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31일 일요일

형통의 비결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할 것이라 (수1:8)

평탄과 형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최고의 비법이 모두에게 목마르다. 이런 막대한 수요에 걸맞게 다양한 비법 공급자의 과잉이 일어난다. 개인의 형통이든 교회의 형통이든 만사형통 약속하는 기발하고 깜찍한 이벤트와 세미나가 곳곳에서 정신을 못차리게 할 정도다.

형통에도 격이라는 게 있다. 여호수아 서두에 등장하는 형통의 비법은 개인의 잘먹고 잘사는 삶, 교회의 금전적 수적 부흥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각자의 기호에 따라 설정된 형통의 개념은 지우시라. 성경의 형통은 하나님의 백성이 주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형통을 뜻한다.

이러한 형통과 어울리는 비법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심을 사로잡을 만한 방식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입술로 늘 읊조리며 주야로 묵상하며 말씀의 기록된 그대로를 다 지켜 행하는 것이 비법이기 때문이다. 창조 이래로 한번도 변하지 않았던 비법이다.

언뜻 보기에는 형통하는 주체가 여호수아 자신으로 지목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도자는 언제든지 섬기는 무리들과 분리되지 않는다. 형통을 특정한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지도자의 신분과 본분에 무지한 자들의 얄팍한 묵상이고 그러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자의 어법이다.

가장은 가족 구성원 전체를, 목회자는 교회 전체를, 국가의 지도자는 국민 전체를 자아의 연장으로 생각해야 한다. 공동체의 형통이 나의 형통이고, 공동체의 아픔은 또한 나의 아픔이며, 공동체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이며, 공동체의 잘못은 나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억울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이러한 공동체적 책임이 어깨에 맡겨진 것은 그 자체로도 영광이다. 여기서 천국의 열쇠권을 적용하면 하늘에 대한 공동체의 닫힘은 나의 책임이고 공동체의 열림은 나의 사명이란 수종자의 책임있는 의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여호수아 어깨에 걸린 책임의 막중한 무게는 무게의 크기만큼 큰 영광이다. 그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준수함에 있어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호기심을 자극하고 의식을 결박하는 이슈들이 유혹의 촉수를 내밀어도 말이다.

형통의 성경적인 개념 정립도 필요하고 그 개념에 걸맞은 비법의 인지와 수호도 동일하게 중요하고 공동체적 형통과 책임을 의식하는 것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2014년 8월 27일 수요일

자랑하지 마라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잠27:1)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 내일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일 일어날 일들에 대해 완벽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자랑 금지령의 대상은 모든 사람이다. 그럼 오늘 하루치의 지식은 완전한가? 그렇지도 않다. 하루의 잔여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내일에 대한 무지 수준을 방불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순간에 대한 지식은 어떠한가? 지금 내가 호흡하는 현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유무도 판별하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의 무지는 내일 혹은 미래라는 특정한 시간과만 배타적인 밀착성을 갖지 않고 인생 전체와 결부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염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비록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는 표현이 있어서 당일에 대해서는 염려가 허락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나 사실은 전혀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앞뒤의 인과를 나타내는 "그러므로" 접속사를 주의해서 본다면, 주님께서 하늘을 나는 가냘픈 새도 지키시고 곧장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의 풍전등화 인생도 솔로몬이 입은 영광보다 더 화려하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채워 주신다는 사실의 결론으로 염려 금지령이 발부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한다.

하나님을 아는 명철과 회개에 이르는 근심 이외의 자랑이나 염려는 어떠한 경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내일로 대표되는 어떠한 순간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적 손아귀에 있다. 내일을 자랑하지 않고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알고 인정하는 자에게 어울리는 삶의 합당한 자세이다. 게으르고 불성실한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은사가 닳아서 없어질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되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다.

자랑과 염려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이 궁극적인 원흉으로 있다. 역도 성립한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자랑에 중독되고 염려가 인생을 장악하게 된다. 삶의 생리이다.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은 졸부의 행보이다. 그렇다고 자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랑에도 방식이 있다. 지혜자는 자랑을 타인의 몫이라고 규정한다. 자신의 입술에서 출고된 자랑은 자랑이 아니라 경박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에는 늘 경박이 경외를 대신한다.

