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30일 월요일

히페리우스의 Methodi theologicae

안드레아 히페리우스, 비록 교부학에 주력하진 않았으나 교부들과 그들의 문헌들을 어떻게 선택하고 읽고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인물이다.

그가 생각하는 교부들의 중요성은 두 가지다.
1. 교부들은 신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에 대한 저작을 집필했던 신학자다.
2. 히페리우스의 동시대 사람들이 신학 메뉴얼을 저술할 때에 교부들을 인용한다.

히페리우스는 새로운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
먼저 그는 교부들이 저술한 신학 방법론 문헌들을 언급한다. 클레멘트의 Stromata, 디오니시우스의 Hypotyposes, 오리겐의 Peri archon, 키프리안의 Expositio symboli와 Aduersus Iudaeos,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De Theologia, 프로스퍼의 Sententiae, 다마스커스 요한의 De fide orthodoxa, 롬바르드의 Sententiae 등이다. 이러한 문헌들의 저자성 문제에 히페리우스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가 주목한 것은 신학 방법론의 교재들에 대한 하나의 전통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부들의 저작에서 불만족은 느끼는데 이는 그들의 사상이 16세기 상황에 적용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한 교리에 대한 오리겐과 나지안주스와 다마스커스와 롬바르드의 입장들이 너무도 다양해서 독자들을 혼돈의 늪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하여 히페리우스는 교부들과 그 직후의 인물들에 의해 쓰여진 신학 메뉴얼이 신학을 공부하는 방법론을 제공하지 않아 문제라는 진단을 내린다.

여튼 이런 문맥에 입각하여 히페리우스는 Methodi theologicae에서 자신의 신학 방법론을 6개의 신학적 테제들을 다루면서 소개한다. 각 교리마다 성경적 증거들과 교부들의 증언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2012년 4월 28일 토요일

안식

여호수아 12장과 13장을 본문으로 설교했다.

히브리서 4장을 근거로 여호수아 전체의 주제롤 안식으로 규정했다. 구속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속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는 성격과 소명에 관계된 것이다. 그게 안식이다. 믿음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약속의 땅은 바로 안식이다. 안식이 있다는 것은 평강과 고요와 안정과 만족이 있다는 거다. 이런 맥락에서, 가나안 땅은 안식을 의미하고 기름진 젖과 달콤한 꿀이 흐른다는 특징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여호수아 전체는 안식의 대단히 역동적인 얼굴을 보여준다. 

게으르고 안주하고 만족하고 나태한 느낌과는 완전히 상반된 전쟁의 기운이 여호수아 이야기 전체에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죄인을 용서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돕는 적극적인 안식일 준수를 통해 안식일의 본질을 잘 보여주신 것과 흡사하다.

안식일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맞이하는 일요일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그들의 과제는 전쟁하는 것이었다. 안식의 땅에서 칼을 휘두르고 낭자히 흐르는 피를 목격하고 부녀들과 노인들과 아이들이 죽어가는 비극을 목격해야 한다는 것이 안식과는 너무도 무관해 보여서 여호수아 주제를 안식으로 잡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처럼 거북하다. 그러나 이 거북함은, 오히려 안식에 들어간 자의 삶에 우리가 얼마나 왜곡된 개념과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안식의 개념조차 낯설 정도인지 우리의 그런 무지를 고발하고 있는 듯하다.

안식은 편안히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침노하고 힘써 추구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바울은 안식에 들어가길 힘쓰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힘쓰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에 달렸고 그것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할 내용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자기와의 싸움은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들이 보여준 것보다 훨씬 치열하다.

자기와 싸워 이기는 것이 안식이다.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기념하되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안식이다. 이 땅이 허무하고 싱거운 분들에게 안식의 이러한 역동적 개념은 구속을 받아 안식에 들어가게 된 자들의 사람이 어떠해야 하며 어떠한 사람으로 초대되고 있는지를 너무도 분명히 가르친다. 즉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안식이며 그것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도의 삶이고 소명이다.

여호수아 13장은 정복되지 않아 아직 소유권이 넘어오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땅들도 분배의 대상으로 언급하고 있다. 땅 분배는 모든 전쟁이 끝난 이후의 일이었다. 정복되지 않은 땅을 분배하는 행위 자체가 앞으로도 전쟁이 지속될 것이라는 미래의 암시이다. 이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이후에도 자신이 지금까지 행한 일보다 더 큰 일을 너희들이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흡사하다. 이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미완성을 뜻하지 않는다. 공간과 시간 면에서 보다 광범위한 일들이 전개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안식은 전쟁의 종료 이후의 고요한 평화가 아니다. 죽는 순간까지 치루어야 할 자기부인 및 주님인정 전쟁이다. 그런 삶으로의 초대가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2012년 4월 26일 목요일

은혜의 쓰나미

인종차별 문제를 법적인 노예제도 철폐로 해결하고 나니 그것이 사람들의 내면과 일상적인 문화로 파고들어 이제는 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양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며 안타까워 하던 마크 놀 교수의 강연이 생각난다. 문제의 외적인 제거가 본질적인 해법은 아니라는 교훈 되겠다.

1561년 존 낙스가 칼빈에게 보낸 편지에는 메리가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로 우상적인 미사가 부활하여 말씀의 권능으로 정결하게 되었던 땅이 다시 신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경건을 가장한 외식과 대항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difficile fuerat adversus hipochrisim pietate fucatam pugnare)인 줄 몰랐다며, 이렇게 도움의 손길만 뻗는 자신이 칼빈에게 만성적인 골치(tibi perpetuo molestus sum)가 될 뿐이어서 미안한 맘을 드러낸다. 하지만 문제의 폭풍 중심부에 서 있을 때에라도 원수에게 두려움을 노출하지 않고 끝까지 소망의 끈을 붙들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배교의 살얼음판 위에서 겪는 창상이 너무도 커 영적으로 탈진할 정도란다. 하여 탄원과 원조의 붓을 들었고 제네바의 유사한 격정을 관통한 칼빈의 지혜를 구하는 서신을 띄웠던 것이었다.

낙스의 영국이 처한 상황에서 마치 한국교회 현실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짠하다. 이는 땅에 썩어 없어지는 것들을 부당하게 취득하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불법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 그것도 교회에 머리둘 곳을 찾았다는 참으로 불쾌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다. 한국만큼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또 있을까? 모든 외적인 핍박과 제도적인 족쇄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파고든 우리가 스스로 만든 어쩌면 경건의 탈을 쓴 우상숭배 습성이 진리와 참경건의 질식을 초래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회에 유일한 희망의 빛마저 꺼뜨리고 오히려 어두움의 산실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치와 경제와 언론과 문화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되 십자가의 방식과는 무관한 바벨론의 달콤한 전술에 구걸의 추한 악수를 청하는 방식으로 그걸 도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의 소름이 돋는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향기가 사회에 거룩한 혼란을 촉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 은혜의 쓰나미가 성도 개개인과 조국을 휩쓰는 날이 앞당겨질 수 있도록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다. 

2012년 4월 25일 수요일

교사의 직무

교회에서 교사의 직무를 감당한 이후로
순수한 경건의 교리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sinceram pietatis doctrinam asserendo)
교회를 유익되게 하는 것 이외에는
(quam ecclesiae prodesse)
자신에게 다른 어떤 의도도 없었다는
(nihil...mihi fuisse propositum)
사실에 대하여

양심에 있어서도 거리낌이 없고
(probe conscius sim)
하나님과 천사들도 증거하는 바라고 말하는
(ipsum et angelos testes habeam)
목회 인생을 정리한 칼빈의 단백한 고백을
나도 할 수 있을래나...인생이 저물 무렵에~~

히페리우스의 De theologo

히페리우스의
De theologo, seu de ratione studii theologiae
16세기에 쓰여진 신학의 기초적인 연구에 대한
개신교의 가장 방대한 책이다.

초기 개신교 신학의 특징적인 것으로서,
히페리우스는 신학연구를 경건에 이르는 수단으로 여겼으며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료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피라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신학이
지식 혹은 지적인 훈련(scientia)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지혜(sapientia)의 형식이라 규정함에 있어서
개신교 신학의 중세적 배경에 대한 의존성을 보여주고 있다.
히페리우스는 사도 바울 자신도 신학을 정의할 때에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은밀한 가운데 감추어 두신 지혜,
즉 하나님이 만세 전에 정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러내신 지혜라고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학의 정의는 히페리우스에게
논문의 근본적인 전제를 제공해 주었다
(아마도 이는 불링거를 따른 것이리라).
즉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구약의
지혜로운 문헌들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히페리우스는 잠언 1장 7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sapientia)의 근본’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거룩한 글을 부지런히 읽기 위하여’
‘사악한 성정’을 제거해 주시고,
어두운 마음을 밝혀 주시고,
자신의 영혼은 평온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겸손하게 하시고,
공허함과 다투고자 하는 마음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올리며 자신의 영혼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문헌들을 공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영성을 정립하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히페리우스는 다시 잠언을 인용한다.
‘지혜와 함께 걷는 자는 지혜로운 자다.’

히페리우스는 경건과 영성확립 뿐만 아니라
신학적 지식에 요구되는 다양한 학문연구 과정도 적극 권장한다.
즉 고대 이방인 사상가들 및 교부들에 의해 가르쳐진
문법과 논리학과 수사학과 같은 하부학문 분야들로 구성된 철학,
산술과 기하학과 음악과 천문학과 같은 수학적 일반학문,
물리학, 고전적인 형태를 가진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 형이상학,
그리고 역사학과 건축학과 농경학,
그리고 무엇보다 헬라어와 히브리어 같은
고전 언어들에 대한 연구를 권장했다.

히페리우스는 철학에 대한 ‘인간적인’ 훈련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사실에 근거하여
철학적 연구의 적합성과 타당성을 주장한다.
이는 개신교 사상의 제도화를 추구하던 시대에
그의 사상이 멜랑톤적 사상을 가졌다는 것과
교과과정 확립의 필요성을 모두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학문 분야들은
신학을 위한 준비로서 권장되는 것들이며,
중세대학 교과과정의 인문학적 개편이라 할 수 있겠다.
그 개편은 삼학사과(trivium and quiadrivium)를 존중하되
연구의 범위에 언어까지 포함하며 특별히
문헌들을 원어로 읽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히페리우스는 신학연구 과정을
세 개의 일반적인 주제별 영역으로 분류한다 
(이는 신학연구 분류의 궁극적인 형태로서
‘사중적 백과사전’ 형식을 예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성경과 성경해석, 교리적 신학 혹은 신학통론,
그리고 교회의 역사 및 정치, 의식, 예배, 설교를 포함하는 
교회의 체제로 구성되는 실천적인 신학 등이다.

