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31일 화요일

새해인사

2013년, 시간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뒤돌아 보면 부족한 자와 자나깨나 동행해 주신 그분의 흔적들로 수북한 1년치의 세월을 보낸 듯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 안에서 존재하고 살며 기동하기 때문에 당연하고 불가피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매번 한 해를 결산하는 지점에 서서 분에 넘치도록 베푸신 은혜와 복을 계수해 보면 그분 앞에 주저앉아 감사의 탄성을 밀어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슬픈 일과 기쁜 일, 아픈 일과 유쾌한 일, 괴로운 일과 흥겨운 일, 억울한 일과 과분한 일, 작은 일과 큰 일, 답답한 일과 후련한 일 등등으로 각자의 안목을 따라 지난 1년을 분류하고 지난 2013년에 저마다 다양한 라벨을 붙여 기억의 창고에 보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부요한 지혜와 지식는 얼마나 크신지요! 사람들의 최고급 지성을 다 모아도 능히 헤아릴 수 없을 듯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기억에서 일순위로 삭제하고 싶은 고난과 역경의 순간들도 "여호와는 은혜롭고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가 크시도다 여호와는 모든 것을 선대하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할 이유로 능히 바꾸시는 분입니다. 2013년내내 그러시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 신실하신 2013년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시간의 매듭을 하나 추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2013년은 페친들이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소통이 주는 기쁨과 활력소가 저로 지금까지 기쁨으로 지내게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영광과 의가 페친들의 새해를 앞뒤로 호위하는 은혜가 마르지 않고 넘치기를 소원하며...Blessed New Year~~

펠리칸의 교리사 1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교리는 교회의 일차적인 활동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세상의 변혁을 도모하며 종말에 이루어질 소망의 절정을 갈망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언제나 함께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사랑이 제일이다. 믿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언제나 학교 이상이다. 심지어 계몽주의 시대에도 교회를 학교의 기능으로 축소하지 아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마치 학교에 못지않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교리와 고백의 형태로 표출하기 때문이다. 예전은 의식과는 구별되고 교회의 정치는 어떤 기관의 조직체와 다르며 설교는 수사학과 다르며 성경 해석학은 고전학과 다르다.

기독교 교리가 역사 속에서 취한 형태는 전통이다. 전통은 교리라는 용어처럼 소통의 과정과 내용을 동시에 가리킨다. 전통은 죽은 자들의 산 신앙이며, 전통'주의'는 산 자들의 죽은 신앙이다. 교회가 믿고 가르치는 바를 고백한 것은 진공상태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교회 안팎의 공격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신약 저자들 중에 유대인이 아닌 유일한 사람은 누가이다. Hermas와 Hegesippus 외에는 어떠한 유대인 교부도 없다. 특이하다. 저스틴 마터는 사마리아 출신이고 이방인 교부이다. 문제는 헬라적 유대인과 헬라적 유대 기독인 사이의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연속성 문제에 대한 이해차에 있었다.

구약의 권위와 유대교/기독교 사이의 연속성 본질에 대한 논쟁은 교회사 전반을 관통하는 전통의 무엇보다 앞서 시도된 형태였다. 어거스틴: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로 보는 기독교적 이해와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이해하는 것들은 그런 논쟁의 중요 사례였다. 교정과 성취라는 교리는 이어지는 세기들 속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되었다.

아타나시우스: 여러 교부들의 이단적인 언어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자기 편에서 활용했고, 어거스틴 역시 헬라 교부들을 펠라기안 사상의 혐의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9세기의 갓초크는 어거스틴 권위에 호소했고, 동방과 서방 교부들의 논쟁도 전통의 언어를 맴돌았고 종교개혁 인물들도 카톨릭적 전통에의 충실을 보이고자 했다.

이상의 논쟁들과 이슈들은 2-3세기 기독인이 유대적 전통을 어떻게 수용해 왔는지와 직결되어 있다. 

차머스의 인명사전

2013년 12월 29일 일요일

기도란 무엇인가? 2

기도에 대한 두번째 경계로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방인이 드리는 중언부언 기도는 피하라고 말합니다. 중언부언 기도는 의미도 없는 음향을 반복해서 말하거나 무의미한 혹은 일관되지 않은 말을 끊임없이 내뱉는 기도를 뜻합니다. 이방인의 중언부언 기도는 신에게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거라는 그들의 그릇된 신지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파장으로 하나님의 고막을 두드려야 비로소 알고 반응하실 것이라는 오해 말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묵상도 다 아시고 생각이란 내면의 언어로 옷입기 이전의 소원까지 다 들으시고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재가 기도의 왜곡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알고 그 지식에서 자라갈 것을 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영혼의 일반을 지으셔서 모든 정신적 활동 일체를 어떠한 중개물도 없이 직관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앞서 아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법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외식하는 자나 이방인의 무슨 '주문'이나 '주술'을 기도로 간주하고 치성을 올리는 기도문화 양산의 주범이나 옹호자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전지하고 전능하고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런 분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기초한 전도자의 권고를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 방대한 언어를 쏟아내고 오랜 시간동안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 경건이나 영성을 좌우하지 않습니다. 열성적인 기도생활 속에 스스로도 속는 경건의 막대한 거품이 있다는 것을 경험자는 알 것입니다.

그렇다고 미지근한 기도나 건성적인 기도나 형식적인 모양 갖추기식 기도를 권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드리는 하나님 사랑의 일환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와 같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보다 뜨겁고 깊고 절박하고 집중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물리적인 요소들 때문에 경건한 기도자의 최면에 스스로 빠지지는 말라는 차원에서 예수님의 경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Hebrew-Latin Lexicon

Marcus Marinus, Arca Noe (1593)

기도란 무엇인가? 1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이 그의 제자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처럼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먼저 두 가지를 경계해야 한다고 답합니다. 첫째,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인간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에서 기도하는 가식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구제할 때에도 사람에게 들켜 인간적인 영광을 취하려고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 앞에서 행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간구의 은밀한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면, 기도의 목소리가 타인의 귀로 들어가면 나도 모르는 본성적인 가식의 발동이 틈탑니다. 사람에게 보이도록 드러내고 사람에게 들리도록 기도하면 결국 마음의 순수한 동기에는 미세한 왜곡이 가해지고 하나님과 스스로를 속이는 '무의식적' 결과도 낳습니다. 

기도는 경건한 삶을 증명하고 공표하는 공증서가 아닙니다. 기도는 보이지 않으시고 은밀한 중에 행하시고 갚으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일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중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지극히 은밀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다른 어떠한 요소도 틈타거나 간격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이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도는 사람들의 눈과 귀에 노출되지 않도록 문닫힌 골방에서 가장 깊고 은밀하게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저도 늘 소리를 내어 사람에게 보이고 들리는 기도의 문화가 익숙한데 예수님이 제자에게 교훈하신 기도법에 의하면 변화가 필요할 듯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뿌듯함이 사람들의 눈에 관찰되는 방식으로 확인될 때 비로소 스믈스믈 차오름을 경험상 모르지는 않습니다.

강하게 부르짖는 합심기도 문화가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소요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문화에 변경을 가한다는 것이 교회에 위기를 초래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가진 분들이 계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 합심기도 사례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한국식 기도가 성경적 토대에 견고히 세워져 있다고 확신하는 분들도 아마 많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과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듣고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도 합심기도 문화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선명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생각해야 할 대목은 집단적인 기도가 기도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신 기도법은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제 눈에는 한국교회 기도가 이 부분에서 다소 취약해 보입니다.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 앞에서 개개인의 신앙과 관계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실제로 뭉쳐서 기도하면 충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이상한 포만감과 뿌듯한 군중심리 때문에 뒤따라야 할 개인의 신앙과 삶에서의 적극적인 성화의 의지와 실현이 희석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기도가 언어 현상에만 머무는 경향은 개인기도 문화에도 동일한 것 같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생활했던 미국 교회에는 집단적인 기도가 거의 없습니다. 대신에 개인적인 기도가 주된 문화로 굳어져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도들의 강한 신앙적 역동성을 느끼기가 쉽지는 않지만 성도 개개인의 삶에서는 기독인의 실천적인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기도를 언어만이 아니라 삶으로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은밀한 개인적 관계성이 그들의 삶으로 결실하고 표출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배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집단적인 기도와 개인적인 기도는 병행해야 하겠고, 개인적인 기도는 은밀한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듣고 갚으시는 하나님께 올리되 개개인의 실천적인 삶이라는 보이는 기도도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절대적인 관계성

쇠렌의 [두려움과 떨림](Fear and Trembling)에 의하면, 진정한 믿음은 "절대적인 존재와의 절대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브라함 이야기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이삭을 희생물로 삼아야만 했다. 부모가 자녀를 죽여야만 한다는 조항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법령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믿음의 조상은 인륜에 반하는 명령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했다. 절대적인 존재와의 절대적인 관계성이 없었다면 그런 믿음의 행위는 산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쇠렌의 판단이다. 

마리아와 요셉의 경우도 동일하다.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아이를 갖는다는, 보편적 자연법에 정면으로 충돌되는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다. 창조의 질서만이 아니라 죽음의 돌세례가 마땅한 율법의 요구와도 모순되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벌어졌다. 놀랍게도 마리아는 당황하고 놀랐으며 요셉도 놀라고 아팠으나 찬양하며 순종했다. 이런 순종의 단절적인 판단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절대적인 관계성 없이는 발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쇠렌의 설명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성은 어떠한가? 잔잔한 미풍에도 심하게 요동치는 경박한 관계성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된다. 관계성은 신앙의 한 전제이다. 주님과의 관계성은 믿음으로 사는 삶의 전제이다. 전제가 부실하면 삶도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화목한 관계의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되시기에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게 정상이다. 그러나 실상은 관계성이 협박의 무슨 수단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뭘 해주지 않으면 관계를 끊겠다는 식이다.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주님과의 견고한 관계성에 도전을 받는다. 힘들고 절망적인 때일수록 믿음이 더 강하여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할배와 요셉/마리아의 순종이 의식을 맴돈다.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라며 죄가 없어 전적으로 순결하신 분이면서 죄와 저주와 억울함과 죽음의 잔을 담담히 기울이셨다. 해석할 독법이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일들이다. 아~~~ 사활을 건 믿음의 삶을 떠받치는 진정한 관계라는 것은 과연 이런 것인가! 주님과의 절대적 관계성을 하루종일 깊이 상고하고 싶어지는 날이다.

가까이 오신 하나님

성탄절이 지나면 예수님의 나심에 대한 관심도 종결된다. 어떤 특정한 날을 기념하는 것의 병폐이다.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한번 오시는 단회적인 이벤트성 인물이 아니시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성육신의 의미는 세상 끝날까지 종결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떠나지 않으신다. 구유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의 죄악된 몸을 입으시고 오시었고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인간의 마음에 영원토록 계신단다. 이는 하나님의 성은에 대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평생 몸 둘 바를 몰라야 할 이유겠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오시려고 우리처럼 되신 하나님은 더 이상 멀어지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섭리

가이사 아구스도 치하에 원활한 통치와 세금징수 목적으로 로마제국 전역에 호적령이 떨어졌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의 발걸음을 옮긴 장소가 중요하다. 그들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다윗성 즉 베들레헴 지역으로 갔다. 이유는 요셉이 다윗의 혈통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베들레헴, 룻기의 나오미와 보아스의 고향이며, 보아스의 자손이며 최고의 이스라엘 왕인 다윗왕의 고향이다. 베들레헴 땅에서 예수님이 나셨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구속자와 와의 계보를 이어가는 분이심을 보이고자 함이다. 호적령의 인간적인 목적과는 달리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를 이루신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왕국과 인간의 도성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으면서 구별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인간의 의도와 목적이 전혀 제한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다 보이시고 이루시는 오묘한 섭리는 믿음에 의해서만 읽어지고 분별된다. 예수님의 나심에는 특별/일반 은총의 절묘한 입맞춤이 확인된다.

2013년 12월 26일 목요일

성탄절에 대한 칼빈의 생각

성탄절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궁금하다. 칼빈이 개혁주의 입장의 대표성을 가지지는 않지만 개혁교회 안에서의 다양성을 살펴보는 좋은 시금석은 제공한다. 요약하면, 칼빈은 성탄절을 기념하는 것이 우상적 미신적 결점만 제거되면 교회에서 허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개혁 교회들은 어떤 특정한 날을 기념할 자유를 갖는다고 확신했다.

물론 칼빈의 제네바 선배이신 파렐은 제네바 교회에서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 예수님 승천일, 오순절을 특별히 구별된 날로 지키는 행습을 엄격히 금하였다. 칼빈이 제네바에 갔을 때에 그는 이러한 5가지의 절기들을 복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가졌었다. 그러나 제네바는 절기별 행사를 금지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칼빈이 비난의 타겟이 되었다.

