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30일 화요일

소통의 부재

페북의 주파수가 닿지 않는 곳을 잠시 방문한다.
소통의 부재가 가져올 진통이 벌써부터 느껴진다.
대신 주님과의 집중적인 소통의 설레임도 만만치가 않다.

2013년 7월 29일 월요일

하나님의 속성이 우선이다

여호와는 모든 방식에 있어서 의로우신 분이시고
모든 행하시는 일에 거룩하신 분이시다 (시145:17)

이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고 비굴한 자들을 일으켜 주시며 때를 따라 모든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셨다는 근거들을 열거한 이후에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에서 전개되는 일들에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읽어내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다.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하신 성품에 경탄하기보다 탄식과 울분이 쏟아지는 경우가 더 많아서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진으로 바뀌고 공법이 불법으로 교체되는 현상이 이제는 낯설지가 않을 정도로 편만하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지으신 분이지만 인간은 간사한 꾀의 주체라는 전도자의 구분으로 납득해야 하겠다.

모든 사태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풀고자 하는 시인의 안목과 접근법이 향기롭다. 아무리 세상이 답답하고 부조리해 보여도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움에 대한 준거점을 놓치지는 말아야 하겠다.

2013년 7월 28일 일요일

중세의 예정론 논쟁

고트샬크(Gottschalk, d.869):

1. 나이가 들면서 수도원 탈퇴권을 요구했다. 수도원의 극심한 반대에 봉착했다. 반대의 주창자는 알퀸의 학교를 이끌던 고트샬크 스승, 수도자 규칙서를 편찬한 라바누스 마우루스(Labanus Maurus)였다.

2. 당시 알퀸과 [카롤링거 전서]의 저자들은 어거스틴 사상에 의존했다. 방식은 어거스틴 구절들을 발췌, 초록, 선집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빈약하다.

3. 고트샬크는 어거스틴 예정론에 가치를 부여하려 했다. 이에 알퀸의 제자들은 말과 폭력으로 대항했다. 먼저 고트샬크 입장을 왜곡했다. 즉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정해 놓았다고 주장하며, 신이 영원한 삶이나 영원한 죽음을 예정해 놓았다는 것이 고트샬크 입장이라 하였다.

4. 알퀸의 제자들: 신은 선하고 옳으며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는다고 주장했다. 신은 선하고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한다는 입장이다.

5. 그러나 고트샬크 입장은 이중 예정론 (gemina praedestinatio) 즉 '인간이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의 결정에 따라 신국에 속하거나 악마의 종자에 속한다'는 후기 어거스틴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6. 그러나 고트샬크 입장은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원한 운명이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예정되어 확정되어 있다면 결국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지 않겠냐는 논리가 작동한다. 확립된 질서는 위험에 빠지고, 카롤링거 왕조의 문화도 방향을 잃게 되리라는 느낌의 확산은 어거스틴 추종자인 고트샬크 쪽을 겨냥하게 되었다.

7. 그리스도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극소수의 선택된 사람을 위해 죽었다는 생각은 칼 대제의 제국에 내재해 있던 선교의 성향과 영통확장 명분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8. 결국 고트샬크는 주교회에서 단죄되고 말았으며 라바누스는 마인츠에 모인 주교들 앞에서 채찍으로 그를 치게 하였다.

9. 이후로 힌크마르(Hinkmar) 교구장의 손에 넘어갔다. 수도원에 갇혀서 생애를 보냈다.

10. 힌크마르는 칼 대제의 왕립학교에 있던 어떤 석학에게 이 논쟁 전체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d.877)였다.

11. 에뤼게나 입장: 1) 하나님의 절대적 단순성에 근거하여 이중 예정론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2) 신은 영원하기 때문에 미리 보거나 결정하지 않으신다; 3) 죄의 예견과 지옥의 예정은 이단적인 주장이다; 4) 일체의 죄와 악은 본질적인 것도 아니며 실존하는 것도 아니요 오직 단순한 결핍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미리 알려질 수도 없다; 5) 신은 선이요 흘러 넘치는 선이며 죄인에 대한 진정한 벌은 그 죄인이 자신에게 내릴 뿐이며 공간적인 것으로 상각되는 지옥에서 이뤄지지 않는 것이요 자신의 후회가 바로 지옥이다; 6) 이중 예정이 없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예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2. 에뤼게나 다른 입장: 1) 유일신의 절대적 순수성, 무시간성, 선성을 강조했다; 2) 악으로서 악은 실존하지 않으며 악은 단지 존재의 결핍일 뿐이라고 했다; 3) 인간은 사물이 아니라 통찰-의지-기억의 생생한 관계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된다; 4) 이 가운데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어떠한 것도 제외될 수 없다, 인간은 결국 자유의지로 생각되어야 하며 자유는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이다; 5) 신은 그 스스로 모순됨이 없이 인간을 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자유를 취할 수는 있다; 6) 인간은 그 자신을 스스로 선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바로 그 가능성이다.

13. 1210년부터 에뤼게나 저작은 소유하는 것도 사형이고 강의하는 것도 사형에 쳐해질 정도로 엄격한 규제가 뒤따랐다.

죄의 대처법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28:13)

잠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자의 참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본문도 그러하다. '죄'라는 말은 인간의 문맥과 관계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의 실존이다. 죄를 숨기는 행위는 죄가 인간의 감시망만 피하면 괜찮다는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럴 의식이 없었어도 점차 그런 방향으로 중독된다. 결국 자신도 속이고 타인도 속이게 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계시는 분을 안계시는 분처럼 대우한다.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 앞에서의 정직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죄의 숨고자 하는 은닉성에 철퇴를 가하는 담력의 소산이며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교살한 죄를 "내가 주께만 범죄"한 것이라고 한 다윗의 고백처럼 죄의 본질과 핵심을 간파한 자가 구사하는 지혜로운 정공법의 표준이다. 비록 사람들 앞에서는 비웃음과 멸시를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긍휼과 자비를 취득하는 첩경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약점과 실수와 오류를 가리는 일에 민감하고 민첩하다. 인류의 조상이 물려준 항구적인 버릇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한 이후 엄습한 수치와 공포에 대한 아담의 대처는 나뭇잎 치마로 수치를 가리고 나무 그늘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물이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자신의 죄를 가릴 수단은 존재할 턱이 없었다. 자신의 기준을 따라 스스로 안심할 뿐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친히 덮으셨다. 죄문제의 해소는 사람의 몫이 아니었다. 죄는 주님의 무궁한 자비와 긍휼로만 소멸될 수 있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그걸 고백하는 다양한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늘 우선이다. 죄에 대한 대처는 고작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관리 수준이다. 내 의식이 무뎌지고 타인의 시선만 따돌리면 그만이라 여겨서다.

지혜자는 죄를 숨기는 자가 형통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진정한 형통은 사람들이 좌우하지 못해서다. 사람의 흥망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 인생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의 교차는 예측을 불허한다. 가까운 원인들이 산더미 수준으로 많을 것이다. 태양도 달도 바위도 정화수도 조상도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장구한 문화와 전통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배려"라고 해명한다.

죄를 자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주권과 긍휼과 자비를 찬양하는 행위이다. 실 한오라기 약점의 희미한 꼬투리만 잡혀도 형통의 목덜미가 잡히는 살벌한 사회에서 죄와 잘못은 할 수만 있다면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기에 급급한 게 현실인 거 안다. 그러나 잠시 가리는 달콤함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보다 엄중한 죄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사단의 떡밥일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렇다고 자신의 은밀한 죄를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니라는 말은 아니다. 죄의 본질과 대처의 핵심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허물의 사함과 죄의 가리움을 받는 복의 지극함 때문에 사람들에 대해서는 만물의 찌끼가 되더라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자유로운 그런 삶의 태도를 의도했을 뿐이다.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떳떳한 삶이 더 행복하다.

2013년 7월 26일 금요일

감사의 기준을 바꾸어라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시136:8)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과 열기의 공급이 일평생 중단되지 않도록, 아니 죽은 이후에도 자자손손 지속될 수 있는 태양을 만드셨고 보존하고 계신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과 인자의 결과라는 시인의 노래이다.

사실 이 시어는 피조물과 일상을 대하는 태도가 과하다는 일반인의 반감유발 가능성이 상당히 높는 대목이다. 태양이 낮과 결부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어서가 아니라 태양이 발산하는 빛 때문에 초래된 자연적인 결과로서 낮이 있다는 물리적 인과율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걸 거슬렀다.

그러나 시인은 가시적인 피조물을 대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즉 보이지 아니하는 신성을 읽었다. 그의 독법에 마음이 이끌린다. 게다가 절망의 홍해를 도하하게 하신 것과 죽음의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것과 대적들의 사악한 손에서 건지신 것 등과 더불어 감사의 목록에 대등하게 삽입했다.

우리는 인간의 지각과 의식에 걸러진 하나님의 확인된 지문에 근거하여 감사의 여부를 결정한다. 당연히 '이익'이란 기준에 미달하면 원망과 불평이 감사를 대체한다. 그러나 성경은 범사에의 항구적인 감사를 가르친다. 이는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이해되지 않더라도 심지어 불이익의 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뜻이겠다.

나의 정신세계 속에 밝힌 감사의 경박한 기준을 교체하고 싶다. 범사에 감사하는 경건의 체질이 다져질 수 있도록 범사에 감사하는 훈련에 돌입해야 하겠다. "오늘이여, 덤벼라. 사랑하는 주님의 인자와 선하심을 읽어내며 감사로 대응해 주마."

2013년 7월 25일 목요일

쫓겨나는 성공

오늘 귀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특별히 어떤 선배 목사님을 통해
평생 가슴에 간직해야 할 헤비급 교훈을 접수했다.
그분은 나에게 "쫓겨나는 성공"의 주인공이 되라셨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죽을 준비, 떠날 준비, 설교 준비라는
삼중적인 준비 중에서 두번째에 해당된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려운 부위를 긁어주고 사람들의 귀에
달콤한 내용 말하기를 거절하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목적으로
순수한 복음의 가감없는 전부를 과감하게 증거하는 문맥에서
"쫓겨나는 성공" 말이다.

이런 류의 성공이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르니
아내와 자식에게 미리 주지시켜 두어야 하겠다.
막상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직책의 안정과 생계의 보장이란 거부하기 힘든 카드에
타협의 부끄러운 손을 필히 뻗을 나 자신의 연약한 성정을 알기에
안정장치 차원에서 가족들의 주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보내는 일과

새벽기도 끝나면 운동복을 갈아입고 인근의 아파트 산책길을 달린다.
지표에 빼곡이 쌓인 산업의 지친 찌끼들이 사뭇 쾌쾌하다.
때때로 장마의 끝자락에 걸맞게 비에 씻긴 쾌청한 새벽과도 대면한다.

