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0일 월요일

<곁길>

9월의 태양이 바람 분무기로 뿌리는
투명한 은색 가루가 유난히 눈부시다
그 가루의 마법으로 깨어난 교정을 거닐며
도시의 아침을 소비한다

그런데 오늘은 어쩌다가
발이 평소에 기억하던 산책의 경로를 벗어났다
그러니까 무심코 들어선 곁길이다

길과 발이 만나는 접지면의 생소한 느낌,
행로가 곡선을 그릴 때마다 전환되는 장면들,
행인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 밤새 준비한
낯선 물상들의 깨끗한 눈인사, 모두 신비롭다

인생이 익숙한 경로가 아니라
낯선 곁길로 접어들면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하다
시간의 낭비, 진보의 정지 혹은 퇴보로 해석한다

그러나 길이 평탄하지 않고 심히 낯설어도
내 삶의 설계자는 다 아시고 걸음을 이끄신다
물론 인생에는 일그러진 곁길도 있지만
어떤 곁길은 갑갑한 자아의 닫힌 세계를
슬그머니 확장하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물이다

곁길이 그릇된 삶으로 이어질 때에는
그 실패의 지점에 서서 뒤따르는 행인들을 위해
돌아가야 한다는 반환점이 되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출구일 때에는
약진해야 한다는 이정표가 된다면,
곁길은 아름다운 청춘이다

곁길에 선 신학자는 행복하다

2018년 9월 15일 토요일

추석 가정예배

잠언 20장 24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지혜자는 인간이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걸음이 여호와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다양한 교훈들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걸음이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걸음의 방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걸음의 가까운 문맥을 파악하고 자신의 길을 해석하면
삶에 왜곡과 오류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우리의 길도 보입니다.

둘째, 자신의 길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앞길이 캄캄할 때마다 하나님을 신뢰해 보십시오.
어쩌면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 자체가
늘 걸어가야 할 우리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셋째, 삶의 출처이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왜 살아가야 하는가를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 물음은 태초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며
삶의 모든 국면들을 경험한 전도자가 내린 인생의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 무지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경외하는 인생의 본분에는
그 무지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늘 감사하며 사십시오.

기도문

사랑의 주님,
무지한 인생의 길에 등대가 되어 주옵소서
사람들의 합의나 나의 욕망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우리의 길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움과 염려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경외해야 하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인생이 길하든 흉하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옵소서

이번 추석에도 혹시 열매가 부실해 보인다면
슬픔과 근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신뢰하고 경외하는
경건의 채찍으로 삼아 감사하게 하옵소서

서나 넘어지나 들오며 나오며
늘 복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8년 7월 27일 금요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스10:2)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 에스라는
그 이름의 의미대로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은 인물이다.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칭찬과 존경을 두루 받은 분이지만
그의 행보는 왕의 수라상에 낄려고
겸상의 군침을 흘리거나
이미지 관리로 거룩한 척 하는
경건의 코스프레 따위와는 무관했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늘 주시했다.
단순히 관찰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의 운명 공동체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했다.
그에게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엎드렸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마치 예수님의 기도문이
구약에도 있었다는 인상까지 주는 표현이다.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였고
백성의 죄는 "우리의 죄"로 여겨졌다.
사회나 교회나 개인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대체로 불똥이 튈까봐 서둘러 정죄의 손가락을 내뻗으며
죄인과 섞이지 않으려는 거리 만들기에 주력한다.

그러나 에스라는 백성을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여겼고
그들의 죄를 우리의 죄로 품었으며
통회하는 죄인의 자리에서 엎드렸다.
그러자 많은 백성이 덩달아 크게 통곡했다.

이런 통곡은
주님의 귓가에 참으로 아름다운 멜로디다.
에스라의 리더십이 아름답다.
여호와의 도우심이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움, 지금은 너무도 희귀하다 ㅡ.ㅡ

2018년 7월 25일 수요일

땅책읽기

오늘은 유난히도 땅이 아름답다.
새벽에 두 발로 땅을 지그시 보듬으며
천잠산의 능선을 오르는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해 심지어 설레인다

땅도 글을 쓴다는
헤르만 헤세의 예리한 관찰이 뇌리를 파고든다
땅의 모든 무늬는 사연이 빼곡히 담긴 문장이다.
날마다 이루어진 산책은 발로 읽어가는 땅 독서였다

땅은 표현력이 뛰어나다
한번도 반복되지 않는 문장들이 온 땅에 수북하다
단문도 있고 복문도 있고
때로는 적절한 지점에서 마침표와 쉼표와도 마주친다