이에 대한 칼빈의 첫번째 반응은 베를린 친구 할러에게 서신을 띄우는 것이었다. 서신에서 칼빈은 성탄절 행사를 금지하는 시의회의 결의에 자신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왜냐하면 교회의 건덕을 위해 선하게만 쓴다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그리 발끈할 사안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칼빈은 자신의 시대에 로마 카톨릭에 의해 벌어지는 미신적인 행습에 강한 저항감을 가졌지만, 모든 걸 무시하는 '묻지마' 거부의 태도만을 취하지는 않았다. 칼빈의 이런 입장에 대해 불링거는 답한다. "친애하는 형제여, 그대는 내가 기대하는 답변을 주었구려. 나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 초대교회 이후로 건장했던 그런 자유가 보존되길 바란다오."

제네바 의회의 금지를 존중하되, 칼빈은 성탄절과 같은 절기에는 성경의 순차적인 강해라는 평소의 소신까지 접고 연관 본문들을 택하여 설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개혁교회 안에는 칼빈의 온건한 입장도 있었지만 조지 길레스피 같이 모든 절기별 행사나 기념을 이단적인 것으로 여겨 강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한 스코틀랜드 교회도 있었다.

성탄절을 비롯한 교회사적 절기들을 기념하고 않고가 개혁교회 정체성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하루를 다른 날들보다 더 거룩하고 더 중요하고 더 신비로운 날인 듯 구별하는 것은 교회의 미신적인 관습 형성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무엇을 하든 빈하지도 과하지도 말아야 하겠다.

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어거스틴 성탄절

우리의 구세주요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나신 날,
진리가 땅에서 활력을 퍼뜨리고
날 중의 날이 우리의 카렌다로 침투한
바로 그날이 다시 한번 방문했다.

그 기념일이 돌아와 우리로 오늘도 기념하게 만든다.
기뻐하고 즐거워 함이 마땅하다.
성도의 믿음은 주님의 위대한 비하가 우리에게 준 것을 알고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는 가리워져 있다.

이는 하나님이 이것을 지혜롭고 강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비천한 자에게는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겸손을 견고히 붙들어라.
겸손은 우리를 하나님의 지고함에 이르게 하는 수레이다.

Augustine, Sermo, 184.1.

인류여 깨어나라. 너를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었다. 깨어나라 잠자는 너희여, 일어나라 죽은 자에게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를 비추실 것이로다. 다시 말하노니 너를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도다.

그가 시간 속에 출생하지 않았다면 영원한 죽음의 진통이 너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로다. 그가 죄악된 육신의 모양을 스스로 취하시지 않았다면 부패한 몸의 결박에서 너는 결단코 풀려나지 못하였을 것이로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가 없었다면 영원한 불행의 족쇄가 생의 발목을 일평생 껴안았을 것이로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공유함이 없었다면 결단코 너는 그의 생명으로 회복되지 못하였을 것이로다.

그가 만약 도움의 손을 서둘러 뻗지 않았다면 너는 죽음의 음울한 바다에 표류하고 말았을 것이로다. 그가 오시지 않았다면 멸망의 쇠고랑에 너는 영원히 결박되고 말았을 것이로다.

Augustine, Sermo, 185.

2013년 12월 24일 화요일

예수님의 불순종?

Han family에서는 가정예배 시간에 질문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은 예수님이 인성을 따라 자라나고 영혼이 강해지고 지혜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나누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적극적인 교훈도 삶으로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런데 대뜸 첫째가 질문을 던졌다.

첫째: 아빠, 예수님은 십계명을 어기신 것 같은데요. 어머니의 말씀을 듣지 않으신 거 아닌가요? 예수님이 삶으로 완전하게 가르치신 건 아니네요 ^^

아빠: 아들아, 예수님이 스스로 밝히신 하늘의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시냐?

첫째: 저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라 어머니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했는데요, 아빠?

아빠: .... 으음....

둘째: 쩜쩜쩜...크크...형아, 위너~~~ ^^

아빠: 아들아, 어머니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불순종을 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왜냐?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에는 전제가 늘 따른단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란 전제 말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보다 크신 분이시지. 아브라함 및 다윗보다 예수님은 주로 불리울 정도로 더 크신 분이시다. 즉 우리의 눈에는 예수님이 성전에 혼자 머물러 있어서 마치 마리아와 요셉에게 불순종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은 부모님께 순종하신 것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다.

첫째: 예수님은 안식일도 지키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아빠: 안식일 문제도 해석은 동일하다. 사실 예수님은 율법을 만드시고 수여하신 분이란다. 그러나 율법의 본질을 가장 잘 아시겠지. 우리가 생각하는 안식일의 인간적인 개념에 익숙해져 예수님의 안식일 해석과 처신이 범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안식일 개념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가르침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단다. 우리에게 안식일 준수의 파기로 보이는 예수님의 해석과 행위가 원래 안식일 계명의 기준이다.

첫째: 아빠, 그럼 만약에 예수님이 살인을 하셨다고 가정해 보자요. 그럼 예수님이 기준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인가요? 그럼 기준이 율법보다 낮추어진 게 아닌가요?

아빠: 음...아들아, 아빠는 역사신학 전공자다. 역사적인 사실을 바꾸어서 생각하는 가정법을 기피하는 편이지. 예수님은 살인하실 분이 아니신데 그렇게 가정하면 말문이 막힌단다.

첫째: 그럼 학교에서 어떤 친구가 기준이라 하자요. 그럼 그 친구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게 다시 기준이 되는 거겠네요?

아빠: 피조물의 경우를 늘 하나님께 즉각 투사하는 것이 큰 설명력을 가지는 건 아니란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갭이 있거든.

첫째: 예수님은 백퍼센트 사람이기 때문에 적용할 수 있지 않나요?

아빠:....으음....

둘째: 쩜쩜쩜...ㅋㅋ...이번에도 형아가 위너~~~!!

아빠: 아니 그게 아니구우~~~. ㅋㅋ 예수님은 백퍼센트 인간이신 동시에 백퍼센트 하나님도 되신단다. 하나만을 기준으로 말하기는 곤란하다. 즉 하나님-인간 예수님을 전체로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오늘 질문은 여기까지 해라. 아빠가 수세에 몰리기는 했지만 승부를 가리는 방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올바른 대화의 자세는 아닌 듯하구나...둘.째.야~~~ ㅡ.ㅡ

한병수의 사유법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23:7) 

1. 우리의 삶은 생각이 그린 궤적이다. 생각은 영혼의 활동이다. 생각으로 대표되는 정신활동 주체는 우리의 영혼이다. 큰 영혼의 소유자가 큰 사유의 사람이고 큰 사유의 사람이 큰 사람이다. 영혼이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2. 영혼의 크기는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한다.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가질수록 영혼은 커진다. 그럴려면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해야 한다. 이는 "말씀"이신 그분을 가리키는 성경을 주야로 즐거이 묵상해야 가능하다.

3. 이렇게 영혼의 크기가 어느 정도 마련되면 본격적인 생각의 방법으로 들어간다. 생각에는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가 있다. 생각 자체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모두에게 주신 선물이다. 모든 사람이 생각한다. 그러나 정도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르다.

4. 생각의 높이: 모든 생각은 하나님께 이어져 있어야 한다. 어떠한 것에 대해서든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섭리가 고려되지 않은 생각은 높이를 상실하게 된다. 고결하지 못하다. 언제나 범사에 주님의 존재와 속성과 사역을 인정해야 생각이 높아진다. 

5. 생각의 깊이: 큰 사유의 사람은 범사에 마지막 근원으로 소급하는 습성을 가진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생기면 사람의 근원적인 본성까지 깊숙이 들어간다. 하나의 사건에 다양한 구조적 환경적 도구적 원인들이 있지만 결국 문제의 핵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6. 생각의 넓이: 우리의 생각은 지구촌 전체를 더듬어야 하고, 나아가 우주를 포함한 전 피조물을 사려해야 한다. 지엽적인 문제를 꼼꼼하게 살피되 온 세상이 의식된 생각과 판단에 이르러야 제대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넓으면 지구촌 전체가 늘 궁금하다. 

7. 생각의 길이: 생각은 어떤 특정한 순간이나 기간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시간의 시작도 사려해야 하지만 시간의 시작 이전과 시간의 종말 이후의 영원도 사려해야 한다. 현재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과거 및 미래와 결부되어 있고 시간 이전과 이후와도 연결되어 있다.

8. 생각에는 경계선이 없다. 모든 시공간을 무시로 출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에도 이를 수 있고,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에도 이를 수 있고, 온 세상의 땅끝까지 출입할 수 있고, 시간과 영원이 모두 생각의 대상으로 언제나 허락되어 있다. 생각은 창조자의 큰 선물이다.

9. 생각에는 지식과 논리와 상식과 습관과 감정과 상상이 장애물로 기능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것들은 생각의 기준이 아니라 방편이다. 하나님과 성경이 생각의 기준이고 원리이고 범례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는 신학의 원리와도 유사하다. 신학 자체가 생각의 방법이다. 

10. 생각은 땅에서의 전제에 지배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땅에서의 전제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다. 믿음으로 생각의 전제를 제거하는 것이 생각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진정한 "자기부인" 의미이다. 물건을 포기하고 기호를 포기하고 권리를 포기하는 것 이상이다. 

11.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이루어진 생각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가 클수록 그 위인도 그러하다. 생각의 경계선이 도무지 확인되지 않는 위인을 경험하고 싶다.

2013년 12월 23일 월요일

교부신학: 전승과 성경

은밀한 교리의 전승이란?

클레멘스: 그노시스, 파라도시스, 사도들의 유럐와 영지주의 사고의 혼합으로 봄.

오리게네스: 성경에 토대를 둔 비의적인 신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봄. 율법과 예언들과 주님의 파루시아 때에 주신 계약과의 일치와 조화로 정의함.

Hyppolytus: The Apostolic Tradition, Didache라는 책에서, 세례와 성찬과 예전 전체가 사도들의 증언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주교단이 사도들의 증언을 순수한 형태로 보존하여 왔다.

이러한 이론이 쇠퇴하며 카톨릭 교회의 통치권에 대한 증대된 인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로마교회는 스스로를 특별한 의미에서 사도적 전승의 지명된 수호자/대변자로 여겼다.

유세비우스: 니케아 공의회에 자신의 신조를 제출할 때에 성경만이 아니라 자신의 선배 주교들이 전달해 준 가르침 및 교리문답 교육, 세례 때에 받은 가르침을 토대로 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은 처음부터 믿어져 왔던 진리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은 예수님이 주셨고 사도들이 선포했던 가르침을 단순히 승인하고 전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난 자들은 기독인이 아니다.

Basil: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예전적인 관습을 주축으로 삼아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함을 논증했고 사도적 증언은 성경과 아울러 비의들을 통해서 교회에 전해졌기 때문에 이 기록된지 않은 전승에 머무는 것이 사도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Gregory of Nyssa: 성자의 독특한 발생을 실증하려 했을 때에 우리에겐 사도들을 계승한 일련의 거룩한 이들을 따라 사도들이 전한 유산과 같이 교부들이 우리에게 전해온 전승도 있다.

성령의 거소이자 신앙의 표준, 예전 행위, 일반적인 증언을 통해서 진정한 사도적 증언을 보존해 온 교회만이 성경 해석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열쇠를 소유하고 있다.

어거스틴: 성경에 나오는 의심스런 구절이나 애매한 본문들은 신앙의 표준에 의해 해명될 필요가 있다, 오직 교회의 권위만이 성경의 진리성을 보장해 준다고 보았다??? 공적인 공의회의 권위는 가장 건강한 것이었다.

키릴루스: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리는 것은 마땅하다. 거룩한 보편적 교회와 숭앙받을 만한 교부들을 근거로 성령이 그들 속에서 말씀을 하셨다. 사도들과 복음서 기자들의 전승,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성경 전체의 취지.

5세기 중엽의 빈켄티우스: 이중적인 보루를 강조, 즉 하나님의 법과 카톨릭 교회의 전승. 성경은 그 자체로 충분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이라 하였으나 성경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승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적 및 카톨릭적 견해의 규범, "어디서나, 언제나, 모두에 의해 믿어져 온 것"(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b omnibus creditum est). "전 세계에 걸쳐서 온 교회에 의해 공언된 신앙만이 참되다고 우리가 고백한다면 우리는 보편성의 원칙에 합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경건한 선조들과 교부들에 의해 명백하게 공유된 신조들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대성의 원칙에 합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전 세대들에 의지하여 주교들과 교사들의 전체 혹은 대다수의 정의들과 견해들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합치의 원칙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교부신학 배경 - 전승과 성경

켈리의 Early Christian Doctrines 요약.

