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선진들이 비가시적 존재의 증거를 확보한 방식은 믿음이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믿음이 없었다면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기동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은 그런 가시적인 것을 생의 기준과 동력으로 삼지 않았다는 게 히브리서 기자의 주장이다. 믿음의 정의가 등장하는 로마서의 문맥은, 믿음의 사람이 된 이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겪고 있다는 현실과 가해자에 해당하는 원수들을 갚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의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해법이 언급된 이후에 믿음의 본질이 진술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과 관계한다. 당연히 믿음이 제거되면 비가시적 존재가 모두 제거된다. 가장 먼저 제거되는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다. 로마서식 표현을 빌리자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과 영원한 능력이 일순위로 제거된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이어주는 소통의 유일한 끈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눈의 기능이 극도로 과장한 비주얼 시대가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노리는 표적은 비가시적 존재의 소멸 내지는 망각이다. 그 방법은 믿음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형의 '비가시적' 신비주의 소재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도 인간의 상상으로 유형화될 가시화 가능성이 없으면 취급하지 않는다. 빛으로도 표상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은 '인간화된 신'으로 대체하면 몰라도 그분 자체로는 문화적 활동에 컨텐츠로 담겨지실 대상이 아니시다.

난감하다. 하지만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원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복음이 증거되는 하나님의 방식은 전능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연약한 증인을 세우시는 거다. 결국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가장 고급한 가시화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 자신이다. 그 안에서 신적 형상의 본체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신다면 그보다 더 탁월하고 선호되는 기독교 비주얼은 없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대사회적 신분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인이다. 믿음은 주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우리는 그것의 증인이다. 믿음의 증인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마음과 생각과 언어와 행실에서 범사에 인정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믿음이 빠지면 독자는 성경의 전부를 상실한다. 수천년 전의 낡고 거북한 사유가 유령처럼 책갈피를 배회하는 쾌쾌한 고서일 뿐이다. 인간문맥 안에서 합의된 윤리의 쪼가리 소스로 여기는 자들의 가식적인 지문이 드물게 찍히는 정도다. 사단이 성도의 본질적인 것을 은밀히 빼돌릴 때에는 언제나 인간에게 가시적 작용이 극대화된 가장 매혹적인 미끼가 사용된다. 윤리적 행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물론 Better than nothing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경과 세상을 읽지 않으면 아무것도 읽지도 보지도 못한거다. 팩트의 유무에 최종적인 가치를 거는 게 그나마 괜찮은 접근으로 환영된다. 가시성 넘어의 비가시적 본질로는 도약하질 못한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증거가 희미하면 주저하고 망설인다. 나 자신의 삶을 잠시만 살펴봐도 그런 망설임이 무더기로 적발된다. 보이지 않으시는 주님과의 연합을 제공하는 최고의 선물을 가졌어도 누리지를 못한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건 억울함과 희생과 고난을 뒤집어 쓰는 가시밭길 삶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축복이요 기적이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허다한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의 삶을 고집했던 것은 주님과의 연합이란 그 축복과 기적에 버금가는 어떠한 것도 세상에서 발견하지 못해서다. 그런 삶이 영원한 증거로 성경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삶을 안내하는 이정표기 때문이다. 아무나 지각하지 못한다. 믿음이 인식의 눈이다. 오직 믿음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거다.

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한병수의 독서법

1. 독서와 사색과 언술의 시간적인 비율은 50: 40: 10이 적당하다. 독서의 Input이 많아야 하고 그것을 소화하는 사색도 그에 비등해야 하나 언술의 Output은 십일조면 족해서다. 문자적 독서와 관념적 사색의 간접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몸으로 참여하는 삶의 독서와 고통으로 읽어내는 사색의 직접성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된다.

2.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단행본, 고전을 균형있게 읽는다. 일간지 즉 신문은 매일 터지는 일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순발력을 길러주고, 주간지는 사태와 약간의 거리를 두되 여전히 현장감 있는 관점을 제공하고, 월간지는 가까운 원인들이 뒤엉긴 인과의 그물망을 그려주고, 단행본은 단일한 주제나 사태의 심도있는 분석과 규모있는 이해를 제공하고, 고전은 긴 세월동안 축적된 검증의 역사가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시대의 정신까지 극복하게 돕는다.

3.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눈과 귀를 왜곡하고 병들게 만드는 편협한 문헌들을 분별해야 한다.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고 다양한 입장과 관점으로 조명된 매체들을 균형있게 읽는 게 필요하다. 좌우매체 10개씩 읽는다...물론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극우와 극좌의 중간지점 혹은 평균치가 사실 자체에 도달하는 객관적 중도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나름 '합리적 중도'라는 표현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4. 성경만이 진리의 유일한 샘이라는 원리는 독서와 공부의 알파와 오메가다. 성경적 관점은 마치 지구가 스스로를 관조하지 못하여 객관적인 시야 확보를 위해 눈을 지구 밖으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같다. 왜곡과 오류와 편협의 본성적인 한계는 물론이고 지구와 우주의 피조물적 한계까지 극복하는 객관적 거리를 확보해 준다. 모든 생각과 판단과 평가와 희노와 애락과 행실과 선택이 전적으로 안심해도 좋을 기준을 제공한다.

5. 당연히 아무리 탁월하고 기발하고 독창적인 깨달음도 성경이 그은 진리의 경계선 밖이라면 과감하게 삭제하고 인간의 상식과 합리와 지각에 호응하는 접족의 여지가 없도록 먼 진리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안다'는 경건한 비약을 단행하는 자세가 독서와 공부의 겸손이다.

6. 독서가 넓지 못하면 거짓과 속임수를 분별하지 못하고 사유가 깊지 못하면 타인이 생산한 생각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록 육체가 결박되는 방식은 아니라 할지라도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 불가피한 수순이다. 가장 자유롭다 하면서도 결국 타인의 지적 배설물을 편들면서 살아가는 인생 말이다.

7.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어떠한 속박도 불허한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는데 그 자유가 교묘한 방식으로 유린되고 착취되는 건 기독교의 정신에 위배된다. 타인의 사유를 지배하고 조작하는 건 인간의 존엄한 자유를 유린하는 가장 은밀하고 간사한 방식이다. 마치 내가 주체인 것처럼 느끼는 중에 자발적인 방식으로 노예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8. 독서와 공부는 진리가 이미 제공했고 지금도 수혈하고 있는 자유를 수호하고 보존하고 공유하고 퍼뜨리는 몸부림을 의미한다. 

2012년 12월 29일 토요일

프레임을 바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16)

생계나 생사가 걸린 절명의 난관에 봉착하면, 우리는 곧장 그 사태의 실체를 규명하고 대처하기 위해 평소에 사용하던 해석의 무의식적 프레임을 먼저 손아귀에 거머쥔다. 그리고 난관을 둘러싼 가까운 문맥을 면밀히 살피다가 우리의 머리에 박힌 인과율 기재에 상응하는 원인이 발견되지 않으면 고민의 촉수는 보다 넓은 맥락을 더듬는다. 이때 대체로 등장하는 프레임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주권 사이의 대립이다.

그리고는 상당한 분량의 고민이 그런 틀 속에서 깨달음도 건지고 해법도 나오고 은혜와 위로도 얻는다. 그러면서 삶의 경륜과 프레임은 분리될 수 없도록 맞물린다. 급기야 프레임을 버린다는 것은 살아온 삶의 경륜을 부정하는 것과 같아진다. 그 프레임 없이는 교훈도 생산되지 않고 해법도 설득력을 유실하고 은혜와 위로의 출처도 소멸된다. 당연히 다른 난관들이 그림자 정도의 옅은 고개만 내밀어도 그 프레임은 곧장 투입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이 마치 어깨를 겨누는 대립항인 것처럼 '과'라는 대등 접속사로 나란히 연결하는 것의 문제점만 곰곰히 뜯어 봐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주권' 사이의 대립이란 프레임이 인생의 신비를 다 담아내는 틀이 아니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프레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인생의 신비와 성경의 진리가 모두 그것을 기축으로 풀어지는 만사형통 프레임은 아니라는 얘기다.

권장하고 싶은 프레임은 '사랑'이다. 환란 자체와 환란의 가까운 문맥과는 단절적인 추상적 프레임일 수 있겠으나 인생과 성경의 가장 광범위한 영역을 커버하는 해석과 깨달음과 은혜와 처방과 회복의 틀임에는 분명하다. 믿음의 선배들이 다채로운 단음으로 주야장천 내뱉었던 신학적 테마의 돌쩌귀는 바로 '사랑'이다. 이는 어거스틴 해석학을 비롯한 교부들의 해석학적 틀이기도 했다. '사랑'으로 성경이 풀어졌기 때문이다.

성경의 각 구절을 사랑에 이르도록 풀었다면, 삶의 책갈피에 불청객 같이 뛰어드는 인간문맥 단절적인 낯선 환란 구절들을 푸는 열쇠도 사랑이란 프레임이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앎과 삶의 프레임은 사랑이다. 

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적십자 봉사

교구담당 집사님이 가족을 초청했다. 매년 불러서 찬양도 부르고 게임도 하고 대화도 나눈다. 척 집사님은 30년이 넘도록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고 지금은 은퇴해서 적십자 자원봉사 활동에 여생을 던졌단다. 얼른 동기를 물었다. 2005년 미국에 카트리나 태풍이 남부를 휩쓸었을 때에 정부도 적십자도 사태를 민첩하게 수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곤경에 처한 분들에게 긴급한 도움을 신속하게 제공하는 상황 조정실의 필요성이 한번도 관여한 적 없는 적십자에 자원봉사 요원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란다.