조깅은 짧아도 찌뿌둥한 몸과 몽롱한 의식 각성제로 단연 으뜸이다.
샤워도 하고 말씀도 읽고 책도 읽고 글쓰기도 하며 오전을 보낸다.
점심과 저녁에는 지인들과 겸상을 하며 회포도 풀고 소식도 나눈다.

밥상벗이 없을 때에는 떡볶이나 순대나 오뎅집을 찾아 끼니를 해결한다.
아들녀석 좋아하는 빠리 바게트의 찹쌀 도너츠로 떼우기도 했드랬다.
물러터진 미국의 옥수수와 다른 한국의 찰진 옥수수도 단골메뉴 되시겠다.

오늘 아침에는 '삼각김밥,' '정통 크림빵'이 공복을 달랬다. 맛나더라.
그런데 너무나도 평범한 하루요 일상인데 하루종일 뭔가에 설레인다.
은혜 때문이다...주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는 하루는 상상도 못하겠다.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설교의 준비

내 말과 선포는 인간적인 지혜의 부추기는 말로써가 아니다 (고전2:4)

인간적인 꼼수와 신적인 지혜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는 그 경계를 허물고 수시로 넘나든다. 
"인간적인 지혜의 부추기는 말"이 없으면 심지어 설교가 마비된다.
과히 중증이다. 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몇 수만 앞질러도 
연출과 조작이 가능하고 대체로 들키지도 않는다. 
여기에 연출의 근육이 조금만 오르면
상대방의 심리변화 유발은 '누워서 떡먹기' 경지까지 단숨에 오른다. 

그런 능숙함을 가진 설교자가 있다면
청중의 감동과 찬동과 슬픔과 아픔을 다루는 것은 식은 죽 먹기겠다. 
설교에 절묘한 반전 두 토막만 적소에 투입하고
그럴듯한 극단적인 반례 몇 꼭지만 삽입해도 효과 만점이다.

일상에서 이러한 심리술의 노리개나 희생물로 전락하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처세술을 연마하고 상대방의 심사를 간파하기 위해 
독심술에 능란한 고비용 달인들 고용도 마다하지 않는다. 
일시적인 효능의 중독성은 과히 마약 수준이다.

여호와 경외함이 빠진 설교자의 설교 행위는 조잡한 꼼수에 불과하다.
인간적인 지혜의 부추기는 말을 가지고는 말씀의 선포가 헛수고다.
설교 강단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가 필요하다.
나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회의 강단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할 당시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철저한 '자기부인' 상태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적격이기 때문이다.
설교단에 오르기가 두려운 이유이다. '자기부인,' 설교준비 핵심이다.

2013년 7월 23일 화요일

라틴 서로마와 동로마의 대결

샤를마뉴 대제는 알퀸을 통해 수사학, 윤리학, 변증학을 배웠다. 특별히 지혜, 정의, 용기, 중용이란 윤리적 덕목들을 배웠다. 철학자는 이러한 덕들을 실현한 반면 기독인은 흔히 경시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알퀸에게 묻는다. 알퀸과 샤를은 고대 현자들의 덕을 도덕적 규범으로 삼았다. 여기에서 규범적 구조의 이중적인 노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대와 신약성서 규범이 서로 타협되지 않은 채로 구분되어 있다. 구분의 기준에 대한 샤를의 물음에 알퀸은 "신앙"과 "셀례"라고 답하였다. 예) 용기: 악마를 이겨내고 이 세상의 어려움을 견디는 것에서 비롯된다.

철학은 알퀸의 시대에 공동체의 문화적 형식을 정의하고 카롤링거 왕조의 삶에 대한 총체적 재건의 의미를 확인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지식은 경계를 설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카를의 궁정에는 거대하고 공격적인 경계가 있었으니, 그것은 비잔틴에 대한 것이었다. 비잔틴은 로마제국, 정지되어 있는 고대 후기였다. 그것은 늘 선망의 대상이다. 비잔틴은 서유럽에 있어서 오랫동안 변함없는 권력과 문화와 부의 상징으로 통하였다. 저자들은 가벼운 헬라어 몇 자를 적어넣는 것도 매력적인 일이었다. 알퀸은 catagorie라는 말을 사용했고, 안셀름은 monologion, proslogion과 같은 헬라어 제목을 사용했다. 

로마교회 수호자로 자임한 카를은 로마의 교황을 제국의 담당사제 정도로 생각했다. 카를은 군대만이 아니라 논증에 의해서도 승리하고 싶었다. Libri Carolini가 이를 증명한다. 이 전집을 카를은 자신의 이름으로 편찬하길 원하였다. 이 책은 라틴 서유럽과 비잔틴 사이의 갈등사에 대한 유일한 문헌이다. 여기서 카를은 성화 논쟁을 공격한다. 성화숭배 금지령을 내린 동로마 제국과의 차별화를 위해 그는 성화숭배 허용을 역설하며 787년 주교회의 결과를 인준한 교황에게 정정을 요구하는 함의도 드러냈다.

칼 대제에게 회화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억 속에 불러내어 허위를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도록 정신을 자극할 수 있었다. 동시에 사람을 속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는 것을 현실적인 것처럼 눈앞에 나타나게 할 수 있고 불가능한 것을 현실적인 것처럼 호도할 수 있기에 회화는 '사기'이다. 칼

플라시의 중세철학 이야기

중세의 책: 1) 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었다; 2) 수도원과 성당을 포함하여 도서관을 소유한 사람은 법적으로 어떤 특정한 성인이라 여겨졌다; 3) 800년경의 책은 황제의 소유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정신적,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를 교육하던 수도원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황제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옥타비움: 손을 대지 않은 자연에 위용과 질서를 부여하는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있었다. 형식과 통일성과 구심점이 거기에 있었다. 신비한 어둠 속에서도 모든 구별은 흐려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황제는 "위에" 있었고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밑에" 있었다. 위계질서, 통치력, 폭력이나 전쟁이 없이는 성취되지 않을 것이었다. 칼 대제의 손에는 언제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설정(Einsetzung)"은 카롤링거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황금으로 칠한 십자가는 고대의 보석이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성정은 과거에 있었던 것을 현재로 가져오는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와 오토 왕조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통을 공감할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배하는 세계에의 참여를 의도한 것이었다. 아름답고 뛰어난 것들은 모두 천상의 세계 지배자와 그 지배자의 세속적 재현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였겼기에 보석이 십자가 설정의 중심부에 있었던 것이다.

서유럽 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칼 대제는 글을 모르는 왕이었다. 그러나 왕의 진정한 소양에 해당하는 문명의 빈곤을 해소해 줄 조력자 선발에는 탁월한 안목을 가졌었다. 781년 로마 원정길에 영국 요크의 신학자 알퀸(Alcuin, d.804)을 알고 자신의 교육정책 및 교회정책 중심부에 심었다. 알퀸을 왕실학교 교장으로 임명하고 문화정책 책임자로 위촉하고 차세대 지도자를 양성하게 했다. 알퀸은 고대로마 및 교부들의 문헌을 연구했다.

De fide sanctae trinitatis 서문에서 알퀸은 철학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중세에는 철학적 탐구들이 문법서, 의학서, 신학서에 자주 등장했다. 서문에서 알퀸은 황제만이 "백성의 책임자요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는(populo praeesse et prodesse)" 의무를 가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권력(potestas)과 지혜(sapientia)는 황제의 몫이었다. 권력은 교만한 자를 누르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혜는 예속된 자들을 충실히 보살피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황제가 권력과 지혜로 무장되는 것은 신의 일이었다. 황제는 옳은 말을 해야 하고, 지시를 내려야 하고 종교적 삶을 보존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아 본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De fide는 알퀸이 황제에게 이러한 보편적 신앙의 선포(praedicatio catholicae fidei)를 예비하기 위해 기독교 교리를 소책자 형식으로 요약한 책이었다. 여기서 알퀸은 황제보다 더 위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 백성의 제후는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연히 황제보다 더 중요하고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의 지식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알퀸은 황제의 지식을 보완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었다. 알퀸은 황제가 기독교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을 알거나 충분히 연구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황제는 수도자적 봉사의 의무와 보편적 신앙에 대한 완전한 지식(perfecta in catholica fidei scientia)를 가지고 있다. 이를 펴뜨려 인류를 살려내고 성화를 시킨 보편적 신앙은 성스러운 평화와 완전한 사랑의 일치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De fide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루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설명하며 지복이신 하나님의 평화에 대한 전망으로 내용을 끝맺는다. 그런 전망에 합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화 속에서 온전하고 확실한 안전과 영원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plena certaque securitas et sempiterna felicitas). 거기서는 덕이신 하나님이 덕에 대한 보상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 보상이며 그러한 하나님 이상으로 선하고 위대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quo melius et maius nihil possit esse). 하나님 자신을 보상으로 받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온전하게 가질 것이다. 그제서야 모든 재난도 사라지고 죽음도 극복하게 된다. 모든 사람을 위한 유일한 사랑, 모든 사람과의 유일한 일치만이 있을 것이며 주님의 집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철학은 가톨릭 신앙을 설명하고 설정하는 것을 돕는다. 철학은 변증학 혹은 논리학과 동의어다.

알퀸의 헬라어 실력은 변변치 못하였다. 그러나 존중했다. 궁정 학문은 비잔틴 문화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도 그리스의 유산이 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인 서술의 10가지 종류(decem genera humanae locutionis)를 범주로 잡았다. 이는 인간적인 서술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규정이다. 서술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우리의 서술이 가지고 있는 근거요 원인이다. 사람들, 각각은 인격(persona)이고 모두 하나의 동일한 실체(substantia)라고 했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인간이란 단어가 다른 여러 인격들의 실체를 칭한다는 것을 더 이상 당연하게 보지 않게 되었다. 인간의 언어가 범주에 의해 규정되어 있듯이 성경의 서술도 그렇다고 보았다. 변증론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어떻게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는가 하는 규칙을 가르쳐 준다. 아브라함의 실체는 무엇ㅇ니가 물으면, '인간'이라 대답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관계의 규칙'은 하나님이 '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일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알퀸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중세 최초의 전체적인 설명을 실현했다. 왜 이것이나 저것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이 허위이고 진리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변증론 없이는 이러한 확증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알퀸의 범주론은 원시적인 것을 제거했다. 하나님은 선이라고 불린다. 하나님 안에 있는 선은 속성도 아니고 자기본질 혹은 실체에 더불어 있는 '우연(accidens)'이 아니다. 신 안에는 어떠한 우연적인 것도 없다. 이는 신 안에는 어떠한 변천이나 시간도 주어져 있지 않지만 속성에서 나오는 것은 변천하며 시간 속에서 진행하기 때문이다. 신의 불변성과 세계의 가변성은 알퀸이 전통에서 부활시킨 중요한 철학적 모티브다.