멜랑톤과 같이 히페리우스는
신학적 주제들이 주석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구약연구와 신약연구를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았으며 과거의 신학적 작업,
특별히 교부들의 문헌들이 논제 설정하는 일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인식했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히페리우스는 역사적인 연구가
비록 19-20세기의 사중적 백과사전 형식과는 달리
변증학과 분명히 구별되진 않았지만
변증학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방대한 논문은 교과과정 부분을 언급해 가면서
동시에 경건과 기도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한다.
그리고 불링거의 Ratio studiorum (1527)과 같은 맥락에서
성경 텍스트와 도구들, 교부들의 문헌들, 
철학의 다양한 영역들 속에 있는 고전적 작품들,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적 문헌들의 방대한 참고문헌 목록과
주요 스콜라적 학자들에 대한 지식을 논의한다.

스파이커가 주장한 것처럼,
이러한 히페리우스 접근법을 관통하는 특징은
학문과 경건한 삶의 일관된 결합, 기도와 설교(ratio and oratio),
웅변과 경건(eloquentia and pietas),
인문학적 경건과 신실한 학문성(pietas literata and literatura pia)의
결합에 대한 강조에 있다.

[칼빈이후 개혁신학] p.260-263 참조.

2012년 4월 24일 화요일

햇살이 눈부시다

뒷뜰에 수북히 쌓인 햇살이 눈부시다.
실패함이 없이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조성하는 일,
물론 하나님께 노동의 땀방울을 요구하는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당연한 것처럼 보여도
그 배후에 수고가 없이 그냥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감사로 맞이함이 마땅하다.

오늘도
이렇게 과거에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하루가
지구를 덮을 분량의 햇살을 동원하여
유혹의 하얀 촉수를 내민다.
흐르는 강물처럼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빛의 빠르기로 흐르는 일정한 시간의 캠버스 위에
오늘은 어떤 존재의 흔적을 남길까나.

소망

눈꺼플이 너무도 무겁다.
버티다 버티다 세상을 닫는다.
캄캄한데, 평화로운 안식이 몰려온다.

아마도 연습일 것이다.
세상을 보려고 눈꺼플을 올리지 않아도 되는
그때가 오면 지금 날마다 반복하는 연습은
망각의 지우개가 한 입에 삼켜버릴 게다.
그 황홀함과 형설을 불허하는 안식 때문에.

아브라함 품에 안겼던 나사로의 느낌이 궁금하다.
또한 주님 안에서 누릴 안식의 소망이
나에게 뼈가 닳도록 성실한 오늘을 살라고 보챈다.

그 소망의 빛줄기가
절망의 먹구름에 차단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허나 하루의 에너지가 다하였다.

그 물음은 꿈으로 가져간다.
ㅡ.ㅡ 으아~~흠.

2012년 4월 23일 월요일

생각의 회복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일상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현실적 환경이 몰아붙인 일이었다.

불혹에 이르기 전까지는
일상이 독서하고 곱씹고 
숙제하는 것이었다.
주어진 현실을 점검하는 일이었다.

불혹의 문턱에 들어선 이후에는
다시 생각하는 것이 일상의 주류를 이룬다.
부과된 운명을 관조하는 일이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하루라도 책을 펼치고 책먼지를 흡입하지 않으면
잠드는 순간까지 무표정한 정죄감이 목덜미를 붙잡았다.
예기치 못한 짜투리 부스러기 시간을 아끼고자
손에는 도보시 독서용 서적을 휴대했고
귀에는 설교나 강의청취 이어폰을 걸었다.

그러나 불혹 이후로
지정된 장소 외에서는 책을 펼치지 않는다.
이어폰도 가능하면 자제한다. 
생각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타인의 생각을 배우고 익히는 퍼오기 활동은
스스로 생각하여 사태를 분별하고 
의제를 설정하고 가치를 산출하는
마음 속 깊은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준비운동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독서량의 빈곤을
일평생 해소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게 된다'는
전도자의 말 입증하는 일을 근사하게 여기거나
거기에 우리의 인생 전체를 걸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이른 아침에 두 눈으로 밟았던
도로 분리대에 자동차가 올라탄 진풍경이
지금도 생각의 발바닥에 소똥처럼 붙어 있다.
난 그런 소똥에 찍혀 쉬 사유의 자율성을 상실하는
생각의 근수가 불면 날리우는 가벼운 위인이다.
ㅡ.ㅡ 에효~~ ㅍ.ㅎ.ㅎ.ㅎ.

바로 이거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집힌 바 되어
그 뜻을 좋게 하실까 함이라

믿음에 대한 단상

오늘 저녁에
Jack 목사님은 하이델 교리문답 7일차
믿음의 조항들에 대해 다루셨다.

"믿음은 지식(notitia)이며 찬동(assensus)이며
신뢰(fiducia)"라는 종합적인 개념과는 조금 달리
하이델의 교리문답 믿음은
확실한 지식(certa notitia)과
확실한 신뢰(certa fiducia)로 구성된다.

이것이 의도하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정의는
어떤 하나의 정신적 기능과만 결부된 것이 아니라
전인격이 통째로 동원될 것을 요구한다.

즉 믿음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내주하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경에 계시된 대로 우리 주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고 신뢰하고 연합하는 것이다.

믿음과 행위라는
언어적 표상의 분리라는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여러 시대에 다양한 모양으로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믿음에 대한 각자의 이해는
인간 편에서 보자면 믿음의 분량에 의존한다.
저마다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와 같은
다양한 측면에 있어서 주관성이 작용한다
채소의 소화력만 발휘하는 믿음이 있고
단단한 식물까지 거뜬히 소화하는 믿음도 있다.
하여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일들이 필요하다.

믿음을 논함에 있어서
논쟁의 불가피한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최종적인 승부는 믿음의 열매를 맺어내는 것에 있다.
믿음의 진위에 있어서
인간의 한계 내에서 평가할 수 있는 요소도 있으나
영원히 신비로 남도록 주님께만 속한 것을
마치 자신의 것인양 판단의 잣대로 삼아
그것도 심판자의 불법적인 자격으로 마구 휘두르는 건
대단히 불경한 월권이다.

결국 믿음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란 성경의 증언은
엄밀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면 갈수록
명료함이 더해진다.

진리가 전해지고 보존되고 열매맺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진리의 본질만이 남는
그런 엄밀성을 추구하는 방식은 강요가 아니라
결국 본을 보여 권면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먼저 돌이킨 이후에 타인을 돌아보는 방식 말이다.

믿음은 아무리 정교한 매쓰로 해부해도
그 마지막 본질이 인간 편에서 벗겨지는 일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은 우리의 지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입증이나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역사가 종결될 때까지
믿음은 지속적인 화두로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믿음의 본질을 일평생 묻는 건
경건 유지와 성장의 괜찮은 장치라 사려된다.

2012년 4월 22일 일요일

Monumenta 지명수배

그리네우스가
1569년도 바젤에서 출간한
Monumenta s. patrum orthodoxographa...
지명수배 들어간다.
'모누멘타'는 그리네우스가 개혁주의 진영으로 
당적을 바꾸기 전 골수 루터파로 있을 때에
출간한 교부학 저작이다. 

특이한 것은
쟁쟁한 거물급 교부들의 문헌만이 아니라
그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마이너로 분류되는 교부들의 문헌과
신약의 외경까지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의도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 통합된 초대교회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네우스는
마누멘타를 특정한 개인이나 교단이 아니라
온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교회 전체에 헌정하여
당시 교회의 이리저리 상하고 찢긴 분열을
봉합할 통합의 포부를 밝힌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것이라면
어떠한 것도 가리지 않는
무진장 '경건한 접근법'을 취하였다.

당연히 교부들의 고유한 저작인지 위작인지
꼼꼼하게 따지는 일은 생략했다.
통이 크고 시원한 바젤의 개혁자다.
그의 사위가 아만두스 폴라누스...

장인의 교부학적 견해를 털어야 사위가 보인다.
맘 같아서는 유럽으로 함 뜨고 싶지만
비행기삯 숫자의 규모가 발걸음을 묶는다.

하여 긴급히 그 장인의 마누멘타 수배에 들어간다.
재보해 주시라...두둑한 보상은? 물론!! ㅋㅋ

2012년 4월 20일 금요일

출장 콘서트

지저귀는 새들의 깜찍한 음파가 창문을 두드린다.
평생 연습하며 준비한 곡조의 무상 배달이라 생각하니
아침의 빼곡한 일정으로 분주한 마음에 미소가 번진다.

창에 부딪혀 달팽이관 언저리에 이르기도 전에 
귀여운 멜로디가 맞이하는 무상한 소멸을 좌시할 수 없어 
나도 샤시를 밀고 적당한 틈을 만들어 출입을 허하였다. 
마치 나의 이러한 반응을 예측이라도 한듯 
빗줄기가 슬그머니 단조로운 리듬을 들고 가담한다. 

새들의 출장 콘서트에 빗줄기의 협찬이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아름다운 아침이다. 

2012년 4월 19일 목요일

바울의 자발성

바울은 괜찮은 남정네다.
그의 화려한 스펙을 보건대,
당대에 신랑감 일순위
놓친 적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이다.

출세가도 아우토반 질주하던 그가
그런 그가, 복음의 일군으로 돌변했다.
저간의 사정을 밝히는 그의 서신들을 보면
신적인 섭리의 지문이 여기저기 채취된다.

요약하면
영원으로 소급되는 하나님의 완전한 뜻과 계획,
그것이 시간의 역사에 펼쳐진 결과란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작정과 섭리라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경험 몇 조각을 가지고는
래티나의 적혈구에 혼신을 쏟아 뚫어지게 관찰해도
그 정체의 윤곽도 잡히지 않는 하늘의 신비가
이런 바울의 경험과 지각에서 머리둘 곳을 찾는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이러한 신비로운 진리를
서신으로 발설한 당사자인 바울은
당연히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역사의 유장한 흐름에 맡기는 결정론적 삶을
살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야마가 돈다.

나는 바울의 역동적인 자발성 발휘에서
숨이 차오를 정도의 거인다운 믿음의 행보를 목격한다.
먹고 마시고 결혼할 권리 박탈해도 될 사람은 없고
밭 가는 소의 입에는 망을 씌우지 않아야 하고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인간의 상식과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
이 모든 것에 부합한 권리의 행사를 마다하고...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종이 되는"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율성을 발휘한다.
그리고는 복음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을 자신이 받을 상이란다.
바울이 지칠줄 모르고 몰아붙인 믿음의 질주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추구하고 있었는지
그 실체의 뽀얀 살갗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렇게 바울은 천국을 침노했다.
하늘의 창고 귀퉁이에 떨어진 엽전 한 개까지
탐욕의 손톱으로 긁어 챙기려는 침노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천국이며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취하고
어찌하든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기 원하여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조차 배설물로 여기며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십자가의 길을 사수했던 그런 향기로운 침노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성숙한 자발성 발휘의 진면목 되시겠다.

그래서 Paul Han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쓰지는 말아야 할 텐데...ㅡ.ㅡ

딸내미의 생일

딸내미의 생일에
해산의 수고를 한 아내에게
더욱 마음이 쏠리는 건 당연하고 마땅하다.

그런데 아내의 시선은 생명을 걸고 생명을 나눈
딸의 기뻐하는 표정과 들뜬 마음을 문지른다.
그것을 더듬는 것만으로
매화꽃의 만개를 방불하는 미소가
불혹의 표정에 번지는 아내를 바라본다.

