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1일 금요일

무지의 출처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욥42:3)

인간의 눈에는 혼돈과 무질서가 자연의 본질이다. 규칙과 질서는 인위적인 타협이다. 우리의 뇌를 언어적 기억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그런 인위적 타협의 충만이라 하겠다. 있는 그대로의 혼란하고 무질서한 자연에 반듯한 규칙과 질서를 강요하는 현상이 문명이란 이름으로 둔갑한다. 기묘한 것은 자연의 그런 폭력적인 인간화 속에서 인간은 안식을 누린다는 거다. 인간화된 문명의 문턱을 넘어서면 늘 불편하고 불안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보다 인간화된 자연에 보다 월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런 불안심리 제거의 일환인지 모르겠다.

욥은 자신의 지각으로 번역할 수 없는 자연의 구석진 그러나 본질적인 현상들의 이치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물음에 답변의 입술을 열지 못하였다.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찌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는 자신의 고백을 현실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지각이 한발짝도 출입할 수 없고 어떠한 과학적 번역도 불허하는 신비들로 온통 채색되어 있다. 조금만 정직해도 탐구의 메쓰를 들이댈 수 없는 자연의 경이로운 신비에 압도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실상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땅의 일들도 깨닫지 못하는데 그토록 무딘 판단의 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섭리를 겨냥하는 것은 얼마나 무례하고 무모한 일일까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기에 말을 적게 하여야 한다는 전도자의 지혜는 하나님과 쟁변하고 하나님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오만과 교만의 싹을 발아 초기부터 제거하는 데에 심히 유용하다. 인간의 최고급 지성들이 과학과 학문에 일생을 내던지고 매달리는 맹목의 배후에 하나님과 선악의 판단권 장악에 대한 본성적 헤게모니 경쟁심이 감지되는 것은 왜일까.

욥의 출중한 지성으로 걸러진 자연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참된 이치를 가리우는 무지일 수 있다는 욥 자신의 정직한 자세가 향기롭다. 스스로 헤아려서 알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말씀으로 조성하고 동일한 권능의 말씀으로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자연의 신비가 커질수록 커져간다. 이에 더하여 솔로몬이 입었던 역사상 전무후무 수준의 화려한 영광의 옷도 언제 소멸의 아궁이에 던져질지 모르는 들풀이 입은 가냘픈 영광보다 못하다는 예수님의 파격적인 평가도 의문의 꼬리를 덮석 문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러하다.

이치를 가리우는 무지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언어가 욥보다 더 분주하게 내 입술에서 출고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오늘은 욥기 일독으로 나 자신을 무지의 출처로서 정직하게 응시하고 하나님을 한없이 경외하는 하루이고 싶다. 

일정한 음식보다 말씀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욥 23:12)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건 행사였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삶을 의미한다.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고귀하게 여기는 것은 욥에게 일정한 삶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길래 물리적인 생존보다 말씀이 더 우선적인 것일 수 있었을까?

욥은 하나님의 뜻이 일정하며 아무도 돌이킬 수 없다고 인식했다. 하나님의 뜻이란 그가 고백한 것처럼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일정한 뜻이 욥에게는 말씀과 동일하다. 나아가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이 마음으로 행하고자 정하신 일정한 하나님의 뜻이 욥에게는 말씀인 거다. 단백하고 정확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작정과 말씀을 이렇게 하나로 묶는 통합적인 이해 속에서 욥은 자신의 불행과 세상을 해석한다. 바울은 욥의 이러한 말씀 이해를 그대로 로마서의 노른자위 안에 담았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하나님과 세상을 아는 지식의 정도가 별반 다르지가 않다. 나도 이러한 사유의 방식을 선호하고 종종 활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욥기 결론에서 욥과 친구들이 모두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으며 욥 자신은 무지로 이치를 가리우고 스스로도 깨달을 수 없는 말을 뱉었다고 시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욥기 해석의 난해함이 여기에 있다. 욥과 친구들이 주고 받은 대화체 속에서 받은 교훈과 깨달음과 은혜가 결론부에 이르면 아주 난처한 상대화에 직면한다. 다양한 해명이 시도될 수 있겠지만 최소한 나는 욥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유는 이렇다. 물론 하나님의 책망과 욥의 반성이 욥기에 기록된 내용 전체에 대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인 책망과 반성이라 한다면 부분의 경계선을 긋기가 애매하고 난감하다. 내용 전체에 대한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하며 논지를 전개한다. 즉 하나님의 완전성 및 충족성과 같은 신적인 속성들과 말씀에 대한 욥의 이해는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해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라는 정도에 있어서는 무지로 이치를 가리우고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합당하다. 

나아가 동일한 말과 내용도 둘러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된다. 하나님의 책망도 욥의 문맥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하여 욥의 상황에서 오고간 대화의 내용들은 그 문맥에 충실하여 이해하면 된다. 상황을 무시하고 욥의 어법이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만 주목하여 로마서의 동일한 내용까지 까칠한 의혹의 갸우뚱 반응을 보인다면 진리는 위태로운 훼손에 노출되고 만다. 로마서는 내용을 그대로 받으면 되기에 어렵지가 않다. 그러나 욥기는 이해의 겹이 다양하여 각별히 의미의 중첩을 사려해야 한다.

일정한 음식보다 말씀을 더욱 귀하게 여겼다는 욥의 고백이 유난히 감미롭다. 마치 욥기가 음식보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욥기의 제맛을 모른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듯해서다. 욥기를 읽다 보면, 실제로 말씀에 대한 특급 우선순위 없이는 이해의 문턱에서 문전박대 당한다는 느낌이 반복된다. 물론 끼니가 다가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쥐도새도 모르게 순위가 역전되는 생리적 한계의 저항도 만만치가 않다. 음식보다 말씀이 고귀했던 욥의 일정한 삶이 지금은 너무나도 강한 도전이다.

2013년 5월 29일 수요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다

내가 잠잠히 있었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아는구나 (시50:21)

성경은 주님께서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거짓이 없으시고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후회도 없으신 분이라고 명토박아 두었다. 이에 대하여 지혜자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권하였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생의 길이나 생각과는 하늘과 땅의 무한한 격차만큼 다르다는 언급으로 무례한 비교 가능성을 일거에 차단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울고 슬퍼하고 근심하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듣고 보고 만지고 먹고 마시고 아신다는 인간의 성정에 적응하신 표현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자비로운 소통의 술어들 때문에 마치 인간과 하나님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을 인간 다루듯이 설득하고 달래고 아부하고 거래하고 선악의 구별에 있어서는 맞짱도 불사하는 오만의 극치를 이따금씩 연출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과 소통 가능한 인간을 만드시고 스스로 계시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와 연약함을 따라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의 언어와 어법을 따라 당신을 알리신 것은 그 자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의도하신 것이 아니셨다. 스스로를 낮추신 적응의 목적은 타락한 인간의 자리에 영원한 삶의 돗자리를 깔고 더불어 영원토록 거기에 머물자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관대한 적응이 인간 문맥에 갇혀서는 아니된다.

마지막 날에 아들을 보내시고 죄가 없으신 것만 다르되 우리와 한결 같이 동일하신 성정을 입으시고 스스로를 죽기까지 낮추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도록 낮아진 존재의 밑바닥에 거하는 우리들의 심각한 구제불능 상태를 알리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며 나아가 더불어 밑바닥에 머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까지 우리를 부르시는 무한한 영광의 초청이다.

하나님은 무궁한 자비와 긍휼로 길이 참으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난잡한 행실과 삶에 대한 신적인 승인으로 간주한다. 아예 하나님도 자신들과 동류라는 못박는다. 우리의 속사정도 다르지가 않다. 대체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죄악을 저질러도 사람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며 담대히 저지른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해 졌다"는 전도자의 지적은 뾰족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한편 하나님의 더딘 징벌과 길이 참으심은 즉각적인 인과응보 때문에 눈치를 보며 웅크리고 있던 인생의 본색이 연출과 가식의 탈을 벗고 있는 그대로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라고 생각한다. 인간 편에서는 진노의 날에 임할 형벌의 축적이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부끄럽고 부당한 온갖 일들에 광기를 부려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심은 하나님의 항구적인 인내와 엄중한 형벌이 맞물려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하나님은 인생과 다르시다. 때때로 응징의 칼을 가실 때에는 말이 없으시다. 사랑 때문에도 그러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잠잠함은 인생과 동류라는 증거가 아니겠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 예수에게 이르러야 한다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창조와 성경의 모든 계시는 하늘의 높으신 하나님께 오라는 초청이다. 계시는 우리에게 적응하신 것이나 우리로 하나님께 적응하게 만든다. 그러니 하나님을 우리의 자리로 끌어 내리는 불경은 삶이든 해석이든 극히 삼가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2013년 5월 28일 화요일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5)

환난날에 주님부터 부르는 게 쉽지가 않다는 게 현실이다. 실제로도 대부분 주님부터 안부른다. 나를 불쾌한 환난에 빠뜨린 인접한 원인(causa proxima)들에 온 신경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환난 대처법은 먼저 분을 축적하고 거기서 추동력을 얻어 환난의 근인들을 낱낱이 추적하고 면면을 분석하고 만만한 순서대로 응징에 들어가고 쌓인 분이 말끔히 해소될 때까지 보복의 사슬을 이어가는 것이다. 원인들 중에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체물을 물색하고 아바타 분풀이로 대충 만족한다.

현실이 이런데도 환난날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면 얼마나 고결한 자기부인 행위인지 모르겠다. 환난의 사태를 둘러싼 모든 주변 환경들을 활호로 묶어내고 반응의 초점을 오직 주님께만 고정하는 행위가 바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목격했고 인과가 뚜렸하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환난의 혈맥을 짚어냈다 할지라도 거기에 매달리는 것은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겨우 우리의 눈과 두뇌로 걸러진 원인들의 멱살을 거머쥐며 너죽고 나죽자고 뒹굴어 봐야 돌아오는 것은 사단의 음흉한 미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환난의 전후 문맥에 아예 신경을 끊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가까운 원인들을 분명히 인지해야 하고 그에 준하는 처방도 뒤따라야 한다. 환난 유발의 감초와 같은 게으름은 성실로 교체하고, 건강을 해치는 불규칙한 과식이나 편식도 일정한 소식과 혼식으로 대체하고,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는 무례하고 자극적인 언사는 순화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음흉하고 거짓되고 잔인한 환경은 가능한 피하거나 거리를 두는 게 상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근접 원인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제끼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주권과 통치를 응시해야 한다는 거다.

사실 환난은 하나님을 아는 실질적인 지식이 움트고 자라나는 절호의 기회이다. 환난 속에서 우리의 무기력한 실상은 맨살로 감지되는 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지혜는 가장 선명하고 순수한 자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의 순도는 높아진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스스로는 불가능한 일인데 환난은 그런 무장해제 백기투항 자기부인 상황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당장은 불쾌하고 불편하고 불필요한 듯하여도 환난에서 정화가 일어나고 하나님도 경험하고 지식과 지혜도 자라간다.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환난에서 건지신다. 감사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환난의 이러한 생리 때문에 사도 야고보는 시험이나 환난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게 여기라고 했나 보다. 환난의 원흉이 나라면 회개하고 엎드리면 된다. 주님과의 관계와 거리는 밀착된다. 밖에서 침투한 환란의 경우에는 용서와 포용으로 주변 원인들을 정리하고 하나님을 부르면 된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주님은 우리를 환난에서 건지시고 우리의 입술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신다.

환난 속에서 만나는 우리 주님은 각별하다...오~~~ 주님!