고대와 기원전의 철학에서 관계는 우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Aug는 이것을 바꾸었다. 신에 대해서는 '본질'의 범주뿐만 아니라 '관계'의 범주도 언급될 수 있다. 신은 순수하고 침해받지 않는 존재이며 신은 '존재 그 자체'시다. 신 안에서는 관계적인 것이 바로 그의 본질 자체시다. 알퀸은 이러한 개혁적인 Aug 범주론을 중세에 정립했다. 알퀸이 중세에 제공한 것은 전통 그대로다.

알퀸은 "관계"와 "실체"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신 안에는 우연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되었다. 신은 무시간적 비공간적 방식으로 사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와 다르게 말한다면 그런 문장들을 변증론의 규칙에 따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변증론은 그에게 해석의 지침이다. 성경의 어떤 문장은 "상징적 의미"로, 어떤 문장은 "본래적 의미"로, 어떤 문장은 "전이된 의미"로, 어떤 문장은 "관계적 의미"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알퀸의 책은 전쟁 후기의 작품이다. 전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황제와 신하에게 미래를 위한 어떤 교시를 제공해야 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던 인물은 알퀸 뿐이었다. 교황과 주교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칼 대제가 가장 높은 정신적, 종교적, 세속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란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에 전쟁과 유배의 잔인성 뒤에 대두되는 카롤링거 왕조의 권력 및 문화의 구조가 가지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 과제였다. 알퀸은 그 의미를 일치 속에서, 인간적 실체의 평화 속에서, 그리고 불안정한 세계에 어떤 형식을 부여해야 할 신의 지도권이 세상에 드러나는 예증 속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 형식은 인간의 보편성과 기독교적 당위성을 가진 현실적인 조직이어야 했고, 그 당위성은 고대 문화의 또다른 보물처럼 철학을 새로운 역사적 세계에 설정했던 것이다. 

칼 대제가 등용한 Alcuinus의 De fide

Alcuinus, De fide sanctae et individuae trinitatis (PL 101)

9세기 판본은 Gallen, Stiftsbibliothek에서 제공하고 있다.

서문에서 알퀸은 철학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중세에는 철학적 탐구들이 문법서, 의학서, 신학서에 자주 등장했다. 서문에서 알퀸은 황제만이 "백성의 책임자요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는(populo praeesse et prodesse)" 의무를 가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권력(potestas)과 지혜(sapientia)는 황제의 몫이었다. 권력은 교만한 자를 누르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혜는 예속된 자들을 충실히 보살피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황제가 권력과 지혜로 무장되는 것은 신의 일이었다. 황제는 옳은 말을 해야 하고, 지시를 내려야 하고 종교적 삶을 보존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아 본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De fide는 알퀸이 황제에게 이러한 보편적 신앙의 선포(praedicatio catholicae fidei)를 예비하기 위해 기독교 교리를 소책자 형식으로 요약한 책이었다. 여기서 알퀸은 황제보다 더 위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 백성의 제후는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연히 황제보다 더 중요하고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의 지식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알퀸은 황제의 지식을 보완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었다. 알퀸은 황제가 기독교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을 알거나 충분히 연구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황제는 수도자적 봉사의 의무와 보편적 신앙에 대한 완전한 지식(perfecta in catholica fidei scientia)를 가지고 있다. 이를 펴뜨려 인류를 살려내고 성화를 시킨 보편적 신앙은 성스러운 평화와 완전한 사랑의 일치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인생의 가이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시119:105)

앞으로 나아갈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에서 진로의 간단하고 명료한 열쇠가 말씀임을 확인한다. 말씀은 과연 인생의 길이면서 등불이다. 직장이나 진학을 늘 진로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씀"이란 뻔하고 단순한 대답 말고 보다 구체적인 디테일을 갈구한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우리의 궁금증은 늘 그런 진로의 개념을 돌쩌귀로 삼아 맴돈다.

말씀이 인생의 길이라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과 역사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지극히 크면서 디테일한 생의 가이드란 이야기다. 대답은 단순해도 내용은 방대하다. 물론 범사에 주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한 개인의 큰 흐름에서 그때그때 나타나는 범사에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성공과 실패가 수시로 출입한다. 그것에 일일이 반응하면 인생의 격심한 굴곡에 우리의 희비도 덩달아 춤추는 변덕에 휘말린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세상을 알고 전부가 어우려진 인생의 윤곽도 그려진다. 무엇보다 내 안에서 삶의 가치관과 일의 선호도가 달라진다. 설 자리가 보인다. 안보이면 보일 때까지 성경과 씨름하면 된다. 그리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대상도 시야에 들어온다. 들어오지 않으면 들어올 때까지 성경과 씨름하면 된다. 야곱처럼 환도뼈를 걸고 죽도록 말씀과 씨름하는 거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둔다고 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의 해소는 무엇보다 근본적인 가치관과 기호의 수술이 급선무다. 이런 우선순위 문제는 나이의 제약이 없다. 아무리 연세가 있으셔도 늦지 않았고 불혹의 문턱을 넘어가면 바뀌지 않는다고 스스로 체면거실 필요도 없다. 가치관의 엔진을 교체하고 고작 3년만 그런 엔진으로 인생을 움직였다 해도 손해볼 거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참수형을 당한 도둑은 죽음의 문턱에서 가치관의 역전을 경험했다.

하물며 청년들은 더더욱 그러하지 아니한가?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 챙기라는 사회의 유행성 독촉에 떠밀리지 마시라. 성경이 무관심과 게으름의 두툼한 먼지에 뒤덮힌 시간이 길었다 할지라도 지금 펼치시라. 사도들의 각오처럼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며 육의 낡은 가치관을 과감히 소각하고 믿음의 열조들이 줄기차게 고수하고 경주했던 거룩한 생의 대열에 뛰어들라. 젊은이 특유의 알콩달콩 관심사에 코뚜레가 껴 노예처럼 이리저리 끌려가지 마시라는 이야기다.

청년들은 창조자를 깊이 묵상함이 지극히 아름답지 아니한가. 진로에 대한 궁구의 손을 창조자에 대한 지식에까지 뻗지 아니하면 아무리 화려한 자기인생 살았다 할지라도 정작 인생의 조성자요 주인이신 하나님은 빠져버린 껍데기 인생의 허무한 가벼움만 입증할 뿐이겠다. 진로에 대한 청년들의 고민이 생의 자잔한 양태에 집착하면 직업이 신분이고 직위가 계급으로 비화되는 비정상적 문화의 희생물로 전락하는 것은 이미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목격되는 현상이다.

주님의 말씀은 인생이 가야할 길이고 인생을 안내하는 빛이다.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에게 이끄는 인생의 가이드다. 그러니 말씀에 인생을 거는 판단에 주저하지 마시라.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어거스틴 죄론

히포의 주교에 의하면, 우리가 죄에 도달하는 과정은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제안(suggestione), 즐김(delectatione), 찬동(consensione). 이와 대응되는 죄의 삼중적인 양상은 마음 안에서의 죄(in corde), 행위 안에서의 죄(in facto), 습관 속에서의 죄(in consuetudine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마음으로 죄에 찬동할 때의 죄, 그 찬동이 행위를 옷입을 때의 죄, 마음이 그릇된 습관의 힘에 억눌릴 때의 죄로 구분된다.

제안은 기억이나 몸의 오감을 통해 일어난다(sive per memoriam fit sive per corporis sensus). 제안에서 즐거움이 생성된다. 마치 음식 앞에서 식욕이 자극되는 것과 일반이다. 즐거움을 지나 찬동까지 이르면 죄는 완성된다(plenum). 물론 찬동이 행위로 출고되지 않았기에 사람에겐 알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께는 그 찬동이 알려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음의 묵상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여인을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고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죄가 적용된다. 행위로 드러나지 않으면 안심하는 태도의 소유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임에 분명하다. 성도는 사람의 눈에 행위로 발각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아니하고 심장과 폐부까지 벌거벗은 것처럼 온전히 아시는 하나님만 두려워 하는 자이다.

매혹적인 제안을 받고 위험한 즐거움을 느끼고 무지한 찬동의 손을 뻗어 죄를 거머쥐는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난다. 교회는 행위로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여 찬동의 단계까진 얼마든지 접어든다. 이는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경외가 없다는 증거겠다. 찬동의 분량이 누적되면 버티던 절제의 뚝은 터지고 고인 찬동은 행위로 범람한다. 이미 공공연한 행위로 만인에게 들킨 교회들이 적지 아니하다.

더욱 두려운 것은 드러난 것은 앞으로 드러날 것의 빙산일각 수준일 수 있다는 점이다. 통회와 자복의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이성과 계시의 조화

토마스는 사물에 대한 자신의 정의에 사물 자체가 일치할 것이라고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신학의 철학화 문제, 철학의 신학화 문제...토마스의 해법: 철학적인 문제는 철학자 신분으로, 신학적인 문제는 신학자 신분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신앙은 지성의 동의를 포함한다. 신앙적 활동은 합리적인 증거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간섭을 포함한다. 과학적인 지식에 있어서 나의 수긍이나 승인은 충분하고 완전하게 바로 그 대상에 의해서 결정된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시간에 과학의 대상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인 경우는 없다.

"신앙을 가진 사물을 증명하기 위해 성스러운 사람들이 사용한 이성은 증명이 아니다. 이성은 증명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증명하려 했던 것이 실제로 증명이 되었다면 그것은 과학적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토마스가 소개한 신앙과 합리적인 지식 간의 특수한 구분은 그 자신이 어떤 분리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아베로적 대립으로 보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결론을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하기에 합당하다 여겼던 철학 교수들에 대해 토마스는 그들의 입장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대했다. 신학자의 필연적인 추리는 단순한 변증법적 개연성일 뿐이라는 아베로의 견해에 동의했다. 신학자는 어떤 사람을 확신시킬 때에 자기가 증명하려 제시한 것을 믿지 않는 한 결코 확신시킬 수 없다.

토마스는 아베로가 오류를 지니지 않은 아리스토 해설가로 보지 않았으며 아리스토 자신을 무오류한 철학자로 여기지도 않았다. 아리스토가 옳을 경우에만 그를 따랐다.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과 같은 신앙의 조항들을 만약 이성이 참다운 것이라고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 조항들이 그릇된 것이라고 입증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신앙은 실로 철학적 지신의 원리가 아니라 합리적 진리에 대한 안전한 지침이며 철학적 오류에 대하여 잘못을 범할 수 없는 경고이다.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 믿을 수 있는 것을 결코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 신앙과 지식 양자가 동일하게 신성한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이기에 그의 신앙과 지식이 유기적인 통일로 성장하는 그런 사람은 토미즘의 추종자다.

질송은 그런 인물들로 카제탄과 마리뗑을 거론한다.

스코투스: De primo principio에서 하나님의 전능, 무한, 편재, 섭리,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용서는 믿음의 대상이며 합리적인 논증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Theoremata에서 논증 불가능한 명제들 중 신의 단일성, 무에서의 세계 창조, 세계를 창조한 신에 의한 세계의 현재적인 보존 등도 증명 불가능한 목록에 들어간다. 그러나 신학에서 충분히 합리적 필연적 논증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들이다. 믿음을 전제한 증명이다.