그런데 양육의 고된 수고가
지난 6년의 짧잖은 기간동안
이마에 파 놓은 주름의 더 깊어진 골이
남편의 못난 무관심과 이기적인 비협조를
가슴이 짠하도록 폭로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해산과 양육의 수고를
아내의 가냘픈 어깨 위에 무한 양도하고
학업에만 매달리는 남편의 똥고집 행보는
당분간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을 전망이다.

그저 고맙고 감사하다...ㅡ.ㅡ

2012년 4월 18일 수요일

자발성 발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갈등의 기로에서 
늘 붙들었던 불변의 진로결정 정석이다. 

그 배후에는 
주님께서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는
그분에 대한 신뢰가 결정적인 원인으로 있고
동시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에 대한
교회의 군살이 박힌 호평도 한 몫 거든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이 요청되는 대목이다.

자신에게 묻는다.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는 
우리 편에서의 자발성 발휘는 무엇을 뜻하는가?

자발성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유난히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에 밟힌다. 
대체로 결정된 법과 형성된 문화와
학습된 습관을 따라 '물흐르듯' 살아간다.
별 무리없이 편하게 흘러가는 삶이면
굳이 자발성을 발휘하지 않아도 되고
발휘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기도를 드리고
신뢰를 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삶,
여기에 부족한 듯 느껴지는 2%는 무엇일까?

자발성의 건강한 발휘이다.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는 역설적인
우리의 적극적인 자발성 발휘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나라의 독특성을
다소 상반되는 전폭적인 신뢰 개념으로
뭉개지는 말아야 한다는 거다.

쳐서 복종하고
눈이라도 내어주고
먼저 찾아가 존경하고
힘써 주를 섬기라는 주님의 명령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내성으로 길들여진 '우수한' 신앙에
일침을 날리고 있음을 직시하는 하루다. 

2012년 4월 17일 화요일

폴라누스 뒷조사

아만두스 폴라누스 뒷조사에 들어갔다.
평소 그와 교류하던 주변 지인들을 터는
우회적인 방식을 취하였다.

블랙 리스트에 오른 이름들은
Johann Jakob Grynaeus, Daniel Tossanus,
Abraham Scultetus, Andrea Rivetus,
그리고 말썽쟁이 Robert Bellarmine
등의 낯선 인물들...

쟈니와 다니엘과 로버트는 대충 털었다.
지금은 학창시절 폴라누스 동창인
아브라함 뒷조사에 들어갔다.
앞의 세 인물들에 비해 문체가 까다롭다.

그는 교부들의 신상을 낱낱이 턴 최초의
개신교 표준 교부학 교재를 저술한 거물이며
당시 로버트가 주도하는 로마 카톨릭의 교부학에
본격적인 안다리를 건 일종의 카톨릭 저격수다.

고문헌을 판독하는 그의 예리한 눈과 논리적 지성이
구석구석 번뜩인다. 제대로 함 디벼보자!!! ㅎㅎㅎ

목회의 방식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목회의 태도를 가르친다.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성을 요구한다.
날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의 공유가 전제된다.
그렇다면 말이 아니라 인격과 삶을 나누는 방식으로
권면과 위로와 경계의 가르침이 전달된다.

목회 근육이 전무에 가깝지만
목회에 뛰어들게 된다면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목회자가 되련다. 

2012년 4월 16일 월요일

위엣것과 땅엣것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생각의 대상과 방향성에 대한 지적이다.
바로 앞부분에 육체 좇기를 금하는 것과 관계된 듯하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죽이란다.
모두 중독성이 강한 것들이다.
빠져들면 가장 중요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고
벗어나는 것도 쉽지가 않은 사안이다.

아예 새사람을 입으란다.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의 차원까지 갱신되라 하신다.
사랑과 감사와 평강이 주장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권면이다.

아~~~
오늘은 위엣것 생각하는 것에
몰입하고 헤어나올 수 없는 하루이길 소원한다.

2012년 4월 14일 토요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직한 자에게
완전한 지혜를 예비해 두셨단다. 

배우고 익히는 것 자체보다
석학과 달인의 자리에 도달하는
원인과 방식의 중요성이 엄습하는 아침이다.
세상에는 날고 뛰는 분들이 무수하다.
그러나 하나님 경외라는 토대의 부실함이
공부와 숙달의 진수를 왜곡한다.

하나님 경외를 내세우며 
게으름의 아랫묵을 고집하는 분들과
고도의 민첩함을 보이지만
교만의 역주행에 지칠 줄 모르는 분들은
모두 위험하다.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해먹어도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규모로
블렉홀이 무색할 정도의 흡입력을 과시한다.
또한 하나님 경외를 주문처럼 외우지만
정작 인격과 삶에서는 나태의 악취를 풍기는
'경건한' 흉물들도 적잖아 보인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현상일 수 있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실상이 아닌 편견이면 좋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실"
오늘은 이런 그럴듯한 문구로 최면을 건다.
이 최면이 평생 지속되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2012년 4월 13일 금요일

부르심

목회자의 부르심은 이 말씀으로 요약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는 늘 준비하고 
이를 위하여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동원하고
이를 위하여 내게 허락된 삶의 시간들을 쏟으리라
이거 심플하네...ㅎㅎㅎ

종말로 형제들아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삶의 태도를 통째로 돌아보게 된다.
바른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에
가정적인 문제에 교회적인 문제에
내 시대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시고 아시고 관여하신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하는 문제이다.

성도로의 부르심은 천하보다 귀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면서
그런 생명에 걸맞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책임이 뒤따르는 문제이다.

우리에게 가까운 인과율에 근거하여
경박한 책임공방 벌이는 건 유아적인 태도다.
보다 넓은 안목과 문맥에서
나의 책임과 우리의 책임과 교회의 책임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태도가 보다 합당하다.

그런 성찰에 따른 실천적인 대책으로
나 자신이 더 참되고 더 경건하고 더 옳으며
더 정결하고 더 사랑할 만하고 더 칭찬할 만한
그런 자리로 앞다투어 나감이 또한 합당하다.

2012년 4월 12일 목요일

확신의 힘


13세기의 중세 철학자 Syger of Brabant는 
비록 당시 극단적 아리스토 철학으로 정죄된 
아베로 사상의 옹립자로 낙인이 찍혔으나 
신앙과 이성의 관계성에 대한 전통 확립에 
일익을 감당한 분임에는 분명하다. 
그의 신학 방법론이 마음에 든다.  

진리의 지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진리에 이르러도 그 진리를 지각하지 못한다. 
의심은 마음을 제한하여 
마치 육신의 발이 족쇄에 결박된 것처럼 
사유의 진일보를 훼방한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은 의심의 종결이다.
(cognitio veritatis est solutionum dubitatorum)

이는 17세기와 18세기에 번졌던 
데카르트 식의 신학 방법론인 
'의심'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확실성에 대한 목마름이
학문의 타오르는 열정에 기름과 같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에 있어서
데카르트 의심법은 양면성이 있는데,
하나는 불확실한 것, 의심의 여지가 일 말이라도 있는
것들을 다 가절하고 가장 판명하고 의심할 수 없는
사실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심과 확실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란
주관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신학도
보다 판명하고 보다 잘 알려진 것에서
애매하고 난해한 것을 해명하는 방법을 취하지만
성경의 기록된 계시로
우리가 옳고 확실하다 판단하는 것까지도
상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는
일인치의 양보도 없다는 것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 고백처럼 이해하기 위해
믿음(확실성)을 붙드는 게 정상이다.
사실 믿음의 본질에 지식과 이해가 자리잡고 있기에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믿음의 연장이다.
믿음면 되는데 믿음니까 연구하게 되는 거,
이거 뚱딴지 같은 어법이긴 하지만
믿음은 인간의 모든 기능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을 통솔하는 주도권도 가지고 있어 보인다.



2012년 4월 10일 화요일

4월의 눈

눈발이 창문을 두드린다. 4월 중순인데...

사람의 사찰과 하나님의 감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본래 사람들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어떤 유익들과 관계된 것도 아니다.
말씀의 주어이신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보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짭짤한 수입으로 지갑 두툼한 보상이 수반되지 않아도
그런데도 말씀을 붙들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그 이유여야 한다는 말이다.

믿음의 경주란 동기(motive)의 싸움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사람이 관여할 수도 없는 마음의 동기는
관찰자가 주님 뿐이시다.
주님에 대한 태도와 관계성이 맨살을 드러내는 영역이
내면의 은밀한 동기라는 것이다.

민간인 사찰은 천인이 공노할 불법이요 만행이다.
사람들의 내밀한 것을 알고 불의하게 이용하는
사악한 인간의 천박한 꼼수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이 모든 만물과 역사의
창조자와 보존자와 심판자 신분에 걸맞은
너무도 적법한 권위를 가지고 행하시는 전방위적 '감찰'은
늘 제일 좋은 것을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시는
목적과 방향을 따라 행하시는 신실한 사랑의 필연적인 행위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 그 이상을
말하고 행하는 것을 불법으로 여기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한하신 경계를 함부로 옮기지 말아야 한다.
옮기면 그것을 정하신 자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타인의 은밀한 삶과 속마음을 엿보는 행위는
주님과 그 사람 사이의 고유한 관계성을 훼손하고
동기의 순수성을 눈치와 조작으로 변질되게 만든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부르심에 충실하면 된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 사람 제대로 사는 세상이다. 

2012년 4월 9일 월요일

생명 그 이상의 가치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이
내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은
장열한 순교의 비장함 암시를 넘어
도대체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높이시려
우리의 생명조차 그 높은 가치에 대해서는
수단으로 동원될 정도인지 생각하게 하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죽는 것도 유익일 수 있는 이유다.

나의 정직과 나의 지혜와 나의 판단이
사실에 근거하든 순수하고 바른 의도에서 촉발된 것이든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로 말미암아 존귀하게 되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로 인하여 실패자로 분류되는 존재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나의 생명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설정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방편으로 간주하되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과 존귀까지
그런 문맥에서 동원되는 일들이 거의 비일비재 수준이다.
나의 형통한 인생에
주님께서 비위를 맞추고 협조해야 하는
그런 방자한 가치전도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내가 그런 현상의 생산자는 아닌지를 돌아보게 된다.

3D 부활절

눈 앞에서 차량이 폭발했다.

갓길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고속도로 스피드로 달리던 차들은 폭발한 차량도 피하고
앞뒤로 달리는 고속 차들과의 충돌도 피하려고
지그재그 급정차를 시도해야 했다.
다행히 아무런 충돌도 없었다.
그러나 폭발한 차량의 사방 창문으로 성난 화염이
시커먼 연기를 거느리고 주변을 삼키기 시작했다.