2013년 5월 27일 월요일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이 고백은 한 마디도 가감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해의 차원에서 왜곡이 가해지기 쉬운 말씀이다. 무엇을 하든 성취 가능성의 여부를 자신의 능력에 두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외부에서 동원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하나님도 필요하지 않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필요는 대체로 하나님의 속성과 뜻에 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소불위 에너지와 관계한다. 이런 인간적인 이해의 바탕에서 해석학적 왜곡이 빚어진다.

등대와 등잔과 관을 환상으로 보고 그 의미에 대한 스가랴의 물음에 하나님은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고 해석해 주시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의 '신'을 여호와의 능과 힘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 다시 에너지다. 이와 유사한 어떤 말씀들을 읽더라도 하나님이 나의 일을 성취하는 에너지 공급자란 관념이 해석학의 아랫묵을 차지한다. 못된 버릇이다. 스가랴서 말씀에서 '여호와의 신'은 힘과 능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길과 빛과 영광과 위엄을 의미한다.

바울의 고백은 비천과 풍부와 주림이란 환경에서 터득한 일체의 비결을 소개하는 문맥에서 등장한다. 이는 주님께서 뜻하시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대체로 주님께서 에너지만 공급하면 내가 원하던 것을 실컷 이룩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런 왜곡된 이해에서 기도는 기복적 성향을 옷입는다. 정성을 드리고 신명을 바쳐 주님께 간곡한 호소문을 올리고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권능의 주먹으로 깔끔하게 성취해 주시라고 간청한다. 여기에는 기능주의 사고의 끈적한 출입도 감지된다.

의미의 무게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문구에 실린다. 말씀이신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다른 언급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고 살고 기동한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존재도 삶도 기동도 없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뜻이다. 하나님의 뜻 밖에서는 살았으나 죽음과 일반이다. 그런 분 안에서만 모든 것이 성취된다. 하나님의 뜻만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의 편 팔은 굽힐 자가 없고 경영하신 즉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건 빈부나 귀천이나 배고픔이 좌우하지 못한다.

바울이 배운 일체의 비결은 이것이다. 나도 그 비결이 목마르다.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경험적 고백을 토해내는 날이 이르기를 고대한다. 

개인의 권능과 경건이라...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행3:12)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분의 존재감이 그곳을 무시로 출입하던 베드로와 요한의 시선을 붙들었다. 평소에는 눈에 걸리지도 않았던 사람인데 관심이 이끌린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사도들의 시선과 초점도 성령의 주도적인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임에 분명하다. 베드로는 대범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어나서 걸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의 발과 발목에 힘이 올랐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기적이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희귀한 기적을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고" 급기야 사태의 전모가 궁금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솔로몬 행각에서 만나 그들을 붙들었다. 단순히 감사의 마음 표하는 정도를 넘어 과도하게 붙잡고 매달렸다. 기적의 주역들을 목격한 군중들은 곧장 그 행각에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들은 기적의 원인으로 사도들의 개인적인 권능과 경건을 주목했고 하나님의 은혜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다. 이에 베드로는 신구약을 관통하는 복음의 정수를 쏟아내며 군중의 인간적인 숭앙심을 단호히 배격했다.

사도들은 교회의 기둥을 세우고 터를 닦았으니 어깨에 권위의 힘이 적당히 들어가도 그리 문제될 게 없는 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 중에 수장격인 베드로의 반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적지가 아니하다. 설교에 대박을 터뜨리고, 일상에서 감동 한 토막을 구현하고, 절박한 분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신비롭고 희귀한 일들이 발생하면 뭐라도 하나 건지려고 어떻게든 수익의 극대화에 매달리고 개인의 영력을 광고하는 법인데 사도들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건지고 챙길 명예와 수입이 완벽히 보증되는 상황조차 격하게 뿌리쳤다.

하나님 한 분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신앙을 사도들은 손아귀에 굴러 들어온 성공과 인기에도 은밀히 영합하지 않고 전인격과 전 생애에서 겸손의 구체적인 범례를 선보였다. 목회적인 성공이나 학문적인 성취나 작가적인 유명세로 자신의 개인적인 경건과 권능이 주목받는 상황이 발생하면, 목회자는 옷을 찢어 성정의 동일함을 보이고 재를 뒤집어 쓰면서 늘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이며 회개의 자리가 마땅한 자라는 사도들의 겸손을 본받아야 하겠다. 그런 절호의 상황은 제대로 활용해야 되겠다는 세속적인 판단은 접으시라.

사람의 영광을 구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훔친 사과처럼 갑절로 달콤해도 나중에는 모래가 입에 가득하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는 것은 흉내도 내지 말아야 할 일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 두렵고 떨린다. 아무리 존재감이 밑바닥을 맴돌아도 사람의 영광에 헐떡이는 본성의 작용은 누구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갈취는 존재감의 정도와 무관하다. 하나님의 영광 갈취는 지금 성공과 인기의 상석을 차지하고 계신 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잘 다스리고 잘 가르치는 분들에 대한 갑절의 존경도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기적은 하나님의 일이었고 은혜였다. 펙트의 문제다. 여기에 궁색한 숟가락을 얹어서야 되겠는가. 어떠한 상황이든 겸손이 상책이다...그게 개인의 진정한 권능과 경건이기 때문이다.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Henri De Lubac's Medieval Exegesis

드 루박의 [중세 해석학]은 아내가 준 졸업 선물이다. 스맬리의 The Study of the Bible in the Middle Ages와 더불어 반드시 읽어야 할 중세의 성경 해석학 독본이다. 중세의 해석학을 모르면 종교개혁 해석학은 개혁이 가해진 일부를 마치 전부인 것처럼 간주하는 일반화의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종교개혁 인물들이 읽고 쓰고 연구했던 교실의 중세적 배경은 생략한 채 그들의 시대적 과제를 푸는 해법으로 제시된 개혁의 내용만을 취한다면 고대와 중세를 비롯한 교회사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의 도도한 줄기는 중세의 종교적 부패와 더불어 폐기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종교개혁 해석학의 종합적인 파악은 중세와의 연관성 속에서 온전한 이해에 도달한다. 루박의 [중세 해석학] 4권 영역본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Henri De Lubac's Medieval Exegesis: The Four Senses of Scripture.

Volume 1, Translated by Mark Sebanc, 1998.

Chapter 1: Theology, Scripture, and the Four-Fold Sense
Chapter 2: The Opposing Lists (historical evidence of the Fathers holding to either a three-sense list or a four-sense list)
Chapter 3: Patristic Origins (and in-depth introduction to Origen)
Chapter 4: The Latin Origen (and his successors)
Chapter 5: The Unity of the Two Testaments

Volume 2, Translated by E.M. Macierowski, 2000.

Chapter 6: Names and Number of the Biblical Senses
Chapter 7: The Foundation of History
Chapter 8: Allegory, Sense of the Faith
Chapter 9: Mystical Tropology
Chapter 10 Anagogy and Eschatology

Volume 3, Translated by E.M. Macierowski, 2009.

Chapter 1: Berno of Reichenau
Chapter 2: Subjectivism and Spiritual Understanding
Chapter 3: A Lineage Stemming from Jerome?
Chapter 4: Hugh of St. Victor
Chapter 5: The Victorine School
Chapter 6: Joachim of Flora

신학연구 방법론

신학공부,
본질이 무엇인가
왜 하는가
어떻게 하는가

이런 물음들과 더불어 해가 뜨고진다.

2013년 5월 24일 금요일

눈의 밝아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창3:7)

선악과 금지령의 위반에 뒤따르는 형벌은 필연적인 사망이다. 그런데도 아담과 하와는 대범하게 위반했다. 죄는 인간의 죽음보다 강하다는 증거겠다. 어쩌면 죄는 인간의 죽음보다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보다 심각한 결과를 겨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즐거움과 선하심에 파괴의 균열을 가하려는 사단의 복안을 읽어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사단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건드리고 갈취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과 비기려는 사단의 전형적인 불경이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을 꾹 짜서 오류의 엑기스를 뽑아내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 갈취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종교개혁 발발의 본질적인 단초였다. 같은 맥락에서 칼빈을 비롯한 수다한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나 다른 어떠한 것에도 영광과 공로를 돌리지 않으려고 했다. 신학의 핵심과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온 세상의 창조와 죄인의 구속과 회복과 완성의 궁극적인 지향점도 하나님의 영광이다. 선지자나 사도나 전도자나 교부나 공의회나 교회나 종교개혁 주역들에 대해서도 영광을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신학의 전부였다.

이는 성경의 핵심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바울은 이것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표현한다.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사망이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하지 않다는 단서가 여기에서 포착된다. 죄와 사망과 영광이 이렇게 인과의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 세상에 죄의 출입이 이루어진 태초에 사단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는 유혹을 첫사람의 귀에 주입한다. 죽음을 모면하는 순종보다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 그들에게 더 달콤했다.

결국 사단의 매혹적인 설득에 편승하여 생명의 말씀을 버리고 죽음에 이르는 불순종의 첫발을 내딛었다. 하나님과 같아지는 교만과 동시에 죽음을 향한 형벌의 첫번째 증상은 사람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었다. 눈은 정보가 전달되는 영혼의 창문일 뿐이고 눈의 밝아짐은 시야의 확대나 시각의 향상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의 빛으로 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판단하고 대처하는 일체의 주체요 주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피조물의 본성적인 종속성과 의존성을 내던지고 자존을 선언하는 셈이었다.

진리와 생명과 길이신 주님과의 단절은 거짓과 사망과 이탈을 초래했다. 눈의 밝아짐이 이 모든 것들을 주도한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냐고 하시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한다.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빛이시다. 바울의 돌이킴은 주님의 강력한 빛으로 인해 그런 눈의 밝아짐이 비늘처럼 벗겨지는 지점에서 발생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바울에게 영영한 빛이 되시었다.

눈은 영혼을 보여주는 창문이다. 영혼이 악하면서 눈빛이 선할 수가 없다. 기막힌 연출도 오래 가지는 못한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은 눈빛으로 드러난다. 우리의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한 것이 눈의 밝아짐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자기의 영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고 사망이 아니라 생명을 지향하는 첫증세는 주의 치유하는 광선으로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것이다. 주의 빛으로 인해 밝아진 영혼의 눈으로 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판단하고 대처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모습이다. 그런 사람이 그립다.

사람들을 만나면 눈빛부터 관찰한다.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검진이 아니다. 상대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존중하는 첩경이기 때문에 그리한다. 물론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볼 때마다 눈빛을 응시하며 자신을 진단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서는 합당하지 않은 태도겠다. 사랑과 긍휼의 눈빛이면 충분하다. 그런 교회의 눈빛들이 하나둘씩 모여 세상의 어두운 영혼이 밝아지면 좋겠다.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만이 구해지면 좋겠다.

2013년 5월 23일 목요일

여호와께 영광을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시115:1)

사태의 꼬인 매듭을 푸는 시인의 접근법이 특이하다. 급박한 필요를 전면에 내세우고 절박한 호소를 황급히 쏟아내는 격문이 아니라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는 겸양의 말로 시작하고 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림이 합당한데 이는 그의 인자와 진실이 유일한 이유라고 시인은 설명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신속한 조치를 촉구하는 독촉장 발부의 떳떳한 자격이나 권한이나 공로가 우리에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종결된다. 터진 문제의 신속한 처리와 말끔한 수습을 위해 몸종을 호출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은 기도의 왜곡된 개념을 부추기는 충동으로 충만하다. 시인도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우상 숭배자의 비아냥과 조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환난의 늪에 빠져도 돕지 않으시고 핍박의 칼이 날아와도 막지 않으시는 너희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고 한다.

