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1일 금요일

소요리 문답 4-4 무한성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는 것입니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제가 건축한 이 성전이 어찌 용납할 수 있습니까? (왕상 8:27)

솔로몬은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짓겠다는 아버지 다윗의 성전건축 숙원을 이룬 왕입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그는 드디어 성전을 완공하고 봉헌하는 기도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의 무한성을 위의 본문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땅에 거하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주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늘과 땅도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한성을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용납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솔로몬은 너무도 잘 알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건축의 주역인데 생색도 안냅니다.

하늘과 땅과 성전이 하나님의 무한성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기 때문에 가까운 데의 하나님인 동시에 먼 데에도 계신 분이시며 그러한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땅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 분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묘사하는 하나님은 어떤 시공간에 제한되지 않으면서 모든 시공간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주물 중에 무한성을 가진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만 돌려야 할 무한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한성에 익숙한 인간에 의한 하나님의 인간화와 유한화가 필히 수반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성 때문에 존재가 무한하며 지혜도 무한하며 사랑도 무한하며 선하심도 무한하며 긍휼도 무한하며 자비도 무한하며 거룩도 무한하며 생각의 규모도 무한하며 계획의 규모도 무한하며 능력도 무한하며 권위도 무한하며 영광도 무한하며 공의도 무한하신 분입니다. 시공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시간적인 무한성 때문에 영원하며 공간적인 무한성 때문에 편재하되 시공간에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신데 피조물의 어떠한 것으로도 저울질할 수 없는 독생자의 생명까지 주실 정도의 무한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데 세상의 그 어떠한 절망과 슬픔에 의해서도 제거될 수 없는 영원한 소망과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영광도 주시는데 세상의 그 어떠한 수치와 비참에 의해서도 훼손되지 않고 빼앗아갈 수도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무한한 영광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무언가를 주실 때에도 무한한 것들을 주고자 하시는데 우리는 땅의 유한한 소욕과 남루한 흥정에 들어가고 어리석은 거래에 계약의 손을 내미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한 지각에 의해서는 다 파악될 수 없는 분입니다. 다 알지도 못하는 분에 대하여 불공평과 독재와 잔인과 모순을 운운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하고 경박한 것입니다. 전두엽에 꼬인 이성의 어설픈 작업이 생산한 불완전한 지식의 유한한 분량으로 하나님의 무한성을 달아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발칙한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판단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판단하는 분이시지 판단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을 선하시고 자비롭고 의로우신 분으로 계시하도 있다면 우리의 이해나 승인과 무관하게 그러신 분입니다.

계시된 대로 이해된 하나님은 사람의 지각에 의해 측량될 수 없도록 무한하신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경배의 이유도 되지만 동시에 두려움의 이유도 된다는 것은 사람이 모든 타인의 시선을 피하는 극도로 은밀한 곳에서 죄를 짓더라도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사실 탓입니다. 범죄의 증거를 아무리 인멸하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제거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죄를 짓는다면 죄의 경중은 죄의 대상에게 의존할 것인데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죄를 짓는다면 우리의 죄는 무한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지불해야 할 대가나 부과되는 형벌도 무한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의 무한한 무게를 견딜 수도 없고 해결할 수는 더더욱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당연히 유일하게 무한하신 성자께서 육체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친히 해결해 주시지 않았다면 죄문제는 다른 어떤 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죄를 지었다는 것과 무한한 댓가를 지불해야 했는데 무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삼아 지불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고 이렇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공로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유한한 믿음과 선행을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공로로 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 만족과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어떠한 피조물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 때문에 우리는 마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쁨은 하나님 바깥에 어떤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기쁨의 원인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공로와 연결되는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게다가 원인이 아니라 수단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우리의 믿음은 기뻐할 만큼의 가치와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인 것입니다. 우리의 초라한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해 주신다는 것은 설명할 수도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무한한 은혜와 영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문한성 안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풀고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무한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솔로몬이 세대에 걸쳐 이룩한 위업 앞에서도 건강한 처신이 가능했던 이유도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한 이해에 있습니다. 

2014년 1월 30일 목요일

소요리 문답 4-3 불변성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않으리라 (말3:6)

하나님이 변하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의 외부에 혹은 내부에 변화의 어떤 원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불변적인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내부에 변화의 어떠한 원인도 없다는 말입니다. 의지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변하실 의사가 없습니다. 외부의 원인에 대해서도 만물의 근원이고 역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자신 이외에 자신을 움직이고 변하게 만드는 상위의 원인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는 해와 달도 무색하게 될 정도로 절대적인 빛이시며 빛의 근원이신 분에게는 회전하고 변경되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의나 외부의 원인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신적인 본성이 변화의 원인일 수 있을까요? 저의 대답은 원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에 더하거나 감하는 변화가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는 가능성의 상태에 있다가 어떤 시점에 이르러서 실현되는 어떤 미완성이 하나님의 본성에는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가 이후에 존재하게 되는 가능태가 하나님의 본성 혹은 실체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시간이 시작된 이후로 종결되는 지점까지 끊임없이 "되어지는" 존재의 발전적인 진행형이 아닙니다.

영광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가감이 없는 완전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긴 하나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이 된다거나 보탬이 된다거나 보완이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영광에 이르러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후덕한 인격을 갖추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견고한 믿음을 가졌거나 예수님을 보여주는 희생적인 선행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생색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다 인생에게 유익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온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가르치고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복인 것입니다.

진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더 옳으시고 도 참되실 수 없도록 완전히 옳으시고 참되신 분입니다. 어두움과 애매함과 거짓과 속임수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진리는 없으며 하나님 위에 보다 더 높은 진리도 없으며 소급될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진리도 없으며 도달해야 할 더 궁극적인 진리도 없습니다. 진리의 근원이며 궁극이신 하나님은 완전하기 때문에 가변적인 상대적인 진리나 점진적인 진리가 그에게는 없습니다. 그에게는 완전한 진리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진리는 불변적인 것입니다. 선악의 구별은 완전한 진리에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모든 선악의 구별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계획에 있어서도 완전하기 때문에 원하시고 정하시면 변경되지 않습니다. 그분이 작정하신 것은 누구도 변경하지 못하며 그의 펴신 팔은 굽힐 자가 없습니다. 말라기의 본문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불변성 때문에 야곱이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하신 자는 반드시 구원하고 마시는 분입니다. 다른 어떠한 것도 여기에 변경을 가하지 못합니다. 시간 속에서 상황에 따라 인간의 설득에 의해서 뜻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원 속에서 작정하신 모든 것들은 시간 속에서 그대로 실행되고 구현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후회도 하시고 탄식도 하시고 진노도 하시고 타협도 하시고 변경도 하시기 때문에 변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의지와 감정과 행위가 인간의 가지적인 언어로 묘사되긴 하였어도 사람의 통상적인 언어이해 습관을 따라 하나님을 사람처럼 변덕스런 분으로 여긴다면 소통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낮추신 적응의 은택을 왜곡하고 오용하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변화이기 때문에 시간에 속한 우리에게(quoad nos)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편에서는 불변인 것이 시간적인 인간의 눈에는 변화로 지각되는 것 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보좌도 움직일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도 수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서고 하나님의 은총을 돌이키게 하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계획에 수정이나 변경이 일어난 것처럼 신적인 작정의 불변성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방식은 인간의 지각이나 이성으로 그 자취를 추적할 수 없도록 은밀하며 우리와 기도로 소통하며 당신의 뜻과 계획을 우리와 더불어 조율하는 것처럼 지각되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시는 방식인 것입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어서 사람들이 협조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협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못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신과 인간은 서로 협력적인 동역자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신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여 더욱 열심히 섬기라는 동기부여 차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 개념까지 고안해 낸 노력과 의도는 가상하나 '동역자'란 이름으로 하나님과 어깨를 겨누는 것은 흉내도 내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백성이고 하나님은 주인이고 우리는 사환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무에서 존재를 만드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역의 완성을 위해 인간을 비롯한 다른 어떤 것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조력을 받아야 비로소 일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명하시고 순종을 원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라도 확장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도 드러나게 되는 '협력적인 현상'이 있는 것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극도로 복되게 하시려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인 것입니다.

본성과 존재와 진리와 계획과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불변성은 우리의 복된 삶에 얼마나 중요한 근원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기에 우리에겐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절망의 음부에 자리를 깔지라도 거기에 계시며 죽어야 마땅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운명에 결박되어 있더라도 자신이 생명을 던져 사망의 결박을 푸시고 자녀의 자유를 명하시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도록 성령의 불변적인 보증으로 인치신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합니다. 한번도 동일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를 못합니다. 시간이 정지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변합니다. 시간이 인간의 유전인자 속에 제거될 수 없도록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이상 세월의 변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시간의 가변성에 매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과 믿음과 행실은 지칠 줄 모르고 변덕을 부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변하시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인격의 몰락과 믿음의 역주행과 선행의 부재에 면죄부를 발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열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자녀로 대우해 주셨기에 우리는 나태와 방종의 삶이 아니라 성실과 절제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은 상식의 항복과 논리의 붕괴와 인과의 마비처럼 인간의 모든 지성적인 무장을 해제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땅에서의 인과응보 논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제 외부의 강요나 강압이나 의무에 떠밀려 억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내부의 감격과 감사와 자발성에 의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고 그분의 자비와 긍휼은 무궁하기 때문에 야곱은 진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불변성에 우리의 소망과 만족과 안식과 평강이 있습니다.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소요리 문답 4-2 영원성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90:2)

하나님은 무한하며 영원하며 불변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람의 머리로는 능히 파악되지 않기에 인간이 확실히 아는 것들에서 유추하는 속성의 지식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가 늘상 경험하는 온갖 종류의 한계가 전혀 없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영원성은 피조물의 속성이라 할 시간성이 없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불변성은 무시로 변하는 피조물의 가변성이 하나님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속성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유한성과 시간성과 가변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속성으로 서술될 수 없는 분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서술할 때에는 부정적인 어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긍정적인 "이다"가 아니라 부정적인 "아니다"의 술어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어법 사용에 두각을 드러냈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질적인 속성의 제한이 없으신 선이시며(sine qualitate bonum) 분량으로 가늠되지 않으시는 웅대한 분이시며 (sine quantitate magnum) 결핍이 없으신 창조자가 되시며 (sine indigentia creatorem) 처소가 없이 거하시는 분이시며 (sine situ praesentem) 만물을 조건 없이 유지하는 분이시며 (sine habitu omnia continentem) 공간에 제한됨이 없이 도처에 편재하는 분이시며 (sine loco ubique totum) 시간에 국한되지 않는 영원하신 분이시며 (sine tempore sempiternum)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시되 변동될 것들을 만드는 분이시며 (sine ulla sui mutatione mutabilia facientem) 외부에서 당하시는 수동성이 없으신 분(nihilque patientem)"이라고 했습니다.

위에 언급된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시작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시기 때문에 시간의 유한한 길이에 얽매여 살아가는 인생에 의해 파악되실 수도 없고 판단 받으실 수도 없는 분입니다. 비록 자신에 대하여 처음과 나중이란 표현을 쓰셨지만 그렇다고 시간성이 투사된 '처음'과 '나중' 개념에 근거하여 시간적인 사유의 틀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읽으려는 태도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함을 땅으로 끌어내릴 빌미를 언어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초대교회 시대부터 구사된 것이었고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때로는 언어사용 중단으로 대응하고 때로는 언어의 역설적인 사용으로 맞서 왔습니다.

언어의 한계와 빈곤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는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는 언어를 개선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렇게도 유한하고 빈곤한 언어의 옷을 입었어도 계시는 여전히 하나님이 주어로 계시다는 사실에서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기록된 계시가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고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고 인간 저자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계시가 인간의 오류와 역사의 우연성과 언어의 빈곤에 억류되어 있다고 보아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 계시를 읽는다면 기록된 계시의 주변적인 요소들 속에 갇히게 될 것이지만 저자이신 하나님의 영으로 조명을 받는다면 결코 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시편에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 되시는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강건하면 기껏해야 80줄에 이르는 인생은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아나고 저녁에 시드는 풀과 같다가 티끌로 돌아갈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섬광처럼 짧게 지나가는 인생인데 엎친 데 덮치기로 모든 날이 하나님의 진노 중에 지나가고 평생이 한숨 같이 증발하고 만답니다. 이러한 인생을 잘 아는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란 기도를 올립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시간적인 생의 어떠함을 깨닫는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시간성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시간적인 인간이 구해야 하는 지혜로운 삶과 관련하여 모세는 1)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주의 종들에게 보이시고 2)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보이시고 3)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고 4)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사 우리의 손으로 한 일들이 견고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립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행하신 일들을 본다는 것은 복입니다. 하나님의 영화로운 광채를 가시광선 수준만 상대하던 눈이 목격하는 것도 다른 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도 놀라운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모든 일들이 덧없는 인생과 더불어 소멸되지 않고 견고하게 보존되는 것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천상의 복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한 인생 전체와 결부되어 있는 실천적인 앎입니다. 인생의 의미와 삶의 동기와 내용과 목적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시간적인 인간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의해 건강하게 정립될 수 있습니다. 땅에서의 유한하고 빨리 지나가는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있으며 그러한 사려를 통하여 우리는 겸손과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이 시간의 짧은 토막을 살아가는 인생의 주먹만한 전두엽 분석을 통해서는 결코 읽혀지지 않습니다. 태초에서 종말까지 스치고 지나간 인생들의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해 최대치의 집단적인 지성으로 살핀다고 할지라도 영원의 한 귀퉁이도 밝혀내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과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 개입하되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언어의 소통으로 우리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육체에 머물러 계시고자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경계선을 한발짝도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를 영원의 영역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죄인의 바닥까지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낮추어진 상태로 계속해서 머물러 계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아지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올리실 목적으로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내려오신 것만이 아니라 승천까지 하셨으며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부활까지 하신 것입니다.

