서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 먼지에서 온 미약한 인간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 바쳐서 사랑할 것을 명하시는 것이 마치 졸열한 독재자의 잔인한 착취로 오해될 수 있는 구절이다. 사실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에는 사랑의 주객이 뒤바꼈다. 왜? 이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로는 생산할 수 없는 진리의 비밀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동원된 하나님의 역설이다. 사랑의 명령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함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쌍방통행 사랑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며 믿어지지 않는 영광이다. 그 사랑에 목숨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동원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신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누리는 최상의 방식이다. 사랑은 진실로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의 목숨과 마음과 뜻과 힘에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생명과 마음과 뜻과 힘을 전부 담으라는 역설적인 은총이다. 사랑은 이처럼 하나님을 지극히 큰 상급으로 취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을 전인격적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명령은 자신을 기필코 주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2016년 8월 20일 토요일

복의 주관자, 있다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신28:8).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을 인과응보 개념으로 이해한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올라가고 성실하게 일하면 소득이 올라가듯 우리가 원인을 제공하면 당연히 주어지는 결과가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자연이 굴러가는 비인격적 질서의 바퀴만 주목하지 않고 그 바퀴를 굴리시는 복의 인격적인 주관자가 계시다고 가르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하심이 없이는 어떠한 복도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의 눈에 확인되는 복의 가시적인 인과율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인과를 만드시고 명하시는 복의 주관자가 계시다는 주장이다. 모든 복은 어떤 질서에서 생산되지 않고 복의 주관자에 의해 주어진다. 그래서 복된 신앙은 반듯한 규칙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의 저자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그와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거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의 인과적인 겉모습만 주목하고 자연의 질서와 규칙을 만드시고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배제한다. 보이지 않는 마지막 근원까지 소급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가까운 원인에 안주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판단을 맡기고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거기에 매달린다. 이런 맥락에서 우주의 창조에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선언한 스티븐 호킹은 대단한 분이지만 안타깝다.

2016년 8월 19일 금요일

백주의 캄캄함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신28:29). 이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면 복이 임하고 거역하면 저주가 임한다는 문맥에서 후자의 한 사례로 등장하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정상적인 시력이 있고 빛이 협조하는 백주에도 캄캄한듯 더듬게 된다는 저주의 내용이다. 사실을 감추고 왜곡하고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대량으로 살포하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모든 시대의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을 모두가 공유하고 합리적인 사고의 분석으로 도달한 결론에 모두가 공감해도 여전히 "백주에도 더듬는" 저주의 상황일 수 있다는 사실은 대체로 간과한다. 일례로, 개인의 자유로운 '성'향을 존중해야 한다는 자유와 평등의 기묘한 논리가 성의 질서를 주장하는 적잖은 선진국 안에서는 동성애, 소아성애, 시체성애, 짐승성애, 가족성애 등을 제어할 논리적인 대응책이 없다. 최근에는 성인이 된 아들과 그의 엄마가 성관계를 맺고서 성적 지향의 자유를 내세우며 합법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원숭이와 개와 고양이와 시체와 결혼하는 일도 실제로 발생한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모든 짐승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미명으로 사람이나 짐승을 성의 무차별적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그러한 부도덕을 승인하는 문화의 공공연한 범람은 신명기의 관점으로 보자면 백주에도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더듬는 저주의 일환이고 불순종의 결과이다. 비록 사안과 동떨어져 보이지만 회개와 순종을 모든 시대의 열쇠라고 보는 이유이다. 

2016년 8월 8일 월요일

가증한 신앙의 악취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미3:11). 미가의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의 리더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가관이다. 종교적 위선이다. 종교적 위선자가 위선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을 의뢰한다. 자신의 위선을 여호와 의뢰라는 고상한 포장지로 가리고 잇속을 챙기면서 타인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한다. 그런데 이렇게 끔찍한 위선이 교회의 현실이다. 한 시대가 통째로 무너지되 분야별 부패의 아귀가 너무도 절묘하게 들어맞는 현실, 통탄이 저절로 쏟아진다. 이러한 기독교의 총체적인 부패는 미가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역사 속에서 끈질기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삼박자 부패의 악취는 교회 안에서 진동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니까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망상 속에서 돈을 위하여 설교하는 목사와 뇌물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장로와 댓가와 비례해서 섬기는 집사가 적잖은 교회를 접수하고 있다. 미가 시대의 부패상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반응에 변화가 없으시다. 회개가 시급하다. 함께 엎드리자.

2016년 8월 6일 토요일

하나님의 역린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욘1:15).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킨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요나는 거절한다. 민족에 대한 애국심과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도 져버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여야 하는 선지자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자신을 움직이던 모든 변수들을 내던져야 했다. 하지만 민족적인 원수의 본거지인 니느웨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과 투철한 애국심 때문에 역방향 행보를 택하였다. 개인의 속은 후련했고 민족들도 열광했을 선택이다. 그러나 배에 동승했던 이방인은 요나를 바다에 투척하여 선지자가 초래한 위태로운 상황을 깔끔하게 수습했다. 흉용하던 바다의 잠잠케 됨은 이방인의 판단과 노고의 결과였다. 게다가 그들은 여호와를 크게 경외했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고백까지 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 줄행랑을 치던 선지자의 가오와 채면이 처참하게 구겨지는 경우였다. 하나님의 뜻 이외의 다른 변수가 움직이는 선지자의 그릇된 행실은 교회가 사회에 종교적인 순기능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회가 교회를 꾸짖고 교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불법과 불륜과 음행과 부의 축적이 좌우하는 오늘날의 적잖은 신학자와 목회자와 교회도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진노의 시대이다. 안타깝고 처참하다. 나 자신부터 돌이켜야 한다.

2016년 8월 5일 금요일

십자가의 역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이는 자신의 피해와 타인의 유익이 인과의 짝을 이루고 있다는 다소 불쾌한 십자가의 역설이다. 나에게 가해진 손실이 너에게 주어지는 유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밟히지 않으려면 밟아야 한다는 사회적 약육강식 논리의 역발상 도식이다. 밟아야 밟히지 않는 상황을 해소하는 세상의 최고급 절충안은 서로 밟히지 않고 공공의 유익을 누리는 윈윈 전략이다. 그러나 "서로"라는 선형적인 범주가 "우리"라는 비선형적 전체로 확대되면 2인분의 윈윈 전략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죄로 말미암아 무너진 이 세상에는 어쩌면 모두가 좋아지는 길이 본질상 없는지도 모르겠다. 주님은 우리의 나음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징계를 받으셨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사하려고 찔리시고 상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고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이신데 다른 방도가 없으셨던 걸까? 너무도 억울하고 부당한 유죄의 상황에서 변론 한 마디도 없으셨고 추가적인 항소도 취하지 않으셨다. 그냥 당하셨다. 왜? 먼저는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건지기 위함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교적 삶의 원리를 친히 보이셔서 가르치기 위함이다. 너무도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데도 환영이 아니라 핍박을 당하는 방식이 요청되는 역설의 원리를.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리이다. 

종교적 아이러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암4:5). 이스라엘 민족과 열방의 불의를 고발하는 아모스의 입술에서 출고된 특이한 증언이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은 열방의 불의를 동일하게 저지르되 그 양태가 해괴하다. 그들은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 가서는 증폭된 죄를 범하면서 아침마다 희생제를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헌납하고 누룩을 넣은 인위적인 수은제를 드리고 낙헌제를 선포했다. 벧엘은 그 의미가 "하나님의 집"이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최고의 복이 임하였던 장소이고 길갈은 약속의 땅에 입성한 후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했던 곳이고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이 사사직을 수행했던 곳이며 사울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장소였다. 그런 곳에서 예배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동시에 온갖 죄악의 소굴로도 쓰였다는 것이 아모스의 고발이다. 같은 입술에서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쏟아지고 한 사람에 의해서 선행과 악행이 동시에 발생하고 동일한 장소에서 예배와 불경이 일시에 벌어진다. 예배자가 불경을 저지르고 설교자가 폭언을 쏟아내고 목회자가 겁박하고 증인이 거짓을 제조하는 어이상실 현상의 역사는 참으로 장구하다. 그런데 아모스는 그런 현상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뻐하는 바'였다고 직언한다. 동의하기 어렵고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실이다. 이에 대한 주님의 형벌은 철회되지 않을 것이라고 아모스는 기록한다. 사활을 건 성찰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2016년 8월 4일 목요일

명령: 희생적인 사랑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호1:2).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행했기 때문에 떨어진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시적인 징계와 형벌이다. 그런데 이 명령에서 왠지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긍휼도 읽어진다. 이는 호세아의 선지자 직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도 어울리지 않는 해괴한 명령이며 이스라엘 백성과 세상 사람들도 경악했을 그런 명령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께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령하는 것은 호세아는 물론이고 명령자인 자신의 거룩한 권위와 신적인 위엄까지 스스로 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교회와 세상 사람들 모두의 조롱과 비난을 자초할 명령을 내리셨나? 백성에 대한 사랑 이외에는 자신에게 뻔한 손해와 불이익이 주어질 명령을 내리신 다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동일한 사랑이 호세아와 동일한 이름을 가지신 예수 안에서도 발견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신적인 권위와 영광과 위엄을 스스로 등지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침뱉음과 따귀와 채찍질과 능욕을 당하시고 억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실 것을 알면서도 그러셨다. 희생적인 사랑이다. 사실 하나님께 저질러진 죄의 심각성은 이런 사랑에 의해서만 제대로 인식되고 그런 인식에 의해서만 온전한 회개와 돌이킴이 가능하다. 호세아가 받은 명령도 그런 회개과 돌이킴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다. 

주님과의 동행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겔33:8). 하나님은 백성이 죽음에 이르는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한다는 경고의 나팔을 에스겔의 손에 맡기셨다. 그리고 파수꾼이 백성에게 죽음의 칼이 임한 상황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는다면 그들의 핏값을 그에게서 찾겠다고 말씀한다. 타인의 핏값을 책임질 만한 자격과 능력이 인간에게 없는데도 그러신다. 이유는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백성의 패망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확고한 마음 때문이다. 2) 패망을 막아야 하는 소명자의 책임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3) 소명자와 백성은 믿음의 운명 공동체가 되기 때문이다. 4) 백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는 것이 소명자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5)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백성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핏값을 대신 지불하실 것을 예표하기 위함이다. 6)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속죄의 영광에 참여하는 은총을 베푸시기 위함이다. 목회자는 성도 개개인의 사사로운 죄까지도 어깨에 짊어지고 교회가 죽으면 나도 죽고 교회가 망하면 나도 망한다는 불가분의 하나됨을 의식하며 목회해야 한다. 타인의 핏값을 나에게서 찾는다면 이성을 따라서는 억울하고 부당한 마음이 앞설 것이지만 믿음을 따라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식이다. 주께서 걸어가신 길은 최고급 비단이 깔리고 번뜩이는 보석들이 촘촘히 박힌 영광의 길이 아니라 각양의 뾰족한 가시들이 사방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길인데도 부르시니 영광이다.

2016년 8월 3일 수요일

용납될 수 없는 목회자의 범죄들 (1561 제네바 교회법규)

이단
분리
교회 질서에 대한 거역
민사 처벌에 합당한 명백한 신성 모독
성해 매매 및 모든 타락한 선물들
다른 목회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술책
합법적인 휴가 및 정당한 볼일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 교회를 방치하는 것
사기
위증
음란
절도
음주벽
법적 처벌에 합당한 싸움
고리대금
법에 금지되고 추문을 일으킬 만한 놀이
춤과 그 유사한 풍기문란
국가 비방죄
다른 이로 하여금 교회를 분리케 하도록 하는 범죄

해결자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4). 미친 소비주의, 음탕한 혼합주의, 무분별한 다원주의, 오만한 합리주의, 경제적인 약육강식, 군수 산업체의 광기, 극단적인 IS의 야만적인 살인과 테러의 심각성은 모두가 공감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해결책이 없다. 비록 문제 해결의 절박한 소원도 있고 요란한 달음질도 해보지만 사람의 힘과 능으로는 풀어지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무기력만 확인한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역사는 그리스도 예수만이 유일하게 문제를 풀어내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세상의 거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미시적인 문제도 상황과 해법은 동일하다. 경제적인 빈곤, 생명의 위협, 관계성의 문제, 미래에의 절망, 건강상의 위기, 정신적인 공황도 우리 각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에 사활을 걸라는 메시지요, 표면적인 문제를 계기로 삼아 궁극적인 필요가 채워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구제 방식일 가능성이 높다. 크든 작든 모든 문제는 당하고 아파하고 억울하게 손해보는 역설적인 십자가의 교훈으로 풀어진다. 문제 자체가 십자가의 도를 붙들라는 초청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보면,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고 그의 이름이 존귀케 되는 방향으로 질주하는 교회 공동체나 성도 개개인은 역사의 중심을 관통하게 된다.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가 사람의 어떠한 지혜보다 지혜롭다. 

은금과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3:6). 지금 세상은 기독교의 숨통을 조이며 다양한 측면에서 광기를 드러내고 있다. 돈과 쾌락은 사랑하고 예수와 경건은 싫어한다. 바울의 예언처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교회에서 목격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하다. 목회자의 주머니는 은금으로 두툼하다. 동시에 교회의 빚은 산더미다. 모든 목회자와 교회가 그러지는 않지만 대체로 교회의 개척과 성장과 폐쇄의 희비가 돈에 의해 엇갈리고 있다. 설교자는 돈의 심기를 살피고 회중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설교는 극도로 자제한다. 회중은 웃기고 자빠지는 설교에 열광하고 설교자는 웃음과 번영의 처세술 조달에 민첩하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와 향기라는 존재감은 빈약하다. 사도들은 반대였다. 비록 은금은 그들의 주머니에 없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태생적인 앉은뱅이 된 사람도 세웠으며 무너진 교회의 존재감도 일으켰다. 이는 주의 이름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지금도 세상에는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해결되는 불법과 무질서가 난무하고 있고 세상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앉은뱅이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 교회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쳐야 할 형국이다. 

2016년 7월 31일 일요일

칼빈전집

세겜의 추억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호6:9).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가 이방인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였고 이에 레위와 시므온이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속임수의 수단으로 삼아 피의 보복을 일삼았던 지역이다. 호세아 시대에도 제사장 무리는 그 세겜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레위와 시므온의 패역한 작태를 따라 살인을 저질렀다. 놀라운 것은 살인의 주역이 성전에서 하나님만 경배하며 백성에게 경건의 모델로서 살아가야 하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한 사람도 아니고 무리를 이루어서 공동의 뜻을 따라(שכמה) 집단적인 살인을 범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하지 못하겠다. 보다 충격적인 것은 목회자의 무리가 합력하여 사람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살인이 야곱이나 호세아의 시대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역사 전체를 농락해 왔으며 그런 상황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지금은 노골적인 약탈과 죽음을 제도적인 무력으로 범하였던 과거와는 달리 타인의 눈을 속이고 스스로도 속는 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교묘한 약탈과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목회자의 추한 실상을 정확히 꿰뚫는다. 이제 사람들은 기독교 목회자의 이러한 행보가 너무도 익숙해서 놀라지도 않는 표정이다. 목회자의 자발적인 회개와 거룩의 회복 그리고 엄격한 권징의 제도적 시행이 너무도 시급하다. 

역설적인 긍휼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호4:7).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고 호세아는 선언한다. 왜 그러한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에서 확인된다. 즉 무지와 망함의 인과율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에 기초한다. 참으로 절묘하다. 범죄에는 형벌이 마땅하다. 이것은 공의이다. 그러나 백성의 번성이 범죄의 증대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들을 망하게 하시는 것은 범죄의 방지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다. 일시적인 망함이 궁극적인 멸망의 자비로운 방패이다.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유익을 위해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는 그런 종류의 긍휼이다(마5:29).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형벌인 동시에 자비로운 긍휼이다. 그러므로 치욕을 당하고 제사장의 직분을 빼앗기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고 그 이후에 죄악에서 돌이키며 하나님의 공의를 존중해야 한다. 같은 차원에서, 우리는 행악자의 형통을 불평하지 말고 범죄자의 번성을 시기하지 말자. 그들의 형통과 번성은 보다 악하고 다양한 범죄의 준비이며 결국 그 자체가 역설적인 형벌이며 잠재적인 재앙이며 궁극적인 망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김이 합당하다. 

