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8일 목요일

사랑의 부재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5:42)

주님의 육안으로 걸러진 경험적 지식이 아니다. 만세 전부터 만물을 벌거벗은 것처럼 직관하고 계신 분의 가슴 철렁한 진단이다. 유대인 및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이 없다신다. 에누리와 군더더기 없는 직설이다. 불신앙의 깊숙한 정곡이 움푹 찔린 느낌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의 궁극적인 차원은 사랑이다. 사랑은 주종관계, 군신관계, 계약관계 따위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인격적 관계의 극치를 일컫는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면서 그걸 찾으신다.

헌데, 주님의 논법이 특이하다. 사랑을 감상이나 최면이나 몰입이나 열정이나 도취라는 내적 정서의 과잉과 연결하지 않고 느닷없이 모세와의 연관성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하나님 사랑의 부재 고발하는 일을 모세의 몫으로 돌리신다. 이유는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님도 믿었을 것이라는 게 주님의 설명이다.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어찌 내 말을 믿겠냐'며 성경의 통일성과 설득의 우선성 문제도 언급한다. 유독, 하나님 사랑의 부재가 말씀의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논지에 매료된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모세의 기록을 믿는다. 이는 모세의 기록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한다는 유추도 가능하다. 성경이 믿어지지 않는데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가 궁금하고 그런 분을 향한 사랑의 실체가 또한 궁금하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지 않은 사랑의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은 사람의 가공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다.

주님은 하나님 사랑의 부재만 꼬집으신 게 아니다. 그것을 말씀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명하며 계시에 근거한 사랑의 본류로 우리를 이끄신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우선적인 사랑은 성육신을 통해 비로소 화들짝 계시된 게 아니다. 이미 모세의 기록으로 드러났고 동일한 계시의 판명성이 최고조에 이른 것이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과 그를 향한 사랑을 임의로 상상하지 않아도 되어서 감사하다. 친절하고 은혜로운 계시로 검증할 수 있어서 가상의 주관적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되어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는 질문은 일평생 던져야 하고 일생을 통해 답변해야 할 신앙의 본령이라 하겠다. 그러니 주야로 성경에 전무할 수밖에...

2013년 2월 18일 월요일

잼난다, 중세신학

수개월간 중세에 빠졌었다. 정말 어두운 시대였다.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도 어두울 수 있었을까? 대략 선지자의 지혜와 선견자의 총명이 가리워진 시대였다. 그러나 주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진리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소수의 선각자를 세우셨다. 그들의 외침에는 물론 시대에 적응된 요소들이 여전하나 그래도 그 시대의 무지를 일깨울 정도의 섬광은 발하였다. 

주님의 어법이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요한복음 10:26)

예수님의 언사가 냉혹하다. 다만 유대인 몇 사람이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시는가 그리스도 맞다면 밝히 말하라'고 했을 뿐인데 곧장 '내 양이 아니라'는 신분 차별적인 격문을 토하시며 소통 단절적인 국면으로 직행했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른다'며 '따르지 않는다'는 가시적 결과에서 소급하여 '내 양이 아니라'는 근원을 진맥하는 듯한 소위 '실천적 삼단논법(syllogismus practicus)' 적용도 불사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지를 시공간적 인과 의존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되겠다.

본문은 분명히 '믿지 아니한 것을 보니 내 양이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같은 주장과는 판이한 입장을 표명한다. 즉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거다. 원인과 결과는 동일하나 인식의 순서가 뒤집혔다. 인간의 지각은 가시적 결과를 보고 비가시적 원인을 추정하는 소급법을 선호하고 그런 인식론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주님은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아시되 원인이 결과에 앞선다는 논리적 순서도 존중한다. 칼빈의 표현처럼 '선택은 믿음에 선행하나 그 선택은 믿음에 의해 식별된다' 식의 인지적 한계를 그에게 돌려서는 아니된다.

허나 우리는 결과를 보고 근원을 지각한다. 믿음을 보고 주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특정한 시점에서 믿음을 관찰하고 선택을 추정하는 것이어서 오류 가능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또한 한 사람의 일대기를 살폈다고 할지라도 추정의 부정확성 때문에 백성의 여부를 단정하고 염소와 양으로 편가르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겠다. 우리의 눈으로는 원수로 분류된 사람들도 사랑과 축복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이미 인간적인 판단의 불완전한 상대성을 지적한 셈이다.

하여 예정을 근거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건 무례하다. 주님의 심판석에 불법적인 착석을 단행하는 도발이기 때문이다. 예정이 구원의 견고한 토대요, 인간의 어떠한 공로도 자랑의 고개를 내밀지 못할 겸손의 빙거요, 변덕스런 상황 속에서의 근원적인 위로요, 복음의 불모지를 기경함에 있어 끝까지 지치거나 좌절하지 않을 마지막 소망의 이유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예정론이 구원의 유무를 사람이 가타부타 규정하는 식별용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심해야 하겠다. 엄밀한 의미에서 주께서만 그의 백성을 아신다.

하여 '내 양이 아니므로 너희가 믿지 않는다'는 냉담은 당신의 백성을 아시는 주님만의 고유한 어법이라 하겠다. 우리 편에서는, 내가 믿고 있다면 당신의 양으로 창세전에 택하신 주님의 뜻과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돌리는 게 도리겠다.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에서 비롯되지 아니했다. 믿음도 그러하고 구원도 그러하다. 본문은 염소에겐 멸망의 빙거요 양에게는 구원의 빙거다. 인간의 명의로는 발설하지 말아야 할 주님만의 고유한 언술이다. 

2013년 2월 17일 일요일

저스틴의 철학적 전향

저스틴(Justinus Martyrus, 100-165)은 진정한 신인식을 통해 획득할 행복을 추구하는 열정에 이끌려 철학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한 인물이다. 학문적인 탐구의 시발점은 스토아 철학이다. 그러나 신개념의 부실을 발견하고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철학으로 이동한다. 결국 플라톤 철학에서 정신의 비물질성, 이데아에 대한 직관, 직접적인 신인식의 출구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친 기독교 노인과의 대화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이 플라톤의 학문적 지식보다 월등함을 확신한다. "당시 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예언자와 그리스도, 동료 인간들에 대한 사랑으로 말아갔다. 나는 어떤 노인의 가르침을 거듭해서 사려한 결과, 이것이 참되고 신뢰할 수 있는 유익한 철학이라 판단하여 나는 '철학자'가 되었다 (Dialogus 8:155ff)."

철학에서 기독교로 전향한 인물이 다시 스스로 철학자가 되었다고 고백한 저스틴의 말이 모순처럼 여겨진다. 철학과 종교를 구분하는 근대 이후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의 기독교는 그리스 로마의 철학적 전통과 내용상의 차이는 있지만 동일한 목표를 가졌다. 즉 바르고 좋은 삶을 추구하는 철학자적 탐구(philosophia)의 하나였다. 기독교는 로마의 전통적인 신숭배를 거부하는 철학의 한 분파라고 여겨 당시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를 전통 거부하는 자 혹은 무신론자 딱지 붙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저스틴의 눈에 '철학'은 인간의 이성과 사유를 근거로 바른 진리에 접근하는 모든 시도를 가리킨다. 철학과 종교가 대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성을 통한 진리인가 아니면 신앙을 통한 진리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중세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기도 하다. 중세사상 문제는 신앙과 이성의 대립이지 종교와 철학의 대립은 아니었다. 그런 오해는 근대 이후의 입장일 뿐이다. 이상을 고려해서 말하자면, 저스틴은 스토아 및 그리스 철학에서 기독교 철학으로 전향한 인물이라 하겠다.

클라우스 리젠후버, 중세사상사, p.20-21 참조.

주어지신 하나님

하나님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다 (사도행전 17:25)

우리에게 있는 것들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 본문은 그 주어진 것들의 구체성을 보여준다. 아무리 고귀한 가치로도 교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생명과 그 생명이 주어지고 있다는 의존성을 보이는 호흡과 그 생명을 지탱하는 제반 환경으로 모든 만물을 하나님이 친히 주셨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언제나 행동은 행동자의 속성을 보이는 증거이다. 그래서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한번도 중단됨이 없이 지금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라는 속성의 표상이다. 주어진 대상보다 주신 자가 관심의 일순위다. 

둘째,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생명과 호흡과 생존의 환경을 주셨으나 그것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선물에 비하면 아직까지 비유나 서곡에 불과하다. 잠깐 있다가 썩어 없어지는 변동될 것들은 의미만 전달하고 소멸되고 마는 속성을 지녔다. 그런 속성이 우리를 일시적인 선물의 영원한 의도로 소급하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지실 '지극히 큰 상급' 즉 최고의 선이 되신다는 거다. 언제든지 주어진 것이 주신 분보다 크지 못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선물은 하나님 자신이란 얘기다. 이 두 가지는 성경 해석학의 핵심적인 문법이다. 문법대로 읽어야 성경이 읽힌다. 내 편에서 가늠된 '형통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해석학은 늘 의미 왜곡의 원횽이다.