살아갈 시간의 날수가 하루하루 줄어들 때마다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살면 살수록 설레임이 커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갈 날들에 대한 기대로 땅에서의 유한한 삶의 단축에 대한 비애를 극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고 영원토록 거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땅에서도 영원의 삶을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영원의 삶을 맛본 사람들은 인생의 가치가 시간적인 길이에 있지 않고 영원한 삶 즉 영생의 소유에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을 알면서도 옛사람의 시간적인 가치관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이 인생관을 강타한 사람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아는 분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수단은 삶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데도 그 지식에 부응하는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전할 수 없습니다. 증인은 입술에서 정보의 파장을 퍼뜨리는 자가 아니라 삶의 파장으로 살아가는 곳곳마다 진동을 일으키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삶은 그런 하나님을 전파하는 증거의 장입니다. "와 보라"고 전도하기 위해서는 삶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땅에서의 시간적인 삶으로 하늘의 영원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증인이길 원합니다. 

2014년 1월 27일 월요일

소요리 문답 4-1 영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요4:24)

예배에 관하여 이것보다 명료하고 강력한 선언은 없을 것입니다. 예배는 기독교의 꽃이며 성경의 주제이며 삶의 정수이며 인생의 절정이며 영혼의 잔치이며 최고의 사건이며 복중의 복입니다. 이러한 예배는 무엇보다 누구에게 예배를 드릴 것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예배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은 예배의 대상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온 세상에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된 온갖 종류의 예배를 일별해 보십시오.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에 근거하여 우상숭배 가능성 측면에서 본다면 숭배의 대상이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물 속에 있는 것들일 수 있겠고 거기에 그것들을 숭배하는 주체의 다양성을 더한다면 예배의 종류는 천문학적 수치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첫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며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 한 분으로만 제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속성은 하나님이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는 요구되는 예배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곤하면 비록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한다 할지라도 "알려지지 않은 신"(Ἀγνώστῳ θεῷ)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경배의 진정한 개념도 애매해질 것이고 예배의 합당한 방법에도 무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경배하는 아테네 지성들의 빈곤한 신개념과 재단을 쌓고 사당을 세우는 그들의 인위적인 방식에 엄중한 일침을 가합니다. 그리고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손으로 지어진 전에 계시지 않으시며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점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너무도 위대하신 분이셔서 땅에 거하실 수 있으시며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 할지라도 그분을 능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테네 이방인의 무지와는 달리 유대인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 예배의 유일한 처소가 예루살렘 지역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백 투 더 예루살렘" 운동도 어떤 특정한 지역에 과도한 종교성을 부여한 지역주의 맹신의 희생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유대인의 '지역주의' 오해를 듣고 예루살렘 지역을 예배의 처소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는 "여기서도 말고 저기서도 말고" 즉 물리적인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 같은 특정한 장소에 특별하고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계시며 누구와도 만나시며 언제든지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순서가 구비되지 않으면 예배가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인위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분입니다.

이러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지구상의 어떤 지점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진리 안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와 올바른 예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혼 차원에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영혼은 어떤 식으로도 꾸며지지 않는 곳입니다. 예배의 무늬만 갖추는 가식이나 연출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우리의 타락과 비참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자로 발견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혼의 추한 실상을 생각하면 우리에겐 도무지 예배자의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망의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삼으시고 영원토록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가 계십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내주 때문에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가슴에서 터지는 감격과 눈물을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크고 무한한 은혜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만 강조하는 분들은 대체로 어떤 신비로운 황홀경을 예배의 지고한 경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정지된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엘리야가 보여준 주님과의 신비로운 조우와 연합의 사례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시라 할지라도 영혼의 신령한 상태만이 예배의 전부가 아님을 예수님은 "진리 안에서"란 문구를 추가하며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영혼과만 결부되지 않고 삶을 의미하는 우리의 몸과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육체로 오신 예수시며 성경 전체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란 방식은 결코 예사롭지 않으며 성경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배가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와 관계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그 전체가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삶의 규범이기 때문에 우리의 전인격과 전생애가 예배와 결부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다"는 바울의 권고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비해서 볼 때 자칫 바울이 예수님의 예배관에 무례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몸과 영을 서로 대립적인 쌍극으로 이해한 이원론적 사유에의 무의식적 적응이 빚은 선입견일 뿐입니다.

영혼과 몸을 과도하게 분할하지 마십시오. 영과 몸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상응하여 한 인격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예배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배제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몸이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와 무관한 다른 예배가 아니라 "영적 예배"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몸의 배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몸은 삶을 의미하고 바른 삶은 진리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이 12장에서 밝힌 몸의 산제사를 가능하게 하는 성경 전체의 영적인 구속사적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말씀은 영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몸과 영에 모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은 삶입니다. 몸이 없으면 삶도 없습니다. 몸이 거하는 모든 곳에서는 어디서든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배에 대해 원천봉쇄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 세상에 흩어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만 경배를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거하시지 않고 진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거룩한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믿고 알고 몸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처럼 최고로 복된 삶입니다. 삶이 예배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살았어도 죽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 전체가 거룩하고 영적인 예배라는 바울의 권고를 빌미로 삼아 모이기를 힘쓰고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하는 기독교의 장구한 전통을 무시하고 소멸하는 것은 주님의 다른 말씀을 핑계로 자신의 기호를 슬그머니 표출하는 야비한 극단인 것 같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나 다른 날들에 드려지는 구별된 예배를 통해 우리는 영과 진리 안에서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의 본질과 범례을 배우고 익히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삶의 모든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영적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도 점검할 수 있습니다.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무데나 적용하는 고질적인 병폐는 기독교에 발을 디디지도 못하도록 조속히 근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순처럼 보인다고 버리면 기독교의 진리는 남아나는 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않으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어떠한 삶이 바른 것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예배하고 진리를 깨닫고 딱 그만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신 분이심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예배를 드리고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소요리 문답 3-3 믿음의 대상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요한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려는 계획이 있으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신약의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도 예표되어 있던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말씀이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생명의 속전으로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난감한 점은 독생자가 주어지는 방식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고 이것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나무에 매달았던 행위와 나란히 대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은 구약에서 사단의 고약한 이미지를 풍기는 짐승이며 온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오는 범우주적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원흉으로 대단히 교활하고 사악한 존재인데 어떻게 지극히 순전하고 흠도 없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연결되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는 표현처럼 어떻게 뱀과 예수님이 나란히 대비될 수 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 내몬 불뱀의 놋형상이 장대에 매달린 사건과 불뱀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신 사랑의 예수님이 게다가 어떤 대체물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이 마치 동일한 사건인 양 나란히 언급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명료성을 믿는데 이렇게 난해하고 모순적인 듯한 구절을 만나면 자칫 혼돈이나 불신의 비탈로 나뒹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땅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의 깊은 차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심으시기 위해 주님은 외관상 모순이나 역설로 보이는 방식을 때때로 동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땅에서는 역설이요 모순인데 하늘의 논리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믿는 자에게는 진리의 무한한 깊이에 파묻히는 경우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을 뒤바꾸는 말인데 상식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진리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뱀과 예수님의 대비도 우리에게 갑절의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주의한 사람들은 뱀과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응시켜 예수님도 뱀처럼 간사하고 사악하기 때문에 저주의 대상만이 매달리는 십자가에 못박힐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터무니가 없으며 결코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곡해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며 무흠하신 분입니다. 자신과 관련해서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뱀의 경우는 다릅니다.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 몰고간 악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이유로도 저주의 십자가에 일순위로 못박혀야 할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뱀의 매달림은 외형은 같지만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삯을 지불해야 우리가 매달려야 할 저주의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원수의 간사한 머리와 음흉한 궤계를 깨뜨리는 것이기에 의미에 있어서는 마치 사탄이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서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인 불뱀을 저주의 망대에 매달아 제거한 셈입니다. 즉 십자가에 오르신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그 위에서 일어난 일은 1) 땅의 이성이 납득할 수 없는 아버지의 무궁한 사랑이 확증되고, 2) 여전히 죄인이요 원수였던 우리의 죄는 사해지고, 3) 하나님의 영광을 넘보고 그의 백성을 함부로 건드린 마귀의 권세는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사랑은 독생자를 주심으로 확증되고 우리로 믿고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므로 성취가 되었으며 동시에 결과적인 면에서는 원수도 십자가에 못박혀 멸망한 셈입니다. 이런 식으로 십자가 위에서 사랑과 정의가 입맞춘 것입니다. 신약과 구약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예언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 지가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성경은 어디를 펼쳐서 읽더라도 우리는 허기진 믿음의 배를 채우는 양식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믿음으로 먹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는 것입니다.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요리 문답 3-2 선행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1) 공의를 행하고 2) 인자를 사랑하고 3)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미가는 이러한 인간의 도리가 인간의 합의나 추정으로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행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우리에게 친히 보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보이신 이 내용은 미가 선지자가 던진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물음의 답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주께서 보이신 선은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는 것과 결부시켜 이해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먼저 공의를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높으신 여호와께 나아가 경배하는 선을 뜻합니다. 여기서 공의(מִשְׁפָּ֥ט, κρίμα)는 사람 편에서의 공정한 행위나 판결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공의로운 행위와 판결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의 기준과 개념과 실행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것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공의는 사람들의 공의에 대한 목마름을 임시방편 차원에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고 요구하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는 하나님의 일인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다윗의 줄기에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와 이 땅에서 공의를 행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역시나 그리스도 예수와 연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성육신은 공의로운 심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심판을 받지 않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믿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대등절 문장에서 현재형과 완료형이 동시에 사용된 어법을 쓰십니다. 이는 말씀의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믿음과 불신이란 자발적인 반응의 형태로 내려지는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호세아가 기술한 것처럼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의를 비같이 쏟으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도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신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라 불려지는 한 아이가 이 땅에서 정의와 공의(מִשְׁפָּ֖ט וּבִצְדָקָ֑ה)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말씀의 성육신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되고 산출된 공평한 판결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세상의 재판관이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행해야 할 책임이고 몫입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공의는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 되어 온 땅에 말씀의 성육신 즉 완전한 신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밝혔듯이 인간의 증거를 구하지 않으시고 성부 성자 성령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하셨기에 우리가 증인으로 이 땅에서 공의를 수행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도 아니고 직접적인 것도 아니고 전적인 은혜로 그 영광의 직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두번째 본분은 인자(חֶסֶד, 헤세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헤세드"는 변함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 무조건적 사랑, 희생적인 사랑, 값없이 주어지는 무한한 사랑, 받을 자격이 안되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역시나 헤세드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헤세드를 사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을 뜻하면서 동시에 그분이 행하신 헤세드 자체를 사랑하고 추구하고 구현하고 따른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창조주요 구속자요 통치자요 희생양이 되셨으며 영원토록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의 길을 사모하며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스런 증인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삶으로 보이면서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은 우리로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번째는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상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가지이고 예수님은 나무라는 사실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행위 이전의 상태와 관계된 말입니다. 동행이란 단순히 존재상의 공존이나 하나님과 우리가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물리적인 걷기나 행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동행은 의지와 방향과 기호와 가치와 관심과 감정과 동기와 목적과 내용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보이신 것인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문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도 원하고 하나님이 향하시는 방향을 나도 향하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나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가지신 관심을 나도 가지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을 나도 동일하게 느끼며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을 나의 이유와 목적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본성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온갖 신령한 은혜와 복을 주신 이유는 바로 신적인 본성의 참예자가 되는 것에 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주님과의 이러한 연합이란 베드로의 이해와 다르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한" 동행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즉 하나님과 전방위적 연합은 우리가 하나님께 맞추는 것인데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해야 하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하나님도 존중해야 한다는 식의 무례하고 불경한 역발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선이라고 한 미가의 기록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고 명하시는 도리와 책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로운 인생에 족쇄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고 경배하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소요리 문답 3-1 믿음과 선행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그를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여기서 다루는 세번째 문항은 성경의 주된 가르침이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일들로 대별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소요리 문답들은 이런 구분을 따라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문항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4-38 문항은 우리의 믿음에 관한 것이고 39-107 문항은 우리의 도리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은 소요리 문답의 이중적인 구성을 산출한 근거로 언급된 구절인데 내용은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다른 많은 기적들이 다른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35가지도 넘지만 요한은 그 중에서 7가지 정도만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메시야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그 결과로서 생명을 얻게 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에 대해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는 메시야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은 베드로가 감동을 받아 했던 고백인데 요한도 동일하게 복음서의 주제로 삼았는데 이 주제는 복음서의 첫 부분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시는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한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 우리의 신앙과 영생을 위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이 암시하는 것은 성경의 목적이 바요나 시몬의 고백처럼 "주는 메시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하나의 단일한 주제를 강요하는 것은 해석학적 횡포를 가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의 단일성은 요한과 같은 한 사도의 사사로운 견해나 입장이 아니라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고자 함이고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5:39)며 성경의 제1 저자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밝히신 입장을 기억하고 복음서 전반에 고스란히 반영시킨 것입니다.