오캄: 자연적인 이성의 빛으로는 신에 관하여 신의 존재에 관하여 전적으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성이 신학적인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변증법적 개연성의 범주를 넘어가지 못한다. 오캄의 영향으로 중세는 이성과 계시의 결별로 치달았다.

존 게르송: 게르송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원하였던 것은 실천적인 기독교적 삶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변적인 신학도 무용했고 신비적 합일에 관한 애매하고 불안정한 신비에 스스로를 맡기지도 않았다. 

이성의 우위 (질송)

독서목록: Gazali, Destruction of the Philosophers; Averroes, Destruction of the Destruction, The Agreement of Religion and Philosophy

아베로는 종교적 신앙과 철학적 이성 사이에 일종의 일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질문: 철학의 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신을 찾는다면 초자연적 계시가 있어야만 하는가?
답변: 아베는 아리스토 구분법을 따라 수사학적, 변증법적, 필연적 논의로 구분하고 각각에 대응하는 무리들로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영리한 언변만을 확신하기 쉬운 사람들: 이성보다 상상에 이끌리며 그들의 감정을 동요시킬 줄 아는 능란한 화술가가 그들을 움직인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성에 의해서 확신할 수는 없다. 이것이 종교의 필연성이 충만히 나타나는 지점이다. 종교와 계시는 이성보다 상상력이 강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철학적 진리일 뿐이다.

2) 변증법적 개연성에 개방된 사람들: 계시에 의해 가르쳐진 어떤 것도 검증과 과학적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고자 한다. 왜 자기들이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믿어야 하는지에 관한 충분한 이유를 부여하려 한다.

3) 오직 수학자 및 형이상학 학자의 필연적인 증명만이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들: 만약 신앙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증명되고 만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일 수 없을 터이므로 계시의 진리를 증명하지 않는 그러한 행위는 정확히 말해서 신학 및 신학자의 적절한 기능이라 한다. 동시에 계시를 적어도 합리적인 방법으로 증명 가능하게 나타내는, 그리고 계시를 그 반대보다 더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일부의 변증법적 정당화를 발견하는 것도 신학과 신학자의 적합한 기능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다소 철학적인 의상으로 입히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면 그들은 믿기를 중단할 것이다. 필연적인 합리적 증명을 결여한 것은 어떠한 것도 지식에 대한 갈증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귀족적인 특권을 누리면서 당순한 신앙의 공상과 아울러 신학자의 변증법적 개연성의 배후에 있는 견고한 진리의 핵심을 조심스레 살피고 조사할 것이다. 신앙은 상상적인 인간이 합리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이다. 신학은 단순히 변증법적 방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혹은 형이상학 다음의 차선이다. 하지만 철학 자체는 순수한 이성의 증명에 의해서 확립된 절대적인 진리이다.

항상 철학자의 합리적인 사변은 계시가 침묵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 아베로는 이성과 계시의 대립이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계시와 이성이 동일한 문제를 다룬다면 일치나 모순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철학자는 자신의 우월한 진리에 스스로 만족하고 간직하고 대중에게 설파하지 말고 신학자와 싸우지도 말고 대중의 호기심도 차단하고 단순한 사유의 소유자가 요동하지 않도록 아베로는 적당히 가리란다. 심지어 아베로는 철학서의 공적인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아베로는 자신이 평화롭게 철학할 수 있는 사회적 질서를 원하였고, 인간이란 단순히 사적 윤리의 어떤 추상적인 규약을 배운다고 해서 문명화될 수는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종교가 단순히 철학적 진리에 대한 조야한 접근이라 여기지도 않았다. 종교는 철학에 의해서도 충족될 수 없는 결정적인 사회적 기능을 가졌다고 보았다.

예언자는 신의 존재를 전혀 증명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신의 존재를 알며 그들의 말을 모든 사람들이 믿는다. 그들 자신은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결코 질문하지 않는다.

철학적 진리는 절대적인 진리이며, 코란과 코란의 신학적 해석은 그에게 순수한 철학에 대한 통속적인 접근에 불과하다. 그래서 심한 박해도 받았다.

질송은 아베로의 이러한 어법이 어떻게 신학자를 위로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파리대학 문학부 교수들은 철학의 결론이 진리라고 학생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으며 그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결론은 자연적 이성의 필연적인 추론에서 나온다는 사실만 말하였다.

질송은 "이중적인 진리 이론을 주장한 단 한 사람의 중세 철학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베로적 견해를 담은 219개의 명제 (1277년에 정죄됨): 40) "철학적인 삶보다 더 높은 삶은 없다"; 154) "세상에는 철학자의 지혜 이외에는 아무런 지혜도 없다"; 37) "오로지 자명하거나 아니면 자명한 것에서 연역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믿을 것이 없다"; 175) "기독교 계시는 배움에 대한 장애물이다"; 153) "신학을 앎으로써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52) "신학은 우화를 바탕으로 삼는다."

질송은 아베로와 그의 추종자가 없었다면 중세의 지적인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퀴나스 신학의 진면목은 어떻게 달라졌을 것인지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질송의 중세적 이성과 계시

1. 신앙의 우위

극단적인 입장들이 있었다.
1) 신이 우리에게 말씀했기 때문에 생각은 필요하지 않다.
2) 철학이 신학을 방해한다: 플라톤의 영혼 윤회설; 아리스토 철학의 신적인 섭리의 부인, 영혼의 인격적 불멸을 부인함; 스토아 및 에피쿠로스 학파의 유물론과 쾌락론(atraxia)
3) 사도 바울: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철학의 속임을 경계하라
4) 교부들: Tertullian, On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vii: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교회와 아카데미 사이에는 어떤 일치가 있는가? 우리들의 교훈은 솔로몬의 현관에서 나오는데 솔로몬 자신은 우리들이 마음의 단순함 안에서 주를 찾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스토아, 플라톤, 변증법적 구성으로 훼손된 기독교를 생산하는 모든 시도들은 떠나라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한 이후에 우리는 아무런 흥미로운 토론을 원하지 않으며 복음을 향유한 이후에는 아무런 물음도 원하지 않는다 신앙이 있으므로 우리는 아무런 신념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이상 우리가 당연히 믿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우리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Tatianus, Address to the Greeks, II.65: "신의 명령에 복종하고 불멸하는 아버지의 법칙을 따르면서 우리는 인간의 의견을 바탕으로 삼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 그러나 변증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변증법을 비난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거스틴, 안셀름, 쿠사누스: intellectus는 지성, 분별, 이해력으로서의 오성이 아니라 이성에 해당한다. ratio를 이성이라 하지만 중세의 많은 학자들은 intellectus와 ratio를 이성으로 보거나 아니면 intellectus를 이성으로, 그리고 ratio를 오성으로 보는 있다고 강영계 교수는 이해한다.

어거스틴 신학의 추종자들: 어떤 때와 장소에서 살든지 이 학파의 모든 구성원이 동일한 신앙을 가지기는 했으나 그들 전부가 동일한 방식으로 자기들의 이해를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어거스틴의 철학적 사변: 기독교 계시에 관한 플라톤적 이해.

안셀름의 credo ut intelligam: "오 주여, 숭고함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는 결코 나의 이해력을 숭고함과 비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어느 정도로는 내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이해하기 원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하여 믿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믿기 때문이다."

안셀름의 Cur Deus Homo? 서문에서: "마치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그를 관점 밖에 놓아둔 채로 필연적인 이유에 의하여 인간이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는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다시근 제 2권에서는 마치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다음과 같은 점은 한층 더 명백한 합리적 진리로 밝혀졌다. 즉 인간의 본성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언젠가 모든 인간은 육체와 영혼 양자에 있어서 행복한 불멸을 즐길 것이다. 또한 인간이 목적으로 삼는 계획이 실현될 것이라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신이 인간이 되지 않는 한 그러한 계획은 실현될 수 없으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주장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생기지 않으면 안된다."

베이컨: 수학은 모든 다른 학문보다 우월하다. "우리는 수학에서 오류가 없는 충분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며 또한 전혀 의심되지 않는 모든 점에 관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그러나 수학의 보조가 배제된 다른 학문에는 의심의 여지가 많고 인간 편에서의 의견이 구구하기 때문에 이들 학문들은 발전될 수 없다...왜냐하면 이들 학문에는 본성상 모든 것들을 참다웁게 증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상을 도출하고 계산하는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수학에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성이 있다." Bacon, Opus majus, IV.iv (vol.1:238-242)

Opus majus: 여기서 베이컨은 수와 기하학적 도형에 의하여 은총과 예정론, 신의 통일성과 삼위일체 관계, 죄인의 수에 비하여 필연적으로 낮은 비율의 정의로운 자들의 수 그리고 상이한 비중을 가진 허다한 종교적 가르침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베이컨이 보기에 실험 과학은 수학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는 수학적 증명이 우리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진리를 확신시킬 뿐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험은 루이에게 진리를 보여준다. 신비주의는 계시된 진리에 관한, 실로 온갖 종류의 진리에 관한 실험적 지식이 될 것이다. 정신적임 감각의 사용을 열심히 훈련한 자는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과학에 관해서도 확신할 수 있으며 타인도 확신시킬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보기에, 모든 지식은 단지 보편적인 계시의 특수한 경우에 불과할 뿐이다.

Raimundus Lullus: 그는 동심원에 쓰여진 여러 기호를 함께 결함하여 거의 기계적인 방법으로 인간 지식의 전체적인 틀을 연역해 내려고 하였다. [증명의 책]은 그 결과이다. 자신의 기호 논리를 가지고 계시된 진리를 위한 명백하고 필연적인 논의를 추출해 내는 것은 계시된 진리를 획득하기 위한 그의 고유한 방법이다.


시편의 어법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시106:2)

이런 싯구를 접할 때마다 뇌리에
만볼트급 전율이 관통하고 의식의 마비가 이어진다.
하나님의 광대한 권능에 대한 무뇌아에 가까운 나의 무지와
주께서 받으시기 합당한 찬양의 분량에
턱없이 모자라는 경배 불감증을 고소하는 듯해서다.

시인은 참 대단하다. 늘 이런 걸 지각하고 있나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갈망을 이런 어법으로 쏟아낸다.
시에 수사학의 호출은 당연한 것이지만
단순히 언어의 미학을 겨냥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유한한 언어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표상하는 모색의 산물이다.

이처럼 시편은 무한하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노래하기 원하는
지극히 초라하고 유한한 나의 입술에 최상의 어법을 물려준다.
물론 언어의 빈곤이 극복되지 않으면 그냥 눈물을 머금는다.
촉촉한 무언의 노래가 때로는 더 감미롭기 때문이다.
날마다 다섯편의 시를 읽으면서 난 찬양을 조금씩 배워간다.

사랑이든 권능이든 지혜이든 주님은 정복되지 않으시니
찬양이 마를 수 없어서 좋다.