하나님 편에서 관찰되는 형통은 영원하고 불변하고 무한하고 전능하고 전지하고 편재하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바 되셨다는 것에서 찾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그에게 돌리는 게 가능하다. 우리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만물이 그에게서 비롯되고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간다 고백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주어지실 하나님 계시의 정점이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에 이른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바 되시고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줌의 신비'가 구현된다. 바빙크가 이런 사실을 잘 표현했다. 

"그리스도 예수는 선포되신 하나님, 우리에게 주어지신 하나님이 되신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 자신을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 따라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을 처음 말씀하신 순간부터 그 자체 안에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신다는 충만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자신들을 그에게 줄 수 있도록 자신을 주시었다." Bavinck, Magnalia Dei, 15-16.

2013년 2월 16일 토요일

여호와의 아름다움, 그 실상은?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27:4)

다윗이 하나님께 청구했던 단일한 소원이다. 곧장 흥분된 건축재료 수집에 돌입했다. 허나 성전완공 소망은 그의 손이 전쟁에서 흘린 무수한 생명의 피 때문에 거절된다. 그러나 그 거절은 다윗에게 절망이나 좌절과는 무관했다. 오히려 다윗이 구하지도 않았던 보다 고귀한 것을 찾고 구하라는 반전의 계기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다'는 바울의 기록처럼, 다윗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주께서 친히 조성하신 자기 자신이 성전이며 그 안에 주께서 좌정하고 계심을 깨달았을 듯하다. 주님을 뵈려고 인위적인 벽돌 무더기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되었다. 특정한 예배시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무시로 어디서든 여호와의 아름다움, 앙망할 수 있었다. 다윗은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사모할 다른 공간이나 시간대에 제한될 이유가 없었겠다. 

거절은 언제나 도약의 비상구다. 사람의 소원은 그 성취가 오히려 재앙일 수 있음을 지혜자가 잘 말하였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여기서 사망은 위엣 것이 아니라 '땅엣 것'과 결부되어 있음에 분명하다. 우리의 생각과는 하늘과 땅의 격차처럼 다른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소원을 파고드는 방식은 결코 정상적일 수 없다. 대체로 그분이 우리를 거절하고 외면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한다. 당연히 삐지거나 불평의 거품 물 일이 아니겠다. 오히려 거절의 차가운 벽에 부딪히는 때가 사람의 두터운 욕망을 벗어나 생각에 지나도록 높은 가치의 세계로 진입하는 문이 열리는 때이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가 오히려 임박한 재앙의 때이기도 하다. 

사실 다윗의 유일한 소원은 아들에게 넘어갔다. 솔로몬이 성전건축 위업을 달성했다. 무엇이든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했고 마음의 즐거움도 묵살한 적이 없었던 무제한의 풍요까지 구가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솔로몬 평가는 냉담했다. 들에 방치된 백합화의 영광보다 못하단다. 형통의 대명사인 솔로몬의 영광이 고작 언제 꺾여 아궁이에 던져질지 모를 야생화 수준의 영광도 안된다는 주님의 언사는 마치 형통의 대로만을 골라 질주하던 인생의 환도뼈에 헤비급 일격을 가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앙망하며 그분의 영광을 사모하는 일은 근사한 건물이 필요하지 않다. 장미빛 진로가 뚫려야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의 부재가 보다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는 환경일지 모르겠다. 이는 주께서 진정한 의미의 앙망과 사모로 이끄시는 준비가 형통과 정반대의 내용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드는 이유기도 하다. 

그분의 아름다움, 그 영광을 사모하는 마음, 다윗이 경험한 그 세계와 마음을 맛보고 싶은 주말이다...

이단 구분법

귀한 교수님 한 분에게 이단을 분별하는 괜찮은 준거틀을 하나 배웠다. 로마서 1-2장과 지극히 상식적인 '존재의 사슬'을 도취시킨 사상들은 모두 이단이란 관점에 기초한 분류다.

1. 하나님을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
2. 인간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
3. 하나님을 사물 혹은 정신으로 간주하는 것
4. 사물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
5. 인간을 사물로 간주하는 것
6. 사물을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

2013년 2월 14일 목요일

바빙크의 '신앙'이란?

믿음은 진정한 자유의 출구이다. 바빙크의 말을 인용한다.

"신앙은 전인(ganschen mensch)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의 어떤 변화 및 중생과 의지의 변화도 전제한다. 어떠한 사람도 원하기 전까지는 믿지 아니한다 (Nemo credit nisi volens). 지식은 강제력을 발동한다. 아무도 수학적 명제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믿는 것은 자유롭다. 그것은 지극히 고결한 자유의 행위이다. 이는 가장 깊은 자기부정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축복을 지식과 결합하지 않고 신앙과 결합한 것은 주께서 강요하지 않고 강요하려 하시지 않았음의 증명이다...

신앙은 또한 의지의 지배(imperium voluntatis)가 아니다. 사람은 하고자 하는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소위 진리를 통찰하지 못할 때, 의지가 어떤 것을 진리로 받아 들이도록 의식에게 명령할 수 없어서다. 믿는 것은 임의적인 것도 아니고 맹목적인 것도 아니다. 믿음은 의지의 변화를 전제한다. 실행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뒤따르기 때문이다 (operari sequitur esse).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성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인식(vrije, spontane erkenning)이다."

Bavinck, Grereformeerde Dogmatiek, I.153.561-2.

사람의 계명에서 하나님 자신에게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29:13)

본문에서 책망의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들의 하나님 존경은 자타가 공인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저울추로 가늠된 그들의 존경은 고작 입술 두 짝의 무게였다. 그들의 여호와 경외가 사람의 계명을 따라 학습된 것이라는 동일한 의미의 다른 설명이 사태의 밑바닥 실상을 뿌리부터 까발리는 듯하다. 뿌리의 문제였다. '사람의 계명'이 여호와 경외의 뿌리가 된다는 건 경외의 최종적인 근원을 인간에게 둔다는 말이겠다. 그런 종류의 경외는 아무리 뜨거운 열정과 정교한 지성과 불굴의 의지가 화려한 들러리로 서더라도 여전히 입술의 꾸며진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생계의 물동이도 내던지며 복음을 증거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라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다소 냉담한 반응의 이유도 신앙의 뿌리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였다. 존경과 경외가 입술에 머문 자들에게 주님은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명철이 가리워질 것이라'는 '가장 기이한' 조치를 취하실 것이란다. 사실 본문을 묵상하기 이전에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는 선행구의 요염한 뉘앙스에 눈길이 끌리었다. 보이는 게 없어진다. 여기에서 초래된 '취함'과 '비틀거림' 현상의 이유는 포도주나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주께서 그들에게 부으신 '깊이 잠들게 하는 신' 때문이다. 가까운 원인은 독주나 포도주일 수 있겠으나 궁긍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진노였다.

결국 모든 묵시는 그들에게 유식자든 무식자든 '마치 봉한 책의 말'이었다. 묵시는 선포되나 깨달음이 없는 무지의 시대였다. 백성의 눈과 머리로 비유되는 선지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선견자의 명철이 가려진 시대는 진정한 의미의 암흑기다. 동시에 주님만이 땅의 그 어떠한 것도 스스로 벗길 수 없는 두터운 캄캄함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이 가장 선명하게 증거되는 때이기도 하다. 사람의 교훈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경외는 그 경외의 뿌리가 인간에게 있다는 의미와 인간의 오류가 발동하면 언제든지 경외의 내용조차 왜곡될 소지가 있다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전자의 극복은 후자의 위험성을 해소하는 열쇠다. 진리의 토대가 견고해야 흔들리지 않는다.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라 할지라도 인간 개개인을 진리와 신앙의 출처로 여겨 이사야나 바울이나 요한을 높이는 식으로 이사야파, 바울파, 요한파를 추구하는 신학은 금물이다. 물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한다는 구절의 정당한 제어를 받아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근원을 하나님께 돌리는 경건의 기본기가 흔들리면 '교주'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설교자로 하여금 교'주'의 맛에 취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에 일조하게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영광을 적당한 비율로 목적과 수단에 고루 분배하는 개념이 아니다. 온전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게 돌아오는 보상의 국물 한방울도 없다면 복음화도 접겠다는 내색할 수 없는 반응이 성깔을 부릴 일이겠다. 그러나 사실이다. 보상적인 영광의 국물이 한방울도 없다. 그래서 이 길이 좁고 협착하다. 주님만이 전부여야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신앙의 궁극적인 뿌리로 소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뜨끔한 경종의 소리가 울린다. 궁극적인 하나님께 이르지 아니하고 사환에 불과한 어떤 지도자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제도의 복장만 갖추면 로마 카톨릭이 된다. 개신교 내에서는 아직 제도화의 움직임이 감지되진 않는다. 그러나 제도의 유무와는 별개로 은밀한 추앙의 짜릿한 맛에 중독되어 취함과 비틀거림 현상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출되는 경우가 교회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여전히 허술한 인간의 법 앞에서의 평등보다 더 철저한 엄밀함이 요구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을 교회에서 허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세상의 입술로 지적되는 지경까지 가서는 아니될 일이겠다. 이를 위해서는 징계가 교회를 정화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 트럭 분량의 천인공노 범법을 저지른 악의 군상들도 진정으로 돌이키면 언제든지 사랑으로 품어주는 용서를 요구하는 장치이다.