이쯤 되면 침묵의 반창고로 오만한 자의 입을 꼼꼼하게 봉쇄하고 겨와 같이 가벼운 존재를 대풍으로 일소하는 파격적인 행동파적 면모를 화끈하게 보여 주시라는 주문이 목젖까지 치밀어 올라 기소문 형식으로 출고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인생의 변덕에 섭리의 장단을 맞추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이름을 위하여' '나의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행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선한 일들을 행하시고 형통의 때를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에 근거를 둔 은혜이며 감사와 영광은 하나님의 이름에 돌림이 너무나도 마땅하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한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같은 식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환난을 돕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 행보로 간주하고 비난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기회만 되면 하나님과 비기려는 고약한 버릇의 반사신경 수준의 돌출이 오히려 문제겠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다. 인생의 지극한 복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의 형통이며 모든 피조물의 신음은 이러한 영광의 회복과 완성을 고대하는 갈망의 표현이다.

삶 속에서 무시로 반갈아 등장하는 슬픔과 환난과 역경과 시련과 아픔으로 인한 우리의 신음도 하나님의 영광과 이어지지 않으면 안되겠다. 진로의 코 앞이 석자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더욱 결박되는 기도의 사람이고 싶다. 인생은 급히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 인생을 주목하면 할수록 허망함만 더해진다. 짧은 토막에 얽매이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다. 매 순간마다 그런 현명함이 발휘되면 좋겠다.

2013년 5월 22일 수요일

거짓된 인간과 참되신 하나님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롬3:4)

만물과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이 담긴 말씀이다.
하나님만 참되시고 모든 사람들은 거짓되다. 간단하고 명료하다.
하나님의 참되심은 말씀의 영원한 불변성과 관계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다.

그러나 사람은 말씀의 속성과는 정반대로 항구적인 변화의 대명사다.
문제는 변화 자체보다 영원토록 참된 말씀에서 멀어지는 것에 있다.
거짓의 정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정도로 가늠된다.
끔찍한 엇각 발생의 출처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태초이다.

그런데 거짓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이 허위자의 첩경이라 하였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는 신탁도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자였다.
신약 시대에는 귀에 달콤한 말씀만 선별하는 유형의 거짓이 왕성했다.

교부들의 시대에는 성경의 물리적인 문자 가감으로 거짓을 저질렀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각권을 임의로 추가하는 거짓에 대범했다.
거기에 번역이나 해석학적 면에서도 거짓과의 결탁은 상식으로 통하였다.
때로는 반듯한 이론을 전면에 깔았으나 실천에 있어서는 거짓을 자행했다.

지금은 역사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던 전력이 있는 온갖 종류의 거짓들이
박람회 수준으로 한꺼번에 자유롭게 각자의 진을 구축하며 공존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전적인 타락이 새로운 유형의 거짓을 더 이상 빚어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정도로 분별과 선택만 남은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본문은 로마서의 문제설정 및 초반의 논지를 주도하는 핵심 문구가 아니다.
하지만 비록 지나가듯 언급되긴 했으나 논지의 밑둥을 떠받히는 전제이다.
역사의 지면에서 참되신 하나님과 거짓된 인간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무시되면 로마서의 중심 메시지가 무너지고 마는 그런 전제 말이다.

자신을 부인하면 부인하는 그 만큼 모든 인간의 총체적 거짓과는 멀어지고
참되신 주님과의 거리는 좁혀진다. 자기부인 명령의 목적은 착취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건의 핵심도 이익의 방편으로 동원되는 사례가 허다하다.
거짓의 탈피와 진리의 취득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있음은 폐하지 못한다. 

2013년 5월 21일 화요일

글쓰기를 고민하다

붓을 느낌의 흐름에 맡기는 의식의 흐름법 글쓰기도 있고
논리의 반듯한 틀에 내용을 담아내는 논문식 글쓰기도 있고
감성을 겨냥한 감미로운 에세이 형식의 글쓰기도 있고
격정을 유발하는 거칠고 저항적인 격문 형식의 글쓰기도 있다.

논문을 쓰면서는 논리적 글쓰기를 최고의 형식으로 손꼽았다.
그러나 학위를 끝마치고 나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고 가치를 저장하는 추상적인 그릇이다.
논리적 언술로는 교환할 수 있는 소통의 내용을 다 커버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람의 논리가 그리 정교하지 못해서다. 
우리의 논리는 고전적인 아리스토 논리학에 몇 가지의 세련된 기교를 
가미한 정도이지 예나 지금이나 논리적 사유의 본질은 동일하다.
문명의 본질을 교체하는 듯한 기념비적 전환도 대체로 기교의 문제였다.

성경의 다채로운 어법보다 탁월한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본다.
인간의 본질과 자연의 근원을 관통하고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까지
우리의 마음과 머리와 수족에 적응하고 전달하는 글쓰기의 방식이
성경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 기발하고 유효한 경우를 경험하지 못해서다.

시, 역사, 대화, 지혜, 묵시, 이야기, 서신, 선언, 애가, 찬양, 서술...
특정한 쟝르에 갇히는 사유나 글쓰기가 아니라 모든 쟝르를 아우르는
성경의 전방위적 사유의 문법에 눈길이 격하게 쏠린다. 아름답다.
학자의 길에 이제 겨우 '면허증'을 취득한 새내기의 작은 고민이다.

성경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확신으로 첫걸음을 내딛는다...

우병훈 목사님의 페북 담벼락 펌글

칼빈의 인생에 중요한 논쟁 장면 중에 하나를 보여주는 이런 일화가 있다(스티켈베르거, 67-72).

 1536년, 로잔(Lausanne)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 종교회의가 열렸다. 서로간의 입장 차에 대한 격렬한 논쟁의 장이었다. 결과에 따라서는 한 도시가 개혁파 쪽으로 넘어올 수도 있고, 한 도시의 개혁 세력이 매장될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양측의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 칼빈은 처음 사흘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렐과 비레가 그들을 상대로 토론하도록 물러나 있었다. 나흘째 되던 날은 토론의 주제가 성만찬이었다. 가톨릭 측의 유능한 변론자인 미마르(Mimard)가 등단하여 자신이 준비한 연설문을 주의 깊게 읽어 나갔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교부들의 교훈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바로 그때, 마른 체구에 창백한 얼굴을 한 젊은이 한 사람이 일어서서, 비웃음을 머금은 채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그 유능한 가톨릭의 변론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칼빈이었다. 뜻밖의 인물의 출현에 의아해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거룩한 교부들에게 영예를 돌립니다. 우리들 중에 미마르 당신보다 교부를 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부들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교부들의 저작들을 좀 더 철저하게 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당신이 교부들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였더라면, 그들의 저작 중에 몇몇 구절들은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준비된 원고가 없는 상태에서 칼빈은 즉석에서 가톨릭 측에 의하여 제시된 여러 가지 의견들을 조목조목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그의 모든 논거들은 철저히 교부들로부터만 이끌어져 오고 있었다. 그들은 개혁파 사람들이 무시한다고 비난하던 교부들의 글을 통해서 자신들이 이토록 궁지에 몰리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칼빈은 먼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를 인용한 후 주석하기 시작하였으며, 교부 크리소스토무스의 것이라고 밝혀진 설교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출처를 밝혔다. “제11장 중간 부분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인용하기 시작하였다.

“제23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고는 마니교도인 아만투스(Amantus)를 반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에서 또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상은 그의 글 중간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98편에 대한 주석에서,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전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으로부터 인용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복음 설교의 시작 부분인데, 아마 여덟 번째 아니면 아홉 번째 설교일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는 칼빈은 마치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듯이 청산유수처럼 수많은 작품들을 술술 언급하였다. 이미 상당히 긴 시간이 흘렀으나 27세의 젊은 칼빈은 고대 교부들의 저작들로부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나가기 위해 증빙자료로 그것들을 인용하고 주석하는 일을 끝내지 않았다.

그가 능숙하게 인용하고 주석해 나가는 자료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거기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 즉 교부의 저작들을 스스로 신성시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낯선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토론되고 있는 문제에 관한 복음주의적인 해석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 사이에서도 아직 충분히 언급되지 않은 많은 자료들을 엄청나게 쏟아 놓기 시작 하였다. “『집사 페트루스를 위한 신앙론(De Fide ad Petrum Diaconum)』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고, 『다르다누스에게(Ad Dardanus)』라고 제목 붙여진 서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는데...” 칼빈은 이 모든 것을 암기하여 대답하였다.

원고도 없이 책도 없이 그는 자신의 정리된 기억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학문적 천재성이 드러나는 순간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신앙에 의하여 확신되고, 성령에 의하여 감동되고 있는 거룩한 성경 진리였다. 천부적인 기억력을 통하여, 제시되고 있는 이 참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학문적인 중언들을 들으면서 양측 모두는 숨을 죽였다. 자신의 고발과 비난을 확신 있는 목소리로 선포하였던 가톨릭의 연사는, 작은 체구에 창백한 젊은이 칼빈이 그의 두 눈을 자기에게 고정시킨 채 다음과 같이 승리에 넘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을 때, 완전히 오그라들어버리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교부들에 대하여 적대적이라고 하는 당신의 주장이 무례하고 뻔뻔스러운 주장이 아닌지 스스로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교부들이 쓴 저작의 껍데기도 못 읽어 본 사람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일 당신과 당신보다 앞서서 연설했던 사람들이 단 한 번이라도 교부들의 저작을 통독하였더라면 아마도 현명하게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수 한 수 밀리다가 마지막에는 신학적으로 외통수에 몰리고 말았다는 패배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빛이 역력하였다. 더욱이 그것도 자신들이 자랑하는 교부들의 저작을 통해서 말이다. 물을 끼얹은 듯한 좌중 한 가운데로, 칼빈이 내리는 토론의 결론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왔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은혜에 의하여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진리 안에서 참되게 우리들을 결합시켜주는 영적 교제, 우리들을 우리의 구세주와 연합시켜주는 영적인 연합... 이 영적인 교제는 영적인 줄 곧 성령의 줄을 통하여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칼빈은 자리에 앉아서 장시간의 연설로 말미암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완전한 침묵이 교회당을 가득 메웠다. 이 연설 가운데 일부분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회중들조차도, 지금 27세의 이 젊은 칼빈에 의하여 무엇인가 진리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제들은 서로 경악에 가득 찬 질린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였고, 감히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들 가운데 유능한 변론자였던 미마르나 블랑셰로즈(Blancherose)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프란시스 교단의 한 탁발승이 일어났다. 대중들에게 인기를 모으던 유능한 가톨릭의 설교자로서 개혁을 반대하는 연설을 열렬히 하고 다녔다. 장 땅디(Jean Tandy)라는 사람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토록 웅변적인 설교로 온 교회당을 뒤흔들어놓았을 이 사람이 창백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미 그의 혀는 목구멍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바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는 것은 명백한 진리에 반항하는 완고함이라고 여겨집니다. 내가 지금 들은 바 연설에 따라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동안 나는 무지함 때문에 오류 속에서 살아왔고 잘못된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왔습니다. 내가 그동안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거슬러 말하고 행하였던 모든 것에 대해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도 내가 지금까지 가르쳐온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나는 지금부터 그리스도와 그의 순수한 가르침만을 따르기 위하여 성직의 옷을 벗어 버리겠습니다.”