기독교 교리라는 것은 주호 1세기 말 이래의 가톨릭적 교회의 교리이다.

오늘날의 전승: 교회 속에서 내려온 문서화되지 않은 일련의 가르침을 뜻한다.

교부들은 구전으로 전해진 것이든 문서로 전해진 것이든 내용에 있어서 사도들이 교회에게 위탁했던 가르침을 의미했고 보다 앞선 시대에는 문화되지 않은 교회의 전래적인 가르침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 주님께서 수여했고 사도들이 선포했고 교부들이 보존한 카톨릭 교회의 본래적인 전승, 가르침, 믿음을 의미한다.

교부들에 의하면, 구약이 초대교회 교리의 규범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 구약에 교리적 권위를 부여했던 초대교회는 구약을 올바르게 해석하면 기독교의 책으로 간주함, 선지자는 실제로 그리스도 및 그의 영광을 증언하고 있다는 전제에 토대를 둔 판단이다, 2) 이러한 전제는 의식하든 안하든 특정한 주석 방법론을 사용할 때에만 가능할 수 있었다, 바나바서: 자신의 그리스도 중심의 중석을 그노시스로 칭함, 3) 이러한 원칙은 2세기 초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사도들도 이미 이러한 원칙으로 구약을 해석함.

클레멘스: 사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우리를 위한 복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명감으로 무장되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을 통해 온전한 확신을 얻고, 성령의 확신케 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확증을 받은 사도들은 기쁜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아갔다.

폴리캅: 바울의 빌립보서, 신앙의 초석으로 여김; 저스틴 마터: 복음서가 권위를 가지는 것은 그것들이 사도들의 회고록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전승: 1) 구약과 사도적 증언은 형식상 서로 독립되어 있었지만 교부들은 그것들의 내용이 실제로 인치하는 것으로 취급했다, 2) 사도적 증언은 사람에게 아직 전승으로 불려지지 않았다. 클레멘스: "우리 전승의 표준"이란 표현을 사용하긴 했으나 여전히 희귀했다. 폴리캅: "처음부터 전하여진 말씀", 저스틴: 예수님에 관한 예언들을 사도들이 이방에게 "전했거나" 성찬식 제정의 말씀을 "전하여 주었다"고 표현함. 3) 교회의 목회자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공인된 사도적 가르침의 수호자란 이론적 암시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레니우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여준 자들 이외의 다른 어떤 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구원의 계획을 배운 적이 없다." 터툴리안: 교회에서 믿어지고 전파된 것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이유는 사도들을 통해 그것을 받았고 사도들은 그것을 그리스도 통하여서 받았고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받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레니우스/터툴리안: 사도들이 가르쳐준 가르침을 지칭하려 할 때에 "전승"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레니우스: 1) 구전 전승과 원래의 계시 사이의 동일성은 계보상 사도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련의 주교들에 의해서 보증된다, 2) 추가적인 보호막은 성령에 의해서 제공된다. 교회의 주교들은 "진리의 무오한 카리스마적 권위"(charisma veritatis certum)를 부여받은 성령의 사람이라 하였다.

터툴리안: 구전된 것이든 서신으로 된 것이든 사도적 가르침 전체를 사도적 전승(apostolorum traditio, apostolica traditio)이라 하였다.

사도적 전승의 여부를 결정하는 시금석은 교회의 관습이 아니라 사도성, 즉 사도들 혹은 그 제자들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사도적 증언을 담고 있는 것으로 신뢰할 수 있다. 올바른 주석은 성경의 열쇠인 사도적 전승 혹은 가르침을 교회 속에서 손상 없이 보존해 온 교회의 대권이었다.

Irenaeus's Adversus haereses: 정통신앙 변론에서 성경을 근거로 제시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1) 전승 자체는 우리 신앙의 터전이자 기둥인 성경에 의해서 확증되는 것이었다. 2) 세례 때에 받은 진리의 교령을 견고히 붙잡고 있으면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교령"은 결코 성경과 구분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단지 성경 속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를 요약한 것이었다.

터툴리안: "전승"의 의미를 확대해서 교회 속에서 여러 새대동안 관습화된 것들을 포함시킴. 그러나 일차적인 의미에서 사도적, 복음적, 카톨릭적 전승은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이렇게 이해된 전승은 결코 성경과 대비되지 않는다. 전승은 성경 속에 소중히 간직된 것이었다. 이는 사도들이 그들의 구전에 의한 가르침을 나중에 서신들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필히 참되고 성경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르침을 받은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툴리안, 사도적 전승을 신약에 제한하지 않았다. 사도적 전승은 교회들이 공적으로 선포하는 가르침 속에서 여전히 발견된다. 은밀한 전승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도들이 계시를 전체로서 알고 있지 못했다거나 전해주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 생각할 수 없다고 설파했다.

터툴리안: 신앙의 표준, 이레니우스: 진리의 교령, 같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터툴리안: 신앙의 표준이 사도들을 통해 전해졌고 이 신앙의 표준은 어떤 사람의 기독인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신앙의 표준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주석의 길을 지시한다.

터툴리안: 성경은 모든 부분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에 전체로서 읽으면 뜻이 분명해 진다고 확신했다. 학자들은 터툴리안이 마치 기록되지 않은 전승을 성경보다 더 궁극적인 규범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이레니우스와 거의 동일했다. 오직 성경을 토대로 해서 이단들과 논쟁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확신했다. 이단들은 성경의 명백한 의미를 매우 노련하고 교묘하게 왜곡하기 때문에 그러한 논쟁 속에서 성경만을 토대로 삼아 결정적인 결론을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터툴리안 전제: 하나님의 동일한 계시는 성경과 교회의 지속적인 공적 증언 속에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 교회들이 순수한 사도적 가르침을 전수함에 있어서 어떤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키프리안: 사도적 전승은 주의 전승의 뿌리이자 원천, 신적 전승의 샘이자 원천이다.

아타나시우스: 교회의 초석은 주께서 주셨고 사도들이 선포한 전승이다. 

교부신학 배경 - 영지주의

2-3세기에 활동했던 가장 강력한 이단들 중의 하나였다.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같은 교부들에 의해 알려진 무리이다. 이 교부들은 영지주의를 기독교와 이교의 철학, 점성술, 그리이스 비의 종교들과 혼합된 것으로 이해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사이먼 마구스를 영지주의 효시로 보았다.

# 하르낙: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극단적 헬레니즘화다.

기독교 영지주의 이전에 유대교적 영지주의 무리들도 존재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영지주의는 유대교와 이교와 동방 종교들의 요소들을 혼합시킨 것이고 악과 인간의 운명이란 문제에 관한 해법과 관련하여 독특한 입장을 취한 사상들을 고안했다.

Valentinus

1) 만유 위에는 최고의 아버지, Bythos, Monad, Aeon이 거하고 그 옆에는 Ennoia인 침묵 Sige가 있다. 이들에 의해 세 쌍의 아이온들, 즉 Nous, Aletheia, Logos, Zoe, Anthropos, Ecclesia가 차례로 유출이 되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8계 ogdoad를 완성한다. 로고스와 조에에서 다시 다섯 쌍의 아이온들(10계)가 유출되고 인간과 공동체가 다시 여섯 쌍의 아이온(12계)를 유출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30계가 하나님의 플레로마 Pleroma 혹은 충만을 구성한다.

2) 여기서 오직 독생한 누스만이 아버지를 알고 계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30계에서 가장 낮은 소피아 Sophia는 아버지의 본성을 알고자 하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붙잡힌다. 소피아는 죄악된 욕망Entiumesis로 인해 진통을 겪는데 만약 플레로마 수호자로 임명된 호로스(Horos, 십자가)가 그녀에게 아버지는 이해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지 않았다면, 만유 속으로 용해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피아는 자시느이 욕망을 내버리고 플레로마 속에 그대로 머물렀다. 정신과 진리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아버지에 대한 아이온의 진정한 관계를 아이온에게 가르치기 위해 새로운 한 쌍의 아이온인 그리스도/성령을 만든다. 이렇게 함으로써 질서가 회복되자, 아이온은 아버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플로레마의 완전한 열매인 예수를 출산한다.

3) 전형적인 영지주의 특징: 사변과 신화를 적당하 융합하고 거기에 성경의 내용들에 관한 흔적들을 드문드문 삽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떤 조직이나 체계를 갖추지 않았다는 것도 특징이다.

4) 영지주의 학파들은 철저히 이원론적,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의 무한한 간격, 물질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악하다.

5) 물질 세계의 기원을 최고의 신, 빛과 선의 신에게 돌리기를 거부한다. 물질 세계는 태초에 있었던 어떤 무질서, 더 높은 영역의 어떤 갈등이나 타락의 결과임에 틀림없고, 물질 세계를 만든 자도 어떤 열등한 신 혹은 데미우르고스일 것이다.

6) 영지주의 무리들은 모두 인간 혹은 인류의 엘리트 계층에겐 영적인 요소가 있다고 믿었는데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위치에 처해 있기 때문에 물질에서 해방되어 본향으로 회귀하고 싶어한다.

7) 영지주의 무리들은 인간의 영적 요소가 본향에의 회귀를 희구할 수 있게 만드는 중개자가 하늘들을 거쳐 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묘사했다. 중개자의 역할은 영적인 인간이 진리를 향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영적인 인간은 지식에 의해 구속함을 얻는다"(Marcus) "복음은 초현세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이다."(바실리데스)

8) 어떤 사람이 영지적인 신화들을 그 진정한 내적 의미까지 모두 파악하면 자기가 누구이고 자기가 어떻게 현재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으며 형설할 수 없는 최고의 신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되어야 비로소 사람의 속에 있는 영적 요소는 물질의 속박에서 해방되기 시작한다.

9) 발렌티누스 (Gospel of Truth)는 이 지식을 얻기 전에는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멍청한 상태에서 비틀비틀 거리지만 지식 이후에는 취중에 든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고 묘사한다.

10)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은 이레니우스, 클레멘스 2서, Theophilus의 Ad Autolycum 같은 2세기 작품들 안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클레멘스: 신앙을 철학적으로 파악하고 있던 기독인에게 '영지주의자'란 호칭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적용했다. 이단적, 비기독교적 영지들이 진정한 기독교적 영지들과 섞여 있었다는 것은 영지주의/기독교 사이의 구분이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을 잘 알려준다.


교부신학 배경 4

플로티누스의 신, 최고의 원리 혹은 최고의 위격 (hypostasis)는 유일자며 그 자체로 존재를 초월해 있고 플라톤적 정신 혹은 신 개념도 초월하는 유일자는 존재의 출처이며 존재가 돌아가야 할 목표이다. 유일자는 축소와 변경 없이도 유출 혹은 발출(emanation)한다. 유일자는 선 자체이다. 두번째 위격은 정신 혹은 사고이다. 세번째 위격은 영혼이다. 정신은 형상들의 세계를 포괄하고 유일자로 회귀하는 시도 속에서 형상들의 세계를 관상한다.

이렇게 해서 다양성이 만유 속에 도입된다. 정신은 원인이 되는 원리로서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와 동일하다. 영혼은 둘로 나뉘는데 물질적인 질서를 초월하는 고등영혼, 현상적 세계의 영혼인 하등연혼 혹은 자연이다. 세계는 비록 물질적인 것이지만 선하다고 하였다.

세계는 고등 영혼에 의해 창조되고 질서지워 졌으며 자연에 의해서 통합되어 이싸. 물질 자체는 악하지만 눈에 보이는 만유는 지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질서를 반영하고 있고 따라서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고의 것으로 인정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유일자의 유출이고 모든 실재에 서로 다른 차원에 스며들어 있으면서 더 높은 차원의 것, 궁극적으로는 유일자와 합일하는 것을 열망한다.

플라톤의 향연: 천상의 에로스에 의해 불지펴져 있는 인간의 영혼은 이러한 합일을 위한 승화를 원하도록 도전을 받는다고 한다. 1) 정화의 단계이다. 영혼은 육체, 감각, 지각의 속임에서 스스로를 해방해야 한다. 2) 영혼은 정신의 차원으로 올라가고 자의식을 유지한 채 철학과 학문에 매진한다. 3) 마지막 단계가 유일자와 신비적 합일이다. 