멸망에 이르는 무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4:6). 여기서 "지식"은 율법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만 있고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을 뿐"이라고 한다. 말씀에 대한 무지가 세상을 그렇게 만든다는 하나님의 교훈은 오늘날의 우리 시대만 봐도 쉽게 이해된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 영원토록 하나님의 말씀은 음으로든 양으로든 역사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의 직무를 중단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율법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알았다면 그들이 율법의 성취이고 완성이고 마침이신 영광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바울은 지적한다. 이처럼 율법에 대한 바른 지식과 깨달음의 여부는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가늠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알지 못하는 백성은 결국 제사장의 직무도 빼앗겼고 망하였다. 우리 주변에도 유사한 망조가 곳곳에서 관찰된다. 벼랑끝에 선 지금의 대한민국 기독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깨달음의 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경건하자, 정직하자, 사랑하자, 신실하자" 아무리 외쳐도 말씀의 회복이 없으면 시끄럽고 공허한 소음에 불과하다. 

2016년 7월 29일 금요일

반전에 반전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호2:15).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물인 최고의 귀고리와 패물로 자신을 장식하고 바알에게 나아가 향을 피우며 숭배하던 날수대로 형벌을 주신다는 판결을 내리신 이후에 하신 말씀이다. 형벌은 주어진 모든 것들이 회수되고 한 줄기의 소망도 없는 광야의 황량한 벌판에 내몰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그런 절망의 땅에서도 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내신다. 생존이 불가능한 땅에서 생명의 말씀을 주신다는 이야기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들은 거저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을 확인한다. "거기"는 "광야"이고 "포도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골 골짜기"도 뼉다귀가 나뒹굴고 악취가 진동하는 절망의 상황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절망의 골짜기를 소망의 출구로 삼겠다고 말씀한다. "광야"는 땅에서의 도움이 전무한 곳이고 "아골 골짜기"는 사람의 목소리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인 공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희망의 포도원과 소망의 문으로 바꾸신다. 이는 온 세상을 향한 섭리의 축소판과 같다. 이처럼 주님께는 밤과 낮이 일반이고 어두움과 빛이 일반이고 절망과 소망이 일반이다. 주님 안에 거하는 우리도 당연히 그러하다. 

은혜: 죄의 수단?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호2:8).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인 음행을 저질렀다. 음행에 사용되는 긴요한 도구들, 즉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향과 은과 금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고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고 호세아는 지적한다. 이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온갖 죄를 저지른다. 죄는 하나님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와 영혼을 섞는 음행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멀어지는 아주 적극적인 역방향 주행이다. 그런데 거기에 동원되는 모든 수단들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들이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다. 젊음도 건강도 재능도 이성도 재물도 환경도 부모도 자녀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도 될 적합한 자격의 당연한 결과물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한 은혜와 선물의 충만 속에서 참으로 많고 다양한 죄악들을 저지른다. 은혜를 죄의 수단으로 삼는 일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과 마치 경쟁하듯 선을 악으로 뒤집는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선포는 이러하다. "도로 찾으며...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쁨으로 받되 두렵고 떨림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게 신앙의 균형이다.

2016년 7월 28일 목요일

유식한 무지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전9:1). 전도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폈으나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전8:17). 그러나 "의인들과 지혜자들 및 그들의 행위들이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과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말라기 선지자의 기록에 의하면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에서는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말1:2-3). 이에 대하여 바울은 야곱과 에서가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라고 설명한다(롬9:11).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미움을 받는 일의 가부는 소원하는 자나 노력하는 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택하심을 따라 성취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좌우된다(롬9:17). 전도자의 관찰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인데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다"(전9:2). 땅에는 이러한 현실의 원인을 발견할 개념적 도구가 전무하다. "모른다"고 고백한 전도자는 정직하다. 이러한 고백의 바울식 버전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다. 이는 성령의 가르침에 의해 주어지는 "유식한 무식"(docta ignorantia)이다.

2016년 7월 26일 화요일

에스라의 리더십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스10:2).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 에스라는 그 이름의 의미대로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은 인물이다.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칭찬과 존경을 두루 받은 분이지만 그의 행보는 왕의 수라상에 낄려고 겸상의 군침을 흘리거나 이미지 관리로 거룩한 척 하는 경건의 코스프레 따위와는 무관했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늘 주시했다. 단순히 관찰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믿음의 운명 공동체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했다. 그에게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엎드렸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마치 예수님의 기도문이 구약에도 있었다는 인상까지 받는다.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였고 백성의 죄는 "우리의 죄"로 여겨졌다. 교회나 개인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대체로 불똥이 튈까봐 서둘러 정죄의 손가락을 내뻗으며 그들과 섞이지 않으려고 거리 만들기에 주력한다. 그러나 에스라는 백성을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여겼고 그들의 죄를 우리의 죄로 인식하고 죄인의 통회하는 자리에 먼저 엎드렸다. 그러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했다. 이런 통곡은 참으로 아름다운 멜로디다. 에스라의 리더십이 아름답다. 여호와의 도우심이 아름답다. 

2016년 7월 24일 일요일

행동하는 학자 에스라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스7:10). 에스라는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다. 그는 위기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재건할 하나님의 준비였다. 본격적인 사역에 돌입하기 이전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했고 준행했다. 자신을 "학자"로 소개한 성경의 다른 저자가 있었던가? 있었다. 바울도 자신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신분으로 묘사했다. 율법의 탁월성에 있어서 에스라는 구약의 바울이다. 그리고 에스라는 바울처럼 학문적인 탁월함에 행동가의 특심까지 겸비했다. 에스라가 보여준 진정한 학자는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자다. 사역자는 준비된 만큼 사역한다. 텍스트 공부만 하는 사역자는 삶의 역동성이 부족하고 공부하지 않는 사역자는 삶의 내용이 부실하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가문의 혈통에 속하여 율법을 잘 알았으나 계속해서 연구했고 텍스트의 평면적인 판독에 도취되지 않고 율법에 삶의 입체성을 덧입혔던 실천적인 학자였다. 그런 자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재건이 맡겨졌다. 그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임하였고 세상의 군왕들이 흔쾌히 협조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쳤고 그들의 삶을 움직였다. 에스라와 같은 깊은 지성과 강한 의지, 꼼꼼한 계획과 투철한 실행, 정확한 앎과 올바른 삶이 탁월하게 공존하는 사역자를 발굴하고 길러내야 한다. 

2016년 7월 23일 토요일

아름다운 인내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중단되니라 (스4:24).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들은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 조공을 비롯한 수입의 감소와 반역의 가능성을 거론하며 왕의 마음에 위기감을 고조시켜 결국 왕의 중지령을 받아냈다. 이는 대규모의 뇌물까지 투입된 일이었다. 그래서 재건은 그때 중단되어 이후로 무려 13년간 내지는 15년간 전혀 진척되지 못하였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성전의 재건은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적법하고 덕스럽게 세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왕의 부당한 중지령을 위반하지 않고 인내했다. 대적의 간사한 뇌물과 사악한 술책으로 이루어진 일이어서 얼마든지 법의 정의에도 호소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기다렸다.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도 참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충돌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손해와 억울함을 유발하는 법이라도 인내하는 게 아름답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다. 지금은 심지어 정당한 법도 무시하고 목회자와 교회의 이윤을 챙기려는 모습이 세상의 이맛살도 찌푸리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2016년 7월 22일 금요일

진리의 전달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2:20). 이는 교육 무용론과 직통계시 정당성의 근거로 인구에 자주 회자되는 구절이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모든 것들을 안다고 말하기 때문에 신학교도 필요하지 않고 교리의 교육도 필요하지 않고 주석과 교의학과 설교도 필요하지 않고 심지어 공부와 학습도 필요하지 않다는 극단적인 주장의 근거로도 얼마든지 동원될 수 있는 진술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누구도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비록 사람이 진리를 전달하는 행위자로 있지만 진리의 전달 자체는 오직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진리의 전달 자체가 오직 성령에 의한 일이라는 사실이 수단들과 도구들의 무용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령은 수단을 쓰시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다. 교회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는 생각도 수단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아무리 탁월한 언변과 정교한 논리와 깨끗한 명료함을 갖춘 수단이라 할지라도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 진리를 수종드는 전달자일 뿐이기 때문에 진리의 원천에게 돌려져야 할 영광을 취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진리는 오직 거룩하신 자에게서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 전달자는 늘 겸손해야 한다. 

혼란한 시국의 열쇠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않으리라 (창18:32). 하나님은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온 세상의 절대적인 통치자다. 물론 그런 통치에는 다양한 과정들과 수단들이 동원된다. 그러나 개인이든 공동체든 모든 흥망은 하나님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과정들과 수단들은 내려진 하나님의 판단을 변경하지 못하고 그저 집행하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경영하신 것은 누구도 폐하지 못하며 손을 펴시면 아무도 돌이키지 못한다고 이사야는 기록한다(사14:27).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를 무너뜨릴 어떠한 파괴자도 없고 하나님이 폐하신 나라를 소생시킬 어떠한 회복자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열 명의 의인으로 인해 멸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의 원리를 믿음의 조상에게 알리셨다. 의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의인을 중심으로 흥망을 정하시는 하나님, 의인을 문제 풀어내는 열쇠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통치법을 알리셨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의 시대에 꼬인 문제의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교회가 완전한 의인이신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고 예수를 드러내는 의로운 증인됨이 무엇보다 절박하고 시급하다. 교회는 증인됨을 통해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사회에 대한 책임을, 나아가 범국가적 책임을 다하는 게 마땅하다.

2016년 7월 21일 목요일

전투의 초점과 대응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엡6:11). 개는 던져진 막대기를 쫓지만 사자는 그 막대기 던진 사람을 쫓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떡밥 투척자의 교활한 의도를 망각한 채 던져진 떡밥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피터지게 싸우는 나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게 한다. 특정한 사건, 개입된 사람들, 배후의 세력들, 서로 맞물려서 돌아가게 만드는 무형의 어두운 동력들이 있는데 사람마다 자신의 관심과 의식을 빼앗기는 요소가 다양하다. 바울은 겹겹의 요소들 중에서 "마귀의 간계"를 대적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귀는 자신의 간계를 감추려고 그럴싸한 논리와 상식과 합리와 일리와 명분을 들러리로 동원한다. 마귀의 간계는 결코 어설프지 않다. 치밀하고 꼼꼼하다. 곳곳에 묻어둔 지뢰가 많고 부지불식 중에 빠지도록 파놓은 함정들도 많다. 이에 대응하는 바울의 지침은 먼저 우리의 관심과 의식을 무수히 많은 혈과 육의 연막용 들러리 요소들을 재끼고 "마귀의 간계"에 두라는 것과 이 간계를 능히 대적하는 유일한 준비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 취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패배는 전투의 초점을 빼앗기는 것과 하나님의 무장을 준비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2016년 7월 20일 수요일

욕심, 죄의 자궁

모든 사람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미혹될 때 시험에 든다 (약1:14). 여기에서 "시험에 든다"는 말은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고 했다. 자신이 공부한 것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으려는 것, 자신이 가진 인격보다 더 좋은 존대를 받으려는 것, 자신이 대접한 것보다 더 큰 대접을 받으려는 것, 타인의 무지를 비웃으며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려 하는 것, 타인의 약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강점을 드러내려 하는 것, 타인의 불의를 비판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 하는 것, 타인의 부도덕을 들추면서 자신의 도덕을 드려내려 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마치 우상처럼 숭배하는 욕심의 다양한 양태이다. 무엇이든 더 많이 취하려는 것도 욕심이고 더 빨리 취하려는 것도 욕심이고 더 오래 취하려는 것도 욕심이다. 욕심은 대체로 지식과 정의와 도덕과 사랑과 관용의 등짝에 빌붙어서 활동한다. 그렇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아주 교묘하게 죄를 잉태한다. 잉태하는 욕심과 잉태되는 죄는 동일하게 은밀하고 고약한 녀석이다. 아무리 자비롭고 지혜롭고 너그럽고 의로운 마음도 욕심 한 방울이 떨어져 번지면 곧장 죄를 잉태하는 자궁으로 돌변한다. 이는 우리의 분별과 판단의 초점이 욕심을 겨냥해야 하는 이유이다.

2016년 7월 19일 화요일

하나님의 사랑

사람이 미련하여 인생을 망치는데 마음은 여호와를 원망한다 (잠19:3). 질서가 무너진 인간의 마음이 작동하는 일반적인 유형이다. 많은 청년들과 대화했다. 그들의 입술에서 쏟아지는 질문은 한결같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세상이 이러냐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는 왜 이러냐고! 세상은 무수히 많은 원인들과 결과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보이는 인과만이 아니라 비가시적 인과들도 많다. 개인의 일대기도 이와 유사하다. 다양한 차원의 원인과 결과가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고 복잡하게 얽힌 망이 인생이다. 대부분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인과들의 편집물로 인생을 분석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이 망하는 원인이 자신의 우매함에 있다고 진단한다.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도 그러하고 회사도 그러하고 사회도 그러하고 국가도 그러하고 민족도 그러하다. 미련함이 개인적인 가정적인 교회적인 국가적인 국제적인 패망의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낸다. 원망을 넘어 "하나님이 없다"며 하나님의 존재마저 지우려고 한다. 이러한 인생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회복의 손을 뻗으시며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다. 패망에 어떠한 원인도 제공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억울한 원망만이 돌려져도 여전히 자비와 긍휼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생의 미련함과 원망 속에서도 놀랍도록 번뜩인다.

한국 기독교 역사

2016년 7월 18일 월요일

기쁨의 비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느8:8). 히포의 교부는 말씀의 해석과 전달을 사역자의 직무라고 했다. 세상에 대해서는 기독교인 모두가 그런 해석과 전달의 책임자다. 에스라를 비롯한 사역자들 모두가 성경을 강독하고 해석했다. 모든 백성이 말씀의 전부를 깨달았다. 이에 백성들은 울음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느헤미야 총독은 울음을 기쁨으로 바꾸라고 권고했다. 그래서 온 백성이 여호와를 기뻐했다. 그들의 울음도 사실은 사무친 기쁨이 출고되는 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기뻐하고 향유하는 방법이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총독이 제시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깨달으면 이처럼 울음과 기쁨이 협력하고 그것은 힘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무너진 성전과 성벽의 외적인 재건의 이면이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는 말씀의 이해에서 비롯되는 눈물의 기쁨으로 강하게 세워진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오직 말씀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 기력이 아무리 밑바닥을 쳐도 말씀을 깨달으면 반드시 기쁨으로 소생한다. 

2016년 7월 17일 일요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8:8).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더불어 믿음의 선배들이 정리한 삶의 일순위 목적이다. 그런데 느헤미야 총독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 선언한다. "힘"은 삶의 보존과 보호와 안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과 근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은 목적이기 때문에 삶의 나중이며 동시에 삶 자체를 가능하게 만들기에 삶의 처음이다. 살다가 매가리가 없어지는 무력감을 종종 경험한다. 그때마다 점검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를 기뻐하고 있느냐다. 많은 경우에 운동과 음식과 쇼핑으로 전환을 꾀하지만 잠시 회복되는 듯하여도 금새 무기력의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은 삶의 기력을 회복하는 창조와 섭리의 본래적인 질서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회복의 근원적인 방법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너무도 당연하고 단순한 말인데도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그리고 막상 기뻐함을 시도하려 하면 막연하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여호와를 기뻐하면 힘이 생긴다"가 아니라 여호와를 기뻐함이 힘 자체라는 거, 꼬옥 기억하자.

입을 크게 열라!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시85:10). 청년기에 가슴을 뛰게 했던 말씀이다. 이유는 욕망을 키우는 것이 주님의 명령에 보다 온전히 순응하는 것이라는 생각의 성경적 보증수표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입을 크게 열라"는 류의 성경 텍스트를 만나면 내 속에 움츠리고 있던 소심한 야망부터 반응했다. 야망의 사이즈를 마음껏 키워도 되겠다는 생각에 이것보다 더 확실한 면죄부가 있었을까?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당연히 능치 못하심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꿈은 나의 능력에 제한되지 않고 꿈의 상한선을 하나님의 전능까지 높이어도 된다. 그러나 성경의 문맥을 보면 해석의 번지수가 다르다. "입을 크게 열라"는 말씀은 욕망의 아구를 넓히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꿈으로 품으라는 것이었다. 그 뜻을 경청으로 품는 게 그 꿈의 사이즈를 최대로 키우는 것이었고, 그 꿈을 이루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한 꿈은 없다. 입을 크게 여시라. 주께서 친히 당신의 꿈을 이루신다. 