약하다는 이유로 약자를 약탈하는 자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잠22:22)

사회적 본성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다. 약한 자가 탈취를 당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약해서다. 이게 세상이다. 부당하고 비겁하다. 그런 부당과 비겁의 향연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편만하다. 알아도 괘념치를 않는다. 사실 강한 자들도 발등에 떨어진 생존의 불 끄기가 급급하다. 재물이 쌓이고 권력이 커지면 안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거든. 강해도 여전히 강한 무리들 사이의 거친 정글법칙 때문에 숨이 막히니까 탐욕의 촉수는 보다 만만한 먹잇감을 더듬는다. 당연히 약자가 밥이겠다.

물론 레위기19장 15절이 지적하고 있듯이 재판할 때에 가난을 이유로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는 말아야 하겠다. 부와 가난은 재판의 유효적 변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정은 공의를 세우는 곳이지 자비의 아지트는 아니잖아. 공의로운 법의 기틀을 세우고 부당하지 않게 집행하는 책무를 추궁할 수는 있겠다. 누구든지 범죄하면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충실히 이행되지 않으면 안되니까. 

그러나 가난한 자를 가난하기 때문에, 약한 자를 약하기 때문에 멸시하고 짓밟고 탈취하고 판결까지 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그들을 위해 주님께서 친히 신원의 입술을 여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무리들의 생명을 제거하실 거라신다. 가난한 자들을 조롱하고 학대하는 자는 그들을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한다. 맞다. 역사 속에서 어느 사회에든 가난한 자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약자는 늘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인간의 항구적인 본성은 지칠 줄도 모른다는 반증이다. 고의성은 없었을지 몰라도 약자를 약하다고 멸시했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다. 물론 나는 자신을 약자라고 늘 생각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다는 말씀의 감시를 늘 받아왔다. 가난하고 약하다고 해서 가난한 자를 멸시하여 그를 지으신 창조주 멸시하는 일에 면제되는 것은 아니겠다. 

오늘은 종일토록 약자를 약하다는 이유로 약탈하는 본성 경계령을 발부한다. 

2013년 7월 21일 일요일

질송의 스콜라 철학 이해

중세는 기독교 교리의 체계화와 증명의 시대였다

1) 기독교적 바탕 위에서 세계관과 인생관을 확립
2) 교부들의 기독교 교리를 계승함
3) 그러나 희랍철학 방법과 개념으로 설명하려 함
4) 희랍 철학자들 의도와는 달랐음
5) 그들은 자연과 우주의 합리적인 설명,
   종교와 무관한 과학적인 정신으로 모든 것을 탐구함
6)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의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수용함: 이것이 근본적 차이
7) 철학은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였음
8)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이성은
    신학적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철학체계 구성을 시도하게 됨
9)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교리와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성경 자체를 중시하고 그와 더불어
    인간의 내면적 양심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도 등장함

스콜라 철학의 구분

1) 초기 스콜라 철학

1-1) 보편적 개념이 사물의 참다운 본질이며 이것은 개별적 사물에 앞서 존재한다.
1-2) 신앙과 지식은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 경향이다.
      - 에뤼게나: 플라톤적 실재론 입장에서 신앙과 이성의 일치를 주장함; 사물은 로고스를 통해 신에게서 산출되기 때문에 물질적 존재란 원래가 보편적 개념으로서 먼저 있었으며 가장 참다운 것은 보편적인 개념이다.
      - 안셀름: 신앙이 지식에 의해서 보증될 수 있다; 플라톤적 실재론 입장에서 개별적 존재인 사물은 거짓된 존재이고 보편적 개념인 신의 존재만이 참다운 존재이다; 존재론적 증명의 골자: 신은 가장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실재성이 결핍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 (칸트는 이를 본체론적 증명이라 명명했다); 보편이 사물에 앞선다 (ante rem).
      - 로스켈리누스(Roscelinus): 보편이란 사물이 있는 이후에(post rem) 있다; 보편 개념인 신이란 한낱 명칭에 불과하고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며 보편적 신개념과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 아벨라르: 보편은 사물 안에 있다(in re)

2) 중기 스콜라 철학

2-1) 12-13세기는 법왕권과 군주권의 충돌이 반복되던 시대였다.
2-2) 이노센트 3세에 의해 군주권에 대한 교회의 우위가 확립됨
2-3) 교회는 세속적인 문제까지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2-4) 십자군 원정으로 지리상의 새로운 견문이 열리게 되었다
2-5) 동방에서 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사상계의 전화에 큰 비중을 차지함
2-6) 이상을 현실에서 찾으려 한 아리스토 철학이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함
2-7) 아리스토 철학은 Avicenna와 Averroes에 의해 소개됨
2-8) 그러나 사상적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수도원 운동의 결과로서 발생한 프란시스 종파와 도니미크 종파의 대립이다.
2-9) 프란시스 종파는 어거스틴 가르침을 보존하되 아리스토 철학과의 이론적 종합을 환영하지 않음; 주의적인 경향을 띠었음; 베이컨은 권위에 대한 복종, 습관의 영향 및 통속적인 편견과 무지의 은폐 등을 학문의 적으로 규정하여 직관적 방법을 배격하고 관찰과 경험을 기초로 하여 자연의 탐구에 임할 것을 주장함
2-10) 도미니크 종파: 아리스토 철학의 수용과 기독교화 시도; 주지주의 색채를 강하게 띔

도미니크 종파의 아퀴나스
1) 이성이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긴 해도 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는 없음
2) 자연의 빛으로서 이성은 추론에 의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뿐임

토마스의 5가지 신존재 증명
1) 운동의 원인: 자연의 모든 운동은 그 원인인 부동의 운동자를 가져야 한다
2) 우연적 존재의 원인: 현실의 사물은 우연적인 것으로서 우연적인 존재에 대한 현실적 필연적 존재가 있어야 한다.
3) 모든 존재의 선, 참, 완전성의 원인: 모든 사물에는 참되거나 선하고나 고상함에 있어 계층적인 구조를 가지는데 이러한 구조에 있어서 가장 완전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4) 모든 존재의 목적: 세계의 모든 존재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있다.
5) 궁극적인 작용의 원인: 인과의 계열 맨 위에는 모든 작용의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
이러한 신존재 증명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은 자연의 빛으로서 창조주의 선물.

토마스가 보는 보편과 사물의 관계
1) 개체는 신의 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형상이 진료에 가해져서 창조되는 것
2) 질료도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한 점에서 아리스토 철학과 다름

3) 말기 스콜라 철학

3-1) 둔스 스코투스: 주지적인 토미즘을 반대하고 종교는 주의적인 것이라고 보고 신앙과 지식의 분리를 주장함; 신학과 철학은 다른 원리를 가진다고 함
3-2) 오캄: 보편은 기호나 명칭에 지나지 않고 실재하는 것은 오직 개별적인 존재 뿐이라고 함; 보편적 존재는 깎아 버려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로 불리우게 되었다.

# 오캄의 면도날은 그의 전유물도 아니고 오캄이 창시자인 것도 아니다. 둔스 스코투스: De primo principio, 2.45: Numquam pluralitas est ponenda sine necessitate (아무런 필요도 없이 복수를 설정해서는 안된다). 사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Physics, I.iv.188a17에서 도출된 것으로서, "이론적 설명에서 불필요한 원리나 요소들의 수가 적을수록 그것이 경험적 데이터에 의해 시험하기 쉽다는 점에서 이론을 구성함에 있어 건전한 과학적 절차로 수용되고 있다.

14세기에는 반토미즘 신비주의 경향이 득세함.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정신력을 외부에서 내부로 돌려 신과의 합일을 도모함. Nicholas of Cusanus에게 영향을 끼침.
   - 쿠사누스: 하나님을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로 이해함; 오성에는 구별을 통해 통일성을 파악하나 이성은 구별 안에서 통일성을 직관한다; 무한자인 신은 온갖 사물을 포함하는 가장 큰 것이며, 온갖 사물에 스며들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이기도 하다; 신의 속박에서 인간성을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함.

질송의 어거스틴

어거스틴 시간론

1) 지나간 것의 현재: 기억
2) 현재의 현재: 시각
3) 미래의 현재: 기대

역사는 신의 뜻이 지상에서 실현되는 과정이다.
역사의 의의는 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있다.
세계의 역사는 지상국과 신국의 투쟁 과정이다.
지상국은 파멸되어야 할 국가이고 신국은 영원한 국가이다. 
인간 세계는 지상국, 시간성이 부여되고
신국은 참다운 국가, 영원성이 부여된다.

질송의 중세철학입문, 102

질송의 경구

어떠한 철학적 사변도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과 같은 종류의 진리들을 위한 필연적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어떠한 철학적 결론도 신앙의 조항들에서 연역될 수 없다. 이는 신앙의 조항들이 논증된 합리적 결론들의 가지적인 원리들이 아니라 믿어진 신학적 결론들의 동일하게 믿어진 원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성이 그러한 신앙의 조항들을 증명할 수 없다면 이성은 그것들이 그릇된 것이라고 증명할 수도 없다.

에띠엔느 질송의 Reason and Revelation in the Middle Ages, 83.

Duns Scotus의 De primo principio 어록

2.20: quia materia de se est in potentia contradictionis ad formam; igitur non est ex se actu per formam; ergo ab alio reducente istam potentiam ad actum – illud est efficiens compositum, quia idem est ‘facere compositum’ et ‘materiam esse actu per formam’ (질료 자체는 형상에 대하여 미결정의 가능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료는 그 자체로 형상을 통하여 현실태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가능태를 현실태로 환원하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현실태로 들어간다. 그것은 합성의 유효적 원인인데 이는 그것이 합성체를 만들고 질료는 형상에 의해서 현실태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2.45: Numquam pluralitas est ponenda sine necessitate (아무런 필요도 없이 복수를 설정해서는 안된다)

3.1: Domine Deus noster, quo te primum esse ac novissimum praedicasti, doce servum tuum, te esse primum eficiens et primum eminens finemque ultimum ostendere tatione, quod certissima fide tenet (하나님은 제1의 유효적 원인이며, 제일 탁월하며, 궁극적인 목적이다)


제1원인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신다(잠21:1)

왕은 사회와 국가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의 원인들을 대표한다. 경내에 왕의 뜻과 무관한 사태나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고의 가시적 질서라고 할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로 지혜자는 보다 고등하고 궁극적인 원인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에 부합하고 반응해야 할 자로 부름을 받았다. 물론 하나님은 권세의 근원이기 때문에 가까운 질서와 권위에 순응해야 한다. 그러나 왕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질서와 권위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기에 저항권이 우리에게 허락된다.

