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0일 일요일

동성결혼 합법화에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

미국의 연방항소 법원이 어제 캘리포니아주 헌법 8조가 규정하고 있는 동성결혼 금지를 철회하고 결혼을 원하는 이들에게 혼인 증명서를 즉시 발급할 것을 명령했다 한다. 이러한 현실을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상에 비추어 평가하면, 경박한 편견이란 조롱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형제간의 결혼, 남매간의 결혼, 자매간의 결혼, 부자간의 결혼, 모녀간의 결혼도 방지할 길이 없어졌다. 이는 동성애 옹호자가 주장하는 "결혼이 두 성인들 사이의 애정적인 헌신에 관한 것이기에 결혼 당사자의 성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입장에 전혀 저촉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2명 이상의 남편이나 아내를 가져도 된다는 법안의 상정은 다음 수순일지 모르겠다. 이러다간 아예 여러 남자들과 여러 여자들이 하나의 부부가 될 수 있다는 법안상정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다. 막장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작금의 현실은 바울의 해석처럼 "하나님이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다"고 봄이 합당하다. 

어리석고 불쌍한 판결이다. 인간 편에서는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한 셈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신 형벌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젠 미국에서 13개의 주가 동성의 결혼을 승인하게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승인한 마당에 이런 합법화 추세의 가속화는 불을 보듯 뻔하겠다. 한국도 이런 문명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겠지. 안타까운 마음 금하지 못하겠다. 주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한다. 돌이켜 주시라고 간구할 수밖에 없다.

2013년 6월 28일 금요일

플라톤 사상과 기독교 in Augustine

어거스틴 눈으로 본 플라톤 사상과 기독교

어거스틴 시대에 지혜에 대한 연구는 실행과 사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행은 생활태도 즉 도덕적인 계율과 관계하고 사색은 자연의 원인 및 순수한 진리에 대한 조사와 관계되어 있다. 그런데 플라톤은 실천적인 부분에 있어서 소크라테스의 탁월함과 사색적 부분에 있어서 피타고라스의 위대한 지성을 결합시켜 철학을 완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플라톤은 철학을 세 부분으로 분류했다. 첫째는 주로 실천과 관련된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부분(pars moralis)이고, 두번째는 사색을 목적으로 삼았던 자연적인 부분(pars naturalis)이며, 세번째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이성적인 부분(pars rationalis)이다. 이런 식의 삼중적 분류는 어거스틴 자신의 학문이해 일반을 잘 보여준다.

이 셋은 각각 모든 행위의 목적이 무엇이며, 모든 자연의 원인이 무엇이며, 모든 지성의 빛이 무엇인지 등의 물음들과 상응한다. 답변은 하나님 자신이다. 플라톤은 현자를 규정하되 하나님을 닮고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 자신 안에서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 복을 얻는 사람이라 하였다.

이런 플라톤 사상에 근접해 있는 사람들은 전 인생을 통제하는 목적, 존재의 원인, 이해를 위한 궁극적인 이성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이라고 히포의 교부는 추정한다.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이 없이는 어떠한 행동도 유익하지 않으며 어떠한 자연도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떠한 교리도 교육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기독교와 플라톤 사상의 근접성은 여기에 있단다. 그러므로 모든 인위적인 신학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요, 진리의 빛의 근원이요, 모든 축복을 풍성히 베푸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플라톤 사상에 그 자리를 조용히 양보할 것을 주문한다. 물론 플라톤 사상의 빈곤을 이곳 저곳에서 두루두루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윤리학과 자연학과 논리학에 대한 플라톤의 세부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섣부른 단언을 경계해야 한다는 신중론도 눈에 밟힌다. 이는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처럼 자신의 지식이나 견해를 숨기는 습성(morem dissimulandae scientiae vel opinionis suae)을 가졌으며 그런 방법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플라톤 자신의 생각을 밝혀내는 것은 심히 어렵기 때문이라 하였다.

De civitate Dei, VIII.iv-v.

자연의 항구적인 기적

자연을 항구적인 기적으로 이해한 어거스틴 진술이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기적적인 것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상
즉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보다는 분명히 덜 경이롭다.
다만 창조자 자신이 인간에게 숨기어져 있고 불가해한 분이듯이
창조의 방법도 가리워져 있고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 가시적인 자연의 기적은
늘상 우리의 시야에 노출되어 있어서 무가치해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현명하게 주목해 본다면
대단히 희귀하고 대단히 드물게 접하는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임을 확인한다.

이를 테면,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행하시는 모든 기적보다
인간 [자신]이 더 위대한 기적이다."

(Quidquid igitur mirabile fit in hoc mundo, profecto minus est quam totus hic mundus, id est caelum et terra et omnia quae in eis sunt, quae certe Deus fecit. Sicut autem ipse, qui fecit, ita modus quo fecit occultus est et incomprehensibilis homini. Quamvis itaque miracula visibilium naturarum videndi assiduitate viluerint, tamen, cum ea sapienter intuemur, inusitatissimis rarissimisque maiora sunt. Nam et omni miraculo, quod fit per hominem, maius miraculum est homo).

De civitate Dei, X.xii.

Augustinus의 이웃사랑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이웃에게 하나님 사랑을 권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요 (Dei cultus),
참된 종교요 (vera religio),
올바른 경건이요 (recta pietas),
하나님에 대한 유일하게 합당한 섬김이다(tantum Deo debita servitus).


고대나 지금이나

고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주체와 원인을 다양한 신들에게 돌렸다. 마르쿠스 바로(Marcus Varro)는 인간이 수태되는 순간부터 죽어서 장례식에 이르도록 모든 시작을 주관하는 아누스(Janus)를 비롯하여 종국적인 것을 주관하는 유피테르(Iuppiter) 및 장례식 때 언급되는 여신 네니아(Nenia)에 이르는 무수한 신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인간사를 묘사했다. 각각의 신들은 인간사의 각 부분을 담당한다. 심지어 음식과 의복과 생필품 등 인간의 소유물에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신들의 이름들도 언급된다. 세상에 신과 무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의 편만은 좋았으나 다양한 신들의 허상에 사로잡힌 시대였다.

오늘날은 사건과 사물의 원인과 관련하여 과거의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대신에 모든 원인들이 실험과 관찰의 결과로 밝혀지는 가시적인 주체에게 돌려지고 있다. 물과 공기와 불과 흙 그리고 이러한 각각의 요소에 관계된 신이라는 고대적인 원인론과 양태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겠다. 물론 검증이 불가능한 신화적 설명이나 인간의 적당한 공감에서 도출되는 사회적 설명에 비하면 거짓과 속임수의 여지가 상당부분 제거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시적 인과의 족쇄에 갇혀 신의 존재와 세상에 대한 신의 섭리적 개입을 부정함에 있어서는 광범위한 공감대를 획득하고 있다. 호킹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의 존재가 요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상에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 만물과 역사의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는다. 범사에 그분을 인정함이 마땅하고 합당하다. 만물이 그에게로 말미암고 그를 인하여 그에게로 돌아간다 함이 여호와 경외의 핵심적인 내용이며 동시에 모든 종류의 시대적인 문제들을 타파하고 극복하는 열쇠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노무현의 공이 정리된 펌글이다

노무현의 업적이 뭐냐구요? 똑똑히보십시오. (사이트: http://m.blog.naver.com/namfx/67860541)

다음 아고라의 수기사랑,Opensky님과 해당 분야에 관한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였습니다.


- 신용불량자 600만명 시대에 개인회생제도를 통해 임기 8개월만에 100만명을 회생시킨 최초의 대통령

- 공약 이행률 45%를 달성한 최초의 대통령 ,

- 국가신용도 fitch사의 전망도를 A+를 달성한 최초의 대통령 ,

- 수출 51개월 연속흑자를 기록하며 500억불 수준에서 3200억불을 달성한 최초의 대통령

- 소비자 물가 상승률 평균 3.0%를 달성한 최초의 대통령 ,

- 부도업체수를 20000개 에서 2000개 수준으로 급락 시킨 최초의 대통령 ,

- 국가정보화 및 인터넷 보급 수준을 세계 1위 수준으로 발전 시킨 최초의 대통령 ,

- 연구 개발비 예산이 6조원 수준이던 것을 24조원수준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 문화기반시설 800개소에 불과하던 것을 1600개소로 확충시킨 최초의 대통령 ,

- 종합주가지수 800대에서 1400대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 국내전체제조업체 현금보유비중을 6%대 에서 10%로 끌어올린 최초의 대통령 ,

- 수출 600억대 수준을 3200억불 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 암환자 건강보험 보장률을 40%대에서 70%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 외환위기로 어러운 국민들을 위해 외환보유액 500억불 수준에서 3200억불을 달성한 최초의 대통령 ,

- 주택 보급률을 60%대 에서 105%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 육아지원예산을 1000억원 에서 10000억원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 남북 인적왕래수를 16000명에서 10만명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 복지지출추이를 17%에서 27% 이상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 국제특허출원 건수를 2900건에서 4600건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 대한강국 2020 계획을 새워 전투력은 1.8향상시키고 , 인원은 50만명 수준으로 줄여 모 병제를 확립 하려던 최초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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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푸틴과 천연가스 채굴권에 대해 협상을 했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해서 러시아 언론에서 난리가 났다는.....

단계적으로 가스배관을 한국까지 연결했습니다. (2004년 9월)


아시아 동쪽의 코딱지만한 나라의 못생긴 대통령이 세계 제일의 강국 러시아 푸틴과 협상을 해서(미국와 협상할 때도 거들먹거리던 푸틴이 노무현 대통령과 협상할때는 굽신거렸죠) 대한민국 국민이 평생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의 가스를 확보한 것에 대해 러시아 언론은 들썩거렸으나 대한민국 조중동 찌라시는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검색하면 이 기사를 찾을 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당시, 그 어떤 신문도 위와 같은 사실을 기고하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현정부 이명박,한승수가 자기네 정권이 해낸 것이라며 언론과 짜고 퍼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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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지론 사태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지금 전세계가 휘청거리는데 금융이 취약한 우리나라는 영향이 덜하지요. 놀랍지 않으세요? 미국경제가 기침을 하면 페렴에 걸리는게 한국인데..

비록 집값 상승은 못막았지만, 서민들이 무리하게 대출받아 집사는 건 예방했지요.

대출규제란 것이 참 인기없는 정책이랍니다. 내집 마련이 소원인 사람들한텐 노무현은 웬수죠. 그 당시

국민들에게도 엄청난 반발을 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서민들이 무리한 대출(모기지론)을 받아 집값상승랠리에 빠지는 상황은 막아냈어요.

그나마 그 과실은 이명박씨가 누리겠네요. <- 언론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모기지론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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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특별교부금 (5년 총 6조 전부 사회 환원)

;노무현 대통령은
소위 통치자금이라고 하는 "대통령특별교부금"을 국가사업
필요한 행정기관에 내놓았습니다
이 돈은 오로지 대통령 재량에 달려있는 자금입니다

노 대통령,특별교부금 폐지 검토 지시=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 24일 행정자치부에 대한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특별교부금을 폐지해 보통교부금에 흡수하는 등 개선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당시 “특별교부금은 원칙 없이 정치적 선심사업에 사용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특별교부금의 배분기준을 재검토해 자의적으로 사용될 여지가 없도록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도 특별교부금이 권력층의 쌈짓돈처럼 사용돼 왔다는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특별교부금 제도는 폐지되지 않고 규모와 운용방법 등만 조금씩 변해왔다. 2003∼2004년에는 1조원이 넘던 특별교부금 규모가 2005년부터는 7000억원대로 축소됐고 사용용도도 재해대책비와 특정현안비로 단순화됐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특별교부금이 도로 개설 등 지역개발보다는 사회복지·문화사업에 집중 지원되도록 했고 심사와 사후관리도 강화했다."

결국, 그 돈은 2003년 태풍 매미 피해가 났을때 그 돈으로 복구사업비로 사용했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자신은...단 한푼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 마음대로 사용 할 수 있는 1조원 넘는 돈을
국민들의 피해보상에 사용하게 지시를 한 그가...지금은 퇴임 후.. 
집한채 지을 돈이 없어서 자신의 후원 기업인에게 돈을 빌린 것이 온세상 메스컴에 부패의 화신으로 둔갑하여 기사화 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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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어요? 재임중 많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얼마나 힘이 빠졌을까요. 그 때 언론도, 국민도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민은 언론으로부터 왜곡된 정보만을 들었던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저 또한 그 바보같았던 국민 중에 한 사람입니다..


대통령에게 잘못이 있다면 국민들로부터 질책을 받아야 하고, 잘한 일이 있다면 칭찬을 받아야 마땅 합니다. 살아 생전,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훗날 역사가 나를 평가해 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 시골로 내려오셔도 가진 것 하나없어 지인에게 10억원 빌린것이 뇌물입니까~~다른 대통령들은 몰래 잘 훔쳐오던 뇌물과 대통령특별교부금 6조원중에 1000분에 1 이라도 가져왔으면 그나마 꼬투리 잡힐 것도 없었겠는데요!그걸 로 어려웠던 아들들 유학보내주고 집도 지었으면,,,전과 14범의 이 명박대통령님께서는 돈 많아서 좋겠네요 사회에 환원한다더니 언제쯤할려나언제부턴가 쏙들어가버리고 대통령끝날때까지 얼마나 더 모을실려나,,,민주주의를 공산화시키고 미국대통령만나는 조건에 국민들을 속이고 광유병소고기들이고 촛불집회를 마냥 무슨 북괴집단으로 생각하고 용산참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마치 범인으로 몰아가며 노무현대통령님에게 온갖 죄 붙이려고 하드만 결과 안나오니까 포괄적 뇌물죄(가족이나 친적이 지은죄를 뒤집어 쓰는 것)을 적용하고....그러면 퇴임후에는 이명박 대통령님께서는 한 10번은 절벽에서 떨어지들 듯하네요!!! 갈수록 사회가 불안하네요,,민주주의는 점점 사라지고 서민정치보다는 권력자와 부자정치를 점점 하고있으니,,,이러다가 조만간 10시에 통금령 내릴지도 삭발도 다시 등잘할찌~~~휴우




노무현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

이명박 정부 들어서 삭감한 사회복지 부문 예산 삭감내역

1 사회적 일자리창출 지원금.... 325억원 삭감.
2 장애아 무상보육 지원금.... 50억 삭감.
3 보육시설 확충비용....104억원 삭감.
4 청소년 안전시설 지원비.... 8천만원 삭감.
5 장애인차량 지원비....116억원 삭감.
6 건강보험 가입자지원금....568억원 삭감.
7 학자금대출 신용보증기금 지원액....1천억원 삭감.
(반값,학자금 대출 금리 인하 요구도 묵살)
8 연탄보조금 삭감
9.서울시 독거노인 주말,도시락 보조금 2억원 전액 삭감
10.기초생활 보장 지원 대상자 월 수급비 36만원에서 9만원 삭감.

이와 반대로,
국부총리실 예산 중 총리 공관관리 비용 올해 7600만원 >>5.5 배 늘어난 5억원 배정..
준법시위 정착예산이 560억에서 726억으로 29.6 %증액....
(특히 법질서 바로 세우기 운동 예산이 올해보다 4.7배 늘어난 31억 8800만원으로 책정)
공안수사 예산 올해 29억원에서 38억4800만원으로 32.7% 급증..
방송통신위원회 바람직한 인터넷 이용환경 조성사업을 신설해 51억원의 예산 책정..
- 이용자 의식제고를 위한 홍보(15억원)..
- 인터넷 역기능 예방활동(18억원) 등이 포함..


참여정부 시절 국정홍보처 폐지를 주장해온 이명박 정부는 올해보다 국정홍보 예산을 60억원 증가
- 금융정책 알리기 명목으로 2억8000만원 책정..
- 노동현실 바로 알리기 명목으로 1억5000만원을 배정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및 후속조치 명목으로 3억7000만원의 예산을 책정..
- 초·중·고 일제고사 시험 결과에 대한 분석을 위해 17억원이 배정..