부득불한 경우에는 자신의 연약함과 관계된 것들을 자랑하면 된다. 그러한 바울처럼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도 논적들이 꼬투리를 잡아 맹공을 퍼부을 빌미의 재료들을 자신의 고백록에 빼곡하게 담았다. 약점과 실수로 얼룩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과하지 않고 저술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를 공개했다. 대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의 대상을 삼을 정도로 큰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이 어디에도 없는 듯하여도 족히 칠천의 규모는 되리라고 믿는다. 그들의 존재로 대한민국 교회는 지탱되고 있다. 감사하다.

2014년 8월 24일 일요일

계시 의존적인 사색

스스로 알 수도 없고 (욥42:3)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다. 스스로 알 수 없다는 자력적인 인식의 한계는 지성사의 축을 뒤흔드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무수한 지성들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여 내뱉은 모든 언사의 질이 이 개념으로 가늠된다.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알려진 모든 지식들의 실상은 진정한 사실에 이르지도 않았고 올바른 진리를 담아낸 것도 아니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욥은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의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지 않았다. 즉 만물과 만사가 대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알 수 없는데도 지금까지 인류가 배설한 언어와 지식의 분량은 수천의 산더미를 이룬다. 이러한 분량이 사물의 이치를 가리우고 올바른 진리의 숨통을 틀어막는 무지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 심각성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정도겠다.

욥은 동방의 으뜸가는 의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그의 출중함을 능가하는 이가 없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런데도 자신이 가진 모든 말과 지식이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들의 이치를 가리는 무지한 언사란다. 그리고 이치를 드러내고 전달하는 말과 지식의 출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그분께 묻겠단다.

욥의 경건이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지나 이르른 지점은 바로 계시 의존적인 사색이다. 하나님 자신이 건내신 물음들 앞에서 욥은 천에 하나라도 답하지 못하였다. 주께서 던지신 물음의 난해함도 답변의 입술을 함부로 벌리지 못하게 하였지만 답변의 질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아시는 답변의 수준에 이르지를 못하기에 욥의 묵묵부답 반응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계시 의존적인 사색에서 진정한 하나님 신뢰가 가능하다. 스스로 알 수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인간의 하나님 의존성은 어떠한 종류이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스스로를 속이는 가식으로 변질되고 만다. 욥의 역동적인 삶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인생의 호흡도 하나님께 달렸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삶도 전적으로 구분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욥의 결론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지고 이치를 가리우는 인간의 자력적인 지식의 한계와 무례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나 자신이 이러한 무례의 원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나를 더더욱 오싹하게 만든다. 인류의, 아니 나 자신의 오만을 꾸짓고 교만의 목을 꺾는,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고 최상의 의미를 부여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행득의 vs. 이신칭의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잠20:7)

NIV 역본에는 The righteous leads blameless life로 되어 있어서 우리의 무흠한 행위가 의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오해는 불식된다. 아마도 KJV의 The just man walketh in his integrity에 의존한 번역인 듯하다.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이행칭의 교리를 지적하고 거절하는 효과는 짭짤하다. 그러나 나는 국역이 좋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롭다"고 되어 있어서다.

이 구절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행칭의 교리를 두둔하지 않는다.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롭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신구약 전체가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는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종합하면, 행위가 온전하면 의로운 자가 분명히 맞지만 그렇게 의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온전히 행한 인간이 있었다.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분만이 이 땅에서 온전하게 행한 의인이다. 그분은 믿는 자에게 의로움이 되시기에 그분 때문에 우리도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우리는 온전하게 행하지 않았기에 직접적인 의의 원천이 아니라 의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물려받은 자들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행하는 의인의 후손이 되었기에 복이 있으리라.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온전하게 행하여서 의롭게 된 자의 복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의 후손이 되어서 주어졌다. 그래서 잠언의 말씀은 이행득의 교리가 아니라 이신칭의 교리와 상응한다. 의인이 무흠한 삶에 이른다고 하거나 의인은 진실하게 행한다고 함으로써 이행득의 교리의 혐의를 애써 벗겨주지 않아도 충분히 해석되는 구절이다.ㅇ

2014년 8월 20일 수요일

하나님의 형상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창1:26)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자신의 속성을 보이시며 닮도록
모든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놀랍고 신기하다.