1차폭발 이후로 다섯번의 연쇄적인 폭발이 뒤따랐다.
주변을 서성이는 청년이 아마도 운전자인 듯하였다.
운전석 차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급작스런 폭발 가능성을 감지한 운전자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급히 달아난 직후에
폭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난 모처럼 앤아버를 방문하여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불과 몇 초의 간격을 두고 폭발에 동참할 뻔하였다.
인명피해 없어서 감사했고 나도 다치지 않아 감사했다.
죽었다가 살아난 입체적인 느낌이 와락 밀려 왔다.
지금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부활절이 이렇게 역동적인 날로 기념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
찐한 3D로 체감한 부활절로 기억될 것 같다.
허나 이런 경험은 한번으로 족하다...ㅡ.ㅡ

2012년 4월 8일 일요일

케커만의 유언

그렇게도 고대하던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직감한 케커만이
활기찬 목소리로(alacri voce) 남긴 유언이다.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배정하신 여정의 끝자락이 이르렀다. 
아마도 타인들에 비해 더 이른 시각에 도달했다. 
하지만 나는 형언할 수 없도록 더욱 행복하다. 
곧 지복의 상태로 접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선박이 안식의 항구로 
보다 빨리 안착할 수 있는데도 
지루한 평온에 마모되고
나태한 미풍의 농락으로 지체되는 것에서 
어떠한 기쁨이 찾겠는가? 

그러므로 지척의 친구들아 
와서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자.

Adam Melchior, Vitae Germanorum Philosophorum, p.502.

2012년 4월 7일 토요일

Raphael Custos의 Patrologia (1624)

가장 얇은 17세기 Patrologia 서적이다.

바울을 히브리서 저자로 보는 당시 다수설의 옹호자인
Raphael Custos는 13장에 기억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아우구스타나 도서관의 허락을 받아 그곳에 진열된 그림들을
소책자로 담았단다.

50페이지 정도의 교부학 소책자다.
당연히 건질만한 내용이 거의 전무하다. ㅎㅎㅎ
허나 17세기 초반에 그려진 교부들의 초상화를
감상할 수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진국이다.

어거스틴 할배는 원조 바이킹 인상을 풍기고,
화통하고 거부일 것 같은 크리소스톰 할배는
섬세하고 차분한 내향적 사색가의 모습이고,
암브로스 할배는 쿵푸팬더 치푸를 연상하게 하고,
시릴은 많이 피곤해 보이고,
제롬은 전두부의 곱슬한 머리카락 부위가 인상적,
아타나시우스 할배는 이마에 삼겹의 깊은 주름이 패였네
ㅎㅎㅎ....이런 차원의 소장가치 만땅이다...^^

Raphael Custos의 Patrologia (1624)

진정한 선교

땅에서는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최고의 상급으로 여기는
성도의 합당한 가치관이 인생의 수족을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시대와 사회는
이미 하나님의 가장 특별한 은총을 받아 누리는 상태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부르심을 받았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 수 있기를 고대한다.

2012년 4월 6일 금요일

스스로 감추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셔서 맘놓고 죄짓는다.
그래도 탈이 없으니까 죄의 지속에 떳떳함도 더해진다.
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분수를 월담하는 오만에 대해
주님께서 심판자의 위엄을 뚜렷이 보이셔서
적당한 겁박을 가할 법도 한데 그런 조짐은 전혀 안보인다.

물리적인 투옥과 몸의 질병과 관계성의 파괴를 경험하며
사람들은 운신의 폭을 조절하고 적정선을 찾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출입의 경계를 한하셨다.
그러나 말씀의 엄중함에 버금가는 감독이 뒤따르지 않아
사람들은 순종의 적정선 찾기가 곤란하다.
감독에 소홀한 정도가 아니라 감독의 유무까지 의심된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감시하고 보상과 처벌이란
필연적인 결과가 기다리고 있어서 행동이 조절되는 것은
아직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높은 도덕성 기대에
못미치는 비자발적 어거지에 불과하다.

자녀들 지도에 편달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그러나 편달 의존적인 인격의 피동적 상태를 넘으려면
외부적인 위협이나 강제의 틀은 제거해야 하고
자발적 검열을 촉발하는 생물학적 권위도
은근히 행사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부모의 관찰 앞에서 연출하는 자식으로 키우지 않으려면
외연적인 교육용 장치들의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보다 높은 차원의 방식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가르치고 기르시기 위해
스스로를 가리시되 당신 자신도 우리의 내적 자발성에
어떠한 조작이나 강제력이 행사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마치 없는 분이신 것처럼 너무도 꼼꼼하게 감추신다. 
모든 것을 지으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분이
뭐가 아쉬워서, 뭐가 두려워서 공적인 노출을
스스로 억제하고 계신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반면 그분을 찾고자 하면 시간의 간격이 필요하지 않은
하늘의 속도로 만나 주신다는 사실도 이해가 불가하다.

그러는 중에 난 "그분의 지혜는 측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슬쩍 더듬고 말았다. 그분이 내 눈과 지각으로 가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뿌듯하고 든든한 평강의 좌소라는 것도
측량할 수 없는 대목이다. 

오늘 4장의 결론이 그려지지 않아 딴짓만 하던
못난 답답함을 달래시려 이렇게 큰 위로까지 동원하실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주님도 참...^^

2012년 4월 5일 목요일

이가봇의 슬픔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 아니다, 떠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 상실하고 내다버린 상태를
이것보다 더 정확하게 통찰해서
이것보다 더 냉철하고 섬뜩하게 표상해낸
어떤 구절도 찾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영광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도 간음을 해도
사기치고 등처먹고 증오하고 저주해도
들키지만 않으면, 들킨다 하더라도
물리적, 물질적, 사회적 손실만 가해지지 않는다면
그런 행보를 중단하지 않으며 심지어
잘못이라 느끼지도 않고 반성도 없다.

이가봇은 비운의 시기에 출생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그의 어머니요 비느하스 아내라는 여인이
시아버지 엘리와 남편의 비보를 듣고 급작스런 출산 이후
그녀의 마지막 호흡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 여인이 죽음으로 밀어낸 메시지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이다.

가장 어둡고 음울하고 비통한 시기의 본질을 통찰한
이름도 없이 등장했다 무대뒤로 사라진 여인이다.
그렇게 짧은 엑스트라 등장으로
시간의 역사가 종료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충격적인 진리의 내용 산출 수단으로 활약한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다는 것보다
무섭고 강력하고 어두운 저주는 없을 것이다.
돈과 명예와 건강과 목숨은 잃어도
그것만은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겉은 멀쩡한데, 위로부터 온 영광은 전무한 상태는 아닌지.
하나님의 존영이 머무는 사람, 교회, 시대...
아~~ 과한 욕심일 수 있겠다....ㅡ.ㅡ

2012년 4월 4일 수요일

밥상정치

식구 다섯이 옹기종기 아점 식탁에 앉았다.
어제 해결하지 못한 반찬 조각들이
스크럼을 짜고 한 상을 덮었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한 홍합 냄비가 밥상의 격을 바꾸었다.

냄비를 부지런히 출입하는 첫째의 젓가락이 덩실덩실 춤춘다.
취향이 다른 둘째는 밥과 두부찌게 조합을 간택했다.
속도전에 약한 셋째의 표정에 수심이 쌓인다.
홍합껍질 더미가 심상찮은 속도로 쌓여서다.
다행히 먹거리를 두고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나님과 나의 전략적 냄비출입 절제 덕택이다.

허나 현장은 녹록하지 않았다.
나름 치열한 그러나 구여운 신경전이 있었지.
나는 나대로 홍합의 구수한 살쩜에
이빨을 박을 일 없었다는 아픔이....ㅡ.ㅡ
허나 이건 화목한 가정을 위한 즐거운 비용이다.

2012년 4월 3일 화요일

한겨레 안수찬 기자의 글을 퍼왔다

나는 어떻게 쓰는가②  안수찬〈한겨레〉탐사보도팀장

글은 자아의 노출이다. 그것도 불특정 다수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쓰기가 두렵다. 글에 담긴 자신을 누군가 폄훼할까 두렵다. 어떤 글도 독자를 한정짓거나 특정할 수 없다. 누가 읽을지 알 수 없고, 의도할 수도 없으므로, 글쓰기는 때로 위험천만한 모험이 된다. 불특정 독자가 나(의 글)를 간단히 오해할 것이다. 두려운 나머지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일기를 쓸 때조차 미래의 독자를 의식한다. 근본에 있어 글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이지 않다.

동시에 사람들은 글쓰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불멸에 대한 동경이다. 삶은 찰나의 시공간에 붙잡혀 있지만, 글은 그 올가미를 벗어버릴 수 있다. 글은 소통의 경계를 붕괴시킨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죽고 난 다음까지 나를 알릴 것이다. 글은 기본적으로 내가 주도하는 미디어다. 글 쓰는 이가 글 읽는 이를 지배한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아를 거리낌 없이 펼쳐 보일 광대한 영지를 갖는 일이다. 이 영토 안에서 나는 자유롭고, 그 땅에서 나는 세계의 주인이다. 글에 비하자면 말은 덧이 없다. 기껏해야 가족·연인·동료에게 나를 표현할 뿐이다. 매스미디어를 장악한 웅변가가 아니라면, 뭇 사람의 말은 공중에 흩어져 자취조차 남지 않는다. (실은 웅변조차 글로 옮겨야 ‘역사’가 된다) 글은 불멸의 미디어이므로, 사람들은 찰나의 삶을 글에 담으려 안달한다.

서로 충돌하는 공포와 열망을 잘 조절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는 자아 노출의 공포와 열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일이다. 글을 지탱하는 것은 그래서 문장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자아가 글의 정수다. 글은 ‘나’의 문제다. 김구의 <백범일지>,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등이 훌륭한 것은 그 문장과 별 상관이 없다. 그들은 문장연습을 거듭한 문필가도 아니다. 그들의 자아가 훌륭하므로, 이를 그대로 드러낸 그들의 글도 훌륭하다.

여기에 이르러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분명해진다. 글에 담기는 자아를 훌륭하게 갈고 닦으면 된다. 우선 10년쯤 면벽참선하며 수양하자. 그 다음 10년쯤 수만 권의 장서를 독파해 교양을 쌓자. 나머지 10년쯤 여러 직업을 거치며 연륜을 얻자. 그렇게 30년을 고행한다면 어지간한 자아에도 향기가 날 것이며, 그 향기가 밴 글도 읽어볼만 할 것이다. 물론 이 방식의 치명적 약점이 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언제쯤 고행이 끝날지 정확한 기약도 어렵다.

글쓰기는 자아와 타자가 섞이고 스미는 일

인내가 부족한 이들을 위한 둘레길이 있다. 게다가 그 길의 초입을 대부분 겪어봤다. 자아 대신 타자에 주목하는 방식이다. 자아와 대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반면 타자를 살피는 일은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자아를 노출하는 일에 비해 두려움과 창피함이 덜하다. ‘남’의 문제를 응시하면 어마어마한 고행을 건너뛰어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남’의 문제가 제 삶에 왈칵 달려드는 때를 사람들은 간간이 겪는다.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할 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낼 때, 누군가 자신을 해코지할 때, 한없이 증오할 때, 사람들은 가슴이 저리거나 치가 떨리거나 심장이 북받친다. 바로 그때, 사람들은 사무치게 글이 쓰고 싶어진다. 살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 겪는 그런 밤이면 명치에서 토악질처럼 글이 솟구쳐 오른다.