정부는 특히 기초생활보장 예산(1369억원), 장애인수당(419억원), 공공보건의료 확충(650억원), 지역사회서비스투자사업(354억원) 등 소외계층 지원과 사회안전망 강화를 위한 예산들을 삭감했으나 예산심의 과정에서 야당과 언론에 밀려 조정 중..

극빈층같은 사회적 최약자에게 지급되는 복지예산은 생명줄과 같을 진데..
대운하 삽질 예산보단 서민,극빈층 먼저 살리는게 순서 아닐까요???

1% 부자만을 위한정치 그만하시고,,서민예산이나,,예전처럼 늘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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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 사람들의 말과 글이 다양하여 여러 글을 참조하여 재정리해보았습니다.(다소 잘못된 사실이 있거나 미흡하더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1. 정치/제도

1) 탈권위와 분권화


참여정부는 4대 권력기관장(국가정보원, 검찰청, 국세청, 경찰청)에 대해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약하는 국회 인사청문회제도까지 도입하였다.

대통령께서는 탈권력의 힘든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권력기관들을 앞세워 통치하면 반대세력들을 견제해 국정운영을 더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주주의 발전을 더 소중한 가치로 삼은 것이다. 특권을 스스로 버리고 권력기관들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퇴임 후 1년도 못되어 권력기관들이 다시 통치 권력의 시녀로 복귀해버린 지금의 상황을 바라본 노대통령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2) 국가 기록관리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국가기록관리의 허술함에 관한 보도를 보고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행자부 장관에게 지시를 내렸었다.

당장 당시 구성 중이었던 정부혁신위원회에 기록관리 분야를 추가시켰다. 그 이후 정부는 기록관리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전문가들을 총체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기록관리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스스로 '이지원' 시스템이라는 업무관리시스템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이 시스템은 특허청에서 특허를 받기도 했다.

모든 부처가 국가기록에 대한 시스템을 바꾸기 시작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라는 법안을 제정했다. 그 이전까지 없었던 대통령 기록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그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할 때쯤 일반 국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기록을 남긴 업보로 후임 정권으로부터 엄청나게 시달려야 했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기록을 봉하 마을로 유출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건국 이후 최대 국가기밀 유출이라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열람권 확보를 위해 스스로 생산한 대통령기록 사본을 가져갈 수 있는지 행정안전부 및 법제처와 수없이 상의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무시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대 수혜자였던 국가기록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을 대통령기록 유출로 고발하는 사태로 비화되었다. 너무나 큰 애정을 가지고 키웠던 기관으로부터 고발당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너무나 억울한 마음을 홈페이지에 토로한 채 전체 기록을 국가기록원에 반납해야 했다. 하지만 상처는 깊었다. 

수많은 기록관리 전문가들이 분노했다.

2. 경제



1) 지역발전 
서울로의 집중을 탈피하여 지방 균현 발전을 위해 충남 연기군을 행정도시로 전환하고자 한것을 포함하여

주요 정부기관을 지방으로 분산하고자 했던 노력.

충남 연기군 조치원역 앞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에는 노 대통령 서거 4일째를 맞은 26일에도 주민의 추모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이날 분향을 하기 위해 30분간 기다렸다는 임개응씨(53)는 “행정도시를 만들자고 한 게 다 나라 잘 되자고 한 것 아니냐”며 “그렇게 곧은 심지를 가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진다”고 슬퍼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행정도시건설에 대한 주민 불신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행정도시건설을 진두지휘했던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갖는 의미는 각별했다.

2) 부동산 문제

흔히 부동산 문제 만큼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표적인 실패라고들 이야기한다. 물론 수요 조절 중심의 정책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던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노무현대통령만큼 부동산 문제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해악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분투한 대통령은 없었다. 왜 노무현은 그토록 부동산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매진했을까? 그가 꿈꾸었던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최대의 걸림돌이 한국사회에서는 바로 부동산-더 정확히는 토지-문제였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부동산 문제의 해결 혹은 부동산 시장 정상화를 위해 추진했던 부동산 거래의 투명성 제고, 종합부동산세로 대표되는 부동산 세제 정상화, 개발이익 환수장치의 정비, 서민용 장기임대주택의 공급 확대 추진, LTV 및 DTI로 상징되는 주택담보대출 관리 등의 정책들은 부동산 문제의 맥을 정확히 짚은 정책들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없었다면 추진되기 어려웠던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의 효과는 임기 말과 퇴임 후에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 스스로도 부동산 광풍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지만, 그 정책 방향에 있어서는 옳았다.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대한민국 부동산 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역설적이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조합이 주효해 부동산 버블이 더 커지지 않았고 부동산 시장이 연착륙할 수 있었다. 전 세계적 부동산 버블 붕괴사태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이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노 전 대통령의 공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노 전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여 기틀을 마련한 부동산 정책들이 'ABR(Anything But Roh)'을 모토로 내건 이명박 정부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의 상징이라 할 종부세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조중동, 헌법재판소의 협업에 의해 말 그대로 형해화됐다. 양도세도, 개발이익환수장치도, 재건축 관련 시장정상화 조치들도, 주택담보대출관리도, 분양가 상한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명박 정부는 단지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전면적으로 훼손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부동산 정책의 기틀을 송두리째 파괴한 것이다.


-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3) 인터넷 강국으로서의 발돋움

인기협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애도를 표했다. 

인기협은 구글코리아와 다음커뮤니케이션, 엔씨소프트, 옥션, SK커뮤니케이션즈, SK텔레콤, KT, NHN, G마켓 등 포털사이트들을 비롯한 150여개 국내 인터넷 관련 대표 기업들로 구성된 비영리 민간 경제 단체다.
이어 인기협은 “노 전 대통령은 개방과 소통이라는 인터넷의 정신을 몸소 실천해 인터넷 대통령으로 불리울 만큼 인터넷을 인터넷답게 만들었다”며 “한국 인터넷과 정보통신 산업의 진흥에 기울인 관심과 노력에 힘입어 국민과 기업인들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부럽지 않은 디지털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고인의 공을 기렸다.
인기협은 또 “고인이 누리꾼들에게 쏟은 애정과 인터넷 업계에 보내준 격려를 가슴 깊이 간직해 인터넷산업 발전과 인터넷 문화창달을 위해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기협은 마지막으로 “우리의 존경과 사랑의 끈이 그곳에도 닿기를 바라며 부디 편히 쉬시길 바란다”고 적었다.

3. 외교/안보



1) 한미간 동맹


"노무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만난 수십 명의 정상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반미 발언으로 미국을 당혹시켰다. 
그러나 한.미 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친미 대통령이었던)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마이클 그린 전 보좌관

2) 남북한 화해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을 통해서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으로 상징되는 남북화해협력, 양국 정상 만남, 남북총리급 회담 정착, 이산가족상봉, 개성공단 등의 업적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모든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지만.

3) 자주적 독립

한나라당은 여전히 반대 또는 연기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독립된 국가로서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가져온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중요한 업적이다.

4) 국방력 증대

햇볕정책과 군사력 증강은 별개의 문제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주장했고 전지작전통제권 환수 및 조기경보기 4대 도입확정, F15K 60대 도입 확정, 이지스함 역시 3척 도입, 제주도 해군기지군함건설도 확정했다. 또한 크루주 순항미사일 개발, 장사정포 파괴용 무인 폭격기 개발도 지시하였다.

과연 어느 대통령이 주변국과 당당하게 맛서면서 이정도까지 자주국방을 위한 군사력 증강에 최선을 다했는가?

- 네이버 군사력 카페 

5) 이라크 파병 및 한미 FTA 협상




“제가 이라크 파병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그때 언론에서 청와대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다고 시끄러웠거든요. 그런데 파병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저한테 나중에 고맙다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격려금까지 주셨어요. 상황에 밀려 파병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공개적으로 내준 제게 고마우셨던 거죠.”

- 박주현 변호사

4. 인권존중

1) 인권위원회, 과거사 진상조사단

노무현 대통령 조문을 온 아주머니께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너무 고맙다는 것입니다.
몇십년동안 아주머니의 친오빠의 생사를 몰랐다고 하십니다.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께서 과거사 진상규명을 하면서아주머니의 오빠께서 실미도 부대원이어었다는것을 알게되었답니다. 가족의 소식을 알게해줘서 너무도 고맙다고 하십니다.

2) 서민 존중, 인권변호사, 서민을 위한 대통령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피해자 40여명.

노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인 1988년부터 원진레이온의 이황화탄소 등 유독가스 피해 진상조사반을 구성하는 등 투쟁에 앞장 서 1993년 정부로부터 정식 직업병으로 인정 받는데 기여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독가스로 가득 찬 작업장에 직접 와준 유일한 분이었다"면서 "퇴임 직전에도 우리를 청와대로 불러 불편한 건 없는지 챙겨 주셨다"

5. 민주주의 등



1) 참여 민주주의


노무현 대통령

- 인터넷을 통한 개방과 소통 확산

- 퇴임 후 민주주의 2.0

2) 부정부패

잘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깨끗한 대통령이 되기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내가 국세청장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1급 세 자리 인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생전에 처음 받아보는 대통령의 전화였다. 대통령께서 대뜸 말씀하셨다.
L씨를 차장으로 임명한다고 하는 데 로비나 부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청탁인사하면 안 됩니다.
저는 누구의 인사 부탁도 듣지 않습니다.
허허, 그래요. 알았습니다.
청와대가 인사부탁을 하면 아무리 소신 있는 기관장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국세청장 재임 2년 동안 대통령으로부터 단 1건의 인사 관여도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어줄까?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다."- 전임 국세청장 이용섭

3) 지역간 이기주의 타파

바보 노무현, 부산 출마.

그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쉬운 곳을 버리고 고집스럽게 부산을 선택했다. 이곳에서 연거푸 떨어진 이유는 순전히 김대중이 이끄는 호남당 후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바보 노무현은 정면으로 항변했다.
“도대체 호남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 왜 전라도 사람은 항상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영남선거에서 호남편견에 맞서 이처럼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맞선 정치인이 누가 있었는가?

4) 권위주의 타파

대통령 권위주의 등 과거 정치의 권위의식 타파 노력, 서민대통령


 

우리 가슴속의 영원한 서민대통령. 사랑합니다.
  
추가자료  "대한민국 정권별 주요 통계 지수" 
 © NHN Co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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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와 어거스틴

마르쿠스 바로(Marcus Varro)라는 인물이 궁금하다. 히포의 주교는 바로가 "가장 박학하고 예리한 학자"라고 한 키케로와 "모든 분야의 학문에 능통한 사람"이라 한 마우루스 진술에 동의하며

“그는 너무나도 많은 분량의 책을 독파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언제 저술할 시간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이며, 너무나도 많은 저술들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 그것들을 전부 섭렵할 수 있을런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아무리 학식이 탁월해도 계시 의존적인 어거스틴 관점에 의해 바로의 저술들은 판단의 도마에 올려지고 만다. 바로는 인간적인 일들에 관한 저술들이 신적인 것들에 대한 저술들에 앞선다는 서열화의 이유를 국가가 먼저 존재하고 국가에 의해 신적인 것들이 제정된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히포의 교부가 보기에 참종교는 지상의 어떠한 국가에 의해 제정되지 않았으며 영생을 베푸시는 참 하나님에 의한 영감과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여 신들의 어떠한 부분이 인간적인 것들 전체보다 선행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지를 반문한다. 그리고 바로의 속내를 들추면서 바로 자신도 속으로는 신들의 본성보다 인간의 본성을 우선시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보다 인간 자체를 우선으로 여겼다고 추정한다. 희포의 주교는 당시 학문의 권위였던 바로를 이런 식으로 다루었다.

한마디 더 코멘트를 달자면,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인간을 아는 지식에 선행하고 있다는 쯔빙글리 및 칼빈의 신학적 진술 순서는 이미 어거스틴 마음에 착상된 것이었다.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아브라함 카이퍼의 Encyclopedia of Sacred Theology

아브라함 카이퍼의 Encyclopedia of Sacred Theology (1898)의 타이핑 파일을 발견했다.

Abraham Kuyper, Encyclopedia of Sacred Theology (1898)

Errores Philosophorum의 철학자 비판

중세에 관련된 문헌들을 숙독하고 있다. 오늘은 로마의 가일즈(Giles of Rome)가 저술한 소책자 Errores Philosophorum을 읽었다. 거기에서 가일즈는 철학자의 견해가 기독교의 진리와 공존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아베로이즈, 아비첸나, 마이모니데스 등의 오류들을 정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1) 모든 변화는 운동에 후행한다.
2) 시간은 시작이 없다.
3) 세상은 영원하다.
4) 하늘은 생성되지 않았고 소멸될 수도 없다.

아베로이즈
1) 세상은 시작이 없다.
2) 개별적인 존재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은 없다.
3) 하나님 안에서의 삼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지성은 수적인 면에서 모든 존재 안에서 하나이다.

아비첸나
1) 변화하는 어떠한 것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올 수 없다.
2) 하나님은 독특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진술들이 가진 개별적 본질에 대해 알지 못하신다. 
3) 하나님의 속성들은 오직 제거의 방식으로 설명되며 하나님의 어떤 긍정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4) 지성은 악할 수 없다.

마이모니데스
1)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은 위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상일 뿐이다.
2) 선지자는 스스로 세워진 자다.

철학이든 기타 학문이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절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절충의 중심추는 성경의 진리이다. 특별히 숙고해야 할 사항은 올바르고 선하고 참된 모든 것들의 출처가 빛의 아버지인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이다. 당연히 "올바르고 선하고 참된" 것들과 성경의 진리를 연결하는 방식에는 각자의 주관적 임의성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각자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거룩의 요청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12:1)

어떤 구약학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레위기 이야기가 나왔다. 그분은 로마서 12장 1절이 레위기의 핵심이요 요약이라 하셨다. 레위기의 핵심은 거룩이다. 그러나 그 거룩의 본체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은 하나님께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셨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는 레위기의 전부시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우리들도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우리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정해진 순서를 따라 드려지는 격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과 삶 전체가 예배라는 사실의 모형이요 요약이다. 레위기는 우리의 인격과 삶 전체의 거룩을 요구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의 일상 자체가 어떠한 거룩을 담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행위이고 하나님의 것이다. 거룩은 우리가 소유하고 취득하는 사물이 아니다.

다른 서신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거룩이 되신다"고 기록한다. 레위기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거룩의 실체는 바로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 예수시다. 레위기의 거룩은 우리에게 어떤 거룩의 실체가 생기거나 소유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거룩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친히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시면서 우리는 죽고 그분만이 사셔서 그분이 우리에게 거룩이 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룩이 되시는 방식은 우리의 죄를 들추시고 고발하고 도려내는 고통과 환란과 역경과 아픔과 억울을 통해서다. 정금 같이 나아오기 위해서는 체질이 녹아 내 형상을 알아볼 수 없도록 자기가 부정되는 과정이 요구된다. 거룩은 깔끔한 옷차림과 반듯한 생활태도 그리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환경이 구비되는 것과 무관하다. 우리를 더럽히는 거룩에의 역주행은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한다.