모든 것들이 이룰 때가 있도록 하시고
온갖 것들을 그 쓰임에 맞도록 적당하게 지으셨고
심지어 악한 자들과 교활한 자들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시고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모두 하나님께 속하였고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해도 그 걸음은 하나님이 이끄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화목하게 되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로 복을 얻게 하시고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는 괜찮은데 필경은 사망으로 가는 길이고
악인들은 결탁의 손을 잡더라도 형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시는 뜻과 무관하지 않은
섭리적인 일들이다.

자연에는 다 파악되는 못하나 안정적인 질서가 있고
사회에도 다 읽어낼 수 없으나 특정한 패턴이 있고
그 속에서 무수한 가치가 생성되고 소멸되며
일뱡향 시간의 배설물은 다채로운 색상으로 역사를 수놓는다.

악하고 오만한 자들이 형통하여
소득은 마음의 소원을 늘상 상회하며
평안한 삶에 재물까지 속속 불어나며
일반 사람들이 이따금씩 당하는 고난도 없고
죽을 때에도 고통은 커녕 기력만 더해가는
피가 거꾸로 솟는 현상들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합법적인 질서인 양 사회를 부조리로 물들이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메가톤급 탄식을 자아내는 상황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어 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는 만세 전에 작정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본질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선 자리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사랑과 공의가 입맞추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2014년 8월 18일 월요일

18세기 공부법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신학을 수종드는 철학(논리학, 윤리학과 형이상학 포함)과 고전(언어와 연설과 역사와 시에 대한 연구)을 예비적인 학문으로 공부해야 한다. 

철학 공부법

1. 선생이 강의하기 전까지는 철학을 시작하지 마라. 전문가 없이는 공부하기 어려운 학문이 철학이고 고전읽기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함이다. 교재 이외의 문헌들을 보려고 시간을 할애하지 마라. 너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세월의 허비이기 때문이다. 강의에 충실해라. 

2.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오전과 저녁 시간을 할애해라. 철학은 냉철하고 명료한 두뇌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른한 오후는 고전읽기 시간으로 적격이다.

3. 철학에 있어서 두툼한 지식이 확보된 이후에는 각 교재에서 논의되는 어떤 물음들에 자신의 견해를 간결하게 노트해라. 

4.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이 나오면 표시해 두고 그것을 설명해 줄 문헌들을 참조해라. 그래도 풀어지지 않는다면 선생에게 문의해라.

고전 공부법

1. 헬라어와 라틴어 고전들을 오후에 읽어라.

2. 독서 리스트를 작성하고 첫번째 잡은 책을 완독하면 다음 문헌으로 넘어가는 방식을 고수해라. 

3. 속도하지 마라. 이해력과 독서의 속도는 비례한다. 서둘러 백독하는 것보다 면밀히 정독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4. 어떤 책들은 일독이면 족하고 반복해서 읽어야 할 책들도 있다. 

5. 중요한 고전들을 읽은 이후에는 그에 관한 이차 문헌들을 참조하라. 난해한 부분들이 푸어질 것이다.

6. 노트를 준비해서 1) 주제별로 정리하고 2) 의심스런 부분을 메모하고 3) 비상한 표현들을 적어두고 4) 낯선 문구들도 수집하고 5) 기억해야 할 잠언들도 기록해라. 

7. 실습에 힘쓰라. 운문과 산문을 작문해야 한다. 가장 찬란한 사상들과 사유들과 인물들을 모방하고 변경을 가해 보라. 

8. 역사서를 읽을 때에는 지도와 연대표를 사용해라. 