자발적 봉사라 할지라도 훈련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십년의 교수생활 접으신 분이 클라스에 들어가 수업까지 들었단다. 최근, 동부의 옆구리를 강타한 샌디로 인해 천문학적 피해를 당한 주민들을 도우려고 본인도 뛰어들고 필요한 사람들도 보내셨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전기와 온수도 없는 불편한 곳에 1주일간 꼬박 머물면서 아픔도 나누고 복구의 땀도 흘리셨다. 지금은 적십자 자원봉사 초년병을 훈련하는 역할에 주력하고 계시단다. 나는 나중에 은퇴하면 어떻게 교회와 사회 섬길까를 늘 생각해 왔는데 기막힌 힌트를 하나 얻은 셈이다...

교부학 소책자

Raphael Custos의 Patrologia (1624), 예전에 소개한 바 있는 가장 얇은 17세기 교부학 서적이다. 50페이지 정도의 소책자다. 당연히 건질만한 '신학적 내용'이 거의 전무하다. ㅎㅎㅎ 

당시 바울을 히브리서 저자로 보는 다수설의 옹호자 Raphael Custos는 기억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경건한 교부들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아우구스타나 도서관의 허락을 받고 거기에 소장되어 있는 교부 그림들을 모아 간략한 행적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소책자로 만들었다. 내겐 17세기 초반에 그려진 교부들의 초상화를 감상할 수 있고 교부들의 신학에 대한 17세기 수용이 그림으로 반영되어 있어 장서 목록에서 빠뜨릴 수 없는 문헌이다.

어거스틴 할배는 원조 바이킹의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화통하고 거부일 것 같은 크리소스톰 할배는 섬세하고 차분한 내향적 사색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암브로스 할배는 쿵푸팬더 치푸를 연상하게 하고, 시릴의 표정은 사색의 무게에 눌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제롬은 전두부의 곱슬한 머리카락 부위가 포인트고, 아타나시우스 할배는 이마에 패인 삼겹의 짙은 주름이 눈길을 끈다. 

이런 차원의 소장가치 땅기시면 다운로드 받으시라. 논문을 쓰다가 해당되는 인물을 분석할 때면 한번씩 들추어 보는 문헌이다.

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가족의 하나됨

어제는 성도들과 함께 촛불예배 드렸는데 한국의 애틋한 현실이 아련하게 중첩되는 예배였다. 예배 끝자락에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족이란 메시지와 함께 수백명이 하나의 점으로 참여한 원을 만들었고 촛불이 좌우로 번지면서 그 원은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리스도 안에서 능히 가늠할 수 없는 모래알 수효의 가족들이 있다는 생각이 눈가에 이르자 이내 촉촉하게 젖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은 잔잔하나 도도한 강력이다. 

어느 누구도 절망의 고독한 바닥에 외로이 주저앉지 않아도 될 정도로 눈시울이 뭉클한 사실이고 현실이다. 이번 성탄절은 그러한 가족의 하나됨 개념에 지워지지 않을 방점이 그렇게 깊숙이 박힌 날이었다. 우리 주님은 사랑이다. 말구유를 훨씬 능가하는,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악취와 누추 투성이인 우리 안에 찾아오신 주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임재가 한 인간을 바꾸었고 그런 변화가 번져 세상을 바꾸었고 바꿔가고 있다. 

그런 문맥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보내졌고 우리를 보내신다. 

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기상청

나이가 들수록 몸은 기상청이 된단다.
일기의 적중률이 높을수록 몸의 상태는 심각한 거다.
자연의 흙으로 돌아가는 날이 임박하면 할수록
자연의 변화가 더 예민하게 감지되나 보다.
천기보다 시대의 표적을 읽어내는 감지력에
예민한 기상청이 되고프다.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우리의 저항은 사랑이다

어제는 생일파티 초청을 받아 중국인 친구집에 갔었다. 정신적인 문제를 앓는 100여명의 아이들이 출석하고 교사가 40명인 독특한 고등학교 교장도 동석했다. 그는 올해가 교장직 2년차라 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힘들고 어렵다는 내색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의 입가에 맺힌 옅은 미소가 시종일관 지워지질 않았다. 그건 주님 안에서 발견하고 부여받은 사명감이 만든 미소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학교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들이 가슴으로 아파하고 영혼으로 신음하는 고통을 읽는단다. 10일전에 있었던 코네티컷 샌디후크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주범 아담 렌자는 자패증 환자였다. 오랜 배타와 고립과 고독에 무방비로 노출된 불운의 시절을 보낸 청년이다. 그의 사회적 소통은 총기를 난사하는 것이었다.

지구촌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픔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내면에 누적된 것들이 사회 전체의 공동체적 아픔과 고통으로 전이되는 건 쉽게 예상되는 일이다. 지구촌의 어떤 골목이든, 어떤 민족과 국가의 누구이든, 가족처럼 돌아보고 사랑으로 치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보호 차원에서 어려운 타인들을 돕자는 건 계산적인 이기주의 동기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맞다. 그러나 사랑을 시도라도 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 그런 정도의 동기라도 붙들자는 거다. 보다 고결하고 순수한 동기는 물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우리에게 손익의 유무와 무관하게 창조의 원리와 질서로서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과 배려일 것이겠다.

부모의 인격과 삶은 언제나 가장 영향력이 강한 자녀교육 교재라는 사실이 가슴과 뇌리를 덮친다. 한 사람을 바르게 기르고 세우는 게 그리도 중요하다. 교제권이 넓을수록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음으로든 양으로든 영향력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는 쌍방적인 영향력의 실타래가 지구촌을 휘감고 있음도 기억하자. 아픔과 상처와 분노와 증오가 단 한뼘의 빈공간도 허용하지 않고 지구의 지표를 두텁게 뒤덮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자. 그것들은 하나같이 언제 발발할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재앙의 씨앗이다. 이에 대한 저항의 방식은 유일하다. '사랑' 이외의 다른 모든 동기나 태도를 모든 의식과 행실에서 삭제하고 살아가야 하겠다. 사랑 뿐이다...십자가의 사랑 뿐이다...주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우리에게 먼저 주시고 보이시고 타인에게 나누라고 명하신 그 사랑 뿐이다.

이게 나에게는 성탄절 느낌이다.

올레비아누스 신학

우르시누스와 더불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작성의 주역으로 잘 알려진 헤르보른 신학자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1587)는 강에서 보트가 뒤집어져 죽음의 강물로 빠져드는 친구를 구하다가 자신이 익사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 '살려만 주신다면 자신의 삶을 의로운 병기로 드릴 것이다'는 서약을 황급히 내뱉었다. 그리고는 성경과 더불어 붙잡은 문헌이 칼빈의 책이었다.

그는 부르주의 법학부에 들어가 박사학위 취득한 후 9개월의 짧은 법조인 생활을 접고 제네바로 갔다. 칼빈과의 인격적인 교분 속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다. 쮜리히로 가서 불링거와 버미글리, 그리고 로잔에서 베자를 만났다. 제네바로 돌아오는 길에 칼빈을 하늘의 위엄으로 종교개혁 대열에 가담시킨 파렐을 만났고 파렐은 기존의 습성을 따라 올레비아누스로 하여금 종교개혁 메시지의 운반자가 되는 게 어떠냐고 (강)권하였다. 여기에 칼빈과 비레의 설득도 가세했다. 

결국 그는 본향으로 돌아와 논리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직을 얻었으나 멜랑톤의 변증학을 교재로 사용하며 수업을 종교개혁 신앙 전수의 계기로 삼았다. 이후에 그는 헤르보른 지역에서 목회자가 되었고 마지막 생애를 헤르보른 아카데미 설립과 그곳의 초대 교의학 교수직에 바쳤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 1586년에 그가 출판한 마지막 문헌은 종교개혁 신앙의 교육용 교재로서 제작한 칼빈의 [기독교강요 요약(Institutionis christianae religionis epitome)]이다. 

개혁주의 언약신학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올레비아누스는 이처럼 칼빈의 신학으로 신학의 생을 시작했고 칼빈의 신학으로 끝마쳤던 전형적인 칼빈주의 신학자다. 그가 청년들을 생각하며 기독교 진리의 총화를 이것보다 더 잘 구성하고 담아낸 다른 문헌이 없다고 확신하며 선정한 책이 바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였다. 교리문답 작성 및 교리교육 분야의 달인이 그의 교육학적 혜안으로 고른 최고의 문헌이라 하였다면, 우리도 교회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교리교육 교재로 채택해도 좋을 것이다.

2012년 12월 23일 일요일

비장의 무기

나폴레옹 말이란다. 출처는 모른다.
그냥 인터넷에 부유하는 경구를 건진거다.
라틴어가 조금 이상하여 경미한 수정을 가하였다. Eam을 Id로.
단어의 위치는 in과 occultis를 바꾸었다.
나폴레옹 기분이 꿀꿀할지 모르겠다.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Ferrum tamen occultis in meis manibus. Id spes est.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대강절의 추억 (펌글, 차정식 교수)

매년 이맘때가 되면 시카고에서 보낸 그 혹독한 겨울이 생각난다.

 1988년 12월, 나는 이른바 ‘사회생활’의 호된 통과절차를 메코믹신학대학원에서 잘못 만난 한 교수와의 얼킨 인연을 통해 겪고 있었다. 그는 개혁신학 전공의 백인 씨니어 교수였고, 내 눈에 인종차별주의 내지 성차별주의의 습성을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 권위적이고 거창한 어투에 과장된 몸짓을 섞어 강의하곤 했던 그는 유독 백인 여학생들을 편애했다. 백인 여학생이 1등급 학생이었고 백인 남학생이 2등급 학생이었다면, 나와 같은 유색인종은 3등급 학생으로 느껴져 그의 수업시간에는 늘 자괴감과 낭패감이 가시질 않았다.