 그날 거기 모인 양측의 토론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직감적으로 칼빈의 연설이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가톨릭 수도사들을 회심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토론이 끝난 다음날 아침, 로잔은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매춘 소굴들은 모두 폐쇄되었고, 모든 창녀들은 추방당했으며, 종교회담은 구체적인 결실을 맺기 시작하였다. 매일매일 보오(Vaux)지역의 성직자들은 개혁을 찬성하는 입장을 밝히게 되었고, 수개월 내에 수도 사역을 한 80여명의 사제들과 수도사 서약을 아직 하지 않은 120여명의 사제들이 개혁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가장 완고하게 고수하던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심지어 미마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모든 일은 단지 칼빈의 철저한 학문적인 준비와 신학적인 천재성만을 입증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거룩한 경건 속에서 획득한 자기화 된 진리를 말한 것이다. 그는 교리를 말하였으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속에서 완성된 신앙의 고백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이 그러한 신학적인 선언 위에 함께 하신 사실이다.

 -- 이상의 내용은,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박종숙•이은재 공역, 나단출판사, 1992), 67-72쪽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좀 더 매끄럽게 읽히도록 제가 중간에 약간 수정하고, 단락도 나누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내용은 엄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약간의 사료에 바탕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상당히 생생하게 그때의 사건을 묘사하고 있고, 또한 감동적이라서 올려 봅니다.

2013년 5월 20일 월요일

인간의 길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이해할 수 있으랴 (잠20:24)

이는 사람이 자기의 인생길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나아가 인류의 행보가 사람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유는 사람의 행보가 여호와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만사가 오묘한 것과 나타난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후자는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영구히 속했다고 밝힌다. '오묘한 것'은 왜 가리워 두었냐며 불공평한 정보공유 실태에 거북한 심기를 드러내며 하나님께 까칠한 불평의 날을 세우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람들은 부지불식 중에 긴 세월동안 선악의 독자적인 분별로 '오묘한' 영역 좁히기의 막대한 성과를 거두었고 고도로 발전된 문명은 그 결과였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은 인간적인 면에서의 발전일 뿐이었고 그 성격은 보고 듣는 기능의 확대와 연장에 불과했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DNA의 속살에 정밀한 성형을 가한다 할지라도 그런 본질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사람의 조작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형평성의 개념이 과장되어 능력과 판단과 영광과 존귀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보다 비교할 수 없도록 탁월함을 용납하지 못하는 세태가 비록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통제력을 상실한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세상에는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의 지계표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임의로 수정하는 방식으로 신과의 '동등성'을 구가하려 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별을 결정하는 기술이 인간의 손아귀에 들어오자 인간의 고유한 질서마저 허무는 문명사적 역주행도 불사한다.

나중에 인간의 도덕성 인자를 식별하고 이식하는 기술이 학술계를 강타하고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단계까지 이르면 창조자 하나님과 비기려는 인간개조 시도들이 신문명의 대명사인 듯 사방에서 뻣뻣한 무쓰를 바르고 민망한 고개를 내밀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광기는 사람이 자기의 길을 능히 알 수 없어서 필경은 사망의 길로 이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각자의 길을 무모하게 질주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독자적인 행보는 어쩌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길과 슬픈 평행선을 그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간이 걸어가야 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시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길이시다. 사람의 길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길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그 길을 이탈하면 모든 것들이 마비된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은 주님의 협박성 인기 관리용 멘트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을 지적하고 삶의 핵심을 교훈하고 삶의 구체적인 행보가 하나님께 속했음을 계시하신 말씀이다. 진실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길을 계시하지 않으시면 능히 그 길을 알 사람이 없다.

사랑하는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신다는 말씀이 심히 달콤한 아침이다. 인간이 능히 알지 못하여서 스스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생명과 진리시며 인생의 길 되심을 보이신 주님께 한없는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2013년 5월 18일 토요일

어느 후배의 선물

사랑하는 후배가 심한 출혈을 감수하고 Kindle을 선물했다.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유용한 도구일 것이라는 확신에서 장만하게 되었단다. 동생처럼 늘 마음이 가는 후배인데,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짠하고 눈시울이 촉촉하다. 주께서 이 후배와 늘 동행해 주시기를 기도하게 된다. 순수하고 성실하고 예를 아는 훌륭한 목회자의 재목이다. 주님의 교회가 이 후배로 말미암아 더욱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상의 빛을 발하기를 소망한다.

어디를 가든 이제 천여권을 챙겨줄 Kindle의 수행을 기꺼이 허하노라....하하하 

지인들의 방문

졸업을 축하하고 교제를 나누고자 지인들이 멀리서 찾아 오셨다. 주초에 수술을 받으시고 다음 주에도 다른 수술이 잡힌 불편하신 몸으로 이곳까지 왕래해 주셨다. 마음이 짠하였다.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졸업의 어깨가 묵직하다. 그런데 드릴 게 없었다. 짧은 라이드 서비스와 허그가 전부였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3년 5월 17일 금요일

데스크 중독

논문도 끝나고 졸업식이 코앞인데,
난 여전히 책상 붙박이로 살아간다.
데스크 중독증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ㅎㅎㅎ
의자에 앉아 책이나 노트북을 펼치는 게
이젠 마음이 진정되는 신경 안정제와 같아졌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하나님 경배

간만에 부자간의 문답식 대화가 열렸다.

아빠: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애?
아들: 하이델베르그 문답에 잘 정리되어 있잖아요?
아빠: 어떻게?
아들: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요.
아빠: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지를 않잖아. 뭐가 문제지? 하나님이 사람들을 잘못 지으신 거야? 아니면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야?
아들: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 같아요.
아빠: 그럼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은 몰라서 못하는 거야? 아니면 알고도 안하는 거야?
아들: 알고도 경배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빠: 알고도 경배하지 않는 이유는 경배할 수 없어서야? 아니면 경배하기 싫어서야?
아들: 경배하기 싫어서인 것 같아요. 그런데 몰라서 그러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요?
아빠: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럼 알고도 경배하지 않는 것과 몰라서 경배하지 않는 것 중에 누가 더 하나님께 혼날 것 같애?
아들: 알고도 경배하지 않는 사람요.
아빠: 그럼 더 많이 알고도 경배하지 않으면 더 많이 혼나겠네?
아들: 그렇겠죠.
아빠: 그래서 아빠는 이번 졸업식이 두렵단다.
아들: 왜요?
아빠: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성도들일 것이고 그 중에서도 성도들을 가르치는 목회자가 가장 많이 알 것이고 그 중에서도 목회자를 가르치는 신학교의 선생님일 텐데, 아빠가 졸업하면 아마도 신학교의 교사가 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아들: 아는 만큼 하나님을 경배하면 되잖아요...히히히 아빠, 저는요 스티븐 호킹이 제일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빠: 갑자기 그분은 왜?
아들: 기독교를 정말 많이 공부한 이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잘못된 거짓도 다른 분들에게 가르치고 있잖아요. 예전부터 이분을 생각하면 불쌍해요. 하나님께 혼날 거 생각하면...그런데 아빠, 호킹은 이스라엘 지역에서 열리는 컨퍼런스 참석 안한다요. 전쟁에 반대해서 그렇대요.
아빠: 그래서 호킹을 말한 거구나. 나도 그분이 마니마니 혼날 것이라고 생각한다...하하하. 그리고 그런 분들은 평화를 많이 강조하지. 평화의 왕은 찾지 않고...오늘 좋은 정보 얻었네. 공부 열심히 하구 오후에 봐...바이~~~
아들: 네 아빠, 바이~~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감

운명은 내 손의 관할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를 얻는다.
못나고 부족하고 무지하고 무능력한 그대로의 뻔한 결과가
운명이라 한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비참한 인생일까?

나의 됨됨이와 존재감의 변수는 나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그분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가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운명을 좌우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면 우리는 그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시면 우리는 그의 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면 우리는 그의 자녀이다.

나 자신과 환경에 기초한 나됨의 어리석은 키재기로
상대적인 우열감에 휘둘리고 변덕스런 희비가 엇갈리는 것은
자신의 선 자리를 망각한 무지의 반증이라 하겠다.

나의 나됨은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발견된다.
은혜 위에 은혜라 할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려 했던 바울,

'작은 자' 바울(Paul)의 이름을 도용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13년 5월 16일 목요일

걸음의 인도자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16:9)

한 사람의 인생 설계도를 작성하는 마음의 경영은 그 사람에게 있지만 그것이 구현되는 현실적인 걸음과 결과는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다. 때때로 머리의 상식과 삶의 현실 사이의 괴리와 불협화음 때문에 곤혹스런 경우가 있다. 실제로 최상의 학구열을 불태우고 땀방울이 소나기에 가깝도록 이마를 적셨어도 돌아오는 결과가 합리적인 기대를 배신하는 경우가 종종 우리를 낭패의 웅덩이에 빠뜨린다. 

예상하지 못한 원인과 결과의 불일치에 부딪히면 푸념처럼 운명의 장난을 탓하기도 하지만 마음의 심연에는 하나님을 향한 무의식적 원망과 분노가 발동한다. 이런 태도는 비록 어떤 특정한 사안의 실패를 계기로 촉발되는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와 유사한 실패들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인생의 예측불허 현실과 내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좌우하지 못한다는 주도권 상실감이 하나님을 노려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배후에는 하나님과 비기려는 근성이 흉칙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

우리가 내일의 일을 자랑하지 못하는 것도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착하고 성실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급작스런 불행과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의 수효를 헤아리기 어렵다. 아이들을 태우고 등교길에 오를 때면 도로변에 한 치 앞도 모르면서 살아가던 짐승들의 사체들이 허무하게 널부러져 있다. 인생과 짐승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하였던 전도자의 예리한 관찰은 동서고금 전체를 관통하는 실재이다.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의 병행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인생에 흐림과 맑음이란 기후의 변덕이 있음은 인생으로 하여금 장래의 일을 능히 헤아리지 못하게 하심이 목적이고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폈다는 전도자도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행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으며 사람이 아무리 궁구의 땀을 흘려도 능히 깨닫지 못하며 내노라 하는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를 못한다고 했다.

인생이 마음의 경영대로 풀어지지 않는다고 원망과 분노의 이빨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고 그의 나라를 훼방하는 행태는 올바르지 않다. 오히려 인생의 걸음 인도자가 주님이고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겸손의 무릎을 꿇고 여호와를 더욱 깊이 경외하는 것이 올바른 지식의 시작이고 건강한 지혜의 본질이라 하겠다. 비록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번뜩이는 형통의 대로가 뻥뻥 뚫어지지 않더라도 경외의 깊이를 다지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디펜스를 통과한 날, 동녁에 걸린 쌍무지개 때문에 사실 언약의 묘한 감흥에 잠시 휩싸였다. 그러나 그걸 인간적인 형통의 주술적인 싸인으로 해석하진 않았다. 그냥 격려의 스마일링 페이스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 표정의 실상은 앞으로 서서히 확인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실상이 사랑하는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백성된 나의 형제들와 자매들을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는 것이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지극히 작고 연약한 자를 지금까지 이끄신 주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미시건 특유의 청아한 하늘이 유난히도 상큼한 아침이다. 

꿈이 아니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감은 사실이 견인하긴 하나
더디 온다는 말이 맞나보다.
오늘 아침도 어제와 동일하다.
그 표정 그대로다.

인간 문맥에서 부여된 어떤 변화는
그 문맥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변화의 다반사 속에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나로구나.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됨됨이를
늘 하나님의 은혜에서 발견했던 것은
안전하고 지혜로운 처사였다.

2013년 5월 15일 수요일

논문방어 성공했다!

디펜스가 끝나자 머리는 백지처럼 모든 게 지워졌다.
식탁에서 멀러 교수님께 과분한 칭찬을 받았으나
그에 상응하는 감사의 답사조차 더듬어야 했을 정도였다.