대학생의 경건연습

1729년도, 영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공부법 가이드북 안에 나오는 대학교육 목적과 경건의 지침들에 관한 대목이다.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훈련을 받고 세상에서 선을 행하기 위해 대학으로 보냄을 받았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모든 것들 중에서 너의 창조주를 주야로 섬겨야 함을 기억해라. 이것은 너의 지극히 높은 지혜이며 너의 지극히 큰 행복이다. 이것이 없다면 지금부터 영원토록 너는 공고하고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고 그 다음에 배우도록 힘써야 한다. 좋은 학자가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좋은 성도가 된다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다. 진실한 사람이 배움의 적정한 공유까지 갖춘다면 사람들 중에서는 물론이고 은총과 선함이 결여된 현명한 사람들 중에 가장 고결한 학자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언제나 보다 바람직한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경건하고 진실한 삶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침들을 주의하여 준수해라. 1. 아침 저녁으로 채플에서 꾸준히 기도해라. 이것은 평범한 필수 지침이다. 기도를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젊은 학도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학업에 하나님의 은택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공적인 기도시간 이외에도 항상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을 짧게 가져라. 3. 아침마다 밤마다 기도하기 전에 신약이나 구약에서 (신약은 더 자주) 1장을 읽어라. 30분 정도 요구된다. 학업에 약간의 지장을 주는 듯하지만 거기에서 얻는 유익에 비하면 전혀 아깝지가 않다. 4. 경건과 거룩에 있어서 깨우침과 향상을 위해 절적한 시기가 주어질 때마다 읽도록 2-3권의 경건서를 늘 구비해라. 5. 절대로 선술집에 가지는 마라. 불가피한 일로 가더라도 오래 머물지 말고 마시지는 마라. 6. 유명세에 탐닉하지 마라. 극소수의 방문객만 있어도 만족해라. 7. 규정된 시간 이외에는 학내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라. 8. 학교에서 평화와 질서를 위해 상급생들 앞에서는 순종적인 예를 갖추어라. 9. 휴양을 위해 할당된 시간 이외에는 무언가에 늘 집중해야 한다. 나태를 경계해라. 

2014년 8월 17일 일요일

원수사랑 훈련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눅6:27)

원수는 정신적, 금전적, 물리적, 신체적 피해를 유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명하신다. 주님의 말씀이니 반박할 수야 없겠으나 마음의 진실한 수긍에는 이르지 못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터무니가 없어서 믿는 터툴리안 신앙(credo quia absurdum)과 이해하기 위해 믿는 어거스틴 신앙(crede ut intellegas)을 고수하려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원수가 나에게 끼치는 모든 피해보다 더 고결한 가치가 있음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우리의 몸이 원수의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면 원수사랑 행위로 증거하는 가치의 크기는 우리의 삶과 생명도 능가하는 것이겠다.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면 생명보다 귀한 것을 이 세상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느냐를 물어야 한다. 땅에 썩어 없어지는 것들이 전부라고 알고 있다면, 원수가 나에게서 빼앗고자 하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 가치를 위해서는 나의 목숨조차 상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내려놓을 수 없다면, 엄밀한 의미의 원수사랑 가능성은 없어진다.

땅에서 주어지는 것 이상의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이 나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판단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원수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한 자기부인 없이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고 내 생명보다 소중한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란 사실을 몰라도 그러하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란 사실 즉 땅에서는 도무지 제공되지 않는 하늘의 진리가 선포되고 그 진리가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명하셨다. 그렇게 앞서 살아가신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그런 원수사랑 실천으로 그 향기가 발산된다.

원수사랑, 나의 인격과 삶과 신앙의 바로미터 같다. 원수사랑 상황에 직면하면 곧장 들려 올라가는 나의 본성적인 가벼움을 때때로 목격하기 때문이다. 원수사랑 훈련은 일평생 지속될 전망이다. 마귀와 죄 이외에 다른 어떤 대상도 원수의 항목에 남아나지 말아야 하니까 마지막 호흡을 내뱉는 순간까지 그 훈련이 중단될 수 없어서다.

훈련의 강도를 기준으로 본 순서대로 자아에서, 가정에서, 회사에서, 교회에서, 국가에서, 모든 나라에서 범사에 동시에 진행되는 듯하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해야 되겠다.

2014년 8월 12일 화요일

징계와의 화친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잠12:1)

여기서 징계는 강한 책망과 거절의 언사를 의미하고 때때로 수정을 위해 처벌도 수반하는 개념이다. 징계를 싫어하는 마음의 배후에는 대체로 교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나는 고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완전주의 교만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짐승의 징표란다.

짐승은 자신의 본성을 수정하지 않는다. 불변의 본성을 따라 생각하고 움직이며 일평생 살아간다. 당연히 짐승에게 징계는 소귀에 경읽기다. 어떠한 변화나 수정도 기대할 수 없다. 짐승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갖는다는 게 어리석은 자세겠다.