인간을 의지하면 그 대상이 선지자나 사도라도 주님은 그들의 지혜와 총명을 가리신다. 주변에 지혜와 총명이 번뜩이는 분들이 보인다. 아직은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겠다.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겸손을 생각한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19:12)

여호와의 율법을 즐기며 주야가 따로 없을 정도로 묵상하던 다윗은 언어가 없고 소리가 없어도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여 온 땅에 통하고 세계 끝까지 이르기에 사람의 증언에 의존하지 않는 말씀의 자율적인 선포가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눈을 밝히고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 말씀의 당도는 그에게 송이꿀과 비교할 수조차도 없었겠다. 그러나 말씀은 정죄의 검이기도 했다. 양날을 가졌음도 간과할 수 없겠다. 인간의 숨은 허물을 영혼의 차원까지 감별하고 도려내는 진단과 처방 때문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도 교만의 뻣뻣한 목을 떨굴 수밖에 없는 이유겠다.

그렇게도 달콤한 말씀과의 열애가 밤낮을 불문하다 보면 형언할 수 없는 영혼의 즐거움과 더불어 뾰족한 소름이 온 몸에 오르도록 육중한 분량의 허물이 내 안에 감추어져 있음도 경험하게 된다. 일곱번 단련한 은보다도 더 순결하고 정미하고 완전한 말씀의 빛으로 감지된 죄이기에, 당연히 사회법의 헐렁한 그물망에 걸러지는 발각된 과오와는 질과 분량에 있어서 비교를 불허한다. 보이는 허물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다윗은 죄의 심각한 실상을 아무도 능히 깨달을 수 없을 정도라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도 공감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겠는가."

자신도 알고 있는 약점의 덜미를 잡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반응이 가능하다. 첫째, 그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다. 둘째, 평생 그 사람 앞에서는 작아지는 것이다. 둘 다 낯설지 않은 현상이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흉악한 살인과 비열한 아부의 숨막히는 충만이 이를 입증한다. 문제는 자신의 의식적인 검열도 여과한 허물에 대해서는 양심을 떳떳하게 걸 정도로 판이 커진다는 거다. 대체로 끝장을 볼 결의에 차오른다. 불쾌한 하나님의 존재마저 지울 태세다. 그러나 양심도 시뻘겋게 달군 죄의 인두로 무수히 지져지면 무뎌진다. 우리의 떳떳함은 주로 그렇게 무뎌진 양심에 기초한다. 이 지점에서 말씀의 엄밀성과 필요성이 대두된다.

말씀 앞에서 다윗은 언어와 소리로 번역되지 않을 정도의 은밀한 죄가 자신에게 무더기로 감추어져 있음을 깨닫고 벗어나게 해 달라고 몸부림을 친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었고 전쟁터에 승리의 깃발만 꽂았던 다윗이라 할지라도 겸손의 무력한 허리를 구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말씀의 역사였다. 이는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진 죄인의 은밀한 추함을 보아서다. 자신의 의식조차 감지하지 못한 허물의 실재를 말씀의 빛 앞에서는 부인할 수 없어서다. 이는 전쟁의 부산함에 휩쓸려 망각했던 밧세바와 우리야와 관련된 단회적인 불륜과 살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간의 총체적 본성을 후비는 성찰이요 자각이라 하겠다.

오늘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적당히 꾸며진 겸손과 말씀의 신적인 엄중함 앞에서의 순전한 겸손이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 된다. 최소한 나 자신에 대해서는 전자의 겸손에 안주하고 그런 류의 겸손을 빙거로 자만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다윗을 통해 투영된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 인간이 스스로 측량할 수도 감별할 수도 없는 본성적 죄의 쾌쾌한 수치를 스스로 뒤집어 쓰신 그분의 겸손을 다시 생각한다. 

일상이 감사의 열쇠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이는 주께서 나를 붙드셨기 때문이라 (시3:5)

익숙한 일상에서 의식의 손을 떼는 건 반복의 나른함 때문이다. 일상의 반복성은 몸이 기억한다. 정신줄을 몽롱하게 놓아도 생존에 아무런 지장이 없어진다. 물론 성경을 읽다가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고 범사에 감사함이 마땅하단 뉘앙스와 마주치면, 얼른 거두었던 의식의 촉수를 애써 일상으로 내뻗는다. 그러나 이벤트성 감사 탐색도 잠깐이고 금새 쉬 무뎌진다. 그러기를 일상처럼 반복한다. 일상에 대한 나의 이러한 무감각과 푸대접의 심각성은 다윗이 본문에서 보란듯이 고발하고 있다. 신앙의 가벼움은 주로 일상에서 들킨다. 물론 회복의 좌소도 철야나 수련회가 아니라 일상이다.

다윗에게 침소는 무덤이요 잠은 죽음의 연습이다. 침소는 모든 무장이 해제되는 곳이고 잠은 정신의 모든 의식적인 활동의 중단이다. 죽음과 닮았다. 그래서 잠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자기부인 연습이다. 바울과 방식은 달랐지만 다윗도 날마다 죽었던 사람이다. 물론 그렇게도 많은 대적들의 시퍼런 칼날이 인기척도 없이 침소를 출입할지 모를 당시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멀쩡하게 깨어나는 것이 다윗에겐 기적이요 감격일 수도 있었겠다. 비록 그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깨달음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인간의 자고 깨어남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의 신실한 손길과 은혜를 깨닫는다. 다윗이 지불한 비용으로 알려진 진리의 내용을 우리에게 동일한 상황이 재연되지 않더라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큰 은혜겠다. Thanks be to David!

사실 본문에서 읽어지는 하나님과 시인 사이의 관계는 내 안에 질투가 불끈거릴 정도로 친밀하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을 분이겠다 싶다.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맺어진 업무상의 관계성이 아니라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 감지되는 관계여서 더더욱 감미롭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험하는 다윗의 신앙은 이벤트가 아니었다. 밤마다 생명을 의탁하고 아침마다 부활에 준하는 감격으로 하나님을 인정했다. 일상의 기초가 튼튼한 신앙은 무너지지 않는다. 훤칠한 설교와 두터운 집필로 명성이 하늘까지 이르는 분들도 일상의 신앙적 지반이 부실하면 훨씬 더 치명적인 추락을 각오해야 한다. 일순간에 무너진다. 장사가 따로 없다.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저울추에 일상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의 솔직한 중심이 꾸며지지 않은 현장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아침이 밝았는데 심장이 여전히 박동하고 있다. 주께서 졸지도 않으시고 밤새 일하셨나 보다. 일상을 감사의 샘으로 여긴다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감사가 회복인데 일상이 그 소스였다.

2013년 2월 10일 일요일

계시 의존적 사색과 문자주의 질문을 접하고

황은영 전도사님, 아래의 신명기 8장 3절 묵상은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신 성도님들 모두가 이해하실 수 있도록 쓴 글인데 제 페북 담벼락이 휘청거릴 정도로 버티기 힘든 묵직한 물음을 주셨네요...ㅎㅎㅎ

1. 아래의 포스팅 묵상은 문자주의 개념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쓴 글입니다 (^^). 계시 의존적인 사색과 문자주의 사이의 연관성 문제가 황 전도사님 질문의 요지인 듯합니다. 창세기 1장의 하루길이 논쟁은 전도사님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구요. 현문우답 가능성을 무릎쓰고 제 생각을 몇 자 적습니다.

2. 라무스가 관뚜껑을 걷어차고 일어날 정도로 현란한 작금의 환원주의 분할과 물리학의 각종 상수들이 마지막 임계점에 이르는 '절대세계' 탐구가 저에게 준 인상은 절대적, 총체적 회의주의/상대주의 사상이 과거에 어떤 대상이나 주체에게 돌렸던 회의주의 개념과는 아주 단절적인, 우주 질서의 비밀을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는 절망의 벽을 이제는 비가역적 사실로 입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수학을 조금 배웠지만 과학은 언제나 자연의 거절에서 시작되고 존재감을 얻습니다. 제가 역사신학 공부하며 느끼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관한 주님과의 질의응답 이후에 빚어진 욥의 정직한 고백처럼 각 시대의 최고급 지성이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문명의 꽃도 시들고 무성한 과학의 잎사귀도 마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이사야의 기록은 오늘날 최첨단 과학의 정밀한 활동이 봉착한 그 벽만이 아니라 오고오는 모든 세대들의 지적 단명에 대한 항구적인 예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원한 말씀을 편들지 않는 모든 것들은 마치 베드로가 영감의 살을 조금 추가한 증언처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전포괄적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입니다.