오늘의 논문방어 성공으로 주말에는 졸업장을 거머쥔다.
아직도 의식은 현실을 받아 들이지를 못하고 있다.
실감이 협조해 주어야 하는데 여전히 멍멍하다.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정말 부족한데...해냈다.
사랑하는 아내가 없었다면 삶도 공부도 없었다.
그녀의 끈질긴 사랑의 보필로 졸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서서히 긴장완화 후유증이 눈꺼플을 짓누른다. 피곤하다.
한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간다...정말 감사하다.

2013년 5월 12일 일요일

형통의 함정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시105:20)

요셉 이야기다. 그는 고진감래 혹은 형통의 대명사다. 형제들의 배신과 주인의 모함과 정치권 참모들의 치명적인 망각으로 요셉은 어둡고 외롭고 괴로운 고난의 가시밭길 여정을 전전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열방의 통치자인 애굽의 왕은 요셉을 감옥에서 발탁하여 최고위 실세의 자리에 앉혔고 애굽의 모든 백성들이 요셉의 허락과 명령 없이는 수족을 놀리지 못할 정도로 제어할 권세가 없는 제국의 실질적인 일인자로 만들었다. 왕이 요셉보다 높음은 보좌 뿐이었다. 이런 반전의 인생을 읽는 독자들이 일순위 롤모델로 요셉을 손꼽는 것은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겠다.

형통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모두가 형통을 추구한다. 형통의 역방향 인생을 갈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이런 기호의 다수성 때문에 형통이 나쁘지 않다고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전도서가 형통을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명시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물리적인 형통이 인생의 목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함정이다. 이는 요셉의 고위직과 명예와 권세와 짜릿한 인생역전 스토리에 흠모의 입맛을 다시는 경우를 일컫는다. 형통이 좋은 것이라는 이유로 수단적인 형통을 인생의 목적으로 둔갑시켜 그 형통에 발목이 붙잡히는 민망한 사례들이 적지가 않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때때로 교회의 본질마저 훼손하는 실정이다.

시편 105편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 대해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신' 형통의 이유가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과 삶으로 먹고 마시는 목적의 수단으로 형통의 우연적인 동원이 있었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겠다. 모세처럼 살인한 적도 없고 다윗처럼 간음한 적도 없고 비열한 방법으로 충복의 존재를 제거한 적도 없고 바울처럼 하나님의 교회 핍박에 공권력을 행사한 적도 없었던 거의 무흠에 가까운 요셉을 믿음의 모델로 삼겠다는 것에 어떠한 이의가 있겠는가. 그러나 거기에 저자세로 도사리고 있는 함정은 조심해야 하겠다.

그 함정은 바울의 아름다운 고백에서 가장 뾰족하게 지적되고 있다. 그가 자신에게 유익하던 소유를 배설물 수준의 무익한 것으로, 오히려 위해한 것으로 여긴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싶어서다. 바울이 소유하고 있었던 학식과 시민권과 열심과 고위직과 출신은 모두 그의 형통을 지탱하던 요소였다. 당시 사람들은 바울의 존재감을 이런 화려한 스펙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 그의 고유한 '바울신학' 속에서 이해하려 한다. 이는 칼빈이 늘 교회의 보편적인 진리를 섬기려고 했지만 후대에 '칼빈주의 신학'으로 특화되는 것과도 별반 다르지가 않다.

설명의 필요성 때문에 고유한 이름이 수식어로 사용된 신학의 불가피한 운운이 허용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아예 표적으로 삼아 돌진하는 것은 '신학적 형통'의 함정에 스스로 걸려드는 셈이겠다. 나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의 대부분이 그리스도 이상의 목적으로 추구되고 있다면 무익하고 유해한 배설물에 불과하다. 형통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는 우연적인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형통은 신앙의 표적이고 그 형통에 협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가차없이 버려진다.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은 나를 형통으로 안내하는 언제든지 해고될 하인이나 운송용 수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만세 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의 인생 설계도로 삼는 것은 땅에서 얻어질 수 없는 지혜겠다.

적정한 국면전환

친구가 목회하는 교회 수련회에 갔드랬다.
늦을새라 새벽부터 부산을 떨다가 차를 몰았다.
제한속도 지키면 1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한참을 달리는데 시골의 아침 흙냄새가 창틈을 비집었다.
게다가 달리면서 무심코 간과했던 수목의 녹색 존재감도 
정확한 제한속도 주행에 급제동을 걸었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속도를 떨구었다.
생략했던 노변의 섬세한 디테일이 안구로 밀려 왔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소박한 아름다움...큰 숨으로 흡입했다.

논문방어 준비로 고조된 긴장의 끈도 잠깐의 이완을 허용했다.
그런 상태로 성도들과 만났고 말씀을 나누었다.
아니나 다를까, 귀가길에 의식의 아랫묵은 다시 긴장의 독차지다. 

긴장에도 급이라는 게 있나보다. 다른 느낌의 긴장이다.
적당한 시점의 짤막한 국면전환, 때때로 요긴하다.
귀한 시간 마련해 준 교회에 친구에게 감사를 드린다.

2013년 5월 10일 금요일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

"진리 앞에서 정직하라" 편에서도 한 토막 옮긴다.

"진실한 교역자가 되고자 한다면 성경을 펴보고
이제부턴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상을 허물거나 외면하고
자기 나름대로 교역자 노릇을 하고 스스로 요령해서
무엇을 꾸려 나간다고 할 때에 그것은 가짜들의 행태라는 말입니다.

속이는 일처럼 단속하기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우리 땅에 설립되어 근 100년 역사를 가졌지만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질서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진리 앞에서 이토록 정직하지 못하고
교회가 기업처럼 매매하는 지경까지 이르른 적이 없다 말입니다.

지금 세운 예배당에 내 돈이 얼마 들어갔다,
내가 노력해서 모아놓은 교인이 얼마다,
이 자리에 오려면 그에 준하는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고
교회를 사고판단 말입니다.
이런 식의 악한 풍조가 지금 우리 교계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신학교가 설립된 목적은
진리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자는 것입니다.
바른 신학이 무엇입니까? 진리 앞에서 합격이 되는 신학입니다.
바른 교회란 무엇입니까? 진리 앞에서 정비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바른 생활이 무엇이죠? 진리 앞에서 정직하게 나아가는 생활이라 말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 한 토막

오늘은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로 아침을 열었다.
언어가 투박하고 거칠지만 여운이 길고 깊다.
[네 꼴보고 은혜를 받겠느냐] 책에서 한 토막을 옮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너무 에누리로 믿습니다.
믿는 일에서 너무 에누리를 한단 말이지요.
성경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훨씬 더 깊이 하려는 결단이 전혀 없습니다.

기도도 역시 한번 생사를 결단해야 하겠는데
생사 결단할 용의가 전혀 없고 그저 에누리로 기도해요.
에누리 기도를 한다 말입니다.
과연 기도라는 것이 그렇게 쓰는 것입니까?
그렇게 무효하게 또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 수 없는
얕은 수준에서 껍데기 수작으로 하는 것입니까?

그야말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성스럽고 엄숙한 일을 할 때에
그렇게 몸을 던져 넣지 아니하고 정신을 투자하지 아니하며
천단한 껍데기 수작으로 소홀하게 지나가선 안되는 거 아닙니까?

투신을 하십시오."

"죽기 내기로" 달려드는 기백의 부재가 부끄럽다.

야밤풍경

인생에 중요한 순간이 임박하면
시야가 좁아진다.

주님의 눈으로 창공을 나르듯 
넓고 길게 관조해야 하는데
사태의 표면에 바짝 달라붙어 
사소한 변화의 물살에도
신경계에 맹목적인 계엄령이 발동하는 
옹졸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묘한 은혜가 머리와 마음에 번진다.
들킨 자신의 초라함이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복임을 교훈하고 있어서다.

연약할 때 강함이란 이런건가?
그래서 바울은 연약을 자랑의 귀빈으로 보았던가?

바울의 경험세계 문턱이 
그리 높아뵈지 않아 보인다고 하면 
이미 교만의 질퍽한 늪에서의
경박한 허세일 가능성이 엄습한다.

허허...사람이 이렇구나.

지금은 주님과의 친밀함이 목마르다.
의식의 혁대를 풀고 나른한 침대에 오를 때엔
익숙하지 않은 세계로의 진입이 늘 설레인다.

내일은 창문을 열어도 
햇살이 쏟아지지 않을 전망이다...그런 날도 있다.

2013년 5월 9일 목요일

아침풍경

아침이 되면 창문을 연다.
뒷뜰에 수북히 쌓인 햇살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새들의 출장 콘서트 음률이
도톰한 햇살을 요리조리 비집는다.
일평생 다듬은 새들의 지저귀는 화음은
웅장한 교향악에 어깨를 겨누고도 남는다.

여기에 청록이 맞닿은 명품 지평선도
한동안 시선을 놓아주질 않는다.

이건 지금까지 창이 없는 연구실에 가지 않았던 이유였다.
사랑하는 학우들이 미워서가 절때 아니다...ㅎㅎㅎ


성경 해석학과 삼위일체

히포의 교부가 저술한 De trinitate를 읽다가 지각의 발목이 묶였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에 대한 짧은 단상이 그 주범이다.

"선지자와 율법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두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성경이 이유가 있어서 둘 중에서 하나만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 사랑을 묵과하는 듯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웃사랑 언급이 생략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계명을 지키는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이웃을 사랑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받드시 사랑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ipsam praecipue dilectionem diligat)
결국 그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필히 사랑하는 것이다."

성경 해석학의 중요한 대목이다.
비록 어떤 본질적인 내용이 본문의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지 않더라도
무조건 그 내용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함의를 제공하고 있어서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는
에스더를 주석할 때에도 계시의 주어로서 하나님은 생략되지 말아야 한다.
어떤 본문의 인위적인 문맥설정 때문에 성경의 본의가 때때로 파괴된다.
물론 사람의 생각을 어거지로 본문에 삽입하는 문제도 풀어야 할 과제겠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성경은 해석되지 않도록 기록된 계시이다.
하나님을 저자로서 그의 뜻을 찾는 시도를 중단하고
기록자의 인간문맥 안에서의 주변적인 의미를 선두에 내세우는 주석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 이해를 위한 과정일 수는 있겠으나 종착지는 아니다.
본문에 믿음이나 하나님이 주어로 명시되어 있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하고 해석을 시도하면 고작 인문학적 쾌감에 머무는 정도겠다.
이런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경 해석학의 종결자가 되신다. 

김영규 칼럼: 학문과 표절의 딜레마

김영규 선생님의 따끔하고 후련한 지적이다. 
학위논문 디펜스를 앞두고 부끄러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학문의 진정한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아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엄따!

"신학은 지금까지 있어 왔던 문명의 모든 언어권들의 진보에 대한 연구, 
헬라 로마 문화로부터 기독교가 자국어로 글을 남기지 않을 만큼이나
객관적 자리를 얻어 왔던 모든 교부들의 자료들, 
현대 학문들로부터 성취되었던 자연과 문명에 대한 학문적 객관성에 대한 
모든 자료들로부터 그 최고의 객관성을 다 확보해야만 
진정한 허위와 표절을 막을 수 있다."

[김영규 칼럼] 신학과 관련된 학문과 표절의 딜레마 (2013. 4. 30)

수학경시 1등 먹다

민망한 (^^;) 자식자랑 들어간다.
첫째 녀석이 미시건 수학경시 대회에서 1등 먹었단다.
자식은 애비를 닮는다는 출처모를 확신이...푸하하하~~~
쭈욱 밀려온다. 거부하고 싶지가 아니하다.


