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악인의 존재에도 목적은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지으시되 심지어 악인도 악한 날에 그렇게 하시었다 (잠16:4)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위해 지어졌다. 악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입장을 지혜자는 피력한다. 함의가 심오하다.

먼저,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사건과 사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유쾌한 일이든 불쾌한 일이든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올바르게 이해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모든 것을 사려할 때 그것의 가장 정확한 가치와 의미에 도달한다. 이는 나의 가치관과 나의 기호와 나의 유익에 근거한 자기 중심적인 눈으로는 무엇을 보더라도 굴절된 의미와 왜곡된 가치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가치관에 충돌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의 기호에 거슬리는 것은 거침없이 거절이나 증오로 응수한다.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유로 사물과 사태와 사건에는 무질서가 초래되고 왜곡이 조장되고 갈등이 형성되고 다툼이 유발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문제의 원흉은 결코 자신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해서는 문제의 매듭이 풀어지지 않는다. 먼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운영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존재의 가치를 신적인 목적에의 기여에서 찾고 사태나 사건의 의미를 그런 관점으로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면 문제의 핵심이 파악된다. 문제의 근원은 우리의 가치관과 유익과 기호가 죄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하나님의 목적과 가치관과 기호를 나의 것으로 삼는 게 최상의 해법이다.

이런 지혜를 가지고 시련과 풍랑과 아픔과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 어디를 가도 나를 너무나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학교든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제거하는 것은 기독인의 해법이 아니다. 세상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대체로 이혼이나 호적을 파내거나 파면이나 퇴직이나 퇴학이나 투옥이나 이사 등의 일시적인 처방을 동원한다. 그러나 기독인의 접근법은 다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생각한다. 문제의 가까운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먼저 더듬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즐거운 상황도 함정일 수 있고 괴로운 상황도 선물일 가능성을 수용하게 된다. 심지어 악한 사람들의 사악한 행동들이 사방을 우겨싼다 할지라도 악한 날에 하나님의 계획이 수행되는 수단들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으나 이유를 불문하고 그게 최상의 해법이다.

아무리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어도, 아무리 조화되기 어려운 배우자를 만났어도, 아무리 고약한 상사가 괴롭혀도, 아무리 순종하지 않는 자식들이 말썽을 부려도, 아무리 난폭한 급우가 옆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는 경우는 없기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알려지는 계기가 아닌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맞이할 기대와 설레임이 절망과 좌절을 대신한다.

2014년 12월 24일 수요일

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다윗의 처신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삼하16:10)

간음과 살인의 주범인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칼을 피하여 도피하는 중이었다. 충신들과 백성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몰락한 사울가의 사람 시므이가 정색을 하고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즉 1) 다윗은 왕이었던 사울을 살해하고 권좌를 찬탈하려 했고, 2)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징벌하는 차원에서 나라를 다윗의 손에서 빼앗아 반역자 압살롬의 손에 넘기고자 하셨으며, 3) 다윗은 '벨리알의 사람'이기 때문에 '꺼지라'는 독설까지 내뿜었다. 그러나 전부가 사실 무근이다.

첫째, 다윗은 권세에 눈이 어두워 사울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그마한 옷자락 한 조각의 제거로도 죄책감에 시달렸던 인물이다. 둘째,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윗의 손에서 압살롬의 손에 넘기고자 한 적이 없으시다. 셋째, 다윗에게 돌려진 '벨리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호칭이며, '꺼지라'는 말도 몰락한 시므이의 입에서 나와서는 아니되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에게는 극도로 부당한 망언이다.

무자격자 입에서 사실과 무관하게 출고된 저주를 들은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죽은 개'와 같은 시므이의 무엄한 악담을 저지하기 위해 그의 목을 베겠다고 나셨다. 이는 누가 보아도 지극히 충신다운 반응이요 지극히 정당하고 상식적인 처신이다. 그러나 저주의 대상인 다윗의 해석은 상이했다. 시므이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으며, 그가 저주하는 것은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시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면서 관계성의 묘한 선긋기에 들어갔다. 심지어 자신의 충신들을 향해 '사탄'이란 표현도 불사했다.

