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31일 일요일

말씀이 시켰다

세상의 기원이 말씀이듯
온 세상은 권능의 말씀으로 유지된다
보이지 않는 진실, 그러나
말씀이 역사의 바퀴를 도도히 움직인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명령을 계속 보내신다
능치 못하심이 없는 말씀이다
그래서 세상이 그 말씀에 필히 반응한다

속히 달리는 말씀의 변혁적인 기운으로
눈이 양털처럼 떨어지고
잿빛 서리가 대지를 뒤덮으며
떡 부스러기 같은 우박이 땅을 난타한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는 것도
온도와 높이의 차이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명령에 대한 공기와 물의 반응이다

삶의 현장에도
말씀의 신속한 출입이 감지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외에 어떤 이에게도
노출되지 않는 사실이다

사람을 설득하고
공감대의 덩치를 키우고
내가 옳다는 사실의 외적인 확증에
골몰하는 태도는 어리석다

적당한 오해로 고독의 맷집을 키우고
믿음의 강도를 높여가며
주님만을 증인으로 삼아
꿋꿋하게 살아가는 게 상책이다

2019년 3월 30일 토요일

양보의 보상

농산물 코너의 진열대에 누운
우리보리 강정의 표정이 요염하다
반가운 분들과의 유쾌한 만남 후의 허전함이
지갑을 열고 강정을 데려온다

강정을 품고 열차에 몸을 실었는데
옆자리의 할머니가 광주까지 가신다며
푸근한 미소를 보내신다
강정이 눈에 걸렸는지 한참 머무셨다

봉지를 개봉하고
주름이 깊은 계곡처럼 파인 손바닥에
빼곡한 분량의 강정을 건네며 드시라고 했다
더 푸근한 눈웃음을 보내신다

또래로 보이는 신사가 곁에서
절망을 깨문 표정으로 여기가 18호차냐고 묻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분의 눈에 고인 낭패감이 한숨을 옷입고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한숨에 묻은 8이라는 숫자는 귀로 들어온다

그분의 자리로 가겠다고 일어서는
나의 옷자락을 붙잡은 할머니가 물으신다
"어딜가? 내가 싫은거여?"
"아니요, 다리에 장애가 있으신 것 같아서요"
"어메, 착한 거, 훌륭허네~이"

이렇게 나는
착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ㅋㅋㅋ

2019년 3월 24일 일요일

부끄러운 법

법은 민주주의 사회의 상징이다
더 분명하고 더 세밀하면
발전과 성숙인 양 사회의 어깨는 올라간다

법의 생산자와 운영자는
민주주의 질서의 수호자로 간주된다
사실은 법의 준행자가 진정한 수호자다

때때로 법의 존재가 불쾌하다

인간에게 괜찮은 법이 내장되어 있지 않고
있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인간은 무법한 존재라는 오싹한 현실의
고상한 고발자 같아서다

법조인의 존재도 불쾌하다

사회적인 합의로 법이 세워져도
그 법을 따르려는 의지가 인간에게 없다는,
스스로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해석자와 판결자의 필요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27일 수요일

평화의 비용 (2018년 겨울 교수연수회 설교)

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그는 우리의 화평이며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분단의 담벼락 즉 적개심을 그의 육체 안에서 허무신 분입니다)

평화는 기독교 정신의 끝입니다. 기독교는 온 세계에 평화가 임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를 기뻐하는 자들에게 평화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온 세계의 평화는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평화, 나와 나 자신의 평화, 나와 너의 평화, 나와 자연의 평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평화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평화의 배후에는 생명을 건 희생적 사랑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평화이며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분단의 담벼락 즉 적개심을 허무신 분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3가지의 교훈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화평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평화가 없으며 그리스도 없이는 평화의 지속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임의적인 평화는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살얼음 판과 같습니다. 개인과 공동체에 평화를 원한다면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계십시오.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나 자신과 화목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부모나 배우자나 자녀나 동료들과 연합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자연의 어떠한 계절에도 적응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 달라고 그리스도 예수께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주께서는 반드시 어떠한 종류의 평화도 주실 것입니다.

둘째, 모든 평화의 배후에는 십자가의 희생적인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잔잔해 보여도 물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큰 에너지가 동원되고 있는지가 최근에 미국 화학학회(ACS)에서 한국인 신학자에 의해 밝혀진 바 있습니다. 평화의 잔잔한 상태도 마치 물과 같습니다. 모든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막힌 모든 종류의 담벼락을 허무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즉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막대한 에너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방식은 희생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자로 삼는 강압적인 방식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는 방법은 주님처럼 공동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인 선택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어떠한 공동체든 구성원이 평화를 향유하고 있다면 지금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희생적인 사랑을 아끼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부 사이에 평화가 있습니까? 가정에 평화가 있습니까? 우리 부서에 평화가 있습니까? 전주대에 평화가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 평화가 있습니까? 그 배후에는 자발적인 희생과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그 누군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셋째,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 누군가는 정당한 감정의 분출도 자제하며 지금 인내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과격함을 누르고 부드러운 마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랑하며 떠벌리지 않고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수고와 기여를 칭찬하며 높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교만의 뻣뻣한 고개를 내밀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무례히 행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예를 갖추어서 찢어진 관계를 지금도 한 땀 한 땀 봉합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타인의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정당한 상황 속에서도 터트리면 속이 후련해질 분노조차 격발하지 않고 잘 다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죄악된 본성에 충실하지 않고 우리에게 이질적인 선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그것에 동조하지 않고 의로움을 구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공동체에 평화가 유지되고 모든 구성원이 그 평화를 향유하는 것입니다.

전주대의 교수님들 및 직원 선생님들 모두가 이러한 방식으로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특권이라 여기며 서로 앞다투어 희생의 지갑을 열겠다는 경쟁적인 평화의 분위기가 이 캠퍼스의 상쾌한 봄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원수 된 것, 막힌 담으로 인해 나누어진 모든 전쟁과 분열의 관계를 평화로 바꾸시되 그 비용으로 아들의 생명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막대한 비용이 지불된 이 평화를 전주대의 모든 가족 구성원은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그 평화를 지키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각자가 자발적인 마음으로 희생의 작은 조각을 기꺼이 평화의 비용으로 지불하여 아름다운 평화의 캠퍼스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주를 기뻐하는 이 지역의 모든 분들에게 평화의 공급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