성경이 다루는 주제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의 주제를 보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관점의 수효는 해석하는 사람의 머릿수에 버금갈 정도로 많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단일한 주제로 수렴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고 오히려 분산되고 상대화될 소지는 훨씬 많습니다. 율법의 수효도 얼추 613개 조항이나 되는데 개별 항목의 표면만 보면 서로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각자 저마다의 관점과 주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는 책이라고 스스로 밝힙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수렴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성경의 주석이란 사실을 교회사 전체의 정통적인 입장으로 승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믿어야 할 것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을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고 있기에 아무도 이것을 거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친히 그렇게 해석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고안된 그럴듯한 생각을 섞어서 성경의 본질과 주제에 혼돈을 가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어떤 글이나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성경 자체가 부여하고 있는 의미의 분량을 임의로 확대하고 축소해서 예수님에 대한 포커스를 흐려지게 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이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성경의 주제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이신 제2 위격에 대해서만 다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세 위격으로 존재하며 실체는 하나이신 분입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류 전체를 말합니다. "예수"라는 주제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성자께서 육체로 오신 것도 믿어야 하겠기에 인간에 대한 지식도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담의 창조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의 죄와 타락을 비롯한 온 인류의 죄와 타락도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그 무게를 가늠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와 인생의 회복도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로 저울질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과 죄와 타락과 사건과 설명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연결되지 않지 않는 조각들로 나누어져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해석되지 않도록 진술되어 있씁니다. 성경은 요한이 복음서 끝자락에 분명히 밝힌 것처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즉 완전한 신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국"장

아들: 아빠, 오늘 생일인데 뭐 어디에 가고 싶으세요?
아빠: 아빠는 늘 천국이지.
아들: 아, 아빠 천국의 음식을 드시고 싶으세요?
아빠: 아니 늘 가고싶은 곳이라는 말이야.
아들: 아빠, 천국이 들어가는 음식도 있잖아요.
아빠: 청국장?
아들: 아 네 맞아요.
아빠: 푸하하하, 아들아...그건 "천국"장이 아니라 "청국"장이란다. 천국이 아니라고.

2014년 1월 24일 금요일

40대 중턱의 스케이트

40대 중턱에서 재가동된 스케이트, 아찔하고 짭짤했다. 펀드 레이징을 위해 막내의 학교에서 스케이트 파티를 열었다. 협조 차원에서 둘째도 데리고 가 막내와 함께 빙판에서 뒹굴었다. 장은 아이들과 학부모로 빼곡했다. 일년에 한번씩 연출되는 스케이트 동작은 역시나 뻣뻣했다. 발목에는 힘이 들어갔고 엉거주춤 자세는 2시간이 지나도록 풀어지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온몸이 쑤신다. 나이 생각을 했었어야 했는데...그러나 아이들과 시킨쉽을 하면 함께 보낸 시간의 소중함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 "함께" 있는 게 사랑이다.

2014년 1월 23일 목요일

소요리 문답 2-3 성경이 기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3:16-17)

여기서 바울은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절대적인 유용성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권위의 근원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른 어떠한 책이나 행위나 현상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분명한 객관성을 제공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양한 인간 기록자의 사사로운 견해들을 임의로 묶은 편집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들을 도구로 삼으셔서 당신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기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며 인간적인 것이 전혀 혼합되지 않았기에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리는 경의와 동일한 수준의 경의를 성경에도 표해야 한다(eandem scripturae reverentiam deberi quam Deo deferimus)고 말합니다.

성경의 유용성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즉 성경만이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보다 선명한 실감을 위해 뒤집어서 생각하면 성경은 신앙과 삶의 완벽한 규범이기 때문에 성경을 활용하지 않으면 신앙과 삶 전체에서 부패와 무질서가 필히 초래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없이는 누구도 온전하게 되지 못하며 어떠한 선행도 행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강하거나 반듯하고 괜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본성의 부패 때문에 외부에서 규범이 제시되지 않으면 한발짝의 걸음도 똑바로 내디딜 수 없습니다. 소수의 천재성과 다수의 보편성이 보증하는 걸음도 필경은 사망을 향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과 교정과 의에 이르는 교육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교훈이 성경의 첫번째 용도로 가장 먼저 거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훈에서 실패하면 나머지 세 가지의 기능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합당해 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과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명료한 최고급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성경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다른 피조물도 모르는 무지의 슬픈 향연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 속에서는 어떠한 책망과 교정과 훈련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무리 온전한 교훈이라 할지라도 지식의 단순한 전달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책망과 교정과 훈련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입술은 황금빛 언어를 내뱉는데 삶에서는 고약한 배설물을 슬그머니 분비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이는 교훈에만 심취한 결과인 듯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성경이 가르치는 투명한 교훈의 빛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점검하지 않는다면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나아가 한번 비췸을 받고도 교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괴이한 면역력이 생겨 다시 비추임을 받았을 때에도 지각이 없는 짐승처럼 반응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성경은 바른 교훈과 따끔한 책망과 성실한 교정 이후에 의로운 삶에 이르게 만듭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의 원수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구석구석 살펴보면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허물려는 원수의 집요한 노력이 얼마나 다양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꼼꼼하고 꾸준하게 지속되어 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절대적인 유용성을 가리려고 얼마나 많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수단들을 동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분적인 진리까지 교모하게 인용하고 광명의 천사로 변장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기에 사단의 집요한 성경파괴 전략은 볌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사람의 눈으로는 도무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은밀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성경의 권위와 유용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때때로 신학교가 사단의 그런 음흉한 전략에 앞장서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수순을 보면 대체로 신학교가 먼저 타락하고 목회자가 그 다음으로 타락하고 성도들이 맨 나중에 타락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고 허물려는 원수의 타깃이 신학자란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원수의 전략적인 표적이 말씀에 전무하는 자들이란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 신학자와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신앙이나 삶이나 가치의 어떤 우열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성경의 우선적인 기능이 올바른 교훈을 전달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우리의 인격과 삶에 적용하여 교정하고 의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 없이는 어떠한 교훈도 책망도 교정도 의에의 도달도 그림의 떡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성경은 비록 인간의 언어와 붓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저자시며 하나님의 말씀이며 무에서 존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사실을 뒤로 하고 인간 저자성에 과도히 집착하고 기록자의 생각을 분석하고 정보의 문자적인 능력에만 호소하면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삶의 안내자는 성경이며 그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깨달음과 훈육과 회복됨와 온전함에 이른다는 사실에 어떠한 의심이나 흔들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리 큰 유익을 주더라도 권위와 유용성의 우선순위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타협이나 혼동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소요리 문답 2-2 성경의 견고성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더라도 권함을 받지 않으리라 (눅16:31)

이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의 결론부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음부로 간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이 그 고통의 처소로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 달라는 놀라운 의리를 보입니다. 만약 죽은 자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할 것이라고 부자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입장은 다릅니다. 즉 이미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의 기록된 말씀이 있고 만약 그 글을 믿지 않는다면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그들에게 가더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들어갈 것이지만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쉽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복음과 율법은 복음이 오면 율법이 소멸되는 배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기록된 말씀과 부활의 사건은 회개와 돌이킴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부활을 목격하는 것과 율법을 묵상하는 것의 기능적인 차이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듣지 않으면 부활을 목격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기적을 보여주면 돌이키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아는 분들 중에서도 어떤 기적을 보여주면 보다 확실히 회개하고 믿음도 강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성정은 그런 기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일시적인 효과 면에서는 기적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는 역기능도 만만치 않습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꿈과 환상과 다른 예언과 기적에 허덕이지 마십시오. 어떤 요란한 방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적의 사람 엘리야는 바위를 깨뜨리는 강한 바람이나 땅바닥을 뒤흔드는 지진이나 모든 것들을 소멸하는 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혹은 부드러운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분입니다. 다윗도 눈부시고 획기적인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향유하며 주야로 묵상한 분입니다. 이방인 문둥병자 경우에도 치유가 아니라 예수님과 나눈 대화에서 근원적인 확신을 얻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확신은 엄청난 기적이 아니라 들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죽음과 생명, 무와 존재가 교차하는 기적이 믿음의 회개와 확신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물리적인 몸은 세월이 흐르면서 약해지고 죽습니다. 잠시 건강하게 되는 것에 신앙과 가치관을 내맡기지 마십시오.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그렇다고 결국 죽으니까 그냥 죽자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생명의 일시적인 연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와 소통하는 분입니다. 그런 방식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다른 어떠한 방식보다 좋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이르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최고의 방식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을 방문하고 돌아온 자가 우리에게 오는 방식보다 더 탁월함을 예수님의 나사로 이야기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된 계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영화롭게 하고 향유할 최고의 방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기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질병이 치료되고 불가능한 일들이 성취되는 기적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주신다면 큰 은혜로 알고 감사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기적 추구자로 부르시지 않았고 기적이 어떤 가치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의도하신 가장 보편적인 생의 원리와 방식을 따르는 게 좋습니다. 심은대로 거두고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살아갈 때가 죽을 때가 있다는 것 등이 대표적인 원리일 것입니다.

만약 기적을 과도하게 선망하고 기적을 보여준 사람에게 과도한 경외심을 갖는다면 교회에는 권위의 혼란과 무질서가 초래될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가시적인 비본질이 교회의 관심과 에너지와 시간을 잠식하게 될 것입니다. 신비를 동경하는 인간의 충동적인 종교성을 노리는 간사한 이리들의 궤계와 광란은 제어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앙의 기반은 약해지고 유치한 기적 키재기로 인해 비교와 시기와 질투의 관계성은 독버섯과 같이 교회에 급속도로 번질 것입니다. 신앙은 말씀에 의해 제어를 받을 때 가장 건강한 것입니다.

사실은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는 기적은 추구해야 목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고 살고 기동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임을 알리는 신호의 성격이 더 강해 보입니다.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초자연 영역에 제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과 초자연 모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개입이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확연하게 알아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초자연적 일들보다 우리에게 익숙하여 자연처럼 보이는 일상의 기적이 더 신비로운 일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우리에게 본고로 믿고 확신하는 것보다 보지 않고서도 믿고 확신하는 것이 더 복되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기적은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복에 있어서도 보다 낮은 비교급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비교급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2014년 1월 22일 수요일

기독교는 삶입니다

기독교의 기본기 중에서도 일순위 기본기는 "기독교가 몽롱한 명상이나 개념적인 학습이나 맹목적인 행위가 아니라 모든 것들이 골고루 어우러진 종합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에 뜨거운 열정과 실질적인 행위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이 결코 아닙니다. 깊은 묵상이 없다거나 신비롭고 방대하고 체계적인 지식이 없다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가 비록 그러한 필수적인 요소들을 포괄하고 있지만 각자의 주관적인 기호에 따라 하나는 과장하고 다른 하나는 폄하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지식의 축적은 공허한 개념의 향연일 수밖에 없고 지식이 없는 실천은 무분별한 광기의 발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반지성적 실천의 맹목성도 거부하고 비실천적 지식의 경박함도 배척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기본기의 충실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삶의 현장에서 입맞추는 것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전인격이 조화롭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아는 지식과 느끼는 감정과 행하는 의지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요소들 중에 하나와만 배타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삶이라는 말을 가장 잘 요약한 표현은 바로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이러한 기독교적 삶의 기본기와 무관하게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을 즐기는 것에 인생을 건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향한다는 고질적인 습성을 스스로 탈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쇠창살의 견고함을 능가하는 "자아"라는 결박을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끊어버린 자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믿음으로 아는 자입니다. 최고의 존재를 높이고 최고의 선을 향유하는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고급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깨달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는 사랑의 본래적인 방향성을 꺾어 자신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거꾸로 가는 삶입니다. 죽음을 향하여 질주하는 삶입니다. 삶의 그러한 역주행은 어쩌면 삶을 중단하는 죽음보다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전포괄적 삶입니다. 기준이 대단히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보이는 도덕과 처세술의 평균치 턱걸이로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는 나의 가치관과 기호가 아니라 타인의 양심을 먼저 존중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의 입술을 열어서 하나님의 속성을 증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을 향유하는 삶을 이 땅에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최고의 복이면서 세상에 대하여는 가장 화려한 빛이요 요긴한 소금이 되는 길입니다.