거룩의 요청은 거룩의 본체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삶의 입에서 그분이 열매와 향기와 빛으로 나오시는 것과 관계한다. 레위기는 우리에게 그것을 요청한다.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는 살고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거룩의 정도는 내가 얼마나 죽었고 주님은 얼마나 내 안에서 사시고 계신지에 따라 가늠된다. 거룩의 길이 여전히 아득하다.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말씀의 왕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행6:7)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흥하고 망하는 가시적인 현상을 쉽게 목격한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숫자가 많아지고 어떤 문화적 주도권을 장악하여 흥하는 경우도 많고 그러한 것들의 부재로 말미암는 쇠퇴도 많다. 이러한 현상을 교회사의 노른자로 여기고 현미경 분석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괜찮은 교훈을 생산하고 그걸 역사에서 건져야 할 교훈으로 삼아 장기간 보존하고 축적하는 일련의 역사화 작업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누가는 교회의 흥왕을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진 탓으로 돌린다. 말씀의 왕성을 기준으로 교회의 흥망을 진단하는 누가의 예리한 붓길에 역사신학 전공자는 매료될 수밖에 없다. 누가의 경건한 역사적 감수성은 이사야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어지럽고 비틀거리는 쇠락은 환경의 독주나 포도주 때문이 아니라 잠들게 하는 여호와의 신 때문이요 그들의 눈인 선지자를 가리고 그들의 머리인 선견자를 덮였기 때문이라 했다.

지금의 한국교회 모습을 다양하게 진단할 수 있겠다. 쇠락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부분 공감한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각자에게 친숙한 가까운 원인들이 두루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을 하나님의 말씀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그런 진단은 피상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 우리의 지각과 인과율이 촘촘하다 해도, 그런 그물망에 걸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성경의 빛으로 조명된 현실인식 없이는 상황의 표피에서 벌어지는 주장의 대립과 감정의 충돌과 견해차의 조율로 우리의 관심사가 소진될 것이고 그러면 교회의 개혁과 흥왕은 요원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교회의 흥망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교회의 참된 개혁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교회의 개혁과 흥왕의 인과적인 방식은 말씀의 왕성을 통해서다. 신학자와 목회자의 책임이 크다. 동시에 말씀의 왕성은 성도된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의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 쇠락의 책임소재 떠넘기기 공방은 어떠한 경우에도 타당성이 없다.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선 자리에서 말씀의 왕성에 각자에게 주어진 방식대로 이바지할 때이다. 이런 방식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한다. 내가 감당해야 할 말씀의 왕성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부족한 재능으로 짧은 여생을 살겠지만 교회사 속에 등장했던 '최고'의 신학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에 일단은 전념하고 싶다.

물론 말씀의 왕성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과 우리 각자의 공로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은 망각하지 말아야 하겠다.

인류의 조상이 범한 죄의 다양한 겹들

우리의 혈통적인 조상 아담과 하와의 죄는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퍼킨스는 주장한다. 

1) 불신 (unbelief):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불신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을 경멸함(contempt of God):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보다 사단의 거짓을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3) 교만과 야심(pride and ambition): 그들은 하나님과 같아질 목적으로 금지된 실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4) 배은망덕(unthankfulness):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탁월한 피조물로 지었지만 하나님과 "동일하게(equal)" 되지 않고 "같아지는(like)"는 정도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 호기심(curiosity): 호기심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실 때에 주셨던 것보다 더 위대한 지혜 추구에 이끌렸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시하신 지식의 분량 그 이상의 것을 원하였기 때문이다. 
6) 책망받아 마땅한 불경(reproachful blasphemy): 그들이 사단의 말을 승인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거짓되고 시기하는 분이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다. 
7) 살인(murder):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통 및 은총과의 단절을 스스로 초래했기 때문이다. 
8) 불만(discontent):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설정하신 것보다 높은 상태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일한 행위로 하나님의 법 전체를 훼손했다. 이는 극도로 세세하게 분할되고 경중이 뚜렷하게 구분된 법의 전문화 시대에는 쉽게 납득가지 않는 논리겠다. 그러나 어떠한 범법이든 그것이 크든 작든 범법의 대상과 주체와 본질을 생각하면 결코 억거지가 아님을 확인한다. 퍼킨스는 이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이 내려지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공의를 높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은 형언할 수 없음을 배운다고 하였다.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권리를 포기하는 신앙

고린도전서 9장 18-19절 

본문의 서두에서 바울은 자신이 자유자며 사도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의 증거를 자신이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는 않고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습니다. 성경에서 사도는 진리의 터와 기둥인 교회의 기초를 다지고 골격을 세우는 지도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막대한 권위와 권한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도 바울의 사도적 정체성은 거기에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이 땅에 대접과 환대가 아니라 종의 형체로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자신의 생명도 대속물로 내어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본문은 바울의 사도권 변증과 연결되어 있다. 뭔가 대단한 권력과 권세와 권한과 권리를 가졌다는 식으로 진술할 법한데,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도성의 증거로 강조한다. 

2.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경건의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지 못해서 누리지를 못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러나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리지를 않는 것은 권리의 자발적인 포기에 해당한다. 

3. 권리의 자발적 포기의 모델은 그리스도 예수시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함이 합당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을 비워 우리와 같이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며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이시다. 

4. 예수님의 일생은 자기권리 포기의 삶이었다. 대표적인 권리포기 사례를 우리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당하신 시험에서 발견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림을 따라 광야로 가셨고 그곳에서 40주야를 금식하신 이후 주리신 상황에서 사단의 치사한 먹거리 시험을 받으셨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다면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게 시험의 골자였다. 

5. 여기서 사단이 노리고자 하는 것은 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게 만드는 것 (누가복음 4장 34절에 의하면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 아버지 하나님이 명하신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일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 3)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뜻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순종하지 않게 유인하는 것, 4) 예수님의 불완전한 순종을 유도하여 인류의 구원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것, 5) 입증하는 순간 예수님이 사단에게 순종한 셈이 되게 만드려는 것 등이겠다. 

6.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의 이러한 노림수에 놀아나지 않으셨다. 사단의 제안에 정면으로 반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변경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타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 입증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동의를 받아내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확보하는 분이 아니시다. 당연히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다. 

7. 물론 예수님은 창조자 하나님이 되시기에 무에서도 떡을 만드실 수 있고 모든 것들의 주인이기 때문에 돌을 취하여 떡으로 변화시킬 권리와 능력과 명분도 당연히 가지고 계시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단의 제안에 말려드는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생의 근원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주도적인 반응을 보이셨다. 

8. 사람들은 어떤 것을 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행할 능력도 구비하고 있으며 게다가 행해야 할 명분까지 있다면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에 어떠한 문제점도 의식하지 못한다. 너무도 당연한 권리를 행하는 것 속에도 어떤 유혹과 시험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속내는 물론이고 사단의 도모와 생각을 아신다고 기록한다. 지당한 것을 정당하게 행하는 것도 유혹일 수 있다.

9. 예수님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예언의 성취요 율법의 마침과 완성으로 이 땅에 오시었다. 일례로 레위기의 핵심은 거룩인데 그리스도 예수는 거룩 자체시다. 예수님의 삶은 말씀이 응하는 삶이었다. 말씀을 따라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셨다. 

10. 바울의 자기권리 포기는 자기 자신보다 복음을 더 사랑하지 않고서는 취할 수 없는 처신이다. 그러나 내 생명을 버리고자 하면 얻고 구하고자 하면 잃는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은 진리이다. 죽는 게 사는 것이고 포기하는 것이 취득하는 것이다.

11. 구약의 권리포기 사례: 1) 창세기 14:21-24절의 아브라함,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리가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2) 에스더 8장 11절과 9장 15절의 에스더와 유다인들, “조서에는 ...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라...유다인이 모여...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했다.” 재산을 탈취하는 것은 조서에 분명히 명시된 합법적인 권리였다. 유다인이 적법한 노획물 취득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는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할 때에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최악의 불경을 저질렀던 과거의 역사를 유다인이 기억으로 더듬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사울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취했으나 에스더의 유다인은 적법한 것까지도 챙기고자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중첩된다. 

12. 여기서 유다인의 태도가 주는 교훈이 심히 육중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이 설정한 삶의 범위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적법하게 합의된 권리나 자유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빛이 발휘되는 계기가 아니라면 과감하게 거절하고 스스로를 쳐서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다다익선 차원에서 무엇이든 있을 때 챙기고자 하는 순간 오히려 유혹의 덫에 걸려든다. 나에게 유익하던 것이 배설물과 해로움의 근원일 수 있음은 이미 바울이 똑 부러지게 잘 말하였다. 자유와 권리가 극대화된 나라와 시대에서 관찰되는 공통된 교회의 모습은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다운 면모가 사라지고 맥아리도 없어진다. 삶의 원리와 규범인 하나님의 말씀에 제어를 받는 삶이 아니라 세상이 허락한 자유와 권리 구가하는 일에 급급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겠다. 

13.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을 사도의 증거로 제시했다. 나아가 그런 포기가 하나님께 자신이 받을 상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자기권리 포기를 “절제”라는 성령의 마지막 열매와 연결한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성숙의 증거이다. 성숙한 사람만이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타인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자아에 갇힌 사람은 자신과 관련된 어떠한 것도 포기하지 못한다. 보다 큰 이익을 위해 작은 이익을 희생하는 차원의 포기는 가능할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자기권리 포기는 기대할 수 없다. 

14.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 자유하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는 막대한 자기권리 포기의 길을 고집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실상을 만물의 찌끼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4)”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바울은 모든 사람들 중에 으뜸이 된 사도였다. 예수님이 비천한 말구유를 인생의 입구로 삼으시고 비참한 십자가를 인생의 출구로 삼으시는 실질적인 종의 행보로 일관하신 것처럼 바울도 그런 식으로 으뜸의 길을 걸었다.

15.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단순히 모든 것들을 실컷 누리다가 마치 적선하듯 남에게 여분을 양도하는 ‘처분’이 아니다. 자신의 마땅한 자유를 제한하되,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살 권리마저 상대적인 수단으로 돌릴 수 있는 예수님의 희생적인 십자가 인생을 방불하는 삶을 의미한다. 사망은 내게 역사하고 이로 말미암아 생명은 타인에게 역사하는 삶이 자기권리 포기이다. 그런데 그런 포기의 삶을 바울은 하나님께 받을 상급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내 권리를 스스로 취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상급을 선택할 것인가?

으뜸에 이르는 종의 길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예수님의 불편하고 역설적인 말씀에 존재가 부서진다...강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러셨던 삶의 언어화다. 비천한 말구유를 인생의 입구로 삼으시고 비참한 십자가를 인생의 출구로 삼으시는 실질적인 종의 모습을 보이셨다.

바울도 스스로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자유하나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으뜸이 되는 행보를 고수했다. 복음을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하는 삶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는 은총의 구체적인 길이 궁금하고 목마르다.

2013년 6월 23일 일요일

중세 성경 해석학

Henri De Lubac, Medieval Exegesis

1) 성경의 4중적인 해석은 교부들의 전통이며 중세에 더욱 발전된다.
2) 특별히 영적인 해석(allegoria)이 중요하고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적 해석의 열쇠로 갖는다.
3) Smalley의 문자적 역사적 해석에 대한 강조를 비판하되 그런 해석은 건조하고 건덕에도 유익이 되지 않아 중세의 독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4) 4중적인 성경 해석학의 타당성은 4복음서와 계시록의 네 짐승들과 교부들의 네 가지 성향들과 신학의 4중적인 학문적 분류법도 증거하는 바라고 주장한다.

Beryl Smalley, The Study of the Bible in the Middle Ages

1) 중세의 신학은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2) 당연히 성경 해석학은 중세의 신학 전체와 맞먹는다.
3) 성경의 의미는 단일한 역사적 문자적 의미이다.
4) 사중적인 해석도 중세 해석학의 일부지만 다른 영적 의미들은 역사적-문자적 의미의 파생적인 의미 내지는 적용이다.
5) 드 루박의 논지는 30년이 지난 증보판에 의해 반박된다.

Ceslas Spicq, Esquisse d'une histoire de l'exégèse latine au moyen âge.

1) 중세의 성경 해석학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4중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
2) 4중적 해석의 대표적인 인물은 그레고리 대제이며 풍유적 해석과 교훈적 해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3) 문자적 해석은 텍스트의 영적인 의미들을 배격하지 않으며 알버트 대제와 토마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2013년 6월 22일 토요일

둘째의 궁금증

둘째가 레위기를 읽다가 갑자기 첫째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아, 레위기는 누가 쓴 거야?"

"모세!"

녀석이 벌써 레위기 저작설에 관심을 가진 것을 보니 성경의 제2저자 및 그와 관련된 역사적 상황이 고려된 문맥적 레위기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에 '대견하고 기특하다' 칭찬이 입술에서 막 출고되려 할 때...

"왜 이렇게 재미없게 썼어?"

온 가족이 집단으로 빵 터지고야 말았다. 푸하하하...그러나 난 얼른 자리를 피했다. 나도 평소에 100% 공감하며 늘 성기문 교수님께 자문을 얻고 싶었던 대목이기 때문이다. 의문의 불똥이 튀기 이전에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여...ㅋㅋㅋ

성경과 신학의 중세적 동일시

오늘은 왠지 신학과 성경을 동일시한 중세의 거인들이 생각난다.

보나벤처: "신학이라 불리우는 성경(Sacra Scriptura quae theologia dicitur)"
아퀴나스: "성경이라 불리우는 신학(Theologia quae sacra Scriptura dicitur)"

성경과 신학이 서로 구분하지 않을 정도의 긴밀한 관계성을 지녔다고 본 중세적 신학 개념이 뇌리를 휘감는다. 비록 중세의 구체적인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는 "오직 성경"과 "전 성경" 사상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지만 성경과 신학의 동일시와 그것이 주는 긍정적인 교훈들은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다. 즉 "신학은 성경을 한 이오타도 더하거나 감해서는 아니되며, 성경이라 불려질 정도로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2013년 6월 21일 금요일

이중적인 가르침

"연단은 교리의 지표"라는 터툴리안 어법을 따라 교부들은
경건은 교리와 병행하고 엄숙성은 연단과 손을 맞잡으며,
참된 교리와 단련된 미덕은 병행해야 하며,
탐독의 열정과 행실의 연단도 동전의 양면이며,
잘 배운 자는 현명한 동시에 연단된 자이며,
라헬과 레아에 비유되는 사색과 행위의 통합이 요구되며,
자녀를 가르치는 경건한 아비의 이중적인 역할은
연단에 있어서는 아론의 지팡이가 되는 것이며
교리에 있어서는 주님의 식탁이 되어야 하겠고,
연단의 육중한 무게와 교리의 진정성은 동일하다 하였다.

네 명의 라틴 교부들

네 명의 경건한 라틴 교부들의 독특성이
중세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묘사된다.

달콤한 능변의 소유자요 깨끗한 삶의 주인공인
그레고리는 "인간"의 얼굴을 가졌으며,
엘리야와 같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악에 침묵하지 않는
암브로스는 강력한 "사자"와 같은 교부이며,
두려움 없이 성경의 방식에 꿋꿋이 몰입하는
제롬은 "황소"와 같으며,
이 모든 교부들 중에 어거스틴은
고결함을 추구하는 경건한 사람이며
"독수리"의 얼굴을 가진 교부로 묘사됨이 합당하다.

제롬은 "엄격성"에 있어서의 모델이고,
어거스틴은 "겸손"에 있어서의 모델이고,
암브로스는 "점잖음"에 있어서의 모델이고,
그레고리는 "참음"에 있어서의 모델이다.

어거스틴은 사물을 "명료하게" 진술하고,
제롬은 사물을 "우아하게" 설명하며,
암브로스는 사물을 "박식하게" 해명하고,
그레고리는 사물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다룬다.

그레고리는 그의 "매력과 감미로운"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의 "절묘한 전문가적 논증" 때문에,
제롬은 "견해의 묵직한 위엄" 때문에,
암브로스는 그의 "사변적인 논박" 때문에 압도된다.

제롬은 역사의 현장에서,
암브로스는 풍유의 현장에서,
그레고리는 유비의 현장에서
지칠줄 모르는 수고의 땀방울을 흘렸고
어거스틴은 모든 현장을 정탐했다.


De Lubac, Medieval Exegesis, 1:6-7.

