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9일 수요일

자기성찰

논문에 몰입하다 보면, 딴지 거는 일에 숙달된다. 

다른 학자들의 간과와 오류와 과장과 부주의를 꼬집고 드러내되
그런 것까지도 감지하고 능가하는 지각의 소유자란 사실을
애둘러 암시하는 완곡하고 간사한 방식으로
학자적 존재감 확보를 추구하는 습성에 중독되고 만다. 

이런 학자의 매마르고 병적인 길이
목회적 포용과 희생적 섬김에 목말라야 할 목회자의 길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 접으려는 분들도 상당수 보았다.
부럽기도 했고 감동도 했고 도전도 받았다. 

공부를 하면서도 목회자적 부르심에 일인치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대충 몸부림을 치지만 그놈의 매정한 역부족과 부딪힌다... ㅡ.ㅡ

몸이 닳도록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세월이 가루가 되도록 분초까지 해체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시는 분들을 보면
책들과의 씨름이 어언 30년을 육박하는 세월의 사치가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묻게 된다.

섬김의 때가 임박해 있음을 느끼지만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초라한 준비를 보며 떨림도 있다.
겨우 이 꼬라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지...

비에 흠뻑 젖은 그랜드 래피즈,
여전히 시무룩한 잿빛 하늘이 조성한 멜랑꼴리 분위기에 편승하야,
오늘은 유체이탈 신공을 구사하며 자신을 관조하려 한다.

2012년 2월 28일 화요일

긴급수배 중이었던 폴라누스 아리스토/라무스 논리학

이얏~~후!!!

Amandus Polanus의 Syntagma logicum Aristotelico-Ramaeum (1605),
오랫동안 긴급수배 중이었다.
 꼭 보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구하지를 못했거든.
미국의 어느 도서관도 가지고 있지 않은 문헌인데,
수소문 끝에 일리노이 대학 도서관에
하드카피 책으로 소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당근, 즉각 협조 요청서 날렸었다.
"고문서 조금 다룰 줄 아는 사람이고
디지털 카메라로 플래쉬 없이 찍을테니, 열람을 허락해 달라...'고

오늘 친절한 사서의 답신이 왔다.
"괜찮다"고~~... 이렇게 감사할 데가...서둘러 다녀와야 되겠다.
왕복 12시간! 화소 높은 카메라 단단히 챙겨서...^^

성경과 전통

‘성경과 전통’ 문제는 교회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로서 과거의 해묵은 담론이 아니라 지금도 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회복의 방향을 제시할 중차대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를 연구하는 분들은 16세기 논쟁의 핵심을 종교개혁 원리로서 ‘오직 성경’과 반동 종교개혁 원리로서 ‘성경과 전통’ 사이에 벌어진 원리의 충돌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슈는 어거스틴 및 루터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에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보편적 교회가 나를 움직이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Evangelio non crederem, nisi me catholicae Ecclesiae commoveret auctoritas)’고 선언했고, 루터는 ‘성경의 증언들 혹은 명백한 근거에 의해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Nisi convictus fuero testimoniis scripturarum aut ratione evidente) ... [오류와 모순으로 가득한 교황과 공회들을 믿지 않는다는 거부의 입장들 중] 어떠한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고 싶지도 않은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양심(capta conscientia in verbis dei)에 저촉되는 일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편적 교회의 권위를 성경보다 우위에 두려는 얄팍한 술수의 정당성을 어거스틴 선언에서 찾고 있으며, ‘오직 성경’이란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구호를 앞세워 주께서 섭리하신 교회의 긴 역사와 전통이란 교훈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종교적 유아독존 망상의 든든한 근거로서 루터의 격한 언사를 동원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상식의 하한선도 허무는 이 두 극단의 지칠 줄 모르는 되물림은 지금도 교회의 기둥을 붙들고 있다고 착각하는 적잖은 종교 ‘정치가’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전통의 올바른 개념과 관계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교회 자체의 개혁도 절망의 벼랑으로 몰아가게 될 것이며, 개인과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무수한 이단들의 고삐 풀린 광란도 잠재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네델란드 출신의 종교개혁 신학자요 역사가인 오버만(Heiko Oberman)은 전통을 둘로 나누는데, 첫번째 개념의 전통은 ‘성경 교사들과 교회 사이의 줄기찬 논의를 통해 성경의 내용들을 성도들의 삶으로 운반하는 성경의 기구적인 수레(the instrumental vehicle of Scripture)’이고, 두번째 개념의 전통은 ‘성경에 배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감독들의 계승을 통하여 전하여진 성경 밖에서의 사도적 전통 속에도 범람하고 있다는 신적인 진리의 권위적인 수레(the authoritative vehicle of Scripture)’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분을 가지고 오버만은 종교개혁 인물들과 그들의 중세적 선행자들 모두가 전통을 그 자체로 거부하진 않았으며 다만 성경의 해석 면에서의 교회적 전통이든 성경의 기록 밖으로 전수된 사도적 전통이든 그 어떠한 전통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제2의 소스로 간주되는 것은 도무지 용납하려 하질 않았다고 말합니다.