왕이 거짓과 불의와 불경과 포악을 행한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왕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이 있다고 하여 침묵하고 순응해야 되겠는가? 아니다.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보복하기 위해 경찰권을 발동하는 방식의 무력적인 저항을 뜻하지는 않는다. 칼빈이 강조한 것처럼 우리의 저항은 말씀에 의한 저항이다. 강단에서 입술로, 세상에서 삶으로 공의의 하나님을 선포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왜곡되고 공의가 무너지는 때가 교회의 가장 교회다운 처신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어떤 이에게든 주신다"는 의미와 하나님이 궁극적인 근원이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와 원인이라 할 왕을 폐하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두려워도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할 자로 알라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는 세상이 아무리 흉용해도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자리를 마지막 순간까지 떠나지 않고 교회다운 교회로 남아 있어야 세상의 빛이다.

원인에 대한 규명이 정확하면 교회의 처신이 결정된다. 하나님은 모든 질서와 권위의 샘이시다. 세우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며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보여주는 교회가 있어야 세상은 캄캄한 흑암 속에서도 소망을 품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하나님의 권위를 두려워 하지도 않고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익집단 중의 하나로서 자신의 배를 신으로 삼아 배불리는 얍삽한 처신에 민첩함을 보인다. 그러나 내가 잘못본 것이리라. 그래도 교회인데 그럴리가 없다.

여호와 송축의 이유

시편 103장 10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않으시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은 것처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의 인자가 크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멀쩡하게 살아 숨쉬며 기동하는 것은
하늘과 땅에서 그 비유를 찾을 수 없는
신적인 사랑의 지극히 크심 때문이란 사실이 확인되는 구절이다.
타인을 정죄할 수 없고 폄하할 수 없는 겸손의 근거기도 하다.

나아가 시인의 결론은 여호와 송축이다.
여호와를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과
여호와의 말씀을 수행하며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통치 아래 거하는 모든 자들의 여호와 송축이다.

흥에 겨워서 노래를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도한 죄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에 기초한 경배와 찬양이
시인이 기술하는 여호와 송축이다.
찬양은 하나님과 인간을 아는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겠다.

소멸과 영존의 분별

천지는 없어질 것이지만 주는 영존하실 것이라 (시102:26)

같은 맥락에서 천지는 옷 같이 낡아져 의복처럼 바꾸시면 바뀔 것이지만 주는 한결같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다. 이러한 이유로 주의 종들은 안전히 거하고 견고히 설 것이라고 시인은 읊조린다.

때때로 우리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하는 두려움과 공포의 엄습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영존하실 주님, 동일하신 주님, 무궁하신 주님의 연대를 거처와 토대로 삼지 아니하고 낡아져 언제든지 바뀌어질 수 있는 천지를 안식의 발판으로 삼아서다.

현실의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교회의 상대적인 침묵과 무관심에 면죄부를 발부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진리의 빛이 발광하고 사랑의 열기가 전도되는 계기와 무대는 세상이고 현실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현실에의 가장 바람직한 참여는 영존하실 주님 안에 안전하게 거하고 견고히 서 있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세상으로 타협의 발걸음을 옮기는 분들은 겸손과 헌신의 진정한 성육신을 실천하는 분들이 아니다.

'뚱딴지' 어법으로 들려질 수 있겠다. 그러나 신구약을 종합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적인 사회참여 정석이며 동시에 이는 주님을 가까이 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 주님께 가장 밀착된 사람이 세상에의 가장 올바르고 적극적인 참여를 구현하는 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듯이 우리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안전한 처소와 견고한 토대는 없어지고 낡아진 천지가 아니라 영존하실 주님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2013년 7월 20일 토요일

중세신학 공부한다

중세신학, 살필수록 재미있다...

1) 신학의 학문성과 영성을 동시에 붙들었던 인물들이 많았다.
2) 중세는 톡톡튀는 아이디어 범람의 시대였다.
3) 어거스틴 재탕, 편집, 재해석의 역사였다.
4) 한 인물 안에 이단성과 정통성이 공존했다.

교황주의 시대의 캄캄함이 중세를 덮더라도 진리의 숨통을 끊지는 못한 듯합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진리의 빛줄기는 더욱 절박하고 선명해 진다는 사실의 증거들이 중세에 여기저기 보입니다. 그것을 찾고 배우는 몸부림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비판이란!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마7:1)

본문은 전혀 비판하지 말라는 절대적인 비판 금지령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에 대한 성찰과 돌이킴의 선행성을 요구한다.

보편적 상식의 위반이나 신학적 오류는 분별해서 드러내고 수정해야 한다
물론 무비판적 묵인이나 무자비한 비판을 피하면서 
냉정한 분별과 자비로운 비판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어쩌면 신의 경지겠다. 

하지만 나는 허물에 대해 친구의 충성된 면책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는
지혜자의 조언대로 그런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맘 절박하다.

나도 모르게 이미 진행되는 본능에 가까운 비판적 사유가
알량한 인간의 결심으로 제어될리 만무한 줄 안다. 그래도 가야 할 길이니까
숨이 멈출 때까지 비판에 분별과 자비를 더하는 작업은 중단하지 않으련다.

2013년 7월 19일 금요일

사람의 슬기와 영광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다 (잠19:11)

모두가 인정하는 분노의 상황에서 우리가 노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이해의 필름이 끊어지고 뭔가 다름을 발견한다.
이렇게 타인에게 짙은 인상을 남기는 소득의 짭짤함은 약과겠다.
무엇보다 노하기 더디함의 달인이신 주님을 아는 지식이
다른 무엇보다 더 고상하기 때문이다. 행위의 기준이 다른다.

분노의 배후에는
자기가 중심이고 심판자란 생각이 도도한 전제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는 주님의 높은 판단력과 고유한 심판권도 묵살하는 종류의 전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라면
그것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도 된다는 뜻이겠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도 우리는 판단과 심판의 주체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이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주님의 주권을 드높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지 않고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에겐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를 값없이 나누어야 할 책임이 뒤따른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영광스런 직분에 충실한 일이다.

나의 신뢰

지혜자는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견고한 성벽으로 여긴단다 (잠18:11)
재물만이 아니라 지식이나 가문이나 자격증도 그러하다
무언가를 가졌다는 것이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잠식한다
약할 때 강한 이유는 나의 모든 신뢰가
다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주님께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견고한 성벽의 부재를 지향할 필요까진 없겠으나
철옹성을 방불하는 수단들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여호와를 나의 요새시요 피할 바위시며
나의 방패시요 구원의 뿔이시요 산성으로 붙드는
여호와 신뢰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어야 하겠다.

2013년 7월 18일 목요일

만남의 설레임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주님도 그 가운데 거하신다.
이는 주 안에서 형제자매 만남이 설레이는 이유이다.
형제가 서로 동거함이 지극히 아름다운 것도
주님께서 그들 중에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다.
모이기를 힘쓰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가 않아 보인다.
서로가 서로를 깨끗하게 함도 주님의 동거하심 때문이다.

자의적 해석

말씀이신 주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서도 성경이 읽혀지는 것을
나는 '자의적 해석'이라 한다.

인문학적 객관성 확보에 심혈을 기울여도
이런 종류의 자의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하나님 사랑과 말씀의 깊이는 동행하고 비례한다.
성경의 저자를 사랑하는 만큼 저자의 의도가 읽어지기 때문이다.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라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는 그가 우리를 조성하신 창조자요,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이요,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요, 생명의 주관자요, 삶의 인도자요, 우리의 지혜와 거룩과 의로움이 되시며, 우리의 기쁨과 영광과 자랑과 전부이신 분이라는 것이다.

다양하고 안타깝고 불가피한 사정들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근심과 두려움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주님을 범사에 인정하지 않아서다. 이는 나 자신을 돌아보면 확인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범사에 모든 것을 신뢰하고 부르짖고 의지하고 의탁할 수 있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은혜이고 그런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증명의 상황들이 때때로 주어지는 것도 은혜이다.

2013년 7월 12일 금요일

십자군 실패에 대한 버나드의 변명

제2차 십자군 실패에 대한 버나드의 '변명'이 흥미롭다. "모든 사람들이 알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는 운을 띄우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하나님의 심히 뼈아픈 심판(judicium Domini)이다.

2.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낼 때 보다 좋은 땅(meliorem terram)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끌고 나왔으나 약속했던 땅으로 그들을 이끌지는 못하였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 자신은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것들을 준행했고 주님도 표적으로 모세와의 동행을 보이셨다.

4.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와 그의 종 모세를 줄기차고 완고하게 거절했던 뻗뻗한 목의 소유자(durae cervicis)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으로 시작된 감격스런 일이지만 더 좋은 약속의 땅 진입은 그들의 반역으로 실패했다. 논지는, 십자군 원정을 독려하는 자신의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 것이지만, 원정의 실패는 지도자와 군인들의 타락 때문이란 말이겠다. 중세의 가장 경건한 교부도 인간적인 냄새, 적잖게 풍긴다.

그러나 십자군 실패를 그렇게 진단한 이유는 자신의 십자군 독려를 사과하지 않겠다는 책임 면피용 목적이 아니라 1) 교회의 위로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기 때문이고 2) 작금의 상황을 사악하게 말하는 무리들의 아구를 봉쇄하기 위함이라 한다. 버나드는 제3차 십자군 독려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의 패배와 실망에 포박되지 아니하고 세번째 전쟁에 순종하여 승리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다시 들추는 간접적인 응원까지 접지는 않았다. 

버나드의 정의론

버나드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정의의 완성"(perfectio justitiae)을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는 것"에서 찾았다.

나아가 버나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마음의 목적일 경우에는 정의가 없다고 단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정의"라는 예기겠다.

여기에서 "정의"는
재물이나 행위의 수학적 평등이란
외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타인을 대하는 배려와 섬김이란
내적인 마음의 목적과 태도에 기초한다.

온전한 정의의 개념을
이런 말씀으로 규정한 경우를 보지 못하였다.
쏟아지는 정의의 실감이 산사태를 방불한다.

그러나 지나가듯 내뱉은 정의의 이러한 규정은
산더미 분량의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도식으로
하나님의 정의나 인간의 정의를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일이겠다.

강퍅한 마음에 대한 버나드의 이해

돌맹이 같이 단단한 바로의 마음을 언급하며
버나드는 '강퍅한 마음(cor durum)'이 어떤 것인지를 묻고 설명한다.

"강퍅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통회에 의해서 찢겨지지 않으며,
애정에 의해서도 부드럽게 되지 않으며,
탄원에 의해서도 움직이지 않으며,
위협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징벌의 채찍에 의해 더욱 굳어지는 마음이다.

또한 그 마음은 은택에 감사할 줄 모르며,
논의에 있어서 신실하지 않고,
판단에 있어서 잔인하며,
치욕에 있어서도 수치를 모르며,
위험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으며,
인간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짐승적인 본성을 발휘하며,
신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안면을 몰수한다.

이 끔찍한 질병의 해악을 간단히 요약하면,
'강퍅한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이다."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는
에스겔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으면
이러한 돌덩이 수준의 강퍅한 마음은 치유되지 않는다고
버나드는 진단한다.

Bernard, De consideratione, ii.