2013년 6월 20일 목요일

복음의 복음다운 증거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2)

진리가 한 사람에게 심어지는 것은 사망에 가까운 고통을 수반한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좌우에 날 선 검으로서 진리는 생명과 사망의 역사를 동시에 수행한다. 방식은 죽음에 이르는 죄를 죽이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식탁을 내시고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으신다. 사람이 함부로 공로의 숟가락을 얹을 수 없는 복음의 역설이다.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야 비로소 생명을 경험한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증거겠다. 생명에 이르는 합당한 죽음의 수단도 인간이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망은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에게 역사했고 그 결과로서 생명은 우리에게 역사했다. 사자의 죽음에서 꿀이 나오는 이치는 인간 문맥에서 생산되고 공유되는 상식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역사의 신비를 푸는 열쇠이다.

진리가 역사의 한 토막에 심겨지는 것은 반역의 땅이 전복되는 변동을 수반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땅을 기경하여 진리를 심으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은 중단되지 아니했다. 짐승을 잡아 죄문제를 해결하는 제사법에 주님의 죽으심이 투영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역사는 사망과 생명이 손을 맞잡은 역사였다.

한 개인의 삶에서, 죽음 같은 고난의 터널을 길게 지나간 이후 그의 영혼에 진리가 새겨지고 동일한 고난의 착찹한 반복을 경험하는 사람을 그 진리가 살리는 현장을 때때로 목격한다. 사망에 준하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다'는 다윗의 증언, 그런 배움이 백성에게 수혈되는 사망과 생명의 교차적인 역사도 같은 맥락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고달픈 고난의 연속이라 하여도 인간문맥 속에서 합의된 기준을 따라 마치 실패한 인생인 것처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복음의 속성을 따라 타인에게 생명이 역사하기 위해 사망이 자기에게 역사하는 증인의 연단 과정일 수 있어서다. 한 민족의 역사가 일정기간 어둡다고 하여 저주받은 민족이라 속단하지 말아야 함은 생명의 역사를 준비하는 사망의 기간일 수 있어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을 어떤 식으로든 통과해야 한다. 사망에 버금가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 타인에게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복음의 속성은 결코 "좋은 게 좋다"는 식이 아니다. 사망과 생명의 조화와 교차이다. 복음의 일꾼이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바울의 태도가 요구된다. 너무 비장한가?

그러나 복음이 복음다운 방식을 따라 복음답게 증거되는 방식이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피해가지 못한다. 편하게 배불리 먹고 살 궁리에 분주한 사람은 복음 증거에 전무하는 일꾼의 길을 접으셔야 한다. 어쩌면 이제는 잘 되었다. 목회자의 길이 사회적인 혐오의 눈길을 감수해야 하는 작금의 분위기 말이다. 목회자의 길이 만물의 찌끼 되기를 각오하는 길이 된다면 슬프지만 바람직한 분위기다.

사망은 우리에게 생명은 타인에게 역사하는 것, 이것이 성도의 올바른 삶이요 목회자의 올바른 길이다.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종교개혁 시대에서 정통주의 시대까지: 근대 초기의 개혁주의 전통

멀러 교수님의 총신대 발표논문 한역본 (Calvin and the Reformed Tradition, pp.13-50에 보다 확대된 글로 수록됨)

1.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16세기 초중반의 종교개혁 발발과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 발생한 반고백적 움직임 사이에는 개신교 신앙과 신학, 교회적 문화와 지성적 문화에 있어서 현저한 발전이 있었다. 신앙의 고백화와 신학적 체계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발전은 제도적인 형태의 개신교 출범으로 묘사될 수 있으며, 그러한 개신교의 형태는 종교개혁 시대에 발생한 로마와의 단절이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주로 1세대와 2세대의 종교 개혁자들이 작성한 신앙 고백적 문헌들을 가지고 종교적 교리적 정체성 정립을 시도하는 태도 속에서 틀지워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고백적 정통주의 개신교 사상의 발전이며 혹은 일반적인 칭호로서 개신교 정통주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방법론적 관점에서 그 발전을 진술하고 분석하는 것은 기존의 연구 문헌들이 취하였던 방법으로 여러 개인들의 신학과 주요 신앙 고백적 논쟁들을 단순히 해석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복잡하다.

칼빈과 같이 한 명의 중요한 신학자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그런 개혁주의 전통의 발전을 해석할 수 없으며 칼빈 당시의 발전조차 풀어낼 수 없다고 한다면 하물며 거의 두 세기의 기간동안 일어난 발전을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울 것이다. 비록 로마 카톨릭 학자들과 루터주의 학자들과 알미니우스 교리와 관련된 논쟁까지 분석한다 할지라도 그 발전상을 보여주는 적합한 그림은 제공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신앙 고백적 차원까지 이르지 않은 논쟁들도 대단히 많고 비록 교리적 체계화의 다양성을 따라 발전하긴 하였으나 중요한 논쟁의 주제가 되지는 않았던 논쟁들도 대단히 많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일반이나 특별히 개혁주의 전통은 무에서 산출되지 않았다. 중세 후기의 종교적 신학적 문맥 안에는 광범위한 중세 후기적 종교개혁 배경이 있었으며, 종교개혁 및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로 흘러 들어간 다양한 신학적 흐름들도 있었다. 게다가 그것들을 수용하는 형태에 있어서도 신학자들 개인마다 다양했다.

개신교의 신학 발전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기존의 학문연구 일반이 보여준 과도하게 단순화된 설명을 거절하고 그 발전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한때 신학의 밀봉된 상자로 묘사된 종교개혁 시대는 이제 중세로 소급하고 근대 초기까지 확장된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그 시대의) 개신교 신학자들 개개인은 이제 전적으로 새롭고 극도로 성경적인 신학의 산출자로 이해되지 않고, 그의 직접적인 신학적 뿌리는 중세 후기의 신학적 토양에서 발견해야 하고 그의 규범적인 자료들은 교회의 보다 오래된 전통의 보다 포괄적인 영역을 포함하는 과히 보수적인종교 개혁자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게다가 상당수의 학자들이 루터, 멜랑톤, 쯔빙글리, 불링거 및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 개개인은 그들의 스승들과 직접적인 선행자들 사상 혹은 그들의 동시대 인물들의 신학적 체계와 동떨어진 독특한 신학의 창시자로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개신교 신학 발전의 복잡성과 다양성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의 중요성은 특히 때때로 칼빈주의로 규정되는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연구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칼빈 이전 시대에 이 전통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로 개인적인 방식이든 다른 사람과의 협의를 통해서든 개혁주의 고백 문헌들의 첫번째 겹을 형성한 여러 인물들을 포함한 중다한 수의 종교 개혁자들이 있었으며 칼빈 자신의 신학은 이러한 기존의 문맥과 자기 세대의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발전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건대, 개별 인물들을 이러한 보다 광범위한 종교적 신학적 문맥에서 분리하면 개혁주의 신학의 발흥 즉 특별한 개혁주의 전통의 형성은 제대로 분석될 수 없거나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별 인물들의 신학적 체계화는 문맥에서 분리해서 보거나 개개인들 간의 일대일 비교를 통해서는 올바르게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존 맥닐(John T. McNeill)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칼빈주의 역사와 특성(History and Charater of Calvinism)』 서두에서 개혁주의 전통의 발전은 처음부터 칼빈과 쯔빙글리 신학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차이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다고 그러한 차이들이 신앙 고백적인 전통을 분리하는정도까지 심각했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맥닐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불가피한 약어로서 지금 칼빈주의로 불리는 쯔빙글리 사상을 그것보다 광범위한 운동의 일부로 규정하는 것은 어떠한 부조화도 초래하지 않는다.’[1] 물론 그런 약어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우리는 칼빈주의(Calvinist)’ 대신에 보다 정확한 용어로서 개혁주의(Reformed)’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개혁주의 전통을 주장하며 칼빈과 불링거 사이의 지적인 이간을 시도하고 혹은 칼빈의 신학과 칼빈의 이탈로 규정되는 베자의 신학 사이에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며 칼빈과 베자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는 시도들은 불합리한 근거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러한 시도들은 하나의 신학적 전통 내에 개별적인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지 못한다. 신학자들 개개인의 교리적 체계화를 위해 다양한 선행자들, 자료들 및 문맥들이 있다는 사실도 수용하지 못한다. 나아가 신앙 고백적인 전통의 형성과 발전이 교리적 체계를 세운 다양한 그룹의 인물들이 개입하여 이루어진 사실도 관찰하지 못하고, 전통이 다양한 환경에서 저술된 일련의 문헌들에 의해 묘사되는 것이라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전통 자체에 속한 관계성과 차이점의 유형들도 파악하지 못한다. 방법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이간적인 시도들은 한 주요 신학자의 교리적 체계화가 가지는 보다 구체적인 특징들이 동일한 신앙 고백적인 전통 안에 속한 다른 인물들에 의해서는 어떻게 다르게 수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지각하지 못한다.

2. 중심인물 접근법(Master Narratives)의 종식

종교개혁 및 16세기 후반과 17세기 개신교 안에서 나타난 발전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최근 50년간 이루어진 근대 초기의 신학적 역사 연구의 중심 주제였고 근대 초기 개신교 사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현저하게 개선해 주었다. 지성사적 관점으로 본다면, 그 재평가의 일부는 종교개혁 역사를 연구하는 자들 편에서 이루어진 종교개혁 이전의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 시대에 대한 학문연구 일반을 받아들인 것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 연구 결과가 개신교 사상의 신앙 고백적, 교회적, 학문적, 교의학적 체계화의 발전에 적용될 때에 종교개혁 및 그것을 이어간 정통주의 모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현저하게 변화시켜 주었다. 이러한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 연구는 종교개혁 시대에서 정통주의 시대로 이어지는 발전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옹호한 학자들이 제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던 연구이다.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에 대한 변화된 이해를 가진 새로운 학문연구 풍조는 개신교 사상의 발전에 대한 기존의 여러 입장들을 산출한 학자들이 크게 간과했고 그런 입장들을 끝까지 고수하는 자들에 의해 계속 간과되어 왔던 방대한 규모의 문헌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개혁주의 사상의 근대초기 발전을 다시 평가하는 작업은 그 분석의 틀을 주로 개혁주의 전통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및 다양성 등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재평가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개혁주의 전통 자체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개혁주의 전통 자체의 초기 시기들과 초중기 정통주의 시대로 불리우는 개혁주의 사상의 이어지는 시기들 속에서 일어난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의 신학적 문헌들에 대한 개혁주의 수용 및 사용에 대한 탐구까지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대단히 방대한 개혁주의 개신교 문헌들을 고려할 때, 재평가의 이러한 요소들은 기존의 학문연구 일반이 고수했던 중심인물 접근법의 결함을 대체할 충실한 대안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2]

기존의 중심인물 접근법(master narrative) 19세기와 20세기의 교의학적 관심사에 주로 의존하고 있는 광범위한 신학적 일반화와 근대초기 지성사에 대한 후기 칸트적 이해에 기초한 일련의 철학적 전제들로 특징지어 진다. 그 접근법의 신학적 형태와 철학적 형태는 모두 서로 대립되는 철학으로 간주되는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 사이의 갈등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중세와 종교개혁 사이의 꽤나 극단적인 단절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게다가 이 접근법은 스콜라주의를 중세의 철학적 체계로 간주하고 그것을 종교개혁 신학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최소한 개신교 사상의 제대로이해된 관점에서 볼 때 중세 말기와 더불어 그 기능이 상실된 것이라고 이해했다. 나아가 그 접근법은 어떤 개인들과 어떤 문헌들을 추앙하되 동시대 인물들 혹은 역사적 맥락들에 대한 관심을 배제시킬 정도로 높이는 역사의 위대한 사상가접근법과 연관되어 발전해 왔다.

간단히 말하면, 그러한 신학적 접근법의 대다수 유형들은 칼빈을 컨텍스트 밖으로 끌어올려 개혁주의 전통 혹은 칼빈주의창시자로 규정하고 혹은 『기독교 강요』를 칼빈 자신의 사상의 근원적인 자료로 삼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에서 이어진 모든 발전들을 이해하는 규범으로 간주하며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논쟁을 양산했고 전통의 본질을 왜곡시켜 왔다. 이러한 접근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을 가지고 있다. 두 개는 예정론과 언약론에 관한 교리적 주제와 관련하여 19세기에 발생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정통주의와 결부된 그리스도 중심주의 개념에 기초하여 20세기에 발생한 것이다. 주로 알렉산더 슈바이처(Alexander Schweizer) 문헌과 관계되어 있고 하인리히 헤페(Heinrich Heppe)의 연구에 의존한 첫번째 유형은 예정론을 칼빈주의 교의학의 중심으로 이해하며 칼빈 자신은 그 입장의 선두 주자이며 신학의 예정론적 체계로 이해되는 이후 칼빈주의 발전과의 연속성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3] 두번째 유형은 칼빈적인 예정론적 궤적과 멜랑톤적 독일 개혁주의 흐름 사이를 구분한 헤페의 입장에 기초한 것으로서 언약을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적 접근법의 중심적인 대안으로 이해한다.[4] 세번째 유형은 여러 신정통주의 학자들과 연계된 것으로서 칼빈의 신학을 신정통적 신학의 표준으로 확정하고, 그의 사상을 그리스도 중심적인 모형으로 흡수하고, 칼빈과 예정론적 칼빈주의 인물들 사이에는 대립적인 관계가 있는 듯한 논리를 펼친다.[5] 이 세 가지 유형들은 모두 대단히 다채로운 역사적 발전에 고도의 교의학적 일반화를 과도하게 강요하는 환원주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접근법을 따라 자주 읽혀지는 근대 초기 철학사에 관한 심각한 중심인물 접근법은 종교개혁 발흥을 스콜라주의 및 서구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종결로 이해하고 그것의 17세기 속에서의 지속은 퇴화된 흔적으로 간주하며 합리론이 귀납적인 데카르트 형태이든 연역적인 베이컨 형태이든 다른 다양한 철학들과 아무런 마찰을 일으킴도 없이 출범하여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전적으로 대체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이런 접근법은 17세기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 소요학파 전통의 역동적인 지속성과 스콜라적 방법론의 지속적인 활용을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로써 개신교 정통주의는 종교 개혁자들 사상을 이탈하게 되었다는 입장을 개진했다.[6] 실제로 근세 초기 철학의 여러 역사들 안에 언급되는 전형적인 인물들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말레브랑쉬, 라이프니츠, 로크 등이며 때때로 베이컨이 언급되고 가상디가 보다 드물게 거명된다. 이들은 모두 과거와의 거대한 단절을 보여주는 사례요 근대성의 창시자로 취급된다. 이러한 보다 넓은 철학적 접근법과 결부된 것으로서 개신교 사상에 대한 두 가지의 주요 대안적인 접근법이 등장했다. 첫번째 접근법은 르네상스 운동을 중세의 미신을 제거하기 시작하고 인간에 초점을 둠으로써 그 미신을 대체한 운동으로 간주하고, 종교개혁을 신학적 철학적 자유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잘된 일이든 잘못된 일이든 합리론의 효시로 규정한다.[7] 중심인물 접근법은 이러한 이해를 뒤따라서 개신교 정통주의 및 그것의 스콜라적 경향성을 종교개혁 정신과 맞서는 교조주의 형태로 간주하며 그 관점이 너무도 계몽 반대적인 것이어서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의 진정한 계승자인 합리론이 결국 승리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8] 두번째 대안적인 접근법은 성경에 대한 종교개혁 신학적 강조를 신앙주의로 간주하고 정통주의 및 개신교 스콜라주의 시대를 계몽주의 등장에 길을 열어준 합리주의 쪽으로의 선회로 해석한다.[9] 두 경우는 모두 17세기 개혁주의 사상의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스콜라주의를 합리주의 등장의 전조로 해석하되 개신교 정통주의를 합리론 혹은 원형 합리론의 한 유형으로 규정하는 교의학적 주장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10] 물론 중세적 스콜라주의가 합리론의 한 형태인 것처럼 잘못 해석되고 스콜라적 방법론의 실재가 여러 세기에 걸쳐 발전되고 변화된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학자들이 주장하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합리론은 합리론의 선행자가 될 뿐만 아니라 이전의 합리론이 재연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신학과 철학의 중심인물 접근법의 모든 유형들은 인문주의 발흥과 스콜라주의 몰락이 예고한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내에서의 중세 말기에 대한 근대의 거대한 중심인물 접근법에 빚지고 있다. 그것의 가장 유명한 형태는 제이콥 벌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Civilization of the Renaissance in Italy)』에서 발견된다.