전통 연구에 있어서 오버만의 동시대 전문가인 콘가르(Yves Congar)도 루터가 전통에 대한 성경의 절대적인 우월성을 외치는 한 교회의 ‘전적으로 보편적인(completely catholic)’ 학자라고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 이후에 마틴 켐니츠(Martin Cemnitz)와 같은 루터란 정통주의 학자가 전통을 7가지 종류 즉 1) 예수님과 사도들의 메시지 전체, 2) 성경의 전달, 3) 초대교회 시대의 신조, 4) 사도적 주해, 5) 성경에서 취한 교리들, 6) 교부들의 공통된 견해, 7) 고전적인 예전 등을 성경적인 것 혹은 성경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긴 것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바르트의 견해에 귀동냥을 한 듯한 입장을 펼치는데, 정통주의 시대는 대부분의 개신교 학자들이 종교개혁 정신을 이탈하여 성령의 내적인 조명도 거부하고 성경‘책’만 강조하는 ‘책의 종교(religion of the book)’로 전락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비록 콘가르의 뽀족한 지적을 피해갈 수 없는 분들이 일부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입장은 중세의 건강한 학자들과 종교개혁 인물들의 전통적인 견해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떠한 종류의 전통과도 권위에 있어서는 결코 비교될 수 없다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대해 반석 같이 견고한 입장을 취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저자요 최고의 해석자인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무시한 것은 아니며 동시에 성경에 부합한 전통을 존중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역사에 출연했던 진리의 발자취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최고의 전통을 찾아내려 했습니다. 즉 교회의 진정한 보편성과 정통성의 계보를 누가 이어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밝히고자 가용한 모든 전통적 자료들을 다 수집하고 샅샅히 탐구하고 각 교부들의 최대 장점들을 다 축출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터와 기둥이란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그 진리의 굵은 줄기를 붙들고자 긴 역사의 두터운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발굴하고 또 발굴하려 했던 시대가 바로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에 큰 별처럼 진리의 빛을 환하게 비춘 믿음의 거인들이 남긴 글들을 읽어 보십시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최첨단 문명의 이기를 누리되 물고기가 물을 모를 정도로 친숙해진 우리가 그런 문명의 혜택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동떨어진 미개발 시대를 산 그들이 얼마나 깊고 거대하고 장구한 사유의 세계를 얼마나 정교하게 더듬었고 표상해 냈는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망원경과 현미경을 통해 해체하고 확대하는 기술의 발달이 과거에는 없었다는 희귀성을 이유로 거기에 과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과거의 역사와 전통에 무례한 콧방귀 신공을 구사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도 들면서 때로는 너무 가볍고 천박하단 느낌에 휩싸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이단들이 자신을 정죄할 껄끄러운 잣대 제거할 요량으로 지난 역사와 전통의 가치가 이제는 낧아서 지금의 '새술'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새부대가 필요함을 역설하곤 한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주장이 과거에도 있었던 전혀 새롭지 않은 이단성 짙은 주장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불쾌함이 견딜 수 없는 것이지요. 전통에는 나쁘고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제거하고 극복해야 할 악습도 있지만 따르고 계승해야 할 좋은 전통도 많습니다. 주로 하나님의 의와 나라보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자 할 때에는 악습이 보다 유용하기 때문에 엉뚱한 전통의 계승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 더러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왠만한 기능을 기술이 다 대신하여 인간이 직접 나서서 관여할 영역이 극도로 축소된 현대와는 달리 과거에는 대부분의 기능을 인간 스스로가 감당해야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이 맨살을 드러내듯 더 현저하게 드러내는 과거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역사의 교훈을 왜 남겨 두셨는지 그 이유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혹 차이가 있다면, 아담 시대에는 치마로 치부를 가렸지만 지금은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문화로 보다 은밀하게 가릴 수 있는 정도의 외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사실 양심도 고발의 증거를 찾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숨을 수 있는 얼마나 다양하고 기발한 방편을 제공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들키지 않도록 잘 은폐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방법을 알려 주면 우리는 거기에 아무리 큰 희생이 수반된다 할지라도 지불할 용의가 되어 있는데, 이러한 현상에서 인간의 타락과 숨고자 하는 죄의 본성을 직시하고 극복의 노력을 시도하는 경우는 대단히 희박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숨고 즐기는데 바빠서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절대적인 권위가 무너지면 교회에는 어떠한 질서도 세워질 수 없습니다. 인정을 봐 주고 적당히 넘어가는 인간적인 ‘지혜’와 처세술을 구사하고 체득하고 물려주고 그런 악순환이 굳어진 반복의 사슬을 ‘당연한 질서’로 여기면서 오히려 여기에 비판의 날을 세우거나 반론의 그림자만 보여도 교회를 허무는 자라고 낙인을 찍어 그 바닦에서 살아남지 못하도록 축출되는, 질서의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대적하는 구조악이 교회의 등뼈에 박혀 부패의 악취를 풍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정직하고 겸손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선 자리가 얼마나 깊은 타락의 수렁에 빠져 있는지를 그나마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은 교회의 전통을 살펴보는 일일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진리의 엄밀성을 어디까지 추구했고, 복음을 따르되 얼마나 고매한 인격과 치열한 삶으로 몸부림을 쳤는지, 캄캄함이 덮힌 세상을 밝히되 얼마나 다양하고 광범위한 차원까지 세상의 빛으로 살았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일에 어떠한 것까지도 희생의 대상으로 포기할 수 있었는지, 천국의 이정표가 되어야 할 교회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 배움의 삶을 살았는지 종횡으로 살펴볼 수 있는 소스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통인 것입니다. 우리는 임의로 시대를 구분하고 선악과 우열의 딱지를 붙이지만 만물과 역사의 통치자요 주인으로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신 적도 없으시며 분초마다 살피시고 세상의 먼지 하나라도 돌보시지 않음이 없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함과 광대함과 섬세함과 인자와 긍휼의 발자국이 실재로 찍힌 그런 교회의 전통을 모든 시대에 걸쳐서 수집하고 탐구하는 것은 물론 진리에 있어서의 가감은 없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기록으로 주신 계시의 진리를 입체감 있게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편이 있다면 아마도 전통일 것입니다.

전통을 버리면 하나님의 역사도 버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부요함도 많이 놓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현주소를 객관적인 눈으로 직시할 수 있는 장치를 제거하여 지금 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를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선배들의 확인된 교훈도 없이 불명확한 오류답습 및 시행착오 가능성에 문을 활짝 여는 셈이 될 것입니다.

2012년 2월 27일 월요일

Cyril of Alexandria 전집

교부 시릴(Cyril of Alexandria)의 오페라다. 판본상태/활자상태 최상이다. 시릴은 알렉산드리아가 로마제국 경내에서 영향력과 권력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 권좌에 오른 인물이다. 크리소스톰을 파직한 삼촌 테오필루스의 실정과 부당한 처사를 인정하고 자기 잘못도 아닌 사안에 대해 용서까지 구하였던 예의범절 지존이다. 비록 세례에 관해 다소 수상한 언사를 뱉어낸 바 있지만, 그래도 네스토리안 사상을 논박한 에베소 공의회의 간판스타 되겠다. 많은 주석을 남겼는데 Migne판 교부전집 안에는 일부만 수록되어 있다. 다행히 그의 전집이 나왔고 IA가 특유의 고콸러티 스캔 파일을 배포하니 이 아니 기쁘고 감사하지 않겠는가! 이거 손아귀에 넣으니 정말 기분이 조오타!!!


폴라누스 초상화

유럽에 거점을 둔 포털 사이트다. 특별히 텍스트 분야에서 16-17세기 문헌들 대부분을 고화질 파일로 링크해 두었는데,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 않는 문헌들이 대단히 많다. 이사회 및 스텝진에 상당수의 도서관 및 문헌 연구소 전문가가 포진해 있다. 사이트의 디자인을 보면 쾌쾌한 박물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주목할 만한 역사적 문헌 사이트다. 미국에서 찾지 못하고 구글도 제공하지 않는 자료들을 건지는 재미가 솔솔하다. 공짜 제공자가 아니라 공짜 탐닉자가 되지 않아야 할 텐데...^^ 여튼 고맙다, 유로피아나 ~~

아래 그림은 Europeana에서 건진 Amandus Polanus 초상화다. 이분과 수년째 매일 씨름하고 있는데, 대면하긴 처음이다. 감회가 새로웁따!!! 그런데 생김새가...ㅋㅋㅋ...ㅡ.ㅡ 으흠,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련다. 베자가 믿음의 사람들 초상화 모음집에 담지 않았던 '사연'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그림이 아닌가 생각된다...


2012년 2월 26일 일요일

교육적 목적의 예수님 그림은 우상인가?