그런데 징계의 거부는 금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만은 아니라는 건 상식이다. 우리 안에서도 뾰족한 지적의 목소리가 고막을 살짝만 건드려도 곧장 격렬한 불쾌와 보복의 이빨을 드러낸다.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짐승의 본성이 흉물스런 모습을 드러낸다.

변하지 않는 사람과 종종 마주친다. 좋은 것들은 한결 같을수록 좋다. 그러나 죄인의 관념과 습성에 가공할 천착을 보이는 불변의 사람들은 혹시 어리석은 짐승에 가깝지는 않은지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런 성찰의 눈으로 나 자신을 수시로 돌아보게 된다.

한 사람이 바뀌는 건 기적이다. 한 가정의 변화도 기적이다. 교회의 변화, 사회의 변화, 국가의 변화, 세계의 변화도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겠다. 대부분의 사람이 징계를 싫어하고 수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칭찬과 고수가 본성적인 기호이다.

이와는 달리 수정과 변화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사랑하는 자라고 지혜자는 규정한다. 나는 불완전한 자이고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자이고 배운 바가 내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복이라고 믿고 주를 향하여 나날이 자라가는 자가 지혜자다.

변화는 익숙하던 것들과의 이별과 생소하던 것들에의 적응을 요구한다. 당연히 거북하고 불편하다. 그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접으시라. 오늘은 나 자신에게 징계와의 화친을 권하였다. 짐승은 되지 말아야지...

2014년 8월 10일 일요일

영혼의 주림은 없다!

주는 의인의 영혼을 주리지 않게 하신다 (잠10:3)

이 구절에 대한 첫번째 반응은 눈물이다. 대체로 언어의 형태로 끄집어낼 수 없는 사연의 배설에는 눈물이 최적의 출구이다. 오늘은 뭔가 깨닫기는 했는데 적합한 언표를 찾아내지 못하여 눈물이 광대뼈 위로 미끄러 졌나보다. 암튼 비에 씻긴 하늘처럼 영혼은 개운하다.

위의 인용문은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는 기근은 있어도 영혼의 배고픔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는 지혜자의 단언이다. 그런데도 영혼이 주림으로 신음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무엇보다 주께서 말씀만 하시고서 정작 영혼의 공복을 책임지지 않으신 것이라는 해석은 금물이다. 주님은 어느 때에나 무흠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의 인격과 삶이 의에 역주행을 일삼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봄이 더 타당한 반응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깨달음이 없고 뭔가 교훈을 산출하려 해도 머리와 마음에 재료가 바닥난 영적 궁핍과 마주친다. 그때마다 나의 불의한 삶을 성찰하게 된다.

사실 위장의 기근은 즉각 감지된다. 그러나 영혼의 주림은 한참을 지나서도 감지되지 않아 영적 기갈이 무의식의 상태로 지속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감지한 것 자체가 은혜라는 이야기다. 영적 빈곤과 기갈의 인식은 영적 풍요와 윤택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방식이다. 아직도 한국은 주님의 은혜가 여기저기 감지되고 있어 기회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영혼의 주린 상태를 알고서도 영혼의 양식에 묵상의 숟가락 들어 올리기를 못마땅해 하거나 게을리 한다면 주님의 자비로운 초청도 묵살하는 무례가 아니겠나! 어떤 사람들은 몸에 비타민이 부족하면 각종 과일이나 야채가 땅긴단다. 생리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영적 영양분의 부족에는 왜 이리도 무신경한 것일까!

주님은 분명 우리의 영혼을 주리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영적 영양분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무수한 종류의 자극을 무시로 동원하는 분이시다. 나 자신의 기호를 보아도 그렇고, 친구들의 소식을 들어도 그렇고, 나라의 향방을 주목해도 그렇고, 교회의 상태를 보더라도 그 필요성이 수시로 감지된다.

특별히 교회의 무기력한 상태와 불의한 모습을 보면, 영혼의 심각한 빈곤이 교회의 광범위한 실태라는 사실이 뼈져리게 느껴진다. 주께서 의인의 영혼을 주리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어도 교회가 이렇게 진리의 핍절로 허덕이고 있다면 교회의 불의를 돌아봄이 마땅하다.