중세에는 바깥을 향하고 내면을 향하는 인간의식 양면이 모두 공통된 베일 아래에서 꿈꾸고 있거나 반쯤 깨어난 상태였다. 그 베일은 믿음과 망상과 강박으로 짜여진 것이며 그 베일에 의해 보여지는 세상과 역사는 낯선 색조로 얼룩진 듯하다. 이 베일은 먼저 이탈리아에서 녹아 내렸으며 이로써 국가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객관적인 취급과 고찰이 가능하게 되었다. 동시에 주관적인 측면도 그에 상응하는 강조점을 획득하게 되었다. 인간은 영적인 개별체가 되었고 자신이 그러한 존재라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11]

벌크하르트에 따르면 인문주의는 중세적 문화와 전적으로 대립된다.

교회가 중세 시대에 양성한 전적으로 성지자 중심적인 문화 전체와 맞서는 경쟁자로 중세의 다른 요소에 기초하여 등장한 새로운 문명이 있다. 그 문명의 역동적인 대표자격 인물들은 고대 인물들이 알았던 것을 알았으며, 그들이 생각하고 이해했던 것처럼 생각하고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12]

이러한 화법들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들이 19세기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16세기와 17세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유의 흐름들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재평가는 인문주의가 중세의 지적 문화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스콜라주의의 계승자가 아니라 13세기의 대학 교수사회 안에서 동일하게 발전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13] 이러한 재평가는 또한 인문주의스콜라주의모두가 주로 방법론을 가리키되 특별히 중세 대학의 여러 교과과정 영역들에 적용되는 논법의 유형들 혹은 모델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두 방법론 모두가 근대 초기로 유입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스콜라적 방법론에 대한 최근 연구들은 스콜라적 방법이 중세에서 시작하여 인문주의 관심사에 적응한 것을 포함한 일련의 발전들과 수정들을 거쳐 심지어 18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어 갔다고 주장한다.

종교 개혁자들의 문헌들에 대한 최근 연구들은 중세적인 배경을 신중하게 살피되 때로는 개별적인 인물들의 성직 및 학문적인 배경과 결부되고 때로는 중세 후기의 자료들을 수용했던 다양한 유형들과 결부된다. 그래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중세 후기 유명론의 선조들, 은둔파 어거스틴 수도원 내에서의 다양한 사상적 흐름들, 에어푸르트에서 공부하며 수용한 중세적 사상의 다양한 갈래들, 가브리엘 비엘의 신학에 대한 루터의 이해 등와 관련해서 연구되고 있다.[14] 피터 마터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 사상은 중세신학의 토마스 및 어거스틴 계보들에 담긴 배경들과 연관되어 분석되고 있다.[15] 칼빈의 문헌들은 버나드 끌레르보를 비롯하여 중세적 스코투스 및 어거스틴 사상까지 포괄하는 중세 사상의 다양한 계보들의 영향을 보여준다. 물론 그가 실제로 인용하고 있는 자료들 외에 다른 특정한 배경들 혹은 그런 자료들의 수용 형태들에 대한 확정적인 규명은 곤란하다.[16]

이와 유사하게 최근 연구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학문적인 활동과 중세 및 동시대 문헌들에 대한 수용의 다양성과 관련하여 신학적 문헌들에 대한 스콜라적 접근법 및 인문주의 접근법의 어떤 측면들은 수용하고 어떤 측면들은 거절하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의 사상에 인문주의 및 스콜라적 요소들이 다양하게 혼재해 있다는 사실도 규명해 주었다. 스콜라 신학과 철학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잘 알려진 반박에 대한 평가도 그들의 사상과 중세 후기의 여러 인물들의 가르침 사이에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다는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들의 글들에서 발견되는 스콜라적 방법의 요소들과 용어들 연구로 말미암아 미묘하게 조정되고 있다.[17] 게다가 스콜라적 방법과 인문주의 방법 지지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르네상스 및 근대 초기 시대에 대한 실제적인 논쟁은 서로 명백하게 대립적인 형태로 신학에 유입되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를 인문주의 학자로, 종교개혁 자체는 인문주의 현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헌들에 대해 근본적인 오해가 있었음을 보여줄 뿐이다.[18] 칼빈과 같이 인문주의 훈련을 받은 종교 개혁자의 사상에도 스콜라적 요소가 확인되고 있으며, 칼빈의 인문주의 수용은 그 자체가 고전적 인물들에 대한 인문주의 연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철학적 발전에 맞서는 그의 반박에 의해 조절된 것이다. 이는 에피쿠루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 대한 칼빈의 반박에서 확인되고, 어떤 경우에는 소피스트 학자들에 대한 그의 반박에서 확인한다.[19]

종교 개혁자들의 광범위한 서신교류 연구에서 확인된 것처럼, 그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교리적 사안들을 논하였고 논박도 하였지만 어느 한 신학자의 교리적 체계가 다른 신학자에 비해 월등함을 보여주는 어떠한 암시도 제공하지 않는다. 몇 가지 사례만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부써(Bucer) 1549년 쮜리히 합의서(Consensus Tigurinus)의 여러 부분들에 대해 칼빈을 비판했다. 부써는 특별히 그 문헌이 그리스도 연합 혹은 그리스도 참여에 대한 명료한 언어가 억제되고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주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20] 1555년부터 칼빈과 버미글리 및 라스키는 여러 교리적 사안들에 대해 서신을 교환했다. 거기에서 칼빈은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으면서 예정의 해석에 있어서 자신과 라스키 사이에 불일치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다른 대부분의 사안들에 대해 라스키와 근본적인 합의가 있지만 성찬에서 그리스도 안에 참여및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대한 라스키의 강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21] 칼빈보다 12살이 많고 1540년대 중엽에 부써 및 불링거와 더불어 성찬식에 대한 사안을 논하였던 라스키는 칼빈으로 인해 자신의 교리적 체계를 바꾸지는 않았다.[22] 칼빈과 버미글리 사이에 교환한 현존하는 편지는 (칼빈보다 12살이 많은) 버미글리가 칼빈의 멘토로 불리울 정도의 상호의존 관계가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23] 그리스도 연합론의 경우, 칼빈과 베자에게 보낸 버미글리 편지는 그가 그 교리를 체계화한 주요 인물임을 증거한다.[24]

이뿐만 아니라 17세기 개혁주의 인물들은 칼빈주의자들로 불려지는 것을 대체로 불쾌하게 여겼으며 칼빈을 중요한 선행자들 그룹의 일원으로 여겼지 그들의 고백적 전통의 설립자나 규범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25] 그들이 교리를 체계화한 유형들도 칼빈주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반복하고 있다. 즉 그들은 대체로 주요한 종교 개혁자들 중의 어떤 인물을 통하여 중세 및 심지어 교부들의 시대로 소급될 수 있는 성경 해석학의 궤적을 따르며 그들의 동시대적 논쟁과 대화라는 문맥 속에서 그들의 교리들을 체계화해 나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개념화의 특별한 유형들을 살펴보면 때로는 칼빈을 의지하고 때로는 불링거, 무스쿨루스, 버미글리, 혹은 종교개혁 시대의 다른 학자들을 의지하는 등 종교 개혁자들 개개인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방법론적 질문은 중심인물 접근법의 사용과 관계된 것으로서 근대 초기 개혁주의 사상사에 관한 기존의 중심인물 접근법이 거절된 것을 고려할 때 그럼 어떻게 새로운 중심인물 접근법이 구축될 수 있느냐일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새로운 중심인물 접근법은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절된 그런 중심인물 접근법이 철학적 혹은 신학적 구성물에 의존하고 역사적 자료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빈약한 토대를 보인 것처럼 새롭게 고안될 다른 어떤 중심인물 접근법도 그러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중심인물 접근법을 제거하기 위한 대안으로 탈근대적 도전들 중 하나를 취하는 것이 아니며, 메타역사 제거를 위해 이론적 관점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국부적 네러티브 접근법을 발굴하는 것도 아니다.[26] 중심인물, 메타, 혹은 국부적 접근법 모두가 가진 문제점은 정확히 그것들이 소위 이론적인 관점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이고 그 자료들 자체에 근거한 이야기를 구성하되 방법론이 허락하는 한 역사가가 지금 가지고 있는 철학적 신학적 전제들 혹은 편견들을 최대한 적게 요구하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다.[27] 앞으로 나는 기존의 중심인물 접근법의 구체적인 내용들과 근대 초기 개혁주의 사상의 재평가 작업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주장들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되 기존의 접근법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비판을 가하고 새로운 접근법에 대해서는 그 전제들을 명료하게 밝히고자 한다.

2. 방법론과 내용

기존의 미심쩍은 중심인물 접근법의 몰락을 초래한 핵심적인 내용들 중의 하나이며 근대 초기 개혁주의 사상의 재평가에 있어서 중심적인 주장들 중의 하나는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가 특정한 철학이나 신학이 아니라 지성의 역사와 특별히 중세 및 근대 초기의 학문적인 배경에 속한 현상으로 올바르게 여겼다는 점이다. 근대 초기에 신학의 체계를 확립하고 표상하기 위해 도입된 방법들과 그 시대의 인물들이 주석적, 신앙 고백적, 전통적, 철학적, 상황적 관심사에 기초하여 산출된 신학의 교리적 내용으로 정당하게 불리울 수 있는 그 결론들 사이에는 구분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분은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 모두와 관련해서 만들어질 필요가 있고 그것들이 종교 개혁자들 및 이후의 개신교 학자들의 문헌에 미친 영향들에 대해서도 그런 구분이 요청된다. 물론 이것은 방법과 내용이 전적으로 분리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방법과 내용의 상호 연관성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논지의 핵심은 (스콜라적 방법이든 인문주의 방법이든) 방법론이 특정한 교리적 내용을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방법론이 어거스틴 은총론 혹은 반 펠라기안 은총론, 혹은 형이상학 지배적인 예정론적 체계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28]

논지는 단순하다. 실제로 그것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기존의 개념적 이해들, 특별히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접근법의 옹호자들 사이에 지금도 모호하게 남아 있는 개념들 때문에 초래된 주요 혼돈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결핍된 미신을 구체화한 연구를 포함한 최근의 여러 연구들은 마치 방법과 내용을 구분하면 방법이 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구분(의 의미) (대놓고) 잘못 표상하여 논지에 더 큰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29]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을 주장하는 문헌들이 보여주는 스콜라주의와 예정론적 체계 사이의 혼돈 및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사이의 혼돈과 관련하여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비적인 주제로서, 스콜라주의는 철학적인 것이든 신학적인 것이든 특정한 내용이나 결론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주로 방법론, 특별히 학문적인 방법에 관한 개념이고 이와 동일하게 인문주의 혹은 특정한 결론이나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방법론, 특별히 문헌학적 방법론에 대한 개념이며, 그 개념들은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식의 해석을 거절하기 위해 수정주의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에 의해 고안된 개념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오히려 그 개념들은 여러 세대에 걸친 중세 및 르네상스 역사가들에 의해 공동으로 주장되어 온 개념이며,[30]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가 스콜라주의 개념에 교의학적 변경을 가하기 이전에 이미 정착된 개념이며, 그 학파가 칼빈 및 이후 개혁주의 인물들의 사상을 표상할 때에 일관되게 간과해 왔던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스콜라주의를 주로 방법론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재평가를 확립된 지성사적 궤도에 올려 놓는 것이며, 스콜라주의에 내용을 부과하는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의 개념은 근거 없이 형성된 것이며 솔직히 말하면 학자적 성실성이 결여된 개념이다. 이러한 성실성의 결여는 특별히 그런 주장의 최근 유형들 안에서 발견된다. 이는 그 유형들이 개신교 스콜라주의 주제에 대한 최근 수정주의 문헌들을 인용하되 단지 부분적인 선별 방식으로 인용하고 있으며, 게다가 근대 초기의 개신교 사상에 관한 수정된 관점 형성의 한 요소로서 일관되게 고려되고 있는 인문주의 본질과 스콜라주의 본질의 중요한 학문연구 흐름을 아우르지 못하고 있으며, 나아가 근대 초기 개신교의 스콜라주의 재평가 과정에서 분석된 내용들도 간파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입장은 스콜라주의가 개신교 신학에 침투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적 헌신에 일정하게 의존하고 특별히 신론과 관련해서 형이상학 문제와 추상적 사색적 사유에 대한 명시적 관심사를 암시하는... 연역적 추론의 형태를 낳았으며, ‘독특한 개신교 입장하나님의 의지론에 대한 사색적 체계화에 기초하여 형성되게 하였다고 주장한다.[31] 이런 종류의 주장은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만들었고, 이는 그 둘을 신학적 내용이란 관점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 주장은 스콜라적 노선이 논증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예정론적, 선험적, 심지어 전적으로 삼단논적 성격을 가졌으며, 인문주의 노선은 논증에 있어서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아마도 플라톤적), 언약적, 후험적 특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32]제한적 속죄,’ 엄격한 예정론 사상, 건조한 교의학적 신학을 생성하는 것은 스콜라주의이며, 인문주의는 보편적 속죄,’ 언약적 혹은 구속사적 사유 및 성경적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고 구분한다.[33] 칼빈 사상의 추진력이 되는 인문주의 때문에 칼빈은 당시에 조직신학으로 행세하던 신학을 정죄한 것에서 암시된 것처럼 하나의 시스템이 아니라 균형 잡힌신학을 산출했던 반면, 스콜라주의는 그러한 칼빈 사상의 균형을 파괴한 원흉이라 주장한다.[34] 이러한 주장들은 마치 역사가 가지런한 비둘기 집처럼 말끔하게 기술될 수 있는 것처럼 기본적인 스톨라주의-인문주의 이분법 위에 인위적인 방식으로 급조한 이분법들, 즉 예정론 사상과 언약론 사상, 선험적 사상과 후험적 사상, 제한적 속죄와 보편적 속죄처럼 깔끔하나 지지될 수 없는 일련의 이분법에 의해 특징지어 진다.[35] 또한 이 주장들은 칼빈이 그 비둘기집 중 하나에 들어갈 수 있고 개혁주의 전통 전체의 발전을 평가할 간편한 척도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기괴한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서 평가는 칼빈의 신학이 그 자체로 개혁주의 전통 전체를 탐구하고 평가하는 완전하고 충분한 주체라고 주장하는 현대의 일부 조직신학 학자들의 고도로 시대 착오적인 접근법에 기초한 것이다.[36]