2016년 7월 16일 토요일

의뢰의 본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잠16:3).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다음 구절에서 조명된다. 즉 "주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들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만물과 역사를 이끄신다. 우리의 모든 것들을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그분의 목적에 맞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모든 것들은 그분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이는 내가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막강한 주먹과 에너지를 수단으로 동원하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개인적인 일이든, 가정적인 일이든, 교회적인 일이든, 국가적인 일이든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보다 강하셔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목적에 나의 전부를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자신이 세운 5만건의 목적을 기도로 달성한 사람이 아니라 고아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목적에 자신의 전부를 의탁했던 사람이다. 

뇌물과 예언의 만남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느6:12). 느헤미야 총독은 뇌물과 예언의 어울리지 않는 만남을 경험했다. 스마야의 예언은 테러의 움직임이 있으니 몸을 성전으로 숨기고 생명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는 제사장들 외에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을 범하게 함으로써 총독의 경건에 치명타를 가하고 죽이려는 전략이다. 당시 외인의 성전 출입은 죽음에 해당하는 범죄였다(민18:7). 경건한 사람들의 영적 무장을 해제하는 최고의 전략은 위법이나 도덕적인 일탈이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적인 죄를 범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제도와 도덕의 훼손도 물론 심각한 문제지만, 하나님께 직접적인 대립각을 세운다는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스마야는 뇌물을 받았고 총독으로 하여금 부지불식 중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범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총독은 이것이 하나님의 예언이 아니라 적들의 뇌물에 의해 가공된 거짓임을 간파했다. 이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죽고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였을 때 살게 된 경우였다. 

2016년 7월 15일 금요일

지도자의 분별력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느1:6). 나라를 빼앗기고 능욕을 당하고 영적 버팀목인 예루살렘 성까지 허물어진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알게 된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직 공무원 느헤미야, 그는 곧장 여러 날 슬퍼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의 무릎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문제의 근원이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하나님께 저지른 "범죄"에 있다고 고백한다. 전능과 공의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만물과 역사를 통치하는 분인데도 그분의 언약이 완전히 실종된 이유는 그분의 변덕이나 망각이나 무능력 때문도 아니었고 그런 통치자의 견고한 언약까지 꺾을 정도로 막강한 외적 환경의 비협조 때문도 아니었다. 언약의 수납자인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모든 게 무너졌다. 느헤미야는 이런 사실을 직시했고 인정했다. 그리고 엎드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도자의 탁월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고 정확한 분별력을 목격한다. 이런 분별력은 하나님의 언약이 무너진 나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국가의 모든 현장에서 요청된다. 

2016년 7월 13일 수요일

대학강좌 사이트

전국 172개 대학에서 제공하는 11,665개의 강의를 공유한 사이트다. 이제 한국도 마음만 있으면 이제 공짜로 집에서 편안하게 전문가의 명강의를 들으며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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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0일 일요일

죄의 핵심을 꿰뚫어라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았도다 (삿6:10).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다.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악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른 신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란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는 것이었다. "목전"이라 함은 악의 가시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시화된 악 이전에 근원적인 악으로서 두려움 혹은 경외의 문제를 보다 중요하게 다루신다.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눈이 그래서 중요하다. 파생적인 죄의 가시성에 시야가 걸려서 문제의 핵심까지 파고들지 못하면 피상적인 해결에만 골몰하게 된다. 엉뚱한 것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거기에 목메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어낸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표면적인 악이 아니라 이면적인 악임에 분명하다. 악에 대한 이해의 결은 하나님의 시선과 맞추어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풀어진다. 

2016년 7월 9일 토요일

삶은 전쟁터다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삿3:4). 이스라엘 민족은 종으로 살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로 들어갔다. 천신만고 끝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했다. 입성하기 전까지 그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백성의 정체성을 체득해야 했다. 그들이 광야에서 치룬 싸움의 대상은 그 말씀을 먹느냐 마느냐의 여부였다. 이러한 싸움은 무대가 바뀌어도 지속된다. 약속의 땅에서도 그들은 이러한 싸움을 싸워야만 했다. 가나안에 여러 족속들을 "남겨 두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고 전쟁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이방 족속들의 공존은 하나님이 친히 의도하신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삶은 전쟁터다. 그칠줄 모르는 전쟁의 연속이다. 전쟁의 종식에 대한 기대는 접으시라.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순종의 테스트를 통과하고 전쟁의 기술을 체득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테스트의 통과이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전쟁 기술의 체득이다.

2016년 7월 8일 금요일

문제 해결의 첫단추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삿2:3).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의 세속적인 문화에 물들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세속적인 가치가 그 백성 안에서 입맞추는 형국을 보신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이 "너희의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라는 처분을 내리셨다.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이러한 하나님의 판결에 대한 백성의 반응이다. 그들은 울었고 다시 하나님을 경배했다. 발등의 불인 가나안의 가시를 분석하고 뽑아내서 제거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푸는 일에 집중했다. 이것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행위였고 모든 것들을 그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대처였다.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울고 경배하는 것은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해결책의 첫단추다. 이것이 무시되면, 무의식 중에 생략되면, 후순위로 밀리면, 문제는 증폭되고 심화된다. 여호와께 돌이킴, 언제나 해결의 첩경이고 해법의 일순위다. 

상한 영혼의 산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일2:9).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증거라고 한다. 반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짓말의 대명사가 되고, 진리가 그에게 머물지 못한단다. 참빛이 임한 신약의 시대에는 같은 내용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라는 문구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수렴되고 종합되고 요약되기 때문에 전혀 이상하지 않고 전혀 상이하지 않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두움이 사랑을 대체한다. 관계가 어둡다는 외적인 결과보다 자신의 영혼이 어두움 가운데 거한다는 결과가 선행한다. 나아가 어두움이 가득한 그 영혼의 눈도 어두움에 가려진다. 상한 영혼에 근심과 좌절과 절망과 슬픔과 분노와 시기와 열등과 교만의 어두움을 일거에 털어내는 유일한 빛은 사랑이다. 사랑하면 모든 게 밝아진다. 기막힌 묘약이다. 어떠한 질병도 치유하고 어떠한 어두움도 제거하고 어떠한 거짓도 일소한다. 사랑은 건강한 영혼의 비밀이다. 말씀을 통한 인간의 사랑이 그러한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어떠할까?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실 정도라는 거,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인류의 산삼이다. 

2016년 7월 7일 목요일

선악의 부조리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 (전8:14). 이 세상에서 쉽게 경험하고 목격하는 일들이다. 전도자는 이것을 "세상에서 일어나는 헛된 일"이라고 규정한다.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일들 중에 무의미한 것은 없을텐데! 나의 의문은 하나님이 만물과 만사를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셔서 악인과 악행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는 지혜자의 견해와 전도자의 말이 상충되는 듯해서다. 악인과 상, 의인과 벌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어울릴 수 없는 허망한 부조리의 극치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의문이 다소 해소된다. 즉 악인들의 행위로 의인까지 아파하고, 의인들의 행위로 악인들도 행복하게 된다고. 이처럼 악인들은 광범위한 악화를, 의인들은 광범위한 의화를 구축한다. 어쩌면 악인들의 악행이 초래하는 의인들의 벌은 그것으로 인한 이 세상의 악화에 맞서라는 하나님의 허용적인 자극제가 아닐까. 아니면 세상의 헛된 기준과 규범과 질서의 고발용 부조리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지만, 세상의 뾰족한 악에 찔리면서 그래도 품으라는 주님의 기묘한 섭리이지 않겠는가. 

풍족과 윤택의 역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해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 지리라 (잠11:25). 인간은 주는 존재로 지어졌다. 타인에게 풍족과 윤택을 제공할 때에 비로소 인간답게 되고 인간답게 산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래적인 정체성과 존재감은 나누고 베푸는 것에서 확보된다. 주는 자보다 받은 자가 더 복되다는 말씀의 근거도 여기에서 확인된다. 나를 위하여 스스로 챙긴 것들은 참된 복과 무관하다. 소유의 분량은 많아질지 몰라도 누림의 복은 상실한다. 복의 진정한 누림은 타인의 풍족에서 오고 타인의 윤택에서 온다. 재물과 명예를 자신의 손으로 바득바득 긁어 모으는 사람들은 참으로 가난하고 불쌍하다. 이는 대체로 풍족과 윤택의 역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대로 남에게 대접하라. 왜? 타인의 윤택에서 자신의 윤택이 나오고 타인의 풍족에서 자신의 풍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자신과 우리의 교회들이 이러한 기독인의 가치관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2016년 7월 6일 수요일

기도하는 밤에

딸래미를 위해 기도하려 하면 둘째가 곧장 머리를 밀고 끼어든다. 아버지가 비는 복의 공동 수혜자가 되고 싶어서다. 이를 지켜보는 아비의 눈은 금새 축축해진다. 귀여워서, 예뻐서, 가여워서, 애틋해서...무엇보다 사랑스러워서...일평생 이 땅에서의 복이 아니라 주님의 복에 가난하고 목마른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도하게 된다. 

형통과 곤고의 화음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7:13).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순응 이야기는 이사야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7). 주께서 정하신 것을 바꾸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거기에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변경하는 자가 아니라 순응하는 자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성찰하면 된다. 인생 안에서 발생되는 모든 일들의 연출과 편집은 하나님의 자비롭고 공의로운 손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곤고한 날이 통편집된 인생을 갈구한다. 그러나 주께서 굽히시고 곧게 펴시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의 적절한 배합에서 아름다운 섭리의 화음이 빚어진다. 그 화음은 여호와 경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형통과 곤고의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것에 두어야 한다고 전도자는 정리한다.

2016년 7월 5일 화요일

하나님의 길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시25:10). 하나님은 거룩하고 선하고 의롭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하고 의롭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통치가 세상을 지배한다. 온 세상의 어떠함은 하나님이 지나가고 계신 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 안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선하심이 최적의 비율로 반영되어 있다. 이 세상이 완전히 진멸되지 않고 있음은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 때문이고, 천상의 유토피아 모습이 까마득해 보임은 인간의 고삐 풀린 죄악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함은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이다. 하나의 장면에, 하나의 상태에, 하나의 환경에,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의 아름다운 심포니가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해명해야 한다. 사람의 논리로 이것을 해체하는 것은 금물이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2016년 7월 4일 월요일

우종학과 이재만 (펌글)


이재만 창조과학선교회 회장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우종학 교수 비판

   

 
이재만 창조과학선교회 회장

- Michigan State University, 지질학
-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홍수지질학
- Grand Rapids Theological Seminary, 구약학


 자료가 필요하신분은 pdf 파일이 첨부되었습니다.

2014년 10월 한국에서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우종학, IVP)” 라는 유신론적 진화론에 관한 책 한 권이 출판되었다. 저자 우종학 교수는예일대학교에서천체물리학으로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에 재직 중이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지구 나이가 수십억 년이며 모든 진화 과정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극단적인 유신론적 진화론을 수용한다. 이와 같은 진화 역사를 수용함에 따라 창조, 첫 사람 아담, 원죄에 이르기까지 창세기를 기록된 그대로 믿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진화론의 비과학성을 지적하고 성경의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창조과학자들의 시도를 비판하고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1859년)이 출판된 이래로 유럽이나 미국에도 기독교 안에서 극단적 진화론의 입장에서 쓴 책이 여러 권 출판되어 교회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쳐왔었다. 또한다음세대를교회에서 떠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책이 출판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우 교수는 한국의 크리스천 신문과 잡지를 통해 여러 글을 써왔고 수년간 KOSTA(북미 유학생 수양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실제로 우 교수의 세미나를 들었던 분들로부터 그 동안 많은 문의를 받았던 바 이책에나타난 과학적/성경적 오류들을지적하고 나누는 것은 성경의 무오류성과 원 저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수호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긴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진화론을 수용했을 경우 결국 진짜 역사인 성경 기록을 바꾸게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우 교수의 책뿐아니라이와유사한책들이 등장했을 때 분별력을 갖추는데 귀한 지침이 되기를 바란다.

 ​목 차

1. 성경에 대한 저자의 자세  I
- 성경교 &예수교
- 솔로몬 성전의물통

2. 제안된 진화의 증거들
-전이화석
-인간과 침팬지의 유사유전자
-확률
-대폭발 이론


3. 아담과 원죄에 대하여
-첫 사람이 아닌아담
-첫 범죄가 아닌원죄

4. 그릇된 용어사용
-진화론=과학
-실험과학과 역사과학

5. 창조과학에 대한 비판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이 틀렸음을말한다
-창조과학 내용이 국제적인 학술지에 실리지 않았다
-창조과학은 안식교에서 출발했다

6. 성경에 대한 저자의 자세  II
-창세기와 육하원칙

7. 진화론 속에 갇힌  하나님

8. 창세기 1장이 사실 일 수 없다는 주장
-태양이 없이 어떻게 처음 3일을 알았나?
- 골격해석

​9.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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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 대한 저자의 자세  I

-성경교 & 예수교

 
“우리가 믿는 것은 ‘성경을 우상시하는 성경교’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기독교’이다.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해석의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p. 110)

책 전체를 통해서 위의 문장은 저자인 우종학 교수의 성경에 대한 인식과 자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이 글을 통해서 자세히언급하겠지만저자는  138억년전에시작했다는 빅뱅, 수십억 년의 진화와 멸종이 반복되었다고 말하는 지질시대, 생물과 인간 진화 등을 그대로믿는다.저자는진화역사를전적인사실로받아들였기때문에성경속에서 진화론과 상반되는 내용이 등장할 때 성경 기록을 바꾸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는 예수를 포함한 성경의 모든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성경을 우상시’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성경 속에 예수를 제외한 어떤 내용이 진화론과 다르다면 그 내용을 바꾸어도 된다는 것이 저자가 의미하는 ‘예수를 믿는 예수교’ 인 것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성경에 대한 이와 같은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한다.이런자세는스스로크리스천이라 하지만 성경을 대하는 자세와 인식에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태도이다. 분별력을 갖고 이 책을 읽는다면 저자의 이런 자세는 어렵잖게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믿는 것은 ‘성경을 우상시하는 성경교’가 아니라  ‘예수를믿는기독교’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인가? 먼저 성경말씀을 읽어보자.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자기에관한것을자세히설명하시니라” (눅 24:27).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이성경이곧내게대하여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1:2)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이와 같이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며, 예수님께서 오신 모든 근거는 성경 전체에 있다고 말한다. 즉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기록은 주변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의 근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창조 과정에 대하여 극단적인 ‘유신론적 진화론’의 자세를 취하면서, 책에서는 ‘진화론적 유신론’이란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인  ‘유신론적진화론’과다를바 없다. 아래 문장들을 통해 그의 생각을 살펴보자.

“우주 진화와 생물 진화를 인정하고 진화 이론을 수용한다”(p.248).

“예를 들어 창조주가 진화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생물을 창조했다고 보는진화 창조론을 꼽을 수 있다” (p. 43).


그리고 이러한 생각에 기초한 저자 자신이 믿는 창조 과정을 책 말미에 다음과 같이 서술해놓았다.

“138억 년 동안 우주는 멋있게 변해 왔다. 중력은 균일했던 아기 우주를 성장시켜 거미줄처럼 엮인 거시 구조로 바꾸어 놓았고,오색찬란한 은하들이 병합되고 자라는 과정에서 수많은 별들이 피고 졌다. 별은 내부의 핵융합 반응을 통해 탄소나 산소와 같은 새로운원소를만들었다가죽음을맞이하며 우주 공간에 다양한 원소들을 뿌렸다. 이 원소들은 다음 세대에 태어난 별과 행성의 원료가 되었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을 구성하는 탄소 원자 하나하나가 바로 이름 모를 별들의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과학은 은하와 별과 행성의 생성과 소멸을 담은 장구한 우주 진화의 역사를 우리에게 흥미롭게 들려준다”(p. 242).

위의 글에서 저자가 설명하는 우주의 역사는 인간에 의해한번도관찰되거나실험으로검증된사실이 아닌, 진화론적 믿음과 시공간적으로 아주 제한적인 데이터와 모델에 의거한 외삽(extrapolation)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역사일 뿐이다.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성경에문자로써 기록된 역사를 이 가상의 역사인 진화론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창세기 1장부터 성경을 자의로 해석할 수 있는 위험한 질문을 던지면서, 적절하지 않은 비유를 들어자신의주장을 합리화하려고 한다.

- 솔로몬 성전의 물통

저자는 열왕기상 7장에 등장하는 솔로몬 성전의 물통(바다) 규격이 수학적으로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그것을 사실로 인식하고 있는 창조과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다.이내용은저자가KOSTA나 여러 세미나에서 여러 번 되풀이 하였기에 여기서 확실히 정리해둘 필요가 있겠다. 저자가 비판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물통의 규격이 “지름이  10자요,둘레는  30자”(왕상  7:23)라고기록되었는데, 둘레는 지름의 3.14(π) 배이기 때문에 지름이 31.4자가 되어야 하는데 30자라고 하는 것은 수학 지식과 위배된다는 것이다. (p.112).