16/17세기 개혁주의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가시적인 그림을 그려 하나님을 표상하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델 문답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칼빈의 경우에도 당시 교황주의 학자들이 카톨릭의 성상숭배 가시적인 요소를 사용한 신비주의 행태가 교육적 차원에서 정당화될 있다고 한 입장을 반박하며 그 이유로서 2계명 해석을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어떠한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는 자체와 2) 그것을 자기의 신앙적인 유익을 위해 경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상을 만드는 행위 자체와 그것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모두가 부패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탁월하게 우상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지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떠한 형상도 합당할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가시적인 그림 혹은 형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모든 사람들은 참된 경건의 훈련에서 쇠퇴할 뿐만 아니라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불의 형태로 모세에게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긴 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불가해한 것이며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우상 제작하는 것을 방지하게 되었다고 칼빈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개혁주의 교회는 이런 16/17세기 개혁주의 인물들의 엄밀한 입장과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주일학교 대부분이 예수님 얼굴과 모습을 그리고 어떤 경우는 진흙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칼빈 신학교의 교단인 북미 개혁교회CRC 그런 흐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교육받지 못한 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수단적인 방편으로 그림이나 쉬운말 성경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지를 생각할 있습니다. 1) 이들은 신앙 선배들의 엄밀한 입장에서 분명히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나 그림이나 조각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경의를 표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 언어는 그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된 성경자체를 하나님의 임재처럼 신령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문자는 그림이 역사 속에서 고도로 추상화된 결과이며 문자를 사용하며 우리는 머리에 시상을 떠올리고 어떤 그림을 그립니다. 언어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머리 속에서는 어떤 형상을 그려지는 것이지요. 인간의 성정이 지닌 한계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이 그런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아주 엄밀한 잣대로 평가해 , 머리 속에 그려진 그림이나 시상을 신념으로 붙든다면, 음란한 생각만 해도 간음인 것처럼 우리는 우상에 빠지는 셈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머리에 그려진 하나님 지식과 형상과 행위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하나님을 문자로 설명하고 뜻을 해설하고 말하거나 책으로 출판하는 방식은 가시적인 그림과는 단절적인 느낌을 주는 높은 차원의 추상화를 활용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이 지각하고 인식하고 표상함에 있어서 본질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논리와 지혜와 지성을 동원하여 깨달은 깨달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담아내지 못하면서 혹은 다른 구절들의 의미까지 희생하는 경지까지 옹호하는 교리적 혹은 교조적 고집과 천착이 오히려 심각한 우상숭배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자나 사색을 활용했다 해서 우상숭배 조항에서 면죄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섬기고 바르게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의 얄퍅한 지각이 덤빌 있는 영역이라 판단되면 그것에 달려들어 정죄의 칼을 세우는 행위는 비겁한 것이고 교회에도 아무런 도움이 안되면 그런 저항 자체가 하나님께 경배의 내용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비진리에 저항하고 논박하고 상대방을 설득할 때에는 그런 행위조차 경배의 일부가 되도록 함이 중요한 같습니다. 경박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무례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정죄나 비판을 자신의 경건을 세우고 자신의 신앙의 깊이를 입증하는 방편으로 삼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 20절을 생각해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능력을 분명히 보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자연 묵상하는 중에 깨닫고 시로 노래한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하늘과 땅을 보지 않고 사람과 동물과 형설할 없이 다양하고 복잡하되 조화로운 창조를 보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일반은총 영역이 생략된 특별계시 강조는 고도의 우상숭배 행위일 있습니다. 인간은 인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을 말로나 글로나 느낌으로 번역할 없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학문이나 과학은 하나님이 당신의 신성과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만드신 만물을 어떻게든 첨삭을 가하는 방식으로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파괴하고 변질되게 만드는 행위가 것입니다. 책에 예수님의 얼굴 그렸다고 문제를 삼는다면 인간은 언어 사용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고 어떤 식의 표상도 피조물과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들도 삼가해야 하고 그냥 모든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부분과 고려해야 부분까지 싸잡아서 무시해야 한다는 아닙니다.

언어와 그림 혹은 형상은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원래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 문자의 형태를 활용하신 신적인 섭리의 의미를 간과할 정도로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런 방식이 인간의 부패한 종교성을 잠잠케 하고 우상화의 빌미를 최대한 제공하지 않는 최상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같습니다. 내가 배움이 있고 지각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우상숭배 단계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저마다 지각이나 재능이나 믿음의 분량이 다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을 고려하되 정도의 차이를 여전히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조항이 들어있고 소자들에 대한 배려를 간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그림으로 신약과 구약을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있도록 돕는 행위를 비판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분들의 선한 의도를 아니까요. 그리고 그림만 단독으로 교육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한계와 유익을 설명하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하나의 일시적인 수단으로 그런 방편이 있다는 가르침이 수반되는 것이라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면에서는 수만 있다면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형태로도 보존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속의 그림보다 부모나 선생이 자녀나 제자에게 인격과 삶이라는 그림으로 하나님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증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 전달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이지만 가장 성경적인 방식 아닌가 싶습니다.

정리하면, 1) 그림과 문자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차이나지 않는다. 2) 그렇다고 구분의 섭리적인 의미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3) 올바른 지도와 가르침이 수반되면 책의 그림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그리 문제될 없다. 4) 자신은 성경의 문자적 형태를 보존하고 우리의 인격과 삶이라는 그림으로 하나님을 보이고 가르치는 방식을 선호한다. 5)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교육적인 목적에 있어서도 그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6) 현재 개혁주의 교회들은 그런 엄밀한 입장을 대부분 따르지 않고 있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왜곡할 정도의 우상숭배 증상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8)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가 결의한 것처럼 본질과 기본에 집중하고 부수적인 것은 허용하는 것이 좋다. 이상입니다...조금 길었지요!!! ^^

2012년 2월 22일 수요일

바울의 복음전도

유능한 분일수록 바짝 엎드리는 자세가 요구된다.
할 수만 있다면 스펙을 키우고 부풀리는 일이 정상인 시대에
열매로 검증된 재능을 가졌어도 목숨걸고 가리라고 한다면
콧방귀가 쇄도할 주문인 줄 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선배가 있었고 우리에게 나를 따르란다.

그 선배는 바울이다. 그의 출중함은
재론이 필요하지 않은 당대 최고의 스펙 소유자다.
젊은 나이에 최고의 공직에 올랐으며
'의정활동' 역시 왕성하여 남들보다 수 걸음을 앞서간 인물이다.
그런데 공무를 수행하는 중에 예수님을 만났다. '이제 고마해라.'

바울은 지칠 줄 모르던 출세가도 행보를 과감히 접고
혐오와 위협과 결박과 제거의 대상으로 여기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가히 '간증집회' 다니며
공직에 있을 때보다 더 바빴을 드라마 같은
극적 반전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바울의 그 이후 삶이 여전히 살인적인 '스케줄'을 증거하고 있지만
방향은 하늘과 땅의 격차처럼 180도 바뀌었다.

많은 회심자가 세상적인 성공을 접으면
보상급부 차원에서 '교회적인' 성공에 눈이 어두운 법인데
바울은 세상에서 버린 만큼 교회에서 챙겨야 한다는 꿍꿍이 속이
전혀 없어 보인다. 정말 멋진 사내다.

물론 본인의 철지난 스팩 자랑했다. 사도권 변증에도 핏대를 올렸었지.
그러나 바울은 인간적인 스펙 운운하는 것이 어리석은 바보의 어법임을 알았고
자기 입술로 사도권 방어하는 것의 인간적인 초라함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말 그대로 복음 때문이다.
주께서 이방의 빛이요 백성의 언약으로 부르시고 세우신 큰 그릇인데
당시 논적들은 복음을 거절하는 방편으로 인신공격 차원에서
바울의 사도권 문제를 건드려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변호하게 만드는
수모의 구덩이를 일부러 팠던 거지.

바울의 자랑과 변론은 복음 때문에 그런 수모를 마다하지 않은
대인의 풍모라는 해석을 가한다면 아부하는 건가! 의심하지 마시라.
Paul 이름 빌려 쓰는 거 말고는 그에게서 어떤 대가성 뇌물도 받은 바 엄따!
사도행전 읽다가 열을 받아서 잠시 발열하고 있는 중이라고 이해해 주시라.

바울은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라면
자기를 공격하고 시기하고 곤경에 빠뜨리는 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루스드라 마실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 소유자를 간파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앉은뱅이 되어 걸어보지 못한 한 사람을 걷고 뛰게 만들었다.

온 동네가 출렁거릴 정도로 난리가 났다.
허메와 쓰스가 성육신을 했다며 그 앞에서 제사까지 지내잔다.
이를 듣고 취한 바울의 '즉각적인' 반응은
옷을 갈기갈기 찢고 동일한 몸뚱아리 가진 동일한 사람이란 것을 보이며
추하고 부끄러운 '나체'를 무릎쓰고 한 톨의 영광도 취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마땅히 주어질 것을 거부한 정도가 아니라 무리들의 분노를 촉발하여
죽도록 맞고 성 밖으로 던져지는 연고 없는 테러까지 감수해야 했다.