말씀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죽은 개'와 '벨리알의 사람'과 '사탄'이란 부정적인 호칭이 남발되고 있는 이 상황에 한국교회 현실이 묘하게 중첩된다. 교회의 지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 간음이나 살인을 저질르면 무수한 목소리가 이 사실을 지적한다. 과하게 격분한 목소리는 '벨리알의 사람'이란 호칭을 투척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사실의 경계를 훌쩍 넘어선다. 이에 대하여 그 지도자의 충신들은 사실에 근거하든 안하든 사실을 발설한 모든 목소리를 '죽은 개'의 짖음을 규정하고 목을 제거하려 앞다투어 달려든다.

사태가 이 정도로 발전하면 지도자는 다윗처럼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충성심 차원에서 발동한 측근들의 격분을 조기에 진압하며 적당한 선긋기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오히려 측근들의 충성심을 부추기고 측근들 선에서 사태가 해결되길 은근히 바라면서 어떻게든 엮이지 않으려고 교활한 침묵이나 비겁한 은둔으로 응수한다. 측근들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으면 무고죄를 들먹이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발설한 입술까지 고소고발 조치에 돌입한다. 법적인 면죄부가 발부되기 전까지는 철회하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되, 고소의 철회가 넉넉한 관용으로 둔갑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면 마치 아량을 베풀듯이 고소장을 보란듯이 찢는 가증함도 연출한다.

사람은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도 저지른다. 그러나 인품과 신앙의 격은 그 사실에 대한 당사자의 반응에서 좌우되는 법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했던 사람이다. 품행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최고의 자격을 갖춘 선지자 나단의 따끔한 지적만이 아니라 지극히 무자격한 사람 시므이가 사실에도 근거하지 않은 방발을 일삼는다 할지라도 그런 가까운 원인에 반응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과 그의 의도를 의식하며 읽어내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그의 정직과 겸손과 온유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다윗의 이런 처신이 심히 목마르다. 

2014년 12월 22일 월요일

창조의 메시지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도다 (시113:4)

비행기를 타고 고공으로 올라갈 때마다 놀이기구 타는 즐거움이 아니라 높은 곳은 사람이 머물 곳이 아니라는 낯선 느낌과 마주친다. 하나님은 우리 몸의 일부로서 발을 지으셨다. 발의 창조는 인간이 접지하여 살아가는 존재라는 암시이다. 이는 인간이 높을수록 불안하고 아찔하며, 낮은 곳일수록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과도 하모니를 이룬다. 이것이 발의 목소리다.

창조는 하나님의 첫번째 계시이다. 시인이 신묘막측 범주로 분류한 인간의 지으심은 그 자체가 이미 메시지다. 시인과 유사한 맥락에서 바울도 지어진 모든 만물이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전하는 메시지의 보고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읽어내지 못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인간의 미련함과 우매함도 꼬집는다.

모든 만물과 역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여호와가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도다'는 싯구는 우리에게 '비교급 인식론'을 제안한다. 즉, 역사와 문명이 아무리 화려하고 지고해도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높으시며 하늘이 제 아무리 끝없이 높더라도 그것을 지으신 분은 그것보다 더 높으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높은 곳에 앉으신 이가 없다고 시인은 선언한다. 그러나 만물과 역사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그것들과 하나님 사이에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격차에서 종결되지 않는다. 메시지의 방점은 그러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세우시고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세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있다.

역사와 만물은 땅의 어떠한 것으로도 표상할 수 없도록 지고한 하나님의 실체(essentia)에 대한 지식도 증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곳에서 언제나 만물과 역사를 붙드시며 신실한 개입으로 주도하사 지고한 가치를 산출하는 계기와 수단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역사(opera)에 대한 지식도 증거한다. 자연과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이 다르지가 않다던 바빙크의 지적은 감미롭다.

일평생 보아도 보지 못하고 무시로 들어도 듣지 못하고 항상 마음으로 생각해도 깨닫지를 못하는 이들에게 시인의 노래는 엄중한 책망과 애틋한 도전이다. 지고한 분이시나 천지에 충만하사 늘 거기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감사하며 영화롭게 하는지도 돌아보는 이 아침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만물과 역사의 부지런한 외침에 귀를 기울인다. 