3. 창세기 1장의 하루길이 개념은 히브리서 기자가 창조와 '칠일째' 날을 논하면서 창세기의 하루를 신약시대 당시 유대인의 하루 개념과 아무런 차이점 없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24시간과 다르게 생각할 보다 설득적인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제 생각이 옳다면, 이로써 애매한 구약의 하루길이 난제를 신약의 명료한 사도적 기록이 풀어준 셈입니다. 사실 '태양력의 하루' 개념도 굳이 태양이 만들어진 이후로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빛이 태양 이전에 있었듯이 빛과 어두움을 임의로 주관하는 분이 태양 이전에 하루의 길이를 정하시고 그 길이에 맞도록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설정한 수순으로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두개골 바깥을 한 발짝도 출입하지 못하는 뇌가 밖을 보려고 소통의 눈을 형성하고 들으려고 청취의 귀를 형성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오늘날의 최근 과학적 가능성 추정과도 그리 충돌되지 않아 보입니다. 만약 창세기 1장의 하루 길이가 수천년 혹은 수억년일 것이라는 가정이 옳다면 아담과 하와가 자녀를 가지게 된 것도 수천년, 수억년 이후의 일일 것이구요. 동일한 가정을 취한다면,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시고 수천년 혹은 수억년 이후에 쉬신 셈입니다. 물론 영원하신 하나님의 어떠함을 시간에 근거해서 해석학적 족쇄를 채우는 게 무례한 일인지라 조심스런 면도 있지만요. 창조의 6일만 특별한 시간으로 본다거나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과 이후의 하루단위 길이가 다르다고 하는 의견도 그렇지만 그런 견해를 산출한 (소위 과학적) 전제들도 제 눈에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4. '문자주의' 용어가 교부나 종교개혁 인물들이 사용했던 그 시대 문맥 속에서의 의미와 의도를 다 살려내지 못한 채 통용되고 있어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문자적 의미는 성경 텍스트의 역사적 의미와 신학적 의미와 도덕적 교훈과 그리스도 발견과 연합 등과 같은 임의적인 구분들 중에 어떤 특정한 것과의 배타적 동일시가 아니라 그 모두의 유기적인 포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믿음의 선배들도 설명상의 필요 때문에 언어적 구분을 활용하긴 했지만 하나를 택하면 다른 것들을 버리는 식의 단선적인 해석학을 문자주의 차원에서 옹호하진 않아 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최소한 저에게는 계시 의존적인 사색에서 문자적인 의미가 가진 비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모든 문자가 의미론적 유기체로 결합되어 있고 애매한 부분이 보다 명료한 부분에 의해 벗겨지고 벗겨지되 의미의 범위는 다른 성경 텍스트에 의해 제어를 당하는 식으로 도달한 의미의 성경 전체적 포괄성이 문자적 의미에 담겨 있다고 보는 탓입니다.

5. 황 전도사님, 저도 잘 모르는 분얍니다. 그냥 익숙한 개념의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틀에 갇힌 노예처럼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늘 성경을 읽고 묵상을 적습니다. 귀한 질문 감사 드리며 우답을 닫습니다...^^

2013년 2월 9일 토요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신8:3)

음식의 섭취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은 기발한 비유였다.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비유를 생략하고 본질만 취하는 취사선택 문제와 무관하다.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본질의 중요성은 비유의 필연성이 강화한다. 음식은 생존의 필연이다. 인간은 생존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하고 조달하는 자존성이 없는 본성상 의존적인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 먹어야 산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도 생존의 그런 절박성과 결부되어 있다. 삼시세끼 식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존재가 보존되고 생존이 유지되고 있는지의 근원을 알고 하나님께 마땅한 감사를 드리는 격식이다.

음식은 입으로 섭취한다. 적당한 소화용 운동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섭취한다. 그에 어울리는 소화용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 음식을 섭취하면 어디까지 음식이고 어디까지 나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구별은 있는데 분리는 불가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나 사이에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은 분명히 구별되는 것인데도 막상 선택의 기로에 서면 구분선이 모호하다. 이유는 주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시되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기 때문이다. 말씀과 우리의 관계는 명령이 밖에서 눈을 부라리며 준행자의 행실을 노려보는 식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말씀이 '밖에' 있으면 아직은 강제요 강압이다. 밥상의 기름진 여유와 풍요를 떨면서 맞이하는 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건조한 명제이며 정보를 제공하고 행위를 촉구하는 몽학선생 정도로 여긴다면 아직은 말씀으로 사는 게 아니다. 음식과 소화기관 사이에 신비로운 조화와 연합이 있듯이 말씀과 인간의 본성 사이에는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 신비로운 상응이 있다. 말씀을 정보취득 소스로 여기며 거리를 두고 있다면, 아직 말씀을 입에도 넣지 않은 상황이다. 말씀은 먹도록 주어졌다. 박물관의 '고물(古物)'처럼 만지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심심풀이 관람용이 아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말씀은 이제 우리의 영혼에 새겨져 있고 성령의 조명으로 황홀한 의미의 세계로 진입한다. 이처럼 말씀으로 산다는 건, 강제가 아니라 자발성이 순종과 결합되는 삶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양식이 되신다고 하셨다. 긴 계시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삶의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스도 예수의 영으로 말미암아 말씀이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나는 주님 안에 거하는 동거와 연합이 바로 말씀으로 산다는 궁극적 의미였다. 구별은 되지만 분리할 수 없는 머리와 몸, 남편과 아내, 나무와 가지의 연합이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믿음의 선배들이 신학과 경건의 질퍽한 피눈물을 쏟으며 얻고자 고대했던 연합이다. 젖이 아니라 때때로 단단한 음식이 주어져도 연합을 접어서는 아니된다. 장성한 자에게는 지각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분별해야 하는 그런 류의 음식이 필요해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이란 밥상 앞에서 편식은 금물이다. 주님은 최고의 요리사다.

꿀을 만나거든 적당히 먹으랬다. 토하는 부작용 때문이다. 그러나 벌통에서 막 채취한 송이꿀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섭취량에 제한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바르게만 먹으면 부작용이 없으니까.

Talk with David Hoekema

대화가 길어 요지만 먼저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토니 후크마 교수님의 두 박사학위 논문(The Centrality of the Heart, Herman Bavinck's Doctrine of Covenant) 중에 첫번째(1948)는 프린스턴 신학교에 제출을 했으나 대대적인 수정을 가해야 할 정도로 심난한 평가와 더불어 돌려 받았는데 수정하는 것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두번째 논문을 5년동안 연구하고 작성하여 제출(1953)했고 그 논문이 결국 박사학위 논문으로 통과된 것입니다. 가혹한 평가의 이유는 1) 지도교수 Kuizenga가 논문제출 1년 전에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했고 2) 논문심사 위원회의 한 교수도 학교를 동일한 이유로 떠나게 되어 3) 위원회가 재구성된 탓이라고 말합니다.

안토니 후크마의 아들 데이빗 후크마(David Hoekema)의 사무실로 갔다. 이는 아버지의 박사학위 논문에 얽힌 사연을 밝히고자 수일전에 신청한 만남이다. 데이빗은 인자한 표정에 맑은 눈동자가 잘 다듬어진 백색 구렛나루 사이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분이셨다.

David: 너가 폴 한(Paul Han)이구나. 만나서 반갑다.

Paul: 네, 맞습니다. 따뜻하게 맞아 주시니 감사 드립니다.

David: 아버지에 대한 한국인 친구들과 너의 그런 궁금증이 대단히 흥미롭다. 너의 물음으로 아버지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시 잠길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단다.

Paul: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스케줄이 바쁘신 것 같아 본론에 해당되는 질문을 곧장 던질게요. 아버지의 두 박사학위 논문에 얽힌 사연부터 듣고 싶습니다. 첫번째 논문이 거절된(rejected) 건가요?

David: 아니, 거절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목회를 하면서 성실하게 논문을 완성했고 학교에 제출했지. 그리고는 몇 주가 지나서 논문의 근간을 뒤흔드는 비판과 수정을 요청하는 코멘트가 거칠게 박힌 논문을 되돌려 받았다. 그것을 보시는 아버지...아, 깊은 실망에 젖은 아버지의 그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결국 수정하는 것보다 논문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리셨지.

Paul: 어떤 비판이 있었길래 그토록 실망하신 건가요? 새로운 주제로 5년이나 투자하실 정도로요? 혹시 코멘트를 보셨나요?

David: 그때 내 나이가 2살이라 읽지는 못했겠지. 읽더라도 이해를 못했겠지...하하하. 이후로 나도 아버지와 그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대화해 보지는 못했단다. 아마도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었나 싶어. 논문을 제출하기 1년전에 지도교수 Kuizenga가 병환으로 은퇴했고 논문심사 위원들 중의 한 교수도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지. 당연히 학교는 위원회를 새롭게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의 신학적 입장과도 달라졌던 것 같애. 구체적인 신학적 입장차는 나도 모르겠다.

Paul: 아, 그렇군요. 그 정도면 한국의 친구들과 저의 의문은 이제 풀린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질문을 좀 더 나누어도 될까요?

David: '예약'된 시간이니 얼마든지 하렴.