복음을 전한다는 건 정보의 전달을 넘어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데 그 복음을 부끄러워 않는다고 한다.
우리에게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 같이 나를 본받으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은 '나를 본받으라' 단계까지
이르러야 하나님의 공적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조국교회 생각하면 직무유기 상태가 아닌지 가슴이 멍멍하다.
나 스스로가 응큼하게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의 자리에 앉지나 않을까 두렵고
그런 유혹에 은밀한 타협의 팔을 뻗은 이가 적지 않아서다.
제도권 밖에서 이런 냉소 날리는 행위가 무례한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허나 이런 게 아직 안수도 안받고 여전히 가방끈 붙든
신학생의 '면책특권(ㅡ.ㅡ;)' 아니던가.

복음 증거할 때에 정말 조심해야 되겠다.
목에 루저로 내모는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이랑
어떤 식으로도 넘보거나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거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주께서 은혜 베푸시는 겸손의 자리는
결코 양보하면 안되는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중세연구 문헌들


My former students sometimes come back to visit at the university and say that now that they have aged a bit, they have developed a greater taste for history than they had as undergraduates.  So here is a menu to feed that taste. The middle ages still suffer from terribly inadequate stereotypes in our current understanding. The following list is long, but still barely touches on several of my favorite topics.  I have included some on medieval Islam and Central Asia, areas of current concern and newer writings.
J. H. Bentley, Old World Encounters, a survey of Central Asia in the middle ages—new to most of us.
C. and R. Brooke, Popular Religion in the Middle Ages, deceptively simple
A.H. Bredero, Christendom and Christianity in the Middle Ages, a useful recasting and reassessment of traditional themes, from theologians to the peasantry.
Peter Brown, The Rise of Western Christendom.  Similar to Dawson below.
 C. W. Bynum, Jesus as Mother, much more than the trendy title, on 12th.c. spirituality.
M.D. Chenu, Nature, Man and Society in the Twelfth Century, all of the topics of the title, spiritual and theological culture.
G. K. Chesteron, Aquinas, the Dumb Ox, and St. Francis of Assisi.  Classics.
Christopher Dawson, Religion and the Rise of Western Culture, and The Making of Europe. Old classics with a profound vision.  See also Dawson’sMission to Asia on the various religious missions from the Papacy to the Mongol Khans in the 13th and 14th centuries.
Georges Duby, The Knight, The Lady and the Priest: The Making of Modern Marriage in Medieval France.  See also C.S. Lewis below.
Ross E. Dunn. The Adventures of Ibn Battuta.  A telling of the story of the Moslem Marco Polo and his travels throughout the Middle East, Asia, and Africa.
Joan Ferrante, Woman as Image in Medieval Literature, on the perception of women in the high middle ages, avoiding the sterotypes.
Richard Fletcher, The Cross and the Crescent: Christianity and Islam form Mohammed to the Reformation.  A topic that is once again very current.
E. Gilson, Reason and Revelation in the Middle Ages, and The Spirit of Medieval Philosophy, old classics with a strong argument still worth considering seriously.
Jean Gimple, The Medieval Machine, on the technological culture of the middle ages.
Gustave E. Von Grunebaum. Medieval Islam. An introduction to the other medieval culture.
Aron Gurevich, Medieval Popular Culture, on the problem of the relation of high theological culture to church life and preaching.
C.H. Haskins, The Renaissance of the Twelfth Century.  If you thought there was only one Renaissance, think, and read, again.
Johan Huizinga, The Waning of the Middle Ages, or the same volume in another translation as The Autumn of the Middle Ages, an older classic on the later middle ages.
David Knowles. The Evolution of Medieval Thought.  A very readable introduction.
J. Leclerq, Love of Learning and the Desire for God, first defined the character and focus of “monastic theology.”
J. Le Goff, The Birth of Purgatory or Your Money or Your Life, problematic, but interesting.
Edward Grant, Physical Science in the Middle Ages. The scientific revolution grows out of medieval science.
Peter Jackson, The Mongols and the West.  We are learning that there is contact between Central Asia and Western Europe.
C.S. Lewis, The Allegory of Love.  A classic, still debated on “courtly love.”
L. K. Little, Religious Poverty and the Profit Economy in Medieval Europe, seemingly incongruous set of topics.
Thomas Madden, The New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describing the crusades as they were, but noting how they are and are not important on today’s political stage—one of the best on this subject.
B. P. McGuire, Friendship and Community: The Monastic Experience, 350-1250, on the human qualities of monastic life.
David Morgan, The Mongols. Current understanding of the effect of the Mongol empire on the middle ages.
Francis Oakley, The Medieval Experience, and The Western Church in the Later Middle Ages.  A good introduction and a sensitive interpretation. 
Thomas O’Meara. Thomas Aquinas, Theologian.  A newer introduction that expands our understanding of one of the greatest theologians and philosophers of the church.
Erwin Panofsky. Gothic Architecture and Scholasticism.  A way into the medieval mind.
J.R.S. Phillips, The Medieval Expansion of Europe, on Europe’s connection with Asia, Africa and the Atlantic world.
Josef Pieper, Scholasticism, and The Silence of St. Thomas.  Always worth reading.
Jonathan Riley-Smith, ed.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the Crusades.  A good introduction to an old topic that has become very contemporary.
R. W. Southern, St. Anselm–A Portrait in a LandscapeThe Making of the Middle Ages, or Medieval Humanism, three classics by one of the masters.
J. Sumption, Pilgrimage, detailed treatment of the central “image” of medieval religion.
Brian Tierney, The Crisis of Church and State, 1050-1300. And introduction with historical texts that reveal the uniqueness of the Western political tradition.  Anything by Tierney is good.
Marecelle Thiebaux, trans. and intro. The Writings of Medieval Women. Some of the most unique voices of the period.
Andre Vauchez, The Laity in the Middle Ages: Religious Belief and Devotional Practices. We always hear about the priesthood, it seems, in medieval history—here is an introduction to the rest of us.
B. Ward, Miracles and the Medieval Mind, takes seriously a neglected topic.
Lynn White, jr. Medieval Technology and Social Change, and Medieval Religion and Technology.  White virtually created our understanding of the dynamism of the middle ages.
One could do no better than to pick up the “Tales” of Chaucer, Dante’s Divine Comedy, or William Langland’s Piers Plowman for understanding the vibrancy of, as well as what we can learn from our ancestors.

교부전집 사이트

Migne판 교부전집(Patrologia Graeca et Latina, vols. 382) 저자별 리스트와 자료가 제공되는 사이트가 있다.


 2-3세기에 활동하고 현존하는 최초의 사도신경 관련 문헌을 저술한 히폴리투스 로마누스(Hippolytus Romanus) 전집 1권과 그의 유명한 [모든 이단들에 대한 거부(Refutationis omnium haeresium)]는 구글이 긁었다.

2012년 2월 21일 화요일

성경에 대한 Quadriga 독법

성경의 기본적인 독법에는 4가지의 요소(quadriga)가 있다. 이거 붙든다고 어두운 중세로 회귀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 접으셔도 된다.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에도 약간의 수정과 발전은 있었지만 Quadriga의 기본적인 틀은 그대로 보존했다 보시면 되겠다. 물론 그 시대들의 모든 신학자가 그런 건 아니다. '다양성이 있었다'는 건 모든 시대의 해석인 거 다 알잖아. 성경 텍스트의 사중적 의미가 성경 해석학의 전부라는 주장 아니다. 아이들이 이런 틀을 따라 성경을 읽도록 훈련하는 용도로는 딱이다. 첫번째 의미는 나머지 3가지 의미의 토대를 제공하고 있음을 주지하자. 

1. 역사적-문자적 의미(sensus literalis/historicus): res gestae (일어난 일) 주어진 본문에서 저자가 의도한 의미는 무엇인가? (what is the proper intention of the author in a given text?) 