2014년 1월 21일 화요일

소요리 문답 2-1 성경의 가감

우리나 혹은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갈1:8)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방법은 오직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다른 원리를 따라서 아무리 치성을 올리고 접신에 도취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만에 빠지는 사망과 저주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이 비록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지만 그들이 자의로 휘갈긴 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말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이 사도들의 붓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만약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사도라도 저주를 받습니다. 하늘의 천사가 전하는 메시지라 할지라도 성경의 경계선을 함부로 출입하면 저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다양한 양태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에 물리적인 가감을 가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말시온과 같은 인물은 바울서신 및 누가복음 일부로만 성경을 구성하고 나머지는 제거하는 불경을 저지른 바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성경을 삭감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로마 카톨릭은 정경이 아닌 소위 외경들을 성경에 포함시킨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물리적인 첨삭은 아니지만 거기에 준하는 불경이 설교하는 강대상 위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설교할 때 특정한 본문의 의도적인 배제가 그렇고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을 과도하게 주장할 때에도 동일한 불경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경우는 해석학적 첨삭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저자이신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가감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성경 해석자가 성경의 제1 저자이신 하나님 자신의 뜻까지 소급해 올라가지 않고 인간 기록자의 의도나 문맥에 머무는 해석학적 인간화가 있습니다. 이런 인간화가 인간적인 열심과 충동을 자극하는 것에는 유익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과 영원한 뜻에까지 이르기를 원하는 성경의 의도와 목적은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윤리나 처세술의 보고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불변적인 진리가 담긴 책입니다.

세번째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례는 순종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물리적인 첨삭과 해석학적 가감을 범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알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용은 올바르고 충실한데 그것이 구현되는 삶의 현장에서 말씀이 가감되어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물리적인 보존도 중요하고 말씀의 의미가 가감되지 않는 적정하고 통합적인 해석도 중요하고 말씀의 가시적인 표상이라 할 삶의 실천도 중요해 보입니다. 이는 하나를 택하면 다른 것들은 버려도 되는 택일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빼거나 더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최고의 선으로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믿어야 할 것들과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들의 규범이요 원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리면 사도나 천사들도 예외 없이 저주를 받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면서 성경을 취사선택 대상으로 대하거나 사사로이 해석하고 삶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교회를 기만하는 것이며 세상을 속이는 것입니다.

2014년 1월 20일 월요일

오직성경

Sola Scriptura in the Scriptures

Before we begin to look at perhaps the most remarkable doctrinal statement of fidelity to the written word of God, especially its place in history, I want to set before you some distinguishing marks out of the Scripture itself. Before we get to church history, what are those distinguishing marks out of the Bible itself?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2 Timothy 3:16 – Every jot, tittle, chapter, verse, every book is God-breathed. It has come out of the mouth of God. It was not the authors who were inspired, but the Scripture that was inspired. The authors were the instruments in the hands of God who would record what God wanted them to write, using their own temperaments and vocabulary and background and experience.

Matthew 4:4 – Every word of Scripture comes out of the mouth of God. It is as though divine revelation in the Bible has come down from God above.

Hebrews 4:12 – It is living and active. This book is alive! This book has the life of God within it because it is the very breath of God. It is inspired by God.

John 6:63 – The words I am speaking to you are spirit and are life.

The Inerrancy of Scripture

Because the Bible is God-breathed, it is the Word of God. And because God is holy, God cannot lie. God is truth and so every word of God is true.

Titus 1:2 – God cannot lie. Are there some things God cannot do? Yes. God cannot sin, cannot deny Himself, cannot lie.

Hebrews 6:18 – It is impossible for God to lie.

John 17:17 -  Your word is Truth

Proverbs 30:5 – Every word of God is tested

And so we uphold, with the Puritans, the very inerrancy of the Word of God. Let God be found true, and every man a liar.

The Infallibility of Scripture

All that is recorded in Scripture must come to pass. The word of the Lord cannot fail.

Isaiah 40:8 – The grass withers, the flowers fade, but the word endures forever.

Matthew 5:18 – Until heaven and earth pass away not the smallest letter or stroke shall pass from the law until all is accomplished.

John 10:35 – The Scripture cannot be broken

The Authority of Scripture

Because the word of God is inspired, infallible, inerrant, it comes with the authority of God Himself. When the Bible speaks, God speaks. And when God speaks, He speaks with sovereign authority in His Word.

Psalm 19:7 – The law of the lord is perfect. These are not the suggestions, options, or considerations of the Lord. This is the law of the Lord, and it its binding upon every man’s conscience.

Psalm 19:8 – The commandment of the Lord is pure. It is the very commandment of God to every man and every woman.

1 Thessalonians 4:15 – This we say to you by the Word of the Lord.

The Perspicuity of the Scripture

The Word of God is clear, understandable, a lucid revelation.

Matthew 22:31 – Have you not read? Do you have two eyeballs? Do you have two brain cells that are connected between your ears? Can you not process the clear revelation in the Word of God?

Matthew 19:4 – Have you not read?

God has so clearly spoken in His word that no man can render the excuse, “Well, I did not understand what God is saying.” God has not stuttered. He’s spoken with precision and accuracy, and it’s an understandable message. We need the illumination of the Spirit, yes. But any misunderstanding is the fault of man, not the Bible. He has spoken with abundant clarity.

Rome said, “The man and woman in the pew cannot understand the Bible. That’s why we won’t translate it into your language. That’s why the preaching is in Latin. That’s why we’ll tell you what to believe. You are incapable.” And that’s why the Reformers said, “No, the boy plowing the field will know more than the Pope!”

The Sufficiency of Scripture

The Word of God is able to accomplish all of God’s purposes here upon the earth as the Word of God is brought to bear upon the issues of the men in this world.

Isaiah 55:11 – God’s redemptive purposes will be carried out in this world by the Word of God which is sufficient to do all He desires to do. It is powerful to convict, to convert, to conform, to console, correct. The Word of God is powerful, more powerful than any other object than you and I will ever hold in our ends.

1 Peter 1:23 – Peter says, you’ve been born again of seed that is imperishable. There is so much light in this Book that when it’s planted in the soil of human hearts, when God causes that seed to germinate, it brings forth eternal life. This Book alone sanctifies and conforms believers into the very image of Christ.

The Immutability of Scripture

It will never change.

Psalm 119:89 – Forever O Lord your word is settled in heaven

Psalm 119:160 – Every one of your righteous ordinances is everlasting.

Right will always be right. Wrong will always be wrong. The way of salvation will forever be the way of salvation. God’s revelation is unchanging because God Himself is immutable and unchanging.

The Invincibility of Scripture

It is a superior weapon in the hand of the man or woman of God as it is wielded.

Jeremiah 23:29 – Like a fire and a hammer which shatters

Hebrews 4:12 – Sharper than a two-edged sword

What a powerfully penetrating instrument is the Word of the living God. It is an invincible weapon.

The Finality of Scripture

There is no new revelation to be given to man after the close of the canon of Scripture. We have the faith once and for all delivered to the saints (Jude 3).

Revelation 22:18 – If anyone adds, God will add to him the plagues which are written in this book.

Original sources: Strange Fire

소요리 문답 1-4 하나님 향유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요17:24)

예수님의 이 기도문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의 의미는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도 목격자의 진술이 가장 객관적일 것이며 목격자가 다수일 경우에는 진술의 객관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에 다들 동의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라는 공동체가 본 예수님의 영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님의 영광이 의미하는 바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과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로 둘러싸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 자체가 은혜이며 본인이 진리시기 때문에 은혜와 진리로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당신의 백성들이 지은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러 오셨으며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고 온전히 성취하신 분이기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광을 제자들도 보고 누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하나님 향유는 눈부신 번영이나 초고속 승진이나 막대한 재물이나 막강한 권력의 확보나 취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유월절 즈음에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영광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바울의 지적처럼,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을 수반하고 고난을 관통해야 비로소 보이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제자들이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암시된 것처럼 1) 성부의 허락 없이는 안된다는 것과 2)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 허락하신 자가 아니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시라"고 기도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선을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면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당신의 절대적 주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있지 않으면서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 제자도의 어법에 따르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때가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때가 바로 인자의 영광을 목격하고 취득하는 때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상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향유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향유자는 이런 십자가의 생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십자가는 믿는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진리가 입맞추는 곳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이며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보기를 원하였던 영광은 바로 고달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예수님과 동행할 때에 비로소 목격되고 취득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영광을 목격하는 일은 마치 하늘에 별따기와 같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데, 이는 독생장의 영광이 무엇이고 그것을 목격하고 취득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유하고 싶다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 영광을 보고 싶으시면 예수님과 함께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와 동행하는 방법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과 방법은 없습니다. 영광의 의미와 방법은 모두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것을 외면하고 있는 듯합니다. 개념적인 왜곡과 방법론적 회피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독생자의 영광을 목도하지 못할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그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에 캄캄한 어두움을 드리우는 결정적인 주범은 교회일 것입니다. 영광도 모르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도 모르는 무지가 어두움과 패망을 낳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영광의 의미와 방법을 뒤틀어 버린다면 가장 어두운 거짓과 패악이 자행되고 있는 셈일 것입니다. 교회가 두려워 하고 심히 떨어야 할 일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에 있어서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교회에는 재앙이요 세상에는 형벌일 것입니다.

교회는 독생자의 십자가 영광을 보고 보여주는 곳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허락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들도 보게 해 주시도록 아버지의 허락과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들도 보게 해 주시도록 아버지의 허락과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여 영광의 일그러진 개념을 반듯하게 펴 주옵소서. 그 영광을 우리도 보고 세상도 볼 수 있도록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간주하며 걷게 하옵소서. 모세가 간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옵소서...

소요리 문답 1-3 향유의 대상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73:25) 

여기에는 하나님을 영원히 향유하는 것의 의미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논지는 하늘과 땅에 주님 이외에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חָפֵץ) 어떠한 대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 돌려지는 때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그의 주석에 의하면, 우리의 애착이나 열정의 지극히 미소한 부분(minimam partem)이 피조계에 돌려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할 영광을 횡령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현상은 모든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불경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아가 그 구절은 시인이 하나님 외에는 자신의 "사모할" 자가 없다는 말에 근거할 때 하늘과 땅을 매혹하여 사모하게 만드는 모든 거짓들과 환영들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은 미혹으로 차고 넘칩니다. 미혹의 종류와 양태가 무수하고 날로 진화하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도 쏟을 관심과 애정을 적당하게 안배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는 매혹적인 대상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홍수에 시인 자신도 휩쓸려서 미끄러질 뻔 했다고 밝힙니다.

이러한 미혹의 원흉들로 시인은 2절에서 14절까지 '악인이 형통하는 것'과 '악하고 오만한 자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오히려 힘이 강건하여 지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재앙도 그들에겐 없다는 것'과 '생이 부요해서 눈이 튀어나올 정도이고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는 것'과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 것' 등인데 이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내용은 일평생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루종일 주님만 섬기는 자기는 '종일 내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다는 것' 등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반석이요 영원한 분깃이라."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이해가 축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에게 몸과 마음이 무너질 때 존재와 상태의 보존을 가능하게 하시는 반석이 되십니다. 시인 자신을 보존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원수들의 공격도 무력하게 할 정도로 안전하고 견고한 안식처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은 눈으로 관찰되지 않고 손으로 수리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와 본질을 정확하게 아시고 최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기에 외부의 것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그 필요의 전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주를 멀리하는 자...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을 기준으로 한 거리의 원근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망하고 가까이 하는 자는 복되다는 결과적인 대조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가까이 함이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며 최고의 복 자체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복된 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받고 멸망을 당합니다. 이는 밤의 경점과 같이 짧은 인생이 고려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습니다.

1천년의 기간도 고작 하루에 불과하신 분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무리 화려하고 존귀하게 살아도 안개처럼 곧장 사라지는 환영일 뿐입니다. 측정이 불가능한 영원 속에서의 상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시간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상태를 영원히 누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화려함과 쾌락에 취하여 영원에 비추어진 자신의 실상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가장 비참한 멸망의 내용은 아닐까요? 문제의 관건은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물리적인 거리 좁히기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멀리' 혹은 '가까이'와 같은 거리 개념의 의미론적 전환이 필요할 듯합니다. 본문에는 "가까이 함"의 의미가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라는 표현으로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믿음의 조상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상당부분 겹칩니다. 피난처는 나 자신의 일부만 보호하고 가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부가 완전히 파묻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도 물리적인 주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의하면, 거룩과 순종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단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거룩과 순종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서도 거룩해질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행위이고 거룩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행위와 상태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기에 시인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피난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거하는 방식은 물리적인 거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뜻합니다. 이는 또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가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이고 싶어 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시지만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하지도 않습니다. 시인의 글에서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복"의 구체적인 개념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심지어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것까지도 주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저는 시인이 말하고자 한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복의 구체적인 의미를 여기에서 찾습니다.

이보다 강렬한 그리스도 연합을 추구했던 다른 인물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생명과 죽음까지 상대화할 줄 알았던 사람이 바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방향과 안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4년 1월 19일 일요일

교회사 연구

판넨베르그: 역사학의 하부분과 중에서 교회사와 같이 각각의 특정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역사 전체를 사려해야 하는 압박이 가해지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 블로흐: 과거의 보다 완전한 재구성에 대해, 연구가 깊을수록 증거의 빛이 보다 다양한 종류의 보다 많은 자료에서 축출되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가가 다루는 주제의 광범위한 범주는 필히 방법론의 절충과 연관되어 있다.

교회사는 교회의 과거를 다루는 모든 학문분과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과목이다. 교회사는 교회의 행습만이 아니라 교회의 사상도 포괄하며 교리만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 혹은 보다 넓은 세상과의 상호작용 부분까지 취급한다.