2013년 5월 8일 수요일

아름다운 근심의 중첩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빌2:28)

1. 에바브로디도는 주님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사람이다. 이는 바울을 섬기는 빌립보 교회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었다. 그런 그가 병들어 죽게 될 지경까지 갔다. 이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근심하게 되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교회가 근심에 빠지게 되었음을 알고 그것이 미안하고 안타까워 극심한 근심에 빠진다. 이런 교회의 근심과 동역자의 근심이 서로 원인이 되어 근심이 더해지는 상황을 지켜보는 바울의 마음은 갑절의 근심에 빠져든다.

2. 드디어 주님의 은혜로 에바브로디도의 질병이 고쳐졌고 바울의 근심은 사라졌다. 그러나 동역자의 치유를 몰라 여전히 근심하는 빌립보 성도들의 근심이 바울의 목에 걸렸다. 그래서 동역자를 교회에 보내기로 결심하고 서신을 띄운다. 그를 만나면 성도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성도들의 근심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바울도 기뻐하게 된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그를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되 그를 존귀히 여김으로 그리하라 부탁한다.

3.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은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과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 교회 사이에서 벌어지는 숨막히는 사랑의 교차는 사랑의 끈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응하는 기막힌 사례겠다. 근심에 근심이 중첩되는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바울의 서신에 담기고 교회마다 회람되어 온 교회의 귀를 달콤하게 하였고 마음을 흐뭇하고 하였고 공동체는 더욱 결속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감정의 대립각을 세우던 사람들도 평안의 매는 줄로 인한 하나됨에 끼어들고 증오의 칼을 부셔뜨러 수고의 보습을 만들고 시기의 창을 쳐서 섬김의 낫을 만드는 결과가 뒤따랐을 것이다.

4. 나로 인하여 상대방이 근심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향기롭다. 나로 인한 타인의 근심에 서로 민감하면 생기가 감돌고 사랑이 공동체의 혈류를 관통한다. 이는 환경의 변화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타인 의존적인 신경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이 형성하는 근심에 빠지라는 이야기다. 적극적인 사랑을 못한다면 최소한 타인에게 근심을 제공하는 것을 경계하고 살피는 사랑의 소극적인 하한선 이하로는 추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근심'이란 단어는 사랑의 다른 표기이다. 이러한 사랑이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는 공동체가 그립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준엄한 목소리로 호령하는 아침이다...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특이한 해석

특이한 주장이 있어 인용한다.

"While he stresses election to salvation but not to damnation in his controversy with Bolsec, he prefers in the Institutes of 1559 to emphasize God's prescience: God elects to salvation those whom he foresees will be true believers, which implies that he also foresses the others as unbelievers and contemns them....In the Institutes (3, 19-25; 4, 18-20), Calvin asserts that God foresees who will believe and elects or condemns as a function of this."

Calvin and His Influence 1509-2009, ed. Irena Backus, Philip Benedict (2011), 13.

정반대의 의견은 아래와 같다.

“While Calvin argues with Bolsec that election precedes faith, in the Institutio he rejects the alternative thesis of prescience: namely, that God elects those whom he foreknows will believe.”

Dr. Neuser’s contribution in The Calvin Handbook (2009), 321.


회전의자

오늘부로 바퀴가 달린 회전의자 시대를 연다.
몸이 뻣뻣하다 싶으면 허리 돌리기에 들어간다.
목운동은 거저 주어지는 덤이다.
지속적인 착석시간 권장량은 4시간이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일어나고 싶지가 아니하다.
"필요해?" 한 마디로 장만을 결심한 아내에게 감사하다. 
조립에 이마를 적시며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깔끔한 뒷정리 서비스도 제공한 둘째 녀석두...ㅋㅋ


2013년 5월 7일 화요일

그릇된 가르침을 극복하는 방법

1. 모든 문제의 극복책 일순위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느낌과 판단과 방식으로 성취되지 않는 사안이다.

2.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확증했다.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가 사랑의 핵심이다.

3.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달리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도 자랑치도 않겠다는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집요하게 파고든 사랑의 사도였다.

4.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성경 전체를 사랑한다.

5. 내 느낌과 감정과 감동과 발견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신 성경 전체를 통하여 알려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정확하고 안전하고 합당하다.

6.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의 가장 궁극적인 차원까지 도달한다. 말씀의 길을 벗어나면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필연이다.

7. 말씀으로 말미암아 도달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이단적인 무리들의 어떠한 해석이나 기적이나 감동이나 미혹보다 더욱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에 신앙의 가장 안전한 장치이다. 이거 대단히 중요하다. 말씀만이 사랑의 궁극에 도달하는 길이다. 결코 교과서적 멘트가 아니다.

8. 지금 내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동행하는 것보다 더 심오한 차원의 진리와 만족이 주어질 수 없다면 설득의 이빨이 아무리 날카롭고 강력해도 그것에 물려 말씀의 정도를 벗어나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 깊어지면 이단의 가르침은 당연히 싫어진다.

9. 결국 성령의 검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악한 무리에게 넘어간다. 자신을 지켜 악한 무리에게 넘어가지 않으면서 연약한 분들도 보호하고 돌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이 내 안에 내가 말씀 안에 거하는 온전한 연합의 사랑에 이르러야 한다.

10. 이단은 우리에게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아는 지식의 현주소를 솔직히 돌아보고 인정하게 만드는 순기능이 없지는 않다는 의미에서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시되 악한 자들도 악한 날에 적당히 지으신 신적인 섭리의 일부로서 허락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11. 이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가 없었다. 그들의 접근에 놀라지도 말고 두려움에 빠지지도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에 더욱 바짝 다가가는 계기로 삼는다면 필요악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다. 우리의 싸움은 이단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사랑으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싸움이다.

12.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어떤 희귀한 지식이나 천사들의 언어나 신비로운 기적이나 놀라운 체험이나 황홀경 같은 매혹적인 것에 단 한 조각의 열망이나 갈증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13. 하나님의 사랑은 흥분이나 충동이나 선동이나 전율이나 혁신이 아니라 십자가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모습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다행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공연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짊어지는 사람은 드물어서 분별하기 용이하다.

철부지 선동가들

오늘 마지막 때를 강조하며 성경을 강조하며 교회를 비판하고
신학교와 교리 무용성을 주장하는 분들의 비디오를 시청했다.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한다.
인간의 연약한 감성을 자극하고
얄퍅한 인과로 지성을 설득한다.
부분적인 사실을 몇 토막 말하면서 은글슬쩍 어거지 주장을 삽입한다.

대세를 거절하고 새로운 혁신의 물꼬를 틀었다는 자의적 영웅심에
스스로 도취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다.
역사의 표피를 전부요 본질인 것처럼 과장하는 것도 심히 어설프다.
초등한 지식과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왜곡하는 모습은 아예 불쌍하다.

간간이 성경 그대로의 문구를 언급하며 그동안의 거짓과 과장을
마치 말씀을 대하듯이 들으라는 교묘한 혼동 유발에는 능숙하다.
마지막 때에 말씀을 읽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릇된 해석 앞에
무방비로 무장해제 시키는 꼼꼼한 버릇은 어디에서 배웠을까.

평소에 교회에 불만이 있고 기분에 거슬리는 지도자가 있던 차에
그런 설교나 선동을 들으면 훅 갈 사람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겸손하고 온유한 인격과 삶과 연단과 눈물과 고난과 역사의 검증 없이
깜짝 등장한 기독교의 아이돌 같은 철부지 선동가를 조심해야 한다.

저마다 '요걸 몰랐지' 같이 철지난 구닥다리 어법으로
무슨 신비로운 내용을 비로소 발설하는 듯한 연출력은
고대나 중세나 근대나 지금이나 변하지도 않고 꾸준히 반복된다.
천상 기독교를 합바지로 깔보고 껌으로 여기려는 철부지 모습이다.

벌써 그런 걸 보고 민망한 마음이 드는 나이까지 먹었다...ㅡ.ㅡ

2013년 5월 6일 월요일

예수님의 지혜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7)

이 질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판정을 빌미로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할 저의를 가진 바리새인 및 서기관의 도전을 뒤집으신 예수님의 역습이다. 짤막한 단문의 위력은 대단했다.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외에는 정죄의 돌을 거머쥔 자들이 모두 떠나갔다. 여인을 두둔하면 모세의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여인을 무리들과 더불어 정죄하면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던 메시지와 스스로 모순되는 코너에 몰린 예수님의 사면초과 사태에 한판승 쾌재를 준비하던 자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다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다.

예수님은 논박의 달인이다.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지 않았고 현란한 언어의 수사학적 설득력과 예리한 논리의 날카로운 분석에 호소하신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접근법은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한번도 포기되지 않았던 인간의 죄악된 본성, 그것만 건드리면 어떠한 자랑과 교만과 자만도 수치의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인간 정체성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추악하고 은밀한 죄악상을 일일이 거명하며 고발하는 식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논적들의 심기는 뒤틀리고 '그런 적 없고 기억도 안난다'는 망각의 이름을 빗대어 탄력을 받은 거센 반발의 집단적인 물결을 감수해야 하셨을 것이다.

그런 반발을 촉발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느끼도록 하는 예수님의 어법에는 신적인 위엄이 있었고 변론할 때에 이웃의 세세하고 은밀한 치부는 드러내지 말라는 지혜자의 금언도 빛을 발하였다.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고 생각과 도모의 길을 아시는 '신인(God-Man)이신 예수님은 고발자의 무례하고 불경한 속내를 읽고 계셨으나 그것을 직접 겨냥하지 않으셨고 공의와 자비의 취사선택 구도에 휘말리신 것도 아니시며 인간과 대등한 자리에서 논증의 고지를 점하려고 논지를 펼쳐 결국은 인간적인 질문이 파놓은 함정의 틀에 갇히게 되는 대응도 피하셨다.

난관은 언제나 주님의 지혜가 번뜩이는 현장이다. 사랑과 공의 사이의 양자택일 반응을 기대하던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근본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던지셨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다. 인간의 묻고 답하는 논박의 문맥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인간적인 논증적 사고의 중단을 촉구하는 탈문맥적 어법이다. 물론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은 증인이 우선적인 정죄의 투석을 가하라는 신명기에 명시된 율법의 관행(more legis)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의미에 있어서는 1) 죄인인 인간은 심판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 2) 공의와 사랑은 대립이나 취사선택 문제가 아니라는 것, 3) 죄가 노출되고 은폐되는 것의 차이는 인간의 눈에만 그러하고 하나님의 눈에는 다르지 않다는 것 등이 암시되어 있다.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사람들도 만나지만 진리를 가지고 진리를 반박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후자가 더 난감하다. 성경에는 문맥에 따라 의미는 다르지만 동일한 표현들이 정반대의 의미로 구사되는 경우가 간혹 등장한다. 그럼 입맛에 따라 하나는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분들이 다가온다. 그들의 입장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셈이 되고 친구도 잃는 결과가 빚어진다. 반면 동의하면 성경의 다른 부분을 부정하여 결국 성경의 모순에 찬동하는 셈이 되는 난처한 상황에 봉착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자리에서 사태를 분석하고 해법을 추구하는 바리새인 및 서기관의 문법을 존중해 주면서도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성육신 사랑의 기조는 꺾지 않으셨다.

참으로 주님은 지혜 자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으나 예수님의 신적인 위엄 담지자는 아니며, 예수님의 어법을 우리의 입술로 카피해도 동일한 위력이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스게야의 아들들이 경건의 능력도 없이 바울의 모양만 취했다가 낭패를 당한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것이 최상이다. 달리 표현하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란 이야기다. 내 입술과 내 생각과 내 의지가 동원되나 주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발휘되는 수단이요 통로로서 주님께 드려져야 한다. 방대한 지식과 반듯한 논리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바울의 고백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는 게 해법이다.

주여, 언제나 나의 지혜가 되옵소서...