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2014년도 결산 (감사제목)

나에게는 2014년 전체가 통째로 감사의 제목이다. 아픔과 눈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으로 행복하고 풍성하고 다사다난 했던 한 해였다. 부족하고 무자격한 자에게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복들을 세어보니, 그 구체적인 내용들 중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3월: 예수가족 교회에 가족으로 합류
3월: 개혁주의신학연구소 설립
3월: 합신과 대신에서 강의
4월: 종교개혁과 스콜라주의 역서(부개사), 출간
6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서론(부개사), 출간
9월: 액츠에 조직신학 교수로 임용
9월: 10년의 유학생활 종료/ 귀국과 순적한 한국적응
12월: 미러링: 더 깊은 묵상(세움북스), 출간
12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서론, 한국연구재단 우수도서 선정
12월: 15년만에 이루어진 목사 안수
12월: 북콘서트 예정, 독자와의 아름다운 만남 기대만빵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서
1. 페북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사귐과 소통
2. 한국과 미국에서 사랑하는 이들과의 만남
3. 액츠에서 외국인 학생들과 주 안에서의 사귐

Bruce Lee is Legend!


2014년 가을학기 종료

채점과 성적입력, 지난 주 미국에 와서 가장 몰두했던 일들 중의 하나였다. 2014년도 액츠의 가을학기, 오늘에야 종료했다. 좋은 학교에서 소중한 학생들과 귀한 교훈들을 큰 은혜 가운데서 나누었던 한 학기였다. 물론 학생들과 보다 풍성하고 입체적인 소통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건 다음 학기를 설레임 속에서 기다리고 기대하게 만드는 빌미요 에너지다.

액츠에서 보낸 가을학기, 참 행복했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부르심을 받아 기도와 말씀에의 전무를 장려하는 처소에서 기도와 말씀에 실컷 전무할 수 있었던 학기였기 때문이다. 주변의 큰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눈물과 신음과 격분이 영혼의 뇌관을 건드려 폭발하기 진전까지 갈 때도 많았지만 이는 순례자가 걷는 길에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라 생각하며 그것도 감사하다.

이제 본격적인 방학이다. 국화꽃 한 송이를 피우려고 봄부터 울었던 소쩍새의 심경으로 2015년도 봄학기 준비에 돌입할까 한다. 보다 더 설레이는 학기를 위하여~~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적당한 무지의 제맛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20:24)

이 문구는 '사람의 걸음이 주께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말 이후에 등장한다. 즉 사람의 행보 혹은 인생이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에 자신의 미래가 사람에게 맡겨지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지식도 인간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일대기는 인간을 비롯한 어떤 피조물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으며, 땅에 기초한 미래사의 올바른 예측은 가능하지 않다. 이게 성경이 가르치는 인생에 대한 이해의 기본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와 비례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하나님이 배제된 어떠한 삶의 뜻풀이도 헛소리 내지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사실 헛소리와 속임수는 지성적인 고상함의 격 갖추는 일에 민첩하고 꼼꼼하고 성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매끄러운 논리력과 치밀한 꼼꼼함과 감미로운 설득력을 구비했다 할지라도 회칠한 무덤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한다.

지혜자는 인생이 신적인 섭리의 손아귀에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길을 하나님이 계시하신 섭리만큼 알고 적당히 무지한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무지에 머물라는 것도 아니고 그 무지에 정당화나 면죄부를 발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점궤나 사술의 신공을 맹렬히 발휘하는 '영험한' 이들에게 두툼한 복채를 투척하며 인생의 판도라 상자를 개봉해 달라고 매달릴 것을 주문하는 것도 아니다.

위에 언급된 본문의 의도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라는 것이다. 인생의 근원이요 보존자요 주관자요 심판자인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캄캄한 무지 속에서 막막한 인생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우회적인 표현이다. 무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갈증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깊을수록 인생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장래사에 대해서도 그만큼의 깊은 평강과 위로를 얻는다. 하나님과 밀착되면 될수룩 인생의 윤택과 부요함도 그만큼 증대된다.

사람의 길이 가리워져 있음은 하나님의 심술이 아니라 자비로운 섭리이다. 무지는 수치와 두려움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밀착에의 초청이다.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에게 부분적인 앎과 희미한 지식이 주어진 것도 이러한 섭리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지식과 논쟁의 세계가 아니라 경외와 경탄의 자리로 인도한다. 나는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 오히려 여호와 경외를 위해 미래는 적당한 무지의 베일에 가리워져 있어야 제맛이다.

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신학을 공부할 때

1.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일인지를 살핀다. 성경이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일들은 호기심에 경도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아서다. 신학적 작업은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들에 집중하고 그 주제들을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

2.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게 조력하는 것인지를 확인한다. 상당수의 신학적 작업들이 성경을 더욱 혼잡하게 만들고 성경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성경을 적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학적 작업이 우리로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말씀이 달콤하게 되고 말씀에 더욱 밀착하게 되어야 정상이다.