땅은 하나님의 입술이다
지면의 모든 굴곡은 그 입술에서 나온 메시지다
땅끝까지 이르러 빠짐없이 읽어내고 싶다
달리지 않고 서행하며 속독이 아니라 정독으로

지금은 전주의 땅책 읽기만도 벅차고 과분하다

전주의 하늘, 아름답다

텅빈 하늘이 완전히 달라진다
고작
손톱 사이즈의 눈썹이 하나 걸렸는데

저 하얀 눈썹이
거대한 하늘에 자그마한 무늬로 들어가는 순간
온 세상이 달라진다

아름답고 향기롭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당당하게 좌우하는 게
하늘이 흰 눈썹의 배경으로 기꺼이 소비되는 게

투명하게 있다가
취침 전 저 허공의 중턱에 올라
살갗을 은은하게 드러내는 초승달

지역에 따라 시간차를 두고
적시에 나타나는 하늘의 눈썹,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대리윙크 같다.

아이의 순수함

꼬맹이가 텅빈 예배당에 서서 운다
그 울음이 2층까지 올라와 연구실로 스며든다
하여, 내려갔다
울음이 흔건한 아이의 말은 해독이 불가하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
놀랄까봐 다가가며 최대한 밝은 미소를 유지했다
아이는 뒤로 물러서는 기색 없이 무언가를 계속 설명했다
여전히 판독불가 상태였다

그러다가 시선을 아이의 입술에서 손으로 떨구었다
끊어진 칸막이 끈을 꼬옥 붙들고 있던 그 손가락에
두려움과 긴장의 땀이 눈물만큼 흔건했다.

괜찮다며 아이를 살포시 껴안았다
아이는 안도하며 나의 가슴에 자신을 파묻는다
그래도 눈물의 흐름은 이어졌다

그래서 끊어진 끈을
그 아이의 시선 앞에서 이어주며
아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 끈의 연약함을 때찌해 주었다

아이는 울음도 멈추었고 걸음도 밝아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뛰어간다...해방의 날개를 단듯

2018년 2월 10일 토요일

2018년도 설 가정예배

성경봉독: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찬송: “날 구원하신 주 감사”
설교: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나님의 은혜로다"

장 도미니크 보비는 프랑스 사교계를 풍미하던 분입니다.
그가 43세에 뇌졸중 때문에 전신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왼쪽 눈꺼풀이 그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15개월간 20만번의 눈 깜빡임을 통해 그는 얇은 책을 썼습니다.
서문에 쓰인 그의 고백에 큰 울림이 있습니다.
“흐르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 쪽의 눈 깜빡임도 전신마비 환자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입을 출입하는 들숨과 날숨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공기도 은혜라면 그보다 더 귀한 것들은 더더욱 큰 은혜일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말합니다.
나에게서 난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은혜의 지문과 흔적으로 얼룩진 전부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호흡은 주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주고 계신 진행형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너무나도 소중한,
그러나 너무나도 사사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들숨과 날숨을,
혹시 불평과 원망과 비난의 수레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호흡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 성경은 찬양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 전체를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각 부분과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나에게 가족과 교회와 직장과 국가가 있음도 은혜로 된 일입니다.
그 모양이 어떠하든, 그 상태가 어떠하든 다 은혜입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소망으로 바라보는
새해의 문턱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나누어 보십시오.
그리고 서로에게 살아 있어서, 곁에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서로를 향한 감사로 한반도의 설을 물들이는 은혜가
우리 개인에게, 가정에게, 교회에게 풍성하길 주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가정예배 기도문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 필요를 부족함이 없도록 풍성하게 채우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그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나의 나 된 것,
가족의 가족 된 것,
교회의 교회 된 것,
나라의 나라 된 것,
이 모든 것들이 주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나와 가족이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새해에도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신 호흡으로 찬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게 하옵소서.
그 호흡으로 우리 서로에게 칭찬과 축복과 위로를 전하게 하옵소서.
은혜로 주신 손으로 외로운 손을 붙잡게 하옵소서.
눈에는 위로의 눈물로, 얼굴에는 격려의 미소로 섬기게 하옵소서.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은혜임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게 하옵소서.