예수님의 이름

성전에서 한 천사가 나타났을 때에 사가랴는 천사를 응시하며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천사는 사가랴의 두려움을 달래 주었고 그는 아들을 가지게 될 것인데 사가랴 자신이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경우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가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를 찾아가 특이한 인사말을 건내었고 이에 마리아는 혼돈을 느끼며 인사말의 의미를 궁구했다. 이에 천사는 사가랴를 대하듯이 두려워 말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의 이름을 "예수"라 부르라(καλέσεις)고 말하였다. 누가가 2인칭 단수 능동 미래형 동사를 썼다는 사실에서 누가복음 안에서는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가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명명하는 주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에도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나온다. 마리아를 중심으로 기록된 누가복음 본문과는 달리 여기서는 요셉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한다.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다. 정혼에 대해서는 히브리적 결혼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은 두 사람의 부모들에 의해 준비되고 약정이 맺어진다. 약혼이 성사되면 그때부터 남녀는 남편과 아내라는 법적인 관계가 생기지만 더불어 살지는 않고 각자의 가정에서 1년동안 생활한다. 이것은 서로의 순결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1년 안에 아내가 임신을 한다면 이는 필히 불법적인 관계를 맺었고 불결한 여자라는 증거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을 했다는 말은 서로의 순결을 검증하는 기간 중에 있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요셉은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불결한 여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배신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저렇게 부정한 여자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다윗의 자손인 요셉에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의로웠고 신중했다. 아내에게 공적인 모독을 주지 않으면서 조용히 끊고자 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몰입되어 있는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 '두려워 말라'는 말부터 꺼내었고, 마리아가 수태한 아들은 성령의 일이며, 아들을 낳으면 그의 이름을 "예수"라 부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예수의 이름을 명명하는 주체가 요셉이다. 이는 아버지의 적법성이 보여준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은 이사야 7장 14절에 등장한다. 이 예언에 따르면,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라고 하였다. 히브리어 원문(קָרָאת)과 70인경(καλέσεις) 모두에서 "임마누엘" 이름을 부르는 주체는 여인이다.

그런데 마태는 임마누엘 이름을 "그들이 부를 것이다"(καλέσουσιν)고 기술한다. 즉 불특정 다수가 예수님을 임마누엘로 명명하는 주체로 묘사되고 있다. 마태가 의도한 "그들"은 누구일까? 바스마 교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고 말한다.

누가는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πατὴρ)로 표현했고 마리아도 요셉에 대해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요셉과 마리아가 모두 예수님의 명명자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사람의 자녀이되 구별되신 분임을 확인하게 된다.

마태와 마가에 의하면, 예수라는 이름의 작명권은 요셉과 마리아가 동시에 가진다. 예수님이 동정녀 출생이란 점과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자녀라는 점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복음서 기록자의 신중함이 돋보인다. 동시에 임마누엘 이름은 모든 백성의 입술에 허락된다.

임마누엘(Immanu-el, 우리와 함께-하나님), 단어 자체에 이미 이 이름을 명명하는 자가 "우리"라고 명시되어 있다. 물론 이사야의 문맥에선 "다윗의 집"(בֵּ֣ית דָּוִ֑ד)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일컫는다.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 

2013년 12월 21일 토요일

누가복음 2장 7절, 카탈루마

<하버드 박물관에 마련된 고대 이스라엘 가정집>

누가복음 2장 7절에는 여관에(ἐν τῷ καταλύματι) 방이 없어서 아기 예수를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대부분의 영역본 성경(NIV, NASB, NRSB, ESV, NET)이 KJV를 따라 헬라어 원어(κατάλυμα)를 여관(inn)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카탈루마"는 "여관"이 아니라 일반 가정집이 방문객을 맞이하는 "객실"(guest room)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마가복음 14장 14절에서 예수님도 집 주인에게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할 객실을 언급할 때 "카탈루마" 단어를 쓰셨다.

그리고 누가 자신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기술하며 거반 죽게 된 사람들을 데리고 간 여관을 표현할 때 "카탈루마"가 아니라 "판도케이온"(πανδοχεῖον)을 사용한다. 물론 다른 단어를 썼다고 해서 가리키는 실체가 다르다는 필연성은 없지만 개연성은 높다.

신약의 고대 아랍과 시리아 역본들을 깊이 연구한 케네스 베일리는 "카탈루마"가 중동의 맥락을 따라서는 "여관"으로 번역된 적이 없고 한 가정집의 "객실"을 뜻한다고 주장하며 영역본이 "여관"으로 번역한 것은 "서구적 관습의 산물"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1세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계층별로 사이즈와 격이 달랐지만 짐승들의 공간, 집주인의 공간, 손님이 거하는 객실로 구분되어 있었다. 객실의 사이즈는 집의 1/3이나 차지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환대가 읽어지는 대목이다.

사실 환대는 이미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가 잘 암시하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고귀한 문화였다. 그리고 애굽에서 오랜 나그네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방 나그네를 환대해야 한다는 것은 모세의 시대에 심지어 율법으로 성문화된 법이었다.

마리아와 요셉은 여관에 기거할 곳이 없어서 마굿간의 구유에 예수님을 뉘이지 않았고 한 집에서 환대를 해 주었지만 이미 객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차지되어 결국 짐승이 기거하는 마굿간에 가게 되었고 아기 예수는 구유에 뉘어질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마굿간 출산의 이유는 누가에 따르면 집주인이 마리아와 요셉을 박대하고 무시한 것이 아니라 "객실"에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이사 아구스도 시대에 이루어진 인구조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작은 베들레헴 도시에도 몰려 든 상황이라 충분히 이해된다.

이상은 오늘 칼빈의 라일 비어마 교수님의 아들 네이튼이 짧게 나눈 이야기에 조금 덧붙인 글이다. 

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사가랴와 요한

누가복음 1장 1-15절

스가랴와 엘리시벳은 의로운 사람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ἐναντίον) 의로웠다.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로서 의로웠다. 누가는 사가랴를 '하나님 앞에서(ἔναντι)의 제사장'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사가랴를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제사장과 구별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제사장은 "주님의 성전"(εἰς τὸν ναὸν τοῦ κυρίου)으로 들어갔다. 유력자의 눈에 걸리도록 권력의 비루한 문턱을 출입하지 않았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고 언제나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서 발견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천사가 찾아와 너의 기도가 들으신 바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예배하러 온 사람들은 바깥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의로운 사가랴가 있다고 해서 성도들의 삶이 문란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가랴와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사람들 사이에는 어떠한 대리만족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주님만이 우리의 거룩함과 선함과 의로움이 되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떠한 면에서도 중보자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 예수만이 중보자다. 기도하는 제사장 사가랴와 기도하는 예배자의 모습이 진정한 교회다.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날 아들의 이름은 요한으로 불려질 것이란다. 하나님에 의해 지명된 이름이다. 그는 부모와 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그가 1)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이 되고 2) 술을 마시지 않으며 3)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의 출생을 부모와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그가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으로 발견되고 술이 아니라 성령으로 취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만이 아니다. 누구든지 부모와 사람 앞에서 칭찬과 존경을 받는 이유는 요한의 경우와 동일하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눈에 괜찮게 관찰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훌륭해야 하고 무엇을 하든지 다른 어떤 기운에 술취한 전문가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가정예배 시간에는 이것을 아이들과 나누었다. 

제사장 직무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3:2)

누가는 당시 대제사장 두 명의 이름을 거명하며 당시 종교계의 불법성을 지적한다. 그런데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불법의 대제사장 두 명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고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임하였다. 특별히 누가는 요한이 사가랴의 아들이란 사실을 굳이 언급한다.

누가는 여기에서 절묘하게 요한을 대제사장 적격자로 암시한다. 요한은 광야에서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했고 이어 예수님은 광야에서 본격적인 대제사장 직분을 시작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다. 그는 말씀이고 말씀이 우리에게 우리의 모양을 따라 오시었다.

말씀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기에 우리에게 임하신 말씀으로 인해 우리는 온 세상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해야 할 부르심을 받은 거다. 무슨 세력을 규합하고 종교적 고위직에 올라야 제사장 직분을 보다 잘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말씀이 중요하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 말씀을 바르게 알고 전달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제사장적 직무의 핵심이다. 이는 사람들에 의해 추대되고 추앙되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땅에서는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광야에서 말씀이 임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제사장은 땅의 환경에 의존하는 직분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살아내야 무늬가 아닌 진정한 제사장 직분의 수행자다. 

2013년 12월 16일 월요일

바르트 에피소드

주일예배 드리기 전에 팔순이 넘으신 '친구'(미국에는 나이를 불문하고 친구처럼 이름을 부르며 지내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사용한 호칭) Gene과 함께 바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은 젊은 시절에 바젤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바르트 밑에서 신학을 배우신 분이었다.

매주 월요일에 바르트는 미국인 학생들과 잔을 기울이며 신학적인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다고 한다. 문서화로 맛사지가 가해지지 않은 바르트의 진솔한 생각을 많이 접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먼저 바르트 자신의 신학적 노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떤 루터주의 학생이 있었는데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에 루터주의 사상이 조각조각 박혀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당신은 루터주의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단다. 그때 바르트는 마시던 잔을 서서히 내리며 다소 소리나게 테이블을 찍더니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어떻게 루터주의 사람이냐, 나는 철저하게 칼빈주의적이다"(Ich bin stark Calvinistisch). 이렇게 말하는 중에 입가에 매달려 있던 맥주 방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격함까지 보였단다. 자신은 참으로 칼빈주의 학자인데 때때로 루터주의 라벨이 붙여지는 경우를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에 나는 "맥주값 지불은 누가 했느냐?"고 문맥 끊어지기 전에 구강을 맴돌던 궁금증을 얼른 투척했다. 자기 기억으론 늘 '더치페이' 했단다. 멀러 선생님의 관대함이 머리에서 급한 대조를 이루었다. 멀러는 어디를 가도 본인이 제자들의 비용을 다 지불해 왔기 때문이다.

브루너와 바르트가 신학적 앙숙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Gene은 곁에서 바르트를 보면서 예상과는 달리 바르트가 브루너에 비해 훨씬 열려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정말 그러냐고 물었다. 두 사람을 다 지켜본 자기가 볼 때에는 그렇단다.

바르트는 브루너와 대화하려 늘 마음을 오픈하고 있었는데 브루너는 성격도 강직했고 바르트와 대화할 의사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이 바르트 밑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팔이 스승의 입장으로 치우친 평가라는 인상도 받았지만 진정성이 없지는 않은 말이었다.

반 틸과 얽히 사연도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바르트의 미국인 학생들 중에는 반 틸 밑에서 공부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바르트가 반 틸의 책을 들고 교실에 들어와 표지를 보이면서 우측 하단에 있는 조그마한 사탄 그림을 보여주며 졸지에 자신이 사탄이 되었다는 말을 다소 유머스런 표정으로 뱉었단다.

이에 반 틸의 학생이 손을 들면서 그 그림은 바르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며 격한 손사레와 함께 오해하지 마시라는 해명의 변을 장시간 쏟아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얼른 반틸이 저술한 책들의 표지를 하나하나 살폈으나 '사탄' 그림을 찾아내진 못하였다.

Gene의 이야기를 듣고 공개해도 되냐고 물었는데 그래도 된다고 하여 이렇게 담벼락에 건다. 유명한 분들을 책으로 만나면 대체로 인격과 삶이 생략된 문자 의존적인 이미지만 머리에 남는다. 그러나 현장에서 서로의 일상을 섞어보면 글로 전달되지 않는 고유한 내용들을 두루 경험하게 된다.

Gene은 바르트가 너무도 친절하고 자상해서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를 못한단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집중적인 인터뷰에 들어가야 되겠다는 여운을 남기며 주일을 접는다.

슬픈 동물원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49:20)

시인은 여기서 지혜와 명철을 말하고자 하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최상급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 할지라도 멸망하는 짐승과 다르지가 않단다. 존귀와 멸망의 분기점을 제공하는 시인의 지혜와 명철은 어떤 것일까가 궁금하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를 언급한다. 그는 타인도 구속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서도 속전을 제공하지 못한단다. 생명을 속량하는 비용의 막대함 때문이다. 영원토록 살되 죽음을 보지 않을 정도의 비용은 얼마일까?

다달이 월세 지불하는 것도 버거운 마당에 영원히 사는 삶을 위하여, 그것도 죽음의 그림자가 얼씬도 못하는 삶의 보증금은 얼마나 막대할까? 인간의 산술로는 아무도 가늠하지 못할 액수겠다. 구속이나 속량은 결코 사람에게 내맡겨진 것이 아니다.

사람은 죽는다. 게다가 재물은 남에게 남긴다. 사람이 임의로 변경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속으로는 집도 영원하고 자신의 거처도 대대에 이른다고 여긴단다. 이런 자들에겐 사망이 그들의 목자이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란다. 시인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그들이 죽으면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들의 영광도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단다.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명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게 시인의 논지이다. 죽음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허탄한 기준을 가지고 썩어 없어지는 목표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은 죽음에 의한 상대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겠다. 죽음의 저울로 달아본 이후의 가치가 여전 고귀하면 붙들어야 한다. 그러나 죽음으로 종결되는 한시적인 가치에는 그에 부합한 제한적인 의미만 부여해도 족하겠다.