교의사는 교회에서 규범적인 정의를 취득한 특정 교리들의 역사를 다룬다. 대체로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 등으로 요약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삼위일체 교리의 완성을 향해 질주했고 칼케톤 공의회는 기독론의 정통적인 개념을 교회에 제공했다. 구원이 은혜와 무관하게 인간의 의지적 작용으로 생성될 수 있다고 하는 펠라기안 억견을 격파하기 위해 은혜론 혹은 구원론이 참여하게 되었다.

하르낙과 제베르그: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에 초점을 둔 기독교적 진리의 정수들의 역사를 교의사의 과제로 구축했다. 교의사는 이러한 기초적인 교리들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교리사는 교리적 체계 전체를 취급한다.

사도적 교부들: 이들의 신학적 논의는 단순히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의 범주를 넘어선다. 교리사의 주제는 보다 광범위한 교리적 요소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18세기 중반 이전에는 교회사 연구가 비판적인 성격을 띄지 않았다. 고백적인 관점에서, 초탈한 어떤 것이었다. 특별히 로마 카톨릭 안에서는 교회의 전통이 교리와 신학의 규범적인 기능을 차지했다. 권위는 고대성과 결부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신학적 전제는 학문적인 탐구에 지대하고 장구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과거에서 의미를 찾는 작업은 의문에 붙여지지 않았다. 모든 관점이 전통의 지배적인 섭리와 확일성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유수기]는 교회가 스콜라 사상에 포로가 되어 있었다는 직격탄을 날렸다. 히페리우스와 더불어 시작된 개신교 교의학자들은 스콜라주의 시대에 사유의 퇴락이 있었다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그러나 중세와 정통주의 시대의 스콜라 사상은 서로 달랐다.

극단적 종교개혁자들은 150년에 교회의 타락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시대 이후의 3세기동안 교회 전체는 병들었고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약속도 가볍게 무시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16-17세기 교회 사가들은 교회의 과거를 정통과 이단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18세기 중엽의 역사해석: 1) 원문의 분석에 대한 학문적 관심사가 증대됨, 2) 특정한 목적에 공헌하는 방식으로 사료들을 해석하지 않는 자유도 증대됨.

가블러와 뮌셔(Gabler and Munscher): 성경적 역사이든 교회적 역사이든 과거의 문헌들은 그 자체의 관점으로 이해된, 현대적 관점이나 범주나 견해로 마사지가 가해지지 않은 이해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오늘날의 교회를 섬기기에 유용하다.

낭만주의 운동: 과거는 그 자체의 고유한 용어에 의해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고 역사적 환경이 개인을 형성하고 있다는 관점에 대한 보다 중점적인 인지가 그 특징이다.

August Neander,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Boston, 1872)가 유명하다.

네안더는 역사학의 낭만주의 운동에 일조했다. 특별히 제1권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1) 지극히 작은 겨자씨를 필두로 여러 세기의 과거를 관통하여 지구를 가릴 정도로 성장하는 엄청난 나무에 이르되 그 가지에서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거처를 얻는다는 개념적 틀을 가지고 연구해야 한다. 학문적인 탐구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삶 사이에는 내면적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의 필연적인 순환적 고리를 갖는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용하는 원리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ㅎ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에게 올바른 검증을 제공하는 것, 즉 원리가 올바르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을 제공하는 것도 역사이다. 원문에 대한 연구와 정교한 문헌적 검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건과 교리를 구별했다. 신학적인 동의 없이도 어떤 대상을 평가할 수 있었다. 역사가의 자세 1) 역사가는 원문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2) 역사가는 스타일의 개체성을 가지고 개별적인 사실을 진술해야 한다. 역사나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이 아니라 구체적인 진술을 해야 한다. 3) 부분적인 선호는 중요할 수 있겠으나 부분적인 편견은 금물이다. 부분적인 선호의 불가피성은 관점이 없으면 역사가 무색하고 생명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필립샤프: 미국 교회사의 아버지다. 미국 교회에 대해 다작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교회사 발전에 현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표준을 제공했다. "A Vindication of the Idea of Historical Development" 논문을 필독하라. Herder, Neander, Tholuck을 의존하고 있다. 헤겔의 역사관 때문에 나타나는 샤프의 약점들: 1) 기독교는 참된 가치의 어떠한 것도 상실하지 않았고 상실할 수도 없다는 생각, 2)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을 참되게 이해할 수 있고 플어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 3) 역사가는 기독교 역사의 주도적인 정신과 섭리의 손을 식별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

일차자료, 자료수집 열정, 문헌비교 통한 비판력, 해석에 있어서의 초탈 면에서는 과거 100여년의 역사학 발전을 지금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Henry Boynton Smith, "The Nature and Worth of the Science of Church History" 읽어볼 것. 1)
역사가의 첫번째 도리는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사실 자체를 진술하는 것, 2) 과거를 규명하는 것, 과거라는 것은 역사적인 페이지 위에서의 삶이다, 3) 자체의 원리나 법칙에 의겨하여 사태를 발견하고 설정하는 것, 4) 역사가는 일반적인 법칙과 원리들이 산출하는 목적들을 식별하는 것이다.

학문적 객관성의 포박은 19세기 후반의 역사학 특징이다.

1900-1930년대 미국의 역사학: 사실적인 사료에서 연역된 일반적인 법칙이나 섭리에 대한 논의를 중단했다.

1933-1950년대 미국의 역사학: 모두 교회사 안에서 의미를 언급하는 것의 중요성을 변론했다. 우리가 학문적인 역사로 이해하는 사실들에 대한 벌거벗은 기록 더미들을 발굴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Cyril Richardson).

1950-1990년대 미국의 역사학: 1) 역사 속에서의 여성에 대한 연구가 출범, 소수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 

2014년 1월 18일 토요일

소요리 문답 1-2 영광의 의미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롬11:36)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와 12장부터 16장까지로 말입니다. 앞부분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credenda)에 대한 것이고 뒷부분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들"(agenda)에 대한 것입니다. 신학도 이런 구분에 근거하여 "믿음에 대하여"(de fide)와 "행위에 대하여"(de operibus)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위에 인용된 구절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의 결론이요 요약인 동시에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들의 전제와 같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 영원토록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핵심적인 의미와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만물의 관계성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의 보존자며 만물의 목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영광의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와야 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예로 들자면, 신학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전적으로 뿌리를 두어야 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전개해야 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학자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는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진 것이고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고 하나님께 이르는 것"(Theologia a Deo docetur, Deum docet, ad Deum ducit)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정의는 이후로도 경건한 학자들에 의해 고수되어 온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신학의 정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께 뿌리를 두어야 하고 하나님을 통하여야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의지의 원인과 이유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나와 세상에 있다거나, 계획의 실행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적인 방식이나 세상적인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거나, 계획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유익이나 세상적인 만족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삶이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어떤 위인이 되고 무엇을 하더라도 시작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릴 영광은 단 한 조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힘과 재능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자신의 몫으로 챙길 영광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에 내 것이라고 주장한 어떠한 것도 없고 무익한 종으로서 하여야 할 일을 했다는 고백만 날길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과 과정과 나중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과 결부되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다른 것의 공로에 해당되는 영광을 그것에 돌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만이 처음과 과정과 나중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됨됨이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너무도 지고하고 신비로와 인간의 지력이 능히 미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은혜여서 어떠한 공로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먼저 알았으며 누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갚으심을 받을 수 있느냐고 바울은 묻습니다. 이는 존재도 주님의 선물이고 보존도 주님의 은혜이고 목적도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어떤 공로나 보상이 돌려질 수 있느냐는 물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러한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세세토록 그분께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에게 삶의 전적인 이유와 도움과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결핍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과 영광을 취하셔야 비로소 속성이 온전하게 된다거나 피조물의 어떤 보완이나 승인을 받아야 하나님의 신성이 온전하게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만물과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자를 대하는 마땅한 반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치가 될만한 것인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려서 그것이 가진 가치의 분량에 상응하는 보상을 그에게서 돌려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유가치한 어떤 소유물이 없습니다. 있다면 주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며 다시 주님께 돌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지 그것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기만 한 피조물의 창조자에 대한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감 보완과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한규삼 목사님의 바울 4차 전도여행

1. 2006년부터 지금까지 준비한 주제이다. 바울은 어디까지 전도하고 싶었는가.

2. 고르틴 (바울이 전도여행 한 장소를 다 방문하고 싶었다. 그 중에 Crete의 고르틴이 있다)

3. 바울이 로마에서 풀려난 시점, 60년...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5년동안 사역했다. 마지막 5년이라 하겠고 4차 전도여행이라 부르게 된다.

4. 그레데에 간 디도에게 쓴 서신이 디도서다. 5절에 보면 디도를 그레데에 머물게 한 이유가 나온다. (그레데에 많은 가정교회 있었다.) 모든 타운에 장로들을 세우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바울과 디도가 그레데를 선교했다. 디도는 남겨두고 바울은 지속적인 선교의 여정을 떠났다. 디도서에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남긴다.

5. 디도서 3장 12절,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6. 장로를 세우고 교회를 조직하라. 아데마와 두기고를 보낼테니 너는 나와 함께 니고볼리 접선 후 선교하자. 이런 문맥이다. 바울과 디도가 그레데 선교할 때에 평소의 선교전략 대로 중심지에 갔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즉 그레데의 중심도시 "고르틴"에 갔을 것이다. 4세기 디도를 기념하는 교회가 그곳에 세워짐. 유적으로 남음. 옆에 음악당이 있다. 음악당이 있었던 도시라는 것, 즉 보통 도시가 아니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이곳에 갔었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해안가가 아니라 섬 중앙에 있다는 것이다. 그레데의 최대 도시는 항구에 있어야 마땅한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바다와 강에 연결되지 않은 대도시는 거의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고르틴은 제주도 같은 섬인데 도시의 위치가 중앙에 있다.

7. 굉장히 발달된 도시였다. 그리스 정교가 그들의 종교이다. 고고학적 발굴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디도 기념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굴하고 있었다. 그레데 대학 고전학과 교수와 팀들이다. 발굴하는 교회가 너무도 컸다. 정말 재미있는 도시였다. 로마의 기본적인 역사를 그 교수가 가르쳤다. 어떻게 로마가 그레데를 다스렸는가? 로마에게 그레데는 너무도 중요하다. 지중해를 둘러싼 정복지에 망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적었어도 50만명, 거의 100만으로 추정한다. 당시 로마 근교까지 합해도 100만 정도가 살았었다. 그레데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고르틴이 섬의 중앙에 위치한 이유는 사방으로 둘러싸인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기 위해 섬의 중심에서 사방으로 해안까지 이어지는 도시일 필요가 있어서다.

8. 니고볼리에서 만나자고 디도서를 바울이 디도에게 썼다. 3장 13절을 보라. 세나와 아볼로를 먼저 보낸다고 한다. 디도서를 들고 간 사람일 것이다. 세나는 율법교사이다. 랍비가 아니라 변호사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그레데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뱃길, 고린도, 그레데,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길이 중요한 뱃길이다. 그레데에서 새로운 물자를 공급받고 싶어했을 것이다.

9. 어떻게 서포트를 받았는가? 어떤 경로로 움직였는가? 이것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선교의 역할, 어디에서 물자를 공급 받았는가? 이것도 살펴보아야 한다. 순회 설교자, 요한 1-3서에 나오는 것, 이들을 돕고자 하는 문화가 있었다.

10. 바울은 디도를 남겨두고 어디로 갔을까? 에베소에 들렀거나 스쳤을 가능성이 높다. 딤전1장을 보라.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에베소를 스치면서 디모데를 남겼을 것 같다. 마게도냐 일이 급해서 그렇게 한 듯하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만나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지키려고 에베소를 그냥 스친 것인지 모르겠다.

11. 로마감옥 출옥 이후에 60에서 바울은 어떤 사역을 했는가? 바울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그레데에 가서 선교한 것, 그곳에 디도를 남긴 것, 그리고 에베소로 가서 디모데를 남기고 마게도냐로 간 것. 이런 행적을 추적하려 함이다.

12. 디모데가 어리지만 바울이 함께할 수 없어서 그에게 목회의 지침을 제공할 의도로 쓴 서신이 디모데서 되시겠다. 1:5절을 보라.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여기서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과 결부되어 있다. 사랑이 핵심이다. 사랑의 출처가 본문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13. 바울은 마게도냐 갔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 '했다' '했을 것이라'는 정황이 성경에 나온다. 1) 서바나에 가야 하겠다는 말이 있다. 왜? 내가 스페인에 가는 것을 로마 교회가 비용을 지급하라. 스페인 사역을 너희가 품으라는 언질이다. 그래서 스페인에 갔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특별히 바울은 하고자 한 것을 포기하지 않은 인물이다. 스페인에 간 결과가 남아있지 않다. 유적적으로, 기록적으로 남아 있는 결과가 없어서 아쉽다. 2) 빌레몬서, 내가 너에게 가겠다고 하였다. 빌레몬이 있는 골로새도 바울이 갔을 것이지만 성경에 나오지는 않는다. 한다면 하는 바울의 성정상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3) 딤후, 순교하기 직전에 썼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서신이다. 디모데는 당시 에베소에 있었을 것이다. 딤후4:9-14: '너는 속히 내게로 오라.' 즉 에베소에서 로마로 오라는 이야기다.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한다. 자기 주변에 있었던 데마, 그레스게, 디도를 언급한다. 바울을 등지고 떠났다고 한다. 데마는 떠났고 나머지 두명은 파송했다. 3명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곁에 지금 누가만 있다. 그러니까 디모데를 향해 마가까지 데리고 오라고 한다.