그러나 열왕기상 7장의 물통에 대한 설명 중에 23절의 지름과원주에대한것뿐아니라이어서 26절에 물통 규격에 대한 다른 요소가 명시되어있다. 물통의 두께가 등장하는데 “그 두께가 한 손 너비(약 10cm)만 하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역대하에도“두께가한손 너비만 하다”(역하  4:5)고다시 한 번 물통의 두께가 기록되어있다. 이 두께를 적용하면 물통의 규격은 성경 기록이 정확함을 보여준다 (그림1).




1 규빗을 46 cm로 보면, 물통의 외곽 지름인 10규빗은 460 cm이며, 둘레인 30규빗은 1,380 cm다. 물통 둘레 1,380 cm을 가지고 역으로 물통의 지름을 계산하면 440 cm (≈1,380 cm/3.14)가 나온다. 즉 물통 외곽 지름과 20 cm가량이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지름은 물통 외곽 지름이지만 둘레는 물통 내곽의 둘레를 의미한다. 물통의 두께가 한 손 너비인 약 10 cm라고 할 때 양쪽에 적용시켜야 하므로, 내곽 지름 440 cm에 두께 20 cm를 더하면정확하게 외곽지름인  460 cm가 된다. 이렇게 물통의 규격을 기록하는 방법은 참으로 지혜로운 방법이 아닌가? 3.14(π=3.141592…)라는 것은 무리수이기 때문에 정확히 적을 수도 없고 두께 또한 정확한 계산이 나올 수 없다. 이 때 외곽 지름과 내곽의 둘레만 알려주면 자동으로 그 두께가 나오니 얼마나지혜로운가! 그리고 성경은 그 두께가 한 손 너비인 약 10cm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열왕기상 7장 26절과 역대하 4장 5절은 무시하고 단지열왕기상  7장  23절만을갖고“솔로몬의 성전의 기구들에 대한 묘사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지 수학적 원리를 주려는 목적이 아니다”(p.112)라고 주장하면서성경의정확성을 훼손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이 수학적 원리를 주려는 목적이아니었을지라도어떻게 물통을 지으라는 정확한 규격이 기록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부분을보더라도저자가수학이라는 ‘이상적인 개념’의 렌즈로 성경을 바라보고 해석함으로써, 안타깝게도실재사실을서술하는 성경 속에 진술의 ‘오류가 없음’을 간과하고 있다.


사실 이런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기존 크리스천 변증학자들이나 창조과학자들에 의해서 이미 오래전에 제시되었었다 (Harold Lindsell, Battle for the Bible, 1976, The Zondervan)(Henry Morris, Henry Morris Study Bible, 2012, p.541, Master Books). 뿐만 아니라 여러 주석 성경에서 이미 언급되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 신뢰를 갖고 관련 참고 문헌을 찾아보았다면 실수하지 않았을 부분이다. 저자가 이 물통을 가지고 이 책에서나 여러 세미나를 통해서 성경에대한그릇된비판을주었던것을어떻게 회수할 수 있을지 안타까울 뿐이다.


​2. 제안된 진화의 증거들

저자 우종학 교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화의 증거들을 언급하기도 하며 스스로 하나님께서 어떻게진화 과정을 진행하셨는지그 방식도 제안한다. 그의 책에 언급했던 진화의 증거들을 점검해보자.

- 전이화석

“최근에 진화고리를연결하는화석들이많이확보되었고연결고리마다비어있던틈새들을 채우는 화석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p. 163)

그러나 저자는 현실을 전혀 모른 채 완전히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학계에서확정된 전이화석은 단 하나도 없다. 1980년에 시카고 자연사 박물관에서 ‘대진화’라는 주제로 당대 최고의 진화론 과학자들을 포함해서 160명이 모인 회의가 열렸다. 이때스스로내린결론중에  하나가 화석에서 전이형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전이형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전무한 상태다. 가끔 전이화석으로 추정되는 것이 발표된다고 할지라도 그 근거가 너무 허약할 뿐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회의적이라는 반박이 등장한다. 최근 진화론자들의 태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창조와 진화 논쟁에 있어서 화석을 진화의 증거로 들고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곧바로 창조론자에게 공격 받는 대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과연 저자는 어디에서 이런 잘못된 정보를얻었는지 궁금하다. 사실 창조과학자들이 진화를 공격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바로 화석이다. 전이화석으로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저자가 알고 있는 그 많은 전이화석 중에확정된 예 하나만이라도 제시하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거꾸로 아래와 같은 주장을 하며 전이화석이 발견되기 어려운 이유를 말하고 있다.

“빠르게 진화가 일어나는 단계에 있는 종들은 안정적 단계에 있는 종들에 비해 화석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훨씬 적다”(p. 163).

이는 1980년초에 등장한 “단속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은 전이화석이 발견되지 않자 당시 진화론자 리더격인 굴드(StephenJ.Gould)가상상해서만든이론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중간단계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느순간진화의속도가너무 빨라서 화석을 남겨놓지 못했다는 이론이다. 얼마나 엉뚱하고 믿기 어려운 이론인가? 이 이론은 단지 전이화석이 없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만든 진화론이다. 이 이론이 나왔을때당연히적지않은 반박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전이화석이 많이 확보되었다고 주장하던 저자는 여기서는 전이화석이없기 때문에 등장했던 상반되는 이론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냥 단순한 생물에서 고등한 생물로 진화했다는 고전적인 진화론을 주장하든지, 전이화석이
없기 때문에 등장한 단속평형설을 주장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소개해야할것이다.물론화석의 증거로 볼 때 이 두 이론 모두 만족되지 않는다. 저자는 여기서도 비논리적인 주장을 펴고 있는것이다. 이런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은 화석과 진화의 관계 대하여 저자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인간과 침팬지의 유사한  유전자

“인간과 침팬지가 매우 유사한 유전자를 갖는다는 것은 인간과 침팬지가 각각 과거에 같은 조상에서
진화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p.  166)

위의 언급과 함께 저자는 인간과 침팬지 사이에 기능과 상관 없는 유사 유전자가 동일하다는 것을진화의 강력한 증거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침팬지가 비타민 C를 만드는 유전자가 고장이 나서 그기능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며, 인간도 동일하게 비타민 C를 만들지못하는유전자를갖고있다고 했다.

외모가 비슷할 경우 그 유전자가 유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침팬지와 인간은 염색체 숫자도 다를 뿐 아니라 그 격차도 너무 크다. 일반적으로 침팬지와 인간의 DNA가 96%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통계 데이터를 만들 때 제외 되어버린 데이터들이 무수히많았다.실제로정직하게비교하면 겨우 70% 정도만 같은 것으로보이며, 이 차이는침팬지와 사람의 겉모습과비교될 수있는 숫자며 기존의 진화론이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차이다. 또한 침팬지에게는 있지만사람에게는 없고, 사람에게는 있지만 침팬지에게는 없는 것을 모두 고려한다면 그 차이는 더욱 더커지며 서로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

또, 대부분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과 침팬지가 비타민 C를생산하지못하지만비타민  C생산에필요한 유사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과 침팬지가같은조상에서진화한증거라고주장한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유사 유전자들이 진화 과정에서 고장 난유전자들이 아니라 다른조절 목적을 위해 존재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타민 C 유사 유전자는 쥐의 비타민 C 유전자의 12 부분(exon) 중 4 부분밖에 없어 진화 과정에서 고장이 생긴 결과로 보기 어렵다. 처음부터 다른 목적을 위해 그렇게 창조되었거나 타락과 저주 사건에서 정보를 잃어버렸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진화의 증거를 내세우면서도 이들이 해석이라는 점을 언급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인지하지도 못한 듯하다. 단지 진화론자들이 해석하는 것을 검증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 교수뿐 아니라 많은 진화론자들은 동물과 사람 사이의 유사성을 진화의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이런 유사성은 이들이 같은공기, 같은 중력, 같은 음식, 같은 환경에서 살 것을 염두에 두는 한, 그


설계자가 모양과 기관을 유사하도록 만든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한편 각 동물의 기관들을 그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그 하나하나의 기관은 각 동물의 기능에 맞게 완벽하게 설계되었으며, 다른 동물에게 적용할 때는 기능을 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란 것을 쉽게 발견할 수있다.즉동일한환경에서 각자의 기능을 고려하신 창조자의 능력과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 확률

저자는 창조과학자나 지적 설계 운동자나 진화의 불가능성의 증거로 확률을 언급하는 것을 비판한다.

“우연이라고 설명되는 현상이 설계를 배제한다고 생각하나? ... 신이 우연한 사건을 이용하여 특정한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게 했다고 볼 수도 있거든. 즉 신이 그렇게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p.  92)

여기서 저자는 확률도 하나님께서 하신 설계 방식으로 제안한다. 그리고 복권을 당첨시키게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그 예로들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이런 예가 많아. 하나님이 제비 뽑기를 통해 자신의 뜻을 알려 주는 경우가 꽤 있거든.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이 당첨되는 것은 과학적으로 볼 때 외부의 통제나방향성없이발생하는 우연한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사용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거든…”(p.93).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책 뒷부분에 한 번 더 등장  한다(p.201, 202).

이 주장은 독자들을 참으로 혼란스럽게 만든다. 정말 기막힌 발상 아닌가? 우연이라는 단어와 설계를 함께 묶는 것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데, 여기에 발생하기도 거의 어려운, 즉 결코 자연적이지 않은 확률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화를 일으키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과연이다지도어렵게진화시키셨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손길로 처음부터 완벽하게 창조했다고 하는 것 둘중에 어느 것이 믿기 쉬운가? 여기에 복권을당첨시키는방법이라든지,제비 뽑기를통해자신의뜻을 알려주신다는 예가 과연 진화를 통해 생물들을 변화시켜 가신다는 주장을 위한 적절한 예가되는 것인지…

제비 뽑기나 복권당첨이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처럼 보일지라도 그 발생빈도는이현실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위의 확률을 가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반면 단순한 세포는 고사하고라도 생명체에 사용되는 유기물이 형성될 확률조차 현실 세계에서 발생할 확률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는 불가능한 확률을 가진다.그러니 확률을 가지고 논할 때, 제비 뽑기와 진화는 결코 비교될수 없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불가능한 확률을 통해 진화를일으키신다고하느니진화를사용하지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저자는 단지 창조론자가 언급한 것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를하고있기때문에무리한발상까지도동원하고있는것은아닌가?뿐만아니라저자는 불가능한


확률을 설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비이성적인 발상을 도입함으로써 자연적인 과정에 의해서는 진화가
일어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창조과학자들이확률을 통해 진화의 불가능성을 제시하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해야 팔 필요가 있다.예를 들어 창조과학자들은 아미노산이 우연에 의해 작은 생체 단백질하나가만들어질수있는 확률이 1/10125라는 식으로 진화의 불가능성을 설명한다. 사실 이런 설명은 수학적으로 표현하고자해서 그렇지 확률적으로접근할 때 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확률이란상대 빈도를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요인을 제한 시켜야 적용시킬 수 있다. 아직 우리가 모르는 요인이 더늘어나면 그 확률이 훨씬 더 작아진다고 말하려는 것이 실제 의도이다.

- 대폭발 이론

저자의 전공인 천문학 분야에서도진화론적 우주론인 대폭발 이론을 진화의증거로 설명한다.예를
들어 우주배경복사를 대폭발의 증거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우주 공간에 균일한 전자기파가 관측된다는 것을 빼고는 데이터가 아니라 모두 진화론적 해석이다.

예를 들면 저자는 우주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배경복사는 대폭발 직후 우주의 나이가 약 35만 년 되었을 시점에 우주 공간에 균일하게 퍼져 나갔던 빛을 가리키며…”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한 결과에 의하면 우주의 나이는 138억년이다”

“138억년 동안 우주는 멋있게 변해 왔다. 중력은 균일했던 아기 우주를 성장시켜 거미줄처럼 엮인 거시 구조로 바꾸어 놓았고,오색찬란한 은하들이 병합되고 자라는 과정에서 수많은 별들이 피고 졌다. 별은 내부의 핵융합 반응을 통해 탄소나 산소와 같은 새로운원소를만들었다가죽음을맞이하며 우주 공간에 다양한 원소들을 뿌렸다…”(p.242)

그러나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이어나가는 이 모든 내용은 진화론적인 해석일 뿐이다. 우주배경복사는 자신의 나이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배경복사란 단어를 제외하고는 몇 단계만 들어가 보면모두 진화론적 해석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동일한 페이지에서 “대폭발 이론은 패러다임에서정설로자리잡았다”고말한다.그러나대폭발 이론은 아직까지 결코 정설로 자리잡은 적이 없다. 2004년 과학저널 New Scientist에서 세계 지도자급 과학자들에게 대폭발 이론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을 때 당시참가한  229명의과학자들가운데이이론에동의한과학자는한명도없었다.저자가“정설로자리잡았다”고 한것은 이런


글을 읽어보지 못했든지 아니면 이들의 주장을 무시했다는 의미다.즉 자신이 이 패러다임에 전적으로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이다.

저자가 믿고 있듯이 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것은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에서 나온것이 아니다.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가 보면 “진화론적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단지 탄소의 양이나 아르곤의 양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양을 가지고 자신들에 맞게 선택적으로해석한 것이다. 사실 어떤 돌들도 수십억 년 되었다고말하지않는다.그러나 이런 해석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어디서부터 데이터고 어디서부터 해석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과학자와 함께 동일한 패러다임 안에 갇히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사실 저자가 언급한 균일하게 관측된 우주배경복사는 창조과학자들이 성경의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데이터이다. 은하들의 우주배경복사는 폭발로는 그렇게 균일할 수 없으며 오히려 창조 첫째 날 언급되었듯이 처음부터 우주 공간에 균일한 빛을먼저 만드셨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지금 알고 있는 태양계와 행성들의 완전한 궤도와 주기 크기는 빅뱅과 같은 폭발의 산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완전하게 설계되었어야 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3. 아담과 원죄에 대하여

- 첫 사람이 아닌  아담

우종학교수는이미진화역사를사실로전제해놓았기때문에진화론과맞지않는성경  내용에
스스럼 없이 손을 댄다. 앞으로 지적하겠지만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창세기 기록을 고대근동 창조설화 중에 하나로 보았기때문에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인 첫 사람 아담과 그가 행한 원죄에 대해서도 성경에서 벗어나 해석을 주저 없이 시도한다. 저자는 첫 사람 아담의창조를 처음부터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창조가 아닌 진화 방법의결과로주장하며,아담의원죄문제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이 자연선택이나 유전자변이 등과 같이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진화의방식을사용해서인간을 창조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p.84).

“아담이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p.229).

저자는 진화론적 아담을 만들어 나가면서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있나?”라고반문한다.이런저자의 반문하는 방식은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한다. 이는 ‘자신’이 진화론을 믿기 때문에 ‘자신스스로’에게문제될이유가없다고말하는것과같다.크리스천은첫아담의창조에 대하여 이유를 진화론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물어보아야 한다. 성경을 보면 아담의 창조에 대하여 진화를 사용하셨다는 내용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우 교수의 이러한 반문식 질문은 그 질문의 ‘이유’를넘어 그 자체가 ‘반성경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아울러 과학적으로 중요한 것 하나는 자연선택이나 유전자 변이가 아직까지 종류를 바꾸게 하는 진화를 발생시킨 경우로보고된바가없다는점을 알아야 한다. 이 두 과정은 단지 한 종류 안에서 다양해지는 변이만 생산했을 뿐이다. 우 박사는 과학적으로도 성립되어본 적이 없는 상상의 가정을 갖고 진화의메커니즘으로잘못알고있는것이다.

성경에서는 아담이 진화 과정 속에 창조되었다는 어떤 암시조차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창조과정가운데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며,특별히인간을창조하실때는“보시기에심히 좋았다”(창 1:31)고 기록하고 있다. 어디에도수백만 년 동안 진화와 멸종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음 아담이 창조되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저자가 주장하듯이 진화 과정으로 아담이 창조되었다는 생각은 성경과 상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창조자의 성품과 전능하심에 손상을입힌다. 창조과정에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심각하게왜곡시키고있는것이다.이 책뿐 아니라 진화 역사를 사실로 놓고 성경을 변형시켰던 모든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이와 유사한 시도들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 중에 하나도 바로 이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왜곡시키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진화 인류학자들이 인류의 진화조상으로 발표했었던 소위 ‘인류의 공통조상’이라고하는 것들이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발표된 것들이 그리 많지도 않지만 이들 대부분은 모두 원숭이, 인간, 위조품, 아니면 다른동물의신체일부로판정이났다.아직결론이 나지 않은 것들이 남았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모두 진화론적 신념으로 단지 형태만 가지고 해석한 것일 뿐이다. 이는 진화론자들이 창조와 진화 논쟁을 할 때 인류의 공통조상을 진화의 증거로 내세우지 않는 것을보아도 그 증거가 얼마나 허약한지 쉽게 알 수 있다.