최근에 수정주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를 면밀히 관찰한 독자라면 스콜라적 방법론과 교리적 내용 사이의 관계성 문제에 있어서 제기되는 여러 견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견해들은 스콜라적 방법론과 교리적 내용이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연구는 방법론 자체가 산출하지 않는 내용과 결론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와 방법론 채택과 특별한 연관성을 갖는 내용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밝히는데 상당수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13세기에서 17세기까지 신학자들이 채택한 스콜라적 방법을 대충만 훓어 보아도 스콜라주의가 특정한 교리적 결론들, 특별히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가 내세우는 주장들 속에 담긴 그런 결론들을 산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인문주의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지를 펼칠 수 있다. 스콜라적 접근법의 채택은 예정론 사상이나 신인 협동설로 귀결되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아스리스토텔레스의 사중적 인과율 사용도 형이상학 관심사를 촉발하지 않았으며 형이상학 결정론은 더더욱 그러하다. 인문주의는 신학에 있어서 언약적 강조점을 초래하지 않았다. 칼빈을 분할하되 그의 예정론을 스콜라적 성향과 연결하고 그의 언약론을 인문주의 훈련과 연관짓는 것은 얼마나 궁색하고 역사 기만적인 처사인가! 개혁주의 전통을 제한속죄 가르치는 스콜라적 예정론 학자들과 가정적 보편주의 가르치는 보다 친절하고 온화한 인문주의 학자들로 분할하는 것도 동일하게 궁색하고 역사를 기만한다. (아마도 우리는 철학적 결정론을 주장했던 두 명의 인문주의 학자들, 피에트로 폼포나찌(Pietro Pomponazzi) 및 로렌쪼 밸라(Lorenzo Valla), 신인 협동설적 유형의 신학을 내세웠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루이스 몰리나(Louis Molina), 제이콥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같은 스콜라적 학자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스콜라적 방법 혹은 인문주의 방법의 요소들을 가졌다는 사실은 16세기와 17세기 인물들이 특정한 예정론 혹은 언약론을 주장하게 된 이유가 되지 않았으며, 어떤 신학자가 작정의 전택설적 입장을 취할 것인지 혹은 후택설적 입장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교리적 체계화 속에서의 미묘한 교리적 차이에 대해서도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

방법론이 어떤 종류의 내용에 책임을 져야만 하는가? 그 시대의 인물들이 일관되게 스콜라적 방법과 대중적, 교리문답적, 혹은 주석적 방법들 사이 및 종합적인 방법과 분석적인 방법들 사이를 구분한 것을 고려할 때, 방법은 문헌의 내용에 영향을 주기는 하되 논증의 정밀도, 형태, 종류, 어떤 주제들은 다루고 어떤 주제들은 생략해야 하는지의 여부, 주제들의 순서와 배열 등과 관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의 중심적인 요소로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발견되는 예정의 후험적(a posteriori) 혹은 분석적(analytic) 위치는 17세기의 많은 신학적 체계에서 보여지는 선험적(a priori) 혹은 종합적(synthetic) 위치와는 대조적인 것이지만 개념에 있어서의 차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예정론적 시스템의 발전과도 무관한 것임을 확인시켜 줄 수 있다. 오히려 예정론의 위치 문제는 신학을 구성하고 가르치는 여러 방법들과 관련된 논증의 다양한 순서와 전적으로 관계된 것이다. 근대 초기의 인물들은 스콜라적 배열, 교리문답 배열, 신조적 배열의 용법을 알았으며, 스콜라적 모델의 경우에는 다소 인과적인 순서를 따르고 교리문답 경우에는 보다 분석적인 바울적순서를 따른다는 함의까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 시대의 신학자는 신학적 내용이나 어떤 교리의 함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않고서도 방법론에 기초하여 위치를 변경하고 주제의 범위와 세목들을 줄이거나 어떤 주제는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37]

스콜라적 설명은 분명히 단정적일 것이며, 명료하고 명제적인 개념들 또는 결론들을 확립하고 문제를 논리적인 방식으로 제기하고 논증하고 풀어가긴 하지만 제기된 문제들 혹은 도달한 결론들을 좌우하진 않는다. 인문주의 모델이 제공하는 설명은 보다 추론적인 것이며, 증명의 논리와는 구별되는 수사 혹은 설득을 지향하며, 그렇다고 그런 방식이 논증의 내용이나 해당 주제들을 임의로 주관하는 것은 아니다.

3. 문맥이 고려된 개혁파 개신교의 지성사

칼빈과 칼빈주의 주제에 대한 최근 논의에서 등장한 멀러 논제(Muller-Thesis)’에 대해 한 마디 추가하려 한다. 그 용어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지금 설명하고 있는 이곳 이외에 나 자신의 다른 어떤 글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용어이다.[38] 나는 근대 초기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에 대한 재해석 및 재평가와 관련된 논증들을 단일한 논제로 축소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그 논제가 단순히 종교 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 사이의 연속성 주장인 것처럼 간주될 경우와, 재평가가 연속성과 불연속성논의로 축소되거나 칼빈의 사상과 이후 개혁주의 인물들의 사상에 어떤 교의학적 일치가 있는지를 살피는 쪽으로 축소될 경우에도 문제가 된다.

칼빈의 가르침과 이후의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어떤 신학자의 교리적 체계화 사이의 일치성에 관한 어떤 교의학적 주장을 위해 그 논제에 호소하는 자들과 그 둘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논제를 비난하는 자들이 환원주의 논법의 협소한 세계에 머물러 있는 한, 논쟁의 두 당사자는 역사적 논의에 어떠한 면에서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주장들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사이의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에 대한 (극도로 단순화된) 환원주의 표상에 의존하고 있다면, 연속성에 호의적인 입장을 가진 측에서 제시한 증거는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파 정통주의 발전을 분석하는 작업에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며, 연속성을 반대하기 위해 제시된 증거도 고백적 개혁주의 전통과 신학의 근대 초기적 발전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속하는 실제적인 제안들에 찬동하건 반대하건 그러한 논의와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종교개혁 시대와 정통주의 시대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재평가는 (최소한 나의 접근법에 있어서 만큼은) 칼빈 및 그의 동시대 인물들의 시대와 이후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되 변화와 발전이 수반되지 않은 연속성은 주장하지 않았다. 또한 그 재평가는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이 칼빈의 사상 혹은 초기의 다른 종교 개혁자들 사상을 수용하되 획일적인 방식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재평가 혹은 재심사의 방법은 근대 초기 개혁주의 전통의 방대함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는 개혁주의 전통의 신앙 고백적 문헌들이 산출되고 그 신앙 고백적 울타리를 인지하며 이루어진 신학의 보다 정밀한 설명이 형성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법은 칼빈 혹은다른 어떤 종교 개혁자를 그 전통의 규범적인 대변자로 만들지 않으며, 교리적 체계화의 다양한 자료들과 배경들과 환경들을 존중하며, 근대 초기 당시의 기준을 따라 정통주의 문제를 풀어가되 개혁주의 인물들이 개입한 많은 논쟁들이 서로를 없애려는 경향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단들을 확정하고 새로운 신앙 고백적 문헌들을 마련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다.[39]

내가 볼 때에,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 해석의 전반을 모두 아우르는 단일한 논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리적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 이론도 그 모두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학자적 논의의 역사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아니면 혼합적으로든 반영하는 다양한 전제들 혹은 해석들이 있으며, 그것들 중 일부는 나 자신의 결론이고 다른 일부는 내가 연구하는 중에 계속 대화의 상대로 삼았던 기존의 학문연구 일반에서 취한 결론이다.[40] 그리고 나의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주의 교의학(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과 다른 부수적인 논문들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개별적인 주제들 및 사안들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주장에 속하는 일련의 하부 논제들도 있다. 20세기의 주된 학문연구 흐름에서 연속성-불연속성 논제를 긍정적인 태도로 수용한 대표적인 사례는,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를 주로 방법론과 관계된 것으로 규정하되 비록 그것들이 내용에 미묘한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 자체나 도출되는 결론들을 직접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한 것이다. ‘멀러 논제에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것을 내가 생각해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의 인용들은 수십년간 이러한 이해를 주장하고 입증한 중세 및 르네상스 분야의 거대한 학문연구 집단이 있음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41] 이 부분에 있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공적이 있다면, 칼빈주의 문제를 다루는 현대 학자들로 하여금 칼빈과 16-17세기의 다른 개혁주의 학자들의 배경을 이해하는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와 그들의 참고문헌 목록을 확장하되 대단히 비판하고 있지만 읽지는 않았던 16세기 후반과 17세기 개혁주의 인물들 뿐만 아니라 현대 학자들이 애써 참조하려 하지 않았던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 본질을 다루는 방대한 학문연구 일반까지 넓히려고 한 노력에 있다.

이와 유사하게 칼빈을 규정하되 비록 개혁주의 전통의 발전에 영향을 주기는 하였지만 정통주의 시대의 인물들이 그들의 유일한 규범적 선행자로 여기거나 개혁주의 신앙의 체계를 세운 창립자로 여기지는 않았던 종교개혁 운동을 집대성한 2세대그룹 중의 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생소한 발상이 아니다. 이런 학문연구 흐름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만이 새롭다고 느낄 것이며 종교개혁 역사를 모르는 자만이 새로운 발상이라 여길 것이다.[42] 라인홀드 제베르그(Reinhold Seeberg)는 이렇게 설명한다.

칼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가 이 위대한 시기의 2세대 중의 한 사람이란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전통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들과 행위의 강령을 받아 들였으며, 대단히 온전한 형태로 담아냈다. 신학에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나 완성하고 조직하는 것은 칼빈의 일이었다.[43]

이와 유사하게 조지 파크 피셔(George Park Fisher)와 존 멕닐(John T. McNeill)도 칼빈을 종교개혁 2세대에 속하였고 그것의 집대성과 체계화에 힘쓴 인물로 규정한다.[44] 이는 윌러스틴 워커(Williston Walker)도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은 2세대 종교 개혁자들 중에 속한다. 그의 연대기적 및 신학적 위치는 종교개혁 창시자들 중에 속하지 않고 그것을 계승한 자들 중에 있다.[45]

학문연구 일반은 17세기의 개혁주의 인물들이 칼빈을 종교개혁 2세대의 문맥에 배치시킨 것과 칼빈의 사상을 개혁주의 전통의 규범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것은 페리 밀러(Perry Miller)가 뉴잉글랜드 청교도 신학과 관련해서 명료하게 진술했다. 청교도는 칼빈을 그들의 사상의 원천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을 칼빈이 창시자로 있는 무리들의 일원으로 여기지도 않았다고 밀러는 설명한다.[46]

나의 논증에서 나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다른 사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믿음과 이성의 관계성 및 신학과 철학의 관계성에 대한 입장이 (비쩌와 키켈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일종의 합리론도 아니고 합리론 및 근대 초기 합리론의 본질과 특성으로 도약하는 발판도 아니라는 것이다.[47] 이것은 나 자신의 논지라고 주장하기 힘들다. 신학계 안에는 합리론의 등장을 퇴조하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작용의 일환으로 이해했던 기존의 여러 합리론 관련 해석들이 있었다.[48] 더욱이17세기의 보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철학사의 주된 흐름에서 등장한 새로운 합리론들 사이의 차이들에 대한 일관된 인식이 이미 있었듯이,[49] 신학과 철학의 역사 속에서 계시와 이성의 다양한 관계들에 대해 중요한 논의가 이미 있었으며, 그 논의는 중세의 스콜라주의에 관해서도 대단히 동일한 논지를 끌어낸 바 있다.[50] 그리고 베자와 오웬 같은 인물들의 문헌에서 합리론의 형태가 아니라 믿음과 이성의 전통적인 조화가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도 최근에 있었다.[51]

이러한 여러 논제들 혹은 전제들의 적용에서 등장하게 된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논의 및 분석 방법론은 발전하는 개혁주의 전통에 내재하는 관점의 다양성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시대의 개신교 사상과 정통주의 시대의 개신교 사상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관계성도 존중하고 있다. 발전과 다양성의 이유는 특별히 관심의 초점이 하나의 신학적 문제에서 다른 문제로 이동하고 문맥들과 논쟁들도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속성과 불연속성개념 혹은 변화되는 환경을 따라 이루어진 신학적 접근법의 발전, 정교화, 개선이란 차원에서 이해된 연속성 개념은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 뿐만 아니라 중세의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 사이의 극단적인 단절을 옹호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된 극단적 불연속의 단순한 책략에 대한 대응이지 탐구의 주된 초점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안의 핵심은 한 신학자의 관점과 다른 신학자의 관점 사이의 연속 혹은 불연속을 밝히거나 주장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특정한 신학자를 이해하되 그의 문맥 뿐만 아니라 사상의 다양한 궤적들 혹은 전통들과 관련해서 그가 처한 위치를 규명하는 것이다.[52] 게다가 이러한 궤적들 혹은 전통들은 종교개혁 시대의 논쟁들을 통하여 전수되거나 도출된 논점들과 교리적 체계화 뿐만 아니라 교부들과 중세의 배경에서 도출된 주석들과 도식들과 논점들을 수용하고 활용함에 있어서 나타난 대단히 복잡한 유형들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교리적 주장에 대한 칼빈의 체계화와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이 제공하는 체계화들 사이의 차이점을 규명하는 것은 재평가의 (연속성) 주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도 아니고 칼빈의 개념들이 그것들을 구체화한 17세기 후반기에 개혁주의 사상의 권위 있는 자료로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묵살하는 것도 아니다. ‘연속과 불연속은 함축적인 용어로서 중세적 표상에 따르면 대개 어거스틴 구원론의 전통이라 불리우고 종교개혁 및 종교개혁 이후의 표상에 따르면 발전하는 개혁주의 전통으로 불리우는 울타리 안에서 논증의 보다 광범위한 서술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접근법을 거절하는 연속과 불연속논제는 그 접근법과 동일하게 그릇된 칼빈주의자들을 위한 칼빈접근법을 가지고 그 거절의 빈자리를 매우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논제는 칼빈을 개혁주의 전통의 창시자나 유일한 편찬자로 규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을 제한적인 의미의 칼빈주의 전통으로 규정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재평가의 역사적 전제들 중 하나는 칼빈이 개혁주의 전통을 고안하지 않았으며 그것의 유일한 2세대 편찬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특별히 칼빈의 작업은 쯔빙글리, 부써, 오클람파디우스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과 더불어 시작된 개혁주의 전통의 발전으로 간주되지 않으면 안되고, 그 전통의 신앙 고백적 교의적 체계화를 향해 칼빈의 동시대 인물들(불링거, 버미글리, 비레, 무스쿨루스, 히페라우스, 아 라스코 등)이 이룩한 업적들 중의 (비록 중요한 공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하나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이런 논지는 칼빈을 개혁주의 전통의 창시자요 규범으로 보는 교의학적규정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개혁주의 사상의 유형들과 궤적들에 대한 탐구, 특별히 16세기 초반의 종교 개혁자들 사상을 이후 세대들의 개혁주의 인물들이 수용한 것에 대한 탐구에 의존하여 얻은 역사적인결론이다.[53] 칼빈이 개혁주의 전통의 설립자도 아니고 유일한 계승자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소여이다. 칼빈과 다른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 교환한 서신은 이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으며, 칼빈 자신의 시대이든 후기 인물을 통해서든 개혁주의 전통의 발전에 기여한 대단히 많은 사례들이 있으며 칼빈의 공헌은 그것들 중에서 결코 종결자가 아니었다.[54]