세상의 열광하는 소리에 부추김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호감의 안테나를 그쪽으로 기울이다. 그러다가 어떤 기운이 감지되면 신속한 군침과 더불어 모닥불에 불나방 달려들듯 죽음을 불사하고 그쪽으로 질주한다. 사망이 목자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사람의 인간다운 존엄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죽는다는 것과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 사실에 냉소의 콧방귀를 분사하는 자는 영원히 살 것처럼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소유할 것처럼 바득바득 긁어 모으려고 한다.

짐승을 보려고 동물원을 출입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충분히 해결되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최소한 교회는 동물원이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본원적인 빛 앞에서의 죄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일1:5)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당연히 밤이 없고 피조된 빛에 매이지 않으신다. 그분 앞에서는 어떠한 죄도 가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의 필연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즉 스스로를 속이게 되고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할 것이란다.

우리 편에서는 그렇지만 주님 편에서 보자면, 우리가 죄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삶 속에 머리 둘 곳이 없어지게 된단다. 죄는 사람의 눈을 피했다고, 광자의 방식으로 노출되지 않았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낮을 주관하는 태양은 하나님이 지으셨다. 보시기에 좋았으나 바울은 그것을 최종적인 향유의 대상이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영원한 능력을 가리키는 비유요 기호라고 했다. 해와 달이 주관하지 못하는 빛의 근원이 계시다는 것을 암시한다.

대체로 아이들은 부모나 선생의 눈에 발각되지 않으면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즉 사람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어두움 속에서는 죄를 저질러도 안심한다.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부모와 선생 앞에서 당당한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것은 피조된 빛에 노출된 우리의 생각과 언어와 행위의 오류나 과실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생기지 않는 근원적인 빛에 비추어진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광자로 번역될 수 있는 죄 개념을 초월하는 죄의 고백을 의미한다.

당연히 죄가 뭐냐는 물음이 이어진다. 물리적인 빛으로 해석된 죄는 주로 합의된 죄의 사회적 기준에 따라 정의되나 절대적인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과녁을 벗어난 모든 것"이 죄로 규정된다. 추상적인 정의처럼 보이지만 교리사 전반을 관통해 온 죄의 정의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우리의 삶과 신앙과 찬양과 경배와 영광과 존경과 향유가 유일한 과녁이신 하나님을 벗어나는 모든 것이 죄라는 말이겠다. 즉 태양의 빛으로는 착하고 의롭고 친절하고 공평한 행실로 번역되는 것들도 과녁이신 하나님을 빗나가면 죄로 간주된다.

이는 어제 가정예배 시간에 나눈 말씀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죄의 사회적인 기준들에 더 많이 노출된다. 이런 맥락에서 가치의 사회적 기준들이 말씀에 의한 상대화 없이는 아이들의 의식과 행실의 절대적인 조정자로 군림하게 되겠다는 점을 의식하며 택한 주제였다.

어릴 때부터 수십년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가치의 표준으로 익숙하게 받아들인 사회적인 질서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적 기준을 상대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원흉으로 기여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어릴 때일수록 성경적 가치기준 설정의 필요성은 절박하다.

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위로도 거절했다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 (시77:2)

아픔이 야밤의 비처럼 중단을 모르고 쏟아지는 환란의 때였다고 한다. 어떤 위로로도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했다. 그런데도 불안이 엄습했고 불평이 쏟아졌고 영혼은 상하였다. 문제의 근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국 하나님 때문에 시인은 평온한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괴로워서 입술은 언어를 밀어낼 기력도 없었단다.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두운 고뇌의 밤에 부르던 노래까지 기억으로 길러냈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마음이 쏟아내는 절규였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신 건 아닐까? 은혜의 때가 지나가고 영영히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혹시 은혜 베푸시는 것을 잊으셨나? 혹시 주의 인자도 바닦이 나고 견고하던 약속도 폐하여진 것은 아닐까? 진노의 게이지가 상승하여 긍휼마저 잊으신 것일까?

이런 근원적인 물음들이 전두엽 주변에 빼곡히 운집했다. 그런데 시인은 "쉘라"라는 추임새 한 어절을 툭 던지고는 돌연 작금의 사태를 자신의 허약으로 돌리고 주체하지 못할 신음이 쏟아지는 고난의 때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로 규정한다.

사람의 머리로는 납득할 수 없었던 출애굽의 기적, 당신의 백성을 속량하신 사건에 기억의 손을 뻗겠단다. 그때에는 물이 하나님을 목격하고 그 깊음이 떨었었다. 바다에 길이 있었고 마르고 반듯한 길이 심연에 있었지만 그런 주님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단다.

누구도 변경하지 못할 약속도 폐하여진 듯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의 한시적인 현상으로 여겨지고, 그 무궁하던 인자와 긍휼도 바닥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차갑고 엄중한 진노의 느낌만이 의식의 목덜미를 거머쥐던 때였다.

비록 드물지만 누구나 그런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간다. 은혜와 긍휼과 동행과 인자와 구속의 하나님은 보이지를 않고 위로도 거절하고 싶은 웅덩이에 내던져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발자취는 도무지 발견되지 않는 때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바다에 길이 감추어져 있고 그 심연도 그 길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발자취를 믿음으로 보고 신뢰해야 한다. 어떠한 때에라도 길을 내시는 분은 주님이며 주님 자신이 또한 영원한 길이시다.

주님은 저주의 십자가에 죽음으로 길을 마련하신 분이시다. 곧장 어두움이 뒤덮어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 길이시다. 주님 당시에도 절망의 바다가 뒤덮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가장 캄캄한 십자가의 심연에서 주님은 길을 예비하고 계셨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변경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십자가의 주님은 어떠한 험산준령 속에서도 여전히 길을 내시고 길이 되시고 길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세상의 바다를 표류하는 우리에게 지금도 우리에게 육안으로 그 자취가 잘 발견되지 않는 길이시다.

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저자의 통일성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약2:11)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이슈가 본문의 발단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란 수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원리가 제시된다. 하나의 율법을 거역하든 율법 전체를 거역하든 동일한 범법의 무게를 가진다는 개념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꺼낸 하나의 사례가 본문이다. 저자 의존적인 사색이다.

하나의 율법과 율법 전체의 동일시는 바로 명령자의 동일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간음하지 말라고 명하신 동일하신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고도 명하셨다. 하나님의 법에 있어서는 범법의 경중이 갯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극히 사소한 하나의 법을 범한다 할지라도 그 범법은 법의 출처이신 하나님께 소급된다. 이상한 산법이다.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는 하나님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고 능멸하는 범죄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다. 피조물과 관계된 범법처럼 보인다. 그러나 선악과를 매개물로 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법을 행한 것으로 여겨졌다. 본질상 모든 법이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에 대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와 행해야 할 도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존재성이 그런 태도와 도리의 핵심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하고 누구에게 대한 것이든지 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의 행위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는 부르심을 받았다. 만물의 창조자요 율법의 수여자요 구속의 저자는 동일한 분이어서 그렇다. 이 날이 더 중요하고 저 날이 더 중요하다 말하지를 못하고 이 율법이 더 중요하고 저 율법이 더 중요하다 말하지를 못한다. 그런 차별은 창조자와 입법자와 구속자가 한 분이라는 사실의 망각에서 빚어지는 오해이다.

약속과 성취라는 개념으로 신구약을 분할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시대별로 의미의 차별을 가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교회에서 신분의 등급을 매기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교리에 마치 서열이 있는 것처럼 구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성과 속, 은총과 자연 사이에 선명한 경계선을 그리는 얄팍한 구획화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혼동을 방조하는 것은 금물이다. 범신론과 다신론과 범재신론 등은 모두 마땅히 사려해야 할 구분선을 은밀히 삭제한 인간의 지적 고안물 혹은 종교적 대체물에 해당된다. 통합과 혼합은 구분해야 한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근원도 없으시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표상되지 않기에 스스로 계신다고 말씀한다.

온 세상에서 단 한 지점도, 온 역사의 단 한 순간도 하나님과 결부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의식의 지평으로 삼아야 성경이 통합적인 안목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가정예배

가정예배 시간이 자꾸만 길어진다. 녀석들이 조금씩 커가면서 던지는 까다로운 질문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예정론과 창조론과 죄론이 늘 질문의 단골 매뉴이다. 우려되는 면도 있고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다. 우려되는 부분은 시간이 길어지면 정기적인 예배의 지속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약간의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 구사한 첫번째 전략은 호기심의 경계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가르침의 핵심은 성경이 주목하는 물음을 묻고 성경이 제공하는 답에 초점을 맞추는 사고방식 정립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말씀으로 우리의 고삐풀린 호기심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한된 인생이 주변적인 물음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것은 지혜가 아니었다.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수긍하는 분위기다. 비록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기본적인 효험은 확인했다. 오늘 쏟아진 질문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묻는 물음에 교회가 너무 무례하고 무성의한 태도로 답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로 모든 답변을 때우려고 한다는 점을 첫째가 꼬집었다. 꽤나 고민한 흔적이 짙었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 필요함을 언급한 후 교회의 선민의식 수준의 뻣뻣한 태도나 불신자의 무지를 냉대하는 태도는 고쳐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이 침묵하는 것을 성경보다 더 잘 아는듯이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함을 가르쳤다. 가정예배 개념에 대한 궁금증도 살짝 폭발했다. 식순에 따라 꼼꼼하게 마지막 순서까지 밟아가는 형식에만 얽메일 수 없어서 내용도 풍성하게 전달하기 위해 성경학교 기능을 가미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지금은 말씀을 읽고, '설교'를 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고, 기도제목 나누고, 주기도문 암송과 찬양으로 예배를 끝맺는다. 아이들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디딤돌이 되면 좋겠다. 예배 드릴 때마다 가족 모두에게 밀려오는 잔잔한 은혜와 기쁨은 형설을 불허한다. 예배는 언제나 은혜의 결과임을 날마다 실감한다. 참으로 감사하다.

길고 넓은 안목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일 뿐입니다 (시39:5)

이러한 논지의 근거로서 시인은 인생의 종말과 연한의 단기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의 눈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림자의 존재는 태양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비추임을 받지 못하면 인생은 살았어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인간이 존엄성의 극치에 이르른 때에라도 존재의 근수는 제로를 가리킬 뿐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번영은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고 실존을 망각하게 만들고 허망한 무아지경 상태로 내몬다는 칼빈의 까칠한 진술은 우리의 오늘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냉온수나 냉난방 시설도 부실했고 거리는 짐승들이 밀어낸 배설물의 악취로 진동했고 전화기도 비행기도 인터넷도 없었던 종교개혁 시대의 사람들이 인지했던 번영의 빈약한 개념과는 달리 지금의 번영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도록 훨씬 강한 중독성과 마취성을 보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보다 든든한 상태로의 행보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누렸던 번영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유려한 문명의 때가 또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판단은 변경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라도 허사라는 것 말입니다.

인생의 길이는 한 뼘입니다. 손톱 길이의 연장을 위해 문명과 감격과 도덕과 과학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시간과 영원의 현저한 격차를 식별하는 안목의 절박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 안목에서 하나님 안에서만 소망이 있다는 판단이 나옵니다. 

시인의 진단은 인생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바울은 이 세상을, 이사야는 온 우주가 하나님 앞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헛되이 지나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시야는 좁고 짧습니다. 그런 안목에는 주님께만 소망이 있다는 말이 관념의 유희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벌여지는 삶의 소소한 일상을 가볍게 보자는 게 아닙니다. 그런 평범함 속에도 온 우주와 역사 전체에 대한 의식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대상에 대한 무시나 폄하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태도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본질에 내린 뿌리

작금의 상황 속에서는 그렇게도 중요하고 긴급하게 보이던 것도 조금 시간이 지나보면 유행성 선동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유행의 장단에 우리의 신학적 보폭을 맞추지 않아도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하면 복장교체 문제로 분주하고 관심사도 소진하여 본질에 대한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관능적인 이슈들이 우리의 관심과 에너지를 잠식하기 위해 기회만 닿으면 요염한 포즈를 잡습니다.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한 우리의 일상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할당할 관심의 분량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해 보입니다. 관심의 안배가 적절하기 위해서는 본질과 유행을 식별하는 안목과 유행에 뒤쳐져도 도태되는 게 아니라는 배포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런 안목과 배포를 기르는 유력한 방편으로 저는 고전을 권하고 싶습니다. 교부들의 글을 숙독하고 종교개혁 주역들의 옥필들을 꼼꼼하게 읽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유행성 신변잡기 대우를 받았으나 오랜 옥석검증 기간을 거쳐 본질적인 것이라고 확인된 문헌들 말입니다. 