3. 성경을 가감하는 것은 아닌지를 검토한다. 성경이 분명히 언급한 내용을 침묵하게 만들거나 성경이 설정한 인지의 경계선을 함부로 출입하게 만드는 오만과 방자가 신학적 연구라는 이름으로 학계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일이 최고의 신학적 작업이다.

4. 하나님께 실제로 영광이 되는 일인지를 성찰한다. 신학자는 인간적인 호기심과 학술적인 영달에 홀려 자극적인 의혹풀이 및 대중적 관심의 구걸 차원에서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심하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역행하는 선동적인 테제들을 투척하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아서다.

5. 교회에 유익이 되는 일인지를 살핀다.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고 기독교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신학적 활동이 적지 않아서다. 모든 신학적 작업은 교회의 유익을 지향해야 한다.

6. 나의 경건을 증진하는 일인지를 진단한다.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온전하게 세우는 것과 무관한 일에 보혈의 값을 지불한 생명의 너무나도 소중한 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신학이 경건을 지향하고 경건이 신학을 독려하는 것이 정상이다.

7. 세상에 빛과 소금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인지를 가늠한다. 우리는 온 세상에 대하여 복의 근원이며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의 선교적 소명이 외면된 신학적 활동은 교회를 고인 물처럼 부패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신학교의 커리큘럼 확립과 교회의 모든 활동과 개인인의 인생에도 이상의 사안들을 신중히 검토하면 좋겠다. 

2014년 12월 17일 수요일

공의로 준비하라

의가 주의 앞을 지나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라 (시85:13)

지금은 공의와 올바름이 실종되고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는 시대다. 심지어 진정성과 정직성도 속임수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동원된다. 그러나 비록 사람은 미혹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표면적 진정성과 정직성의 가증한 연출로 하나님도 속이려는 시도가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면...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사실 의로움 상실의 현장은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도 해당된다. 의가 주의 앞을 지나가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법인데, 의의 부재는 주님을 거부하고 앞 길을 감히 훼방하는 방식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의 방식이 참으로 교묘하다. 주님의 걸음을 막아 서겠다는 고의적인 의도가 없더라도 결과적인 면에서는 교회가 훼방자일 수가 있어서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생각난다. 불의를 외면하지 않았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적극적인 공의를 선포했던 마지막 선지자다. 주의 길은 그렇게 예비하는 거다. 가시적인 부흥과 덩치 불리기를 위해 공의와의 결별도 불사하는 교회를 요한이 보았다면 아마도 그 시대보다 더 준엄한 불호령이 떨어졌을 게다.

요한이 죄에 합당한 회개의 공의를 외침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예비한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교회도 최소한 요한이 쏟아낸 공의의 외침으로 그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현실은 주님의 오심을 예비할 마음이나 의식이 없다고 의심될 정도로 하나님의 공의에 무신경해 보인다.

한반도에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거짓 예언자의 광란이 비록 너무나도 유치하고 어처구니 없는 사태지만 하나님의 의중에는 심판의 날에 임할 진노의 경종 차원에서 허락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날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이후로 지금까지 종말의 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땅한 도리를 일깨우는 경종 말이다.

주님은 공의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주의 역사는 공의가 예비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공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십자가로 말미암는 의의 행보에 온 교회가 전심을 기울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시인의 간명한 어구에서 촉발되는 아침이다.

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주인의 심판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인 탓입니다 (시82:8)

시인은 하나님의 세상 심판권이 모든 나라에 대한 그의 소유권에 근거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세상에서 불의가 자행되면 하나님의 소유물에 불의를 가했다는 의미이다. 귀한 통찰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유일한 소유자다. 이 점에서 하나님은 땅의 판단자와 현저하게 다르시다. 하나님은 주인의 신분으로 만물과 만사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분이시다. 이는 그의 판단이 어떠한 것이라도 의로우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불의한 자가 갑부의 대로를 걸으면 대체로 사람들은 심기가 뒤틀린다. 우리가 가진 지상적인 공의의 잣대가 무시되는 듯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악인들이 소원에 지나도록 소득을 얻고 재산은 천문학적 단위로 증대되고 기력은 쇠락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임종의 때에도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현상들이 안구에 걸리면 누구나 의분이 솟구치는 게 정상이다. 어떤 식으로든 의분은 적당히 배설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물과 역사의 주재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모든 것에는 주인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불공정한 판단을 내리고 악인의 간사한 낯을 봐주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악인의 야비한 손에서 건지지 않는다면 이는 주인의 의도를 짓밟는 것과 일반이다. 공의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조롱하는 악들이다. 모든 만물은 창조자요 소유자인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능력을 선포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목적에 위배되는 수단의 모든 오남용은 주인의 진노를 축적하는 행위이다.