저자는 일단 아담이 진화 과정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했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하여도 성경에 없는 ‘스스로의’ 상상 속 이야기를펼쳐낸다.

“다른 모든 창조물과 달리 인간이 특별하다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맞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인간을 창조한 방법 자체가 특별하다는 뜻은 아니다”(p.223).

그러나 저자의 주장과 달리 성경은 인간에 대한 창조 방법과 과정도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일관성이 있다. 자연적 방법이나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처음부터 완전한 초자연적인 방법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창 1:26)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며”(창 2:7)


“아담의 아내 하와는 그의 갈비뼈로”(창  2:21)

이처럼 인간 창조에 대한 성경의 구체적인 진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위의 주장을 펴는 것은 그가 진화론적 세계관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관과 상반된 위의 성경의 진술을 받아들일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저자의 의도는 다음 문장을 읽을 때 더 구체적으로 이해되는데 아담이 유일한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 진화된 여러개체와집단들가운데 선택된존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담이 최초의 인간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미 아담의 시대에 다른 인간들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있다”(p.232)

“인간의 진화가 한 개체에서 일어난 것인지 혹은 집단에서일어난것인지는아직확실치않다.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처럼 생물학적 진화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났든지, 신은 한 인물이나 공동체를 택해서 언약 관계를 맺음으로 진정한 인간이 되게 했다고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p. 232)

아담이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가운데 선택된 존재라는 것은 아담에게는 결코 적용될 수없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고하지아담을선택했다는말씀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언제나 “첫 사람 아담”(고전 15:45)이다. 창조했을 당시에는 세상에 한 사람 밖에 없는데 무슨 선택이 있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저자는 아담에 대한 몇 가지 신학적 견해를 제시하는 가운데서도 “어느 견해든 신은 진화의 방법으로 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p.233)고 하며,하나님이 진화의 방법으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견해에는 포용적이며,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견해에는 반박하는 입장을 취한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진화 방법을 사용하는 문제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했느냐, 하지 않았냐’의 사실 여부에 관한 문제다. 성경은 진화란 것이 발생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사용하지도 않으셨으며, 인간이 진화의 산물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 첫 범죄가 아닌  원죄

저자가 아담에 대한 부분을 모두 진화론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아담이 행한 원죄에 대한 부분도
모두 비성경적인 해석을취한다.

“원죄가 사회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라면 아담이 모든 인류의 조상일 필요는 없다… 원죄는 대표성의 원리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p.  234).

저자는 이번엔 여기서 ‘필요’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아담이 유일한 조상이라는 것이 필요에 대한 문제인가? 아담이 인류의 조상일 필요도 없고 원죄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대표성의 원리라는것은 도대체무엇을의미하는것인가?죄 지은많은 사람들중에 아담이대표로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말일까?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선악과는 무엇이며, 이 때문에 사망이 왔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난 창세기 기록은 어떻게 된것인가?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언급한 ‘첫 사람아담’ 때문에오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무슨 의미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죄가세상에들어왔다”(롬  5:12)고 한 이 ‘한 사람’은 누구인가? 또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들었다”(행 17:26)에서 성경이 말하는 한 혈통은 아담부터가 아니라 진화의 조상인  아메바란 말인가?

저자는 아담과 원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받기 위해 여러 신학자들을 나열한다. 그러나 이는 신학자를 나열할 문제가 아니다. 저자가 나열한 신학자들도 모두 진화론을 사실로 놓고 성경을 변형시키려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저자와 똑같다. 진화 역사를 사실로 믿고 있기에 이를 기준으로 놓고 성경 역사를 바꾸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라 할지라도 성경을 변형시키거나 성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신학이 등장했을 때는 다음 세대에게 신앙이 전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에 진화론 등장 이후에 영국 신학자들이 만든유신론적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신학이 기독 신앙을 전수했다면 왜 지금 영국교회가 전체인구의  2%도수용하지 못하며 몰락했겠는가! 그리고 미국 교회의 젊은 세대가 교회에 등을 돌리는가!

저자가 그냥 “나는 성경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떳떳해 보인다 마치 성경을 믿는 것처럼 말하면서 성경을 말씀 그대로 믿는 순수한 신앙인을 어지럽히며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 크리스천의 신앙의 모든 근거는 성경에서 비롯되며, 특별히 창조사실이 담긴창세기는가장기초가되는부분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면 성경 전체가 흔들리며 복음도 사라지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난다. 실제로 영국이나 미국이나 유신론적 진화론을 먼저 수용했던 모든 나라들이 그랬다. 그러나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서 성경을 그대로 믿지않아도신앙을유지할수있다는이상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4. 그릇된 용어 사용

‘사실(fact)’이란 단어가 있다. 한 마디로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말한다. 예를 들면 과학자들의 연구의 대상인 별, 지층, 화석, 생물, DNA… 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이런연구대상을 데이터(data)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데이터들은 자신이언제어떤 과정을통해지금의자리에서 현재 모습을 갖추었는지 말을 하지 않는다. 이들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들을 보며‘해석(interpretation)’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을 하고 있지 않는 데이터를 보며 해석해야 하는 것은 창조과학자나 진화과학자나 피할수 없는 현실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이 어떤 화석을 하나 발견했다고 하자. 이 화석은 데이터이다. 그러나 화석은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이 데이터를 가지고 진화과학자들은 수억 년 전에 살았던진화의과정에있던생물로해석한다,한편창조과학자는성경에나오는격변적 심판의  결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현실 때문에 기원이나 과거 역사에 대하여 말할 때 데이터와 해석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글을 쓰게 된다면 글을 쓰는 자신도 정리가 되지 않을 것이고 독자들에겐 혼돈만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교과서나 과학잡지를 보면 그것이 데이터인지 해석인지 거의 구분 없이 나열되어있는 것이  현실이다

- 진화론 = 과학

우종학교수의책을읽는독자들은저자가단어사용에있어서이현실을고려하지않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만약 이런 통찰 없이 이 책을 읽는다면어디서부터데이터이고어디서부터 해석인지 혼동 속에 빠지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잘못된 용어사용은 과학이란 단어와 관련된 서술 속에서 일어난다. 저자는 “진화론=과학”이라는 전제 하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한다. 즉 “진화론”이란 단어가 사용되어야 할 문장에서 저자는 계속 “과학”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과학은 진화론보다는 훨씬 포괄적인 단어다. 과학이란 단어를 쓸 때는 어떤 지식체계도 될수있고,방법론적인 과정이 될 수도 있다. 반면에 진화론이란 앞에서설명했듯이데이터에대한해석일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책의 목적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크리스천이 과학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를 풀고 과학을 거부하기 보다는 수용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다”(p. 11).

그러나 책 전체를 보면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이 “과학”은 “진화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책전체를 읽어보면 저자는 과학이 아니라 진화론을 수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진화론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될 때 마치 그것이객관적사실이라는 지위를확보한것처럼착각하게 하는 것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 통상적으로 과학이라고 하면 독자들의 머리 속에는 교과서에 배우던 ‘중력의 법칙’ ‘보일의 법칙’ ‘유전 법칙’과 같은 것들이 떠오를  것이기때문이다.그래서단지이 문장뿐 아니라 이 책 전반에 걸쳐 과학이란 단어를 모두 진화론으로 바꾸어 읽으면 앞으로 저자가 전개하려는 내용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지적설계 운동가들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찾아내어 그것을 설계논증에사용한다(p. 187)”

그러나 이 비판에서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실제로지적설계운동가들은생물들을관찰할 때 진화과정(과학이 아니라)으로 설명될수 없기 때문에 설계를주장하는 것이다. 또 다른예를 보자.


“생물의 변화과정을 연구하는 진화 이론 자체는 무신론 혹은 유신론이 아니라 그저 과학이란 말이다.
무신론이나 유신론은 과학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p.37).

이 문장만 보면 진화론이 생물의 변화과정을 연구하는 과학이라 말하지만,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진화 과정을 인정하는 것을 과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사람도 진화되는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진화론은 하나의 해석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무신론과유신론을해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무신론, 유신론 문제는신념체계이지해석이아니다.이 부분에서도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용어의 오용을 알고 보면 이 책에서 진화론과 과학에 대한 그릇된 용어 사용을 어렵지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과학에 대하여 고찰하다’, ‘성경과 과학, 함께 생각하다’, ‘과학과 기독교, 적일까 남일까’, ‘과학의 창으로 창조를 보다’와 같이 책의 소제목에서 과학이란단어를사용하였지만책 내용을 읽어보면 하나같이 진화론이란 용어를 과학이란 용어로 대체한 것이다. 모든 과학이란 단어를 진화론으로 바꾸면 정확한 제목이 될 것이다.

- 실험과학과 역사과학

창조과학 사역자들은 ‘진화론은 과학이고 창조론은 신앙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것 같다. 과학에는 우리가 직접 관찰하고 실험을 할 수 있는 “실험과학”의영역이 있는 반면,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없는 과거의 사실을 재구성하려는 “역사과학”의 영역이 존재한다.창조와 진화에 관한 논쟁은 바로 이 역사과학의 영역인데, 창조론자들과 진화론자들 모두 동일한 자료(화석, 지층, 생물 등)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서로 가지고 있는 믿음 체계 및 세계관이 다르기때문에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창조과학자들도 동일한 데이터를 갖고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과학자들은 과거를 해석하는데 있어서진화론자와의차이점은거기계셨던 분께서 계시하셨다고 하는 “성경”을 갖고 있다는 차이뿐이다. 과거 사실을알고자하는입장에서 소위 “증인”을 만나서 그의 “증언”을 들은 것이다. 그러므로 형사가 증인을 받아들이듯이 자연스럽게 성경 기록을 참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성경에 생물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시고, 이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시고, 그이후전지구를쓸어버리셨다는 격변적 심판 기록을 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데이터들을 보았을 때 전이화석도 없고 생물들이 서로 교배할 수 있는 한계로 묶여진다는 것, 그리고 이들을 다스리는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 인간의 모습이 맞아 떨어진것이다.이때창조과학자들은성경이과학적데이터들과 맞아 떨어진다는 해석을 하게 된 것이다. 화석, 지층, 별, 생물과 같은 증거는 말을 하지 않아도 증인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실험과학”과 “역사과학”의 차이에 대하여도 이해가 불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연구하는
천문학 분야도 이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있다. 즉 천문학의 연구의 대상인 별들 자체에 대한 데이터(실험과학)와 이 별들을 통해과거를유추해야 하는 해석(역사과학)의차이를 구분해야한다.두 과학의 차이에 대한 저자의 불분명해 보이는 이해 역시 “진화론 = 과학”이라고 여기는 저자의생각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같은 이유로 이어서 다룰 창조과학자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본질에서 벗어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진화의 증거보다는 주변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5. 창조과학에 대한 비판

우종학 교수는 창조과학을 비판하는데 한 단원을 할애했을 뿐 아니라, 책의 곳 곳에서 창조과학을 비판한다. 그 예들을살펴보자.


-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이 틀렸음을  말한다

“창조과학자들이 주로 취하는 방법은 과학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p.140).

저자는 여기서도 “진화론”이란 단어를 넣어야 할 곳에 “과학”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창조과학자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심어준다.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이 틀렸음을 보여주는것이아니라 과학적 증거와 방법들을 통해서 얻어진결과들이  “진화론”과맞지않음을밝히는것이다. 위의 문장에서도 과학 대신에 진화론을 넣어보라. 오히려 창조과학의 올바른 정의로 바뀐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까지살아있는 것이나 화석에서나 전이생물이 발견되지않았고, 생물들을 교배할수 있는 단위(종, 속, 또는 과, 창조과학자들은 이를 ‘종류’라고 부른다)로 묶을 수 있으며, 돌연변이나 자연선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이 종류가 바뀌는 예를 관찰하거나 실험에 성공한 예가 없다. 이 결과 진화론이 과학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것이아님을밝히는것이다.그리고 성경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창조하실 때 “종류대로”라는 방식을 사용하신 것이 증거와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부정확한 개념을 사용하여 창조과학자들을 매도하는 표현을 서슴없이 써 내려간다. “(창조과학자들은) 대부분의 과학이 타락했다고 정죄한다”(p.  138):
“창조과학자들은 주로 취하는 방법이 과학이 틀렸음을 보이는  것이다”(p.140):


여기서도 저자는 진화론과 과학을 혼돈해서 쓰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오해를  부추긴다.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이 틀린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틀린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창조과학 분야가 지질학에만 국한 된 것으로 잘못 알고있다.
“창조과학이 담고 있는 과학이라고 할 만한 내용은 20세기 초부터 창조론 운동에 근간이 되어온 홍수지질학(flood geology)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p.  139)

창조과학 분야는 홍수지질학이 유일한 것이 아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미국의창조과학관련홈페이지에 들어가보라. 지질학뿐 아니라, 천문학, 생물학, 고고학, 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들을 발견할 것이다.

“창조과학은… 성경의 내용들이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입장을 갖고있다”(p.33):

창조과학자는 성경의 기록들이 과학으로 “증명(proof)”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구, 별, 생물, 사람과 같은 연구의 대상들이 실험실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과학자는우리가갖고 있는 연구의 대상(data)들이 증인이신 하나님께서 성경대로 행하신 “증거들(evidences)”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그 증거들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는 미국 창조과학연구소의 창시자인 헨리 모리스 박사를 예로들며그분이  ‘성경을과학교과서’로 봐야 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p.110). 그러나 단순히 이 한 구절만 가지고 비판할 내용이 아니다. 그의 책의 전반을 읽어봐야 모리스 박사가 말한 의미를 알 수 있다. 모리스 박사가 과학 교과서라고 말한 것은 성경이 천체의 위치와 궤도를 설명한다든지, 지구의 화학적 구성물질을언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과거 역사(즉 앞에서 언급한 역사과학)는 거기 계셨던 증인인 창조자를 통하여 가장 쉽게 알 수 있으며,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데이터들이 거기 계셨던 그 창조자가 계시한 성경과 일치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어 열왕기상 7장에 등장하는 솔로몬 성전의 물통 규격이 수학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예를 들며 모리스 박사가 성경을 사실로 전하는 태도를 비판한다(p.  112).그러나오히려모리스 박사는 이 물통 규격에 대한 성경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그의 책에 이미 언급하였다. 물통 부분에 대하여는 앞에서 이미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 창조과학 내용이 국제적인 학술지에 실리지 않았다

“창조과학은 과학이라 할 수 없네. 과학계에서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 방법론을 창조과학자들이
제시한 것도 아니고…”(p.139).

 저자는 창조과학자의 글을 국제적인 학술지에 싣지도 못하는 빈약한 주장이라고 치부하였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비판은 잘못된 것이다. 창조과학자 중에는 네이처지나 사이언스지에 논문을 수록한 분도 있고,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라간 분도 있다. 또한 현재도 과학분야에서 자신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하는 분들도있다.

이런 식의 비판은 과학계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비판이다. 학술지의 수록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큰 부분은 당시의 우선하는 패러다임에 의해서 결정된다. 실제로 19세기 말부터 수십년간학술지에 실리지 않았던 것은 창조과학자들의 글만이 아니었다. 지질학적 증거들이 짧은 기간에 격변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문은 어느 지질학자든지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지질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는 거의 대부분의 지질학자들은 오늘날과 동일한 속도와 강도로 오랜 시간에 걸쳐 지층과 지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동일과정설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동일과정설의 패러다임과 상반되는 지구가 지금과는 다른격변을겪었다는해석의논문들은  1970년대 들어서야 조금씩 등장했고 최근에야 학계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지질학연구가 실험에 의해서 얻어진 결과라면 최근 논문의 대부분은 격변적으로 해석한 것들이다. 지질학계 안에서 기존의 동일과정설에서 격변설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학술지의 수록 여부는 설득력 문제보다는 분명 패러다임의 문제인 것이다.