어떤 사람은 칼빈에게 사실과는 달리 규범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확인 가능한 신앙 고백적 전통 내에서의 기초적 교리의 광범위한 연속성을 무시하며 칼빈을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것처럼 설정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칼빈의 사상에 스콜라적 배경과 스콜라적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있고 또한 17세기 개혁주의 인물들에 의해 쓰여진 비스콜라적 신학 문헌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도 부인하고, 나아가 방법이 내용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방법이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들에 의해 가정된 그런 종류의 영향을 주었거나 그런 종류의 결론들을 강요한 것은 아니라는 지극히 타당한 논지도 거부할 수 있겠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러한 내용들을 무시하며 동시에 칼빈의 신학과 17세기 스콜라적 방법론을 대립적인 것으로 설정할 수 있고 유의미한 문헌적 증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스콜라적 방법과 정통주의 교리의 구분은 적합하지 않으며 후기 개혁주의 인물들의 교리들과 교리적 강조점은 그들의 스콜라주의 때문에 칼빈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은19세기 혹은 20세기적 신학 접근법을 지지하듯 칼빈을 그의 배경과 문맥에서 분리하여 이해할 수 있겠고, 그래서 칼빈은 좋은 신학을 남겼지만 다른 사람들은 칼빈 신학의 균형을 뒤틀어 버렸다는 주장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그 전통의 한 (대체로 스콜라적혹은 정통주의’) 부분에서 분리하기 위해 칼빈의 사상을 칼빈이 한 부분으로 참여하고 있는 전통에서 분리시킬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의 신학을 위하여 좋고 균형이 있으나 대단히 시대 착오적인칼빈주의 모델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역사서술 방식이 아니며 등급 신학화(rank theologism)일 뿐이다.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재평가는 칼빈과 그의 동시대 인물들 안에서 규명될 수 있는 교리적 체계의 차이들이 개혁주의 사상의 후기 역사로 흡수가 되었으며, 발전적인 개혁주의 전통의 특징적인 이슈들, 특별히 전택설과 후택설 및 가정적 보편주의 논쟁과 같은 사안들에 있어서 그 시대의 신학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시대와 이후 개혁주의 사상의 궤적 속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시대들 사이에도 교리적 체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그 재평가는 2세대 종교 개혁자들 시대에 상대적인 신앙 고백적 한계들을 설정했고 계속 논의하되 정통주의 시대에 때로는 그 한계들을 엄밀하게 정하였고 때로는 느슨한 상태로 내버려 두었던 그런 개혁주의 전통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주석적인 사안이든, 교리적인 사안이든, 변증적인 사안이든, 철학적인 사안이든,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도 논증의 광범위한 흐름들이 있고 그 흐름들의 다양한 대표적 인물들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다른 주제들과 사안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전승과 발전의 다른 유형들 및 다양한 연속과 불연속이 드러날 것이다. 신학서론 관련 주제들, 성경의 해석 및 교리적 이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및 삼위일체 교리 등과 관련해서 이미 밝혀진 발전들은 모두 다양한 궤적들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으며, 또한 그 모든 발전들은 교리적 체계화에 있어서도 유의미한 다양성을 증거하되 논증의 어떤 부분은 칼빈의 논증과 유사하고, 어떤 부분은 불링거의 견해와 유사하고, 어떤 것들은 버미글리 관점과 유사하며, 논증의 다른 부분들은 이전의 신학적 철학적 전통에서 발견되는 논증의 계보를 수용하되 어떤 경우에는 종교 개혁자들 사상을 통하여 중개된 것이며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재평가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근간들은 결코 칼빈과 이후의 칼빈주의자들사이의 단순한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 문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사실 연속성-불연속성 문제는 주로 데오도르 베자가 칼빈 신학의 균형을 뒤틀어 버렸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가 제기했던 중심적인 문제였다. 즉 칼빈은 개혁주의 전통 전체의 규범을 제공했고 베자는 그러한 칼빈의 신학을 훼손하며 예정론적 시스템 혹은 예정론적 형이상학 신학을 생산했고 이것은 칼빈의 신학이 아니라 베자의 신학을 재생산한 모든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전수된 것이라고 했다.[55] 물론 잔키우스 또한 지극히 동일한 결과를 산출한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될 수 있겠다.[56] 이처럼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주장은 현대의 신학적 체계들과 같이 16-17세기 신학들도 중심교리 혹은 중심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하나의 체계 혹은 통일성을 이루었고 이후의 개혁주의 전통은 (그리스도 중심성이든 그리스도 연합이든 간에)칼빈 자신의 중심적인 교리를 제대로 전수하지 못했다는 가정에 기초한 극단적인 불연속성 이론이다.[57]

다양하게 발전한 개혁주의 전통 내에 연속성이 있다는 주장은 이러한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이론의 단순한 반전이 아니다. 그 이론을 반박함에 있어서 이 새로운 접근법은 신학의 체계(body)’를 구성하는 일련의 서로 독립적인 교리적 주제들에 의해 특징지어 지는 로쿠스 방법론(locus method) 때문에 단일한 중심교리 개념을 거부한다. 또한 그것은 시대 착오적인 시스템(system)’ 개념을 적용하는 것과 칼빈의 사상 혹은 근대 초기 신학자들 사상을 해석하되 그들의 어떠한 문헌들도 증거하지 않는 강제로 주입된 통일성(coherence)이란 개념의 틀로 해석하는 것을 반박한다. 중심적인 교리는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하나의 중심적인 교리에서 다른 중심적인 교리로의 이동도 없었다.

게다가 나 자신의 논증은 일관되게 칼빈주의자라는 용어 사용을 피하였다. 이는 그런 용어사용 자체가 편견을 조장하기 때문이며,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은 자신을 칼빈주의자로 혹은 칼빈만(Calvinus solus)의 추종자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어떤 신학자를 개혁주의 전통의 창시자, 저자, 혹은 주도적인 지도자로 여기기를 꺼려 했다.[58] 달리 말하면, 16세기 후반과 17세기의 개혁주의 전통은 결단코 칼빈의 신학을 일종의 교의학적 규범으로 여겨서 그것에 제한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통은 16세기의 종교개혁 1세대와 2세대의 핵심적인 인물들의 작업에 기초한 신앙 고백적 운동이며,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불링거의 『교의학적 설교집(Decades)』 및 그 시대의 어떤 다른 문헌처럼 신학적 가르침을 제공하는 하나의 특정한 책을 표준으로 삼아 규정되는 전통이 아니라 서로 느슨하게 관련된 국가별 및 지역별 고백서와 교리문답 등에 의해서 확인되는 그런 전통이다. 보다 정교한 신학적 체계들이 제공하는 많은 세목들을 고의로 제거한 교리의 포괄적인 진술이란 신앙 고백서의 특성이 암시하듯,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그런 신앙 고백적 이해는 주석의 다양한 결과들과 교의학적 혹은 교리적 문헌들의 다양한 체계들을 염두하지 않으면 안된다. 처음부터 논증의 근원적인 요소들은 전통적인 문맥, (‘칼빈주의보다) 개혁주의 전통의 상대적인 넓이, 그에 버금가는 고백적 범위의 포괄성 및 제한성 등인데, 이 고백적 범위는 종교 개혁자들(주로 종교개혁 2세대)이 확립했고 이후 세대의 개신교 학자들이 변증해 온 것이다.

재평가의 특성과 방향은 또한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진영의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논쟁과 자유선택 문제의 미세하게 차별화된 논의와 가정적 보편주의 문제의 발전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첫째 전택설과 후택설 문제에 대한 17세기 논쟁들이 선택 및 유기와 관련된 신적인 의지의 대상을 규명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고 영원한 작정에 있어서 우선순위 정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17세기에 체계화된 교리의 정밀한 내용들에 선행하는 동일한 요소가 종교개혁 1세대와 2세대의 사상에는 거의 없으며 우르시누스, 베자, 잔키우스 같은 초기의 주요 정통주의 인물들 중 첫번째 그룹에 속하는 자들의 문헌 속에도 그리 많지 않음을 확인한다. 물론 인류의 정죄된 자들(condemned mass)’ 중에서 얼마를 선택한 것에 대한 일관된 언급들이 초기 개혁주의 인물들의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선택과 유기, 창조, 혹은 타락과 관련된 작정의 순서에 대한 물음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17세기 학자들의 후택설적 입장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행적 요소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타락을 신적인 작정에 포함시킬 것이냐에 대한 사안에 있어서 칼빈과 불링거 사이의 불일치를 지적하긴 하지만 순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근대 초기의 개혁주의 견해들도 있다.

두번째 자유선택 문제에 대해서는, 칼빈이 주장하는 논증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무능력 문제를 겨냥한 것이었고 인간의 자유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물음으로 전개되진 않았기 때문에 칼빈이 그 이후의 교리적 체계화에 끼친 영향이 상대적으로 작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대 초기 개혁주의 사상에 대한 중요한 재평가가 있었다.[59] 최근의 연구들은 개혁주의 인물들의 스콜라적 논의에 대해 토마스 학파와 스코투스 학파를 모두 포함하는 중세적 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으며, 버미글리 및 잔키우스 같은 인물들을 거쳐 유니우스, 고마루스, 푸치우스 (이 세명은 전택설 옹호자들) 및 튜레틴 같은 이후의 개혁주의 학자들로 이어지는 발전의 계보도 규명해 주고 있다.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이론을 지지하는 자들에게 놀라움을 가져다 준 것이 있다. 즉 은혜로운 예정과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주장의 길을 제공하고 이와 동시에 결정론을 피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긍정적인 주장을 제공한 것은 칼빈이 아니라 바로 칼빈 이후의 전택설 지지자를 포함하는 개혁주의 전통이란 사실이다. 비록 칼빈 자신이 그런 논지를 확증하고 있기는 하지만 명료한 체계화를 확립한 것은 아니었다.

가정적 보편설과 제한속죄 문제도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칼빈주의자들을 위한 칼빈관점들과 구별되는 나 자신의 논법의 방향을 예증하는 아주 유용한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칼빈이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삐에르 드물랑(Pierre Du Moulin),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과 같은 칼빈주의자들입장과 일치하는 제한적인 속죄혹은 특별한 구속을 가르친 것으로 해석하는 다량의 연구 문헌들이 있다. 또한 칼빈을 무제한적 속죄혹은 우주적인 구속가르친 인물로 해석하며 그의 신학을 모이세 아미로(Moyses Amyraut)의 신학과 연결하고 결국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사이의 불연속을 주장하는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하는 동일한 분량의 문헌들도 있다.[60]

칼빈의 그리스도 사역론과 아미로의 가정적 보편주의 사이의 유의미한 단절이 칼빈주의자들을 위한 칼빈해법에 고유한 요소이듯, 그 둘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성은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해법의 근원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발전적인 개혁주의 사상을 다채로운 전통으로 이해하는 재평가는 그 관계성 문제를 풀기 위한 두 해법들 중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61] 전택설과 후택설 경우처럼, 종교개혁 1세대와 2세대 인물들 중에 쯔빙글리, 부써, 칼빈, 불링거, 무스쿨루스, 버미글리 등의 신학에는 종교개혁 고백서들 및 교리문답 문헌들 안에서 규정되고,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논쟁들을 성립시킨 교리적 체계라는 울타리 내에 포함되어 있으며, 후기 개혁주의 신학에서 발견되는 교리적 체계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그런 요소들이 있다. 게다가 가정적 보편설의 여러 16-17세기 유형들이 신앙 고백적 울타리 안에서 발견되고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 중에 교리적 체계의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보건대,[62] 특정한 교리적 이슈들에 있어서 칼빈의 교리적 도식들이 아미로, 투레틴, 오웬, 코케이우스 및 푸치우스 중에서 누구를 지원하고 있는지 그 방향을 확인하는 것은 비록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기는 하지만 그런 확인이 보다 광범위한 전통적 발전의 연속성에 대한 기본적인 주장에 변경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 아미로의 신학이 고유하게 칼빈주의 전통을 대표하고 있다는 과도하게 단순화된 주장이 오류인 것처럼, 오웬과 투레틴 같은 개혁주의 학자들이 마치 베자를 포함한 신학자들 개개인의 신학 사이에 유사성과 차이성이 공존하고 있지 않기나 한 것처럼 오직 베자만의 신학적 궤적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동일하게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이다.[63] 만약 칼빈 자신의 가르침이 유일한 칼빈주의표준이라 한다면, 17세기 논쟁에서 아미랄드 학자이든 그를 반대하는 학자이든, 코케이우스 학자이든 그를 반대하는 학자이든 각 당사자들 모두는 변질된 칼빈주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17세기의 어떤 논쟁 당사자도 칼빈이 주장한 것을 정확하게 반복하진 않았으며 논쟁의 당사자들 모두는 칼빈이 처한 문맥과는 다른 자기들의 문맥 속에서 자기들의 신학적 체계를 논하였고, 또한 실제로 그들은 모두 칼빈이 제공했던 (가정적 보편설에 있어서는 베자가 제공했던) 것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개념을 요구하는 논지들을 펼쳤기 때문이다.