Paul: 교수님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신 건 아버지께서 권하신 건가요?

David: 아버지는 나의 진로에 대해 어떠한 압력도 가하신 적이 없으셨지. 늘 자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다만 삶으로 보이시는 방식으로 푸쉬를 가하셨지. 하하하. 가하기는 한 거네. 아, 하나 생각난다. 박사학위 논문 들어갈 때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군. '지도교수 건강을 먼저 확인하고 논문을 시작해라.' 자기처럼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러신 거지. 아버지의 가장 큰 영향은 그분의 죽음이다. 그 죽음이 나의 진로를 확정했지. 아버지는 아무런 증세도 없다가 갑자기 뇌졸증 때문에 두번 쓰러 지셨는데, 두번째 쓰러지신 이후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지. 뇌가 완전히 사망한 것을 확인한 이후 가족들은 호흡을 보조하던 장치를 제거하는 결정을 내렸어.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는 칼빈 공동체의 사랑이 얼마나 크던지. 아, 그 출렁이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도록 말이야. 슬픔과 감동의 눈물이 흐르더군. 그렇게 장례식을 하면서 '칼빈으로 돌아가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지. 아버지는 죽음으로 나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끈 셈이네.

Paul: 감동적인 얘깁니다. 아버지를 뒤이어 신학으로 전향하고 싶지는 않았나요? 오기 전에 이력을 훓어 보았는데 신학도 아니고 철학의 이론적인 부분도 아니고 대단히 실천적인 정치철학 분야에 올인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 세상에서 아버지 신학의 사회적 구현을 의도하신 건가요?

David: 오호, 이 질문은 정말 마음에 드는 걸! 아버지의 유지를 신학으로 전향하는 방식이든 실천적인 철학을 통한 사회적 구현이든 솔직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사실 아버지의 마지막 책을 편집하며 적잖은 생각은 했었지만. 여튼, 개혁주의 신학과 북미 개혁교회 견지를 따라 아버지가 출입하지 않은 사회적 영역에서 남은 여생동안 섬기는 것도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Paul: 최근에 정당전쟁 이론의 재해석을 시도하는 책을 집필하고 계신 듯합니다. 격동하는 중동과 아프리카 상황이 고려된 것인가요?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함께요?

David: 정당전쟁 이론은 교회가 너무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늘 느끼던 분야야. 사회의 공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방편으로 전쟁의 불가피한 선택을 말하지만 동일한 목적을 보다 평화적인 방편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붓을 들었지. 조만간 출간이 될 것 같아.

Paul: 그럼 교수님이 생각하는 대안적인 해법을 귀띔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신학을 공부하는 예비 신학자로, 원수를 대하는 최고의 무장은 십자가의 사랑이라 말해야 하거든요. 보다 참신한 교수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David: 좋은 질문이네. 답변은 어렵구. 나도 뾰족한 해법을 알지는 못한다네. 구도자의 목마름을 비판과 재평가의 방식으로 축이는 정도이지. 고민과 생각이 축적되면 그래도 좋은(better) 해법이 나오리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어.

Paul: 그런 희망 자체가 어쩌면 놓치지 말아야 할 대안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교수님, 장시간의 대화, 감사 드립니다. 한국인 친구들과 저는 궁금증도 풀고 귀한 분을 발견한 뿌듯함도 느낍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David: 나도 즐거웠네. 아참, 한국에서 아버지의 번역본을 보내 왔는데 다음에 만나면 그것을 주지. 조심해서 가게~~~

Paul: 오호호, 정말 감사합니다. 저자의 아들 싸인도 빠뜨리지 말아 주시구요...ㅎㅎㅎ 또 뵐께요~~~

사진기와 녹음기를 구비하지 않아 현장감 흐르는 자료를 남기지 못해 아쉬웠다. 궁금증을 촉발하신 총신대 신대원의 이상웅 교수님 덕분에 귀한 교제의 문이 열렸다.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2013년 2월 8일 금요일

유쾌한 멘붕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어지는 방식 or 인식론은 믿음이다. 믿음 자체가 지식의 샘이라는 것은 아니며 주어진 소스가 지식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불가피한 수단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믿음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얻지 못할 것이며, 얻어진 바른 지식은 필히 믿음의 수단을 통했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본성적인 기재를 의미하지 않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서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은 것, 즉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일컫는다. 물론 나는 모든 지식의 생산에 각자의 주관적인 믿음이 깊이 개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은 또한 세계의 기원을 푸는 열쇠로서 믿음의 기능을 꾸욱 누질러 강조한다. 세계의 창조가 이미 '나타난' 계시의 성격이 있음을 지적하되 그 창조적 계시의 신비를 벗기는 '보이지 않는 인식론'도 믿음이란 함의까지 담았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해되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그것의 근원이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급하지 않으면 아무리 넓은 보편성과 희귀한 천재성을 확보한다 할지라도 고작 학습된 무지의 허탄한 향연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까지 함축한다.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눈에 세상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신성과 무한한 능력이 계시되는 출구로 보인다는 바울의 지적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기원과 본질과 실존과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는 알려질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어떤 식으로도 분리될 수 없기에 결국 하나님의 속성까지 소급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지식도, 그 지식에 기초한 어떠한 행위도 건강하지 못할 것이다. 이로 보건대 신학이 관심의 손을 뻗어야 할 영역은 거의 무제한에 가깝다. 그런 만큼 올바른 신학의 중요성은 하늘과 땅의 무게보다 육중하다. 온 우주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해명해야 할 과제가 신학자의 어깨에 얹혀진 셈이다. 게으름과 안일함의 음흉한 추파에 단호한 저항의 등짝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겠다. 

신학적 행동반경 안에서 발견되는 필요에 부응하는 정도로는 신학자 본연의 부르심에 충실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극히 협소하고 구체적인 사안을 건드릴 때에라도 늘 우주를 의식하고 세계와 인류를 어깨에 짊어지는 각오와 자세에는 한 주름의 구겨짐도 없어야 하겠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감당이 안되는 선언이다. 미치겠다! 사람이 받아낼 만한 진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한 오라기의 의식도 이 진리를 벗어난 방향으로 촉수를 뻗지 못하겠다. 완전한 무장해제, 전적인 자기부인, 절대적 백기투항!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자리로의 부르심은 영광이고 흥분이고 감격이고 그 자체가 이미 상급이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공자의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는)' 구도자적 열정에도 미치지 못해서는 안되겠다. 

2013년 2월 7일 목요일

교의학은?

교의학은 하나님 지식의 체계이다.

그 의도는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 밖에서는
우리에게 인지되실 수 없다는 사실과,
교의학의 목적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말씀으로 계시하신 그 지식의 자국일 뿐임을
명백히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체계적 구성이 일반 과학이든 철학과 신학이든 
막대한 해를 끼친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런 구성으로 인해 내용이 형식에, 현실성이 이념에, 
지식이 의지에 희생을 당하는 일들이 빈번하다. 

당연히 체계의 '몰록'은 경계의 대상이며,
참된 철학은 체계의 형식으로 표상할 필요가 없다는 
플라톤의 격설을 불쾌한 짝다리 자세로 째려볼 일은 아니겠다.
교의학은 실증적인 과학이고 모든 원재료를 계시에서 얻으며
당연히 계시 이외에 어떠한 사변을 통해서도
내용을 변경하고 유포할 권리가 없다. 

교의학과 신앙진리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생긴다면
무조건 전자를 포기하고 후자를 편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대립과 갈등이 있다면 그 원인이
우리의 제한적인 통찰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은 서로 모순될 수 없기에
필히 그 자체 안에 유기적인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사상들을 고찰하고 그것의 통일성을 추적하는 것은
교의학을 다루는 신학자의 거부할 수 없는(onafwijsbare) 과제라 하겠다.

물론,
교회의 공적인 고백과 각 개인들의 교의학은
유오하며 성경에 종속되며 감히 성경과 권위의 어깨를 겨눌 수 없다.
그것들은 진리와 일치하지 않고 인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성경의 기록된 진리에 대한 결함 있는 재생이다.

하지만,
모든 지식에 우선하는 그리스도 사랑을 배워 깨닫도록 하고
신학의 궁극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학문의 두터운 유산 위에서도 무수한 겹의 신적인 지혜를 
고백하게 하는 것은 주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소명이다. 
하여 신학과 교의학은 주님의 뜻 때문에 존재한다.

바빙크의 교의학, I.i.7에서 편집

2013년 2월 6일 수요일

손은 보이는 뇌

손은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이다
생각과 글쓰기는 서로를 격려한다
문자공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도록 절제하되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야겠다

인체에서 뼈다귀가 가장 많은 부위는 손이다
그만큼 고도의 정교한 움직임이 가능하다
뇌의 정밀성을 가장 잘 구현하는 기관이 손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두뇌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 특별히
마우스를 장시간 사용하는 분들은 1시간이 멀다하고
수시로 손가락 스트레칭 반복하는 건 필수겠다

365개의 혈관이 손 운동으로 상당한 자극이 주어진다 해서
운동에 태만해도 된다는 궁색한 이치를 되뇌이는 분들에게
희소식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할 것은 하면서.....