나아가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돌아가는 꼬라지, 비참의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 창궐을 보면서도 세상의 빛과 소금인 교회가 각성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진동시킬 진리의 깊은 경지를 추구하고 수혈하지 않는다면 영적 주림에 대한 신경과 감각의 심각한 마비를 의심해야 된다. 부에 대한 교회의 맹목적인 집착과 하늘을 찌를듯한 오만도 심히 의심된다.

악인의 소욕은 좌절시킬 것이라는 뒷부분 구절이 돌이키지 않는 우리의 교회에 적용될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아마도 눈물에 녹은 하나의 사연이라 생각된다. 주여, 건물과 재정은 무너져도 말씀하신 대로 교회의 영혼만은 주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2014년 8월 8일 금요일

고난도 유익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119:71)

시인은 고난 당하는 것 자체를 유익이라 하지 않았다. 고난을 유익이라 한 시인의 이유는 고난으로 인해 주님의 율법을 깨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말씀의 깨달음이 고난보다 낫다는 가치관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주의 입술에서 나오는 법은 천천의 금은보다 좋다고도 하였다. 오늘날 교회가 들으면 심히 거북하고 까무라칠 가치의 틀이겠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시인도 어리석게 살았으나 고난 이후에는 계명의 뜻과 힘을 깨달아 순종하게 되었단다. 물론 고난이 삶의 불편과 시간의 낭비와 마음의 내상만 남긴다면 그것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당연히 맹목적 고행은 우리의 지향할 바가 아니겠다. 다만 고난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는 게 고난조차 유익으로 만드는 상책이다.

고난은 내가 원하는 소원에 역행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내가 좋아하는 기호에 거슬리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기호와 소원이 외면되는 현실을 달가워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와 언어와 행실에 방향을 부여하는 그 기호와 소원이 거절되면 비로소 보이는 의미와 방향이 있다. 그것을 제공하는 샘이 바로 하나님의 율례이다.

화나고 억울하고 슬프고 힘든 것은 대체로 기호와 소원의 거절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결코 거절되지 못할 기호와 소원을 붙들면 화나고 억울하고 슬프고 힘든 일도 없어질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시고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든 일들을 성취하고 마시기에 거절될 일이 없는 하나님의 소원을 붙드는 건 최상의 지혜겠다.

시인의 경험을 보면 하나님의 기호와 소원은 주로 우리의 기호와 소원이 향방을 잃을 때에 포착되는 듯하다. 우리의 경험도 이를 지지한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끊으려고 온갖 출처모를 고난을 동원하나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깨달음의 계기로 바꾸시는 선을 이루신다. 고난 이전에는 주님의 선하심이 주어져도 깨닫지를 못하다가 고난으로 비로소 깨닫는다.

고난은 인기척도 없이 원인을 감추면서 슬그머니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로 갑절의 분노가 격발한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는 계기는 그 원인의 디테일이 가려져 있어도 중요성이 삭감되는 것은 아니다. 시련을 만나거든 거절의 격한 손사레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야고보의 권면으로 반응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가장 놀라운 승리이다. 고난도 유익으로 이해하고 처신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릴 뾰족한 묘안은 어디에도 없다. 죽음도 유익이라 하는데 아무리 간교한 사탄인들 어찌 우리를 실족케 할 재간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법을 천천의 금은보다 더 사모하고 고난조차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 자의 향기가 교회에 진동하면 좋겠다.

2014년 8월 7일 목요일

약할 때 강함이라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12:10)

바울이 받은 계시는 지극히 컸다. 이는 그의 정교한 저술들만 봐도 확인된다. 이처럼 자랑의 꺼리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단다. 이는 약함과 강함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주님의 역설적인 가르침 때문이다.

지극히 큰 여러 계시로 자만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에서 육체에 자만 억제용 가시 곧 사단의 사신을 보내셨을 때였다. 떠나가게 하려고 주님께 세번이나 구했으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교훈이 주어졌다.

일평생 바울을 괴롭히고 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가시가 바울에게 준 교훈은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하다"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약함"은 교훈을 목적으로 한 일회성 수단이 아니었다. 자신의 약함을 "큰 기쁨으로" 일평생 자랑한 것이 그 증거이다.