 그는 용기를 내어 힘들게 질문하는 나와 같은 부족한 아시아출신 학생에게 내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 해줘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주 무시당했고, 불평등한 처사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하루는 빌레몬서의 시시콜콜한 역사적 정황 따위를 재구성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성서주석가들의 연구 작업을 시시껄렁한 것으로 은근히 조롱하면서 그는 이런 사소한 전공의 사소한 분야와 구별되는 자신의 칼뱅 신학에 대한 터무니없는 자긍심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연구세미나’ 수업 시간에 나는 그와 결정적으로 부대꼈다. 내 연구 프로포즐을 발표하는데, 그는 다 듣기도 전에 끼어들어 내 발표를 중단시켰고 무시하는 발언을 하였다. 나는 감정이 격해져 발끈했는데, 내 항의의 사유인즉 다른 백인 학생들 발표는 친절하게 다 듣고 상냥하게 조언하면서 왜 유독 내 발표는 이렇게 묵사발로 뭉개느냐는 것이었다. 이 무례함과 불평등의 신학적 기원이 어디 있는 것이냐는 식으로 나는 따지며 대들었다. 내 발언은 그 자리에 앉은 학생들 앞에서 이 교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망신을 주기에 충분했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갑자기 얼굴이 벌개지면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행태에 대한 분노와 치욕을 얼굴 표정으로 드러냈다. 

나는 이 사건을 정치적 맥락으로 끌어들여 우리 신학대학원에 목사로서 저런 인종차별주의자가 학자로 행세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라고 선언하며 일부 교수들을 찾아가 이런 사람을 학교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의 괴팍함을 다 알고 있었고 내 주장에 동정해주었지만, 종신직을 받은 씨니어 교수를 쫓아내는 것은 법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그가 자기 자식과도 불화하고 다른 동료들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사실을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법적인 계약관계의 효력으로 그가 은퇴할 때만 기다린다는 식의 답변을 전해 들었다. 결국 이 어쭙잖은 투쟁으로 인해 나는 이 과목에서 D+라는 매우 치욕적인 점수를 받았고 인간에 대한 환멸로 정신이 심히 병들어갔다.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어느 날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 저녁 무렵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을 읽던 중 침대에서 컬러사진보다 더 생생한 형상의 마귀를 보고 즉각 졸도해버리는 끔찍한 환상 체험을 겪기도 했다. 내 뇌 속의 신경세포에 타격을 줄 정도의 충격적인 해프닝이었다. 이후 이 경험에 대한 숱한 고뇌와 분석이 이어졌다. 마침내 나름의 소박한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나는 내 안의 억압된 욕망과 분노가 응어리져 있다가 릴케의 시로 의식의 족쇄가 안온하게 풀어지는 순간 바깥으로 투사된 이미지의 결정체가 그렇게 흉측한 마귀의 몰골로 보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까지가 고통과 좌절의 스토리였다.

어느 날 망연한 포즈로 그간의 황망한 심사를 달랠 길 없어 사우스 55가의 거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서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대면서 덩치 큰 백인 할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도시산업선교회에 몸 바치다 당시 메코믹신학대학원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데이빗 래미지(David Ramage) 박사였다. 길을 걸으면서 아침식사로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대는 것도 코믹한 풍경이었지만 나를 발견한 순간 그의 그 풍부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내 이름을 불렀고, 호기심을 잔뜩 머금은 표정에 금속성 목소리로 쌕쌕거리며 왜 여기서 어슬렁거리느냐, 왜 그처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힘들게 그동안의 사태를 떠듬거리며 이야기하자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임을 알아채고 나를 자기 자동차 안으로 초대했다. 똥차보다 약간 더 나은 그의 조그만 자동차에 총장인 그의 거구가 들어앉는 그 부조화와 불균형도 코믹했다.

차 안에서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그에게 들려주는 동안 그는 그 동네를 빙빙 돌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던 중 내게 전한 그의 한 마디는 ‘대강절은 희망을 키우는 절기’라는 말이었다. 그 희망과 관련하여 그가 어떤 디테일로 이야기를 이어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한 마디 선언에서 희망의 육체를 어렴풋이 보았던 것 같다. 전통적인 절기가 형식 이상의 심오한 의미로 채워져 있다는 직관도 스쳤다. 무엇보다 어릿광대 같은 동양인 학생의 푸념을 들어주기 위해 자기 차로 날 초대하여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실천하는 모습에 적잖이 감동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억지로 동행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자발적으로 동행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대선이 끝난 지 이틀이 지난 현재, 많은 이들이 ‘멘붕’을 말한다. 페이스북의 한 친구는 내 책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의 18장 제목이 “예수, 여성을 동무 삼다”였는데, 이것이 바로 18대 대통령으로 여성의 당선을 사주한 다빈치 코드류의 음모론적 복선이 아니었는지 유머러스하게 나를 추궁했다. 또 어떤 이는 기발한 사후승인적 위안의 방식으로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킨 지 51.6년이 지난 시점에 그의 딸이 51.6%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뭔가 신묘한 하늘의 조화가 아닌가 하는 식의 결정론적 암시를 남겼다. 또 다른 이는 오늘 2012년 12월 21일이 고대 마야력의 예언에 따라 마지막 종말의 날임을 상기시키면서 종말의 도래를 강렬하게 희구하는 듯한 여운을 풍겼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대표 송인수 선생의 페이스북 글이었다. 그가 어제 전주에서 열린 학부모 초청 강연회에 갔는데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 이유에 관해서 그는 전통적인 야도(野都)인 곳에서 이번 대선이 가져온 거의 공황상태의 정신적인 충격이 아니겠느냐고 진단했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나는 전라도 출신의 사람이 아니지만 선거 때마다 전라도의 인구가 경상도보다 적은 것이 무슨 원죄인 것처럼 드러나는 꼴을 봐주기가 역겹다. 무슨 사명감처럼 편을 갈라 쪽수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더 원시적인 야수성이 어디 있으랴.

문득 박정희의 경제치적 덕분에 우리 백성들이 고기를 먹게 되었다는 소설가 김훈의 객기어린 방담에 자신은 제 손으로 열심히 노동하여 당당히 고기를 사먹는다고 퉁명스런 일격을 가한 진중권의 발언이 떠오른다. 전체와 개인, 우상과 주체, 중앙과 주변의 거리가 이다지도 아득하다. 이 세상 구석구석을 두루 헤매며 살피고 부대끼고 체험한 뒤 자신의 몸뚱이로 돌아와 속속들이 그 심연을 다시 살펴도 여전히 방황하는 마음 가눌 길 없고 그 미궁 같은 속내를 다 까발려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하물며 수천 만 명 붉은 도장의 향방에 담긴 ‘표심’을 어떻게 요약하고 한 무더기로 재단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런 사연과 의지와 변덕과 미망 속에 아무도 모를 요물 같은 ‘우리’가 불현듯 만들어낸 해괴한 작품 아니더냐. 이런저런 후유증의 사연들을 가슴에 새기면서 샤워를 하는데 문득 24년 전 시카고 남부 55가의 추운 겨울 거리에서 만난 데이빗 래미지 총장의 한 마디가 귓전을 스쳤다. 희망을 키우는 대강절의 의미가 다시 가물가물한 기억의 단층을 뚫고 오늘의 육체를 입으며 돌올했던 것. 이제 대강절의 끝자락에 성탄절이 고개를 내민다. 종말론적 희망이 힘들게 영글어 이 땅에 핏덩이 생명으로 오신 메시아를 기린다면 이 희망으로 선사할 구원은 아직 요원한 미래를 가로질러 절박한 현재에 걸쳐진 것이니 오늘도 폼나게 요동치는 것이 마땅하리라.

오늘도 생명이 태어나는 건 하나님이 아직 이 땅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단 확실한 증거 아닌가. 무덤 속에 누운 데이빗 래미지 총장이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다시 태초의 언어처럼 ‘희망’을 선포할 분위기다. 이 고리타분한 추상명사가 다시 시간의 씨줄과 공간의 날줄을 엮어가면서 보여줄 이 땅의 풍경과 거기 잇닿아 하염없이 펼쳐질 생의 미로, 그 무늬가 설핏 궁금해질 뿐이다.

개혁주의 신앙 고백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개혁주의 전통의 산실이라 할 16세기와 17세기 문헌들을 살펴야 하는데, 그 종류는 1) 신앙고백서 (confessio fidei), 2) 교리문답 (catechismus), 3) 교의학 (loci communes), 4) 주석 (commentarium), 5) 회의록 (acta), 6) 서신 (epistola) 등으로 구분된다. 당연히 문헌의 종류별로 개별적인 연구와 종합적인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

신앙 고백서는 다른 어떤 문헌보다 중요하다. 종교개혁 시대에 부패한 로마 카톨릭의 악취가 교회에 진동할 때 모두가 느끼고 알았지만 깨어있는 믿음의 사람들만 그 부패성을 고발하고 개혁의 절박성을 알리는 깃발을 목숨 걸고 흔들었다. 이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대응은 그들의 정체성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징계의 부당한 칼을 뽑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순교의 피를 흘리고 이단의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도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는 않았다.

피의 순교만이 진정한 개혁을 보증하는 건 아니었다. 여러 종교개혁 인물들은 개혁을 주장하는 진영의 정통성과 로마 카톨릭의 이단성 입증을 위해 결사적인 저항과 응전의 적극적인 붓을 들었다. 무엇보다 로마 카톨릭과 구별되는 개신교의 정체성을 시급히 표명하는 일에 우선적인 일필이 가해졌다. 이는 대단히 많고 다양한 고백서가 주로 16세기 초반에 출몰했던 이유기도 하다. 고백서 작성을 위해 성경과 교부들과 건강한 중세 문헌들에 대한 탐독과 연구와 정리와 진술의 지난한 작업에 들어갔다. 개신교의 고백적인 문화는 주로 개혁주의 진영에서 주도했다.