2. 풍유적 의미(sensus allegoricus): fides/credenda (믿음) 본분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가르침은 무엇인가? (what is the doctrine that we should believe in the text?)

3. 도덕적/비유적 의미(sensus moralis/tropologicus): caritas/agenda (사랑) 본문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이웃 사랑 (what is the work that we should do in the text?)

4. 영적/신비적 의미 (sensus spiritualis/anagogicus): spes/speranda (소망) 본문에서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what is something that we should hope for in the text?) 

자녀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노트하게 하면 자녀들의 마음밭에 주석가의 씨앗을 뿌리는 셈이다. 자녀들이 성경읽는 보다 좋은 방법들이 있으면 한 마디씩 거둘어 주시기를...

2012년 2월 20일 월요일

칼빈의 종말론

의인이 죽으면 어케 되나?

개인적 종말론 즉 죽음 이후의 영혼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그가 처음으로 1534년에 저술한 신학적 문헌으로 Psychopannychia에 잘 나타난다. 무엇보다 Psychopannychia는 책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죽음과 몸의 부활 사이에 인간이 가진 중간적인 상태를 ‘영혼의 각성’으로 보는 입장을 영혼 불멸설과 더불어 설명한 책이며 이러한 영혼 각성설은 기독교 강요 안에서도 거의 바뀌지 않는다. 이 책의 저술 동기는 칼빈 시대에 재세례파 및 열광주의 분파들이 주장하는 영혼 수면설를 진압하기 위함이다. 이 책에서 칼빈은 먼저 죽음에 대한 묵상이 죽음에 대한 이방인의 음울한 태도와는 다르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죽음은 멸절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여러 유력한 교부들의 입장을 따라 칼빈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실화적인 상징으로 보고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을 안식(puietem) 누리는 상태로 이해한다. 이 안식은 성경이 말하는 ‘잠’의 본질인데, 나태(desidiam)나 무감각의 병적인 상태(ueternum) 혹은 취기에 빠져 골아 떨어진 어떤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항상 믿음을 수반하는 양심의 평온과 안정(conscientiae tranquillitatem et securitatem)을 뜻하는데 이런 평온과 안정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nisi post mortem) 결코 완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언급 이후에 칼빈은 죽음 이후의 영혼이 무의식 및 무감각의 수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누린다는 자신의 논지 지원하는 여러 성경적 근거들을 제시한다.

불신자의 죽음 상태를 생각하면 칼빈의 입장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불신자의 죽음은 ‘영혼의 수면’ 상태가 아니라 히브리서 10장 27절이 말하는 것처럼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아마도 중간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 같음)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아마도 마지막 심판에서 이루어질 일이 아닌가 싶다)만 있으리라’ 같은 상태다. 여기에 빗대어 의인의 죽음을 생각하면 의인의 죽음은 영혼의 무감각한 수면이 아니라 아브라함 품에 안긴 듯한 평강과 안식을 누리는 의식적인 상태라는 것이 쉽게 납득된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저자(바울?)는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에 대해 논하면서 하나님과 어린 양과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의인들 등등이 우리에게 허다한 증인으로 있다는 논지를 펼친다. 이분들이 다들 주무시는 무감각 상태에 있다고 보기에는 곤란한 구절이다. 사실 십자가에 나란히 매달린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그것을 '잠자리' 같이 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잖아. 최근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논쟁이 후끈 달아 오르고 있는데 과거에도 늘 있었던 논쟁인데 옷만 갈아입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양한 입장을 접하면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되고 포용력도 커진다는 유익이 없지는 않지만 믿음이 연약하신 분들에겐 그런 다양성에 대한 노출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링크된 Psychopannychia는 1545년 판본이다. (보기에는 컬러지만 다운로드 받으면 흑백으로 돌아간다.) 1536년 서문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공공연히 공격을 받는다면 진리의 극미한 조각도 뜯겨지지 않도록 어떠한 식으로도 참아서는 안된다(quum ex professo tentatur Dei veritas, nullo modo ferendum esse, ne tantillum quidem ex ea delibari)'는 젊은 칼빈의 비장한 결의가 타오른다. 겨우 약관의 중턱에 오른 칼빈의 언사지만 가볍지가 않다. 불혹의 어깨가 버거울 정도로...ㅡ.ㅡ

Psychopannychia 라틴어판 (1545)
Psychopannychia 불어판 (1558)

2012년 2월 19일 일요일

Louvain 대학의 라/불 대조판 문헌들

라틴어 문헌을 불어로 번역하여 라/불 대조판을 제공하는 사이트다. 권별로 Concordance 형식의 단어검색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루방 카톨릭 대학이라 개신교 인물들의 문헌들이 희귀한 아쉬움은 있다. 아직 마무리가 덜된 문헌들도 있지만 훌륭한 작업이다. 무슨 '덕'을 보자고 이런 지난하고 손해보는 작업까지 마다하지 않는지, 루방 대학에 감사를 표할 뿐이다.

Altenstaig의 신학용어 사전

예전에 소개한 바 있지만, 최근에 활자상태 너무도 좋은 Altenstaig의 신학용어 사전(Lexicon theologicum complectens vocabulorum)이다. 1517년에 출간된 사전의 1576년 수정판 되겠다. 16세기 대부분의 개신교 학자들이 통요한 신학용어 개념의 문맥적인 파악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문헌이다. 컬러에, 고화질에, (대충 훓어본 바로는) 알바의 손가락도 등장하지 않는 깔끔한 스캔 파일이다. 구글도 '진화'한다. 쌩유를 전한다.

2012년 2월 18일 토요일

멜랑톤의 방법론

멜랑톤은 케익을 어떻게 먹고 어떻게 가지는지 알았던 사람이다. 그는 Dialectices의 1-3권을 판단적인 변증으로 규정하고 4권을 발견적인 변증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발견과 판단이란 키케로/아그리콜라 변증학 이분법을 아리스토 얼개 안에서 담아낼 수 있었다.

Erotemata dialectices 안에서 멜랑톤은 De methodo를 논한다. 여기서 그는 방법론을 변증학의 판단적인 부분과 연결한다.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의 방법론 개념을 소개한다. '방법은 이성에 의해 하나의 방식을 정립하는 채득된 성향이다. 즉 방법은 성향, 학문, 및 기술로서 어떤 숙려를 통하여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광통할 수 없고 대단히 광활한 지역을 뚫고 사물들의 혼돈을 뚫고 지나가는 길을 찾아 개통하는 것이며 상정된 주제에 속한 것들을 정연하게 끄집어 내고 정렬하는 것이다.'

멜랑톤 안에서는 범주를 서술로 간주하는 아리스토 개념이 범주를 박스로 처리하는 개념에 의해 압도된다.

멜랑톤은 방법론이 질문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가 물은 열 개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 언어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Quid vocabulum significet?
그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An sit re?
그것은 무엇인가? Quid sit res?
어떤 부분들이 있는가? Quae sint rei partes?
그것의 다양한 종류들은 무엇인가? Quae sint species?
그것의 원인들은 무엇인가? Quae causae?
그것의 결과들은 무엇인가? Qui effectus?
그것과 인접해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Quae adiacentia?
그것과 관계된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Quae cognata?
그것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인가? Quae pugnantia?

멜랑톤의 자신의 10가지 질문들과 Posterior Analytica 안에 있는 4가지의 아리스토 질문들(An sit? Quid sit? Quod sit? Quare sit?)과 비교한다. 이는 자신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비교 되겠다.

갈렌의 세 가지 교육의 방식(viae doctrinarum)은 분석과 종합과 정의이나 멜랑톤은 종합을 주로 사용한다.