저자는 설득력이 패러다임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옹호하기 위해 지동설과 천동설을예로든다.지동설이 등장한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케플러가 타원의 법칙을 통해수학적으로지동설을증명하기까지 갈릴레이가 지동설의 증거를 제시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지동설로 전환시키는데 실패했다고 말한다(p.53). 즉 패러다임보다 설득력이 약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쉽게 선후를 내세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당시에 천문학자들이 지동설을 믿고 있었다면 갈릴레오의 증거들을 훌륭한 것으로 받아들였을것이기때문이다.

과학계 안에서 이런 예들은 너무나 많이 들 수 있다. 미생물학의 아버지인 파스퇴르(Luis Pasteur)가 탄저균 백신을 개발했을 때 당시 과학자들은 그 백신이 제대로 역할을 할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덩치 큰 동물들이 현미경에서나 보일까 말까 한 미생물에 의해 죽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때 설득력이 먼저일까? 아니면 당시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편견(패러다임)이 먼저였을까? 파스퇴르는이미 미생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실험을 통해서 수없이  강조해왔었다.

의학계에서 가장 큰 발견을 꼽으라면 리스터(Joseph Lister)의 화학살균을 꼽는다. 그가 화학살균을통해 수술을 마치고 감염을 차단시키며 감염 막는 것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대부분의의사들은 수 년 동안 그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다. 많은 생물학자나 의사들이 세균은 몸에서 자연 발생한다는 진화론적 해석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설득력이 먼저인가 패러다임이 먼저인가? 이런 이유때문에 과학 철학자 쿤(Thomas Kuhn)은 과학계가 가장 큰 전제를 받아들이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 전제를 따른다고 했다.

어떤 과학자가 “신(god)” 또는 “성경”을 자신의 논문에 게재했다고치자.과연그논문이 받아들여질까? 천문학자인 저자가 진화론적 우주론을 설명하면서 논문 말미에라도 ‘이 일을맨처음에는 하나님이 시작했다’다고 쓴다면 어떤 과학저널이 이 논문을 받아들일까? 지금 자신의 이책에서 말하고 있는 유신론적 진화론 내용도 과학저널에는 실릴 수 없는 것들이다.

아마 저자는 창조과학 글이나 책을 읽을 때 객관성을 갖지 않고 읽었거나 비과학자들에게 전달하는 것만을 접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에게 편견을 버리고 창조과학자들의기술적논문들을 꼭 읽어보기를권한다.여기에는 1차 문헌을 다룬논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비록유명 논문지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이 과학자들이 자기 전공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필자가 미국창조과학 연구소에 있을 때 그곳 도서관에는 국제적인 학술지를 포함해서 각 분야의 새로운 저널들이 늘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실하게 그 논문을 읽고 계셨던 교수님들을 기억한다.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 보지 못한것을가볍게추측하며함부로판단하는 것은 삼가야 할 태도일 것이다.

- 창조과학은 안식교에서 출발했다

“창조론자들의 문자적 성경해석은 사실 안식일, 그러니까 토요일을 중요시 했던 제칠일안식교의 극단적인 문자적 성경해석의 전통에서 출발했다”(p. 147).

저자는 창조과학의 출발을 제칠일안식교의 극단적인 문자주의 성경해석의 전통에서 왔다며 비판한다. 사실 이런 질문은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접하는 질문이기에 이 기회를 빌어서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 교수는 창조과학자들이 홍수지질학을 언급한 안식교인인 맥크리디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를 따르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프라이스는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안식교인이다. 그는 과학과 성경에 대하여 높은 지식을 가진 소유자였으며, 그리고 홍수지질학에 대하여는 당시에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설명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은 창조과학자들이 그의 지질학적 해석을 공유하는 것이지 성경의 교리에 대하여동의하는것은아니라는 사실이다. 현대 창조과학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 모리스 박사도 그의 홍수지질학에대한 업적에 대하여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나 “나는 침례교인으로서 그의 종말론과구원론에대하여는 분명히 반대한다”고 선을 그었다(History of Modern Creationism, 1993). 미국 창조과학 연구소에 소속된 사람들 중에 안식교에 소속된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모두 거듭난 크리스천들이다.


이들이 프라이스의 과학적해석에 동의하는부분이있다고 해서 창조과학자를안식교에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저자는 창조과학자들이 문자적으로 6일 창조를 믿는다고 해서 이단인 안식교에 뿌리를 두고있다고 말한다. 만약 이단을 규정할 때,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기 때문에 이단 단체로 묶는 태도가 옳을까, 아니면 오히려 6일 동안 창조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단 규정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까?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가 “6000년 전에는 세상이없었다”고했는데,  6일간의창조를 믿는 그가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자인가?

여기서 하나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inspired) 쓰여졌다(딤후 3:16). 여기는 창세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6일 동안 창조하셨다는 기록은 하나님께서 돌판에 친히 새기신(inscribed) 것이다(출 31:18). 영어로는 “inscribed by the finger of God”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직접 새기신 것이다. 손가락으로 직접 새기시며 말씀하신 6일간의창조는 감동으로 쓰여진 것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6일 동안의 창조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것이안식교에 근거했다고 비판을 받아야 할 일인가 말이다.

과연 자신이 6일 동안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6일 동안 창조하셨다고 직접말씀하신 하나님은 누구며(출 20:11),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출 35:2)? 6일이 기록된 대로 평범한 엿새가 아니라면 안식일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아니면아직끝나지않은것일까? 실제로 본인이 안식을 하지도 않았는데 안식하셨다고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 그러면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예수님은 누구인가(마 12:8)? 그분이 안식후첫날부활한사실을기념하기 위해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크리스천은무슨 일을하고 있단말인가(눅 24:1)? 과연 창세기 1장의 하루를 하루로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범한 자들에게 내리신 조치와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안식일의 주인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단들은 우리가 6일 동안 창조했다는것을 믿기 때문에 비웃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성경 기록을 믿지 않기 때문에 비웃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창조론 사역은 안식교인만이 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꾸준히 진행해왔었다.과학과 신학을 공부했던 루터교 목사 바이런 넬슨(Byron Nelson)의 “돌 속에 홍수 이야기(Deluge Story in Stone, 1931)”는 창조론적 지질학의 뛰어난 책으로 꼽힌다. 그의 “종류대로(After Its Kind, 1932)”와 “아브라함 이전(Before Abraham, 1948)”도 그의 역작이다. 그 밖에 “진화에 대한 에세이(Essay on Evolution, 1925)”와 “하나님과 우주(God and the Cosmos, 1943)”를 쓴 데어도르 그래브너(Theodore Graebner), “홍수(The Flood, 1951)”를 쓴 알프레드 리윈클(Alfred Rehwinkel), “크리스천을 위한 매일 과학(Everyday Science for  the  Christian, 1947)”과  “창조-사실,이론, 그리고 믿음(Creation- Facts, Theories, and Faith, 1953)”을 쓴 데어도르 헨드리치(Theodore Handrich) 등.

여기서 지면상 모두 소개하지 못하지만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있는지모른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의 세파 속에서 소위 말하는 창조과학의 위치에서 글을 썼다. 그럼에도자세한역사적연구없이한사람의이름을거론하며성경에적혀있는  6일동안창조하신것을 믿는다고 해서 창조과학을 안식교에 뿌리를 두었다고 한다면, 이는 매우 안일하고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6. 성경에 대한 저자의 자세  II

- 창세기와 육하원칙

저자는“창세기가육하원칙에의해쓰여질필요가있을까?”라고반문하며,창세기  1장은전쟁을
경험했던 한 주민의 전투기록과 같은 것이지 정보장교가 육하원칙에 의해서 쓴 전투기록이 아니라고 말한다(p.210-212). 즉 창세기 1장을 전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한 주민의 전쟁기록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런 비유를 통해 저자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그린 책이 아닌, 부정확하고 제한된 시야로 쓰여진 ‘사람의 책’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러나 육하원칙이란 무엇인가? 상황을 정확하게 기술하도록 ‘사람이’ 정한 기준이다. 그런데 우리가만든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을 평가절하 한다면, 이는 성경을자신의 사고 아래 가두려는 위험한 태도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창세기 1장을 잘 살펴보면 이 육하원칙의 요소를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언제(태초에, 첫째 날,둘째 날, 셋째 날…), 어디서(무無에서, 지구위에,하늘에궁창에),누가(하나님이),무엇을(천지,동식물, 별들, 인간을), 어떻게(말씀으로, 물을 한 곳으로 모으며 바다를, 생물을 그 종류대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왜(식물은 동물과 사람의 먹거리로, 별들은 낮과 밤을 주관하며 징조와 계절과날과 해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 사실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유인 “왜”에 대한 부분이 창세기 1장에선 가장 찾기 어렵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신의 형상이 거하도록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창세기 1장 안에 필요한 각 요소들이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창세기 1장의 기록을 육하원칙이 빠진 불완전한 기록이라고 생각하는이유는 무엇일까? 몇 백억 년 전에 빅뱅에 의해 우주가 시작되었고 수십억 년 동안 진화와 멸종이 반복되었다는 진화 역사가 마음에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다음의 진술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과학은 ‘어떻게’라는 문제를 다루고, 신앙은 ‘왜’라는 문제를 다룬다고 말할 수도 있다”(p.120).


이것은 바른 말이 아니다. 만약 우 교수의 말대로 신앙이 왜에 대한 문제만을 다룬다고 한다면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신앙이든지사람들이스스로만든철학에 어울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저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육하원칙의)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라고 하는 모든 것을함께 사용하신다.이것이기독교가다른종교나 철학과는 다른 가장 구별되는 특징이 이것이다. 시공간 속에 일어난하나님, 인간, 피조물,사탄이 행했던 역사를 통틀어서 ‘왜’란 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 문장은 우 교수 안에있는 잠재된 결심일 것이다. 위의 문장을 “나는 과학으로부터는 ‘어떻게’에 대한 답을 가져오고, 신앙으로부터는 ‘왜’란 답을 가져오기로 했다”라고 바꾸는 것이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단지 막연한 개념의 하나님이 아닌 과거에 행하셨고, 지금 행하시고, 앞으로 행하실 실재하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크리스천은 이 부분을분명히알아야한다.하나님께서는성경책 속에만 갇혀있는 분이 아니시다. 크리스천은 성경을 통해서 지금 우리의 시공간 속에서도 여전히 행하시는 하나님임을 믿고 아는 것이다.

인간은 과학을 통해서 우주 만물의 운행과 작용의원리에 대해 ‘어떻게’에 대한 답을 조금 알아가고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학은‘왜’에 대한 대답을 전혀 줄 수 없다. 다시 말해, 과학은 물질 세계에대해 부분적으로 알려줄 뿐이고, 기독교 신앙은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왜’에대한근본적인 지식과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결국, 우 교수는 과학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신앙으로부터 ‘왜’의 답을찾으려는자신의태도를마치과학은  ‘어떻게’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신앙은 ‘왜’에 대해서만 말해줄 수 있다는 식의 이원론적 관점을 보이고있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태도는과학에 대해서는 필요이상의 지위를 부여하고, 반대로 기독교신앙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취사선택하도록 하는 그릇된 신앙을 갖도록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떤 사건이 언제, 어디서,누가,무엇을,어떻게,왜일어났는지를어느 역사책보다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만약 독자가 성경을 읽을 때 일부러 이 사실을 무시해버리지만 않는다면 이 요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서 역사적 사건을 “왜”라는 부분에만 국한해서 알려주려고 하셨다면, 무엇 때문에 성경속에노아의방주에 대해서 구체적인 규격과 방법까지 기술하게 하셨고, “어떻게” 만들라고 그토록 상세하게 서술하게 하셨을까? 성경은 결코 “어떻게”라는 부분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우 교수가 ‘있는 그대로’보다 얼마나 ‘자신이 믿는 전제’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대목이다.

아래 내용도 저자의 비슷한 자세이다.

“성경은 백과사전도 아니고 자연사를 담은 과학책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내용은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든지 읽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p.215).


저자가 말한 것처럼 성경이 모든 것을 기록한 백과사전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 생물, 인간의
창조, 타락, 전지구적인 격변적 심판 등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자연사를 분명히 담고 있다.단지 저자가 진화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성경 속의 이런 기록들을 인정하지 않고있을뿐이다.그렇다면, 저자가 언급한 백과사전과 과학책은 모든 역사와 진리를 포함하는가? 그것들 역시 모든 것을 옳게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너무도 제한적인 것들이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저가가 성경보다 백과사전과 과학책에 더 큰 신빙성을 두고 있다는 의구심을 들게 하는 부분이다.

성경이 백과사전은 아니지만 ‘사실’을 적은 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이 기록되었다는 의미란모든 것이 진술되어있다는 말은 아니다. 말 그대로 적혀있는 내용이 틀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즉창세기 1장에 모든 것이 적혀있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종류대로 창조된생물’,‘이를다스리도록창조된 하나님의 형상’, ‘우리의 먹거리로 창조된 식물’, ‘엿새 동안의 모든 것 창조’, ‘지구를 첫째 날, 별들을 넷째 날 창조’, ‘첫 사람 아담’ 등 성경에 기록된 모두는 사실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사실을 기록했기 때문에 만약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내용이궁금하다면,이사실을근거로 유추할 때만 실수하지 않고 답을 얻어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솔로몬 성전에 대한 그릇된 예는 성경에 대한 저자의 오해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7. 진화과정 속에 갇힌  하나님

우 교수는 창세기를 고대 근동 지방에서의 개념으로 쓰여졌다고 단언하며,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사실로 믿는 진화 역사가 성경에는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창세기는 몇 천년 전에 고대 근동 지방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가 21세기 과학을 통해서 알고있는 우주 대폭발이나 우주 팽창 혹은생물진화를하나님이창세기기자에게영상으로 보여주었다고 하더라도,창세기 기자는 자신이 갖고 있던 지식과 우주관을 토대로 글을 쓸 수밖에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대폭발을 통해 ‘우주 팽창을 시작하시니라’ 라던가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을 통해 인간의 몸을 구성할 탄소를 창조하시니라’ 같은 표현이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다”(p. 213).

그런데 우주가 폭발이나 핵융합으로 시작했고 생물이진화되어왔다는것은 누구의상상이며누가 만든 단어인가? 모두 진화론적인 해석에서 나온 단어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영상을창세기 기자에게 보여주실 리도 없거니와, 창세기에 이들 단어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경이 사실을 적은 책이 아니라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상황에서 쓰여졌다라는 하는 생각은 정말로 억지가 아닌가?


별이나우주공간은스스로말을하지않는다.그러므로과학자들이해석을한다.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우주와 별들이 창조될 때 거기에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연구 대상을갖고 과거의 일들에 ‘해석’할 수밖에 없으며, 이 해석의 과정에는 반드시 자신이 갖고있는 전제를필요로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많은 혼돈을 가지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 글의 뒤에 저자의 용어 사용 문제점을 지적할 때 더욱 더 자세히  언급하겠다.

크리스천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성경을 통해 피조물을 해석해야한다.그런면에서성경은증인의 증언과 같다. 그러나 저자는 반대로 행하고 있다. ‘말을 하지 않는 피조물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을 하고 있는 성경’은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을 하지 않는 피조물’에 대한 과학자들의 해석을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경’보다위에두고 있는것이다. 아래 두 문단도 저자의 동일한 자세를 보여준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와 같은 목적론적 질문을제외한 모든 과학적 질문들을 궁극적으로 자연적방식, 즉 ‘과학으로 답할 수 있다’라는 전제를 갖는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이런 전제를 크리스천이 가지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p.  195).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과거에 대하여 스스로 깨달아 알려고 하는 자세를 단호하게 꾸짖는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으면 말할지니라”(욥 38:4)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행하신 과거 일을 우리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과거에대한 사실은 언제나 거기 있었던 증인을 통해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이 세상의 창조주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준다. 반면 자연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계시로서 하나님이우주를어떻게주관하시는지,세상을어떻게 다루시는지 알려준다”(p. 104).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자가 말하듯이 자연은 하나님이 우주와 세상을 어떻게 주관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단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이 이를 담고 있다고할지라도 우리는 이를 스스로알 수없다. 과학자가 우주와 생명의 운행하는 지금의 모습을 관찰한다 할지라도, 이들이 어떤 과정으로지금의 위치까지 와서 이와 같이 운행하고 있는지는 그 시대의 신념과 자신의 편견에 따라 제각각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과학의 한계와 과학자의 오류는 ‘과거’에 대하여 재구성하려고 시도할 때 훨씬 더 커진다.과거에 대한 구성은 검증할 수 없는 전제와 해석들이 훨씬 더 많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과정과는 전혀 다른 사건들을 겪었던 과거 역사에 대하여는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주를 어떻게 주관하는지는 자연이 아닌 성경이 말하고있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창 1:16,  18).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시 136:8).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히 1:3).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구절을 그 자리에없었던 우리 자신의 편견으로 또다시 해석해야할까?