포도원 주님이 생각난다. 일터에 일찍 투입된 일꾼이나 업무마감 직전에 투입된 일꾼이나 동일한 금액으로 보상해 준 주인을 천국으로 묘사한 복음서 메시지는 주인의 자격으로 모든 것을 임의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선포하고 있다.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도 강요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자유성을 증거한다. 인간의 절대적 자유는 방종과 부패를 낳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의롭고 언제나 옳으신 분이시다.

세상에 모순과 부조리가 아무리 관영해도 나는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을 의심하지 않는다. 주인의 자격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판결이 분초마다 일어나고 있음을 아무런 증거가 없더라도 확신한다. 나아가 이런 소극적인 인정을 너머 주인의 의도가 구현되는 방향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청지기의 적극적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으련다. 세상을 심판해 달라는 시인의 호소에서 나는 하나님이 언제나 이 땅에서 공의로운 심판자로 계시다는 사실을 읽는다.

Church of the Servant

내가 소속되어 있는 북미개혁교단 Church of the Servant 교회의 사역이 잘 소개되어 있다.


Living out our mission from Trent Elders on Vimeo.

목사 안수식

2014년 12월 14일, 목사 안수식: Soli Deo Gloria

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주석을 안내한다

성경 권별로 괜찮은 주석들이 소개되어 있고 랭킹도 표기되어 있으며, 최근에 출간된 주석들도 업데이트 해주네요...주석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착한 사이트입니다~~ ^^

Best Commentary

은혜로운 안수식

안수식을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는데 오셔서 목사의 소명을 부여하는 순서까지 맡아 주신 칼빈 신학교의 Julius Medenblik 총장님, 안수식에 참석하지 못하여 마음이 아팠던 아내와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무려 1시간의 생중계 카메라맨 역할을 하시느라 팔이 떨어질 정도로 수고하신 우병훈 목사님, 전종만 목사님과 김석현 목사님, 김효남 목사님, 박재은 목사님, 와 주시고 축하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아들처럼 사랑으로 늘 격려해 주시고 목회자의 본을 보여주신 Jack Roeda 목사님과 늘 동생처럼 10여년간 친구와 형님과 누님으로 늘 함께 한 Craig Koetsier와 Melinda Koetsier 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예전 미국에서 섬기던 교회에서 이곳까지 와 축하해 주신 분들과 미국 내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사랑과 격려와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고개를 숙입니다. 허다한 증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종(Minister of the Word)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고 주께서 명하신 예전을 적법하게 집례하고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온전히 세우는 일에 바울(Paul)처럼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전무하는 목회자가 되도록 전력으로 질주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2014년 12월 12일 금요일

루터전집

지난 주 토요일에 "루터의 율법과 복음"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참조한 루터의 원문들이 인터넷에 공짜로 공유되어 있다. 방대한 루터전집 및 맬랑히톤 전집, 거의 링크되어 있다. 다만 루터의 경우 1513-1515년 시편주석 55권과 55-1권이 누락되어 있어서 안타깝다..

Luthers Werke

2014년 12월 11일 목요일

적응계시의 은혜

심지어 창조물에 대해서도 인간은 그것의 있는 그대로를 보거나 알 수 없습니다. 빛이나 입자 방식의 중계나 번역이 없이는 지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물이 지각되는 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적응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 우리의 본성적 지각을 벗어난 하나님은 더더욱 우리의 우둔한 머리에 적응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그분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적응계시 중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은 죄 이외에는 우리와 한결 같이 동일하실 정도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최대의 적응이며 그런 적응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 지식의 최고점인 동시에 한계선이 되는 것입니다.