뭇 사람들은 이런 일을 평생 몇 번만 겪는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이런 일을 거의 매일 겪는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랑하고 실연하며, 투쟁하며 갈등한다. 타자로 인해 자아가 매일 뒤흔들린다. 매일 그들은 토악질하며 글을 쓴다. 이 대목에 이르러 글은 ‘자아’를 넘어서는 ‘타자’의 문제다. 글쓰기는 타자에 대한 감응의 표현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삼라만상을 향한 감성의 더듬이를 벼려야 한다. 주변의 이웃, 그들을 엮는 관계에 민감하게 감응해야 글을 쓸 수 있다.

세상 모든 길은 서로 만난다. 자아를 성찰하는 길과 타자에 감응하는 길은 어느 경지에 이르러 서로 섞이고 스민다. 둘의 팽팽하고도 적절한 긴장 가운데서 글이 탄생한다. 공교롭게도 저널리즘은 정확히 그런 글을 지향한다. 문학의 글(소설), 과학의 글(논문), 일상의 글(일기) 등과 비교된다. 모든 글은 자아와 타자가 교감한 결과이지만, 소설·논문·일기 등에서 자아는 종종 타자를 압도한다. 저널리즘의 글, 즉 기사에서 균형추는 반대로 기운다.

기사에는 자아가 (적어도 노골적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타자, 관계, 공공이 기사의 주어가 된다. 기사를 쓰면 더 깊이 더 자주 타자를 응시할 수 있다. 삼라만상에 감응하는 더 예민한 더듬이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기사에서 자아 노출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는 (본능적으로) 공공의 문제 뒤에 숨은 자아(기자)를 알아차리고, 그 인격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꽃을 뿌린다. 타자를 응시하는 기사는 소설·논문·일기보다 더 광활한 광장에 필자를 노출시킨다. 기사는 자아와 타자가 서로 섞이고 스미는 전형적 글쓰기다.

이 글에서 나는 기사 쓰기를 빌려 글쓰기를 설명할 것이다. 자아와 타자가 어떻게 교감하고 충돌했는지 보여줄 것이다. 타자를 통해 어떻게 자아를 노출했는지도 보여줄 것이다. 기사는 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글 쓰는 모든 이가 즐겁게 뛰어들 수 있는 하나의 장르다. 직업이 기자건 아니건, 글쓰기의 공포와 열망을 갖춘 사람 누구에게나 작은 영감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최근 2년여 동안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실렸던 기사를 주로 인용하겠다. 훗날 돌이켜 반드시 창피해질 글이지만, 지금으로선 내가 가닿은 최신의 지평이다.

1. 끊어 치면서 리듬을 탄다
지금 하얀 모니터에 검은 커서가 깜빡인다. 뭘 써야할지 막막하다. 빚쟁이처럼 아우성치는 커서를 오른쪽 끝으로, 저 아래로 밀어붙여야 글이 된다. 그 압박은 누군가를 밤 새게 만들고, 누군가를 술 마시게 한다. 그래도 돌아앉으면 또 커서의 압박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나는 중얼거린다. “끊어 치자.” 이 하나로 글쓰기의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끊어 치기는 글쓰기의 배터리다. 끊어 쳐야 글의 시동이 걸린다. 문장을 끊어 치는 것은 글쓰기의 출발이다. ‘주어-목적어-서술어’의 기본 단위로 하나의 문장을 끝내야 한다. 수학의 ‘소인수분해’처럼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때까지 모든 문장을 단문으로 줄이는 것이다. 짧고 간결한 문장을 쓰자는 이야기인데, 그렇게만 알고 있어선 짧은 문장을 쓸 수 없다. 모든 문장은 구질구질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기어코 애를 써서 ‘끊어쳐 내는’ 호흡으로 써야 한다.

끊어 치기는 만병통치약이다. 감동적인 연애편지를 쓰고 싶은가. 끊어 쳐라. 괜찮은 소설을 쓰고 싶은가. 끊어 쳐라.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될 기사를 쓰고 싶은가. 당연히 끊어 쳐라. 처음부터 제가 쓴 글을 끊어 치는 건 쉽지 않다. 제 글을 끊어 치면, 오장육부를 잘라내는 듯 고통스럽다. 이럴 때, 남이 쓴 글을 끊어 치면 도움이 된다. 싹둑싹둑 썰고 끊고 후려칠 수 있다. 문맥에 신경 쓰지 말고 기계적으로 끊어 쳐도 된다. 단 한번이라도 끊어 치고 나면, 내용과 상관없이 모든 글이 그럴듯해 보이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쯤에서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세상에는 유장하고 화려한 문장으로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들의 길을 따르면 안 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훌륭한 자아’를 갖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뭘 어떻게 써도 좋은 향기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매한 자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무조건 끊어 쳐라. 간단하고 빠르게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다.

문장을 끊어 치지 않으면, 손가락이 글을 지배한다. 커서의 압박에 시달리다 보면, 손이 가는 대로 글을 쓰는 일이 생긴다. 손가락이 글을 지배하면 문장이 길어진다. 일단 길어진 문장은 제 관성으로 더 장황한 글을 만든다. 장황한 글에서 생각과 느낌은 흩어지고 희미해진다. 결국 나의 글은 내 뜻과 상관없이 산으로 가버린다.

문장을 끊어 치면, 손가락 대신 생각과 마음이 글을 끌고 간다. 끊어 치면, 자아의 느낌과 생각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애초 느끼고 뜻했던 바대로 문장을 배치하고 글을 이어갈 수 있다. 끊어 치면, 독자는 필자의 세계에 보다 쉽게 몰입한다. 긴 문장은 독자의 시선과 호흡을 방해한다. 긴 문장을 따라가다 중도에 읽기를 포기한다. 유장하지만 읽히지 않는 글과 담백하여 잘 읽히는 글 가운데 어느 것이 훌륭한 글이겠는가.

문장을 끊어 치면, 리듬을 발견할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고유의 리듬을 갖고 있다. 글만 읽어봐도 필자가 누군지 알아차리는 일이 그래서 가능하다. 세상 모든 이에겐 문장의 리듬이 내장돼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그런 리듬을 자유자재로 끄집어낸다. 끊어 치기는 내장된 리듬을 발견하여 끄집어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글의 리듬에 있어 정해진 악보는 없다. 오직 각자의 리듬만 있다. 내가 즐기는 리듬은 ‘짧게 – 짧게 – 조금 길게 – 아주 길게 – 다시 짧게’의 방식이다.

주의할 것이 있다. 끊어 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리듬을 담을 수 없다. 리듬을 욕심내기 전에 끊어 치기부터 해야 한다. 초보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적으로’ 끊어 쳐야 한다. 그 다음, 짧은 문장 몇몇을 이어붙이면 리듬이 생겨난다. 이를 반복하면 자신만의 리듬을 찾을 수 있다. 글이 풀리지 않으면, 어찌 시작할지 막막하면, 어떻게 끝낼지 알 수 없다면, 일단 끊어 쳐라. 그러면서 리듬을 타라. 바로 이 글처럼. 

늦었다. 뛰어간다. “신분증 좀 봅시다.” 경찰이 막는다. 없다. 급하게 나오느라 주민등록증을 빠트렸다. 촛불집회가 열린단다. 나는 거기 안 간다. 성질 급한 B형 그녀가 저기 교보문고 앞에서 눈을 부라리며 서 있다. 이건 중요한 데이트다. 하소연한다. “그럼, 가방 좀 볼까요.” 승낙도 하기 전에 손부터 집어넣어 뒤적인다. 코끼리 그려진 콘돔 두 개 삐져나온다. 시청 앞 지하철역 출구에 늘어선 전경들이 킥킥댄다. 이런 십장생이 게브랄티 먹고 지브롤터 해협에서 염병하는 일은 10년 전, 대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다. 이빨 물고 신음하는 당신, 끝내 오도카니 서 있다 돌아갈 작정인가?
(‘쫄지 마! 실전 매뉴얼이 여기 있잖아 – 불심검문 대처법’ [2009.07.17 제769호])

2.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세상 모든 필자는 제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히길 원한다. 세상 모든 독자는 모든 글을 함부로 성의 없이 읽는다. 독자가 글에 완전히 몰입하길 원하는 필자의 기대는 대부분 배신당한다. 독자는 글의 대강을 대충 읽으려 한다. 이 비극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면 된다. 독자에게 상황을 설명하지 말고, 독자를 그 상황에 밀어 넣으면 된다. 그러면 독자는 ‘남의 글’을 읽는다 생각하지 않고, 글이 제공하는 시공간을 ‘내가 경험 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읽는 게 아니라, 글 속에 파묻힌다.

주제와 소재만으로는 특별한 글을 쓸 수 없다. 태초 이래 인간사의 중요 주제는 무수히 반복됐다. 눈에 쌍심지를 켜도 신선한 소재를 찾기 어렵다. 특별한 글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주제와 소재의 특별함이 아니다. 주제와 소재를 ‘특별하게 드러내는’ 힘이 특별한 글을 만든다. 대부분의 글은, 특히 기사는 인물·사건을 ‘설명하려’ 든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 밝혀 적으려 한다. 기자들의 기대와 달리, 이른바 ‘6하 원칙’은 독자들에게 거의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한다.

심지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독자를 글에 푹 빠뜨려야 한다. 독자를 글 속에 파묻히게 하려면 시공간과 인격의 디테일을 보여줘야 한다. “그는 슬펐다”고 설명하지 말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고 보여주는 방식이다. 보여주는 글을 쓰려면 보여주기 위한 취재가 필요하다. 디테일을 꼼꼼하게 살펴야 꼼꼼하게 보여줄 수 있다. 이는 눈썰미가 아니라 의지·의도·계획이 있어야 가능하다. 인터뷰를 할 때, 상대의 말만 적으면 설명하는 기사만 쓴다. 상대의 말과 함께 눈빛·표정·행동·시공간을 함께 적으면 보여주는 기사를 쓸 수 있다. 디테일 취재가 쉬운 것은 아니다. 더듬이가 많아야 가능하다.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더듬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중략) 노량진의 독서실은 금기투성이의 영토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과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 많다. 비닐봉지에 덧버선들을 담아 독서실 입구에 걸어두었다. 위에 안내문이 붙었다. “발뒤꿈치까지 감기는 이런 덧버선을 신고 다니세요.” 열람실 문에는 포스트잇이 여럿 붙어 있다. “발뒤꿈치 올리고 걸으세요.” 덧버선을 신어도 걸음마다 소리가 난다. “차가운 음료만 드세요.” 뜨거운 음료수를 마시면 훌쩍거리는 소리가 난다. “캔음료는 밖에서 따세요.” 딸깍거리는 소리가 방해된다. “점퍼·가방 지퍼는 밖에서 열고 들어오세요.” 지퍼 소리도 신경에 거슬린다. “담배 피우면 냄새 다 빠질 때까지 한참 있다 들어오세요.” 냄새조차 거슬린다.
(노량진 공시촌 블루스 [2010.11.26 제837호])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을 취재했다. 어느 고시원에 갔더니 게시판에 포스트잇이 빼곡하다. 고시 준비생의 말보다 그 메모가 더 절절했다. 작은 메모지를 모아 노량진의 본질을 드러내려 했다.

