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31일 일요일

의로우신 하나님

"그의 모든 길은 정의니라"(신32:4).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입니다. 정의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도 그 속성을 따라 정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로운 일을 하셨기 때문에 정의로운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분이기에 정의로운 일을 하십니다. 정의 자체이신 하나님은 외부의 어떤 기준에 의해서도 판단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라는 것은 외부의 판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정의로운 속성을 그렇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판단을 받는다면 그것은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 바깥에 있다는 의미이고 그 기준이 하나님 자신보다 우월한 권위나 권세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셔서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보편적인 상식의 기본적인 신관에도 저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의로움의 신적인 속성은 인간적인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경외하고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원인이 없는 불의들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됩니다. 비록 자연적인 재해로 삶의 터전이 훼파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별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로움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그의 의로움을 감히 부정하는 판단을 내려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죄 때문에 존재의 질서가 무너졌고 그 무너짐의 끔찍한 결과가 인간에게 되돌아와 인간의 죄를 계속해서 고발하고 정죄하되 여전히 하나님께 돌이킬 것을 촉구하는 은혜의 과격한 수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재앙의 가까운 원인이 없다고 판단되면 곧장 하나님께 나아가 죄의 원흉인 양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한 무지와 멸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상태나 우리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영원토록 의로우신 분입니다. 

온 세상의 만물과 만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 아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다양한 기준과 관점이 있어서 다양한 판단들을 내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경험이든 실험이든 지식이든 기억이든 합의이든 상식이든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떠한 판단도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판단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유일한 가능성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완전히 아시는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에 의존할 때에만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이유로 모두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고전2:14). 참으로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고전2:15). 만물과 만사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의 바라봄과 귀의 들음과 마음의 사유로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오직 성령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취득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가르침은 무슨 신령한 계시나 환상이나 육성이나 진동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만물과 일어난 만사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 의해 관절과 골수의 물리적 차원만이 아니라 영과 혼의 비가시적 차원까지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것입니다. 

성경의 눈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일들을 보십시오. 불의한 자들과 불의한 일들 속에서도 여전히 별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공의가 보일 것입니다. "그의 모든 길은 정의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길이 공의요 판단이요 심판이요 결정이요 옳음이요 작정이요 질서요 정의"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그 자체가 정의라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시인도 하나님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인데 이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이 영원하며 진리와 정의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시111:7-8). 지혜자도 지혜이신 주님은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닌다"고 했습니다(잠8:20).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 경제적인 불의가 있고 정치적인 악독이 있고 문화적인 타락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정의는 결코 제한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정의를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인정할 때에 의로우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주님이 그가 행하신 정의에 의해 알려지는 분"이라고 말합니다(시9:16). 정의 없이 하나님이 알려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보이지 않고 그런 하나님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준이 월권을 범한 결과일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력을 따라 상황을 해석하면 하나님의 정의는 결코 분별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에 의해서만 분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어떠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치지를 않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분입니다(시33:5, 사61:8, 렘9:24). 당연히 그의 백성에게 "공의와 정의"를 바라고 계십니다(사5:7). 그래서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하수같이 흘리라"고 하십니다(암5:24).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운 속성이 자신의 백성을 통하여 발휘되고 증거되는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내던지는 자"였으며 하나님이 원하셨던 공의와 정의라는 좋은 포도가 아니라 포학과 절규라는 들포도를 맺었다고 아모스와 이사야는 말합니다(암5:7). 이는 마치 오늘날의 세상과 교회를 보는 듯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에 그의 백성도 거룩해야 하듯이,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교회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교회 밖에서는 공의가 질식되고 정의가 조롱을 받더라도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꺼지지 않는 빛으로서 세상을 비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만 보더라도 좋은 포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들포도를 맺고 있습니다. 무슨 낯짝과 자격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에 외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불의한 교회로 인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을 당하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회개하고 자복하며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 개개인과 교회를 주관해 주시라고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2016년 1월 30일 토요일

순종과 인식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2:3). 기독교의 독특한 인식론을 이 구절에서 발견한다. 이름하야, 순종 인식론!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안다는 이야기다. 이는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이고 안다고 할지라도 안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과연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확인한다. 물론 순종은 앎의 조건이 아니라 확인에 가깝고 앎의 진정성 여부를 가늠하는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지식은 언제나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머리의 몽롱한 관념을 하나님 지식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신학자는 온갖 잡설을 입으로 붓으로 쏟아내나 그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은 단 한 조각도 건지지를 못하겠다. 나도 그런 신학자의 모습으로 발견될까 두려운 마음으로 늘 경계해야 되겠다. 순종이 입술의 언어적 향연보다 낫다. 

2016년 1월 29일 금요일

과학과 진리

세상의 모든 "이론은 거듭되는 장례식을 통해 진보한다." 죽으면서 성장하고 성장의 종국은 여전히 죽음이다. 과학에는 최종적인 주장이 없다. 모두 그럴듯한 것들이다. "과학은 논증과 증명으로 여기저기 기운 누더기다." "객관적 진리라는 성배"는 과학과 무관하다. "과학은 정보에 입각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생명이며 영원토록 소멸되지 않는 진리이다. 