어떤 신학생의 질문

어떤 목회자가 '랍비 전도사'란 과분한 호칭까지 ㅎㅎㅎ 언급하며 던진 질문이다.

1)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간극을 매우는 건 목회자의 인격적인 삶이다?

논리의 가지런한 그물망을 투과한 지식만을 '객관적 지식'으로 간주하며 거기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는 근대주의 지식론의 허술한 성격을, 지식에는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인격적 공감이 전제되어 있다는 지식의 '비논리적 인격성'을 강조한 마이클 폴라니의 인격적 지식론에 근거하여 따끔하게 지적하고 넉넉하게 보완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로 보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관찰되는 미묘한 논리적 '충돌'을 논리적 어법으로 조화로운 해명을 시도하는 것의 한계를 논리의 격자에 반듯하게 담아낼 수 없는 목회자의 인격적인 삶으로 극복하는 것은 성경이 강조하는 증인의 방식과도 부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루터는 세상과 성경의 모든 역설적인 신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풀고자 했습니다. 탁월해 보입니다. 하나님-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분명 인간의 논리적인 이해의 지적 기재에 부합하는 신비의 적절한 해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처음부터 감취었던 것으로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그 모든 비밀을 푸는 열쇠로 오신 분입니다.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란 두 본성의 실재는 논리적인 어법으로 결코 풀어질 수 없는데도 우리는 전인격적 신앙으로 그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이상의 권위적인 증인이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경에 계시된 모든 진리를 증언하는 믿음의 궁극적인 사도가 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논리적 언사를 한 마디도 내뱉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적당하게...^^

2) 설교자의 역할은 교회 공동체의 사명이다?

질문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는 못하지만 설교자와 교회 공동체가 인격적인 소통으로 함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냐는 취지에서 묻는 것이라면 저는 긍정하고 싶습니다. 진리의 증인이 된다는 건 한 개인의 영웅적인 과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더불어 참여해서 수행해야 할 공동의 소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설교자든 목회자든 전도자든 성도이든 비록 가시적인 역할은 다르지만 모두가 동일한 존엄성과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참여한 지체니까 당연한 것이겠죠? 하나님의 백성과 영생이란 궁극적인 운명까지 묶어 생각하고 살아간 모세나 바울처럼 오늘날의 목회자도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그런 일체감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게 옳아 보입니다. 

2013년 2월 5일 화요일

동방과 서방의 신학적 차이

동방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그리스도 죽음으로 해방되고
신적인 본성을 얻는다는 게 특징이고
서방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동방의 교회는 특별히 요한과 연결되어 있었고
서방의 교회는 바울과 연결되어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중심점이 성육신에 있었으나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있었다.

동방 신학에는 그리스도 인격이 배경으로 있었고
서방 신학에는 그리스도 사역이 배경으로 있었다.

동방에는 신인적 본성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통일성에 중점이 있었고
서방에는 두 본성의 차이 즉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점한 중재적 자리에 있었다.

전자는 신비적 의식적 요소가 지배적인 성격으로 굳어졌고
후자는 율법적 정치적 요소가 지배적인 것이었다.

분리는 언제나 시대의 물음이다.

바빙크의 교의학 I.v.42.

무관심은 없다

자연 안에서든 국가나 과학과 예술 안에서도 무관심할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전체 안에서는
저마다 확고한 자리와 고유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가 알지 못하거나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은 자신이 무지불식 중에 평가하고 가치를 매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무관심할 것이 없다.

바빙크의 교의학 I.8.74.

2013년 2월 4일 월요일

Ipsa/Ipsum 논쟁

Ver. 15. She shall crush. Ipsa, the woman: so divers of the fathers read this place, conformably to the Latin: others read it ipsum, viz. the seed. The sense is the same: for it is by her seed, Jesus Christ, that the woman crushes the serpent's head. (Challoner) --- The Hebrew text, as Bellarmine observes, is ambiguous: He mentions one copy which had ipsa instead of ipsum; and so it is even printed in the Hebrew interlineary edition, 1572, by Plantin, under the inspection of Boderianus. Whether the Jewish editions ought to have more weight with Christians, or whether all the other manuscripts conspire against this reading, let others inquire. The fathers who have cited the old Italic version, taken from the Septuagint agree with the Vulgate, which is followed by almost all the Latins; and hence we may argue with probability, that the Septuagint and the Hebrew formerly acknowledged ipsa, which now moves the indignation of Protestants so much, as if we intended by it to give any divine honour to the blessed Virgin. We believe, however, with St. Epiphanius, that "it is no less criminal to vilify the holy Virgin, than to glorify her above measure." We know that all the power of the mother of God is derived from the merits of her Son. We are no otherwise concerned about the retaining of ipsa, she, in this place, that in as much as we have yet no certain reason to suspect its being genuine. As some words have been corrected in the Vulgate since the Council of Trent by Sixtus V. and others, by Clement VIII. so, if, upon stricter search, it be found that it, and not she, is the true reading, we shall not hesitate to admit the correction: but we must wait in the mean time respectfully, till our superiors determine. (Haydock) Kemnitzius certainly advanced a step too far, when he said that all the ancient fathers read ipsum. Victor, Avitus, St. Augustine, St. Gregory, &c. mentioned in the Douay Bible, will convict him of falsehood. Christ crushed the serpent's head by his death, suffering himself to be wounded in the heel. His blessed mother crushed him likewise, by her co-operation in the mystery of the Incarnation; and by rejecting, with horror, the very first suggestions of the enemy, to commit even the smallest sin. (St. Bernard, ser. 2, on Missus est.) "We crush," says St. Gregory, Mor. 1. 38, "the serpent's head, when we extirpate from our heart the beginnings of temptation, and then he lays snares for our heel, because he opposes the end of a good action with greater craft and power." The serpent may hiss and threaten; he cannot hurt, if we resist him. (Haydock)

Targum Pseudo-Jonathan: "And I will place enmity between you and the woman, and between the offspring of your sons and the offspring of her sons. And it will happen: when the sons of the woman will observe the precepts of the Torah, they will aim to strike you on the head; and when they will forsake the precepts of the Torah, you will aim to bite them in the heel. But for them there will be a remedy; whereas for you there will be no remedy. And they will be ready to make a crushing with the heel in the days of King Messiah."

Fragmentary Targum: "And it shall be: when the sons of the woman observe the Torah and fulfill the commandments, they will aim to strike you on the head and kill you;and when the sons of the woman will forsake the precepts of the Torah and will not keep the commandments, you will aim to bite them on their heel and harm them. However there will be a remedy for the sons of the woman, but for you, O serpent, there will be no remedy. Still, behold, they will appease one another in the final end of days, in the days of the King Messiah."

Targum Neofiti: "And I will put enmities between you and the woman, and between your sons and her sons. And it will happen: when her sons keep the Law and put into practice the commandments, they will aim at you and smite you on the head and kill you; but when they forsake the commandments of the Law, you will aim at and wound him on his heel and make him ill. For her son, however, there will be a remedy, but for you, serpent, there will be no remedy. They will make peace in the future in the day of King Messiah."