현장을 담는 르포 기사를 쓸 때, 나는 본능적으로 ‘작은 사물’을 탐색한다. 인터뷰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옷과 버릇부터 살핀다. 르포 취재를 가게 되면, 그 공간에서 발견되는 작은 물건의 특징에 주목한다. 기사에 독자를 ‘밀어넣는’ 일의 출발이다.

부족한 더듬이를 보충하려면, 시선의 확장 단계를 염두에 두면 도움이 된다. 하나의 인물에서 군중으로, 작은 사물에서 큰 공간으로, 찰나의 에피소드에서 인생의 역정으로 펼쳐나가는 방식이다. 삶과 역사를 단숨에 받아들일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는 독자는 세상에 없다. 다만 독자는 일상에서 접하는 작은 순간과 소품을 인지할 수 있다. 작은 것부터 보여주고, 이를 거대한 것으로 확장해 보여주면 효과적이다. 때로 그 반대의 확장도 가능하다.

마을이 끝나는 좁은 들판 위로 느닷없는 돌산이 거대하고 멀끔하게 솟아 있다. 말의 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이다. 굽이치던 금강은 마이산 자락에서 용담호수를 만들어 쉬었다 간다. 산과 호수를 훑고 내려온 겨울 삭풍은 전북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읍내 사거리를 칼처럼 가로지른다. 오후 1시30분이 되면 아이들은 바람을 뚫고 진안초등학교 교문을 빠져나온다. 그 가운데 몇몇은 또박또박 걸어 ‘마이용 아동지원센터’를 찾는다. 마이산과 용담호에서 머리글자를 따온 ‘마이용 센터’는 민간이 운영하는 무료 아동돌봄 시설이다. 센터 맞은편에는 초·중등 보습학원이 있다.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학원’이라고 펼침막을 내걸었다. 마이용 센터 아이들에겐 공부하는 습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신발을 벗자마자 아이들은 주방으로 달려간다.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먹을 것을 찾는다. “선생님, 저희 언제 밥 먹어요?”
(날치기가 엎은 아이들의 밥상 [2010.12.24 제841호])

방중 아동급식 예산 삭감 논란과 관련해 지방 도시의 아동지원센터를 취재했다. 기사 첫 대목의 ‘시선’은 다음과 같이 흘러 간다. ‘시골 들판 – 마이산 – 금강 – 용담호수 – 겨울바람 – 진안읍내 – 진안초등학교 – 아동지원센터 – 아이들 – 주방 – 냉장고 – 밥.’  기사의 초점은 아이들이 먹는 밥에 있다. 그 밥이 어떤 의미인지 독자가 몰입하여 스스로 알아차리길 나는 원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독자의 손을 잡고 아동지원센터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으니 그 시공간을 온전히 제공해야 한다. 아이들이 겨울 방학 때 먹는 밥 한 그릇의 의미에 몰입할 수 있도록 나는 산, 강, 바람을 등장시켰다. 시공간으로 보자면 거대한 것에서 작은 것으로 이동해갔다. 오직 밥을 위해서였다.  

3. 디테일을 전략적으로 배치한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려면 디테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디테일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세계는 무한한 사실의 연쇄 고리다. 작은 사실들이 끝도 없이 얽히고설켜 세계를 구성한다. 그 디테일의 전부를 기사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디테일은 기자의 ‘전략적 판단’에 의해 배치된다. 어떤 디테일은 버려지고, 다른 디테일은 생생하게 재현된다. 무엇을 드러낼 것인지 기자는 의도해야 한다. 디테일의 전략적 배치가 기사의 품질을 결정한다. 디테일이 세계를 입증한다.

수많은 디테일 가운데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나는 간단한 방법을 택한다. 취재 과정에서 내가 실제로 몰입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공연히 거창한 순간을 고르려 하지 말고, 실제로 기자가 몰입했던 순간을 돌아보면, 거기 전략적 디테일의 대상이 있다.

(중략)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종이 박스를 깔고 앉았다. 신문지로 싼 유리병을 꺼낸다. 원래 그 병에는 새우젓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 새우젓으로 김장을 했을 것이다. 돼지 머리고기에 새우젓을 올려 먹었을 수도 있다. 김순남(75)씨는 새우젓 말고 그 병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쌀밥과 볶은 김치가 담겨 있다. 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김씨는 밥을 먹는다. “우리는…” 하고 시작하는 게 그의 말버릇이다. ‘우리’는 차가운 걸 좋아한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차가운 밥을 먹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는 짠 것도 좋아한다. 붉다 못해 까만 김치를 먹으며 그가 말했다. 요즘 나오는 맛소금과 진간장이 참 맛이 좋아서 그것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고물 같은 내 인생 [2008.12.19 제740호])

70대 고물상을 24시간 따라다니며 취재했다. 그의 말, 행동, 표정을 샅샅이 살피고 메모했다. 모두 기사에 담을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새벽이 되자 도시락을 먹었다. “소금과 간장이 참 맛있다”며 꽁꽁 언 밥을 유리병에서 꺼내 먹었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을 드러내는 게 기사의 목적이었다. 할아버지가 겨울 새벽 도시락을 먹는 모습에 나는 완전히 몰입했다. 기자가 몰입했다면, 독자도 몰입할 수 있다. 그 순간을 기사에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디테일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다보면, 특정 시공간을 ‘쪼개어 펼치는’ 힘도 생긴다. 찰나의 순간, 한마디의 말, 얼핏 스쳐간 표정 등이 때로 거대한 일을 설명해낸다. 이 대목에 이르러 글의 위대함이 발휘된다. 순간을 쪼개어 펼칠 때, 글은 말·영상을 압도할 수 있다. 문학이 여전히 위대한 것은 영화가 담을 수 없는 섬세한 결을 활자로 표현하여 독자의 가슴에 무수한 울림을 각인하기 때문이다. 기사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중략) 그리고 공을 길게 툭 밀었다. 푸른 공간이 새로 열렸다. 그곳에 공간이 있다는 걸 박지성 말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창조한 공간 속으로 30m를 드리블했다. 여섯 차례에 걸쳐 공을 만지고 다듬고 깎았다. 마지막 순간, 그는 공의 자유의지를 믿었다. 수비수의 백태클과 골키퍼의 팔이 악다구니처럼 달려들자 그는 공이 굴러가는 대로 잠시 내버려뒀다. 공은 손과 다리의 정글을 마치 제 의지인 것처럼 헤집고 나왔다. 참을성 있게 기다린 박지성은 마침내 왼발 등으로 공을 토닥이듯 밀어 찼다. 골문 왼쪽 구석으로 공이 굴러갔다. 그리스인들은 헝겊인형처럼 서 있었다. 축 처져 있던 골 그물마저 가볍게 몸을 떨었다.
(투지보다 아름다움! [2010.07.02 제817호] )

2010 월드컵을 맞아 축구의 ‘미학’에 대한 기사를 썼다. 축구가 아름답다는 느낌부터 공유하고 싶었다. 축구 미학의 카타르시스는 골 장면이다. 2010 월드컵에서 박지성이 그리스를 상대로 골 넣는 장면을 수십 차례 돌려봤다. 십여 초에 불과한 그 장면을 거의 0.5초 단위로 끊어서 살폈다. 박지성이 골을 넣을 때 환호했던 독자라면 이 대목에 집중할 것이다. 일단 집중하면 축구의 미학에 대한 나머지 기사도 착실히 읽어줄 것이다. 디테일을 미분하면 때로 ‘서사’가 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어떤 디테일을 미분할 것인지, 기자가 전략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기사의 품질을 결정한다.

    4. 정보가 아니라 성격을 전달한다

기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건조한 단신 기사조차 사건·사고에 얽힌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근본적으론 모든 글이 그러하다)  독자가 기사를 읽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면 읽기 힘든 기사, 지루한 기사,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기사가 된다.

피노키오는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말도 한다. (적어도 소설에선) 사람처럼 느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피노키오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 피노키오의 관절은 뻣뻣했다. 그는 두 발로 걸었지만, 사람의 걸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사에서 사람은 ‘피노키오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굴곡진 피부, 부드러운 관절, 다양한 표정이 없다.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그런 디테일을 살려야 한다.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잘 살펴서 ‘전략적으로’ 기사에 배치해야 한다.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이력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다르다. 이상하게도 기자들은 이름·나이·직업·성별·고향·거주지·소득 등에 집착한다. 이런 것들을 나열해야 그 사람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생 떽쥐베리는 일찍이 <어린왕자>에서 그 허망한 믿음을 논파했다.

    (중략)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 친구의 목소리는 어떻지? 무슨 놀이를 제일 좋아하지? 나비를 수집하니?” 이런 말은 절대로 묻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지? 형제가 몇이나 되니? 몸무게는 얼마지? 그 애 아버지의 수입은 얼마나 되지?”하고 묻는다. 그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고 생각한다.
(<어린왕자>)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어린이의 눈으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목소리가 어떤지, 어떤 놀이를 좋아하는지, 나비를 수집하는지 적어야 한다. 버릇·표정·취미·태도 등을 밝혀 적어야 한다. 그제야 독자들은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직접 만나는 것처럼 느낀다. 비로소 기사에 몰입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기사는 그저 사람(person)이 아니라 인물(character)을 드러내는 글이다. 인물에겐 반드시 성격과 태도가 있다. 사람의 정보가 아니라 인물의 성격이 중요하다. 그것이 기사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중략) 12살 태피소 마테는 패배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의 팀 코트렐랑 초등학교는 2년 전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때도 태피소는 팀의 스트라이커였다. 그런데 올해는 3·4위전에서도 졌다. “화가 나요. 아주 많이.” 태피소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씩씩거렸다. “나는 오늘 4경기에서 3골을 넣었어요. 기회만 온다면 또 골을 넣을 수 있어요. 미드필더 잘못이에요. 나한테 공을 공급하지 못했죠. 수비수도 제 역할을 못했어요.” 태피소의 키는 120cm가 되지 않았다. 스트라이커 치고는 작은 게 아닐까. “축구에서 키는 상관없어요. 기술이 중요하죠. 리오넬 메시라고 알아요?”
(소년의 꿈은 ‘바파나 바파나’ [2010.06.11 제814호])

물론 이 기사에는 ‘숫자’가 등장한다. 온전히 어린이의 눈으로 인물을 드러내진 못한 셈이다. 다만 태피소 마테를 소개하는 정보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씩씩’거린 일과 “미드필더 잘못”이라고 몰아 부치는 고집과 “리오넬 메시를 아는지” 묻는 당당함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태피소 마테가 얼마나 축구를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 다음부터 기사는 테피소 마테의 꿈을 둘러싼 남아공 사회의 구조적 한계를 짚어 나간다.