개혁주의 고백서는 신앙과 신학의 출중한 두뇌들이 시대의 필요에 따라 최고급 역량을 발휘해서 산출한 개혁교회 얼굴과 같은 문헌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역사 속에 교회의 공적인 이름으로 심어지는 방식이 바로 교회에 의한 진리의 공적인 고백이다. 그것의 역사적 흔적이 고백서다. 그런데 이에 대한 교회의 관심사는 긴 세월동안 의식의 밑바닥을 맴돌았다. 신학적 자격증 취득의 일환으로 특정한 고백서의 부분적인 연구가 드문드문 있었지만 주로 학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정도의 반향만 일으켰고 범교회적 성찰과 진단과 진보의 발판까지 제공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최근에 앞서 언급된 고백서의 중요성에 일찍이 눈을 뜨고 역사의 비좁은 골목을 해치고 들어가 개혁주의 고백서라 불리는 문헌들을 찾아 영어로 번역하고 책으로 묶어낸 인물이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James Dennison이다. 데니슨은 워싱턴에 있는 개혁주의 신앙을 표방한 신학교 Northwe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회사와 성경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지만 한국에도 잘 알려진 프란시스 튜레틴의 [변증신학 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영역본의 책임 편집자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데니슨이 편찬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서 모음집은 Reformed Confessions of the 16th and 17th Centuries in English Translation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Press)이다. 현재 1권 (2008)과 2권 (2010)과 3권 (2012)이 나왔으며 4권과 마지막 5권은 2013년도에 나온단다. 오늘 3권 전체가 수중에 들어왔다. 포장을 뜯고 책장을 펼쳤다. 아~~ 정말 탁월하다. 세 권에 포함된 개혁주의 고백서는 무려 91개다. 데니슨의 지속적인 노고에 찬사가 저절로 쏟아진다. 라틴어나 고전 불어나 고전 독일어를 모르시는 분들도 이제 영어로 16-17세기 개혁주의 고백서 전부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개혁주의 고백서 모음집은 데니슨 자신만의 독창적인 활동이 아니다. 선행자가 있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로 니어마이어 (Hermann A. Niemeyer)의 Collectio confessionum in ecclesii reformatis publicatarum과 뮐러(Ernest F. K. Müller)의 Die Bekenntnisschristen der reformierten Kirche, 및 부쉬(Eberhard Busch)의 Reformierte Bekenntnisschristen에 근거해서 번역하고 편집했다. 그리고 각 고백서는 간단한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서문과 고백서의 영역본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고백서의 원문에 대한 서지사항 또한 친절하게 제공한다.

조엘 비키(Joel Beeke)는 데니슨의 노고로 개혁주의 신앙의 풍요로운 발전과 조화와 경건을 입증하는 놀라운 성취의 발자취를 단권으로 추척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일독을 권하신다. 제네바 대학의 이레나 바쿠스(Irena Backus)는 이 문헌이 모든 개혁주의 공동체가 정통적인 것이라고 인증한 문헌들의 종합적인 영문 판본이고 대부분의 고백서가 영어로 처음 번역된 것이라며 책의 고유한 기여도를 꼬집는다. 이 고백서 모음집을 통해 근 2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종교개혁 공동체의 다양성과 발전의 도식적인 액기스를 영어로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바쿠스의 마지막 추천의 변은 이렇다: "모든 도서관이 필히 소장해야 할 문헌이다."

교회가 남긴 가장 짙은 신앙의 발자취가 신앙 고백서란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표방하는 교회가 뭔가 이상할 때 그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은 개혁주의 고백서를 살피는 것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그 본류로 소급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 본류의 중심에 개혁주의 신앙 고백서가 있다. 이 고백서를 번역하는 번역자와 출간하는 출판사가 있다면 그들의 땀방울이 한국교회 회복에 미칠 영향력의 크기는 측량을 불허한다. 하여 본인도 관심있는 분들의 소장과 일독을 강추한다!

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배부를 것이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 (마5:6)

팔복은 땅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천국을 디디며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지침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군지에 대한 정체성의 지표과 살아가는 삶의 원리로서 구약에는 십계명이 있고 신약에는 팔복이 있다. 주어도 동일하고 본질도 동일하고 목적도 동일하나 양태와 깊이와 명료성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팔복은 십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다. '율법에는 이렇게 쓰여 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율법의 본의가 팔복이란 예기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외적 행위이기 이전에 내적 상태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되다는 것은 도덕적 행실을 촉구하는 미끼가 아니다. 물론 행실이 불량해도 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지만 말이다. 하나를 강조하면 다른 하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여기는 배제적 사고가 보다 깊은 진리로의 초청에 불응해도 되는 암초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행위는 당연한 열매다.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폄하도 반론도 부당하다. 그렇다고 행위에 머물면 함정에 빠지고 만다. 강조점은 진정한 복의 유무가 의의 외적인 한시적 구현 여부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사람의 상식과 논리를 따라 의미의 사족을 달아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주어라는 사실은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되는 성경 해석학의 원리이다. 예수님이 만물을 조성하고 역사를 성취하실 분으로서 하신 말씀이다. '배부를 것이라'는 말은 사람이 원하는 내용이 사람의 방식대로 사람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주의 마음에 품으신 의가 주님의 방식대로 주님의 때에 주께서 친히 이루실 것이기에 배부를 것이고 복되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약속이다.

의는 하나님께 있다. 의의 성취도 하나님의 성취이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실패함이 없이 배부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사람의 의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주께서 원하시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핀트가 안맞으면 결코 배부를 수 없는 것에 허기진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겠다. 허탄한 것에 슬퍼하고 좌절하고 낙담하며 아파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마땅히 목말라야 할 그것에 목마르고 마땅히 주려야 할 그것에 굶주려야 하겠다. 

잿빛 하늘이다

미시건은 잿빛 하늘이다. 다 때가 있는 법이다...
겨울인데 지나간 가을 습기로 여전히 축축해도
관찰되지 않는 어울림과 아름다움, 있을 것이다.

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투표하자

꼬옥 투표하자.
유통기한, 5년이다.
수혜대상, 국민 전체이다.
일인일표, 완벽한 평등이다.

투표는 국민의 존재감을 표현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투표는 국민의 진정한 자유가 구현되는 출구이다.
투표는 자유지만 그 자유에는
국민 전체에게 미치는 5년치의 영향력에 대한 책임이 수반된다.

잔키우스 신학의 정수

잔키우스 신학의 정수가 담긴 개혁교회 교리서다. 1590년에 생을 접었으니 그의 원숙한 신학이 응축되어 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차가운 거절의 벽에 부딪히긴 했으나 그 책의 가치는 영국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널리 유포될 정도였다. 꼬옥 번역하고 싶은 책이다. 관심 가질 출판사가 있으려나...두툼한 세월의 먼지에 묻힌 이 고서를 누가...ㅡ.ㅡ 아서라!

Hieronymus Zanchius, De religione christiana fides (Neustadt, 1588)

2012년 12월 16일 일요일

질송의 중세연구

질송의 글을 읽는다. 그의 사유에는 탁월한 통찰과 로마 카톨릭적 오류가 공존한다. 저자에 의한 신구약의 통일성을 확언하고 있고 영감설에 대한 입장도 무난하고 신학자든 철학자든 가장 근원적인 자료의 샘이며 권위인 성경에 모든 지성적 활동의 뿌리를 박아야 한다는 태도도 건전해 보인다.

요한은 성자를 로고스(logos)라 하였고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energeia)과 지혜(sophia)라 하여 기독교 진리를 헬라어에 담았다. 성경에는 철학적 언어로 충만하다. 질송은 그런 전제에서 파생된 해석의 다양성을 지적하며 두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하르낙의 입장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로고스로 규정한 것은 기독교 사상이 헬레니즘 사상과 결탁하고 결국 복음의 순수성을 상실한 변질의 철학적 시궁창에 빠지고 말았다는 그런 입장에 근거하여 하르낙은 기독교가 복음서의 순수한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에 제한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다른 하나는 로마 카톨릭 사가들이 고집하는 입장이다. 기독교 진리의 형성과 해석에 있어서 그리스 철학의 막대한 영향력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본질이 바뀌거나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에 근거하여, 기독교는 종교적 철학이 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신학적 사색의 방대한 소스가 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질송은 후자의 대열에 섰다.

질송의 고대 및 중세 신학과 철학에 대한 학문적 기여도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만큼 그의 신학적 공과를 엄밀하게 분석하고 교정해야 할 필요성도 크다. 중세의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질송의 글은 꼭 지나가야 할 정거장이 아닌가 싶다. 중세신학 강의를 준비하는 문턱에 선 이 순간에 본 나의 생각은 그렇다.

참으로 아름다운 Kaitlin Roig 선생

Kaitlin Roig, 대학을 갓 졸업한 코네티컷 샌디후크 초등학교 1학년 선생이다.

미국 초등학교 교실에는 조그마한 개별 화장실이 있다. 총을 든 사나이가 학교에 들어왔고 100여발을 난사하여 아이들만 20명이 죽은 상태에서 로이그 선생은 총성을 듣고 서둘러 15명의 아이들을 그 좁은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공간이 좁아 변기통에 올라가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을 향해 절대적 침묵을 부탁했다. 그러나 결국 다 죽게될 것이라는 생각이 로이그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로이그는 아이들이 짧은 생을 총소리로 마감하길 원치 않아서 계속해서 '얘들아 이걸 기억하렴, 난 너희들을 너무도 사랑하고 있단다'를 반복했다. 아이들이 듣는 생의 마지막 소리가 '사랑'이길 원해서다.