Method of Method

Methodus의 극단적인 의미는 '추구함' '뒤좇아 따라감' '뚫고 지나가는 길' 등이다.

그리스 사람에게 Methodia는 기술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특성에 있어서의 기술 혹은 계략을 의미하며 특별히 세금이나 빚을 수거함에 있어서의 기술을 가리킨다. 헬라어 Methodus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 혹은 탐구하는 것, 탐구를 수행하는 방식을 의미하되 물리적인 과정이 아니라 논리적인 과정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 안에서 발견되는 개념이다.

소크라테스 전통에 따르면, Methodus는 대화의 개념 혹은 변증적인 과정과 결부되어 있으며 가르침의 과정이란 개념과도 연결되어 있다. 중세에는 methodus가 교과과정 중의 한 분야를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 용어를 수사학에 있어서 하나의 주장을 인지하고 하나의 테제를 다루는 수단을 지시하는 용도로 쓰였다.

한편 methodus는 의학과 특별한 연관성을 갖는다. 고대 그리스 지역에서 의학이란 합리성이 고려된 기술로서 확립된 유일한 활동이었었다. 라무스가 방법론에 대해 저술할 때에 히포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 갈렌 및 다른 아리스토 해설가를 인용했다.

의학은 환자를 치료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치료 자체를 설명하기 위함 때문에도 합리성이 발휘된 기술로 나타났다. 의학은 기호들을 활용하고 해석하는 일과 기억과 같은 심리적인 활동 과정에 대한 연구에 깊이 관여한다.

아리스토는 질문들을 어떻게 올바른 질서를 따라 배열할 것인지와 방법론과 관련된 많은 물음들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집중했다. 우리는 안전을 취득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여기서 방법이란 무엇보다 지성적 혹은 논리적 과정을 일컫는다.

그리스 사람에게 법의 기술은 사람과의 개별적인 만남과 실습을 통해 가르치고 배운다. 법은 의학과 같은 방식의 방법론에 접근하지 않는다. 의학에서 방법론의 문제는 어떤 사실들이 알려지고 알려지지 않은 외부의 세계에 접근하는 이성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법은 이성적인 배열이다. 오직 수사학과의 연관성을 통해서만 발휘되는 방법이다.

방법론에 대한 중세적 관심은 학문적인 탐구보다 학교의 교과과정 조직과 교육학적 과정에 근간을 두고 발전을 했다. 방법론은 그래서 교과과정 문제였다. 방법은 지식에 이르는 지름길에 다름 아니었다. 이처럼 16세기 이전에 대학 교사들은 그들이 가르치는 주제들의 조직에 관심을 가져왔다. 변증학 전통은 추상적인 사유의 기술 혹은 과정의 질서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라무스 논리학 계속

모든 가르침은 일반에서 특수로 이동한다. 삼단논법 역시 동일하다. 다만 정의와 분배 혹은 분할에 의해 작동한다. 용어가 정의된 이후에는 부분들로 분할된다.

라무스의 특이한 점은 이렇다. 그는 변증을 잘 논술하는 기술이라 하였는데 그것의 부분들이 inventio와 iudicium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다. 라무스는 이분법적 테이블 만드는 것에 만족하고 통합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사이의 기본적인 구분에 대해서는 해명을 회피한다. 

라무스의 애매성에 대한 혐오와 추상주의 및 수학에 대한 극렬한 찬사는 고대 플라톤 사상의 유산과 연결되어 있다. 

종(Genus)은 모든 부분들에 대해 본질적인 것들의 전체이다. 특별한 개체들은 종의 부분이다. 동물은 개별 동물들의 종이다. 인간의 개별 인간들의 종이다. 인간의 동물에 대해서는 개별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개별전인 존재이다. 

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증의 연쇄성은 라무스 방법론의 특징이다. 

플라톤은 사물들의 통일성을 보증하는 일종의 연쇄적인 변증과 결부되어 있다면 아리스토 경우에는 분할과 결부된다. 라무스가 이런 관계성을 주장한다. 

라무스는 유명론자 혹은 실재론자? 사물들 자체 외에는 모든 것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라무스의 변증학은 보편적 개념이 실재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유명론적 교리를 암시하는 듯하고, 동시에 마음의 내용들이 구별된 대상들과 동일시 된다는 면에서는 보편이 우리의 의식 밖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실재론적 교리를 암시하는 듯하다. 

보편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사물의 세계에 있는가? 라무스는 침묵하는 입장,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에 판단하기 곤란하다. 


2012년 2월 17일 금요일

아들과의 대화 2

오늘도 아들을 태우고 학교로 핸들을 돌렸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타자마자 내가 먼저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아빠: 아들아, 아빠가 오늘은 예수님이 죽으신 장면을 읽었단다. 많은 생각이 들더구나.

아들: 아빠, 그런대요~ 예수님이 아프시고 슬퍼하고 죽으시는 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아요. 거기에 보면 신들이 화내고 싸우고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잖아요.

아빠: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사실 비슷하지.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는 달리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단다. 죄 말고는 우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으시지. 그리고 걔네들은 그리스 사람들의 힘샌 아바타에 불과해. 그렇다고 예수님도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바타로 보면 안되는 거 알지?

아들: 그런데 아빠, 창세기에 보면 사람들이 죄를 짓고 타락한 것을 하나님이 보시면서 후회도 하잖아요. 그때는 사람으로 오신 것도 아닌대.

아빠: 물론 그렇지.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시기 전에도 우리에게 늘 가까이 오셨고 가까이 계셨단다. 구약에서 관찰되는 하나님이 마치 그리스 신들처럼 보이는 것은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소통하신 방식이기 때문에 비슷한 것이지 본질은 전혀 다르단다. 하나님은 몸으로 오시기 전에도 우리에게 가까이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실 때에 전혀 새로운 계시를 보이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게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하신 거란다.

아들: 아빠, 이것도 궁금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하고 모든 것을 아시는데, 왜 슬퍼하고 후회하고 우시고 그러세요?

아빠: 네가 말한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계획하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란다. 그런데도 마치 몰랐던 것을 알고 경험하신 것처럼 인간적인 감정을 보이시는 게 이상할 수 있겠구나. 아들아, 성경을 자세히 보면 늘 두 가지가 동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단다. 세상을 창조하신 동시에 그것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명령의 방식으로 전달하신 동시에 그것에 대한 사람의 반응에 일일이 개입하며 소통하고 계시다는 것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늘 가까이 하시는데 당신의 마음과 뜻을 전달함에 있어서는 명령만 덜렁 던져 주지 않으시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행실을 일일이 살피면서 그것에 대해 반응을 해 주시므로 더 깊은 소통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거란다. 슬퍼하고 후회하고 우시는 건 하나님이 무능하고 무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지만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얘기지. 지금은 다 알지 못하겠지. 아직 어리니까 괜찮다. 말이 길었지만 한 마디만 더 해줄께. 그리스 신화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하나님은 무조건 그것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지나친 반응일 수 있단다. 그리스 신화가 구약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모습을 카피했을 수도 있거든. 일종의 페러디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지. 진짜 주변에는 늘 가짜가 많은 법이거든.

아들: 아빠, 이건 조금 다른 얘긴데요. 모든 것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왜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죄를 좋아하시는 거 아니예요? 좋아하지 않는다면, 전능하신 분이신대 다르게 계획하실 수 있는 거잖아요.