저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다음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 하기도 한다.

“과학은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종교를 정화할 수 있으며,종교는맹목적숭배와잘못된절대성으로부터 과학을 정화시킬 수 있다. 과학과 종교는 각각 서로가 더 번영할 수 있는 더 넓은 세계로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다”(p.  106).

요한 바오로 2세의 위의 언급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언급이 창조자의 말씀을 가진 기독교에도 정당할 수가 있겠는가? 과학이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성경을 정화하는가, 아니면 성경이 그릇된 과거의 해석과 미신의굴레로부터인간을벗어나게하는가?대답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1997년 진화론을 인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염두에두어야만 한다. 그가 종교지도자라 할지라도 성경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요한 바오로 2세와 저자의 생각이 유사한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진화와 자연과정의 틀에 제한시키려는 저자의 태도 또한우려되는바이다.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과정을 진화과정에 맞추어서 해석하려고하는태도 역시진화론적세계관 속에 저가가 갇혀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섬과 별과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계신다고 고백한다.하지만이러한창조는기적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원래 창조 세계에 부여하셨던 자연법칙을 따라 자연적인 방식을 통해 섬과 별과 생명을 비롯한 다양한 창조 세계의구성물을 창조하고 계신다”(p. 244)”.

“(하나님이 설계했다는 생각은) 어떤 면에서 신을 우리의 설계 개념 안에끌어내리려는 것이다”(p.  199).

“과연 신의 창조 방법을 기적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과연 옳은것인가?”(p.243).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의 창조 행위이다. 저자는 창조가
이런 기적을 통해서 이뤄지지 않으며 자연법칙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히려 창조가 자연과정을 넘어선 설계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자들에게설계개념안에신을가두어 놓는 ‘우물 안 개구리’(p.200)의 자세라고 비판한다. 과연 저자는 무슨 말을 하고있는가?과연 진화라는 자연과정 틀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저자의 생각과 자연을 초월한 분의 설계로 창조를 설명하려는 것 중에 어떤 것이 하나님을 더 제한시키는 생각이란 말인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자연적인 방식으로 창조하고 계시다는 저자의 의견은 성경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 2:1)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

창조 행위가 엿새 동안 다 이루어졌고, 창조에 관한 모든 일을 마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조는 지금도 진행 중인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다. 이미 ‘다 이루어졌고’, ‘마쳤고’, ‘그치셨다’(창  2:1-3).하나님의 창조 기적으로천지와 만물과 그것들을운행하게 하시는 자연법칙들이 만들어졌고, 지금은그 법칙들에 의해 운행되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계신 것이다.자연적인 과정으로 자연 법칙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 법칙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금의 자연적인 과정이라는 피조 세계의 운행과 작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 과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의 현실 속에서경험하고 있지 않은가?완벽한 설계 없이 과연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창조가 기적이 아니라 자연적인 과정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의견은 성경과 현실세계를 다 왜곡시킬 뿐이다.

창조를 진화과정으로 제한하는 다음 주장들도 동일한 맥락에서 읽으면 저자의 그릇된 논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진화과정이라는 한계 안에서 창조하셨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법칙 자체가 신의 작품이라면 자연현상을 신이 (창조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가 되지 않겠나”(p.70).
“행성들이 공전하는 질서 있고 아름다운 태양계는 분명 신의 설계였을 테지만,그 설계가 실제로
구현된 것은 태양이 만들어지고 행성들이 잇따라 만들어진 긴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다”(p.88).
“우주 진화는 창조의 과정이다”(p. 243).
“신이 진화의 방식을 통해 생물들이 만들어지도록 설계했다면 어떤가?”(p.89).


위의언급들은하나님을자연법칙안에제한시키고있는저자의인식을보여주는모습이다. 또한
일관성이 없이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에 꿰어 맞추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신을 설계의 개념 안에 끌어내려서는 안 된다고말해 놓고, 아름다운태양계는 분명 신의 설계였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저자는 설계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우주의 신비로운 질서 체계를 긴 시간 동안형성되었다는 진화론적 개념에 끼워 맞추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는 긴 시간 동안 형성되었음을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는 분명 이 세상의 어떤 지적 존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의 설계에 의한 작품임을 보여준다. 성경도 전지하신 분께서 전능하신 기적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우주 진화라는 긴 시간 동안의 자연적인 과정에 의한 우주 생성은 무엇을 위한 설정일까? 다름아닌 진화론적 신념을 위한 개념 설정에 불과하다. 자연만 가지고 모든 것을설명하려다보니결국자신들의 신념 안으로모든 원인을 환원시키는 논리적 오류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읽으면 저자의 비논리적인 면을 어렵잖게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통찰력 없이 읽다 보면 저자가 성경을 신뢰하고 있는지 아닌지 파악하기 힘들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교개혁자들도 성경이 가르쳐 주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는 것에서 대해서는 멈추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나”(p. 212).

그러나 정작 저자 자신은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는 부분은 토를 달고, 가르쳐 주는 부분은 무시하며 지나간다. 성경 어디에 우주가 대폭발이 있었고, 진화와 멸종이 반복되다가 인간이 되었고, 하나님이 자연선택이나 돌연변이를 사용했고, 아담이 그런 여러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가르치는가? 이런 것을보고 적반하장이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내용을 성경에서 찾으려는 생각은 위험하다”(p.250)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내용을 찾으면서 이 위험한 일들을 저자 자신이 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서 우주의 폭발과 진화 방법을 찾을 수 있는가? 어디에서 원죄가 사회적 전승이란 단어를 찾을 수 있는가? 이어서 다루겠지만 우 교수의 책은 진화와 과학에 대한 용어를 혼동하여 사용한다든지, 해석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든지 결국 그의 논리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는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진화역사를 실재적 성경역사와함께엮으려는시도때문이며, 그런 이유로 당연히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8. 창세기 1장이 사실일 수 없다는 주장

 우종학교수는창세기  1장이창조기사를순서적으로적은것이아니라는이유를제시한다.  이에
대하여 논해보자.

- 태양이 없이 어떻게 처음 3일을 알았나?

“창세기  1장의창조기사를극단적으로문자적의미로해석하면여러어려움이있다.가령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정의하겠나? 그것은 지구가 태양을 바라보면서한바퀴자전하는데걸리는시간이다. 태양이 있어서밤이 되고낮이되는 것이다. 그러나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태양은 넷째 날 창조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즉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낮과 밤이 있었고 하루가 정의 되었다는 말인데 이해하기 어렵다.” (p 146)

이런 질문은 창세기 1장을 다룰 때면 저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받는 질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그대로 사실을 적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어렵지 않은답이나온다.하나님께서창세기  1장  1절에 “태초”라는 시간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 주간에 걸쳐 시간의 주기도 창조하신다. 첫 번째 등장하는 주기가 “하루”다. 그런데 실제로 하루는 태양이 아니라지구만가지고이루어지는 주기다. 지구가 태양을 바라볼 필요도 없이 지구가 한 바퀴 돌면 하루가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성경은 지동설이 등장하기 오래 전에 이미 지구가 자전하는 주기를 언급했다는 면에서 그 사실을알고 계신 분의 계시를  보여준다.

그리고 두 번째 등장하는 주기는 넷째 날 태양이 창조되며 언급된 “해(年, year)”이다(창 1:14). 모든 물질은 질량이 무거운 것을 중심으로 돌게 되어있다. 태양도 행성들의 질량의 비만큼 공전하는데 태양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공전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모든 물질은 질량이 있기 때문에 두 물체를 공전시킬 때 어떤 물체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완전한 중심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만약 질량이 같은 두 별들이 서로 공전 관계를 갖는다면 각각의 별은 서로 공전하며 공전의 중심은 두 별 사이 중앙에 존재할 것이다.

즉 지구가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까지 세 번 자전하고 네 번째 자전할 때 훨씬 무거운 태양이 창조되므로 자전만 하던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도 시작하게된것이다.그리고태양이만들어진 이때 성경은 정확히 ‘해(year, 年)’를 언급했다. 만약에 성경에서 태양이 창조된 다음 하루를 언급했다면 과학자들에게 더 공격을 받지 않았을까? 그러나 성경은 지구만으로 하루, 태양이창조되었을 때 연한을 언급하는 정확한 순서를 보여준다.

빅뱅론자들은 하루와 한 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다고말하는가?또한이를믿는유신론적진화론자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성경만 비판하지 말고 자신 스스로 한 번 모델을 제시해보라. 느려도안되고빨라도안되는완벽한하루가어떻게정착되었는지,그러면어떻게이정확한 시간의


단위들이이루어졌는지설명해보라.우교수가상상하듯이하나님께서시간과자연법칙에 제한
받으시면서 이루셨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초월하신분의전능하심과계획하심을통해이루어졌을까? 성경은 모든 시작을 막연하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막연한분이아니시기때문이다. 모든 자연법칙을 초월하신 전능한 분께서 처음부터분명히 창조하신것이다. 하루와한해도 마찬가지다.

- 골격해석

“창세기 1장은 시적 구조를 갖는데 첫 번째 3일과 두 번째 3일을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3일 동안에는 궁창이라든가 바다라든가 육지와 같이 골격을 만들고, 두 번째 3일 동안에는 각각의 구조물에 들어갈 새나 물고기나 동물 같은 내용물을 창조한 것으로 배치해서 기록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기자는 창조와 안식이라는 주제를 전달하려고 한 것이며,시간적 순서를 전달할의도는없었다고 보는 입장이다.”(p.144)

저자가 주장하는 골격해석은 최근 신학계에서 창세기  1장을해석하는가장보편적인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해석은 진화론이 보편화되면서 신학자들이 창세기를 실제 기록으로보기 보다는 시나 설화와 같은 하나의 문학으로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창세기 1장이 그대로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온것이다.그리고 그밑에는진화론에 대한 신뢰가 깔려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이 저자가 언급한 처음 3일과 나중 3일이 서로 대조되는 골격해석의 예이다.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눔   넷째 날: 해, 달, 별 창조
둘째 날: 물을  궁창으로 나눔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의  창조
셋째 날: 뭍과  식물의 등장   여섯째 날: 육상동물과 인간의  창조

언뜻 보기에 위의 표는 그럴 듯하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을 조금만 자세히 읽어도 위와 같은 패턴이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몇 가지만 보자.

첫째 날을 보면, 단지 빛과 어둠만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간, 하늘, 지구도 등장한다. 그렇다면 넷째 날에는 지구에 살고 있는 동식물도 언급되어야 한다. 창세기 1장의 첫째 날은오히려형태가갖추어지지 않고 비어있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지구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어두움에 초점을 둔것이 아니다.

둘째 날의 창조된 궁창 위의 물에 대하여는 다섯째 날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엄밀히 순서로보자면 물고기는 둘째 날이 아닌 바다가 창조된 셋째 날과 대응되는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어야 더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셋째 날에 바다가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섯째 날에는 바다 생물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 과정에서 환경요소를 먼저 갖추시고 생물들을 창조하신 것이 사건이나 시간순의 기록이 아닌 왜 시적 구조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집에서 물고기를 한 마리 키우려 해도 어항과 물과 기타 환경적인 요소를 미리 준비하고 물고기를 어항 속에 넣는다. 이는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미리 설계하고 고려하여 물리적 화학적 요소들을 갖추는 지성적이고 당연한 과정이다. 어떤 사람이 어항을 꾸미고 물고기를 풀어놓은 전 과정을 일기로 썼을 때, 우리는 그것을 시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일어난 사건을 기술한 일지로  받아들일까?

창세기 1장을 골격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이미 성경이 순서적으로 기록되었을 리 없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이는 잘못된 편견이기 때문에 실제로 창세기에 기록된 다양한 요소들을그냥 지나치고 자신이 원하는 문학 구조에 필요한 요소에만 집중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왜 저자를 포함해서 많은 크리스천들은 이 불완전한 골격해석에 매료될까? 자신이 배워왔던 진화론의 영향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성경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9. 맺는 말

이 시대는 한 마디로 말한다면 “진화론 시대”다.한 시대를 지칭할 때는 그 시대의 생각이 나에게얼마나 그리고 어디에 묻어있는지 감지할 수 없다면 그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시대와그 생각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늘날에는 초 중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그 시대의 생각이라고 하면 거의 맞을 것이다. 그 사고가 어렸을 때부터 비판 없이 수용되기때문에더욱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창조와 진화의 공개논쟁을 할 때면 진화론자들이 지금교과서에실려있는 내용을 진화의 증거로 내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내용이 진화의 증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모두 진화론을 배운다. 아마 진화론만을 배우고 산다는 말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기에 성경을 그대로 믿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현실은 안타깝지만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보고만 있어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르고 범하는 죄를 뭐라고 하실까? 성경에서는 모르고 범하는 것도 죄라고하신다.


“만일평민의한사람이여호와의계명중하나라도부지중에(unintentionally)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 4:27-31)

즉 부지중에 범죄하였을 때라도 누가 그에게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우쳐주면’ 암염소로 번제물을 드려 속죄함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즉 모르고 범하는 죄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이 모르고 거짓말 하는 이들은 어렵잖게 일어날 수 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과학자가 진화론과 함께 믿어도 된다고했기 때문에 나도 그랬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대로 사실이라고 누구도 가르쳐주지않았습니다”라는 식의 변명이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 모르고 주장했어도 거짓말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또 이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킨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르고’ 성경에 진화 역사를 추가한 것도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과학자나 신학자의 핑계를 대고 성경 역사를 바꾸어도거짓말이다.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 (잠 30:6).

다른 유신론적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이번 우종학 교수의 책도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나 많은 것을 더했다. 그러면 거짓말이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이 없다”라는 직설적언급을하며접근하지않았음을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말라고하시더냐?”라고하며(창 3:1)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의심하게 했다. 그때 하와는 “말씀”을 의심하고 범죄하였으며결국 자신과 그 후손들이 모두 죄 아래 있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과오늘날수많은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탄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그와유사하게성경을진화론에맞추려는타협이론들은 진화론보다 훨씬 위험하다. 진화론은 ‘교회 밖에서’ 성경이 틀렸다고말하지만,한편유신론적진화론은 ‘교회 안에서’ 성경이 틀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진화론 자체가 담고 있는 과학적 문제점만 교회 내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실재 역사를 진화의 역사로 바꾸어 놓은 무서운 오류를 교회 내로 끌고 들어온다. 그리고 마침내 창세기 기록을 당시의 전설이나 시로 전락시키려고 시도한다.


사탄은  “예수가그리스도가아니다”라는무지한직설적방법으로크리스천을시험하지않는다.
만약에 교회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당장 그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사탄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이 직접 거론되지 않는 ‘범죄 이전의 태초에 좋았던 창조’, ‘첫 사람 아담’,  ‘첫 범죄 선악과 사건’, ‘홍수 심판’ 등의 예수님의 이름이 직접 거론되지 않는 성경 기록을 역사적 실재가 아닌 신화로 만들어 놓은 다음, 이것들을 복음과 상관없는 성경 속주변이야기로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이들은 주변 것이 아니라 복음의 기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성경에 기록된 사실에 근거하여 처음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던 창조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만약 교회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복음이 흐려진다. 과연 범죄 이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시기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선 자신을 믿고 죄사함을 받은 우리를 언제가 좋았길래 어디로 데려가신다는 것일까? 첫 사람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가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온 인류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노아의 때와 같을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크리스천이 예수님을 믿는 근거는 모세가 쓴 글을 포함한 신구약 성경전체이다.만약저자가말하듯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 것이 성경교라면 우리 크리스천은 성경교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경 ‘책’에 갇혀있는 성경 교인이아니라,성경에써있는그대로시공간을초월하신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한 시공간 속에서 성경 그대로 행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 크리스천의 바른 믿음이다. 지금도 내 삶과 피조물에 대하여 성경 그대로행하시는살아계신하나님을믿는 신앙인 말이다.