[1] John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p. viii.
[2] The following essay uses the term “master narrative” rather than its near-synonyms, “grand narrative” and “metanarrative,” given the association particularly of the latter term with an unspoken or untold narrative that unifies an entire cultural perspective or world-view — while master narrative can be identified somewhat less philosophically as an actual narrative designed to give sequence and cohesion to a series of lesser narratives concerned with more particularized contexts. The foundation of such master narratives will, typically, be an anachronistic assumption drawn from the philosophical and/or theological views of the writer rather than from the materials used to construct the historical narrative.
[3] Alexander Schweizer, Die Glaubenslehre der evangelisch-reformirten Kirche dargestellt und aus den Quellen belegt, 2 vols. (Zürich, 1844-1847); idem, Die protestantischen Centraldogmen in ihrer Entwicklung innerhalb der reformierten Kirche, 2 vols. (Zürich, 1854-1856); Heinrich Heppe, “Der Charakter der deutsch-reformirten Kirche und das Verhältniss derselben zum Luthertum und zum Calvinismus,” in Theologische Studien und Kritiken, 1850 (Heft 3), pp. 669-706; idem, Die Dogmatik der evangelisch-reformierten Kirche (Elberfeld: R. L. Friedrichs, 1861).
[4] George Park Fisher,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New York: Scribner’s, 1901), pp. 347-348; more recently, Leonard Trinterud, “The Origins of Puritanism,” in Church History, 20 (1951), pp. 37-57; Jürgen Moltmann, Gnadenbund und Gnadenwahl: Die Prädestinationslehre des Moyses Amyraut, dargestellt im Zusammenhang der heilsgeschichtlich-foederaltheologie Tradition der Akademie von Saumur (Göttingen, 1951); Richard Greaves, “The Origins and Early Development of English Covenant Thought,” in The Historian, 31/1 (1968), pp. 21-35; and J. Wayne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Athens, Ohio, 1980).
[5] E.g., Basil Hall,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in John Calvin: A Collection of Distinguished Essays, ed. Gervase Duffield (Grand Rapids: Eerdmans, 1966), pp. 19-37; Wilhelm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trans. Harold Knight (London: Lutterworth, 1956); Brian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rotestant Scholasticism and Humanism in Seventeenth Century France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Alister McGrath, A Life of Calvin (Oxford: Blackwell, 1990).
[6] As found in standard manuals that were highly influential in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highly influential in framing the understanding of Protestant scholasticism in nineteenth- and twentieth-century theological discussion: e.g., Friedrich Ueberweg, Grundriss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von Thales bis auf die Gegenwart, 2nd ed., 3 vols. (Berlin: E. S. Mittler & Sohn, 1865-1866); in translation, A History of Philosophy, from Thales to the Present Time, trans. from the 4th German edition by George S. Morris, with additions, by Noah Porter, 2 vols. (New York: C. Scribner & Company, 1872-1874); and Johann Eduard Erdmann, Grundriss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2 vols. (Berlin: W. Hertz, 1869); in translation, A History of Philosophy, ed. Williston S. Hough, 2nd ed., 3 vols. (London: S. Sonnenschein & Co.; New York, Macmillan & Co., 1890-1892).
[7] Thus, Amand Saintes, Histoire critique du rationalisme en Allemagne depius son origine jusqu’à nos jours (Paris and Leipzig: Jules Renouard, 1844); and Robertson, John M. A History of Freethought, Ancient and Modern, 2nd ed., 2 vols. (London: Watts & Co., 1906).
[8] Cf. Friedrich August Tholuck, Vorgeschichte des Rationalismus, 4 vols. (Halle: E. Anton, 1853-1862); also note John Dillenberger, Protestant Thought and Natural Science: a Historical Interpretation (Nashville and New York: Abingdon, 1960).
[9] Evident in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 Jack B. Rogers and Donald K. McKim, 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the Bible: an Historical Approach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79), pp. 47, 75-76, 149-150, 160-169,175, 185-188, 221-223, etc.
[10] Thus, Hans Emil Weber, Reformation, Orthodoxie und Rationalismus, 2 vols. in 3 parts (Gütersloh, 1937-51; repr.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66); and Ernst Bizer, Frühorthodoxie und Rationalismus (Zürich, 1963).
[11] Jacob Burckhardt, The Civilization of the Renaissance in Italy, trans. S. C. G. Middlemore (London: S. Sonnenschein; New York: Macmillan, 1904), p. 129.
[12] Burckhardt, The Civilization of the Renaissance in Italy, p. 203
[13] Perhaps most notably, Paul Oskar Kristeller, Renaissance Thought: The Classic, Scholastic, and Humanist Strains (New York: Harper & Row, 1961).
[14] See, e.g., David C. Steinmetz, Luther and Staupitz: An Essay in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80); Dennis Janz, Luther and Late Medieval Thomism: A Study in Theological Anthropology (Waterloo: Wilfrid Laurier University Press, 1983); and John Farthing, Thomas Aquinas and Gabriel Biel: Interpretations of St. Thomas Aquinas on the Eve of the Reformation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1988).
[15] Cf. John Patrick Donnelly, Calvinism and Scholasticism in Vermigli’s Doctrine of Man and Grace (Leiden: Brill, 1975); idem, “Calvinist Thomism,” in Viator, 7 (1976), pp. 441-455; and idem, “Italian Influences on the Development of Calvinist Scholasticism,” in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VII/1 (1976), pp. 81-101; with Frank A. James III, Peter Martyr Vermigli and Predestination: the Augustinian Inheritance of an Italian Reformer (Oxford: Clarendon Pres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and idem, De iustificatione: the Evolution of Peter Martyr Vermigli’s Doctrine of Justification (Ph.D. dissertation: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2000).
[16] Thus, e.g., Karl. Das Grundverständnis der Theologie Calvins (Neukirchen: Neukirchner Verlag, 1963); idem, Vom Scholaren bis zum jungen Reformator (Neukirchen: Neukirchner Verlag, 1981); A. N. S. Lane, John Calvin: Student of the Church Fathers (Grand Rapids: Baker, 1999), pp. 15-66, 87- 150; and Dennis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John Calvin and the Mysticism of St. Bernard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4). Also note Arvin Vos, Aquinas, Calvin, and Contemporary Protestant Thought: A Critique of Protestant Views of the Thought of Thomas Aquinas (Grand Rapids: Eerdmans, 1985).
[17] See, e.g., David Bagchi, “Sic et Non: Luther and Scholasticism” in Carl Trueman and R. Scott Clark, eds., Protestant Scholasticism: Essays in Reassessment (Carlisle: Paternoster Press, 1999), pp. 3-15; David C. Steinmetz, “The Scholastic Calvin,” in ibid., pp. 16-30; and Richard A. Muller,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rm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pp. 39-61.
[18] Cf. Stephen Ozment, “Humanism, Scholasticism, and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Reformation,” in F. Forrester Church and T. George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in Church History (Leiden: E. J. Brill, 1979), pp. ***; with Erika Rummel, The Humanist-Scholastic Debate in the Renaissance and Reformati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pp. 126-134.
[19] Cf. Josef Bohatec, Calvin et humanisme (Paris: Revue Historique, 1939); and idem, Budé und Calvin (Graz: Herman Bölhaus, 1950), pp 121-147; with François Wendel, Calvin et l’humanism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76).
[20] Bucer to Calvin, August 1549, in G. C. Gorham, Gleanings of a few scattered ears, during the period of the Reformation in England and of the times immediately succeeding; A.D. 1533 to A.D. 1588 (London: Bell and Daldy, 1857), pp. 100-104.
[21] Calvin to Vermigli (18 Jan. 1555), in CO 15, col. 388 (Select Works, VI, p. 124).
[22] Cf. Laski, Catechismus ecclesiae Emdanae, Q & R, 67, in Opera, ed. Kuyper, II, p. 530, with idem, Catechismus ecclesiae Londini, Q. 240, in ibid., II, p. 468; and note Laski to Bucer, 23 June 1545; Laski to Bullinger and Pellican, 23 March 1546, in Gorham, Gleanings, pp. 30-35.
[23] Cf. Marvin W. Anderson, “Peter Martyr, Reformed Theologian (1542-1562): His letters to Heinrich Bullinger and John Calvin,” in Sixteenth Century Journal, 4/1 (1973), pp. 41-64.
[24] Peter Martyr Vermigli, Loci communes, 2 edition ( London: nd Thomas Vautrollerius, 1583), p. 1095 (letter to Calvin); p. 1109 (letter to Beza); in translation, The Common Places of Peter Martyr. Trans. Anthony Marten. London: Henrie Denham et al., 1583), part 5, pp. 96-99, 105-106.
[25] See the documentation in Richard A. Muller, “Reception and Response: Referencing and Understanding Calvin in Post-Reformation Calvinism,” in Calvin and His Influence, 1509-2009, Proceedings of the Calvin Congress, Geneva, May, 2009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p. ***.
[26] The latter phrase is taken from Michael A. Peters, Poststructuralism, Marxism, and Neoliberalism: Between Theory and Politics (Lanham: Rowan and Littlefield, 2001), p. 7.
[27] See the magisterial essay by Perez Zagorin, “Rejoinder to a Postmodernist,” in History and Theory, 39/2 (2000), pp. 201-209; responding to Keith Jenkins, “A Postmodern Reply to Perez Zagorin,” in History and Theory, 39/2 (2000), pp. 181-200; and Zagorin’s earlier essay, “History the Referent, and the Narrative: Reflections on Postmodernism Now,” in History and Theory, 38/1 (1999), pp. 1-24. Also note, Thomas L. Haskell, “Objectivity is not Neutrality: Rhetoric vs. Practice in Peter Novick’s That Noble Dream,” in History and Theory, 29/2 (1990), pp. 129-157.
[28] Cf. the various definitional statements in Richard A. Muller, Christ and the Decree: Christology and Predestination in Reformed Theology from Calvin to Perkins, reissued, with a new preface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2008), pp. ix-x, 11-12; idem, After Calvin: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a Theological Tra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pp. 27-33, 74-78; idem, PRRD, I, pp. 189-204.
[29] Thus, Charles Partee, Theology of John Calvin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2008), p. 22; cf. Myk Habets, Review of Christ and the Decree, in American Theological Inquiry, 3/2 (2010), p. 107; and note my response, “Reassessing the Relation of Reformation and Orthodoxy — A Methodological Rejoinder,” in American Theological Inquiry, 4/1 (2011), pp. 3-12.
[30] See, e.g., the definitions in G. Fritz and A. Michel, “Scholastique,” in Dictionnaire de Théologie Catholique, 14/2, col. 1691; Kristeller, Renaissance Thought, pp. pp. 92-119; David Knowles, The Evolution of Medieval Thought (New York: Vintage Books, 1962), p. 87; Armand Maurer, Medieval Philosophy (New York: Random House, 1962), p. 90; J. A. Weisheipl, “Scholastic Method,” in New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1967), XII, pp. 1145-1146; Calvin G. Normore, s.v., “Scholasticism,” in R. Audi (ed.), The Cambridge Dictionary of Philosoph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pp. 716-717; and Ulrich G. Leinsle, Einführung in die scholastische Theologie (Paderborn: Schöningh, 1995), pp. 5-15.
[31] Brian G.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rotestant Scholasticism and Humanism in Seventeenth Century France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p. 32; cf. ibid, pp. 120-121.
[32] Cf.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120-121; with Jürgen Moltmann, “Zur Bedeutung des Petrus Ramus für Philosophie und Theologie im Calvinismus,” in Zeitschrift für Kirchengeschichte, 68(1956-57), pp. 295-318.
[33]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140-141, 151; cf. Hall,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pp. 25-28;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pp. 29-31.
[34] Cf.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129, 136-139; idem, Armstrong, “Duplex cognitio Dei, Or? The Problem and Relation of Structure, Form, and Purpose in Calvin's Theology,” p. 136; with Hall,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pp. 19-20, 25-26, 28; Wil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nth-Century Portrai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pp. 5, 238, note 24; and idem, “The Spirituality of John Calvin,”in Christian Spirituality: High Middle Ages and Reformation, ed. Jill Raitt (New York: Crossroad, 1987), pp. 318-319.
[35] Thus,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120-121, 123, 127-129, etc.
[36] Thus, Partee, Theology of John Calvin, pp. 3, 4, 25, 27.
[37] See Richard A. Muller, “The Placement of Predestination in Reformed Theology: Issue or Non-Issue”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40/2 (2005), pp. 184-210.
[38] See Martin I. Klauber,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in Post-Reformation Reformed Theology: An Evaluation of the Muller Thesis,” in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3 (1990), pp. 467-475, for what is probably the first instance of a summary statement of the “thesis”; more recently, Thomas L. Wenger, “The New Perspective on Calvin: Responding to Recent Calvin Interpretations,” in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50/2 (2007), pp. 311-328; also note Habets, Review of Christ and the Decree, pp. 105-106, 107.
[39] See my essay, “Diversity in the Reformed Tradition: A Historiographical Introduction,” in Michael G. A. Haykin and Mark Jones, ed., Drawn into Controversie: Reformed Theological Diversity and Debates Within Seventeenth-Century British Puritanism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1), pp. 11-30.
[40] As, e.g, the eleven premisses presented in my essays on “Calvin and the ‘Calvinists’” in After Calvin, pp. 63-102.
[41] Thus, e.g., Armand Maurer, Medieval Philosophy (New York: Random House, 1962), p. 90; David Knowles, The Evolution of Medieval Thought (New York: Vintage Books, 1962), p. 87; J. A. Weisheipl, “Scholastic Method,” in NCE, 12, p. 1145; G. Fritz and A. Michel, “Scholastique,” in DTC, 14/2, col. 1691; Paul Oskar Kristeller, Renaissance Thought: The Classic, Scholastic, and Humanist Strains (New York: Harper & Row, 1961), pp. 92-119 with idem, “Humanism,” in The Cambridge History of Renaissance Philosophy, pp. 113-114 and with Charles B. Schmitt, Aristotle and the Renaissanc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3), pp. 24-25; Stephen Ozment, The Age of Reform, 1250-1550: An Intellectual and Religious History of Late Medieval and Reformation Europ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0), pp. 304-309.
[42] E.g., Partee, Theology of Calvin, pp. 25, 27.
[43] Reinhold Seeberg,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 trans. Charles E. Hay, 2 vol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7), II, p. 394.
[44] George Park Fisher,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Scribner’s, 1894), p. 318; John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pp. 3-4.
[45] Williston Walker, John Calvin; the Organizer of Reformed Protestantism (1509-1564), repr., with a bibliographical essay by John T, McNeill (New York: Schocken, 1969), p. 1.
46. Perry Miller, The New England Mind: the Seventeenth Century (New York: Macmillan
[46] Perry Miller, The New England Mind: the Seventeenth Century (New York: Macmillan, 1939; repr. Boston: Beacon Press, 1961), p. 93; and note Richard A. Muller, “Reception and Response,” pp. ***.
[47] See After Calvin, pp. 78-80; and PRRD, I, pp. 123-146, 388-405.
[48] E.g., Amand Saintes, A Critical History of Rationalism in Germany, from Its Origin to the Present Time (London: Simpkin, Marshall and C., 1849), pp. 90-91; John Fletcher Hurst, History of Rationalism, revised ed. (New York: Eaton & Mains, 1901), pp. 336, 339, 346-347, 349.
[49] E.g., Frederick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 9 vols. (Westminster, Md.: Newman Press, 1946-1974; repr. Garden City: Image Books, 1985), IV, pp. 1-33; Michael Ayers, “Theories of Knowledge and Belief,” in Daniel Garber and Michael Ayers,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Seventeenth-Century Philosophy, 2 vol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II, pp. 1003-1049.
[50] E.g., Gtienne Gilson, Reason and Revelation in the Middle Ages (New York: Scribner, 1938).
[51] Jeffrey Mallinson, Faith, Reason, and Revelation in Theodore Beza, 1519-1605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and Sebastian Rehnman, Divine Discourse: The Theological Methodology of John Owe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2002), pp. 109-128.
[52] See Carl R. Trueman, “The Reception of Calvin: Historical Considerations,” in Church History and Religious Culture, 91/1-2 (2011), pp. ***.
[53] Contra, e.g., Thomas F. Torrance, “Knowledge of God and Speech about Him according to John Calvin,” in Theology in Reconstru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66), p. 76; Partee, Theology of John Calvin, pp. 25-26.
[54] See my comments in “Demoting Calvin? The Issue of Calvin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Amy Burnett, ed., John Calvin: Myth and Reality: Images and Impact of Geneva’s Reformer (Eugene: Wipf & Stock, 2011), pp. 3-17.
[55] Thus, the emblematic essay of the school: Basil Hall,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in John Calvin: A Collection of Distinguished Essays, ed. Gervase Duffield (Grand Rapids: Eerdmans, 1966), pp. 19-37; so too, Johannes Dantine, “Das christologische Problem in Rahmen der Prädestinationslehre von Theodor Beza,” in Zeitschrift für Kirchengeschichte, 77 (1966), pp. 81-96; and idem, “Les Tabelles sur la doctrine de la prédestination par Théodore de Bèze,” in Revue de théologie et de philosophie, XVI (1966), pp. 365-377; Walter Kickel, Vernunft und Offenbarung bei Theodor Beza (Neukirchen: Neukirchner Verlag, 1967); R. T.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New York and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9); and cf.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129-132.
[56] Otto, Gründler, Die Gotteslehre Girolami Zanchis und ihre Bedeutung für seine Lehre von der Prädestination (Neukirchen: Neukirchner Verlag, 1965); also, idem, “The Influence of Thomas Aquinas upon the Theology of Girolamo Zanchi,” in J. R. Sommerfeldt, ed., Studies in Medieval Culture (Kalamazoo: Western Michigan University Press, 1964), pp. 102-117.
[57] The latter being proposed in Charles Partee, “Calvin’s Central Dogma Again,” in Sixteenth Century Journal, 18/2 (1987), pp. 191-200; and idem, Theology of John Calvin, pp. 3, 4, 25, 27, 40-41, et passim.
[58] Thus, e.g., Andreas Rivetus, Catholicus Orthodoxus, oppositus catholico papistae (Leiden: Abraham Commelin, 1630), p. 5; Pierre DuMoulin, Esclaircissement des controverses salmuriennes (Leiden: Jean Maire, 1648), pp. 231-232; Jean Claude, Défense de la Reformation contre le livre intitulé Préjugez légitimes contre les calvinistes, 4th edition (Paris: L.-R. Delay, 1844), pp. 210-211.
[59] Thus, Willem J. van Asselt,J. Martijn Bac, and Roelf T. te Velde, trans., ed., and commentary, Reformed Thought on Freedom: The Concept of Free Choice in the History of Early-Modern Reformed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10).
[60] See the extensive literature cited below, chapter 3.
[61] Note that the conclusions concerning this issue, drawn largely in terms of Christ’s limited intercession, in Christ and the Decree, pp. 33-35 and p. 194, notes 130 and 137, do not include any judgment on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Calvin’s view of Christ’s sufficiency might conduce to the view that if all would believe, all would be saved or whether it implies a prior hypothetically universal divine intention.
[62] Cf. the argument presented in PRRD, I, pp. 73-81.
[63] As, e.g., Alan Clifford, Amyraut Affirmed, or Owenism a Caricature of Calvinism: a reply to Ian Hamilton’s ‘Amyraldianism — is it Modified Calvinism’ (Norwich: Charenton Reformed Publishing, 2004), p.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