아빠: 오늘은 은진이가 질문이 많구나. 답변이 곤란해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얘기를 들으면 소화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구나. 아주 간단하게 두 가지로 답한다면 이렇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되 마치 하나님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을만큼 고매하게 만드셨고 우리의 가치를 그런 차원까지 높이셨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죄짓는 것까지도 허용하신 거란다. '허용'이란 말이 어렵지? 아담과 하와의 가장 높은 자유를 존중해 주셨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둘째, 죄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죄는 욕하고 나쁘게 행동하는 외적인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근원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을 떠난다'는 의미가 있단다. 하나님은 생명이고 하나님은 모든 좋고 올바른 것들의 주인이신 거 은진이도 알지.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런 그분을 떠난다는 건 죽음이고 모든 나쁘고 그릇된 것들만 알고 행하게 된다는 뜻이겠지. 이제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정말 '나를 멀리 멀리 떠나라'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을까? 만약 그것을 좋아하신 분이라면, 어떻게 자신이 창조한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말이 안되잖아. 하나님은 늘 선하시고 옳으신 분이시고 당연히 악하고 그릇된 말과 행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텐데 그걸 좋아하실 리가 없잖아.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생명을 떠나 죽음으로 돌진하는 걸 즐기시는 심술쟁이 결코 아니거든.

아들: 하하하...아빠, 천사들은 순종만 하잖아요. 그런 왜 마귀가 되었어요?

아빠: 천사들~~ 그분들에 대해서는 아빠가 큰 관심이 없는데....ㅎㅎㅎ 성경을 보면 천사들은 로보트가 아니라 '뢰셔널 비잉'으로 분명히 묘사되고 있단다. 의지도 있고 생각도 하고 하나님 및 인간과 소통도 하는 존재라는 얘기다. 물론 하나님과 늘 대면하고 있다고 하니 하나님 면전에서 함부로 죄를 지을 수는 없겠지. 그러나 성경은 천사도 자신의 의지를 따라 타락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단다. 땅의 일들도 잘 모르는 우리의 지적 수준을 잘 아셔서 그런지, 하나님은 성경에 천사들을 비롯한 하늘의 상황을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신 것 같다. 성경이 열어준 그 만큼만 보면 된다는 의미겠지. 그러니 너도 아빠처럼 그분들에 대해서는 너무 지나친 호기심 갖지 말거라.

아들: 와~ 재밋다. 아빠, 다 왔어요.

아빠: 오늘은 짧은 시간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네.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공부 열심히 해. 학교에선 선생님이 대장인 거 알지? 아이라뷰~~

아들: 아이러뷰 투~~ 아빠! 바이~~

십자가의 역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아주 많이~~ 승리가 실패일 수 있고 실패가 승리일 수 있어서다.
이는 중국의 새옹지마 개념과는 다른 역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은 어떤 것이었나?
'하나님의 아들이면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거기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노라.'
 여기에 그들은 궁시렁 멘트 한 마디를 덧붙인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면
이제 구원하실 게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랬거든' 

십자가의 죽음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아들됨을 인정해 주겠단다.
십자가 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신 증거란다.
여기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하나님도 그를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는 상황이다.
허나 예수님은 이런 사면초가 상황의 원흉들에 대해 일언반구 없으셨다.
민중의 기대감을 해아리지 못하였고
그런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성 여론이 조성되어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예수님께
호의적인 마음의 소유자들마저 등돌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면 다 밝혀질 거야'라는 변호의 한 마디도 내뱉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
군중이 묻는 물음과 기대감은 묵살되고 말았다.
열두 영보다 많은 천사들 중 소수의 선발대만 파견해서
십자가를 몽둥이로 삼아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능멸하며 깐죽댄
군병들과 군중들을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팰 수도 있었는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냥 죽으셨다.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 주셨다.

이는 군중들의 기대와 물음에 반응하는 결정이 아니셨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양식이라 하셨던 자의 불가해한 고집이다.
그런데 인간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특이하다.
그들은 '그 증거가 참'이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감을 그게 무엇인지 스스로 알지를 못한다.
자신들도 모르는 피상적인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보내신 이의 뜻 이루는 것을 접는다면 그것보다 큰 실패는 없을 것이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이 아니라 동일하게 썩지도 않는
불량식품 때문에 사는 인생으로 전락하니
이보다 더 처참한 낭패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교회가 주님의 보냄을 받았다면
주님의 뜻 이루는 일에 착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의 도덕적 평균치 주변에서 이르지 못하는 교회들도 있어
세상의 빛은 고사하고 세상의 신음과 탄식을 더 깊게 만드는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바늘 크기의 구멍만 있더라도
숨고 싶어하는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지금 교회가 당장 풀어야 할 당면과제 외면하고
우리는 우리의 길만 가자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들이댄 잣대에 겨우 턱걸이한 수준에
혹 이르렀다 할지라도 모가지 뻗뻗한 교만과 자만의 자리로
곧장 달려가진 말자는 얘기다.
세상의 비판과 혹평의 입을 틀어막는 게 교회의 도리인 것처럼은
착각하며 살지는 말자는 얘기다. 
이에 대하여는 억울함이 진정한 성공의 첩경일 수 있겠다...

라무스의 변증학 in Dialecticae institutiones

Dialecticae institutiones는
라무스의 변증학과 그의 사상 전체가 형성되는 메트릭스 문헌이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변증학의 기원, 변증학의 기술 혹은 가르침, 및 변증학의 실행
(natura, doctrina or ars, and excercitatio)이다.

1. Natura dialecticae: 라무스는 변증학을 담화의 능력, 혹은 논의하는 힘이라고 규정한다.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disserendi)는 것의 라무스적 의미는 '대화하다', '논쟁하다,' '식별하다,' '이성을 사용하다' 등과 동일하다. 이처럼 이성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사유와 연결되지 않고 말하는 것과 관계된다.Cf. Thomas Spencer는 To discourse is the declare one thing that is lesse knowne, by another thing that is more knowne (The Art of Logicke, p.7)이라 했다. 스펜서의 금언 하나 추가하자. The more logicall a man is, the more is he like a man, and the lesse logicall, the lesse like a man who is a reasonable Creature. If this be true (as it is most true) then must it be granted that the precepts of this art, are profitable for the vse of man in the highest degree. 이는 독자서문 3번에 나오는 내용이다.

2. 탁월한 웅변가 혹은 저술가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플라톤의 Phaedrus
유사 키케로의 Rhetorica ad Herennium
퀴틸리아누스의 Institutio oratoria

3. 라무스의 문맥에서 Natura는 작용의 본질 혹은 원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natura dialecticae 및 naturalis dialectica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태생적 변증학'을 의미하며 플라토닉 방식으로 말하자면, "성향, 이성, 마음, 하나님의 형상, 및 영원한 빛을 필적하는 빛을 가리킨다." 이런 라무스의 이해는 아그리콜라 이전의 스콜라적 논리학자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나아가 라무스는 '변증학의 기술은 자연적 변증학을 모방하고 연구하여 발전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4. 기술은 말하기와 관련해서 발생되는 것이라면 말하기는 전적으로 교사의 독차지다. 라무스의 논적 아드리엔 투네베(Adrien Turnebe)는 그리스 사람들이 변증학을 사유나 추론이나 주제 설정하는 것과 결부되지 않고 말하기와 결부시킨 것을 강조했다.

5. Dialectica as Ars or doctrina: 라무스의 변증한 개념은 키케로 개념의 확장이요 세련된 형태를 입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변증학이 '잘(bene)' 담화하는 기술로 규정한 것은 태생적인 변증학과 변증의 '기술' 사이의 차이를 가리키기 위함이다. 변증의 기술을 탁월하게 연마하는 것과 관련해서 습관(habitus) 혹은 습성 혹은 취득된 기술이 중요하게 사려된다.

6. 변증의 기술(ars dialecticae)은 태생적인 변증(natura dialecticae)과 관계된다.