영희는 말끝마다 “말이에요”를 붙이는 버릇이 있다. 그는 대학을 못 간 것에 대한 회한이 없다. “대학 나와 봐야 커피 심부름 하면서 90만원씩 받는단 말이에요.” 실업계 고등학교만 졸업한 영희는 주유소·노래방·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주유소에선 기름 냄새 때문에 토악질을 했다. 노래방 카운터는 ‘도우미’ 제안이 자꾸 들어와 그만뒀다. 손님들 술시중을 들다 흠씬 얻어맞는 노래방 도우미들을 영희는 자주 봤다. “불법 영업이니까 두들겨 맞아도 신고를 못한단 말이에요.”
(마트에선 매일 지기만 한다 [2009.12.11 제789호])

버릇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버릇은 그 사람의 일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말, 표정, 몸짓, 걸음걸이, 옷차림 등에 드러나는 여러 종류의 버릇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게 그 사람을 설명한다. 영희는 부당함에 대한 불만을 본능적으로 토로할 때, “말이에요”라고 말을 맺었다. 항변이 입에 붙은 그의 삶과 관련이 깊다. 그 버릇을 나는 드러내고 싶었다. 독자의 코앞에서 빈곤 청년 영희의 토로를 들려주고 싶었다.


 5. 평범한 말에서 탁월한 문장을 찾는다

좋은 문장은 책 속에 있지 않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말 속에 참으로 훌륭한 문장이 숨어 있다. 그럼에도 좋은 책을 읽어 좋은 문장을 배우게 되는 이유가 있다. (이 글의 맨 앞에 밝혔듯) 말은 공중으로 흩어져 자취조차 남기지 않는다. 오직 글만 사람에게 각인된다. 좋은 말은 사라지고 좋은 글만 기억된다.

기자는 이 비극을 해결할 수 있다. 기자는 남의 말을 듣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공연히 문학의 문장에 집착하지 않아도 (물론 책을 많이 읽을수록 좋은 글이 나오긴 하지만)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면 좋은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

(중략) 큰아들이 죽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결혼까지 했는데,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그게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잘 모르겠네. 뭐 알 필요도 없고….” 황기백(가명)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웃에 사는 김형성(가명)씨의 딸은 26살 되던 해에 죽었다. “딸을 날려버렸다”고 김씨는 말했다.

(중략) 2006년 폐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박씨는 말했다. 그래도 입에 무료 점심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삐거덕거리는 현관문을 열어 남편이 홀로 앉은 좁은 방으로 돌아간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힘들다 [2010.03.26 제803호] )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빈곤층을 취재했다. 그들의 말은 모두 탁월한 문장이었다. 평생의 가난을 응축한 문장이었다. 예컨대 “딸이 죽었다”가 아니라 “딸을 날려버렸다”고 말했다. 무엇이 힘든지 물었더니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이런 문장은 책상머리에 앉은 학자·문인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기자는 복 받은 직업이다. 이런 말이 널린 거리와 광장에 직접 나설 수 있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 말을 그대로 글에 옮기면 방대한 분량이 된다. 위 기사에 등장한 할아버지, 할머니와 각각 1시간 이상 대화했다. 평범한 시민의 말은 정연하거나 논리적이지 않다. 기자는 그 말의 본질을 흐리지 않는 한에서 정돈하여 압축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말의 ‘요지’를 정돈·압축하면 절대로 안 된다. 취재윤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하면 말이 죽어버린다. 전체 요지를 잘 드러내는 어떤 말을 잡아채서 짧게 쓰면 된다.

아울러 그 말을 기사의 문장으로 옮길 때, ‘문어체’로 고쳐 잡지 말고, 최대한 ‘말 그대로의 생생함’을 살려 적어야 한다. 놀랍게도 많은 기자들은 “딸을 날려버렸다”는 말을 번연히 듣고도, 기사에는 “딸을 잃었다”고 적는다. 책상물림의 감각으로 생생한 말을 죽은 글로 대체해버린다.

인용문은 꼭 필요할 때만 악센트처럼 집어넣어야 한다. 따옴표가 많으면 독자가 몰입할 수 없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지식인은 온통 인용문으로 가득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문으로 점철한 글을 쓰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글의 진정한 본질일 수도 있다. 다만 그런 경우에 처하게 된다면, 나는 따옴표를 지워버릴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문이 아닌 문장’으로 가득 채우고, 그 전체가 인용문이라고 어디엔가 주석을 달아둘 것이다. 나는 따옴표가 싫다.

어느 면에서 따옴표는 글 쓰는 이를 위한 ‘면책’의 장치다. 기자가 대표적이다. 기자들은 인용문을 남발한다. 제 글의 책임을 피하고, ‘취재원’들에게 말의 책임을 돌리기 위해 따옴표를 붙인다. 이런 장치가 꼭 필요한 때가 있긴 하다. 대통령·정치인·기업인·학자 등이 중대 사안을 논할 때, 일부러라도 따옴표를 붙여 인용문을 만들어둬야 한다. 유력자·명망가·권력자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기록에 남겨야 한다.

그러나 평범한 시민들의 평범한 말은 평서문으로 옮길 때 더욱 설득력이 높다. 딸이 죽은 과정은 기자가 직접 서술하는 평서문에 압축하여 설명하고, 그에 대한 노인의 감정만 인용문에 담으면 된다. 이를 모두 인용문으로 처리하면, 노인의 훌륭한 말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린다.

예상치 못했던 말도 배척하지 말고 잘 담으면 좋은 문장이 된다. 종종 기자는 어떤 판단과 편견을 갖고 취재에 나선다. 기자가 생각하기에 적절치 않은 말도 듣는다. 많은 경우, 대부분 기자들은 그런 말을 기사에서 빼버린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고, 상황에 비춰 적절치 않은 말이 독자를 몰입시키는 놀라운 문장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위 기사에서 할아버지는 큰 아들이 언제 죽었는지 “잘 모르겠네. 뭐 알 필요도 없고…”라고 말했다.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통속적으로 보면 노인은 엉엉 울어야 하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노인의 말은 다른 진실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다른 식구를 건사하려면 아들의 죽음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노인은 용을 쓰며 다짐했을 것이다. 삶의 밑바닥에 있는 그런 진실을, 그리고 문장을 한낱 기자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오직 그 노인의 말 속에 진실과 문장이 있다. 나는 그걸 옮겨 적었다.

6.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쓴다

(중략) 내 이름은 김순악. 그런데 일본 군인들은 자꾸 다른 이름을 불렀다.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또는 마쓰다케라고 불렀다. 요 한 장을 깔면 방이 꽉 찼다. 방문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 주먹밥 서너 개를 넣어줬다. 틈틈이 먹으며 하루 종일 일본 군인을 상대했다. 내 나이 열여섯이었다. 나중엔 몸이 아팠다. 일본 군인들은 옷을 벗지 않고 지퍼만 내렸다. 허리에 매달린 칼집이 내 뱃살을 찔렀다. 생리 때도 상대했다. 가제나 솜을 구해 아래를 닦았다.
(내 이름은 김순악, 일제에 짓밟힌 소나무 한 그루 [2010.01.15 제794호])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취재했다. 할머니가 남긴 기록을 살피고 생전에 사귀었던 사람들을 만난 뒤, 할머니가 직접 80여년 인생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기사를 썼다. 할머니는 해방 직후, 경찰과 사귀어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사라졌다. 이후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혼혈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다시 사라졌다. 서울 부잣집에 들어가 식모살이도 했다. 늙어서는 혼자 지냈다. 그 일생을 취재하고 글로 옮겨 적으며, 나는 많이 울었다.

기사에선 일부러 담담한 문장만 사용했다. 형용사와 부사는 최대한 덜어냈다. 감정이나 감상을 드러내는 문장도 덜어냈다. 일어났던 일만 적었다. 독자들이 메일을 많이 보내주었다.  글 가운데 가장 높은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다. 즐겁고 기쁘게, 슬프고 애달프게 만드는 글이 위대한 글이다. 글 쓰는 모든 이는 그런 글을 쓰려는 욕심을 갖고 있다.

기사에서 그런 성취를 이뤄내려면 반드시 지켜야할 철칙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부터 문장까지, 철저히 담담하게 써야 한다. 울리고 싶은가. 울지 마라. 웃기고 싶은가. 웃지 마라. 필자가 먼저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정 이입을 부추기는 문장을 쓰면, 독자는 울고 싶다가도 눈물을 거두고, 웃고 싶다가도 미소를 지운다.

이와 관련해 종종 발생하는 잘못이 있다. 사람들은 도입을 `인상적으로‘ 시작하려 애쓴다. 마무리도 `그럴듯하게’ 매듭지으려 애쓴다. 그런 태도에는 잘못이 없지만, 그 방식에 문제가 있다. 공연히 형용어구를 남발하면 안 된다. 인상적 도입, 그럴듯한 마무리는 독자의 감정을  부추기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철저하게 냉담을 유지하는 게 좋다.

특무대원들은 박진목을 나무에 묶었다. 새벽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무성하게 익어가는 보리밭이 보였다. 낙동강 줄기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육군 특무대원들은 그를 지프차에 싣고 대구 달성군 화원유원지 뒷산으로 데려왔다. 차 한켠에는 가마니, 삽, 괭이가 있었다. 그들은 구덩이를 파고 박진목의 눈을 가렸다.

(중략) 박진목은 3남5녀를 두었다. 세 아들은 농사를 짓거나 작은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으나, 지금은 특별한 직업이 없다. 단칸방의 움막은 지금 방 두 칸의 슬레이트 지붕집이 됐다. 오는 10월께 집 앞에 묘비를 꾸며 모실 것이라고 근처에 사는 큰아들이 말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며느리를 불러다 ‘내가 곧 돈 구해서 줄게’ 하며 웃으셨다”고 큰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평생 아버지 심부름만 했다”는 큰아들은 선하게 웃었다. 독립운동가·평화운동가의 자손이다.
(평화와 통일로 새겨진 92년의 삶 [2010.08.06 제822호])

평화운동가 박진목에 대한 기사를 썼다. 첫 단락은 기사의 도입이고, 뒷 단락은 기사의 마지막이다. 현대사의 역정을 오롯이 담은 인물이었는데 기사에선 수많은 곡절을 담담하게 쓰려고 애썼다.

인상적 도입과 그럴듯한 마무리를 결정짓는 것은 결코 수려한 문장이 아니다. 도입과 마무리가 막힐 때마다 나는 어떤 `장면‘을 떠올리려 애쓴다. 영화를 만든다고 상상한다. 전체 서사를 상징하는 특징적인 장면으로 무엇이 좋을지 고민한다. 위 기사에서 첫 장면은 총살 위기에 처한 박진목이고, 마지막 장면은 돌아가신 아버지 묘를 꾸미는 가난한 아들이다.