사랑과 책망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거짓되고 게으른 그레데 사람들의 목회에 대해 바울이 디도에게 건낸 조언이다. 인간을 아는 지식은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란히 열거했을 정도로 중요하다. 죄악된 본성이 기회만 닿으면 표출되는 인간의 본색을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때때로 지나치게 가혹하고 엄중하게 보여도 인간에 대해 가장 정확한 지식에 기초한 말씀이다. 이해가 안되고 동의가 안되어도 그저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최상이다. 인간의 고약한 죄성이 그 야비한 고개를 내밀 때마다 강하게 책망하고 꾸짖으라. 단, 얕고 가벼운 성질 퍼붇기가 아니라 가장 깊은 가슴에서 끄집어낸 사랑과 경건의 결과여야 한다. 사랑과 책망은 서로 등짝을 맞댄 대립항이 아니라 동행하는 친구다.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한다. 

2016년 1월 27일 수요일

가인과 아벨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이에 가인은 아벨의 생명을 돌로 쳐서 빼앗았다. 아벨의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을 질투와 경쟁의 빙거로 삼은 가인, 얼마든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배우고 진일보한 성숙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는데...

이런 가인의 모습은 우리 사회, 아니 교회 안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상대방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칭찬과 존경을 받으면 경쟁의 섬뜩한 대립각이 아니라 도전과 배움과 성숙의 기회를 제공한 그에게 감사함이 보다 합당하고 지혜롭다.

2016년 1월 2일 토요일

거룩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8:13).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거룩"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전적인 구별성을 가리키는 말로 "완전히 다른 자" 혹은 "전적인 타자"(das ganz Andere)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즉 돼지의 발굽이 뚜렷하게 갈라진 것처럼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명확한 존재론적 구별이 바로 거룩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에는 다른 어떠한 존재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신적인 고유성이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나 교회의 긴 역사에서 확인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피조물과 전적으로 구별된 분으로 여기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연을 신으로, 때로는 벌레나 짐승을 신으로, 때로는 자신을 때로는 어떤 영웅을 신의 고유한 자리에 앉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혼란한 무질서 조장은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고 불경스런 짓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부정하는 짓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고...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고 진단하며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결코 핑계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존재론적 구별을 가리키는 거룩은 "완전한 순결"의 개념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결하고 무흠하신 분입니다. 그에게는 어떠한 흠결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어떠한 결함도 없고 결핍도 없는 완전한 분입니다. 신적인 속성과 뜻과 계획과 행하심이 완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가감할 수 없으며, 뜻도 가감할 수 없으며, 정하신 계획도 가감할 수 없으며, 행하심도 가감할 수 없습니다. 욥기의 기록처럼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고 아무리 선하여도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단 한 조각의 인간적인 의지나 기호도 섞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은 누구도 변경할 수 없으며 반드시 성취될 수밖에 없습니다. 선행은 모든 선들의 출처이신 하나님의 전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어떠한 공로도 인간에게 돌려서는 안됩니다. 비록 인간의 생각과 기호와 소원과 수족이 선행에 결부되어 있지만 그것은 선행에의 은혜로운 초청과 영광스런 동참일 뿐이며 선의 주체성을 인간에게 돌릴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뜻과 도모와 행실이 선행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할수록 선행의 순수성은 거기에 비례해서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라"라고 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하는 것이 피조물의 마땅하고 필연적인 도리이기 때문에 명하여진 것입니다. 이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하는 우리의 태도로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에 무지하고 그렇기 때문에 경외해야 할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거나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경향을 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두려움과 경외의 신이라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잔인한 원수나 독재적인 신으로 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과 공의, 자비와 정직, 평강과 경외심은 하나를 취하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하는 배타적인 대립항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화와 균형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만약 경외심이 없는 사랑과 긍휼 일변도의 태도로만 하나님을 대한다면, 그렇게 이해된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계신 그대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기호에 의해 가공된 하나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우리가 경외해야 할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하고 무서워할 자로 삼아야 한다는 이사야의 교훈에 작금의 교회는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성 때문에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그저 두려워서 떠는 상태에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즉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의 자녀요 백성인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지식은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당위나 필연과도 같습니다. 존재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과 무관하게 이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론적 고유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나아가 "완전한 순결"의 전방위적 요구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뜻과 생각과 계획과 말과 행실에 세상과는 구별된 기준과 규범과 질서와 원리와 동기와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백처럼 우리도 우리의 원대로 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늘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존중하고 그것에 맞추어 늘 조율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도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하고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당위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거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뜻과 생각과 계획과 말과 행위를 하나님께 맞춘다고 하더라도 모든 방면에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몫입니다. 바울의 교훈처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기에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만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거룩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는 우리 편에서의 노력이나 연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뜻과 생각의 거룩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부인되고 하나님의 것이 인정되고 만큼 커집니다. 언어와 행실의 거룩도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이 우리의 것을 대체하는 만큼 커집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우리도 거룩해야 하는 근거는 여기에 있습니다. 실질적인 거룩의 가능성도 주님의 거룩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을 경시하고 거룩에의 참여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오히려 세상과 같아지는 경향성을 보입니다. 비록 기독교의 종교적인 언어와 행습으로 포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슬프게도 세상이 추구하는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지금 교회에는 돈 때문에 분란과 분열이 발생하고 목회자에 의해 음행의 문제가 발생하고 많은 성도들이 경건을 이익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성경을 자의로 해석하고 진리보다 귀에 달콤한 교설을 강단에서 쏟아내는 교회도 적지 않습니다. 마치 거룩의 개념이 실종된 시대인 것 같습니다. 마음의 부정함과 생각의 부정함과 입술의 부정함과 수족의 부정함이 도처에서 신적인 거룩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증인인 교회의 거룩함 회복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라는 사실에 우리 개개인과 온 교회가 경각심을 가질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