드디어 남성의 묵직한 발자국이 다가왔고 문을 열라는 소리까지 문틈을 비집었다. 자신은 건맨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비록 경찰이란 신분을 밝혔지만 로이그는 신뢰할 수 없어서 경찰관 뱃찌를 문 밑으로 밀어보라 했다. 그리고 뱃찌를 보았지만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경찰이면 학교의 열쇠를 찾아서 열고 들어올 수 있지 않느냐는 침착한 주문까지 했다. 경찰은 그렇게 했고 결국 선생과 아이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인터뷰를 보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참으로 귀한 선생이다. 사선에 올라선 아이들이 일평생 가장 소중한 교훈을 배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부모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친 사랑이 숨쉬는 Kaitlin Roig 선생, 그녀의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로이그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멘트다. “I said to them, ‘I need you to know that I love you all very much and that it’s going to be okay’ because I thought that was the last thing they were ever going to hear. I thought we were all going to die. I don’t know if that’s okay as a teacher, but I wanted them to know — I wanted that to be one of the last things they heard, not the gunfire in the hallway.”

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40)

생일파티 옆 자리에는 이미지 관리에 유익한 순서를 따라 거리조절 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누구를 초청하고 어디를 출입할 때에도 동일한 이해관계 주판을 먼저 두들긴다. 표면적 유유상종 개념도 상당히 진화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사람도 밀착교제 대상일 수 있어서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만물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시되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신 절충적 섭리를 선호하고 계시다는 대목을 부각시켜 정당성을 부여한다. 물론 궁색하다.

'필요'가 성경이 설정한 인간의 존엄성 이상으로 과장될 때 어떠한 면에서든 '작은 자'의 동일하게 존엄한 가치는 무시되고 짓밟히게 마련이다. 사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고 대상이다. 사람에게 기능적인 우열의 굴레를 뒤집어 씌워 수단화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건 창조자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에게 부여한 본래의 창조적 가치를 뒤틀고 왜곡하는 행위이다. 백분을 양보해도 이는 하나님과 맞짱을 뜨자는 무의식적 의사표시 아닌가! 창조자를 향한 무례와 오만의 본색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가장 높은 가치가 부여된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 본색의 가장 적나라한 노출은 '작은 자' 앞에서 확인된다. 인위적인 조작의 의식적 무장이 해제되는 건 건질만한 유익이나 혜택의 희미한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소자 앞에서다. 강하고 부하고 예쁘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유력한 자 앞에서는 온갖 알랑방귀 가리지 않으면서 가난하고 약하고 못생기고 무지하고 부족한 자들 앞에서는 본래의 오만하고 사악한 성질을 있는 그대로 노출하는 사람들을 드물게 목격한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어떤 성질을 부리고 다니는지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작은 자'의 최상급 표현을 사용하여 '지극히 작은 잘들(τῶν ἐλαχίστων) 중의 하나'를 대하는 동일한 정도만큼 자신을 대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작은 자일수록 꾸며지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극명하게 고발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염소와 양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언급될 정도로 정밀한 가시적 바로미터 일번지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였다. 지금 교회의 질적 무게를 가늠하는 저울추도 사회에서 존재감이 바닦에 가까운 분들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이다.

교회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외치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고 세상의 모든 슬픔을 위로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 인생을 격려하고 세우는 교회가 많아지면 좋겠다.

2012년 12월 13일 목요일

복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 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112:1)

다른 방식으로 얻어지는 행복은 없다. 복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궁극적인 목적을 의미한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즐거워 하는 것'보다 더 정확히 설명된 인간의 본성은 지상에서 달리 진술된 적이 없었다. 그것보다 우선적인 생의 목적이 시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적도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의 계명이 즐겁지 아니한 것보다 더 불행하고 인간의 본분에서 더 멀리 벗어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창조는 '신묘막측' 어구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 충만하다. 가장 큰 신비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 인간의 성정과 정확히 포개지는 창조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가장 온전하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정직하고 가장 공의롭고 가장 자비롭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자유로운 상태가 여호와를 경외하고 계명을 준수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가 그렇게 지어졌다. 그래서 여호와 경외와 계명의 즐거움이 복이다. 창조적인 복이고 본성적인 복이고 궁극적인 복이다.

지갑의 근수나 썩어 없어지는 것의 분량이 복의 시금석일 수 없다. 세상에서 진정 불행한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고 그 계명이 즐겁지가 않은 사람이다. 나아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고 기록한다. 불행한 사람은 악과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이다. 여호와의 부재에서 비롯된 결과다. 만복의 근원이며 최고의 궁극적인 복이신 하나님 자신과의 분리와 단절보다 더 큰 불행의 원인은 없다.

반대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계명 즐거워 하기를 지속하는 사람은 당연히 항구적인 복의 소유자다.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한다. 

2012년 12월 12일 수요일

사도적 신학 방법론

신학은 언어적 장신구의 웃통을 벗고 사람들이 자신의 시각으로 사물의 진실을 목격하고 손의 촉감으로 더듬을 수 있도록 명료한 논지를 펼치면서 사물의 본질을 단순하고 직접적인 화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프랑스 개혁주의 신학자 챵디우(Antoine Chandieu)는 이것을 사도들이 이해한 신학의 기능이라 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 (요일1:1).” 이런 방식의 신학을 추구한 챵디우의 오페라가 E-rara의 우아한 디지털 파일로 제공되고 있다.

Antoine de la Rosche Chandieu, Opera theologica (Geneva, 1599)

잔키우스 오페라

이탈리아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잔키는 15세에 어거스틴 계열의 수도원에 들어가 피터 마터 버미글리 밑에서 아퀴나스 전통을 경험하며 신학적 잔뼈가 굳었고, 교부들을 비롯하여 부써, 멜랑히톤, 루터, 그리고 칼빈의 문헌들을 탐독하며 신학의 근육을 키워갔다. 당연히 피터와 칼빈의 영향력이 지대했다. 물론 스코투스 전통과 '은밀한 칼빈주의' 딱지가 붙은 멜랑히톤 신학의 영향도 상당부분 감지되는 인물이다. 자국에서 추방을 당하는 망명자의 설움 속에서도 그는 스트라스버그에서 구약학 교수로 섬겼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선 우르시누스 후임으로 교의학을 가르쳤다.

 그가 묻힌 무덤의 돌비에 새겨진 비문이 눈길을 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그를 억류하니 자기애는 중단되고 하늘의 땅이 목말랐던 잔키우스, 여기에 잠들다. 너무나도 선량하고 출중하며 눈이 부시도록 연마된 잔키우스, 그의 수다한 작품들이 증인의 열린 입술이다. 그에게서 가르침을 듣고 삶을 지켜본 이들의 증거도 한 결이다. 그의 영혼은 떠났으나 땅은 지금도 그를 향유하고, 그의 흙은 왔던 곳으로 갔으나 그의 이름은 죽음을 모른다." 이런 잔키우스, 그의 1619년 제네바판 전집이 구글 북스에서 애서가의 커서를 기다린다.

Girolamo Zanchius, Omnium operum theologicorum (Geneva, 1619)

Primus, Secundus, Tertius

2012년 12월 11일 화요일

나심과 죽으심

다 이루었다 (요19:30)

지난 주일 저녁에는 성탄절 노래로 이루어진 예배를 드렸다. 허나 예수님의 나심을 기념하는 성탄절 문턱에서 난 그분의 죽음을 묵상한다. 우리에겐 출생이 무에서 유로 들어가는 은총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로 진입하는 첫 관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생을 누리면서 살다가 명이 다하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반적인 인생과는 무관한 목적으로 첫걸음을 떼신 것이 출생이다. 

죽으려고 오셨다. 그런데 죽으려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분의 출생이 하늘에는 영광이 되고 땅에서는 기뻐함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란다. 왕에게 많은 백성이 영광이듯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여 살리신 것이 하늘 나라에 영광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택함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평화일 수밖에 없는 게 맞다.

그런데 죽음은 영광과 평화와는 하나의 범주로 분류되기 어려운 개념이다. 비록 각각이 다른 주체에게 부여되는 개념이긴 하나 하나의 사건에서 모두 만난다. 죽음은 씨앗이고 영광과 평화는 열매다. 예수님의 나심은 죽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고 출생과 죽음을 시간의 간격 없이 이해하는 성경의 관점에서 '영광과 평화'라는 열매는 천사들의 입술에서 이미 탄생의 날에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의 마지막은 '다 이루었다' 구절이다. 

'영광과 평화'라는 노래는 예수님의 일대기를 둘러싸고 한번도 중단되지 않았던 곡조였다. 예수님의 삶은 수많은 내용들과 수많은 열매들이 저마다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면서 하나로 어우러진 심포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고 계신다는 여운은 세상 끝날까지 지속될 것이어서 그때까지 끝나지 않을 심포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에티엔느 질송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이해>(성균관대출판부, 2010)와 더불어 읽어야 할 어거스틴 평전계의 고전, 피터 브라운의 <아우구스티누스>(새물결, 2012) 평전이 번역되어 나왔군요. 가격이 조금 쎄지만 소장가치, 필독가치 만점인 책입니다. 프린스터 대학의 역사학자 피터 브라운 교수는 옥스포드 대학이 그의 탁월한 학문성과 필력을 기리고자 교부시대 및 중세 학계의 권위자 혹은 독본(Reader ad hominem)으로 지명했던 분입니다. 강추!