2013년 5월 5일 일요일

사랑과 공의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마9:9)

'세리와 죄인,' '세리와 이방인,' '세리들과 창기들' 같은 표현들은 당시 '세리'라는 말의 문맥적 의미를 제공한다. 교회의 권면에도 회개치 않는 자들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될 수 없는 부류의 전형이요, 자기를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이같이 하지 않느냐'는 산상의 교훈처럼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자기애의 대명사가 세리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법 속에서도 세리는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라고 하는 세리에게 다가가 '나를 좇으라'는 소명의 팔을 내미셨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의 초석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는 막중한 사도직을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중의 죄인에게 맡기셨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마태의 지파적 출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료가 빈약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다지파 소속의 예수님 혈통에도 최소한 두 사람의 '레위'가 있었듯이 '레위'라는 이름은 레위지파 밖에서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마태를 유다지파 소속으로 규정하고 코드인사 아니냐는 혐의를 제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치함'은 아니겠다.

아마도 '레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부르심을 받은 레위지파 소속처럼 하나님께 쓰여지면 좋겠다는 부모의 기대감 속에서 작명된 이름일 것이다. '레위'라는 이름 대신에 '마태'라는 생소한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도 당시 세리직의 야비하고 부끄러운 생리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칼빈은 추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을 세리가 부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다 현란한 유흥의 접대(a divitibus lautius accipi) 를 기대하며 부자들만 건드리는 분으로 간주했던 참으로 기발한 발상의 소유자도 칼빈의 시대에는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칼빈은 마태의 부르심을 계파나 부와 무관한 예수님의 값없는 선하심의 범례(specimen gratuitas suae bonitatis)이며 모든 부르심이 우리 자신의 의로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순전한 너그러움 (mera sua liberalitate) 때문이란 사실의 증명이며 전형(testimonium et typus)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어떠한 신분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은혜 앞에서의 평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옳고 정당하다. 그러나 누가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며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과 더불어 '모든 것을 버렸다(καταλιπὼν πάντα)'는 사실을 굳이 언급한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마태의 반응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마태가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totum dedisse) 복음의 모든 장애물을 버렸다고 설명한다. 죄인에게 구원과 최상의 부르심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죄인의 자리에서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죄의 자리에 머물러도 된다는 승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에서의 떠남을 의미한다. 세상이 괜찮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자리에 제도의 합법적인 돗자리를 깔고 머물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와 평등을 운운하는 것은 주님을 욕보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능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공의에 상응하는 우리의 변화도 수반한다. 사랑을 명분으로 공의를 짓밟거나 공의를 명분으로 사랑을 져버리는 것은 동일하게 위험한 편협이다. 타인에 대해서는 공의를 휘두르고 자신에 대해서는 사랑을 적용하는 것은 비겁하고 야비하다. 십자가의 제자도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타인과 자신 모두에게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공의가 입맞추는 제자됨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들을 한없이 사랑하되 죄와의 단절은 철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일상의 기독교적 재조명이 필요하다

1. 밥하고 빨래하고 설겆이도 도맡아서 하시는 '괴짜' 선배님이 계시다. 이렇게 전자제품 관련 가사들을 직접 행하면서 주부들의 고뇌와 필요를 경험하고 읽어내는 것이 30여종 이상의 특허출원 비법이란 알짜배기 정보도 곳곳에 전파하고 공유하는 분이시다. 그분에게 일상은 가치와 의미의 출처였다. 가장 일상적인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 부분의 소비자란 이야기고 거기에서 한 발짝만 앞서가면 대박이 난다는 건 삼척동자 고개도 끄덕이는 사실이다.

2. 플라톤의 철학은 이론의 상아탑 축조와는 정반대로 실천적인 삶이라는 목소리를 내시는 참으로 존경스런 전천후 박학다식 철학자가 계시다. 철학의 중년을 넘어 완성의 고지에 거의 도달하신 그분의 붓은 지금 일상 번역으로 분주하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웃고 자고 주거하고 옷입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은 그분이 판독하는 최상의 정직한 철학 텍스트다. 지금까지 그분이 생산한 철학 이야기는 마치 일상 벗기기의 준비운동 내지는 예고편이 아닌가도 싶다.

3. 연구 실험실이 목양실 옆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천재 신학자가 계시다. 과학은 신학의 마지막 대화자로 모든 학문을 블랙홀 수준으로 흡수하고 있으며 일상은 그런 대통합적 과학의 최첨단 분야가 되었다는 문명의 현주소를 고도의 경건과 박학으로 읽으시는 분이시다. 기라성 같은 세계적인 노벨상 수상 및 입후보 과학자들 모임에서 발표도 하시고 논문도 게제하는 그분은 일시적인 기적을 일상이란 항구적인 기적의 맛배기라 하시었다.

4. 사도들도 풀기 어려운 것이 있어서 어거지 해석의 위험성을 경고해야 할 정도로 진리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의 극대치를 논구한 사도가 있었다. 그는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너무도 깊어서 측량할 수 없고 그의 길은 추적되지 않는다는 백기투항 멘트로 교리적 논의를 종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삼층천에 준하는 경지까지 이르렀고 그러므로 우리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하나님 경외와 경배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5. 몸은 일상의 다른 표현이다. 최고의 사도가 신구약 전체의 진리를 종합하고 그것에 준하는 우리의 마땅한 도리와 본분으로 몸을 산 제사로 드리란다. 일상을 주목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을 사소한 것, 무가치한 것, 평범한 것, 지루한 것,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기 싶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높이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일상에서 찾으신다. 하나님이 주목하면 사단도 주목한다. 하나님의 기쁨이 큰 것일수록 사단의 속임수는 보다 간교하다.

6. 일상은 너무도 소중하다. 문화는 일상이다. 문화의 중심부에 가정이 있다. 가정이 무너지면 문화가 무너진다. 사단이 가정에 왜곡과 파괴의 군침을 흘리는 건 당연하다. 지금 가정의 정체성과 질서가 심히 흔들리고 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지식과 교양과 양심과 문화를 배양하는 가정의 소중함이 무시되고 세상에서 매겨진 가치의 유행성 순번을 따라 죄마저 인간의 위엄과 존엄성 일번지로 간주하는 사회적 합의점이 세상 곳곳에서 선진국의 척도처럼 앞다투어 공포되고 있다.

7. 죄는 죄다. 다윗의 고백처럼 죄는 본질상 하나님을 향한다. 죄의 여부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늠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라고 규정하신 것을 죄라고 고백해야 한다. 여기에 다른 이야기를 섞어서는 아니된다. 사실 가정보다 근본적인 일상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본성이 죄로 물들었다. 우리는 본성의 차원까지 죄와 친숙하다. 그래서 가정이 없는 사람들도 피해갈 수 없는 일상이 본성이요 죄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인간의 본성과 죄문제의 왜곡은 일상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겠다.

8. 예수님은 죄라는 범인륜적 일상을 해결하러 오셨는데, 죄악된 본성에 왜곡이 가해지면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은 헛다리를 짚으신 일이겠다. 만세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죄에서의 자유라는 구원도 불필요한 일이니 세상의 일에서도 통치와 섭리의 손을 거두셔야 하시겠다. 죄문제를 건드리면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님의 존재와 행하시는 일에 불경한 도전의 칼끝을 겨냥하는 셈이겠다. 과도한 비약적 풀이라고 반박해도 좋다. 원하시는 대로 생각해도 자유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9. 나에게는 일상이 너무도 소중하다. 희귀한 전문가용 진리의 특정한 조각이 아니라 모든 진리가 개입하고 합력하는 현장이 바로 일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죄도 거기에 개입한다. 일상이 너무도 신비롭다. 오늘날의 과학이 신학보다 앞질러 일상에 눈독을 들이고 최상급 의미를 투하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일상의 기독교적 재조명이 저자권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겠다. 일상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10. 삶을 철학으로 이해하는 철학자는 모든 분야에 관여한다. 일상을 신학의 대상으로 주목하는 신학자도 모든 곳을 진리로 조명해야 한다. 신학의 현장은 일상이다. 진리가 진동하는 현장도 책상과 학회가 아니라 일상이다. 신학의 목적을 실천으로 이해한 믿음의 선배들이 제공하는 통찰은 수백년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번뜩인다. 사람은 사람이고 동물은 짐승은 짐승이고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이고 남편은 남편이고 아내는 아내이고 부모는 부모이고 자녀는 자녀인데 이걸 강조하면 법에 저촉되는 뒤틀린 일상의 시대가 지금이다.

11. 할 일이 태산이다. 죽는 날까지 신학의 붓을 꺾지 못하겠다. 

늘상 봄이다

자식들을 데리고 수영장에 갔다.
여름 등살에 떠밀린 봄이 애처롭긴 해도
이미 득세한 여름 선언을 늦출 수는 없어서다.

겨울동안 굳은 몸의 삐그덕 아우성, 난리가 아니었다.
심각한 체력저하 상태를 물 속에서 확인했다.
얼마나 춥고 얼마나 떨리고 얼마나 숨차든지...허걱

그러나 아이들의 웃는 모습은 늘 봄이어서 좋다..

2013년 5월 4일 토요일

신학자의 고민

신학을 공부하며 늘 뇌리의 아랫목을 차지하는 고민이 있다.

1.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면서 관심과 가치의 구심점이 성경의 핵심에서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어느 분야를 섭렵하고 나만의 고유한 지적 상아탑을 구축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흡입하며 고지의 나른한 쾌감에 잠기는 방향으로 관심이 휩쓸린다. 인간문맥 속에서 합의되고 설정된 임의적인 기준에 희비를 걸고 매달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코의 호흡으로 연명하며 훅 불면 날리우는 인생의 경박이 한없이 부끄럽다.

2. 신학에서 변증은 필연이다. 어떠한 이슈든 시시비비, 옳고그름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은 신학의 실천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변론의 각을 세운다고 해서 경건의 근육이 단련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엉뚱하고 기형적인 기질이 인격과 삶에 군살처럼 박힐 위험성만 더욱 높아진다. 그렇다고 침묵이나 무관심은 더더욱 능사가 아니겠다. 하여 어떤 특정인, 특정학파, 특정시대 신학이나 신앙의 문제에 개입하고 해명하는 것은 불가피한 과제이되 성경 전체의 진리가 고백되고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도록 늘 전역사의 세계교회 전체를 의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3. 괜찮은 믿음의 선배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파괴하는 다양한 이단들의 광란을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변증의 입술을 열고 논박의 붓날을 세웠지만 상대방이 내세우는 그릇된 논지의 허리를 꺾는 것 자체를 능사로 여기지를 아니했다. 묻고 답하는 중에 무의식적 타협과 수긍에 매몰되어 진리의 순수성과 엄밀성이 무너지는 변론의 생태적 한계를 간파하고 있었기에 완급과 원근을 적당하게 조절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잘못과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책망의 채찍도 필요하고 교훈의 당근도 필요하며 의로움의 구축과 올바름의 정립도 필요한 균형 말이다.

4.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문헌들을 읽고 다양한 사안들과 마주치고 다양한 필요들을 발견한다. 다 반응하며 살기는 곤란하다.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가 유한하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선택과 집중의 기준과 방편이 궁금하여 물음의 일급 리스트에 올려두고 줄기차게 고민한 끝에 성경이 모든 역사와 모든 만물의 헤아릴 수 없도록 무수한 것들에 대한 최상의 선택과 집중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성경은 세세한 것들을 일일이 다 건드리지 않으면서 온 세상과 전 역사를 다 커버한다. 놀랍고 신비롭다. 성경에 매달리면 몸이 열이라도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들이 백기로 투항한다.