적응계시 이론과 관련하여, 인간은 유한할 뿐만 아니라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 성경이 적응된 것이라면 성경도 인간이 가진 모든 제한성과 부패성과 죄성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과 의심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성경이 인간의 불완전에 적응된 계시지만 성경 자체는 결코 불완전한 계시가 아닙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인간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사랑하고 계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 당신이 의도하신 내용을 의도하신 방법대로 의도하신 분량만큼 계시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성경은 어떠한 모자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무엇보다 하나님 편에서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도달하기 원하는 결론이나 디테일에 성경이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성경을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인간이 보기에는 인간이 원하는 내용과 원하는 방식과 원하는 차원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불완전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편에서의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서는 평가될 수 없는 책입니다.

다른 만물들도 그렇듯이 성경도 하나님의 자발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식과 방향과 목적을 따라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는 책입니다. 인간 중심성을 포기하는 자기부인 없이는 성경을 펼쳐도 종이와 잉크의 혼합물일 뿐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스스로 증거하고 있기에 “성경은 그 자체의 주석”(scriptur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이라는 성경의 자체 가신성은 성경 자체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원리이며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되 마치 논의나 논증을 통하여 도달하는 결론이 아닌 일방적인 계시를 대하듯이 진리의 영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이런 자세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숙지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확신은 구원 밖에서는 이해될 수 없고 성령의 조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믿음 이외의 방법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어 보입니다.

액츠 송년회의 격

조직신학 분과에서 가졌던 논문 발표회의 사진이다. 비록 고기맛과 숫불향에 관심과 의식의 코뚜레가 꿰이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논하며 보내는 송년회의 격이 이렇다. 뿌듯했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논문의 전체와 디테일을 골고루 꼼꼼하게 지적하고 각자의 고유한 공부법과 논문작성 노하우와 해결책 제공에 전혀 인색함이 없는 교수님들 모습을 보면서 가슴도 뭉클했고 눈시울도 뜨거웠다. 학생들은 그런 조언들을 경청하며 수납적인 자세로 각자의 형편에 맞도록 이해하고 적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액츠의 허니문 학기를 끝마치며

액츠에 와서 첫 허니문 학기가 끝났습니다. 액츠 교수진의 일부가 되어 누린 너그럽고 풍성한 사랑과 외국어로 신학함을 도전하는 학부생들, 말씀의 수종자로 준비되기 위해 먼 나라에서 온 M.div 학생들, 본국으로 돌아가 교수로서 섬기기를 꿈꾸며 학자의 도상에 있는 석박사 외국인 학생들, 액츠 특유의 신학적 성향으로 빚어지고 있는 우리나라 석박사 학생들 등과 더불어 이루어진 첫학기 학문적 스킨쉽에 대한 평가는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감격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흠다운 곳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들과 하나님을 궁구하며 함께 배운다는 사실이 지금도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학생들의 과제물과 논문과 답안지를 읽으면서 성적을 매김과 동시에 지난 한 학기에 이루어진 나의 섬김도 반추하게 되더군요. 참 많은 생각이 머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1) 학생들을 더 사랑해야 되겠다는 것, 2) 사랑한 만큼 학생들도 변하고 자란다는 것, 3) 교수 편에서는 전달해야 할 진리의 품격을, 학생들 편에서는 고품격의 진리를 수납할 신앙과 학문적 소양을 동시에 높여주는 교수법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 4) 신학을 가르치는 것은 교실만이 아니라 삶이며 강의만이 아니라 인격적 소통까지 요구하고 있다는 것, 5) 교육은 하나님의 영광과 개인의 영적 학문적 성숙과 교회적인 건덕을 동시에 지향해야 한다는 것, 6) 수업에 박사학위 논문이나 전문 학술서를 저술하는 정도의 연구력과 집중력을 투여해야 한다는 것, 7) 가르친 이후에는 학생들이 최소한 교수의 수준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목표를 늘 의식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다음 학기에는 어떠한 일들이 발생할지,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준비에 돌입해야 겠습니다. 사랑과 실력과 겸손과 관용과 인내로써 향기나는 산 제사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흠양되는 학기이길 소원하며 말입니다...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안수에 즈음하여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궤변들과 모든 오만한 것들을 다 파하며 모든 마음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하게 한다"(고후10:5).