7. 변증의 기술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주제 설정하기 및 배열하기. 라무스는 아그리콜라가 따르던 키케로/아리스토 전통를 따라 변증을 명백하게 형식화된 문제들을 푸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라무스는 모든 논리학과 변증에서 범주들과 서술들에 대한 논의를 제거하고 주제별 논의만을 선호했다.

8. Inventio: 라무스의 종류별 논제들 혹은 소재들(generic arguments)은 14가지:  causes, effects, subjects, adjuncts, disagreeings, genus, form, name, notations, conjugates, testimonies, contraries, distributions, definitions.

9. Judicium or Syllogismus: 라무스의 판단(judicium)은 아래와 같이 세 가지의 단계로 구성된다. 이러한 삼단계 판단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정작 판단(judicium) 자체는 이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중세나 근대의 형식 논리학이 관심을 보이는 '명제'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삼단논법(syllogism) -- 주장의 연쇄(concatenation of arguments) -- 종교(religion)

10. 첫번째 단계(syllogism)에서 하나의 주장이 하나의 질문과 견고하게 매치되고 그래서 질문 자체는 true or false로 인식된다. 이러한 배열(dispositio)가 바로 삼단논법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주장에 하나 발견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물음과 결부된다. 라무스는 전통적인 shsqjqdmf 이탈하여 주어와 술어의 개념을 첫번째 용어와 두번째 용어라는 말로 대체하여 시공간적 효과를 강화한다.

11. 삼단논법 구조에서, 첫번째 것(대전제)을 propositio, 두번째 것(소전제)은 assupmtio, 결론은 complexio라 하였다. 라무스식 삼단논법 사례: 라무스의 귀납법은 참으로 이상하다.

       Propositio: 모든 동물들은 느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Assumptio: 모든 사람들과 모든 짐승들은 느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Complexio: 모든 동물은 사람 아니면 동물이다.

12. 두번째 단계(beginnings of method): 많은 주장들을 서로 일관된 것들을 엮고 배열하는 단계이다. 이 부분을 Ramist Method라 부른다. 이 단계는 끊임없이 정의하고 분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되 끊어지지 않는 연쇄를 만들어 하나의 설정된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13. 세번째 단계(religion): 이것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은 동굴의 그늘에서 해방되며 모든 것들은 거룩한 빛 즉 하나님을 가리키게 된다고 라무스는 주장한다. 이는 그가 이후에 다루는 변증의 내용과 연관성이 떨어지며, 다만 라무스 자신의 변증에 플라톤 사상의 윤택을 입히고 아리스토 추종자들이 가진 상처에 소금을 문질러 넣는 행위라고 Ong 아재는 평가한다.

14. 라무스는 철학과 변증학과 물리학과 윤리학 중에서 우리의 마음이 안내자로 삼아야 할 것은 변증학이라고 주장한다. 변증으로 말미안아 마음이 하나님께 이르는 것은 혹자로 하여금 버질이 우주를 그 안에서 부양하고 있다고 말한 영에 이르는 것이며, 플라톤의 세계정신에 이르는 것이며 스토아의 섭리에 도달하게 한다고 라무스는 말한다.

15. 그리고 라무스는 물리학, 산술한,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 실재적인 변증으로 변형될 때에 존재하며 그 모든 교과과정 과목들의 흠결없는 통화를 통하여 마음은 하나님께 도달하게 된다고 말한다.

16. Dialectic as Usus or Exercitatio: 이 세번째 파트에서 변증의 기술은 삶으로 적용된다. 기술이 그 자체로는 죽은 표면이요 생명력 없는 교훈들의 그물망일 뿐이다. 라무스는 아리스토 형이상학 같은 것보다 플라톤의 Republica와 키케로의 De natura deorum을 선호한다. 왜냐? 다양한 사실들과 의견들을 제공하며 설명하는 'discursive논설적인'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17. 라무스의 말이다. "인간의 삶 전체는 이성의 사용 즉 태생적인 변증의 실행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삶 전체의 자원을 이 이성의 기술 혹은 본성적인 변증의 기술을 연구하고 활용하는 일에 동원하자. 기술은 교훈들을 통해 알려지는 것보다 실행을 통해서 더 잘 알려진다. 우리는 이러한 실제적인 실행에 익숙한 노인들을 공경해야 한다."

18. 라무스의 본성적인 변증 개념은 학문적/심리학적 설명으로 입증되지 않고 실천하는 방식으로 해명되는 것이다. 먼저 교실에서 실행된다.

19. 철학자는 강압적인 기억술을 사용하나 라무스는 외적이고 그림과 같이 명시적인 기호들과 표상들을 배열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라무스가 주장하는 기억술이 가장 기본적인 기초는 '사물들 자체 안에 발견되는 질서'이다.


Ramus의 Dialectic in Aristotelicae Animadversiones (1543)

라무스의 새로운 변증학은 먼저 두 문헌에서 정립된다. Aristotelicae Animadversiones:  아리스토 Organon에 대한 독설을 담은 문헌이다. Dialecticae institutiones (1543): 이것은 대단히 특이한데 애매한 아그리콜라 변증학을 정립하되 키케로적 심리학 안에서의 정립을 시도한 문헌이다. 

Aristotelicae Animadversiones를 보자.

1. 라무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최초의 철학자로 간주한다. 그가 발견한 불은 인위적인 지혜(artificiosa sapientia)이다. 어떤 변증적인 원리들(quaedam cica dialecticam principia)로 말미암아 지혜는 학문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2. 프로메테우스, 제노, 소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아리스토 이전 철학자들은 실재적인 변증학을 따랐는데 그 중에서 플라톤이 변증학 혹은 철학의 절정에 이른 인물이다. 그러나 아리스토가 플라톤을 계승할 때에 변증학적 진리와 실천은 부패하게 되었단다. 물론 그 부패의 원흉은 아리스토 자신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라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 라무스는 아리스토 자신이 지금은 유실된 자신의 문헌에서 변증학을 비공식적 방식으로 활용하여 그것을 부요하게 만든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 Ong 아재의 생각이다.

3. 라무스는 변증가들 혹은 철학자들 무리를 '본성을 따르는 좋은 자들'과 '아리스토 철학의 거짓된 기술을 따르는 나쁜 자들'로 구분한 이후에 아리스토 Organon 안에 표상된 변증의 잘못된 기술과 실천을 먼저 사려한다.

4. 라무스는 아리스토 문헌들 중에 Categories와 Topics I-VII 및 폴피리의 Introduction을 발견(invention)과 연관짓고, On Interpretation과 Prior Analytics와 Posterior Analytics를 형이상학 영역으로 묶어 판단(judgment)과 연관짓고, Organon 나머지 부분은 Topics VIII과 Sophistical Argumentation은 변증학의 사용과 연관을 지었다. 물론 라무스의 논적들(Gouveia, Riolan, Charpentier, Schegk)은 아리스토 문헌들을 라무스적 변증학의 구미에 맞도록 재편한 것에 맹공을 퍼부었다. 

라무스는 폴피리의 Introduction에서 그가 자신의 설명을 왜곡하고 있으며, 특별히 species와 같은 용어의 올바른 사용에서 이탈하고, 변증학에 문법을 도입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Categories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척하지만 그것들을 혼돈과 잠재성 속에서만 다룰 뿐이라고 주장한다. Topics는 주장들을 발견하는 소재들(locis argumentorum inveniendorum)을 제공하나 심각한 혼동을 일으키고 7권의 책들 각권에서 네 가지의 질문 What are the accidents? the Genus? the properties? the definition? 만 되풀이할 뿐이라고 일갈한다. Rhetoric에서 아리스토는 발견의 세 가지 방식 즉 원인 보편적인 주장, 그 둘 사이의 어떤 것을 지정함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