진화론이 등장했을 때 교회가 ‘진화가 틀렸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신앙의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게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화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그들이떠났다.영국을포함한유럽이 그랬고, 미국이 그랬고, 이제 한국 교회도 여기에 몸살을앓고있는것이다.그러므로우 교수의 이런 식의 책이 등장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특별히 영국이나 미국을 보더라도 이런 유신론적 진화론은 교회가 성경을 신뢰하고 있을 때는 크게 고개를 들지않고있다가,교회가약해지는 시점에 고개를 든다. 지금 한국 교회가 동일한 유혹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 이래로 사탄의 유혹이 멈추었던 적은 단 1초도 없다. 여기에는 교회도, 과학자도 예외는아니다. 그리고 그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과 사탄 자신이 만들어 내었던 진짜 역사를 숨기는 것이며, 그 사실이 기록된 성경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우종학 교수의 책 출판을 계기로 유신론적 진화론이 성경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얼마나 허약하고 영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한국교회가 분명히 알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또한 진화론이 받아들여질 때 얼마나성경이왜곡되는 지를 새롭게 각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하는크리스천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구든지이음란하고죄많은세대에서나와내말을부끄러워하면인자도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우리에겐 과거 거기 계셨던 예수님께서 계시해주신 진짜 역사책이 있다. 이 성경책이 어떤 과정에서 내 손에 왔는가?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핍박과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며, 수 많은 선교사님들께서 고초를 겪으시며,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식지 않는믿음의열정이있었기에…그래서우리가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말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말이다.우종학교수의책을읽으며필자는 내내 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모든생각을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더 많은 도움을 원하시면 아래 도서를 읽기 권합니다.
이재만 (2015), “한국에 등장한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해”, 목회와 신학, p166-173.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장 vs 진화론 (이재만, 두란노, 2014)
노아홍수 콘서트: 땅에게 물어보라! 욥기12:8 (이재만, 두란노,  2009)
[출처] 이재만 창조과학선교회 회장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우종학 교수 비판|작성자 진리와 진실

원글 출처: http://blog.naver.com/wmsfms/220751937347

2016년 7월 3일 일요일

흔들리지 않는 비결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 (시15:5). 이생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면 비결은 간단하다. 시인에 따르면,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고 마음에서 진실을 말하고 남을 혀로 허물하지 아니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이웃을 비방하지 않고 망령된 자를 경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존대하며 마음에 서원한 것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다소 있더라도 변경하지 않으며 이자를 받으려고 대출하지 않고 무죄한 자의 입장을 꺾으라는 뇌물을 거절하면 된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도 흔들리지 않는 비법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민은 주께서 가르치신 삶의 규범을 존중하면 아마도 백발백중 해결된다. 여기에서 지나는 것은 대체로 악이나 속임수와 연결된다. 성경이 최상의 정답을 제시해도 우리는 그것을 수정하고 개악한다. 예면 예이고 아니면 아니라고 함이 성경적인 경건이다. 

2016년 7월 2일 토요일

생각의 성장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9).

이는 악하고 불의한 자들이 자신의 길과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면 그가 용서해 주신다는 것의 이유로 언급된 구절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높은 생각에 이르라는 교훈이다. 생각의 성장이 진정한 성장이다.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의 됨됨이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생각이 큰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무던히도 쏘다녔다. 이는 생각의 거인과 생각을 섞다 보면 그와 비슷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생각의 거인과 만나려는 갈증은 나의 발걸음을 태평양 너머로 움직였다. 거기서도 여러 거인들을 경험했다. 그래도 갈증이 가시지 않아 지금의 세대 이전 역사에 등장했던 거인들을 조사했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 생각의 거인들을 그때그때 절묘하게 세우셨다. 이렇게 내 주변에서, 내 세대에서, 시간의 역사에서 생각의 거인들을 만나며 깨달은 것은,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생각에 최대한 노출시킨 분들이며 결국 최고의 거인이신 하나님의 고매한 생각을 중개하는 도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용서,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 합리와 논리와 명분과 대체로 상충된다. 용서는 그것들을 향한 '동작그만' 선언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중지하고 하나님의 높은 생각을 추앙하며 올라가 "용서"까지 이르는 생각의 거인이고 싶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타당하게 보여도, 여전히 용서가 해법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에 부딪혀 나의 타당성이 모조리 박살나는 게 생각의 성숙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매사에 나의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으련다...

2016년 7월 1일 금요일

고백의 유익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요일1:9). "자백"은 자신의 입술로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거다. 불의를 해결하는 최고의 해결책은 그 불의를 저지른 당사자의 자백이다. 타인의 지적이나 비판이나 정죄와는 대립된다. 자신의 죄가 외부에서 지적되면 심기도 불편하고 관계도 뒤틀리고 합리화의 심보도 발동한다. 나아가 변명과 증명과 반론과 대립이 사안의 본질을 대체한다. 국가의 법제도는 어떤 사람이 타인의 죄를 고발하고 양측이 각자의 입장에서 진위를 가리는 장치이다. 양측이 서로 법적인 원수가 되는 대적의 모양새가 빚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도 자신의 죄를 시인하면 공방은 종료된다.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자백"은 불필요한 논쟁의 사회적인 비용을 줄이고 서로간의 파괴적인 관계를 치료하는 일의 첩경이다. 나아가 자백은 자신의 문제를 사람들 앞에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처리하는 참으로 유익한 수단이다. 

죄의 자백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9). 성경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참으로 단순하고 명료하고 명쾌하고 정확하다. 즉 죄의 자백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는 열쇠라고 한다. 하나의 불의가 자백을 거부하면 본질상 다른 불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판한다. 이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불의가 곳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분란을 일으킨다. 이러한 불의의 연쇄적인 자기 번식력이 수위를 넘어가면 "우리"라고 일컫는 공동체 전체가 그 불의의 집단적인 희생물로 전락한다. 탄식과 신음이 목젖까지 차오르고 급기야 개개인의 입술에서 절망과 좌절의 언어가 쏟아진다. 불의는 수습의 단계를 훌쩍 벗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마지막 희망이 있다면 바로 "자백"이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의 죄는 사해지고 우리는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된다. "자백"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그 효력은 확실하다. 자백은 행하라고 주어진 능력이고 누리라고 주어진 선물이다. 

2016년 6월 30일 목요일

충직한 책망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잠27:6). 이 구절은 공개적인 책망이 숨은 사랑보다 났다는 말의 단서이다. 친구의 잘못을 침묵으로 덮고 지나가는 식의 어두운 사랑은 올바르지 않다. 비록 아프지만 공개적인 책망이 아름답고 지혜롭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친구"라는 맥락이 중요하다. 친구는 서로를 위하는 관계성을 일컫는다. 이러한 관계성을 고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정죄하고 파괴하고 부끄럽게 만들려는 책망은 지혜자의 권면과 무관하다. 책망은 충직해야 한다. 도움과 안위와 회복과 세움을 지향하며 아프도록 꼬집는 것이 친구의 충직한 책망이다. 가정이나 교회나 학교나 직장이나 정치계나 상대방이 무너져야 자신의 존립이 확보되는 듯한 파괴적 책망이 난무함을 본다. 책망의 입술을 열고자 하는 사람은 함께 아파할 친구의 심정을 구비하는 것이 우선이다. 

2016년 6월 29일 수요일

입맞춤의 균형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을 맞추었다 (시85:10). 하나님 안에서는 인애와 진리가 절친이고 의와 화평이 연인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을 따라 하나님의 섭리도 양상은 동일하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이 공존한다. 홍해의 갈라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평의 입구였고 애굽 백성에게 공의의 출구였다. 섭리의 절정인 말씀의 성육신도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가리킨다. 즉 믿는 자에게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인 동시에 거부하는 자에게는 거치는 반석이다. 하나의 대상일 때에도 그러한 공존이 있다. 아들에 대한 징계의 경우, 아버지의 사랑과 의가 공존한다. 판단이나 헤아림의 경우에도 우리는 이러한 입맞춤을 고려해야 한다. 비난은 사랑이 없는 공의의 과잉이고 음비는 공의가 없는 사랑의 과잉이다. 무엇을 하든지 균형이 필요하다. 균형이 구비되지 않았다면 침묵이 상책이고 무위가 최선이다.

2016년 6월 28일 화요일

바른 관계의 정수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요일1:7). 진정한 사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림이고 그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없어지고 사람들 사이의 사귐도 온전함을 상실한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동거하는 사귐을 원한다면,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를 원한다면, 빛 가운데 거하여야 한다. 어두움 가운데서 이루어진 관계는 진정한 사귐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과 빛은 분리될 수 없는 사귐의 토대이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주님도 거기 계신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사귐을 의미한다. 어떠한 관계이든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원인들 뒷조사에 들어가기 이전에 내가 빛 가운데에 거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게 상책이다. 

목격자적 증인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1). 이처럼 사도들은 증인의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생생한 목격자적 증언을 신뢰한다. 그러나 사도들의 글을 신뢰하는 것에 과도히 만족하면 안되겠다.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우리도 그런 증인의 자리로 나아올 것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천지에 충만한 분이시다. 온 세상의 그 어떠한 미물도 그분의 충만한 영광을 침묵하지 못한다는 칼빈의 관찰은 정확하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목격해야 한다. 그분의 영광, 그분의 자비, 그분의 긍휼, 그분의 참으심, 그분의 통치, 그분의 주권, 그분의 섭리, 그분의 사랑, 그분의 공의, 그분의 심판, 그분의 진노, 그분의 지혜, 그분의 능력을 보고 만지고 들어서 증언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지각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2016년 6월 23일 목요일

영광의 거부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시115:1). 이 시인은 참으로 희한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광의 보다 큰 조각을 챙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는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오는 것을 극구 거부하며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라고 간구한다. 위대한 경건이다. 시인은 아무리 놀라운 업적을 이루고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고 할지라도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관찰하고 인정하는 경건의 사람이다. 사람의 눈에는 내 땀방울이 묻은 성취처럼 보여서 자칫 뻣뻣한 목을 세우며 자만의 폼을 잡기 십상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안다.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근거가 제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선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님이 이루신 일들이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사실의 인정이다. 그래서 영광은 그에게만 돌려져야 마땅하다. 

2016년 6월 22일 수요일

사랑을 사랑하라

인자를 사랑하며 (미6:8). 이 구절의 탁월한 해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하는 책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사랑을 사랑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cum diligimus caritatem, aliquid diligentem diligimus). 어떤 대상을 사랑하면 그것은 개인의 기호이고 특정한 대상만을 향한 제한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 자체를 사랑하면 그것은 성향이고 체질이며 특정한 대상에게 국한되지 않는 무제한적 사랑이다. 미가 선지자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라고 한다. 즉 인자를 사랑함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요구하신 선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체질과 성향에 자리잡은 사랑의 사람이고 싶다. 판단이나 정죄나 대결이나 증오나 격분이나 보복의 묶음에서 놓여 그런 사랑에 결박되고 싶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 사랑에 뿌리가 박힌 책망을 하고 분석을 하고 지적을 하고 징계를 하는 선행자요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람이고 싶다. 

2016년 6월 21일 화요일

우리의 실상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않으시니 (시103:10). 태초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필경 죽음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 때문에 그들은 즉각적인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지금도 이러한 긍휼은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생존은 하나님의 긍휼을 증거하는 입술이다.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억울해도, 아무리 답답해도, 아무리 공허해도, 아무리 참담해도, 아무리 비참해도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가늠된 죄의 심각한 무게와 우리의 여전한 생존을 생각하면 그래도 감사가 쏟아지고 하나님의 긍휼을 노래하게 된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확인되는 것이 실상이다. 주변과 비교하면 그 실상은 가려지고 망각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바로 우리의 실상이다. 이는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항상 감사해야 하는 근거이다.

"하루"라는 택배 (펌글)

하루.jpg
아침에 눈을 뜨니
밤새 배달된 귀한 택배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수 신; 나
발 신; 천국우체국
내용물; 하루

‘하루’라!
상자를 여니 하루 분량의 시간과,
각자에 맞는 달란트와 움직여 섬길 수 있는 건강이 들어 있었다.

신기한 것은 매일 아침 배달되어 지는 이 선물들은
벳세다 광야의 오병이어 바구니처럼
축복과 감사로 쓰면 자꾸만 내용물이 생겨나고
가나안 혼인잔치의 물 항아리처럼
순종과 섬김으로 사용하면 더 좋은 재질로 변한다는 것!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선물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다른 이들이 상상도 못한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선물을 시들시들 말려버린다.
선물이 선물로 보이지 않고 누가 보낸 것인 지에도 관심이 없다.
매일 받으니 시들해한다.
매일 만나를 먹으며 질려버렸던 광야의 사람들처럼
인생이란 날만큼 많이 배달된 이 선물을
하루도 감사와 기쁨으로 꽃피우지 못하고
불만과 짜증과 원망과 한숨으로 썩혀버린다.

똑같은 선물을 가지고 어떤 이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누리고
어떤 이는 감옥을 만들어 스스로 갇혀 지난다.
어떤 이는 천국의 분점을 계속해서 열고
어떤 이는 지옥의 가맹점을 확장해간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이 ‘하루’라는 선물상자는 계속 배달된다.
선물이 오는 동안의 하루하루는 영원한 나라와 연결되는 기회이다.
편지에 답장을 하듯이 선물에 대한 각자의 반응은
천국을 얻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다.
영원으로부터 와서 매일 단 한 번씩 주어지는 이 귀한 선물!
당신은 ‘하루’라는 이 선물을 어떻게 쓰고 계십니까?

출처: http://article.joins.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3272298

진정한 금수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6:10).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구분이 현실을 상당부분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동의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은 수저의 정확한 구분을 따라서는 분류되지 않는 이들이다. 수저의 모든 차이를 일거에 소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은 혹시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흙수저와 같더라도 모든 것을 가진 하나님의 금수저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은 인간문맥 안에서 고안된 수저 개념으로 슬픔과 절망과 낙심과 분노와 불평에 빠진 이들에게 유일한 소망이다. 그런데 교회마저 금수저 쟁탈전에 뛰어들면 그나마 한 가닥의 소망마저 사라진다. 하나님의 자녀는 참으로 금보다도 더 사모할 진정한 금수저 신분이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는 어떠한 불평과 시기와 질투도 그 명분을 상실하고 만다. 

2016년 6월 20일 월요일

길에 대한 무지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20:24). 자기의 길에 대한 이해 불가능은 사람의 걸음이 하나님께 있어서다. 인생이 그러하다. 모르면서 산다. 그래서 자랑과 교만이 있을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다수의 변수들로 들러싸여 있다. 날마다 끝자락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를 모르는 미지의 길에 걸음을 내딛는다. 그나마 인생의 가장 완성된 지도는 성경이다. 그런데 성경의 결론이 바로 시인의 고백처럼 사람은 자기의 길을 알지 못한다는 거다. 내일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이 아무리 높은 진리의 경지에 이르고 최고의 성취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저 바울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함은 섭리적인 무지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를 위함이다. 너무 많이 알려고도,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도, 너무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도 말라. 성경의 결론에 머물러 있음이 언제나 인생의 최선이요 최상이다. 

2016년 6월 18일 토요일

신적인 진노의 두려움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시90:11). 인간의 방자함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즉 코로 호흡하는 인생의 연약함은 어떠하며, 거기에 신적인 진노의 바람이 불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다. 이것이 시인의 설명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생각과 판단이 달라진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는 하나님의 일성을 경청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멸망과 멀어진다. 하나님을 경외하되 그분의 격에 맞도록 두려워할 대로 경외해야 한다. 이런 경외심이 없어지면, 생각의 방자함과 판단의 불의함과 언어의 경박함과 행실의 문란함이 뒤따른다. 경건의 총체적인 고삐가 풀어진다. 달리 말하면, 여호와 경외가 모든 것에서 질서를 잡아준다. 생각과 마음과 삶의 질서가 흐트러져 있다면, 여호와를 경외함이 회복의 첩경이다.

첫학기, 종강했다

전주대에서의 첫번째 학기, 종강했다. 은혜가 너무나도 컸다. 환경의 중요성도 절감했다. 종합대학 안에서의 한 학기는 신학교의 문맥 안에서 가르쳤던 경험과 판이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부족함과 옹졸함을 절감했다. 주 앞에서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도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주님은 정말 위대하고 자비로운 분이심을 경험했다. <사진> 전주대의 일대일 제자양육 모임이다. 신앙으로 소통할 수 있는 분들이 계셔서 더욱 행복했다.

2016년 6월 17일 금요일

신앙의 지향점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시81:14). 이는 주의 백성이 주의 말씀을 경청하고 주의 도를 따른다면 원수의 정복이 급속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속히"라는 말은 시간의 빠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미의 무게는 원수가 제거되는 속도에 있지 않고 말씀의 경청과 순종의 중요성에 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정하신 도를 따른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기독교 신앙은 원수의 정복을 중심으로 구축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순응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는 귀신의 쫓겨남을 기쁨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아야 함과 일반이다. 원수의 넘어짐과 엎드러짐 때문에 기뻐하지 말라는 지혜자의 교훈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신앙의 지향점을 위해 하나님은 원수도 적당히 지으시고 적합하게 쓰신다. 원수에 대한 우리의 부수적인 지향은 제거가 아니라 오히려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