바울의 해괴한 처신, 사실 납득하기 어려웠다. 우리의 약함과 그리스도 예수의 강함이 어떻게 서로 상응하고 동시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실감의 경험이 없어서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 문득 그런 경험이 급습했다. 말씀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약할 때 말씀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반면 우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진리의 말씀은 그만큼 가소롭게 여겨진다. 말씀과 우리 사이에 이런 힘의 기묘한 반비례가 있는 줄 예전에는 그리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하였다.

사람이 약해지면 다른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한다. 눈이 약하신 분들은 귀가 밝으시고 귀가 어두우신 분은 눈의 관찰이 예리하다. 우리에게 어떤 약함의 가시가 있으면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신경이 자극된다. 평범하던 말씀도 천지를 진동하는 진리임을 감지하게 된다.

일평생 바뀔 기미도 보이지 않는 연약함을 내 안에서 발견한다. 그러면 주님께 원망을 쏟고 한탄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사도에게 배운다. 비록 영혼을 찌르는 뾰족한 가시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높아지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말이다.

연약함이 발견될 때마다 어떠한 말씀이 나에게 위력을 발휘하고 꿀보다 달콤한 진리의 어떠한 맛을 경험하게 될 것인지를 기대하게 된다. 개인의 성향이든 건강이든 가정의 문제이든 모두가 우리로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여 마련하신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없는 날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런 연약함 속에서 강하게 발휘되는 말씀의 위력을 마음껏 즐기라고 권면하고 싶다.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항구적인 문제의 삽바를 하루종일 거머쥐고 씨름하는 분들이 적지 아니하다.

바울은 "큰 기쁨으로"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다. 주님의 강함이 거기에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이다. 자아의 지경을 넓혀 공동체로 여기고 나 자신을 그 몸의 한 지체로 여긴다면 해결되지 않는 교회의 문제도 주님의 강함이 발휘되는 출구라는 이유로 감사할 수 있겠다.

주변에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나 사건이 있더라도 그런 확대된 연약함 속에서 발휘되는 주님의 강함을 큰 기쁨으로 향유하는 믿음의 거인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면 좋겠다.

2014년 8월 6일 수요일

믿음은 승리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다 (요일5:4)

여기서 "이김" 혹은 "승리"의 헬라어 원문은 "비케"(νίκη)이다. 어떤 학자는 "비케"를 "승리하는 수단 혹은 방편"으로 번역한다. 내가 보기에는 두 번역이 다 가능하다. 믿음은 승리의 방편인 동시에 승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세상을 이기는 삶,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나 간절히 소망하는 하나님 자신을 인정하며 사는 삶이다. 그분 때문에 승리할 수밖에 없어진다.

문제의 가까운 원인들이 우리의 시야를 덮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해결의 실마리가 안보인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그 답답함과 숨막힘은 사실 가까운 원인들 때문이 아니라 그 원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까운 원인들의 보이지 않는 원인이신 하나님을 보면 숨통이 트이고 가슴이 시원하게 뚫어진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비록 사태는 여전히 암담해도 그 사태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문제일 경우,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는 더욱 선명하고 섬세하다. 이는 나의 죄와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죄를 더 짓자? 그럴 수 없느니라.

믿음은 방편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승리이다. 헤어나올 수 없는 역경의 늪에 빠져보면 안다. 이런 경우에는 해답이 없다. 해결의 기미도 찾아보기 어렵다. 부르튼 입술에는 좌절의 한숨만 연거푸 출고된다. 믿음이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승리인 경우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답답해도, 땅을 꺼뜨리는 한숨이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런 상황이 변화될 일말의 조점도 안보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여전히 승리할 수 있다. 믿음이 승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게 승리이다.

승리의 근거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상황의 변화에서 찾으려는 '유혹'이 있다. 이는 믿음을 승리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유혹이다. 그러나 믿음은 또한 그 자체로 승리이다. 상황의 호전이 수반되지 않더라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면 그 자체가 승리이다.

믿음은 그 자체로 승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승리는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 승리를 방해하는 유일한 원흉은 우리 자신의 불신이다. 믿음은 상황을 바꾸는 마술봉이 아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이고 승리이다.

항구적인 기도의 이유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신앙의 나이테가 한겹씩 늘어날 때마다 이 말씀의 질감이 달라진다. 기도는 삶에서 어쩌다가 만나는 환란 수습용 비품이 아니라는 사실이 절감된다. 기도는 삶의 모든 순간들을 위해 '명하여진 은혜'이다. 한 순간도 기도와 무관할 수 없기에 기도는 쉬지 말아야만 한다.