피터 브라운의 <아우구스티누스>(새물결, 2012) 평전

투표

시카고를 왕래하는 하이웨이 눈발은 매서웠다.
그래도 재외투표 마지막 날에 국민의 소임을 다해 흐뭇하다.
150백 달러치의 비용과 8시간 마라톤 운전이 아깝지 않았다.
투표하고 상장처럼 제작된 "재외투표 확인증"을 받아보긴 첨이다.
몸은 피곤하다...할 일도 많았는데...그래도 맘이 편해서 좋다.

2012년 12월 8일 토요일

하나님의 한 의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예전 M.div 시절에 한 선생님이 풀어주신 내용을 더듬는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처럼 율법과는 다른 '하나님의 한 의'를 소개하기 시작하여 11장에 이르도록 일관된 주제를 풀어간다. 로마서의 신학적 무게는 '하나님의 한 의'를 새로운 신학의 출범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해 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설픈 측량을 불허한다. 구약 전체와 바울이 펼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한 의'라는 논지와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존중해야 하고 그것을 살피려면 구신약 전체를 저자이신 하나님을 의식하며 통으로 보되 하나도 가감하지 않는 자세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바울의 구약학은 로마서가 제공한다. 로마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신약 전체가 포섭된 구약의 사도적 해석학에 푹 빠지는 황홀경을 경험한다. 유쾌하다. 이런 성경의 전체성 경험을 구약학은 물론이고 신약학도 동일하게 제공해야 마땅하다 생각한다. 표현을 달리하면, 로마서가 제시하는 구원의 전포괄적 파노라마 전체에 도달하지 못하는 구약학과 신약학은 아직 성경을 제대로 벗기지 못한 미완성 해석학일 뿐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약을 공부하고 구약을 공부하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하고 증거한 것이 신약에서 구현되고 성취된 것과의 조화 속에서 동일하신 하나님의 일관된 역사와 그 궁극적인 종착지로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어야 하겠다.

왜 날마다 구약을 탐독하고 신약을 펼치는지, 그것으로 도달하길 원하는 언어와 문법과 배경을 넘어선 진리의 안식처는 어디인지, 그러기 위해서는 가방끈을 언제까지 붙들어야 하는지를 신학 공부하는 동안에 바르게 확립하지 않으면 진리의 어중간한 일부를 전체인 양 과장하고 심지어는 왜곡하는 이들이 신학교의 강단과 교회의 설교단을 거만하게 활보할 가능성이 짙어진다. 특별히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읽으면서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 펼쳐 놓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에 이르지 아니하고 '율법' 자체에 머무는 해석학은 진리를 삼천포로 유배시켜 입출을 봉쇄하는 것과 일반이다. 도덕이나 윤리적 교훈에 머물거나 삶의 매력적인 처세술 제공하는 것에 안주하는 것도 동일하게 어리석고 위험하다.

로마서 3장 21절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의 포문을 열어서도 좋지만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의 사도적인 범례를 제공하는 것이어서 더욱 깊은 묵상을 요청하는 본문이다. 

조엘비키, "예비적 은총"에 대하여

대부분의 20세기 학자들은 중생을 위한 예비적인 은총(preparatory grace)이 청교도가 종교개혁 은총론을 인간 중심적인 율법주의 사상과 거래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여겨 폐기처분 했다고 비키는 진단한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를 아끼지 않은 학자들도 몇몇 있단다.

1. '예비적인 은총'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책과 위험과 속수무책 상태를 확신하게 하도록 하나님이 율법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청교도는 확신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설명하고 죄인들이 반응할 수 있도록 훈계하는 것에 대한 방대한 논의를 생산했다. 즉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고 은혜의 수단들을 활발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성경읽기, 설교듣기, 묵상, 기도, 영적인 교제 등등을 강조했다.

2. '구원적 믿음의 예비'라는 개념에 오해가 없지는 않았다. 죄인은 자신의 죄로 죽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어떠한 것도 수행할 수 없는데 어떻게 죄인이 회심을 향하여 준비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대표적인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특별히 오캄의 영향을 받았던 일부 중세 학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따라 수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에 합당한 보상으로 회심하게 하는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는 일종의 남루한 거래 개념을 주장했다. 즉 이런 인간의 노력은 주님에게 부합한 '일치적 공로(congruent merit)'를 획득하게 될 것이란다.

3. 비키는 예비적 은총에 대한 청교도적 개념은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공로적인 은총(meritorious grace)과 다른 것이며 구원에 인간의 공로가 끼어들 여지를 넉넉히 마련한 펠라기안 사상과도 다르며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성경적인 가르침과 무관한 것이라고 정죄한다. 청교도도 그랬다며.

4. 종교개혁 인물들과 청교도가 고수했던 성경적 가르침은 인간의 영적인 무능력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례로 웨스트민스터 문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는 믿음과 영생에 이르는 회개의 중요한 전조요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통한 죄인식에 이르도록 하시는 수단인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을 언급하고 있다. 웨민 고백서는 돌이키지 않은 죄인들이 믿음 없는 은혜의 수단들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태만함은 더욱 죄악된 것이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든다고 진술한다.

5. 실제로 많은 청교도가 '회심을 위한 준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잃어버린 죄인들이 돌이킬 것을 기대하며 은혜의 수단들 사용을 그들에게 권하였기 때문에 '준비주의(preparationism)' 같은 거북한 호칭도 뒤따랐다. 물론 준비 개념을 과도하게 발전시켜 세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뉴잉글랜드 청교도가 없지는 않았단다. 비키는 이를 청교도 사상의 계승이 아니라 퇴락의 단면이라 꼬집는다.

6. 비키는 구원적 믿음을 위한 예비적 은총 개념에 대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 인물들과 청교도 사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청교도 내에서도 교리의 디테일에 있어서는 상이성이 발견된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만 죄인들을 중생케 하는 주체라는 것, 그리고 회심이 죄에 대한 확신과 말씀에 대한 경청의 과정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하나의 목소리를 낸단다. 그리고 실질적인 예비주의 주창자는 청교도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 옹호자라 역설한다.

7. 비키가 생각하는 '예비적인 은총' 개념의 긍정적인 측면들은 이렇다. 1) 청교도 예비론은 복음의 자유로운 선포를 지원하고, 2) 철저한 개혁주의 개념이며, 3)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을 강조하고, 4) 죄인들과 율법을 연결하려 하지 율법주의 사상을 두둔하진 않으며, 5) 중생의 신비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비로운 그대로 열어두며, 6) 하나님을 창조자와 구세주로 경외하며, 7) 그리스도 예수의 충분성을 보이고, 8) 성경적인 토대 위에 세워진 개념이다.

8. 질의응답 시간에 '예비적인 은총'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에 대해 여쭈었다. 사용하지 않아도 별탈 없었을 텐데라는 추정에 근거해서 말이다. 이때 비키는 화란 개혁주의 진영과 청교도 진영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즉 죄책감 직전--깊은 죄책감--회심--신자의 길 등으로 구분할 때에 화란은 죄책감 직전을 중생의 시점으로 보았지만 청교도는 깊은 죄책감 직후의 회심을 중생 확인할 수 있는 시점으로 강조했다 한다. 당연히 회심 이전에는 하나님의 역사와 은총이 없었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예비적인 은총'이 인간 편에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것이어서 회심 이전에도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와 역사 강조를 철회하지 않을 수 있었단다.

9. 청교도 내에서 혹시 '예비적인 은총' 사용을 거절하고 심지어는 공격까지 한 청교도가 있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했다. 없단다...!!! 멀러의 많은 멘트에는 논쟁적인 내용이 없었고 책의 건설적인 조언들로 충만했다. 비키는 꼼꼼하게 받아 적으시는 겸손과 존중의 자세를 취하셨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멀러가 비키를 소개하는 서두에 동료(colleague)라는 호칭을 썼는데 비키는 멀러가 자신의 멘토(mentor)인데 동료는 과분한 것이라며 유쾌한 거절로 응수했다. 그것도 멋졌었다!

오늘 발표된 논문은 분량 면에서 여름에 나올 책의 '폭력적인 요약'이라 했다. 내년 여름에 청교도 신학의 주목받지 못한 때때로 가리워진 부위를 조명하는 서적 기다리는 설레임이 하나 생겼다.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문화충돌

손을 뻗어서 책장을 넘겨야 하는데 커서를 움직였다. 하하하...디지털과 아날로그 문화의 공존이 빚어낸 불협화음, 그것이 늘 한 방향으로 움직이던 행위의 통일성에 안다리를 걸었다. 헌팅턴이 말한 아날로그 내에서의 문화충격 개념이 디지털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음을 여기에서 나는 '유레카'한 거다.

To turn the leaves of a book, I had been supposed to stretch my hand but moved 'cursor.' Hahaha.  I found that cacophony caused by the cultural a coexistence of digital and analog working in my mind which tripped Andari of the unity in acting always in one direction. Here I did 'Eureka' that the culture shock Huntington insisted within the realm of analog stepped on a conceptual expansion toward the digital world. 

성실한 사랑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주께서는 성실한 자를 보호하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는 엄중히 대하신다.

주를 향한 사랑은 성실과 만나야 한다. 교만은 성실한 사랑 앞에서는 그 뻣뻣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이 그 속에서 잔치를 벌이는 격이겠다. 하나님 사랑은 형제를 향하여 드러난다. 성실하게 형제를 사랑하는 하루, 그런 하루를 살자. 수련회용, 집회용 사랑을 달군다고 하나님 사랑하는 거 아니다. 형제를 향해서도 일시적인 이미지 관리용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영원하다. 믿음과 소망보다 더 지속적인 것이라고 했다. 성실한 사랑! 이 한 단어가 구현되는 하루!