처음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 무렵 나의 정신세계 전반을 꿰뚫은 말씀이다. 학창시절, 철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경제학과 법학과 의학과 신문방송학과 정치학을 조금 배우면서 관심의 촉수는 언제나 제반 학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느냐의 여부를 더듬었다. 물론 '여기가 좋사오니' 탄성을 지르면서 안주하고 싶은 일반학문 내에서의 매혹적인 주제들에 홀린 것도 그 수효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분야든 우주 전체와 지극히 미세한 구석까지 두루 아우르는 하나님의 속성과 절대적 주권에 대해 감히 입을 다물어 침묵하는 학문은 하나도 없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심지어 악한 것들도 악한 날에 적당히 지으셔서 아름답게 하셨다는 지혜자의 기록처럼 직접적인 방식이든 간접적인 방식이든 하나님의 속성과 행하시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선포되고 결코 가리워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하나님 아는 지식을 대적하는 교묘하고 은밀하고 능란한 거짓과 속임수의 온갖 원흉들이 모든 분야에서 우매자의 영혼을 삼키려고 끈적한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도 감지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 거짓과 속임수는 늘상 높아지려 하고 이미 드높아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다른 대체물이 없다.

목회자의 길에 대한 결정의 기로에 서 있던 나에게 판단의 목덜미를 당기며 가장 집요하게 저지한 망설임의 주범은 참과 거짓의 문제였다. 대상과 주체의 진실성을 추구하고 싶었다. 지금 내뱉은 말은 시공간이 변하면서 얼마든지 거짓과 오류로 간주될 가능성에 늘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과 땅의 체질이 녹아져 없어진다 할지라도 시공간적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대상의 진실성은 말씀만이 보증한다.

물론 인간 주체의 진실성은 죽었다 깨어나도 확보되지 못한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인간의 마음은 수리나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차원은 일찍이 첫 조상의 불순종에 의해 벗어났다. 자신을 응시하면 할수록 탄식과 좌절만 증폭된다. 그냥 죽고 거듭나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만이 주체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유일한 소망이다.

하나님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권세와 신분과 계층과 지식과 관습과 전통과 성향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앞에 복종의 무릎을 꿇게 하겠다는 목회적 다짐은 인간의 능력과 결단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바울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달린 문제다. 우리가 규정한 대적과, 우리가 마련한 방식과, 우리가 결정한 시점과, 우리가 결의한 인간적인 힘의 합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길을 실컷 질주하다 때가 이르러 주님께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안수의 날을 맞이한다. 이렇게도 못나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무지하고 비천한 자를 부르시는 자비의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나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주변에서 묵묵히 사랑으로 포용해 준 아내와 아이들과 지인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 

2014년 12월 9일 화요일

살아가며 배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나의 겉모습이 아니라 깊고 은밀한 본성이 드러난다. 그러면 회개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말씀은 돌이켜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성경을 대면할 때마다 이렇게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나를 슬퍼하고 주님을 기뻐한다. 이러기를 일평생 반복한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진리의 토대는 마음의 심연에 견고히 다져진다. 그 토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에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고 그분과 동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인생의 도리라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2014년 12월 5일 금요일

축복과 저주의 혼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잠27:14)

축복과 저주가 동전의 양면처럼 개념의 등짝을 맞대고 있는 구절이다. 동시에 내용과 방법의 긴밀한 연관성도 드러내는 지혜자의 금언이다. 축복은 귀하고 좋은 내용이다. 그러나 축복을 전달하는 방법이 축복의 고귀함에 상응하지 않으면 비록 축복 자체가 변경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주처럼 여김을 받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세포는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한 이후에 비자기 세포를 파괴하는 기이한 면역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잘못 구분하여 자기를 비자기로 여기거나 비자기를 자기로 간주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자기를 비자기로 착각하여 파괴하는 경우가 비자기를 자기로 착각하여 용인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태라고 한다.

지혜자는 본문에서 저주를 축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저주로 여겨 배척하는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즉 보다 위험한 상태를 경고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진리를 전하면서 마치 거짓인 것처럼 전달하는 것은 거짓을 전하면서 마치 진리인 것처럼 전달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이는 거짓을 소유한 자들이 아니라 진리를 소유한 자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최고의 복을 소유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고 복을 나누면서 마치 거짓을 증거하고 저주를 퍼뜨리는 원흉으로 오해를 받는다면 세상에 그것보다 위험하고 안타까운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편만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가장 지고한 진리를 알고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 자신이 선물로 주어진 바 된 우리가 세상에 가장 심각하고 끔찍한 위험의 원흉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소름이 온 몸을 급하게 뒤덮는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의 인격과 삶은 그 자체가 축복을 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는 우리에게 복음에 합당한 인격과 삶을 요구한다.