Catholic Misuse of Genesis 3:15 By Keith Thompson

The Catholic Church has exalted Mary the mother of Jesus to an extremely high status over the centuries. Misuse of the Holy Scriptures has occurred in the process. One example of distortion of Scripture to support Catholic exaltation of Mary has to do with the translation of Genesis 3:15. First let us examine the true meaning of Genesis 3:15 by looking at the translation offered by all Protestant translations. In agreement with the majority text (MT) and the Greek Septuagint Old Testament (LXX), Protestant translations will render the passage as such: "13Then the LORD God said to the woman, "What is this you have done?" The woman said, "The serpent deceived me, and I ate." 14 So the LORD God said to the serpent, "Because you have done this, "Cursed are you above all the livestock and all the wild animals! You will crawl on your belly and you will eat dust all the days of your life. 15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you and the woman, and between your offspring and hers; he will crush your head, and you will strike his heel.”(1) “He” (הוּא) in the original Hebrew is masculine. It is pronounced “hoo” and can also mean “it.” Many think it means “it” in reference to collective offspring of the woman crushing the head of the serpent. In the LXX, however, it is rendered autos “he,” indicating that the passage should be understood as a Messianic prophecy about Jesus Christ alone crushing the head. “He [Jesus] will crush the serpent's head.” However, Jerome (342-430) in his Latin Vulgate translation made a major error changing “it” or “he” into “she” using the feminine pronoun ipsa in the Latin. Roman Catholic scholars who accepted the Latin Vulgate then translated Genesis 3:15 in their Douay-Rheims Bible as: "I will put enmities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thy seed and her seed: she shall crush thy head, and thou shalt lie in wait for her heel."(2) Instead of “he” (one of the woman’s descendants crushing the serpent as the LXX renders it), it becomes “she will crush your head.” And who is “she” for the Romanist? She is Mary of course. From this mistranslation they claim that instead of Jesus alone crushing the head of the serpent it would be Mary who would crush the head of Satan by being perfect and sinless. They use this mistranslation to justify the doctrine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among other doctrines. The 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explains the controversy: “The Hebrew text of Genesis 3:15 speaks about enmity between the serpent and the woman, and between the offspring of both. The personal pronoun (hu’) in the words addressed to the serpent, “He will strike at your head”, is masculine. In the Greek translation used by the early Church (LXX), however, the personal pronoun autos (he) cannot refer to the offspring … but must refer to a masculine individual who could then be the Messiah, born of a woman. The Vulgate (mis)translates the clause as ipsa … This feminine pronoun supports a reading of this passage as referring to Mary which has become traditional in the Latin Church. The Neo-Vulgate (1986), however, returns to the neuter ipsum…”(3) Note that the Neo-Vulgate (Nova Vulgata), the revised Latin version authorized by the Vatican, corrected the error and changed it from ipsa to ipsum in the Latin. This controversy was not unknown to Roman Scholars of old. One such Romanist Bishop Alphonsus Liguori (1696 –1787) stated: “She will crush your head: some question whether this refers to Mary, and not rather to Jesus, since the Septuagint translates it, He shall crush your head. But in the Vulgate, which alone was approved by the Council of Trent, we find She.”(4) Conceding the argument the Catholic Encyclopedia remarks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her seed; she (he) shall crush thy head and thou shalt lie in wait for her (his) heel" (Genesis 3:15). The translation "she" of the Vulgate is interpretative; it originated after the fourth century, and cannot be defended critically. The conqueror from the seed of the woman, who should crush the serpent's head, is Christ …”(5) Footnotes: 1.) NIV, Genesis 3:13-15 2.) Catholic Douay-Rheims Bible, Genesis 3:15 3.) 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Donald Bolen, Gregory Cameron, Mary: grace and hope in Christ : the Seattle statement of the 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 the text with commentaries and study guide,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2006], p. 33 footnote 4 4.) St. Alphonsus Liguori, The Glories of Mary, (adapted), New York: Catholic Book Publishing, 1981, p. 88. 5.) Catholic Encyclopedia, Immaculate Conception, Genesis 3:15 http://www.newadvent.org/cathen/07674d.htm

영광과 고난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했다 (욥6:10)

욥의 일대기가 구구한 사연으로 엮여 있지만 엔딩은 해피였다.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인생의 결론을 안다는 것이 두 가지의 생각을 조장한다. 첫째, 과정의 고통이 실제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둘째, 고통스런 과정은 지나가고 만다는 확신을 제공한다. 욥의 해피엔딩 인생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뚫고 지나가야 했던 고통의 실재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한편으론 고통이 최종적인 상태가 아니라 지나가는 과정임을 확인한다. 욥은 인생의 하늘이 짙은 먹구름과 찬란한 햇살의 단절적인 교차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환란보다 허무하고 답답한 고통도 없을 것이지만 욥은 그런 성격의 '희비'가 부단히도 엇갈린 나날을 보내었다. 나의 관심은 그의 '비'에 쏠린다.

욥은 동방사람 중에 으뜸이다. 그런 그를 사단이 건드렸다. 욥의 인생은 자신에게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재앙의 끝모를 늪으로 삽시간에 함몰된다. 그는 태어난 날부터 탄식의 거친 도마에 올렸다. 멸망과 유암과 사망의 캄캄한 그늘이 그날의 소유권을 주장하면 좋을 뻔 했겠다는 창조의 질서 교정을 요청하는 언사까지 내뱉었다. 그에게는 은밀하게 낙태되어 빛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손바닥 사이즈의 차가운 무덤이 자신의 몸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극심한 기쁨과 즐거움 중에 뛰어들어 눕겠단다. 그가 당하는 분한과 재앙의 무게는 지구촌 전체의 해변을 뒤덮은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란다. 그가 직면한 고통의 정도가 대충 가늠되는 고백이라 하겠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의 틈바구니 속에서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던 욥의 신앙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신적인 눈으로 보기에도 심히 좋았던 복의 충만 속에서도 말씀을 거역한 것과는 너무도 노골적인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다.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되지 않은 문맥 단절적인 재앙을 당하면 그 출처를 의례히 하나님께 돌리는 법인데도 욥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불평을 바가지로 쏟았지만 그래도 넘어가지 않은 경계선이 있었는데 말씀만은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풍요로운 중에 말씀이 존중되는 일의 아쉬운 점은 향기가 진동하지 않는다는 거다. 진리의 향기가 한 시대를 진동하는 것은 인간적인 통제의 손아귀를 벗어난 역경과 환란 속에서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씀은 빈말이 아닌게다. 주님의 뜻은 형통이고 불행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자의적인 도식은 '멍멍이'나 주어야 할까보다. 

신학 공부법

영어권에 오랫동안 살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어떤 신학생이 영어 글쓰기, 영어일반, 및 신학 공부법에 대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래의 진술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1. 영어작문

제가 오히려 비법을 들어야 할 부분인 듯합니다. 그냥 개인적인 입장을 전하자면, 영어의 효과적인 작문을 위해 반복적인 연습을 별도로 해오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 했기 때문에 매일 영문으로 1-2페이지 정도의 글은 써 온 셈입니다. 작문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1) 틈틈이 영문 신학서를 한글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영어 글쓰기가 탁월한 미국인 학자의 책을 선정하고 번역하다 보면 학문적 영작의 묘미도 발견하고 섬세하고 세련된 표현도 조금씩 익숙해져 저의 영작에 서서히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또 다른 도움은 신학서적 중에 언어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문학에 가깝도록 저술된 책들을 읽은 것입니다. 그런 책들은 그냥 읽고 싶어지기 때문에 특별한 작심이나 각오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학적 내용도 취하면서 언어의 수사적 유희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냥 손에 잡힙니다. 그런 류의 책들을 읽으니까, 신학적 글쓰기를 하면서 문학적 표현의 부재가 가져오는 건조함과 글맛의 민밋함을 많이 의식하게 되더군요. 좋은 내용을 좋은 것처럼이 아니라 싱겁고 사사로운 내용인 것처럼 잘못 전달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명료하되 가급적 아름다운 표현을 사용하면, 정보의 취득만이 아니라 독자에게 독서의 즐거움도 제공하게 되어 설득과 공감의 효과도 배가되지 않나 싶습니다. 

2. 영어공부

저는 영어의 어휘력, 문장력, 독해력의 향상을 위해 별도의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그냥 신학적인 이유로 좋은 책을 찾아 독서하고 번역하는 것 뿐입니다. 제가 간과하고 있는 대목인데 오히려 찔러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3. 신학공부

저만의 고유한 비법이나 전략은 아닌 듯합니다. 그냥 기본적인 방식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1) 성경을 매일 읽어서 나의 상식과 합리와 논리와 확신과 기호를 부단히 꺾는 지속적인 판단중지 훈련을 하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일용할 양식처럼 매일 섭취하여 내 모든 생각과 말과 행실의 원천으로 삼지 않으면 우리의 죄성에 가장 익숙한 원리가 그 틈새를 매꾸고 급기야 삶의 발목을 잡습니다. 아는 줄로 생각하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이며, 선 줄로 생각하는 순간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할 때라는 인간적인 앎의 역설적인 실상을 늘 되새기는 게 좋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힘든 자기부인 항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유순하고 둥근 성품으로 대충 참고 지나갈 수 있는데, 옳고그름 문제만 터지면 나만이 진리의 수호자인 양 일인치도 물러서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선악과 범법의 항구적인 후유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분들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걸 보면 말입니다.