퓨리탄 신학의 현대적 유용성

퓨리탄 신학 전문가 조엘비키 교수님이 밝히는 퓨리탄 신학의 현대적 유용성

1.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의 영광은 퓨리탄이 신학하는 절대적 목적이다. 이러한 신론 중심적인 퓨라탄의 사유로 하나님의 현대적 정체성 상실에서 비롯되는 모든 교회적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단다.

2. 중보자 중심성: 그리스도 예수는 퓨리탄 신학의 심장이요 교리적 혈맥이다. 그들의 모든 글에서 그리스도 중심성이 박동한다. 이것을 비키는 그리스도 상실 시대의 대안으로 본다.

3. 죄의 사악성: 죄에 대하여 퓨리탄 신학보다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진영은 없었다. 어디까지 죄일 수 있는지에 대한 극한점을 묵상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하는 퓨리탄 정신을 오늘날에 부활시켜 현대교회 아랫묵을 안식처로 삼은 죄의 사악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4. 예배에의 순종: 퓨리탄 신학에서 진정한 예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슴에 새겨진 말씀의 메아리다. 인간의 의지와 감정에 기초하고 자극하는 현대교회 예배의 가벼움 극복은 진리와 성령 안에서의 예배에 있다.

5. 개인적인 희생의 필요성: 대부분의 퓨리탄은 생명과 명예도 양심에 따른 예배를 위해 초개로 여겼다. 번영을 추구하는 신학에 제대로 안다리를 걸 선례로서 딱이다!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PRC) 저널

아래의 사진은 일전에 들렀던 프로테스탄트 개혁주의 신학교(Protestant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다. 매년 두차례 저널을 발간한다. 2012년 가을호는 특집으로 바빙크의 삶과 신학을 다루었다. 카이퍼와 바빙크의 일반은총 교리를 거부하는 비판의 날은 여전히 날카롭다. 일반은총 논쟁은 1924년 북미개혁교회(CRC)와의 분리를 초래한 원흉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확인한 CRC와 PRC의 형제애는 여전히 친밀하고 두터웠다. 아래 사이트는 PRC가 지금까지 발행한 저널의 전체 pdf 파일을 무료로 제공한다. 중요하고 잼나는 주제들이 많아 유익하다.

Protestant Reformed Theological Journal

전통을 지키라

예전에 수업에서 '복음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전하는 것이 전통이 되게 하라'던 스승의 말이 생각난다.

본문은 데살로니가후서 2:13-15이다.

*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바울은 그들에게 권면의 입술을 열고 있다
주께서 구원의 대상을 사랑하는 자들이라 하였다.
여기서 신적인 사랑의 의지라는 속성(voluntas)이 드러난다)

*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항상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려 한다)

*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예정(praedestinatio)이 첫번째 감사의 내용이다.
사랑이란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 첫번째
내재적 사역(opera interna)이다)

*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구원론이 등장한다. 성령과 진리와 믿음의 구원 말이다.
신학적인 표현을 쓰자면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 해당된다)

*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복음을 증거하는 현장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현장에서 구현되는 실행 (executio) 대목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및 자유로운 행위가 이 항목에 들어간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택과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finis ultima)이다.
피조물의 상태에 의존하지 않는 목적을 따라 역사가 움직인다.
당연히 우리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어 항상 감사가 마땅하다)

* 그러므로 형제들아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에 굳건하게 서서 지키라
(이렇게 가르침을 받은 복음의 총화를 전통(traditio)으로 지키란다.
물론 복음의 한 조각만 전해도 구원의 역사는 일어난다.
그러나 복음의 온전한 몸통을 다 전하는 전통에 확고히 서서
그것을 붙들고 전수되게 하라고 바울은 가르친다)

Basil의 오페라

다운로드 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 화질과 스캔상태 및 활자 최상이다. 스캔할 당시에 조명의 변덕이 관찰된다. 자신의 모니터 문제가 아니니 읽다가 밝기가 달라져도 걱정하지 마시라.

Basilius Magnus, Opera Omnia (Basel, 1540)

2012년 12월 5일 수요일

이루려 함이러라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2:23).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다. 그 시대의 정세와 요셉이란 인물의 심리적 상태와 천사들의 가이드와 그것에 근거한 최종적인 판단이 요셉 일가가 나사렛 동네에 와서 사는 가까운 원인이다. 그런데 선지자로 미리 하신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마태는 기록한다. '이루려 함이러라' 표현이 신약의 모든 문장에 해석학적 추임새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신약의 성취가 구약의 예언과 섭리적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동일하며 동일한 뜻을 따라 하나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로서 부족하지 않도록 적당한 간격을 두고 등장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난 신실하신 하나님, 그래서 신뢰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피곤한 공부

오늘은 로마 카톨릭의 연옥설에 대해서 벨라민과 그가 자신의 입맛대로 증인석에 세운 교부들의 문헌들을 읽고 폴라누스 해석으로 교정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과연 공부는 몸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주께서 늘 동행해 주신다.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는 느낌에 위로를 얻는다. 늦었다. 이제 고요한 적막에 의식을 맡기련다. 여명이 의식의 촉수를 충분히 자극할 때까지...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생각하지 마라 (롬12:3)

자신을 영화의 등장인물 같이 관람하는 꿈이든지 깨어서 정신이 말짱한 중에라도 자신을 밖에서 보는 객관적 창문이 인간에겐 없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외형을 볼 때에라도 꿈과 유사할 뿐 여전히 유체이탈 상태가 아니다. 몸을 떠난다 할지라도 자신을 이해하는 지각의 객관성이 확보되는 건 아니기에 몸과 영혼의 분리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문제의 매듭은 풀어지지 않는다. 자각은 의식의 주체와 대상이 동일한 경우를 일컫는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객관적 거리를 확보할 수 없어서다.

굴곡된 주관성의 결박을 푸는 유일한 해법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쉽지가 않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와 삶 전체를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제시한 대안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척도(μέτρον πίστεως)이다. 믿음의 유비(analogia fidei) 혹은 믿음의 규범(regula fidei)은 여기에서 산출된 개념이다. 자신을 이해하는 객관성 확보의 비결로 제시된 믿음의 규범이 잘못 적용되면 통제되지 않는 주관성의 원흉으로 전락할 수 있어서 거부되는 경향도 있지만, 경건한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경 전체를 가리키고 이해하는 해석의 기준이란 개념으로 본다면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타인과 비교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바의 기준을 따라 자신의 가치를 매긴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필히 삼천포로 곤두박질 친다. 타인에 대한 상대적 우등과 스스로의 만족에 가슴이 벅차도록 뿌듯하게 살았어도 여전히 덧없는 일장춘몽 인생이다. 우리를 예정하고 창조하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푸신 믿음의 분량대로, 즉 성경 전체를 따라 생각해야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시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바 되셨다. 우리는 그의 몸에 지체로 참여하는 방식을 따라 그분을 머리로 소유한다. 우리는 주어진 은사도 다르고 역할도 다른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동등하다.

자신에 대해 우열이나 아래위 개념으로 교만과 열등에 사로잡힐 필요 없다. 각자에게 최고의 인생이 주어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일만 남았다. 당장 눈에 밟히는 삶의 암담한 현실도 최고의 인생에서 생략될 수 없는 한 조각이다. 슬픔을 슬퍼하고 기쁨을 기뻐하는 중에 다채로운 그러나 조화로운 삶의 심포니가 구성되는 거다. 삶은 강약과 경중과 완급과 흑백의 교차로 충만하다. 연약한 형제는 감싸주고 넘어진 자매는 일으키는 역할도 수시로 교차한다. 그게 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으로 보면 모순이나 충돌이나 대립이나 우열이 아니라 조화와 균형과 보완과 동등이다. 성경 전체로 자신을 보면 동의하지 아니할 수 없다.

자존감은 성경으로 세우시라. 오늘은 무의식 중에라도 중단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생각의 기준에 '믿음의 규범'을 장착하는 하루이길 소망한다.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로버트 베일리의 Letters and Journals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이해를 위한 최고의 배경연구 자료는 단연 로버트 베일리의 세 권으로 된 [서신과 저널(Letters and Journals, 1637-1662)]이다. 웨민 총회에 참석한 베일리의 생생한 현장목격 기록이기 때문이다. 링크시켜 두었다. 단어검색 가능한 Internet Archive 디지털 판본이다.

대요리 문답 비평본 (2010)

친구에게 선물을 하나 받았다. [대요리 문답: 비평본과 서문 (The Larger Catechism: A Critical Text and Introduction, RHB, 2010)]이다. 개혁장로 신학교(Reformed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의 교회사 교수 존 바우어가 편집한 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비평본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주요 문헌들 (Principal Documents of the Westminster Assembly)] 시리즈의 제1권으로 기획된 책이다. 대요리는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세 왕국에서 사용될 하나의 교리문답(one catechism in all three kingdoms)' 작성을 위해 의회가 소집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보다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를 위해 작성한 것으로, 웨민 총회에서 발행된 것들 중에서 가장 긴 문헌이다.

소요리와 함께 대요리는 범국가적 기획이니만큼 작성에 기울였을 심혈의 분량은 형설을 불허한다. 교리문답 위원회의 의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허버트 팔머(Herbert Palmer)가 일찍 타개하는 바람에 안토니 터크니(Anthony Turkney)가 의장직을 계승하게 되어 대요리는 터크니의 신학과 보다 긴밀하게 결부된다. 물론 보다 광범위한 연구를 위해서는 교리문답 형식에 모델로 고려된 우서(James Ussher)와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ius)와 볼(John Ball)과 보언(Immanuel Bourne)의 신학도 사려해야 하겠다. 여튼, 바우어를 통해 진리의 총화를 교육용 차원에서 가장 잘 담아낸 텍스트가 드디어 원본의 뽀얀 속살을 드러냈다.