본질에 견고한 터를 닦은 이후에 유행에 대응해도 늦지 않습니다. 본질에 터를 닦는 것 자체가 이미 최선의 대응인 것 같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절기별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의 세기가 더할수록 깊은 뿌리의 향기만 짙어질 뿐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체질의 가변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하루 우리는 무지불식 중에 어떤 체질을 향해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신앙도 학문성도 어법도 태도도 사고도 일상도 하루하루 굳기가 더해져서 그 자체가 응축된 의미와 가치와 메시지로 빚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대기를 다 파악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려주신 인생 설계도를 따라 하루하루 걸음을 옮기는 게 가장 좋습니다. 우리의 걸음은 본질이란 디딤돌을 골라서 내딛는 게 최상인데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 장거리 경주의 중심을 쉬 잃습니다. 

말씀의 본질은 너무도 깊어서 한번 들어가면 사실 유행에 반응할 관심의 여분이 잘 마련되지 않습니다. 시간의 표피를 뚫고 들어가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와 마주치게 되고 결국 시간의 유행성에 매이지 않는 본질을 자기의 시대에 유통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문제를 커버하지 못하는 삐딱한 본질에의 집착에 면죄부를 발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거스틴의 진리

"감관에 아름다운 것으로 비치는 모든 것은...지성을 통해서, 감관의 중개를 거쳐서 물체들의 미가 파악되고 판단된다. 그런데 (아름다와 보이는 사물이 갖춘) 저 균등과 통일성은 공간 안에 분산되거나 시간 안에 변천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들은 단일하고 불변하는 균등의 척도에 의해서 판단되고 있다. 사각형의 광장이든 사각의 돌이든 사각형 책상이나 조그마한 사각의 보석이든 그밖의 무슨 물건이든 간에 그것이 사각형인 한, 우리는 사각형의 법칙에 준해서 판단한다. 이와 동일하게 부지런히 달려가는 개미의 걸음폭을 비례의 법칙에 의거해서 판단을 하듯이 점잖게 걸어가는 코끼리의 걸음폭도 우리는 동일한 비례의 법칙에 의거해서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 법칙, 모든 예술에 적용되는 이 법칙은 불변하는 것이다. 다만 그 법칙을 직관할 수 있도록 허용된 인간 지성은 오류의 변화를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의 척도가 되는 이) 법칙은 우리의 지성을 초월하는 것임이 분명하며, 이 법칙을 일컬어 진리(眞理)라고 한다." De vera religione, xxx.56.

우리 육체가 자리잡는 공간에 그것(단일성 혹은 진리 혹은 규범)이 자리잡고 있다면, 저 동방에서 물체들에 관해서 우리와 똑같은 식으로 판단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공간에 내포되는 것이 아니다.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항상 거기에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것은 공간을 통해서는 그 어디에도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능성을 통해서는 없는 곳이 없다”(nusquam est per spatia locorum et per potentiam nusquam non est). De vera religione,xxxii.60.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성과 진리 사이에, 인식 주체와 인식대상 사이에 설정되는 공간을 부인함과 아울러, 인간 지성과 진리 사이에 어떠한 매개체도 거부하고 “진리는 어떤 사물을 인식케 만드는 내면의 빛"(veritatem, id est lucem interiorem, per quam illum intellegimus)이라고 한 선언에서 그 의미를 더잘 드러낸다.

인간의 "추론이 이 진리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발견할 따름이다(non enim ratiocinatio talia facit, sed invenit).그러므로 [진리는] 발견되기 전에도 스스로 존재한다." De vera religione, xxxix.73.

더 지고하신 하나님

아~~~ "나의 가장 내밀한 것보다 나에게 더 내밀하며 나의 가장 고결한 것보다 더 지고하신 하나님" (interior intimo meo et superior summo meo). Confessiones, III.vi.11.

철학의 정의

로마의 정치가요 웅변가요 문학가요 철학자인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는 철학을 "올바르게 사는 학문"(bene vivendi disciplina, Oratio in Pisonem 29.71)이라 하였으며,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도 철학을 "올바르고 행복한 삶의 기술"(ars bene beateque vivendi, Epistula 89.2)이라 했습니다.

 철학은 관념의 뜬구름 잡으려는 이성의 헛발질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어거스틴 안에서도 보이는데, 그도 철학을 "선하고 지복한 삶의 길"(vitae bonae ac beatae via)이라고 여겼네요. 여기서 삶이라는 건 물리적인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특별히 어거스틴 경우에는 철학이란 말보다 "참 종교"(vera religio)라는 보다 생생하고 근원적인 표현을 썼다는 점에서 고대 철학과의 차이를 보입니다. 이 개념은 종교개혁 및 이후의 개혁파가 신학의 정의로 발전시켜 포섭했던 것입니다. 철학이든 신학이든 전인격과 삶이 빠져서는 안되는 뜻입니다.

2013년 12월 9일 월요일

교부신학 배경 2

1. 특별한 부류의 유대교: 알렉산드리아에 번성, 70인역복을 만들었고 이것은 헬레니즘 문화를 초대 교회로 도입하는 데에 매우 유리한 통로였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학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유대교 신학을 헬레니즘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한 시도라고 해석한다. 보다 엄밀한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2. 필로 (주전 30-45)는 이러한 헬레니즘 경향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플라톤을 특히 좋아했고 이데아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구분함, 그리스도 철학의 가장 탁월한 주장들은 이미 성경에 등장했던 것이라고 주장. 이런 주장은 종교개혁 및 그 이후에도 줄곧 발견되는 주장이다. 필로는 하나님이 성경의 자자들을 하나님의 뜻 전달하기 위한 수동적인 도구로 사용했고, 성경은 온전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3. 필로의 중요성: 1) 필로의 알레고리 해석학, 계시된 진리와 철학자의 진리가 동일함을 보여주려 했다. 알레고리 방법론은 필로의 새로운 시도가 아니었다. 이미 호메로스/헤시오도스 시들에 감추어진 의미를 발견하고 고대의 신화에서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를 읽어내는 데에 유용한 도구였다. 필로는 모세의 율법을 그대로 수용했고 동시에 알레고리 도움으로 율법의 보다 깊은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몸의 그림자며, 보다 심오하고 참된 진리는 문자가 상징하고 있는 영적인 의미에서 발견된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폐하지도 않았고 폄하한 적도 없었다. 사람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고 영혼의 장막인 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듯이 성경의 역사적 의미는 최고로 존중될 가치가 있었다.

4. 이런 원칙에 입각하여, 필로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인간의 지성, 감각과 욕정들, 지상적인 영혼의 창조, 쾌락에 의한 지성의 유혹, 물질적 질서에 대한 지성의 종속, 인간의 지상적 영혼이 그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방식들을 상징하는 신화로 설명했다.

5. 필로의 중요성: 2) 로고스에 대한 개념. 하나님은 전적으로 초월적. 플라톤의 전제였던 미덕, 지식, 절대선, 미, 영원한 형상들도 초월한다. 하나님은 순수한 존재이며 절대적이며 단일하고 자족적이며 속성이 없는 것으로 설명된다. 유한 존재들을 분류하는 데에 사용하는 그 어떤 논리적 범주들 속으로도 포함될 수 없는 존재시다.

6. 당시의 플라톤 학파의 해법은 최고선 혹은 하나님과 물질세계 사이에 신적인 존재들로 이루어진 계층 질서를 집어넣어 이 존재들이 물질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것으로 보았었다. 이제까지 존재한 것들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하나님과 가장 비슷한 존재로서 필로는 그것을 로고스라 하였다.

7. 로고스: 1) 하나님과 만유를 이어주는 중개적인 로고스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인, 정신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수단이다. 이는 모두 스토아 학파의 사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필로는 로고스를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들 혹은 원형들의 세계와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정신 속에서의 이성적인 사고(λόγος ενδιάθετος)와 말로 표현된 사고(λόγος προφορικός)가 존재하듯 하나님의 로고스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정신적 개념들 혹은 사고이며 그런 후에 형태가 없는 비실재적 물질 속으로 투사되어 그 물질을 실재적 이성적 우주로 만든다고 하였다. 필로는 로고스를 독생자와 같은 인격적인 용어들로 묘사한다. 로고스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매개체다. 구약에서 족장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천사는 필로의 눈에 로고스였다. 

보다 중요한 것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도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가 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일의 분량보다 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듯합니다.

많은 책을 저술하여 지식을 두루두루 공유하고 유익을 얻는 것도 좋겠지만 얼마나 진리가 진리답게 단 한줄기의 빛이라도 세상에 비추어질 수 있느냐가 중요한 듯합니다. 학문의 분량보다 질이 더 중요한 탓입니다.

교부신학 배경 1

1. 교리적인 동질성을 교부 시대에 부과하지 말아야 한다. 교리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교회의 신학은 미숙함과 정교함의 양 극단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2. 신학의 개념: 1) 이레니/터툴리안, 철학에 대해 깊은 회의와 적대감을 가졌기에 신학의 기능을 성경에 제시된 교리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국한. 열등한 유형의 기독교: 성경 및 교회의 진리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토대로 함/ 우월한 유형의 기독교: 그노시스, 즉 비의적인 형태의 지식을 토대로 함. 성경과 전승이 지닌 더 깊은 의미를 밝혀내서 그것에 비추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구원의 계획과 관련된 심오한 신비들을 탐구하는 것이 목표. 신비적 관상이 기독교의 절정으로 간주됨.

3. 콘스탄틴: 교회와 제국의 화해, 니케아 공의회는 화해의 상징이다. 교회는 제국의 호의를 향유하게 된다. 논쟁의 시대가 열리고 주교들로 구성된 공의회는 교의를 정의하는 공인된 기구가 되었다. 신학의 전성기다.

4. 교부들의 교회가 로마의 복잡한 문화적 환경 속에 놓여져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종교적, 철학적, 신지학적 개념들로 번잡했던 시대였다.

1) 유대교. 기독교의 요람이다. 교회의 예전과 사역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팔레스틴 유대교: 신약성경 저자들의 사상이 형성된 밑거름 되시겠다. 헬레니즘 등장 이전 2세기 준반까지 기독교는 주로 유대교의 틀 속에서 형성됨. 변증적인 교부들이 등장하기 이전의 거의 모든 사상적 범주들은 유대적인 것이었다. 

2013년 12월 8일 일요일

하나님을 향유하다

하나님 자신만을 유일한 향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어거스틴 사상의 굵고 넓은 스케일이 가늠되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다 하나님 향유의 수단이요 과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좌절과 절망도 상대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것이고 수단이란 얘기지요.
땅에서의 기쁨과 흥분과 감격과 아름다움 역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거기가 종착지인 것처럼 소망과 절망을 걸지 않는 게 지혜인 듯합니다.

자식이 속을 썩여도 거기가 전부인 것처럼 분노하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가까운 사람과의 이격과 갈등도 아프지만 여전히 상대적인 것입니다.
변할 줄 모르는 고질적인 난황도 시간의 올가미에 걸려 있습니다.

지혜자의 정확한 지적처럼 생명의 근원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반응의 포커스를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비록 원수라도 화목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끝까지 믿고 맡기면 말씀의 운동력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신뢰하면 천지가 흔들려도 여유와 쉼이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마음이 말씀에 정박해 있으면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법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미소를 짓습니다. 눈물이 흐르지요.
그런데 '그리하지 않더라도' 신앙은 그 미소가 구말리로 번지게 만듭니다.
이는 자연의 관찰에서 걸러지지 않고 유독 믿음의 눈으로만 보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그분만을 향유할 수밖에 없어짐을 느낍니다.
이를 악물고 결단하는 향유가 아니라 그리 아니할 수 없는 향유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왜 이리도 좋을까요? 닭살이 몇 개 올라올 정도로요 ^^

아무일도 없었고 할 일은 여전히 산더민데 말이지요...

2013년 12월 7일 토요일

고백의 의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저술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속에 흩어진 나를 모으는 것이 회상이고,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통합이다. 이것이 고백의 목적이다. 여기서 히포의 주교는 과거로 흘러간 자신의 흔적까지 자아의 개념에 집어넣고 있다.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통합의 방편이 고백이란 점, 흥미롭다. 관념의 하루를 닫는 일기도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통합의 당일치기 방편일 수 있겠구나. 하루하루 매 순간마다 떠오르는 생각의 자취들을 모아 메모하는 것도 하나님께 나를 모아 드리는 통합의 소중한 도구겠다.

고백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물이라, 어거스틴 고백록을 묵상하다 건진 짭짤한 교훈이다. 고백의 주어가 나이기에 내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삶과 사태를 알고 경험하고 수집하여 고백의 내용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건 조금 어색하다.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희생하고 섬기고 돌보며, 내가 회개할 자인 것처럼 형제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품고 기도하는 그런 '나'의 삶이라는 고백의 소여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아야 하겠기에 드는 생각이다.