우리는 축복이 타인에게 저주로 둔갑하는 일들의 원흉으로 발견되지 않도록 값없이 받은 복음을 값없이 전달하는 삶을 경주해야 한다. 축복을 축복으로 여기는 일에 우리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이른 아침의 경박한 큰 소리 방식'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길을 뒤따르지 않으면 무엇이든 합당하지 않다.

복을 복으로 전달하는 유일한 방식은 주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다. 지금 세상은 기독교를 마치 더러운 버러지인 양 불쾌한 눈길로 쳐다본다. 복이 저주로 여겨지고 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복을 저주의 옷으로 뒤덮어서 버려지게 만든 우리의 실상을 인정하고 정확한 타이밍과 최고급 어조로 복을 전하는 인격과 삶의 준비가 시급하다. 주의 은혜를 부르짖게 된다.

2014년 12월 3일 수요일

성경의 침묵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3:11)

이 말씀은 계시의 정도와 분량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증거한다. 또한 인간에게 적정한 무지가 있음은 하나님의 의도라는 선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 추구욕은 이러한 사실이 거북하다. 사람의 머리에는 어느 정도 알면 더 이상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 만족의 적정선이 있다.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호기심의 촉수가 미친듯이 운신한다.

그런데도 성경은 인간의 굶주린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큼의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사에 대한 신적인 개입의 처음과 끝을 측량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게 성경의 분명한 입장이다. 그래서 선택해야 한다. 호기심을 따를 것인지, 성경이 호기심의 중지를 요구하는 지점에 머물 것인지를 말이다.

성경은 인간의 의문이 다 풀리도록 모든 것을 시원하고 후련하게 다 밝히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식이 얼굴을 대면하는 수준의 전체성과 명료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희미하게 안다. 어떠한 주제를 잡더라도 이러한 지식의 뿌연 부분성과 마주친다. 최고급 지성을 동원해도 그런 무지의 그늘은 제거되지 않는다. 늘 그 이유가 궁금했다.

과거를 파헤쳤다. 믿음의 선배들은 출입을 불허하는 지식의 경계선에 대해 맹렬한 호기심 발동이 아니라 경외와 경탄의 태도를 취하였다. 주께서 당시의 행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신 것은 전도자의 기록처럼 그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사람들의 어떠한 훼방이나 조작도 없이 영원토록 보존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신 것과 정한대로 행하신 모든 것들은 어떠한 피조물에 의해서도 더함이나 덜함도 없게 하셨다고 전도자는 기록한다. 이렇게 행하심의 의도에 대해 전도자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 알았다"고 진술한다. 그렇다. 지식과 무지 사이에 적정한 경계선이 그어진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계시된 만큼도 모르는 무지는 패망을 가져온다. 그러나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무지의 영역은 모르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모르는 무지에 머물라는 게 아니다. 성경이 그어놓은 침묵의 경계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여호와 경외와 경탄까지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경외의 탄성을 지른 바울처럼...

2014년 12월 1일 월요일

하나님의 의와 은혜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시145:17)

시인의 노래처럼 하나님은 모든 일에 은혜롭고 모든 행위에 의로우신 분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으로 인해 심장이 크게 울립니다. 여기에 의롭지 않다거나 은혜롭지 않다는 판단의 토를 달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감동으로 시인의 입술을 열어 친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움직여진 시인의 붓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정을 선명한 필체로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 누구의 어떠한 판단도 중지를 엄명하는 짤은 이 한 마디가 왜 그렇게도 큰 평강과 기쁨과 위로가 되는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이루어진 모든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에게 판단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경탄하며 찬미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늘 수납자의 자리에 머물러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판단자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에 몸과 마음과 머리의 꼭지가 틀어지는 상황이 펼쳐져도 절망할 수 없는 이유는 한번도 포기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의롭고 의혜로운 섭리에 있습니다. 세상의 꼬라지가 엄두도 못낼 교회의 밑바닥 꼬라지에 대해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더욱 심한 괴수의 꼬라지가 내게서 보인다 할지라도 주저앉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범사에 무시로 하나님의 의와 은총을 읽어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그러신 분이라는 시인의 선포에 있습니다. 어설픈 판단으로 경박한 반론을 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선포된 말씀에 근거하여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하루종일 호흡하는 날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