Quid ergo cor durum? Ipsum est quod nec compunctione scinditur, nec pietate mollitur, nec movetur precibus: minis non cedit, flagellis duratur. Ingratum ad beneficia est, ad consilia infidum, ad judicia saevum [al. surdum], inverecundum ad turpia, impavidum ad pericula, inhumanum ad humana, temerarium in [al. ad] divina, praeteritorum obliviscens, praesentia negligens, futura non providens... Et ut brevi cuncta horribilis mali mala complectar, ipsum est quod nec Deum timet, nec hominem reveretur.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지식지도

연관된 주제들을 지도처럼 보여주는 지식의 지도화를 시도한 사이트다. 칼빈을 검색하면 그를 둘러싼 각종 이슈들이 칼빈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지식이 준비된 이슈에 커서를 올리면 내용이 나타난다. 기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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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의 사랑론

버나드의 사랑론이 흥미롭다. 그는 사랑을 네 단계로 구분한다.

1. 첫번째 사랑: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 때문에 사랑한다(ante omnia homo diligit se ipsum propter se ipsum). 육신은 자신을 넘어선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만을 사랑하는 단계이다.

2. 두번째 사랑: 인간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Diligit Deum, sed propter se, non propter ipsum). 독존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생존의 필요와 복지 때문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3. 세번째 사랑: 인간은 더 이상 자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diligat Deum, non jam propter se, sed propter ipsum). 하나님을 경배하고 올바르게 추구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고 계명을 지키면서 비로소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이다.

4. 네번째 사랑: 인간은 오직 하나님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se diligat homo tantum propter Deum). 육신의 어떤 욕망도 주님의 기쁨에의 동참을 저지하지 못하며, 어떠한 곤란도 주님의 평강을 파괴하지 못하는 단계요, 영혼을 사로잡아 육신적인 고통에도 웃음짓게 만들고 생명조차 즐거이 양도하게 만드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단계이다.

버나드는 네번째 단계가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고 오진 하나님의 능으로만 실현 가능한 단계라고 한다. 나아가 이러한 완벽한 사랑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지의 가능성도 알지 못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고 하나님 집의 풍요로 만족하게 되는 때에 도달할 단계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확언한다.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버나드의 라틴어 전집 사이트다

버나드의 신학에 빠져든다. 일상과 신비, 이성과 신앙, 지식과 실천, 학문과 신학의 균형과 조화를 골고루 갖춘 인물이다. 루터와 칼빈이 버나드를 중세의 가장 경건한 자요 유일하게 교부라 불리울 자격이 있다고 평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의 전집이 웹 사이트로 꾸며졌다. 오늘의 중세자료 수집은 이것으로 만족한다.

Bernard of Clairvaux (d.1153)

사랑하는 녀석들

미시건 호숫가의 모래는 과히 명품이다. 그러나 그 명품이 떠받치는 아이들이 나에게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명품이다. 푸하하핫, 팔불출!!!

버나드의 간략한 지혜론

버나드는 전도서를 "마음과 몸의 유독성 습성들을 자기절제 괭이로 근절하는(sarculo disciplinae prava quaeque in moribus, et carnis superflua resecans)" 책이라고 보았고, 잠언은 "세상이 영광스런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에서 발하는 요염한 색조를 거듭난 이성의 활용으로 신속히 지각하게(luce rationis in omni gloria mundi 0786A fucum vanitatis sagaciter deprehendens)" 만드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들의 결론적인 멘트로서 버나드는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떠한 참되고 완전한 지혜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여호와 경외이고 지혜의 절정은 계명의 준행이라 규정한 후 이렇게 적는다: "누구도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이는 악에서의 성공적인 도피는 불가능한 일이며, 계명의 준행 없이는 어떠한 행위도 선하지 아니하다" (itemque recedere a malo neminem posse perfecte absque timore Dei, nec bonum opus omnino esse praeter observantiam mandatorum).

Bernard, 1266-1267 Sermo I. De ipso titulo libri «Cantica canticorum Salomonis», in PL 183: 785-786.

개혁주의 신학의 본질(Essentia reformati theologiae)

1. Sola et tota scriptura : 가장 성경적인 신학

    # Sola: 갈1:8,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 Tota: 신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a. 성경에 기록된 것은 한 이오타도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하며(tota), 동시에 성경의 기록은 인간의 욕망과 호기심을 따라 함부로 범하지 말아야 하는 침묵의 경계선이 된다(sola). 
   b.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것에 대한 입장 → 개혁주의: 성경이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 루터주의: 성경이 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도 괜찮다.
   c.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d. 루터의 tota scriptura : 전 성경은 아버지보다 아들을 더 강조한다. 그리스도 중심적
       칼빈의 tota scriptura : 전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한다. 삼위일체 중심적
   e.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중심과 부분과 전체시다.
   f.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이다 (벧후1:19, 우리에게 더 확실한(βεβαιότερον) 예언이 있어)

2. Catholicus et orthodoxus : 기독교의 가장 좋은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는 신학

   a. 이신칭의(Sola fide justificatio)는 루터의 발명이 아니다. 로마서 3장 28절의 헬라어 원문에 Sola라는 말이 없지만, 문맥의 요구와 신학의 전통 때문에 allein (durch den Glauben)을 첨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Sola fide는 교부들과 신실한 중세 학자들이 사용한 용어이다(Origenus, Basilius, Hilarius, Chrysostomus, Bernardus, Thomas).
   b. 신학을 행하는 어거스틴 정신: 거룩한 신구약 성경을 따라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었던 모든 전통적인 선진들(omnes catholici tractatores)의 보편적인 입장을 정리한 이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또한 나의 믿음이다(Haec et mea fides est, quando haec est catholica fides).” 어거스틴 신학은 바른 전통을 가장 잘 집대성한 신학이다.
   c. 예정론(praedestinatio)은 칼빈이나 베자의 고안물이 아니다. 성경과 신실한 증인들이 결코 침묵하지 않았던 보편적 진리였고 16세기와 17세기의 시대적 과제를 극복하는 특별한 저항의 검이었다. 칼빈은 개인의 신학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고 교회의 신학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d. 기독론과 예정론은 종교 개혁자들 신학과 후기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구별하는 중심 교리가 아니다. 16세기와 17세기에 모두 교의학 안에서 발견되고 강조되던 중요한 교리였다. 

3. Summum bonum : 하나님 자신만을 높이며 하나님이 전부인 신학

   a. 성경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인간에게 적응하여 알리신 계시이며 선물이다.
   b.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증거되는 가장 영광스런 극장(splendidissimum theatrum)이다.
   c. 모든 성경과 만물은 동일한 실체(res)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싸인(signa)이다.
   d.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궁극적인 목적(finis)이며 상급(merces)이다.
   e. 다른 모든 복과 은총은 부수적인 것들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상대화 되어야 한다.
   f. 로마서 11장 36절(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은 성경과 만물 전체를 포괄하는 진리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은 세상의 올바르고 참된 모든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 신학이다.
   g. 이러한 하나님의 이해 때문에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론이 아니라 신론에 바탕을 두고 신론적인 방법론을 따라 전개하는 신학이다. → 코케이우스와 그 후계자들 신학의 문제: 인간론적 신학 방법론
   h. Theologia reformata est theoloria gloriae, a principiis ad principium: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4. 사랑과 진리의 조화(Harmonia veritatis et amoris)를 도모하는 신학

   a. 진리와 사랑, 정의와 평화, 이론과 실천, 지식과 지혜가 입맞추는 신학이다.
   b. 진리에 있어서는 가장 엄밀하며, 사랑에 있어서는 가장 관대한 신학이다.
   c. 하나님의 깊은 것도 통달하되, 죽음의 돌을 던지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신학이다.
   b. 진리에 목마른 목회자, 사랑에 굶주린 신학자,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성도들, 진리의 성령께서 사랑의 운동력을 발휘하는 교회를 세우는 신학이다.
   e. 십자가의 사랑으로 십자가의 도를 온 천하에 증거하는 신학이다.
   f. 개혁주의 신학는 석의적(exegetical), 교의적(doctrinal), 변증적(apologetic), 실천적(practical) 부분의 결합체다.

5. Five Sola로 이루어진 신학

   a. Sola Scriptura (원리) : 벧후1:19-21,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다
   b. Solus Christus (질료) : 갈2:16,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다. 즉 주님만이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c. Sola Gratia (방법) : 롬3:24,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과 성화가 가능하다.
   d. Sola Fide (도구) : 롬3:28,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e. Soli Deo Gloria (목적) : 롬11:36,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6. 신구약의 통일성: 실체의 통일성

   a. 주체의 통일성: 하나요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b. 언약의 통일성: 하나요 동일한 은혜의 언약
   c. 교리의 통일성: 하나요 동일한 구원의 교리

7. TULIP*

   a. 전적 부패 Total depravity,
   b.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c.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d. 저항할 수 없는 은혜 Irresistible grace
   e.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 멀러 교수님의 생각에 TULIP은 19세기 영미신학 발명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을 잘 보여주는 내용인 것은 분명하다.

2013년 7월 9일 화요일

Henry of Ghent 저술들의 비평본 PDF

토마스와 둔스 스코투스 사이에 어거스틴 전통의 수맥을 이어간 겐트의 헨리(Henry of Ghent, d.1293) 저작들의 비평본이 PDF 파일로 만들어져 배포되고 있다. 카톨릭 계통의 루방대학 고등철학 연구소와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고든 윌슨 교수가 관여했다. 난 16세기 판본을 가지고 있는데 폰트의 난독성 문제를 제거한 것만으로도 감사가 솟구친다. 쌩유~~~!!

Henry of Ghent Series

Henricus, Quodlibeta (Vaenundantur ab Iodoco Badio Ascensio, 1518)
Henricus, Summae quaestionum ordinariarum theologi (1520)
Henricus, Summae quaestionum ordinariarum theologi, tomus primus (1520) in Google

2013년 7월 7일 일요일

칼빈의 신학 근원들

지난 2011년 10월 30일(주일)에 열린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전달된 Richard Muller 교수님의 열린교회 특강 전문이다.

1 칼빈의 초기 저작들: 1532-1538

근원들 혹은 출발점을 규명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면서 다소 난해한 일이기도 하다. 칼빈의 신학적 발전에 있어서 근원에 대한 문제는 그의 일반학문, 언어들 및 철학에 대한 교육 그리고 법학에 대한 심화된 연구라는 문헌으로 입증되는 근원들을 고려하고, ‘예기치 못한개혁주의 진영으로 전환하여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수다한 주석들과 설교들과 논문들 및 기독교 강요까지 서술하게 된 사실을 고려할 때에 대단히 흥미로운 분야라 하겠다. 칼빈의 신학 근원들은 특별한 관심을 유발한다.