3-2) 바른 신학을 가르치는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다른 많은 분들이 거명될 수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신학에 영향을 주신 분들은) 김영규, 박윤선, 김홍전, 김성수, 최낙재 목사님 같은 스승들과, 외국에는 어거스틴, 칼빈, 루터, 바빙크, 바질, 아타나시우스, 암브로스, 크리소스톰, 그레고리 대제, 제롬, 안셀름, 버나드, 아퀴나스, 스코투스, 폴라누스, 베자, 잔키우스, 우르시누스, 트위스, 러더포드, 프래버스, 길레스피, 카트라이트, 부카누스, 푸치우스, 파레우스, 토사누스, 히페리우스, 무스쿨루스, 버미글리, 케커만, 투레틴, 하이데거, 퍼킨스, 오웬, 에드워즈, 워필드, 카이퍼, 멀러 같은 스승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런 분들의 문헌을 최대한 입수해서 일평생 읽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이러한 분들의 문헌들을 늘상 수집하고 읽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복사판 재생이 아니라 진리의 고백적인 범위 내에서 창조적인 발전과 개선을 도모하는 게 우리의 시대를 섬기는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3-3) 1년에 언어를 하나씩 배우는 게 좋습니다. 방법은 하루에 매일 2-3시간씩 2개월만 투자하면 기본적인 문법을 독파할 수 있고 10개월간 좋은 문헌(사실 성경이 최고)을 정하셔서 계속해서 원서를 읽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1년이 지나면 다른 언어로 넘어가되 학술적(신학적)인 언어로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 불어, 화란어를, 실용적인 언어로는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정도를 배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학을 시작하는 분들은 신학을 최소한 10년정도 공부한다 생각하고 언어습득 전략을 세우는 게 좋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신학의 지경을 넓히는 최고의 유일한 길입니다. 시공간에 흩어진 다양한 스승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언어에 대한 시간의 의식적인 투자 없이는 교회의 장구한 전통이 물려준 풍부하고 아름다운 유산은 망각의 먼지만 두터워질 것이고 겨우 극미한 일부만 상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나름 날고 뛰었는데 이미 과거의 한 시점에 어떤 지역에서 풍미했던 이단적 사상의 재탕으로 확인되는 분들이 간혹 보입니다. 진리의 지식에 가난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유산을 최대한 많이 상속하는 비결은 언어를 익히고 성실하게 독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3-4) 신학은 하나님만 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결단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모르는 신학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본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이 고려되지 않은 신학은 수도원 신학의 현대판일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과 문명을 최대한 읽어내되 세상이 제공하는 물음과 답의 분주한 챗바퀴 공감 및 개선에 안주하지 않고 늘 빛과 소금의 책임의식 속에서 주님께서 세상에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것을 주는 자처럼 해법을 찾고 제공하는 복의 근원이 되도록 마음의 태도를 가다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른 어떠한 것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는 신학자가 세상을 제대로 배웁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의 긴급하고 근원적인 필요를 발견할 수도 없고 해소시킬 수도 없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도다'고 한 시인의 고백처럼 정말정말 사람을 사랑하는 신학자가 되어야 신학을 올바르게 배우는 게 가능한 것 같습니다. 공부 한답시고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분리되는 사람은 잠언이 제대로 꼬집은 것처럼 온갖 참지혜를 배척하는 자입니다. 물론 신학자는 평생 책과 더불어 지내지만 어느 정도 지나면 텍스트는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처럼 놀이터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텍스트가 분명 중요한데 그 중요성의 지나친 과장으로 배움의 입체적인 소스 확보와 습득의 필수성을 훼손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문자중독 해독의 비결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있는 듯합니다.

3-5) 신학자는 삶을 언어로, 언어를 삶으로 번역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신학자가 진리와 삶을 언어로 생각하고 기록하는 일을 부단히 연습해야 하고 언어의 텍스트를 인격과 삶으로 전환하는 일에도 동일한 분량의 노력으로 연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해석(성경을 삶으로 해석)과 전달(삶으로 진리를 전달)로 구성된 어거스틴 해석학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언어에서 언어로만 이동하는 진리의 해석과 전달에는 능력과 생명이 없습니다. 삶에서 삶으로만 이동하는 진리의 이해와 전달은 일상으로 담아질 수 없는 진리의 초월적 부요함을 생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진리는 변하고 유한하고 일시적인 언어와 삶의 조화로운 협조 속에서도 다 담아질 수 없도록 영원하고 무한하고 불변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최선일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3-6) 저도 아직은 아니 어쩌면 일평생 신학 공부법의 구도자일 뿐입니다. 신학의 짬밥이 차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 공부하고 가르치고 목회하는 일에 아름다운 균형의 모델과 같은 믿음의 현존하는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묻습니다. 그토록 귀한 모범을 보이시는 분들도 대부분은 최고의 범례를 지금도 찾아가는 과정에 있노라는 답변을 하십니다. 이런 물음과 답변을 수차례 경험하며 얻은 저의 잠정적인 결론은 모든 사람들이 획일적인 신학 공부법과 구성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제자도의 원리를 벗어날 수는 없겠으나 각 개인에게 그 원리가 구현되는 방식의 다양성은 오히려 아름답고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교가 동일한 제품의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조심스런 부분인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하는 최소한 내려가지 말아야 할 신학적 하한선은 분명히 있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개개인의 다양성도 존중될 여지는 늘 마련해 두어야 할 듯합니다.

두서가 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따라 떠오르는 생각의 순서대로 몇 자 적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나이와 신학의 짬밥을 막론하고 서로에게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고 믿습니다. 성령께서 님에게 맡기신 아름다운 교훈도 저와 페친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2013년 2월 3일 일요일

사무엘 러더포드

가장 탁월한 스캇 퓨리탄 사무엘 러더포드 (Samuel Rutherford, 1600-1661), 그의 책들을 링크해 둔 사이트다. 기도와 말씀과 연구와 교육과 저술과 심방과 설교 밖에 몰랐던 진정한 목회자의 심장을 가진 러더포드 문헌들을 작심하고 독파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책마다 설교마다 편지마다 다른 문체와 어법과 언어의 다양성은 그의 저작들이 동일인의 저술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학자들의 의구심을 일으킬 정도였다. 난 탁월함의 증거로 생각한다. 혹 시간이 되시는 분들에게 정독을 권하고 싶다.

Digital Puritan: Samuel Rutherford (1600-1661)

2013년 2월 2일 토요일

복음의 역동성

칼빈이 말하는 복음의 역동성이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Institutio 1559, III.vi.4)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과 휘장만 걸쳤을 뿐이면서 '그리스도 사람'이라 불려지길 원하는 자들에겐 엄중한 문책이 마땅하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그들은 얼마나 뻔뻔하게 자랑하고 있는가? 복음의 말씀에서 그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체득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 예수와는 진실로 어떤 친밀한 교분(commercium)도 나누지를 못한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입으라'는 가르침을 받지 못한 모든 이들은 그를 올바르게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는 그들이 현혹적인 욕망으로 부패해 버린 옛사람을 벗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로 보건대 그들이 복음에 대하여 박학과 능변으로 지껄이는 모든 그리스도 지식은 거짓과 부정으로 가장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복음이 언어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교리(non linguae doctrina sed vitae)이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들과 달리 복음은 지성적 기억으로 포섭되는 게 아니다. 복음은 오로지 그것이 영혼 전체(animam totam)를 장악하고 마음의 심연에 안식의 좌소를 마련할 때에 비로소 수용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과 무관한 것을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실의 중단을 택하든지 아니면 스승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합당한 제자답게 처신하라.

우리는 우리의 경건을 지탱하는 교리에 우선적인 자리를 내주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거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리는 우리의 가슴 속으로 이동하고 일상으로 스며들며 급기야 우리를 그 안에서 개조하니 어찌 교리가 우리에게 무익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심지어 철학을 인생의 스승으로 여기며 자칭 철학자라 칭하는 자가 철학을 궤변적인 수다로 전락시킬 경우 그가 속한 무리에서 격분 속에서 축출되는 게 마땅한 일이라면, 복음의 효력이 마음의 정서적 심연을 관통해야 하고 영혼에 자리를 잡아야 하고 철학자의 차가운 교훈보다 몇 백배나 철저하게 전인격(totum hominem)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혀끝에서 굴리는 정도로 만족하는 이런 경박한 궤변가를 우리가 혐오하는 것은 훨씬 더 타당하지 아니한가?

2013년 2월 1일 금요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

에임즈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일차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도다 (시4:7)

급박한 위험과 환란이 이 시편의 배경이다. 그런 환경과 마주친 다윗의 지혜로운 처신은 하나님께 의의 제사를 드리고 잠잠히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최고의 선이요 안전의 마지막 보루라는 것이 이런 처신의 밑바닥에 깔린 믿음의 전제였고. 에임즈는 이 시편을 강해하며 최고선(summum bonum)이 다윗에게 최고의 유일한 위로(Erlösung)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나는 교리문답 1문항의 '위로' 개념을 '최고선'과 연결한 다른 인물을 알지 못한다.

에임즈가 본문에서 끄집어낸 교훈들은 다음과 같다. 1) 우리의 일평생에 숙려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다른 어떠한 것보다 최고의 선이다. 2) 이생에서 인간의 최고선은 재화에서 얻어질 수 없다. 3) 우리의 진정한 최고선은 주님과의 연합(unio)과 교통(communio)이다. 4) 주님과의 교통으로 얻는 우리의 지극한 즐거움은 그 자체의 짙은 감미로움 때문에 모든 인간의 덧없는 희열과 행복을 능가한다. 5) 이러한 기쁨과 거룩한 위로가 성도의 양심에 견고한 확신을 수혈한다.

진정한 최고선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과의 연합과 교통은 우리의 본질적인 복의 샘이며 때때로 하나님을 바라봄(visio Dei) 혹은 지복한 통찰(visio beatifica) 등으로 진술되는 경우도 있다. 성경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눈의 시각적 작용이나 지성의 뻣뻣한 사색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fruitio)을 일컫는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으며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그 거룩한 교통과 즐거움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찬(communio)이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통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이다. 타당한 문맥도 없이 우리의 삶을 강타한 위험과 환란은 그 거룩한 위로의 기운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는 우리 하나님의 아프지만 감미롭고 지고한 사랑이 원인일 경우가 대부분인 듯하다. 우리에게 궁극적인 위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심과 속성과 연합과 교통이다. 목회자가 어떤 내용으로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의 기록이 가슴 찡하게 울리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