신에게 고백의 글을 출간하는 것이 낯설었던 시대에 당시 출판계의 문화를 쇄신했던 이런 고백서 형식의 문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각자의 삶 전체가 언어로 번역된 기도문을 하나님께 올리는 건 아름답고 향기로운 시도이다. 남에게 읽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민망하고 소름도 한 움큼은 떠밀어낼 일이지만 시편의 기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찬양의 한 쟝르로 생각하면 닭살까지 돌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순수한 동기를 유지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다. 

행복에의 회복

히포의 주교에게 1) 하나님 추구와 2) 행복 추구와 3) 진리 추구는 동일하다.

귀하고도 부러웠다. 하나님 추구와 진리 추구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런 생의 판단력과 체질을 가진다는 것은 놀라운 저력이다. 하나님과 진리와 행복의 동일시가 이론적인 지식으로 고수하는 사람들을 보았어도 그것이 전인격과 생을 관통하는 경우는 희귀한데 희포의 주교는 이런 점에서도 본받고 싶은 귀감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 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어거스틴 진단은 이렇다. 행복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면 추구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와 부패에 참여한 것처럼 타락 이전의 아담이 누렸던 행복에도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으로 행복에 참여하는 것인지, 실재로 참여하는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우리는 아담이 잃어버린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아가게 되어 있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었다. 참된 삶이란 진리를 갈구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이니 결국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삶이고 행복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것은 진리와 하나님과 행복과 진정한 삶을 동시에 등돌린 격이었다. 모든 것이 절망으로 돌변했다.

유일한 회복은 말씀으로 돌이키는 것인데 그 말씀이 우리에게 오셨다. 회복의 성취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몫이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한 블레싱의 삶이 오직 그분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행복론은 불행론의 다른 이름이다. 행복의 개념적 도전은 이제 종결이다. 그러나 행복의 체질전환 문제는 별개이다. 

연구의 대상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우리나라 상황이 아니고 우리나라 문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언어가 아니고 우리나라 사태가 아니면 무엇이든 연구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우리나라 사람과 상황과 문화와 언어와 사태는 우리에게 쉽게 알려진다. 정보 접근력의 용이성이 가치의 낮음과 결부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쉽게 간과된다. 홀대를 당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타인들에 대해서는 깍듯하고 관대한데 가깝고 편한 가족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무례하게 대하는 것과 흡사한 인상 말이다. 유럽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연구할 때 그들의 삶이 먼 시대여서 그들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연구의 대상으로 여겼었다. 어떤 의식에 사로잡힌 태도였다. 물론 환경에는 하나님의 지문이 잔뜩 묻어 있다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주변에서 설정된 가치의 우선순위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보다 중차대한 것을 홀대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하게 된다. 집중적인 학구열 투입의 대상은 하나님의 뜻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역사신학 전공자의 도리는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인 조명임에 분명하나 여전히 가치의 개입이 필요하다.

불안증

불안증은 하나님이 우리을 일깨우는 자극이다. 신호등과 같아서 집중해야 하고 지시를 정확히 이행해야 한다. 무시하면 불안증이 우리를 무시하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든다. 적당한 시기에 적당하게 주어지는 불안도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그런 신호등이 없다면 인생은 무모한 아우토반 질주에 내던져질 수 있어서다.

균형을 위해서는 견제가 필요하다. 때때로 불안은 하나님의 윗트라는 생각까지 든다. 여기서도 측량하지 못할 하나님의 지혜가 번뜩인다. 도대체 어떻게 불안이란 것이 인간에게 있을까? 불안은 신비로운 현상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명의 물꼬일 수도 있겠다. 너무 나아갔나? 불안은 고통과도 유사한 하나님의 '선물'임은 분명하다.

2013년 12월 6일 금요일

대상이 사랑의 속성을 정한다

사랑의 대상에 의해 사랑의 속성이 정해진다.
내 사랑이 하나님을 향하면 거룩한 사랑(Amor Dei)이고
하나님 사랑에 기초하여 사랑이 이웃을 향할 때에도 거룩하다. 

사랑이 자기를 향하면 거룩하지 않은 자기애(Amor sui)다.
다른 형태의 자기애는 마음이 세상의 재물을 향하는 경우이다.
이것을 탐욕(Cupiditas)이라 한다. 사랑은 대상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사랑(Amor)은 영혼의 무게이다. 사랑의 대상에게 그 무게가 쏠린다.
그 무게에 이끌려 우리의 영혼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신기하다.
사람이 해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헛갈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이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제자리로 삼는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을 향하지 아니할 때는 자기가 제자리다.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늘 자기라는 제자리를 맴도는 인생이다.

책의 피곤함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전12:12)

아직은 유능한 누군가가 '뭐라 카더라'에 쉽게 매료된다.
한 줄의 그런 경구를 건지려고 수백 페이지의 먼지를
흡입하는 한이 있더라도 여전히 설레임이 가시지를 않는다.

의식의 저변에 깔린 무형의 전제들을 캐내려고
유명인의 사유 깊숙한 곳 후비기를 병적으로 집착한다.
대부분 상황 속에서 가치화된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징후이다.

최근에 모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다. 내년 여름에나 나온단다.
신학생과 목회자와 신학자와 신학적 사고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을 독자로 생각하고 저술한 책이다.

그동안 공부하고 깨달은 교훈의 대부분을 그 속에 담았다.
신학적인 저술은 처음이다. 시작은 했는데 끝이 없다는 게
전도자의 진단이다. 마침표를 찍지 못한 길로 접어든 셈이겠다.

집필과 출판으로 인해 몸과 마음에 쌓일 피곤의 분량을
지금은 예단하지 못하겠다. 피곤의 값어치는 충분한가?
생각의 배설물을 예쁘장한 문서에 담아내는 행위가 아직은 감미롭다.

그러나 적정한 피곤이 누적되면 그때서야 전도자의 지적을
다시 곱씹으며 재평가에 들어가게 될 듯하다.
지금은 내게 경험된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언어로 담아져서
타인과 공유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큰 기쁨이다.

제임스 브랫의 카이퍼 특강 1

제임스 브랫(James Bratt)은 칼빈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이다. 오늘(2013년 12월 5일 7시) 베이커가 최근에 출판된 그의 책 사인회 겸 특강을 마련해서 참석했다. 아주 유익했다.

1. 예일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카이퍼의 시대를 깊이 연구할 수 있었고 미국의 더치 이민사를 다루게 되었다. 미국 종교사의 권위자인 그의 지도교수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E. Ahlstrom)은 카이퍼가 대단히 다르고 고유한 인물임을 지적하며 보다 지속적인 연구를 권하였다. 그리고 풀브라이트 연구비를 받아 두 차례 카이퍼를 단독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2. 미국의 종교적 관점을 보자면 같은 개혁주의 입장을 취하여도 대단히 다양한 부분들의 몇 조각만 가진 종파들이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이 모든 개혁주의 신학의 조각들을 두루 담지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카이퍼란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카이퍼에 대해 다양한 구호들이 그에게 라벨처럼 붙는다. 기독교 학교, 일반은총, 영역주권 등의 다양한 구호들이 있지만 도대체 이 모든 것들이 산출된 근거가 어떤 것인지가 궁금했다. 이것이 바로 카이퍼를 대하는 브렛의 굶은 물음이었다.

3. 카이퍼를 대하는 다양한 반응들이 있다. 한편으론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어떤 사람들은 평균치의 인간적인 대우에도 인색하다. 브렛은 카이퍼를 정당한 인간답게 대우하는 회복을 시도했다.

4. 카이퍼는 대단히 중요한 시대적 물음에 직면해야 했다. 카이퍼 자신의 시대에 카이퍼는 어떻게 정의되고 있었는가? 카이퍼를 둘러싼 맥락을 3가지로 지적하려 한다. 1837년도에 태어났다. 17세기의 화란은 유럽 사회와 경제와 예술의 기수로 여겨질 정도로 대단히 잘나가는 국가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의 국가들과 특별히 영국이 산업혁명 이후로 부상하여 화란의 내리막길 행보가 끝자락에 이르렀을 무렴에 카이퍼가 태어난 것이다. 카이퍼의 정신에 회복에 대한 열망이 타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프랑스 혁명도 지났고 프랑스에 의해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었다. 국가적 회복과 예술과 교육과 학문의 회복과 경제의 회복이 극히 갈급했다.

5. 19세기 중반에 화란의 경제가 반등하기 시작했다. 카이퍼는 라이든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863년에 직업을 찾고자 하였다. 우트레히트 아래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목회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도 철도가 뚫고 들어올 정도였다. 화란의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다. 철도는 독일의 경제와도 연결하는 가교였다. 지리적인 차원에서 유럽은 지구촌 사회였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강제적인 교육을 요구하게 되었다. 모든 아이들은 적정한 연령에 이르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국가에게 좋은 일이었고 모든 이들에게 좋은 것이었다.

6. 어떤 학교를 세울 것인가? 기독교 정치가인 카이퍼의 첫번째 정치적 관심사는 공공교육 정책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공적인 학교를 세워 강제적인 교육을 행하는 것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교과과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읽고 쓰고 비평하는 것이 좋다. 건강한 시민성과 종교와 도덕적 원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나 이신론이 대안들 중에 있었으나 카이퍼는 충분히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특정한 확신을 가진 가정들은 불공정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학교가 기독교 학교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이퍼는 반대했다. 유대인에 대해서는 공정하지 않은 처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신교 학교는 로마 카톨릭에 공정하지 않았다.

7. 이때 카이퍼가 확립하게 된 원리는 평등한 공의(equal justice)였다. 당시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의 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다. 카이퍼가 보기에 그것은 공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떤 특정한 신념이 강요되는 학교의 정체성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기독교적 권리의 방어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공정함과 병행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이 카이퍼의 고유한 생각은 아니지만 그의 표지였다.

8. 모든 국가가 직면했던 공통적인 물음들이 있었다. 누가 학교를 통제할 것인가? 사고방식 형성은 누구의 몫인가? 누구의 생각이 원리로서 가르쳐 져야 하는가? 이런 국제적인 질문들과 카이퍼는 씨름했다. 공공교육, 이것은 모든 산업화된 국가가 직면해야 하는 초미의 주제(the issue)였다. 1870년 미국도 공공학교 역할에 대한 논의에 예외가 아니었다. 어떤 이의 교과과정을 선택할 것인가? 개신교는 선택권을 로마 카톨릭와 유니테리안에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1870년대에는 독일이 비스마르트에 의해 통일이 되었고 결혼과 학교의 세속화가 일어났다. 모든 나라가 이렇게 공공학교 문제를 해소시킬 방안 모색에 여념이 없었다.

9. 카이퍼의 관심사는 정당과 정치로 기울었다. 1901-5년에는 네델란드 수상이 되었다. 1905년에 재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당시의 어려운 문제를 잘 해소하지 못하였다. 대체로 카이퍼는 곤경을 잘 극복하지 못하였다. 루즈벨트가 미국에서 1905년에 대통령이 되었다. 러시아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1905년 민중운동 불길에 휩싸였다. 19세기의 첫번째 사반세기 기간동안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정치적인 격동을 맞이했다. 영국과 미국과 일본에도 그러했다. 자유주의 물결이 격렬했다.

10. 산업화의 가속화에 묻힌 희생들도 만만치 않았다. 파업들이 난무했다. 카네기의 경우, 노동자를 잠재우기 위해 사병들도 가지고 있었다. 카이퍼는 정부의 서툰 정책이 끼치는 부작용을 염려했다. 카이퍼는 거대한 산업 자본주의 팬이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인 그가 보기에 정치신학 측면에서 1%가 다스리고 99%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었다. 정부에게 권한을 주어 노동자를 임의로 통제하게 만들지 않고 노동자에게 권한을 주어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협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선호했다. 즉 카이퍼가 선호했던 것은 작은정부 진보주의(small government progressivism)다. 이것이 필히 정치적 자유주의 사상과 결부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든다면, 사람들은 큰 정부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에 권한을 부여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카이퍼의 수상직 끝자락에 공공의료 문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자신이 이 부분을 저술할 무렵에 오바마는 공공의료 문제로 대통령 리더십을 상실하고 있었다. 기괴한 일치였다.

11. 카이퍼는 Universal health insurance for everybody with public option을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인 건강보험 가지는 건 사회적인 강요였고 사적인 보험과는 협상해야 했다. 이는 공공교육 경우에도 동일했다. 하지만 카이퍼가 유토피아 사상에 경도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이 정부의 주도권 아래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주의자다. 어떤 인물이나 집단이나 산업이 막대한 권력을 축적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 대통령과 생각의 결이 동일했다. 카이퍼는 견제와 균형을 추구했다.

