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8일 수요일

예수님은 누구신가?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6:35)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9)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
"나는 참 포도나무요"(요15:1, 5)

도덕경 43장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단단한 것을 이깁니다.
"없음"만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함이 없음"의 유익을 알고 있습니다.
말없는 가르침, "함이 없음"의 유익에 미칠 만한 것이
세상에 드뭅니다.

2016년 9월 21일 수요일

들음의 직접성

거짓 증인은 패망하나 확실히 들은 사람은 일관되게 말한다 (잠21:28). 이는 들음의 직접성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증인이 패망하는 이유는 거짓된 증거 때문이다. 거짓된 증거의 원인은 확실하고 직접적인 들음이 없어서다. 직접적인 들음이 없으면 출처가 불분명한 '카더라 통신'의 범람으로 분별력과 판단력이 흐려진다. 그러면 비록 거짓의 의도가 없더라도 부지불식 중에 거짓 증인으로 전락하고 패망의 쓴 맛을 경험하게 된다.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과도한 침묵으로 몸을 사리는 것은 소극적인 처신이다. 주께서 조성하신 입술은 증거의 도구로서 적극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성경 자체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성경의 해석을 좋아한다. 우리의 기호는 후자의 도움을 받아 전자로 이동해야 한다. 타인이 묵상하고 분석하고 정리하고 해설한 것은 아무리 은혜롭고 감미로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씀의 직접적인 들음의 유익에는 못미친다. 공부할 때에도 비록 산더미 분량의 2차자료와 3차자료를 두루 섭렵한다 할지라도 한 권의 1차자료를 읽은 사람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서의 쥐다. 믿음의 거인들은 대체로 탁월한 스승의 도움을 받되 성경과 직접 사투를 벌이며 진리를 흡수했고 고난과 시련의 바다에도 기꺼이 뛰어든 자들이다. 지금 정보의 홍수는 간접성의 과잉이다.

2016년 9월 20일 화요일

인간의 길, 하나님의 길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20:24). 사람이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걸음이 여호와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양한 교훈들이 감지된다. 첫째, 우리의 걸음이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걸음의 방향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걸음의 가까운 문맥을 파악하고 자신의 길을 해석하면 삶에 왜곡과 오류가 빚어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우리의 길도 깨닫는다. 둘째, 자신의 길에 대한 전적인 무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이유이며 싸인이다. 앞길이 캄캄할 때마다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어쩌면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셋째, 삶의 출처이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왜 살아가야 하는가를 사람들은 묻는다. 이러한 물음은 태초부터 삶의 화두였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 물음을 던지며 답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간다. 인류의 역사에서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며 삶의 모든 국면들을 경험한 전도자가 내린 인생의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 결론은 지금도 유효하다. 인간은 자신의 길에 무지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길에 대한 무지의 껍질을 벗기려고 분투한다. 그러나 이 무지는 하나님의 길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자신의 길에 대한 무지, 어쩌면 합당하다.

2016년 9월 18일 일요일

여전히 아들로!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신1:31). 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방식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온 그 크고 두려운 광야의 길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아들로 대하셨고 그들을 안고 친히 걸으셨다. 하나님은 그들보다 먼저 그 길을 가셨으며 장막 칠 적합한 장소도 찾으셨고 잘 따라올 수 있도록 밤에는 불로 걸음을 밝히셨고 낮에는 구름으로 감싸서 이끄셨다. 이는 그들이 광야에서 40년간 걸었어도 결핍이 없었고 의복이 낡아지지 않았고 신발이 해어지지 않았던 이유였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총애와 은택의 충만 속에서도 애굽의 죄악된 삶을 추억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모세는 고발한다. 그래서 광야가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출애굽 1세대 전부의 무덤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상황은 모세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르지가 않다. 지금도 교회가 걸어가는 길은 광야를 방불한다. 지금도 하나님은 교회를 자신의 아들처럼 안으시고 친히 걸으신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군침을 흘리며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교회를 광야로 내모시고 역경과 고통을 주시냐며 원망하고 불평한다. 나아가 불신으로 불경을 저지른다. 끔찍한 현실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돌이켜야 할 상황이다. 

2016년 9월 17일 토요일

하늘과 땅의 격차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사55:9).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인간의 길과 생각보다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높다는 이야기다. 사실 하늘과 땅의 무한한 격차는 측량 자체를 불허한다. 땅에 있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어찌 알겠는가! 이사야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깊음과 부요함에 압도되어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하나님의 길은 추적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바울의 이러한 경외와 겸손의 고백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은 생각과 길에 너무도 잘 어울리고 지극히 마땅한 인간의 태도이다. 그러나 인간은 대체로 하늘처럼 높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거북하여 거부하고 증오한다. 땅이 하늘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규정하려 든다. 하늘이 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면 땅은 하늘을 기소하고 정죄하고 결박한다. 인간에게 익숙하고 때때로 변경하고 조작할 수 있는 땅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면 하늘의 질서를 따르는 자들은 곧장 죄인으로 혹은 적으로 분류된다. 게다가 하늘의 숨통을 조이는 일에 세상은 대체로 미친듯이 열광한다. 이는 하늘에 대한 땅의 거부와 정죄와 공격이 하나님을 대하는 타락한 인간의 보편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가정과 결혼과 법률과 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다. 그렇다면 나의 삶을 주장하는 태도는 과연 어떠한가? 땅을 편드는 것에 민첩한가? 아니면 하늘을 위하는가?

2016년 9월 10일 토요일

겸손의 위력

22장은 겸손의 위력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휘면 온전할 수 있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움푹 파이면 채워지게 되고,
헐리면 새로워 지게 되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고 세상의 본보기가 됩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기에 돋보이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갑니다.
겨루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휘면 온전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어찌 빈말일 수 있을까요?
진실로 온전함을 보존하여 돌아 가십시오.

<도덕경>의 "물처럼"

오랜만에 <도덕경>을 다시 펼쳤다. 눈에 걸린 대목(8장)이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려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서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겨루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 받을 일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