2018년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랑과 진리로 결실하게 하옵소서.
은혜의 전부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8년 1월 27일 토요일

'언택트' 기술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과거에 소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소비자와 판매자의 접촉이 필수였다. 그러나 이제는 소비자와 판매자가 서로 대면하지 않고서도 소비가 가능한 언택트(untact) 기술이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소비자가 필요한 물품이 있는 쇼핑몰 사이트에 방문하여 원하는 제품을 선택하고 결제하면 그 제품은 소비자가 원하는 장소로 배송된다. 이러한 소비활동 속에서 사람과의 접촉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특정한 제품에 대한 구매의 강요나 부담감 없이 소비를 즐길 수 있어서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한다. 이러한 비대면 방식의 소비 풍조는 온라인 구매만이 아니라 오프라인 구매에도 확산되고 있다. 적잖은 매장에서 소비자는 판매원이 없어도 컴퓨터나 로봇을 통해 어떤 제품의 특성과 기능과 가격을 정확하게 확인한다. 친절한 설명을 다 들은 후에 비록 구매하지 않더라도 소비자의 마음에는 인간적인 미안함과 정죄감이 없다. 언택트 기술을 활용할 경제적인 여건이 안되는 매장도 이제는 가능하면 소비자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언택트를 지향하되 소비자가 먼저 도움을 요청할 때에만 필요를 채워주는 정책을 선호하고 있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언택트 기술이 무인과 자율과 자동의 개념을 통합한 것으로서 비용절감, 즉각적인 만족, 풍부한 정보, 대인관계 피로감의 해소라는 장점을 가졌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것이지만 동시에 일자리 감소의 유력한 주범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측면도 지적했다. 더불어 잘 사는 사회의 구축보다 수익의 증대가 정책적인 판단의 보다 강력한 변수로 작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창출 효과를 잠식하고 사람들의 인격적인 대면을 감소시킬 언택트 기술의 발달과 활용의 감퇴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이와 더불어 서민들의 일자리도 더욱 감소되고 사회적인 빈부의 격차도 더 벌어질 전망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교류의 단절이다. 기독교는 공동체를 강조한다. 인간이 태초부터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태초에 창조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좋았지만 유일하게 좋지 못했던 것은 아담의 독처였다. 그래서 하와가 지어졌고 아담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난 이후에도 우리는 공동체의 차원에서 새 사람으로 빚어지고 있다. 각 사람은 한 몸의 지체가 되어서 서로 연합되어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 자라간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한다(고전12:26). 이로써 고통은 감소하고 기쁨은 배가되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체질이다. 각자의 강점과 약점이 다르기 때문에 만나야 강점은 강화되고 약점은 보완되어 성장하고 전인격적 차원에서 더욱 인간답게 된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다.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고립되는 자는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지혜자는 규정했다(잠18:1).

접촉의 차단은 창조의 질서를 거스른다.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어 주는 인격적인 거울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철이 철을 날카롭게 다듬듯이 접촉해야 서로의 인격을 둥글게 다듬는다. 다양한 인격과의 접촉을 통하여 뾰족한 인격은 깎이고 움푹 들어간 인격은 매워진다. 시장 혹은 매장은 인격적인 교류가 가장 왕성하게 일어나는 광장이다. 서로의 재능과 도움이 교환되는 공간이다.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민족과다양한문화가각자의장점을타인에게수급하는현장이다. 그런데 언택트 기술로 인한 거래의 기계화와 무인화와 자율화와 자동화가 인격적인 접촉의 기회를 위협하고 있다. 언택트 기술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면 더 많은 직종에서 이 기술을 활용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고용과 접촉의 감소도 더 가속화될 것이어서 서로의 장점을 교환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유익도 감소되어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간의 공동체적 됨됨이도 벼랑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뒤집어서 보면 수익의 증대를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사회에서 공동체적 인격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사회적인 역할은 더욱 증대될 것으로 사료된다. 언택트 기술의 확산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보다 왕성하게 해야 할 문명의 틈새이다.

출처: 신앙세계 2018년도 1월호

이찬수 목사님이 말하는 옥한흠 목사님의 목회철학

1. 억제력을 가지라:
      ⇒ 더 커지려는 인간적인 욕망을 억제하라.

2. 한 사람에게 집중하라
      ⇒ 많은 청중이 아니라 한 사람의 구원에 집중하라.

3. 건강과 가정을 돌보라
      ⇒ 나 자신과 가정이 교회에 모범이 되도록 돌아보라.

4. 광인론, 사람에 미쳐라
      ⇒ 성공이 아닌 사람을 위해 미친 것처럼 죽을 듯이 목회하라.

5. 고독이 두려워 회피하지 말고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 주말에는 목숨을 걸고 의도적인 고독 속에서 설교를 준비하라.

6. 성도를 위한 눈물을 지닌 목회자가 되라:
      ⇒ 한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무능을 인정하고 눈물로 엎드리라.

7. 본질 중심의 목회를 하라
      ⇒ 목회는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숨 걸어야 하는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