일상의 모든 소소한 일들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혹 해결된 일들이 있더라도 나의 능과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지극히 소소한 일조차도 없다는 것, 이는 신앙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실이란 깨달음에 젖어든다. 심지어 존재하는 것도 그러하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를 이것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표현이 있을까? 존재하고 살고 기동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인간의 실존은 한번도 변경된 적이 없다. 누구도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살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한 순간도 기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겠다. 기도 없이는 움직임도 가능하지 않다. 그런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유쾌하고 즐겁지는 않으나 나 자신의 처한 본성을 직시할 수 있어서 유익이다. 죽음 앞에서는 그 유익의 크기가 갑절이나 더하겠다.

지혜자는 우리에게 어려운 때에 숙고를 권하였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누구인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지를 환란의 때보다 더 선명하게 확인하는 기회는 많지가 않다. 타인의 고난을 진실하게 이해하는 최고의 준비도 환란의 때이겠다.

시간은 반복되지 않고 매 순간마다 만나는 경험도 동일하지 않다. 하나의 경험이 전달하는 교훈의 색조와 결은 고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포착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다. 요즘 그런 숙고의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생의 고유한 순간들, 놓치고 싶지가 않다.

나에게는 이것이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명령문을 대할 때마다 강요나 억압이 아니라 영혼의 소생과 갈등의 종식과 눈의 밝아짐을 경험한다. 성경은 이렇게 은혜로운 명령으로 충만하다. 은혜 베푸시고 싶으셔서 '안달'이 나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014년 8월 3일 일요일

징계를 인내하라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12:7)

징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지적한 말씀이다. 징계는 하나님이 아들로 우리를 대우하는 것이기에 참으란다. 참을 때에 징계의 고난은 연단이 되기에 참으란다. 아들을 고난으로 연단하는 이는 아버지다. 그런 연단과 훈련이 없다면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 징계하는 분은 공포의 아버지가 아니다. 징계의 채찍을 든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는 법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고통의 농도는 짙어진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 고통의 농도도 측량을 불허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성자의 반열에 곧장 등극하는 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들은 서서히 성장한다. 그런 성화의 필수품은 징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를 가리키기 위해 헬라어 "παιδεία"를 사용한다. 교육이나 훈련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징계는 파괴를 겨냥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가 밝혔듯이 거룩에의 참여를 돕기 위해서다. 즉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다. 물론 징계가 당시에는 즐겁지가 않다. 그러나 징계로 연단된 사람은 의의 평온한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각자가 풍기는 고유한 향기를 경험한다. 그들 중에는 시기심이 생길 정도의 안정된 의가 느껴지는 도전적인 분들도 있다. 처음에는 부요한 가정에서 좋은 부모 밑에서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삶의 기구한 사연을 들어보면 연단의 결과라는 사실이 금새 확인된다. 인간은 원래 미련하다. 이것을 지혜자는 아이들의 마음에 미련함이 있다는 말로 묘사한다. 훈련이 없으면 죽는다고 말하고 우매의 충만 속에서 길을 잃는다고 단언한다.

징계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인내이다. 우리를 아들로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의 증거이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즐겁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을 뒤덮은 미련함이 벗겨지고 삶에 박힌 우매함이 제거되기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된다. 성화는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 아들의 신분 재확인과 거룩에의 참여와 의의 평강한 열매라는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스런 징계와 연단은 과연 경한 것이겠다. 그리고 고통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다. 지나간다.

본문에서 이런 의미도 생각해야 한다. 징계는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이 없이는 파괴의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징계는 분명히 부모의 몫이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이 없는 분노의 출구로 동원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교사도 학생을 징계해야 하겠으나 부모의 사랑으로 그리해야 한다. 학생의 파괴가 아니라 변화와 성장을 원한다면 아비의 심정으로 눈물이 묻은 사랑의 채찍을 사용해야 한다. 목회자도 동일하다. 성도를 권징해야 한다. 그러나 재판관의 차가운 판결이 아니라 아비의 마음으로 파괴가 아니라 성화의 방편으로 그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