14. 아데마를 에베소로 보내어 디모데를 대신하게 했다. 당시 마가는 골로새에 있었을 것 같다. 바울은 그 전에 그곳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초대교회 정황이 잡힌다.

15. 에베소에서 로마로 오는 것은 드로아를 거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바울이 선교여행 시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바울이 가장 자주 방문한 지역일 것이다. 드로아 거쳐서 오라는 기록이 있다.

16. 니고볼리, 어떤 장소인가? 폐허가 된 도시이다. 그곳에 갔다. 로마의 역사에는 기본인데 신학 학자에겐 무지하다. 니고볼리, 승리의 도시이다. 옥타비아누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침. 악티움이 니고볼리다. 악티움 해전 후 로마의 폐권을 장악한 기념으로 새운 도시이다. 주요 항구로 사용했다. 브린디시, 로마의 중요한 항구이다. 길이 베드로가 거꾸로 매달린 압비아가드. 다라키움, 에그네시아, 당시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길이 시작된다. 로마의 가장 중요한길, 브린디시, 다라키움 길이다. 다음으로 갈 곳이 니고볼리다. 바울은 디도에게 니고볼리로 와라고 했다. 겨울내내 준비하자. 무엇을? 앞으로 로마에 가서 해야 할 일의 전략을 짜자고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이 선택한 헬라어 단어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니고볼리 전도에 들어간다.

17. 바울은 그리스 동쪽만 전도했다. 서쪽은 안하였다. 서쪽선교 거점으로 니고볼리로 삼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일루리곤, 3차때 전도했던 곳이다.

18.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 딤후,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고 한다. 니골볼리가 포함된 지역 전체를 달마디아라고 한다. 바울이 마지막 순교 이전에 디도를 다시 달마디아 지역으로 보냈다. 그리스 서쪽 지역을 전도하기 위해서다. 마지막 5년동안 마음의 의도는, 기존의 선교지를 돌아보고 선교하지 않은 지역을 선교하기 위해 전략적 매진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바울은 마지막에 그레스게, 디도를 마무리 하지 못한 선교 불모지로 파송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다고 한다. 갈라디아, 많은 어원을 가진 말이다. 갈라디아, 갈리아로 쓰이기도 한다. 그레스게를 보낸 갈라디아는 이탈리아 북쪽으로 가면 남프랑스 쪽인데 프랑스 선교를 위해 그곳으로 보냈을 것이다.

19. 바울이 로마감옥 이후에 1) 먼저 스페인에 갔을 것이다. 스페인 중에서도 타라고나 혹은 카디즈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인 선교가 크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코르도바, 카디즈, 타라고나 200년 말경에 순교자가 많이 나온다. 다른 바울의 선교지, 부흥이 일어났다. 곧 박해가 일어나 가정으로 지하로 내려간다. 기간이 지나서 다시 핍박이 가해지는데 순교가 일어난다. 10명의 순교 이야기가 나온다. 빌립보에도 있다. 개척한 교회는 박해를 받아 지하로 들어간다. 약 200년 보존되다 그 이후에 순교자가 나오고 순교의 피가 흐른 이후에 313년 기독교 공인 이후에 지상으로 올라와 엄청난 부흥이 이어진다. 니케아 종교회의 때 초대된 교회들 보면 200년대 후반에 순교자를 낸 교회들이다. 부흥의 증거이다. 니고볼리/빌립보/그레데/고르틴 등지에도 증거되고 있다. 바울이 스페인에 갔다는 증거는 순교자의 유무에서 확인된다.

20. 바울이 스페인에 간 것은 2년 정도일 것이라 추정된다. 제롬 코너, 왜 바울이 스페인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나? 여전히 스페니쉬 사용하는 곳이어서 바울은 언어적 장벽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21. 로마에서 압비아, 아우올리아, 오스티아 가는 길이 가장 유명한 경로이다. 오스티아 항구에서 스페인에 갈 때 클레멘트와 작별했다는 기록이 클레멘트 서신에 나온다.

22. 마게도냐로 가서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쓴 것이 1서. 고린도에서 디도를 불렀다. 니고볼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니고볼리에서 디도와 함께 있다가 브린디시에서 로마로 들어가서 순교한다. 이것이 한규삼 목사님의 추정이다.

23.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부른 바울의 이유는 무엇일까? 왜 바울은 에베소로 직접 가지 않았을까? 당시 배가 에베소로 가지 않고 밀레도로 갔다. 자동차로 1-2시간 거리이다. 밀레도와 에베소 사이. 밀레도에 벌거 없다. 그러나 옛 밀레도를 알고 싶다면 베를린에 가면 된다. 베를린의 버가모 박물관, 버가모 지역을 발굴하며 중요한 것을 다 갔다 놓았다. 그들은 밀레도도 연구했다. 밀레도의 중요 유적들은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단의 재단도 몽땅 베를린으로 갔다. 1/3은 우리가, 1/3은 남긴다는 게 고고학 발굴의 계약인데 중요한 것만 가져갔다. 프랑스/베를린/영국 박물관에 중요한 것은 다 있다.

24. 베를린에 가서 밀레도의 복원된 것을 보면, 상상할 수 없도록 멋지다. 바울이 왜 에베소에 가지 않았을까? 1) 밀레도 항구 이용이 용이했다. 2) 당시 에베소 항구는 수리 중이었다. 에베소 항구는 정말 멋지다. 밀레도에 누구를 떨어뜨려 놓았는가? 딤후4:2, 드로비모는 병들어 밀레도에 두었다고 한다. 고린도로 오다가 에라스도 두고 니고볼리 갔다가 로마로 갔다는 이야기다. 밀레도 항구는 에베소 항구 다음으로 컸다.

25. 왜 바울이 고린도에서 디도서를 썼을까? 딤후 단서도 있고, 고린도가 고르틴을 통해 알렉산드리아로 연결하는 통로이다. 외경 중에, Acts of Paul. 필독서다. 여기에 바울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머리가 까졌고 일자눈섭, 키가 작고, 눈이 부리부리 했고, 어떻게 보면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천사같다. 영성은 뛰어난데 외모는 아니다. 이런 얘기들이 외경에 나온다. 2세기의 자료이다. 참고하라. 바울행전, 선교할 부분을 사도행전에 안나오는 것들이 등장한다. 소설이 아니다. 떼클라, 여성 리더십 이야기가 나온다. 여성이 세례주는 이야기도 나온다. 고린도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뱃길을 주목하라, 고린도, 브린디시, 육로로 이어진다. 압비아가 나온다. 베드로가 압비아로 도망갔다. 압비가가도, 베드로에게 나온 꾸오바디스 이야기. 바울행전: 바울이 고린도를 거쳐 로마로 갈 때 베드로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순교할 것을 환상으로 보여줌. 바울이 순교할 때, 동편을 향해 기도하고 길게 목을 늘이는 순간 목을 쳤는데 하얀 피가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경은 아니다. 흥미있게 외경 차원에서 읽어보라.

26. 바울의 마지막 5년: 1) 바울의 마음에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울은 충실하게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했다. 그의 마음에 자기가 아는 모든 세계가 선교의 대상이다. 그리스와 터키 서쪽, 그리스와 로마. 지도를 보라. 사도행전 19장에 두란노 서원이 나온다. 선교사로 나갈 분들에게 중요한 텍스트다. 그곳에서 이틀을 가르치매 아시아 전체가 복음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시아 전체를 선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루스드라 더베 등이다. 소아시아 전체를 선교한 자들은 두란노 서원에 모인 서생들이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흩어져 전도한 것이다. 바울 밑에서 누란노 서생들이 소아시아 선교의 주역이라 추정한다. 행19장, 두란노 서생들이 소아시아 전역을 선교했다. 달마디아, 일루리곤, 니고볼리 지역을 나중에 바울이 선교했다. 로마, 스페인, 아우올리아로 올라가면 남프랑스 지역을 거쳐 리옹까지 갔을 것이다. 자기의 제자 그레스게를 남쪽 프랑스 갈리아로 보냈을 것이다.

27. 그림을 좋아한다. 렘브란트, 벤 고흐. 아를 지역. 리용을 가기 전의 도시이다. 지금 마르세이유가 있다. 아를이 중요하다. 르혼강 가에 있다. 아른의 박물관에 갔다. 고호의 카페 테라스 엣 나잇(cafe teras at night)에 나오는 길이 바로 아우레이아 길이다. 로마 카르도다. 글미에 나오는 돌들은 로마시대 2000년 전에 깔린 돌이다. 아마도 이 길을 거쳐서 남프랑스에 복음이 전달되지 않았을까?

28. 오늘의 교훈 1) 바울이 가진 원대한 계획,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리라. 땅끝은 스페인. 바울의 머리에 그려져 있는 세계 전체를 품으로는 꿈과 뜻. 우리에게 큰 도전이다. 2) 바울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사람에게 이리오라 하면 오고 저리가라 하면 가는 권위의 사람인데 어떤 분이길래 그런가? 바울이 돈을 많은 줄 안다. 따라 다니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짐작한 것이다. 어떤 리더십 때문에, 이 리더십의 출처는 어디인가? 바울의 리더십은 자기가 전심으로 하나님만 섬기고 복음만 섬기니까 사람들이 붙은 거다. 바울을 움직이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따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던 것이다. 사단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과 나라를 중심으로 뭉치는 리더십과 연합이 아름답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메이지 않는다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리더십.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매이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바울선교 팀의 규모는 마지막에 100명 정도였을 것이다. 3) 바울이 디모데와 마가를 자신에게 부른다. 로마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순교한다. 순교의 시간은 67년 말경이다. 이유는? 네로가 1년동안 외유를 한다. 밖에 나갔다. 네로가 밖에 있다가 돌아온 시기이다. 네로 자신도 68년 이후로 실각하기 때문이다. 바울을 죽일 수 있는 시기는 얼마 안된다. 67년 12월 경에 바울을 참수했을 것이다. 마가에게 복음을 전수했을 것이다. 바울, 본인의 선교를 통해 터득한 하나님의 진리를 마가에게 전수했을 것이다. 마가의 변화, 신약 전체 속에서 엄청나게 중요하다. 바울, 베드로, 요한, 그리고 마가 순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바나바다. 마가의 변화. 바울은 마가와 디모데와 같은 차세대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하고 인생을 마감했다. 니고볼리, 바울이 그곳에 갔을 때에 네로도 그곳에 있었지 않았을까. 네로는 올림픽에 참석하여 놀고 있고 바울은 마지막 선교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다. 묘한 아이러니. 바울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의 사역도 지역이 넓게 펼쳐지길 소원한다.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소요리 문답 1-1 하나님의 영광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먹고 마시고 행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동물들도 먹고 마시고 행합니다. 식음과 행동은 모든 살아있는 생물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는 어떤 가치가 구별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달라도 무의미한 오십보 백보의 차이일 뿐입니다. 방향이 부여될 때에 가치의 구별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구별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는(εἰς) 것에 있습니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특정한 기간에 특별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단회적인 이벤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판을 벌이거나 멍석을 깔지 않고 인생의 지극히 기본적인 현장에서 호흡처럼 중단되지 않고 벌어지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항상 범사에 쉬지 않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자체가 우리의 삶입니다. 생의 의미와 가치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먹어도 먹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추구되지 않는 마심도 무의미한 액체의 흡입일 뿐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할 때에 비로소 무엇을 먹고 마시고 행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기가막힌 요리를 먹고 최고급 음료의 잔을 기울이고 온 세상의 시선을 사로잡는 행위의 화려함을 발산한다 할지라도 헛된 짓입니다.

표피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식음과 행위는 생명과 몸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보이지만, 성경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입니다. 바울이 권하는 것처럼, 가난하고 연약한 분들을 잔치의 상석으로 모시고 자기의 양심과 유익이 아니라 타인의 양심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즐겁고 이롭게 하는 일들이 우리의 행위를 장악하게 하십시오. 물론 사람의 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환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방향성을 이탈하면 무엇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이고 무엇을 마셔도 해갈되지 않을 것이고 무엇을 행하여도 성취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과 타인의 입맛에 맞는 삶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살았어도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빠진 삶은 이가봇의 삶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법궤는 빼앗기고 시아버지, 시동생, 남편은 비운의 죽음을 맞아 아들을 낳았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삶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무의미와 허무보다 무서운 인생의 저주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향할 때에 인생다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지극히 본성적인 것이며 일상적인 것이며 자연스런 일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행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고 근원적인 기쁨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궁극적인 영광인지 모릅니다.

인생의 기본적인, 본성적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며 추구하는 것입니다. 본래 모든 인간은 그렇게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온 인류에게 가장 큰 유익을 끼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 각 시대와 온 세상이 유익을 얻습니다. 어떤 종교적 최면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의적인 억견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거창한 구호의 화려한 장미빛에 몽롱하게 도취하는 정도로만 만족하고 말 것입니다. 