바우어는 대요리가 출간된 1648년 이후로 텍스트가 왜곡되어 17세기 중엽의 작성당시 본의가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며 근 400년간 방치된 텍스트 오류 교정에 뛰어 들었다. 1647년과 1648년 판본들을 비교하고 그런 본문비평 결과로서 자신의 비평본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원문을 복원하고 대요리 작성 당시의 신학적 문맥과 의도를 살린다는 취지로 출간했다. 17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연구는 정확한 본문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모든 후속 연구들은 거기에 기초한다. 바우어의 작업이 갖는 연구 기여도가 주목될 수밖에 없는 근거 되겠다.

앞으로 The Confession of Faith, The Shorter Catechism, The Directory for Public Worship, The Directory for Church Government, and the Psalter 등도 계속해서 단행본 형태로 나온다니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겠다.

2012년 12월 3일 월요일

능동적 순종

그리스도 순종의 능동성을 부정한 피스카토르 입장에 찬동한 틸레누스 견해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향유하라

여호와는 내 기쁨의 원천이라 (시104:34)

다른 모든 조항들이 이것에 좌우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항은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다. 하나님 향유하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진술한 교리문답 및 고백서는 이전에 없었다. 1560년 개정판 제네바 교리문답 1문항은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창조자 하나님을 아는 것(nouerint)이라고 하였고 다른 고백서는 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만 주목했다. 하나님을 즐긴다는 것이 다소 경박하게 보이고 불경스런 일로 여겨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튼, 소요리에 고백된 인생의 이중적 목적은 아마도 모든 것을 사물(res)과 기호(signa)로 나누고 사물들 중에 사용(uti)과 향유(frui)의 대상을 구분한 어거스틴 사상의 반영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일에 하나님이 즐겁지 아니하면 다른 것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 건 필연적인 결과다. 당연히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장식용 구호에 아무리 진실한 핏대를 세운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다른 대상을 즐기는 목적에 하나님도 수단으로 투입되는 기현상이 무의식 중에 벌어지는 거다. '귀신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신 주님의 교훈도 본말의 전도라는 기현상을 어느 정도 경계하고 있다. 본질과 근원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다윗이 하나님 자신을 자기의 기쁨이요 소망이요 만족이요 즐거움이 되신다는 고백에 곡조를 달아 악보가 닳도록 일평생 연주한 이유는 천지 어디에도 하나님 외에는 그의 사모할 자가 없어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다윗의 우선순위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지향점을 180도 바꾸는 열쇠를 발견한다. 우리의 즐거움이 온전히 하나님께 있다는 열쇠 말이다. 이것을 관념의 유희로만 접수하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만을 실제로 향유하는 자는 슬픔과 절망과 불만과 괴로움 속에서도 하늘의 미소를 짓는다. 스데반은 살기가 등등한 무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상황 속에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아~~~ 하나님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인생의 목적에 충실하고 싶다. 그렇다고 수도원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는 방식의 하나님 향유가 우리에게 열려 있어서다. 모든 것에서 모든 곳에서 모든 순간에...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 (1560판)

1541년에 초판이 나왔고 1545년과 1560년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물론 개혁주의 신앙의 기조가 뒤바뀌진 않았다. 초판은 찾을 수가 없구나...ㅡ.ㅡ

Johannes Calvinus, Catechismus ecclesiae genevenis (Geneva, 1560)

즐거운 자발성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시1:2)

한 분야의 천재성이 아무리 출중해도 노력파의 성실한 땀방울을 당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런 성실성도 즐기는 자의 자발성 앞에서는 고개를 떨군다. 한 분야의 가장 무서운 전문성은 그것을 즐기는 자의 몫이다. 웨민의 교리문답 일번지는 인간의 제일가는 목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렇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신구약 성경 밖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문항이 이어진다. 이는 말씀을 즐거워 하는 우리의 태도와도 무관할 수 없다.

주께서는 마지못해 드리는 인색한 예배나 헌신을 받지 않으신다 했다. 즐거이 드리는 자를 받으신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주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 예배로서 몸을 드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하든지, 동기의 즐기는 자발성이 없으면 몸을 주께 드리는 산 제사의 성격은 소멸된다. 주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아닌 삶의 허무에 대해서는 전도서가 모든 일의 결국을 낱낱이 서술하며 내린 결론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예배의 궁극적 가치'를 공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모든 일에 절박한 생계보다 더 강력한 동기가 없다는 각박한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를 포함하여 그런 생계의 강제성에 떠밀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자발성 운운은 사치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동기를 결정하는 마지막 원인은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살림터라 할지라도 두려움을 동기로 삼아 살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유효한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동행은 땅의 모든 원인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바울의 복음증거 인생이 '부득불 할 일'이라는 말에서 강요나 강제의 '적법성'을 두둔하는 건 부분만 본 편견이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침묵이 자신에게 해가 될 정도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그렇게도 발견되기 원하였던 자발성의 화신이다. 형벌이 두려워서 밀린 숙제하듯 떠밀려 살아가지 않았다는 얘기다. 즐거운 게 제대로 사는 거다. 시인의 고백처럼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워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일주일에 10여편에 가까운 설교를 생산해야 하는 것보다 더 큰 고역이 있을까!

물론 누구나 때때로 슬럼프에 빠진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의 캄캄한 결박 속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한 역설적 권면이 귀에 쟁쟁한 건 왜일까~~~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거대한 소득

거대한 소득의 방편은 자족을 겸한 경건이다 (딤전6:6)

'나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 하는 사람은 그것을 가졌을 때 자랑하게 된다'는 칼빈의 심리학적 언사가 떠오른다.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매겨진 빈부를 빗대어 열등과 교만의 선을 넘나드는 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의 의중을 거스르는 일이다. 주께서 당신의 눈으로 보시는 아름다운 조화를 따라 각자에게 베푸신 고유한 분량이 있어서다. 물론 하나님의 눈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도 존귀히 여김을 받음이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그런 일은 현실에서 아주 희귀한 경우라 하겠다.

주님으로 부요하지 않으면 대체로 궁핍이란 자의식이 발동한다. 인간은 '그릇'이기 때문에 무언가로 채워져야 안심하고 비워져 있으면 불안정한 본성을 가졌다. 주님의 부재로 촉발된 궁핍의 빈자리는 다른 대체물이 없는데도, 우리는 본성적인 불안의 급박한 불을 끄고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보일 정도로 탐스러운 '선악과' 취득으로 분주하다. 파스칼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던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의 주머니'는 세상적인 시기와 자랑을 부추기는 온갖 잡동사니 흉물들로 채워진 쓰레기통 신세로 곧장 전락한다.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들조차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간주한 맥락은 바로 이것이다. 땅에서 아무리 유용하고 고급스런 것이라 할지라도 가장 고상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채워져야 할 주님의 고유한 자리를 그것에 내어줄 수 없어서란 맥락 말이다. 그에게는 주님이 전부였다. 그리스도 때문에 능욕을 당하고 고난의 길에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동행하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와 낙의 상속자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던 모세의 판단력과 세상의 감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싶어하는 바울의 정신세계 이면에는 뭐가 있었을까?

자족을 겸한 경건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마취제 투입으로 확보되는 방편이 아니다. 그 경건은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상급이요 만족이 되신다는 확신의 소산이다. 이는 이것을 상실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헛되고 헛된 것으로 만들기에 믿음의 조상에게 결코 침묵할 수 없었던 진리였다.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복이라는 확신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헌신이나 진정한 경배는 불가능한 일이겠다. 

시험을 만나거든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2)

예기치 않은 일들이 터지면 손익부터 따지는 게 사람의 근성이다. 희로애락 선택도 대체로 그 근성의 산물이다. 사태의 전말이 주로 가까운 원인과 결과에 따라 이해되고 그 이해에 충실한 행동은 타인의 공감을 낚는 호소력도 있어 이에 상충되는 다른 설명들의 접근은 문전박대 당하기 일수다. 맥락의 사이즈와 초점의 원근만 조정하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인데도 자신의 사태 해석학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아서다.

시험은 대개 고통과 손해를 수반한다. 기쁨이란 반응과 어울리지 않는데도 사도는 우리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란다.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성경의 이러한 어법은 책갈피가 멀다하고 수시로 등장한다. 시험에 환영의 비상식적 쌍수를 들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도 야고보는 상식과 합리에 근거한 사태파악 습성을 뿌리채 바꾸라고 주문한다.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방식 차원이 아니다.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진리의 넓은 밑그림에 근거한 주문이다.

시험은 야고보가 서술한 것처럼 인간의 욕심에서 자라난 죄와 결부되어 있다. 시험의 출현은 엄밀한 의미에서 늘 우리의 욕심과 죄를 고발한다.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기에 시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없다. 시험은 불가피한 것이고 그 씨앗은 우리가 뿌린 것이라면 시험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은 체념과 슬픔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야고보가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한 것은 우리의 인과율 중심적인 판단력을 무장해재 시키면서 하늘의 해석학을 이식하는 반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창세기 전체가 드러내고 로마서가 정리한 하나님의 속성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죄를 피로 씻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야고보의 권면 배후에 깔린 맥락이다. 시험은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어 시험을 만날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겸손과 경외의 지성소로 한 걸음씩 이동한다. 시험과의 불가피한 대면에서 온전한 기쁨을 고집하는 이유는 금전적 이해득실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다. 시험은 하나님과 인간을 아는 지식의 보고이기 때문에 기뻐한다. 추악한 죄성과 무한한 선하심!

이걸 얻으려고 시험을 만나기 위해 욕심에 적극적인 광기를 부리라는 얘기는 아니다. 온전히 기뻐하는 것은 '시험을 만나거든' 사태에 대한 우리의 사후적인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