검박한 도입과 마무리가 가장 좋다. 더 검박할수록 더 감동적이다. 다만 나 역시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검박한 마무리에서 애를 먹는다. 언제나 차고 넘친다. 검박한 도입과 마무리를 연습하는 방법이 있다. 남이 쓴 글의 도입 단락과 마무리 단락만 떼어서 각 단락의 마지막 문장부터 지워보는 것이다. 예컨대 위 기사의 마지막 단락에서 ‘독립운동가·평화운동가의 자손이다’는 문장을 없애 보자. 더 여운이 남는 마무리가 된다. 그 앞의 문장, 다시 그 앞의 문장을 지워도 마찬가지다. 남의 글에 손을 대보면, 내 글의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

    7. 통찰을 담으려 애쓴다

이제 기사 쓰기의 가장 어려운 대목이 남았다. 기사의 두 축은 프레임과 디테일이다. 디테일은 지금까지 거듭 설명했다. 무수한 사실의 연쇄 고리가 디테일이다. 프레임은 그 가운데 특정 사실을 담아 엮는 틀이다. 프레임 없는 기사는 세상에 없다. 기자 또는 언론은 특정한 프레임을 모든 기사에 적용한다. `객관적 기사‘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의 총체를 담으려 애쓴다는 차원에서 객관적 기사를 `지향’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런 객관을 `구현‘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누군가 “우리는 객관적으로 보도 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거나 무식꾼이다.   

프레임은 이념, 논조와 조금 다르다. 오히려 사건, 사고,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 가깝다. 철거 세입자가 농성을 벌이다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용산 사건‘의 경우, 당시 두 종류의 프레임이 경쟁을 벌였다. 남일당 망루에 누가 올라갔나, 얼마나 많은 화염병을 준비했나, 누가 화염병을 던졌나 등 사건 현장에 초점을 맞춘 프레임이 있었다. 이 프레임으로 기사를 쓰면, 독자의 관심은 ’폭력성‘에 맞춰진다.

다른 프레임이 있었다. 그들이 왜 망루에 올랐나, 여러 재개발 가운데 하필 용산이 문제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재개발은 무엇인가 등에 초점을 두었다. 이 프레임으로 용산 사건을 보면, 재개발의 전근대성과 폭압성이 드러난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덕목들, 즉 끊어 치면서 리듬을 타고, 디테일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면서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고, 말 속에서 좋은 문장을 찾아 담담하게 적는다 해서 곧바로 훌륭한 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방식으로 최악의 기사를 쓸 수도 있다. 프레임 때문이다.

올바른 프레임, 좋은 프레임이 무엇인지 논하려면 더 많은 글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강력한 프레임‘에 대해선 몇 자 적을 수 있다. 통찰의 힘은 강력한 프레임을 구성하는 기초다. 통찰의 힘, 즉 사건, 사고, 인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능력은 기사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런 통찰을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에게도 그런 천부의 재능은 없다. 나름 노력은 하고 있다. 기왕의 상식을 뒤집어본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금기를 건드려본다. 여러 분야의 잣대를 교차하여 들여다본다.

태초에 원시 단세포동물이 있었다. 바다를 떠다니는 단백질 덩어리였던 녀석은 어느 날, 무작정 물결에 몸을 맡기는 대신 ‘하나의 방향’으로 헤엄치기 시작한다. 먹이를 섭취하는 데는 그 편이 훨씬 유리하다. 녀석의 몸뚱아리엔 이제 앞과 뒤의 구분이 생긴다. 단세포동물의 ‘앞 몸통’은 모든 얼굴의 시초다.
(얼굴 관음증은 구별짓기 본능 [2009.02.13 제747호])

살인범의 얼굴 공개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인권, 공익 등의 가치가 충돌하는 가운데 나는 달리 보고 싶었다. 살인범의 손과 발이 아니라 왜 하필 얼굴이 문제인가. 사람들은 얼굴에서 무엇을 보나. 얼굴이 전하는 정보는 무엇인가. 사람의 얼굴은 어떻게 진화했나. 도대체 얼굴은 왜 필요한가. 이런 엉뚱한 생각으로 기사를 썼다. 생물학, 관상학, 의학, 역사, 문화인류학, 심리학, 법학의 자료를 검토하고 각각을 종횡으로 엮었다.

부족함이 많은 기사였지만, 내가 의도했던 것은 살인범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우리의 얼굴‘을 보자는 메시지였다. 정치사회적 불안이 높아질수록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에서 ’악의 근원‘을 찾아내 응징하려는 욕망에 휩싸인다. 살인범의 얼굴을 들여다봐도 우리의 뇌는 그것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누군가를 징벌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우리는 과연 정상인지 묻고 싶었다.

이것이 과연 `강력한 프레임‘이었는지 자신할 순 없지만, 뒤집어보고 섞어보면 전혀 다른 프레임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건, 사고, 인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끝없이 질문하면서, 이를 담는 효과적이고 정확한 틀이 무엇인지 거듭 궁리할 때, 비로소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어느 면에서 프레임은 다시 글쓰기의 본질을 묻는 일이다. 타자에 대한 감응, 자아에 대한 성찰을 거듭하지 않으면, 사건, 사고, 인물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다.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글로 적어 남에게 의미를 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혹시 흉내를 냈다 해도 아무짝에도 소용없거나, 외려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뿐이다.

프레임은 자아-타자 교감의 수준을 드러낸다. 수많은 기사 가운데도 번뜩이는 통찰로 생각지 못했던 대목을 면도날로 잘라내 생생하게 드러내는 글이 있다. 그런 기사를 쓴 필자는 자아에 대한 성찰과 타자에 대한 감응에서 오랫동안 절차탁마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러 이 글은 되돌이표를 찍는다. 기사는 결국 기자의 노출이다.

옹기 빚는 장인의 마음으로

십수 년 동안 기사를 쓰면서 거듭 확인한 일이 하나 있다. 독자가 바라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점이다. 때로 독자는 편파 보도라거나, 정보가 충분치 않다는 불평을 한다. 그런 요구를 기계적으로 반영하면 (그조차 반영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만) 좋은 기사를 평생 쓸 수 없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입하여 공감할 수 있는 어떤 타자다. 그 공감은 때로 분노, 때로 웃음, 때로 울음이다. 공감은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이뤄지는 게 아니다. 공감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있다. 독자는 기자에게 “타자, 이웃, 세계와 공감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정돈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기자들은 지금까지 ‘정보’에 방점을 뒀다. 앞으로는 ‘공감’에 주목해야 한다.

공감을 위한 정보, 정보를 통한 공감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정답은 없다. 다만 나는 몰입하려 애썼다. 프레임을 고민할 때, 취재할 때, 기사를 쓸 때, 최대한 몰입했다. 나중에 돌아보면, 몰입한 만큼 독자들이 공감했다.

그것은 예술정신이 아니라 장인정신에 가깝다. 화가는 백지에 페인트를 뿌리고도 작품이라 주장할 수 있다. 대중이 외면하면 그 대중조차 비난하며 독야청청 한다. 그러나 장인은 함부로 옹기를 빚지 않는다. 거듭 연습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옹기를 만든다. 흠이 있으면 서슴없이 깨버린다. 모든 소비자가 그 옹기를 쓰며 만족하길 기대한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불평한다면 장인은 깊이 상심할 것이다.

기사는 화가의 그림보다 장인의 옹기에 가깝다. 너무 흔하여 사람들의 발길에 차일 정도다. 그래도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적 필요에 반드시 부응한다. 희로애락을 항상 받아 담는다. 그런 옹기를 만들기 위해 장인은 수십 년을 거듭하여 빚고 굽고 깨고 다시 빚는다. 사람들은 옹기 귀한 줄 좀체 모르지만, 장인은 오롯한 자부심으로 평생을 버틴다. 기사 쓰기의 이치가 이와 같다.

2012년 4월 2일 월요일

성경의 빛은 무섭도록 강하다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 하여 그만 두노라

바울은 참말을 하면서도 늘 이런 의식의 절제와 겸비 속에서 입술을 열었다. 타인이 자신을 과장해서 이해해 주기를 은근 기대하는 마음으로 붓을 움직이고 혀를 놀리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바울의 이 한 마디가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유발한다. 쉽사리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고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대목이다.

성경의 빛은 너무도 강하다. 은밀하게 감추어둔 모든 것들을 드러나지 않음이 없도록 조명한다.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과연 흑암과 빛이 일반이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이나 술 취함이나 음란이라 호색이나 다툼이나 시기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에 거꾸러 졌다는 어거스틴 일화는 결코 꾸며낸 야사가 아닐 것이다. 진리의 빛을 경험한 자는 그런 반전을 거부할 수 없는 은혜에 압도되는 법이니까.

그림처럼 화창하고 깨끗한 아침이다.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디 푸른 하늘이 거대한 하나님의 눈처럼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결혼, 이혼, 재혼이 궁금해

재혼하는 분에게 교회에서 주례와 예배당 사용이 괜찮아?

결혼, 이혼, 재혼 문제는 진짜루 간단하지 않아
늘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답변해야 할 것 같아.

사람마다 적용하는 기준이 달라서 다소 엄격한 입장이 궁금한 것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어.
먼저 사별 이후의 재혼인지, 이혼 이후의 재혼인지 구분해야 돼.
전자이면 재혼은 성경의 어떠한 조항도 반대되지 않으니까
주례와 예배당 사용 모두가 성경의 잣대로도 적법하지.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면 성경에 저촉되는 부분들이 꽤 있어.
즉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구절(이혼문제)과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라"는 구절(재혼문제),
심지어 "만일 갈라 섰다면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합하든지 하라"는
말씀(처방)이 있거든.

그러니 후자의 경우에 주례와 예배당 사용은 곤란할 수 있다고 봐.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엄밀한 기준으로 본다면 그렇다는 거야.
 만약 지금이 모세 당시의 완악한 시대에 준한다면,
이혼증서 써 주면 이혼도 적법하고 당연히 재혼도 적법할 수 있겠지.
그러나 신약의 말씀이 계시된 이상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건 곤란해.
난 할 수만 있다면 엄밀한 기준을 교회가 고집하는 게 좋다고 봐.

다만 이런 반론이 가능할 수 있어.
즉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과 관련해서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 아니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짝지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되겠어. 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나 동시에 이런 해석을 적법하고 적정하게 적용하는 경우보다
자신의 정욕을 두둔하는 정당화의 방편으로 동원될 가능성이
높은 해석이 아닌가 싶어.

 결국 법과 해석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성이 요구되는 사안이지. 여전히 애매한가? ㅎㅎㅎ

2012년 4월 1일 일요일

새로운 창문

한동안 숨쉬기가 곤란했다.
4개의 창문과 샤시가 통째로 바뀐 신선함의 댓가로
방마다 진동하는 페인트 냄새를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드뎌 그넘의 끈덕진 '유독성' 냄새가 가시었다.

 코로 호흡하는 생존 이전에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환경을 만드신 주님께
울컥한 감사가 복받친다. 내 건강만 감사할 게 아니라
그런 건강이 작동하는 바탕도 감사함이 마땅하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ㅡ.ㅡ

근데 학교가 어쩌자고 이런 선심을 보이는지,
선거철도 아니데 말이지...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