2014년 1월 15일 수요일

율법의 통일성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삼상15:23)

우리는 우상숭배 행위를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는 계명을 우상숭배 조항으로 여깁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나머지 계명들에 대해서는 우상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무엘이 사울에게 정죄의 말을 내던진 근거에 대해 밝힌 내용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의 의미를 새로운 각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점쟁이 집을 출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점치는 죄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상숭배 행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물리적인 점쟁이집 출입의 유무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그게 바로 점치는 죄에 해당되는 것이고 마음이 완고한 것 자체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사무엘은 말합니다. 여기에는 왠지 논리적인 비약이 있어 보이는데 그런데도 성경은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불순종과 사술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보다 높은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그 기준을 따라 인생이 움직임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점치는 인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모든 기준은 다 "점괘"입니다. 말씀과 무관하게 어떤 행운이나 운명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는 모두 점치는 사술과 같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것은 자신이 세운 어떠한 뜻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마음을 뜻합니다. 즉 완고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든지 적응하는 유연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만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우상인 셈입니다. 누구를 따른다는 것 자체가 숭배인데 자신을 따르니까 자신이 우상인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 대상은 사실 자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완고함은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은 아말렉왕 아각을 살려 두었으며 괜찮은 양들을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용 제물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고 아각을 죽이지 않아 자신의 위용을 보이고자 했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의미가 고작 양이라는 수단에 달렸다고 생각한 신지식의 결핍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황급한 변명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사울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황제적인 채면을 기준으로 행동했고 자신의 완고함을 따라 인간적인 예배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상을 백성에게 풍기고자 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사울의 행실을 간단히 "말씀을 버렸다"는 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버리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사울은 왕이지만 자신의 칼로 자결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습니다. 말씀을 버린 "왕"은 이름 뿐이었고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행위 일체가 우상숭배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이 얼마나 긴밀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계명들을 다 지키다가 지극히 사소한 계명 하나만 어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 전체를 범한 것이라는 성경의 '어거지' 같은 산법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말씀의 속성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의 말씀은 주어지신 하나님 자신과 직결되어 있으며 당연히 하나님의 계명 하나만 범하여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고 전부를 범하여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며 지극히 사소한 조항 하나를 범하여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기에 그의 말씀 전체를 짓밟는 행위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하나 낱개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계명의 저자를 중심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다 이룬다는 말씀도 맥락의 결이 같습니다. 결국 율법을 생각하고 대면할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께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계명은 한결같이 그리스도 예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몽학선생 같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런 통일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각의 율법을 낱개로 여기고 서로 독립된 행위로만 번역하려 할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파 사상의 부활일 것입니다. 

2014년 1월 14일 화요일

주님께만 범죄한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시51:4)

다윗은 자신을 주님께만 범죄하는 자로 의식하면 살아가신 분입니다. 이는 타인과 사회에 대한 무책임과 무관심의 정당화가 아닙니다. 자신을 낳은 어미가 죄 중에 잉태했고 죄 중에 출생한 다윗은 죄의식이 다른 누구보다 더 강했던 분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죄론이 하나님만 그 대상으로 삼았다면 그의 사회성 결여 혹은 법의식의 불균형을 의심하는 것보다 다윗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고백을 했는가에 탐구의 시선을 돌리는 것 더 좋을 듯합니다.

세상에서 약하고 가난하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무시를 당합니다. 신원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투자'하고 '관리'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탓입니다.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돈도 없고 인맥도 허약한 사람들은 천대를 받습니다. 교제의 악수를 청할 사람들이 주변에 없습니다. 마음 편하게 속사정을 쏟아낼 소통의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의 문턱을 출입하는 것 자체가 부담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돌봄을 받지 못하고 법과 경제라는 대응의 수단이 없는 분들에게 죄를 지어도 그것에 상응하는 형벌이 주어질 리가 없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고 마구 횡포를 부립니다. 이러한 심리는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다르지가 않습니다. 땅에서의 수단을 장악한 자들의 안중에는 하나님도 없고 사람도 없고 자기들만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백성들을 돌보라고 맡기신 재능과 재물과 권력을 사리사욕 챙기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의 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신분을 늘 의식하며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모두 주님께만 지은 죄라는 놀라운 경건의 기본기를 가진 종입니다. 비록 꿈틀거릴 저항의 힘이 제로인 약자와 빈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 지은 것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죄를 짓는다는 다윗의 의식보다 지금의 교회에 더 긴급하게 요청되는 태도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정죄의 손가락을 겨누는 죄인에게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들키지 않은 죄라도 그 죄는 하나님께 지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합의를 따라 죄가 아니라고 세탁된 죄도 여전히 하나님께 저지른 죄입니다. 죄는 사람들과 상황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한 일입니다. 죄의 유무도 하나님께 달렸고 죄의 경중도 하나님이 죄의 대상이란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사회법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러한 하늘의 법의식과 죄개념이 최소한 교회 안에서는 견고한 문화처럼 뿌리가 박히면 좋을 듯합니다. 공동체 단위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의식을 전념시킬 개인들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면 참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2014년 1월 12일 일요일

사랑의 독특성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5)

사랑의 가장 독특한 속성은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해야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마음만 가지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힘으로만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할 의지가 있다고 해서 사랑이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 우리의 전부가 동원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전부가 그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이시고 말씀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자체도 사랑과 관계된 것인데 가장 명료하게 계시된 형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의 핵심은 사실 이 계명을 주신 저자로서 "내가"에 해당하는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을 하셨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1) 자신의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고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기호와 판단을 따라 사랑의 대상이 정해지지 않고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보내신 자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2) 우리가 원수였을 그때에 사랑하신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킬 자세가 되어 있다거나 화해가 이루어진 상태에 비로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시점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풀어지는 때, 상대방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때, 최소한 그런 기미라도 보이는 때가 우리에겐 사랑의 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3) 사랑을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겨 생명조차 사랑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순수한 개념의 사랑인 경우보다 이윤을 창출할지 모를 투자의 개념에 사랑이란 언어의 옷을 입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고의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중심을 파보면 예수님의 순수한 사랑의 준행자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도 타인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도 영혼도 뜻도 힘도 성품도 심지어 목숨도 동원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별 말썽없이 더불어 살 뿐입니다.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여 사랑하며 산다고 자위하며 스스로 속을 수는 있지만 사랑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랑은 마음으로 결단하면 닭이 계란을 낳듯 쑥 밀어낼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모가 그런 사랑을 본보여야 하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되 눕거나 걷거나 앉거나 일어날 때에도 말씀을 말하고 이마와 손에도 말씀을 묶어주며 문설주와 입구에도 말씀을 붙여 범사에 항상 연습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이것만을 위해 태어났고 이것만을 위해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맞습니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형상으로 태어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의 당위성은 사라지만 생존만 있습니다. 생존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화 시킵니다. 아이들도 그것을 배우고 따라가는 듯합니다. 이는 세대를 거듭하며 더욱 공고해질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세파에 역류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7000이나 되는군요. 하하하. 이 정도면 낙관도 부당하고 좌절도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각자가 주어지는 삶의 분량만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협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선을 이룰 것입니다. 

2014년 1월 10일 금요일

왜 기본기를 따지는가?

사람이든 짐승이든 집단이든 개인이든 생업이든 학업이든 신학이든 목회든 그 어떤 것이든지 기본기의 중요성은 재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기본기의 부실이 양산하는 전방위적 폐단의 불가피한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마땅하고 모두가 알고 재언할 필요도 없기에 더더욱 부지불식 간에 집단적인 최면과 망각에 빠지기 쉬운 지점이 또한 기본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전은 모두가 좋은 책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한 어느 애서가의 한탄처럼 기본기도 모두가 필연적인 것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필요성에 상응하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의 발로로서 소자(Paul, 필자의 영어이름)는 이곳에서 주기적인 일필을 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두 개의 동사로 축약해서 말한다면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맹신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을 알고 확신하고 하나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만약 여기에서 멈춘다면 일종의 개인적인 득도나 황홀경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믿는 대상을 행위라는 가시적인 형태로 밀어내는 것까지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고 행하신 일은 작정과 창조와 섭리를 뜻합니다. 즉 기독인인 우리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풍기는 인격과 보이는 삶으로 표상하는 증인의 자리까지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할 때에 기독교의 기본기에 충실한 개인이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공로에 단 일인치의 공간도 할애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후의 됨됨이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돌립니다. 게다가 교육을 대단히 강조해서 배우고 아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마치 기독교는 입술만 분주한 종교로 규정해도 반박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우리의 자랑이 인기척도 할 수 없도록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일평생 자라가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구현함에 있어서는 인격과 삶의 입체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인격이요 삶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정보의 비대한 분량 확보로 만족하는 종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가난한 비교급에 구걸하며 여전히 지식에 과도한 애착을 갖는 분이 계시다면, 그는 아직도 기독교의 기본기가 부실한 분입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궁핍한 기본기의 실상을 올바르고 종합적인 안목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스스로를 내감하는 창문이 없다고 함이 옳은 듯합니다. 사회적인 화두 지각에는 민첩하고 개인의 이해와 관계된 현안에는 광속의 순발력을 보이지만 정작 부실하면 해결할 대체물이 없는 기본기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신경한 태도를 보이고, 급기야 위기감이 무르익어 막상 실태를 파악하려 해도 어디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는 막막한 난관에 부딪히고 맙니다. 이러한 경험은 기본기에 대한 상식의 부족이 빚어낸 결과인 듯합니다. 기본기가 튼튼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고 문제의 원인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신속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본기가 건실하면 문제가 생겨도 두렵지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통해서 생각지도 못한 지혜와 교훈까지 얻습니다.

기독교의 기본기에 대해 말하면 마치 도의 초보로 회귀하는 듯하여 예수님에 대한 교리의 초보를 버리라고 한 히브리서 기자의 입장과 충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의 이 말은 기독교의 기본기가 필요하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 단단한 음식까지 먹고 남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이 되었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기독교의 초보마저 다시 배워야 하고 연한 식물만 먹어야 할 정도로 신앙이 무너져 있는 실태를 고발하고 책망하는 맥락에서 던져진 말입니다. 히브리서 본문의 등뼈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교리로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신약과 구약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가 가장 선명하게 그려진 책입니다. 기본기를 결코 경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본기가 튼튼하지 않으면 성경을 읽어도 독법이 깊어지질 않고 아무리 왕성하게 활동해도 곧장 공허함에 빠집니다. 기본기는 무엇을 담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부실하면 열심을 부려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습니다.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습니다. 쌓을수록 무너짐만 커집니다. 잘하는 듯해도 늘 불안해 보입니다. 기본기의 중요성은 단순히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장기적인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은 기본기의 건실에 관심을 쏟습니다. 기본기가 건실하면 세월의 표피에서 발생하는 경박한 변덕에 쉽게 나풀대지 않습니다. 그는 바다의 수면에서 미풍만 불어도 촐랑대는 물살에 반응하지 않고 바다의 저변에서 도도히 흐르는 대류를 읽습니다. 남들이 당황해도 덩달아 편승하지 않습니다.

정치나 예술이나 운동이나 사업이나 학업이나 교육이나 목회나 문제의 근원은 언제나 기본기에 있습니다. 그때그때 붉어지는 문제의 이면을 관찰하면 기본기의 부실이 표면화된 가시적 증상에 불과하고 서둘러 복구해야 한다는 경고와 같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제의 근원을 소급하다 보면 추적이 불가능한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지각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는 문제의 근원에 가장 근접한 마지막 단계까지 파고드는 것이 다른 어떤 대안보다 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표면화된 문제에 피상적인 해법만 부지런히 제시하게 될 것이고 무시된 문제의 근원은 반드시 그 다음 단계의 심각한 증세를 의식의 표면으로 밀어낼 것입니다. 이러기를 수없이 반복해도 지각하지 못한다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멸망으로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심각한 정체성 위기의 벼랑끝에 서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의 무리인데, 교회에서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라 할 그리스도 자신을 목격할 수도 없고 그의 향기를 맡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적 코드가 맞는 사람들의 사사로운 동우회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아가 다툼과 불의와 분열과 도덕적 타락으로 오히려 사회적 근간에 위협을 가하는 자들의 리스트에 기독교를 올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세상의 거짓과 불법을 방조하고 나아가 낯 뜨거운 편까지 들면서 야비한 정당성도 종교의 이름으로 부여하는 일에 다른 어떤 종교보다 앞장서고 있다는 가슴 오싹한 지적도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맛을 잃고 빛을 상실하면 세상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힐 수없에 없는 듯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고 무너져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에 소망의 빛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타락을 보면서 지적과 비방과 정죄의 목청만 높이는 것은 대단히 비겁한 행위일 수 있습니다. 타인의 무너짐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일그러진 이미지를 관리하고 은밀한 차별화를 도모하는 비겁자의 시커먼 속을 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물론 저도 그런 비겁자의 대열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만 대안을 제시하고 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비판은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오해되고 오용될 가능성이 높은 법이기에 대안과 본이라는 비판의 기본기는 최소한 갖추자는 차원에서, 저는 기독교의 위기를 공감하는 여러분과 함께 여기에서 대안도 펼쳐보고 할수만 있다면 본도 보이자며 제 자신을 설득하고 여러분께 그렇게 한번 해 보자고 권유도 드리는 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우시고 폐하시는 분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단2:21)