2013년 12월 5일 목요일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

하나님께 가장 진실할 때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속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 앞에서는 대충 넘어가지 못한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시다. 정말 두렵고 떨린다.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디까지 진실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면 하나님께 가장 진실해야 한다. 진실하면 할수록 그것이 우리를 진정한 복으로 떠민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란 진실의 절정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진실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사람 앞에서의 진실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진실하다 할지라도 사람의 본성과 의식이 설정한 범위 내에서의 진실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은 다르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거룩하고 분별하고 전능하고 전지하고 거하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분이시다. 진실의 차원이 달라진다. 하나님께 가장 진실할 때에 비로소 사람에게 진정으로 진실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교회에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을 요구한다. 그건 사람들 앞에서 덕스럽게 보이는 연출이 아니라 영과 혼의 차원까지 우리를 꿰뚫고 계신 분 앞에서의 경건이다. 그런데 교회가 사람들이 보기에도 진실의 수위가 위태롭다.

진실의 최종 번지수는 사람이 아니지만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진실하지 못하다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은 그림의 떡이겠다. 그래도 교회는 극상품 포도나무 열매로서 공의와 정직이 기대되는 마지막 보루여야 한다.

진실은 가만히 있으면 도달하는 본성의 자연스런 종착지가 아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의 부단한 자기부인 없이는 부스러기 한 조각도 기대할 수 없는 게 진실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을 아침마다 분초마다 일깨워야 하겠다. 

2013년 12월 4일 수요일

사랑의 방향성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생의 방향이다. 방향의 올바른 설정이 전제되지 않은 모든 행위나 진로는 결국 '여기가 아닌가벼' 낭패감의 원흉으로 작용한다. 낭패와는 역방향을 질주하는 듯한 형통과 번영도 실상은 어쩌면 보다 심각한 낭패감을 초래하는 원흉의 괴수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굶주린 사랑의 해우소 차원에서 무언가를 추구하게 된다. 탐닉하고 집착하고 파괴하는 본성의 기운이 무의식의 언저리로 파고든다. 당연히 그런 기운의 자취는 추적되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다. 어떤 형태로든 곪아서 터져야 비로소 인식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무엇을 하든지 뭔가가 살아난다. 생각을 해도 생명의 기운이 작용하고 행동을 해도 거기에서 생기가 발산되고 말을 하더라도 음파의 향기가 진동한다. 사소한 것들도 고귀하게 변모하고 일상적인 것들도 특별의 수위로 상승한다. 신비롭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양한 결과가 뒤따른다. 그런데 밖에서는 그 인과의 뚜렷한 궤적이 관찰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사자는 안다. 내 삶의 모든 순간들에 행위의 모든 조각들과 생각의 모든 마디들이 어떻게 조성되고 상합하여 의미가 되고 가치가 되는지를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해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대체로 들키는 일이 드물다. 그래서 도덕적 해이의 끈적한 표정이 빚어지기 쉽고 이래도 그만이고 저래도 그만이란 무차별의 나른함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람들의 시선에 맞추어진 삶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러나 세상을 통째로 속여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니까 그분의 존재가 부담이다. 존재를 지우려는 동기는 강력하고 방법은 간단하다. 무신론만 내뱉으면 존재의 삭제는 간단하게 종결된다. 요청된 분이기에 요청이 없으면 존재의 무게가 소멸되는 분이라는 이해도 유용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는 지워질 수 없으며 그분이 온 땅을 통치하고 계시기에 세상 전체를 속이거나 설득해도 종국적인 낭패감은 따놓은 당상이다. 반드시 좌초한다. 사람들을 다 속였다고 안심할 때 찾아오는 낭패의 근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존재가 무너진다.

사랑은 두 대상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속성이다. 택일해야 한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망각하고 미워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덮고 기억하고 끌어안게 된다. 모든 계명의 종착지가 하나님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방향을 설정한다. 반나절이 걸려도 아깝지가 않다. 그릇된 방향이 모든 좋고 아름다운 것들을 무로 만들기 때문이다. 방향이 우선이다. 설정되면 전력으로 질주하면 된다. 방향도 알고 선택할 수도 있는 은혜가 무한대로 제공되고 있어 만 입으로도 감사가 부족하다. 

멀러의 비공식적 라이트 평가

멀러 교수님과 N T Wright의 칭의론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본인은 라이트의 글을 많이 읽지 않았고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 이유로는 자신에겐 별로 도움이 안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하신다. 대화하며 느낀 전반적인 인상은 라이트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대화하며 감지한 라이트에 대한 멀러 교수님의 '비공식적'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라이트의 칭의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냐고 여쭈었다. 멀러 교수님은 라이트가 두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단다.

1. 바울은 당시 오해되고 있는 유대인식 율법관과 구원관을 떠났는데 라이트는 오히려 당시의 주변 문헌들을 근거로 유대적인 사유와 바울의 가르침을 묶으려고 한다. 바울 자신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처신이다.

2. 라이트는 종교개혁 신학과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입장을 탐구하지 않았으며 그럴 마음도 없어 보인다. 주석적인 전통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석의와 유대문헌 해석에 치충하고 있다. 당연히 그가 취하는 교리적 입장은 그가 취한 소스의 산물이다.

라이트는 그리스도 순종을 능동과 수동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내용이 특이하지 않느냐고 여쭈었다. 이에 대한 멀러 교수님의 답변은, 그리스도 순종의 능동성과 수동성 구분은 종교개혁 주역들도 활용했던 구분이다. 그러나 개념이 어떠냐가 중요하다. 라이트의 개념은 종교개혁 입장과 다르다. 그는 그리스도 죽으심을 수동으로 간주하고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 순종을 능동으로 연결하고 전자는 현재적 칭의의 원인이나 후자는 미래적 칭의를 위해 전가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비록 현재적 칭의가 미래적 칭의를 내다보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미래적 칭의는 그리스도 순종과는 무관하고 성령의 도움을 입은 기독인의 삶에 의존한다.

이에 나는 라이트가 종교개혁 신학의 칭의와 성화를 이중적 칭의라는 개념 속으로 통합한 것 같으냐고 여쭈었다. 멀러는 아니라고 했다. 이는 구원과 직결되는 법정적 칭의와 중생자가 어떻게 거룩하게 되고 사느냐와 관계된 성화를 모두 구원과 결부된 칭의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덕담을 남기셨다. 라이트의 장점과 단점을 구분할 줄 알고 전자는 취하고 후자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온당하다. 좋은 것이 많다고 해로운 것까지 무더기로 승인하고 수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반대로 잘못된 부분들이 있다고 해서 전체를 거부하면 이 세상에 남아나는 것은 하나도 없어지게 된단다.

2013년 12월 3일 오전 11시, 칼빈 세미너리 멀러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2013년 12월 3일 화요일

공동체적 책임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3:3)

미시건의 겨울은 목도리 착용을 늘 압박한다. 그런데 지혜자는 계절을 타지 않는 목도리로 인자와 진리를 우리의 목에 매라고 권고한다. 마음에도 새기란다. 마음은 만물과 비견할 수 없는 부패와 거짓의 온상이고 목은 그것들이 수시로 출입하는 길목이다. 

여기서 "인자와 진리"의 히브리어 원문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그런 책임의 항속성을 일컫는다. 뉘앙스가 다르다.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라거나 진리의 지식에 부요한 자가 되라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개인적인 자질을 넘어 공동체적 연대성을 키우라는 말이다.

그 결과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칭찬과 존경이 따른단다. 물론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는 건 기본이다. 그러나 거기에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의 함양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하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누이는 자는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는 자다.

내가 속한 공동체로 가족과 교회와 직장과 학교가 부족하고 못나고 실패하고 좌절하면 그런 존재감에 섞이지 않으려고 관리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잠시는 모면할 수 있겠으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란 보다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지혜자의 지적처럼 미련하다. 

마음에 늘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교회가 새겨져 있어야 한다. 적극적인 의식의 철필로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공동체가 무너져도 개인'경건' 관리와 자기 잘난척 투하의 기회 포착에 여념이 없어한다. 

공동체를 위해 생명책 지면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모세와, 생명 자체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망가진 공동체와 함께 자신의 운명을 묻으려고 했던 바울과, 백성들의 멸망을 언제나 눈물로 적셨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떠오른다.

한국교회 침몰은 교회에 무신경한 사람들도 감지하고 혀를 내두른다. 나 자신도 이미지 관리용 손가락질 신공만 허구헌날 구사한다. 부끄럽고 무책임한 처신이다. 교회의 본격적인 황무함의 더딤은 주께서 게의하는 자의 출현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James Bratt, Abraham Kuyper

벌써 6개월이 지났지만 대충만 훓어보고 아직 구입하지 못한 카이퍼 전기이다. 저자인 브랫은 카이퍼의 대단히 방대한 문헌들을 꼼꼼하게 독파한 인물이다. 예일에서 작성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Dutch Calvinism in America라는 책으로 나왔는데 그 책에는 카이퍼에 관한 챕터가 포함되어 있다. 역사 속에서 희귀한 인물들 중의 하나인 카이퍼를 더 연구하면 좋겠다는 지도교수 권유로 그 챕터를 발전시킨 카이퍼 연구의 결정체가 바로 이 전기이다.

칼빈 신학교의 존 볼트 교수는 지금까지 쓰여진 카이퍼 전기중에 최고란다. 저자와 절친이기 때문에 평가의 팔이 안으로 굽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리 틀리지 않은 지적이라 생각된다. 물론 브랫이 더치 혈통이고 카이퍼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물려받은 공동체를 섬기는 학자라는 점에서 비판의 각이 무딜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도 카이퍼 전기를 하나 구입하라 하면 난 이것을 고르겠다. 이젠 카이퍼의 본격적인 신학 연구서가 기다려진다.

James Bratt, Abraham Kuyper: Modern Calvinist, Christian Democrat (Grand Rapids: Eerdmans, 2013)

2013년 12월 2일 월요일

입술의 의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롬10:10)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사도들의 교리라는 가장 확고한 반석 위에서만 세워지는 원리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단한다. 믿음은 맹목적인 배짱이나 무모한 고집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만을 그 토대로 삼는다는 이야기다.

계시된 진리의 토대 위에 세워진 믿음은 우리에게 마음과 입술의 의무(officium cordis et linguae)를 부과한다. 이는 우리의 모든 정신활동 중추인 마음에 진리가 새겨져야 하겠고 동시에 마음에 쌓인 것이 입술로 출고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이다.

입술의 고백은 행함과 진실의 배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입술은 마음에 각인된 내용이 외부로 이동하는 출구의 대표성을 나타낸다. 교회의 입술은 언제나 믿음의 내용을 고백했다. 구원의 본질적인 진리를 담은 공의회의 신경들과 고백들과 신조들이 있었다.

고백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인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전진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이는 신학의 체계로 발전되고 이론과 실천을 포괄하게 된다. 신학은 믿음의 고백이며, 성경 전체에 한 이오타도 첨삭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최고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진리이다. 무엇이든 인간의 눈길이 미치고 손길이 닿는 곳에는 변경이 발생한다. 내가 살아 있어서다. 내 기준에 사로잡혀 있어서다. 있는 그대로를 가감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은 놀라운 은총이요 기적이다.

신학자는 그것을 최상의 과제로 설정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계신 그대로를 마음에 새기고 증거하는 과제 말이다. 그런 과제의 일환으로 진리에 대한 인간의 왜곡적인 관여의 최소화를 도모한다. 자기부인 없이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게 신학자의 길이다.

2013년 12월 1일 일요일

도덕법의 세 가지 기능

구약에는 세 종류의 율법이 등장한다: 의식법, 실정법, 도덕법

도덕법의 기능은 다시 세 가지의 기본적인 용법으로 구분된다.

1) 실정법적 활용 (usus politicus sive civilis): 죄의 억제 차원에서 사회의 악과 불의를 제어하고 공공의 복지를 도모하게 하는 율법의 기능을 의미한다. 이는 일반계시 혹은 자연법 개념으로 주로 논의된다.

2) 훈육적 활용 (usus elencticus, theologicus sive paedagogicus):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불의에 절망하게 만들고 그들 밖으로 눈길을 돌이켜 십자가의 은혜와 자비를 갈구하게 만드는 율법의 기능을 의미한다.

3) 규범적 활용 (usus didacticus sive normativus):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감사의 차원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신앙과 삶의 규범을 제공하는 율법의 기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화의 삶과 관계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구약의 사람이든 신약의 사람이든 율법의 총화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finis legis)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는 실정법적 차원에서 율법이 고발하는 죄와 불의의 종결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법적인 요구를 모두 해결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란 본래적인 질서를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훈육적인 차원에서 율법이 우리로 도달하길 원하는 마지막 종착지가 그리스도 예수시기 때문이며, 규범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의 신적인 규범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삶으로 온전히 이루셨고 우리에게 최종적인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