5. 성경 텍스트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한 이오타만 씹어도 진리의 황홀한 맛에 곧장 중독된다. 내 영혼에 달기가 송이꿀의 당분을 무색하게 한다. 달콤하던 모든 것들의 달콤함을 제거한다. 모든 필요가 거기에서 해소된다. 여기에서 소박한 해법을 발견했다. 변증이나 논박은 특정한 사안에 몰입되어 두뇌와 입술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공격하고 입술을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택과 집중이 내 인격과 삶에 체화되고 축적되어 그 자체가 상대방의 인격과 삶에 발견적인 해법이 되는 식이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6.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진리가 인격과 삶으로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변론의 생리는 머리와 입술을 분주하게 하여 우리 자신이 먼저 진리의 터와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선행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생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함정이다. 사단은 이런 논쟁에서 지더라도 우리가 변론의 덫에 걸리기만 하면 궁극적인 면에서는 이기는 승부수를 노리고 있다. 이는 사단이 깔아놓은 논쟁의 판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조심스런 이유겠다. 그래서 전인격적 무장이 우선이고 필요에 따라서만 언어와 붓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겠다.

7. 당장 반박의 피를 토하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것 같은 긴박한 상황들이 많이 발생한다. 이때 침묵은 비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진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등판이 위험하다. 웨민 고백서가 산출된 이후에 곧장 영국 본토에는 실종되고 그렇게도 우람한 진리의 체계가 뿌리마저 뽑히는 기현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가볍지 않고 단순한 것도 아니다. 지식의 생산과 진리의 파종이 항상 병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 말이다. 물론 진리가 어느 시대나 지역에 심겨지는 것은 기적이고 은혜이다. 진리를 머리만이 아니라 심장과 수족에 보관하는 건 은혜 수혜자의 도리겠다.

8. 보다 심오하고 높은 진리의 골격을 다시 생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역사 속에는 이미 주님께서 허락하신 교훈들로 충분하다. 그것을 전인격과 삶에 담아내는 것은 교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사 속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 진리의 고백들을 입술에 올렸다고 신학자의 소임을 접는다면 큰 오산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한 시대의 심장을 관통하게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자신의 심장에 담아낸 진정한 진리의 사람들이 나타나야 가능하다. 사단은 이것을 경계한다. 생명보다 귀한 진리를 시끄러운 논쟁의 꺼리로 매도하는 일에 능란하다. 진리가 논쟁의 도마 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9. 교회는 진리의 터와 기둥이다. 진리는 교회의 신분이고 인격이고 삶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교회가 이 정체성을 포기하면 진리가 무너진다. 천재나 영웅 몇 사람의 활약으로 때우려는 창조적 소수 발상은 접으시라. 하나님의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동일한 비중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것은 일회성 운동이나 이벤트가 아니기에 선동이란 접근법도 접으시라. 우리의 방법론은 진리의 터와 기둥으로 각자가 선 자리에서 일평생 살아내는 삶이어야 한다. 우리가 진리의 터로 닦아져야 하고 기둥으로 세워져야 한다. 

2013년 5월 3일 금요일

진주상인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샀느니라 (마13:46)

예수님은 땅의 신비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천국의 심오한 세계를 비유로 설명하는 중에 농부와 상인을 언급한다. 농부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을 우연히 발견했고 상인은 진주라는 특정한 대상을 찾다가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천국의 성격은 수동성과 능동성이, 소극성과 적극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동일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밭과 진주를 접수했다.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도 아니고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게 예수님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오직 선택하신 백성에게 지각과 출입이 허락되는 전적인 은혜이다. 농부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이 있는지도 몰랐었고 필요도 몰랐었고 구하지도 않았었다. 그런 보물과의 만남은 인과를 읽어낼 수 없을 때에 우리가 이름을 붙이는 '우연'이란 섭리로 찾아왔다. 그래서 은혜인 줄도 모를 정도의 은혜이다. 보물이 평소에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눈에는 가려졌던 것임에 분명하다.

상인의 경우에는 다르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떨어지는 설명이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상인이 보였던 진주의 집요한 추구는 자신의 직업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가치추구 활동의 일환일 뿐이지 천국의 실체를 스스로 알고서 자기 힘으로 찾아낸 행보로 보기는 곤란한다. 단적인 증거로서, 기대하지 못했던 "극히 값진 진주"와의 일상 단절적인 만남과 자기의 모든 소유까지 댓가로 지불하는 극단적인 거래는 평소의 이윤추구 행위와는 구별된다. 진주의 발견이 일상의 연장처럼 보이는 것은 범부들도 삶의 자리에서 혹 더듬어 쉬 발견할 수 있도록 가까이 오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봄이 타당하다.

천국이 은혜로 알려지고 주어진다 해서 장터의 싸구려 물품으로 취급하는 것은 무례하다. 기존의 모든 삶과 가치를 무익한 것으로 여겨야 할 정도의 값진 진주가 천국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제자도의 필수 항목으로 언급되고 있음도 동일한 맥락이다. 김성수 교수님은 이와는 대조적인 사례로서 천국을 팥죽 한 그릇과 거래한 에서의 망령된 행실을 꼬집었다. 천국을 배설되고 말 먹거리 수준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우리에게 생존의 기반이 바뀌었다. 밭을 접수했고 기존의 진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진주 취급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천국과 세상의 적당한 지점에서 어정쩡한 양다리 걸치기 자세로 미지근한 삶을 지속한다. 생업을 접고 집을 팔고 가족을 화끈하게 떠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주님께서 거하시는 우리는 각자가 땅에서의 천국이다. 삶의 양태는 동일해도 질은 현저히 달라졌다. 요지는 그런데도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진주를 산 상인의 처신처럼 천국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거다.

슬프지만, 어쩌면 아직 우리가 천국이 뭔지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런건가! 

2013년 5월 2일 목요일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이 구절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포기할 줄 모르는 과부의 호소 이야기로 강조하고 반전 접속사 '그러나'를 던지신 이후에 내리신 상당히 단절적인 인상을 풍기는 이야기의 결론이다. 동문서답 어법의 달인이신 예수님의 의중이 궁금했다. 김성수 교수님의 풀이가 압권이다. 교수님은 먼저 과부가 호소하는 내용을 주목한다. 헬라어 동사 'ἐκδικήσω'는 '원통함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라는 개념에 착안하여 과부의 호소는 민생고 해결이 아니라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신원하여 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야기의 핵심은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 험하고 어렵고 힘들다는 것과 이러한 경우 신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와 믿음'을 교훈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인자가 올 때'라는 것은 '믿음과 사랑이 점점 식어가는 때일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요 또한 주의 재림이 가까운 때일수록 세상은 더욱 악하고 부패할 것을 미리 알리시는 말씀이다. 마지막 때가 임박하면 세상은 더욱 악하고 부패할 것이고, 우리의 눈길이 어디에 머물든지 그곳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 나라와 약속에 대한 기대가 식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함을 지적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김성수 교수님은 '세상이 너무 악하여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듯하여도, 악한 세상 가운데서 천지간에 홀로 서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마치 고아나 과부와 같은 억울한 처지에 있다는 생각에 젖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흔들리지 않고 완성을 향하여 전진할 것이므로 신자는 여전히 자비롭고 의로우신 재판장의 긍휼과 은혜와 도우심을 하나님께 기대하고 간구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온 세상이 사방에서 종말의 끝자락 장면을 연출하는 듯하여도 화들짝 놀라거나 기이한 일 벌어진 것처럼 떠들석할 필요 없다. 공법이 인진으로 변하고 불법이 합법으로 둔갑하고 반듯한 제도의 옷을 입고 공공연한 거리를 활보한다 할지라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종말론적 낭패감에 주저앉을 필요가 없다. 물론 종말은 성경의 핵심적인 교훈이며 성도의 믿음에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는 진리이다. 그러나 고대나 중세 및 종교개혁 시대에 횡행하던 경악과 공포의 사건들에 비한다면, 지금은 종말론의 '종'자도 언급하기 곤란한 평화의 시대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며 오늘날의 혼탁한 시대상에 구린내 나는 숟가락을 얹어 무너진 리더십을 관리하고 어떤 모양이든 한 몫 챙기려는 시한부 종말론이 심지어 멀쩡한 기성교회 강단에서 예의 그 역겨운 고개를 내밀도록 멍석을 깔아서는 안되겠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보고자 하시는 믿음을 예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에는 나를 안심시킬 증거가 도무지 감지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오직 하나님 자신에만 근거한 하나님 신앙을 주님은 보시기를 원하신다.

그런 신앙은 항상 낙망하지 않는 기도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름다운 기도문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마8:3)

문둥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를 갖추며 청원의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황금의 입술'이라 불리우는 교부는 언어의 귀재답게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시면(si rogaveris Deum),' 혹은 '주여 깨끗하게 하소서(domine, munda)'가 아닌 예수님 자신의 신적인 의지를 존중하고 신적인 권능을 고백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일거양득 혹은 '일타쌍피' 어법을 관찰하고 격찬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산상에서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와 사랑과 신실함을 가르치고 하산하신 이후에 벌어졌다. 산에서는 입술로 교훈을 전하셨고 아래로 오셔서는 행위로 교훈을 실천해 보이셨다. 예수님의 교훈은 삶과 동일했다. 이는 주님께서 선보이신 교육학의 시청각적 극대화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을 만지셨다. 이는 부정한 사람을 만지지 말라는 율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였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행위는 때때로 율법 폐기론의 범례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자신의 주장을 성경에 강요하길 좋아하는 무리들의 습관성 문법일 뿐이다. 예수님은 깨끗해진 그에게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제사장의 확인을 받으라고 하셨다. 율법 폐기자가 아니라 완성자의 모습이다. 여기서 문둥병의 부정함은 인간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부정함의 상징이며 제사장의 확인을 명하신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이고 본질적인 실체이며 궁극적인 완성임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 대목에서 황금의 입술은 우리가 하나님의 덕에 이르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실질적인 장애물은 육신의 문둥병이 아니라 '영혼의 문둥병(animae lepram)'이 문제의 원흉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정한 자를 만지신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litteram legis)를 범하기는 하셨으나 본래의 취지(propositum)를 범하지는 않으셨다. 문둥병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이나 흉한 모습으로 인해 겪는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부정함 때문에 이스라엘 진 밖으로 쫓겨나야 하는 영적인 죄문제를 상징한다.

의지나 말씀만이 아니라 굳이 손의 접촉으로 질병을 치료하신 것은 예수님이 율법의 고의적인 폐기자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입안자요 해석자요 완성자요 심판자가 되신다는 사실의 선포이며 확증이다. 바울의 지적처럼 율법은 범법 때문에 '더하여진 것'이다. 당연히 율법은 의술이나 윤리나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범죄와 직접 관계한다. 문둥병 조항도 예외일 수 없으며, 당연히 문둥병의 치료는 죄문제의 해결과 유비적인 연관성을 갖는다고 이해함이 합당하다.

'예수님이 의지만 하신다면 무엇이든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문둥병자 입술에서 나온 고백과 청원의 탁월함이 번뜩이는 대목은 바로 여기이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의 주체요 죄사함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신 응답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예수님의 행적은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지극히 사소하게 보이는 행위나 언행이나 거동도 율법 해석의 단초이다. 과연 모세의 기록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예수님은 율법의 해석이라 함이 정당하다.

오늘은 복음서가 무더위의 급습을 황급히 따돌리는 듯한 매력을 보란듯이 발산한다. 최소한 주님께 다가가는, 마음에 쏘옥 드는 근사한 기도문 한 소절은 건졌다. "주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무슨 신앙고백 같은 평서문에 불과해 보이는데 나에게는 너무도 매력적인 기도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