폐하고 세우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대기에 있어서도 세워질 때와 폐하여질 때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국가이든 개인이든 흥망의 이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때로 이차적인 대상이나 원인에게 분풀이를 가합니다. 그러나 분풀이가 무분별한 것은 아닙니다. 온갖 부정과 불법에 대해 정당한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저히 침묵할 수 없고 하루종일 울분의 주먹을 거머쥐고 살아가야 할 정도의 몰상식과 몰염치와 몰지각이 사회에 너무나도 편만해서 그것들을 피해 눈길을 다른 곳에 두고자 할지라도 한 줌의 지면도 찾지 못하는 현실의 비애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 그분께만 반응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지각에 걸러지는 악의 사슬이 전부가 아닙니다. 범우주적 규모의 악이 고려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빙거로 사회에 대한 우리의 나태과 무관심을 정당화 한다거나 다른 기독인의 그런 자세를 방조하고 나아가 두둔하는 것은 결코 올바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도덕법은 단순한 윤리의 강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광을 드러내고 나라가 임하고 그의 형상을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는 것과 관계된 고차원적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가치관의 진동과 거룩한 혼란을 초래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영향력의 통로로 쓰이도록 사회에 관여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나 개인이 사회적인 발언과 참여가 가져올 유불리에 기초해서 육신의 몸을 사리는 이기적인 처신에 민첩함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열매맺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도 개념적 차원에서 각 진영의 문법으로 가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가공된 개념을 가지고 서로 정죄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거짓과 속임수가 국가의 심장부를 쥐락펴락 한다면 그건 대한민국 교회와 국민에 대한 신적인 징계의 성격이 강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들을 마치 보의 물과 같이 임의로 다스리며, 그분만이 왕들을 세우시고 폐하시는 분이시며, 깊고 은밀한 일을 드러내고 어두운 데 있어도 아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이런 반응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무르짖을 수 있습니다. 어떤 왕을 세우시고 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깨달음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깊고 은밀한 것을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구할 바까지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믿음의 분량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회적 자유와 평등이란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분신도 마다하지 않는 열심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통로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발휘해야 할 가치와 향기가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더 높고 탁월한데 그에 부응하는 우리의 삶은 너무도 미진한 듯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반응한 오늘의 다니엘이 나오기를.

2014년 1월 9일 목요일

아들의 우주론

아들: 아빠, 하나님은 왜 별을 만드신 거에요? 그냥 태양과 달만 있어도 좋잖아요.

아빠: 낮에는 태양이 환하니까 괜찮지만, 캄캄한 밤에 달만 있으면 외롭잖아. 그리고 별들이 없는 하늘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삭막하냐. 별들은 꿈과 낭만과 미의 상징이지. 아빠는 별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멋지다는 생각에 빠진단다.

아들: 잘생긴 아빠보다 착한 아빠가 좋잖아요. 하늘이 멋지도록 별을 만드시는 것보다 그것을 공부하지 않아서 과학자가 하나님을 안믿게 되지 않으면 더 좋잖아요.

아빠: 일리가 있는 말이다. 생각이 치밀한데...흐흐흐. 그런데 아들아, 가장 아름다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그분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되셨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 거치는 반석이 되셨지. 뚜렷하게 갈라졌다. 하늘의 별들도 그렇단다. 믿는 우리에겐 별들이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함을 말하지만, 믿지 않는 분들에겐 그것을 탐구하다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창조도 부정하게 되지. 그런데 이걸 왜 물어?

아들: 요즘 학교에서 하늘에 대해서 배우는데 버스 타고 오다가 갑자기 생각난 거에요...^^

아빠: 그렇구나. 암튼 좋은 질문이다. 

2014년 1월 8일 수요일

칼빈의 섭리론

칼빈의 섭리론을 정독했다. 정말 많은 교훈들의 보고이다. 우연과 운명의 개념을 격파하는 화술도 뛰어나다. 인과의 가시적인 사슬에 얽매여 본다고 하나 마땅히 보아야 할 것들을 못보고 안다고 하나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에 고질적인 무지의 광란을 그치지 못하는 세상의 일반적인 인과율에 편승하는 성도의 연약한 부분도 화끈하게 꼬집는다.

하나님의 뜻과 정하심이 없이는 세상에 어떠한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태만한 방관자로 오해하게 만드는 '허용'의 개념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일도 반생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최고 원인이며 제일 원인'이란 뜻으로 이해했다. 이런 맥락에서 행악자들 역시 섭리의 도구라고 하였다.

이는 원수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우리는 그들이 아무리 우리를 괴롭혀도 그들을 우리의 최종적인 반응자로 맞서지 말란다. 오히려 요셉처럼 천륜을 범한 형들의 악행도 하나님이 g허락하신 것이며 결국 선의 도구일 분이라고 여기고 나아가 수치와 비참에 빠진 그들과 그들의 자손까지 돌보아 주겠다고 한 것처럼 선으로 악과 싸워 이기는 태도가 합당하다.

아프고 어려운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도 가까운 원인에만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지혜와 권능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을 주목함이 마땅하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때에도 신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번영할 때에는 감사의 마음을, 역경 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대한 우려에는 자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2014년 1월 7일 화요일

오묘한 것과 나타난 것

감추어진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고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했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을 행하게 하심이라 (신29:29)

세상에 완벽하게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도 잘 모르는 우리에게 존재를 아느냐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사치스런 물음일 수 있습니다. 무에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무도 아시고 존재도 아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겐 그 모든 것들이 적당히 가려져 있습니다. 억울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전지는 최적이 아니기에 희미한 지식이 부여된 것입니다.

자식들은 늘 궁금한 것을 묻습니다. 그때마다 성경이 계시한 부분까지 답합니다. 성경보다 더 많이 알고자 성경이 그어놓은 침묵의 경계선을 출입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것이라는 엄포용 멘트까지 때때로 날립니다. 물론 우리의 무지를 가리고 정당화할 핑계의 빙거로서 신명기의 본문을 오용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지식의 적정선에 머무는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어쩌면 어릴 때일수록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경험이 늘고 지식이 많아지고 책임이 커지면 적정선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과제에 부응하기 위해 적정선 고수의 다짐이 서서히 희석되는 경향이 생깁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주님께서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에게 적당히 계시하신 목적이 완전한 지식을 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계시를 따르는 것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원하는 지식의 완전함을 위하지 않고 우리에게 신앙과 삶의 불변적인 규범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고자 하면 성경의 섬세함은 결코 빈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말씀을 준행하려 할 때에 말씀의 본질에 더욱 다가가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온전한 지식이 정보의 분량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로 살아가길 원하시는 앎의 목적과 관계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나 목회자가 성경의 배경을 조금 더 안다고 할지라도 목이 뻣뻣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돌아보면, 적나라한 노출보다 적당한 오묘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삶에는 훨씬 유익한 것 같습니다. 지식의 정교함을 높이는 노력보다 순종의 온전함에 집중하는 태도가 하나님 지식의 보다 높은 경지까지 이른다는 것도 어느 정도 경험한 것 같습니다. 저녁에 죽어도 좋을 도의 깨달음은 인격과 삶의 변화와 관계된 것입니다.

오늘 가정예배 시간에는 아이들의 질문이 거의 없더군요...^^ 설교를 제대로 한 걸까요???

몸살과 맛짱뜨다.

몸살이다. 이틀째다.
열은 사라졌다. 기침은 여전하다.
몸이 쉽게 피곤하다.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식은 땀도 바가지로 흐른다.
오한으로 떨다가 이불 속 뜨거움에 지치다가 잠든다.
이러기를 밤새 반복했다.

몸이 아프신 분들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다는 이유로 감사했다.
그러나 이렇게 감사해도 아픔에는 장사가 없다.

나는 괴롭고 가족들에 대해서는 미안하다.
게다가 자동차도 말썽이다.
문짝이 열리더니 닫히지를 않는다.

미시건의 혹한기를 제대로 경험한다.
교회도 학교도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쉬라는 싸인이다. 그런데 노숙자는 어떡하나...

2014년 1월 6일 월요일

아들들의 세례

사랑하는 아들들이 오늘 세례를 받았다. 아이들의 솔직한 신앙이 궁금했다. 그래서 물었다. 합습된 고백이냐 아니면 마음의 중심에서 나오는 고백이냐? 후자란다. 이것도 분위기에 편승한 반응일지 몰라 '나는 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통찰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아시는데?' 그랬다. 그때서야 아이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떳떳해서 오늘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고백한 것이란다. 녀석들의 반응에 난 뿌듯했고 흡족했다. 정말 주님께 감사하다.

2014년 1월 5일 일요일

생명과 호흡은 선물이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다 (행17:25)

생명과 호흡과 만물은 지극히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것들은 원래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과 호흡과 만물이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는 선물이란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의 원천임을 아테네의 지성인들 앞에서 선언하고 있으며, 이는 감사치도 않고 영화롭게 하지도 않는 자들의 무례와 몰상식에 대한 우회적 회초리 멘트와도 같습니다.

생명은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고 호흡은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며 만물도 인간의 실존과 삶을 떠받치는 것입니다. 지극히 광대한 극거시 세계와 극도로 미세한 극미시 세계 및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원의 세계들 각각과 상호간의 정교한 관계성도 다 우리에게 주시는 만물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지금도 선물로 받고 있다는 증거인데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계속해서 선물로 받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의 공통된 상식으로 승인된 적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게도 소중한 인생이 고작 코의 호흡에 달렸지만 그렇다고 코를 생명의 원천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생명과 호흡을 구분하고 호흡보다 생명을 먼저 언급하며 생명의 출처가 호흡에도 있지 아니함을 분명한 어조로 못박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호흡의 연장을 가져오는 다른 어떤 이에게도 돌릴 수 없는 영광과 감사는 오직 생명을 친히 선물하고 계신 주님께만 합당한 것입니다. 범사에 항상 감사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하는 분에게 가장 불손한 배은망덕 상태를 지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십니까? 감사가 우리의 삶입니다. 살아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최상급 은혜의 충만 속에서 저지르는 죄입니다.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생명에 대해 후순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생명의 선물에 대한 감사가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가뿐히 처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에 돌릴 관심의 여력이 없을 정도로 생명이 선물이란 가치를 최상으로 확대하고 거기에 극도로 집중함이 좋습니다. 환란이 강타할 때마다 생명과 호흡을 선물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가락으로 응수함이 좋을 듯합니다.

지금도 나에게 생명이 수혈되고 있다니 놀랍고 신비로운 섭리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부요함이 탄복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드는 밤입니다. 

고난이란 성장통

변화와 성장에는 언제나 수고와 고통이 따릅니다. 수고의 땀이 없고 아프지 않으면 무변화와 제자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변화와 성장은 없습니다. 무사안일 상태가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고통의 지속적인 상태가 늘 나쁘지는 않습니다. 

기존의 익숙한 생각과 습관과 행동과 말을 거절하고 성숙한 생각과 습관과 행동과 말을 택할 때에는 진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런 성장통을 거절하면 발전과 변화가 없습니다. 늘 친숙했던 어린 아이의 생각과 판단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고통이 즐거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주어질 때마다 신앙의 지경이 넓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에 의하면, 환란의 날은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때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서로 등짝을 맞대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은 안락한 아랫목 사건일 뿐입니다. 고난의 때에 영광에 대한 설레임이 이는 건 정상적인 것입니다.

장밋빛 미소를 기대하며 새해를 맞이해도 여전히 고난은 있습니다. 때로는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고난만 보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큰 것 같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정말 아프지만 그래도 예비된 영광의 전리품을 거둘 수 있도록 '설레임' 속에서 인내해야 겠습니다.

2014년 1월 3일 금요일

새해의 유일한 소원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39)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던 자들은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했다. 이유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추구하는 성경의 부지런한 연구에 아무런 이의가 없으셨다.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영생을 얻을 목적으로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도 성경이 가리키는 본질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려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에 있다. 성경을 올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이렇게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겠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함에 있어서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시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독법은 정당하다. 신실한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읽었다.

그러나 거기에 그쳐서는 안되겠다. 예수님은 길이시지 종착지는 아니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야 한다는 궁극적인 성경읽기 목적을 포착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경의 목적이다.

2014년 새해에도 가장 큰 행복의 근원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리라 예상된다. 지적인 호기심과 주변의 물음에 대한 반응의 일환으로 성경을 읽지는 않으련다. 주석집필 방편으로 성경을 읽거나, 교리두둔 차원의 성경읽기 유익과 유혹이 크겠지만 그건 후순위다.

솔직히 괜찮은 독법들이 주변에 난립하니 호기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간다. 독법이 세련되고 그럴듯한 것일수록 교부들을 비롯한 믿음의 선배들이 고집했던 그리스도 중심적인 독법의 검증된 권위에 대한 도전도 심상치가 않다. 잠시 눈길을 빼앗길 수는 있겠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유행성에 둔해진다.

1년내내 성경을 펼칠 때마다 주님을 만나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그리하여 나누어 줄 영적 양식의 풍성한 깨달음에 새해내내 흠뻑 젖었으면 좋겠다. 그게 새해의 간절한 소원이다. 두자릿수 영하로 떨어진 날씨지만 성경읽기 열정은 얼어붙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씀은 매이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