칼빈이 회심한 시점에 대해서는,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칼빈 자신이 교황적 미신들(papal superstitions)’로 여겼던 것을 버리고 경건하고 배우고자 하는마음의 상태로 돌이키게 된 시점에 대하여는 지속적인 논쟁이 있었으며 다양한 해석들이 등장했다. 칼빈 자신의 설명과 베자(Beza) 및 콜라돈(Colladon)이 저술한 초기 전기들의 면밀한 숙독에 기초할 때 칼빈의 회심은 그가 빠리에서 학부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로 법률공부 끝마치기 전까지, 1529년과 1530년 사이 부르쥬(Bourges)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분명히 선호된다. 이러한 회심시기 추정은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 주석을 포함한 칼빈의 모든 초기 저작들이 회심 이후에 저술된 것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산출하며 카톨릭을 떠난 그의 초기 신학의 재구성이 그의 모든 초기 저작들의 근본적인 테제, 즉 교황적인 미신에서 경건으로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태도로의 전환을 확립해 주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저작들을 중요한 소스로 간주하게 한다.

칼빈의 세네카 주석

칼빈은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532 2월에는 공인된 변호사가 되었다. 세네카 주석이 출판된 것은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4월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주석은 그의 회심 이후에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이며, 그것이 다루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가 그의 인문주의 훈련과 법학의 한 측면인 관용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에 회심 직후에 대한 그의 나중 설명에서 비록 다른 학문들에 대한 열정은 식었지만’ ‘그것들을 한꺼번에 내던진 것은 아니라는 그의 생각도 그 주석은 증거하고 있다. 그 주석의 주제인 관용, 특별히 백성들을 용서하고 아끼는 지혜로운 통치자의 성향인 관용은 한 인문주의 법조인의 직업세계 속으로 포섭될 수 있으며, 또한 주석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함의들과 교회의 개혁에 가담한 프랑스 인문주의 학자들의 기소와 핍박이 고조되는 분위기를 고려해 보건대, 그 관용은 새롭게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한 젊은 프랑스 인문주의 학자의 개시적인 화두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주제와 논조 면에서 세네카 주석 자체는 법학을 마감하는 칼빈 자신의 전환기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칼빈 당시의 전기 작가들의 설명에 따른다면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브르쥬와 그 근처에 있는 리니에르 안에 있는 종교개혁 추종하는 무리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전환점도 예시하고 있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란 세네카의 신분과 텍스트에 대한 인문주의 주석의 특징에서 충분히 기대되는 것으로서, 칼빈의 글은 미신들과 설화들을 포함한 그리스-로마의 고전적인 문헌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최소한 칼빈이 사례들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세네카의 글을 분석하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고전 철학을 중요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칼빈은 자신이 세네카의 글 안에서 발견한 진리와 지혜를 수용하고 있다. 어떤 개념이 이방인적 근원을 가졌다고 해서 거부하는 일은 없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스토아적 이해와 기독교적 이해가 나란히 대비되는 경우들도 이따금씩 있었다. 고대 철학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칼빈이 초기에 하나님과 우주 및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진리들이 자연적 질서에 내장되어 있는 계시와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새겨져 있는 신의식 안에 있다고 한 이해와 일치한다.

게다가 우리가 칼빈의 회심 시기를 아마도 부르쥬에서 그가 세네카 주석을 저술하고 있었을 1529년과 1530년 사이로 잡는다면, 그 주석 안에는 회심에 대한 칼빈 자신의 진술들을 보여주는 일부 본문들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특별히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자신을 대신관 통할하는 최고의 신관(pontifex maximus)으로 승급시킨 일에 대한 세네카의 설명을 주석하며, 칼빈은 세네카 안에서는 명확하게 발견되지 않는 논점, 즉 로마교회 주교들과 자기 시대의 종교개혁 옹호자들 사이에 문제시된 논점을 발전시킨다.

대주교는 주교단에 의해 선출되곤 하였다. 그러나 도미티우스(Domitius) 집정정치 하에서는 선거권이 백성에게 양도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사장의 직분은 최고 수준의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주교들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들이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졌다는 미신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중독시킨 탓이다. 대주교는 주교들 중에서도 더 주목을 받고 두드러진 자였었다.

종교는 신들에게 영광을 돌리지만 미신은 그들에게 잘못을 행한다는 세네카의 언급을 설명하며, 칼빈은 퀸틸리안(Quintilian) 및 키케로(Cicero)의 유력한 논증을 덧붙이며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다.

미신은 동정이 관용에 대하여 가지는 것과 동일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잔인함이 관용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을 불경함이 종교에 대하여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과 일반이다. 미신이 명예를 해치는 것처럼 동정도 그러하다. 퀴틸리안은 이렇게 말한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과 성실한 사람이 다른 것처럼 미신도 종교와 다르다.’ 키케로도 말한다.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도 미신과 종교를 구분했다.’

칼빈의 회심은 그로 하여금 곧장 미신과 종교를 분리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어 성경 서문 (1534/35)

성경 전체에 대하여 라틴어로 쓰여진 서문과 불어로 신약의 서문처럼 쓰여진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칼빈이 가장 이른 시기에 출판한 신학적 글들이다. 1) 교황적인 미신에서 참된 경건으로 돌이킨 것과 2) 빠리에서 도망쳐 대학에서 전달된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의 종교개혁 강연을 들으러 간 경험과 3) 1534년 미사에 반대하는 벽보를 붙였다고 핍박을 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등에 너무도 분명하게 고무된 칼빈은 확고한 종교개혁 지지를 표명한다. 첫번째 서문은 칼빈이 고대 이방인의 풍요제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로마 교황(지금은 로마교회 교황)’과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신비를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되 동시에 일반 백성들을 실제로 성장시킬 수 있는 문헌들의 출판은 금하려는 수작들을 비난하고 있다. 두번째 서문에서 칼빈은 그리스도 언약을 더럽히고 은닉하고 부패시킨 자들을 논박했고 그들을 소경이 소경 인도하는 자들로 규정했고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따라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추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필요성도 역설했다.

1536년판  『기독교 강요』

칼빈 자신이 기술하고 있듯이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대체로 교리문답 안에 포함되어 있는 믿음의 조항들, 율법,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 기독인의 자유, 교회의 권세 및 국가통치 조항에 대하여 가벼운혹은 심지어 피상적인방식으로 제시한 간결한 편람이다. 이 책은 간결하나 심지어 그런 형태 속에서도 저자의 신중한 약속과 당시 종교 개혁자들이 강조했던 기본적인 믿음의 조항들을 잘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종교개혁 운동의 경과를 도표처럼 명료하게 보여줄 정도는 아니지만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초기에 제네바의 교회개혁 가동시킨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의 확신, 즉 젊은 칼빈이 제네바의 교회개혁 운동을 위해 발굴해야 하고 협력해야 할 가치가 있는 동료요 교리 편찬자요 조직가란 그의 확신을 종결시킬 정도로 충분한 것이었다.

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몇 가지 특별한 점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겠다. 첫째, 칼빈은 책의 서문을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에게 드리는 헌사로 대신한다. 그 헌사에서 칼빈은 재세례파 비방을 반박하고 프랑스 종교 개혁자들의 교회를 위하는 성향과 평화적인 의도를 설파했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의 일치성을 근거로 종교개혁 운동의 정통성과 적법성을 논증했다.

둘째, 1536년판 『기독교 강요』가 길이에 있어서는 루터의 대요리 문답에 가깝지만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유력한 모델은 루터의 소요리 문답이다. 특별히 기독인의 자유, 교회의 권세, 국가통치 주제들은 루터가 소요리 문답에 부록으로 첨가하고 대요리 문답에선 사라진 가정의 의무들에 대한 도표(tabula oeconomica)’를 반영하고 있다. 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교리문답 구조는 루터의 소요리 문답의 구조와 유사하며, 율법과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교리들은 쯔빙글리 교리보다 루터 가르침의 흔적을 보여준다. 성례론에 대한 칼빈의 접근법도 비록 루터 자신보다 멜랑톤 입장에서 도출된 것이라 할지라도 강한 루터적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칼빈의 저작과 루터의 저작 사이의 관계성 때문인지,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율법(1, 십계명)에서 믿음과 복음과 교회로 (2, 사도신경) 그리고 기도와 성례로(3-5), 나아가 교회와 국가 안에서의 기독교적 삶(6)으로 전개되는 모델을 가지고 기초적인 기독교 교리를 제시한다. 율법과 믿음과 복음과 교회와 국가라는 기본적인 순서는 『기독교 강요』의 이어지는 모든 판본들 안에 그대로 보존되는 구조이다. 칼빈은 5가지 거짓 성례들을 비난하는 대목에서 루터의 교리문답, 아우그스부르그 고백서멜랑톤의 초기 『신학통론(Loci communes)를 현저하게 극복한다. 그 대목에서 칼빈은 두 개의 진정한 성례들을 고수하고 나머지 견진성사 및 혼인과 참회는 배제하는 입장을 보인 『참종교와 거짓종교 해설(De vera et falsa religione, 1525)에서 보인 쯔빙글리 모델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칼빈의 참성례와 거짓성례 구분은 성례의 실행에 있어서 쯔빙글리 입장보다 훨씬 변증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기독교 강요』의 성례론 부분은 교황적인 미신을 제거하고 경건에 이르는 뚜렷한 경로를 제시하려는 칼빈의 바램에 의존하고 있으며, 파리대학 재학시 발발하고 회심 이후에는 더 격렬해진 프랑스 안에서 이루어진 종교개혁 시도들의 억압에 대한 반발을 증거하는 의분에 찬 변론적 어조로 진술된다.

초기의 교리문답 및 신앙고백 (1537-1538)

칼빈의 사상에 대한 연구의 초점은 주로 『기독교 강요』에 맞추어져 있고,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이 근대 초기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에 대하여 가지는 중요성 때문에 칼빈의 신학이 형성되던 시기와 밀접하게 결부된 다른 문헌들에 대한 면밀한 탐구에는 소홀함을 보여 왔다. 그러나 신앙을 가르치는 기초적인 모델을 제공하는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 견줄 수 있는 다른 문헌도 있다. 보다 유명한 『기독교 강요』 외에도 비록 덜 알려지긴 했으나 칼빈의 초기 사상의 중요한 지표를 제공하는 칼빈의 초기 교리문답,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되는 신앙의 가르침과 고백(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dont on use en l’Eglise de Geneve, 1537)1538년에 출판된 그것의 라틴어 번역본(Catechismus seu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ecclesiae Genevensis)이 있다. 『신앙의 가르침』 부분은 칼빈이 전적으로 저술한 것으로서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확대된 해설이며 그 교리문답 뒤에 덧붙여진 『신앙고백』 부분은 아마도 칼빈과 파렐의 합작임에 분명하다.

칼빈의 교리문답 서론은 그의 근본적인 종교개혁 관심사와 회심을 거듭 언급하고 있다. ‘교황주의 및 그것의 미신적인 요소들에 대한 협오가 제거되고 그 도시의 종교복음의 순수성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교리문답 및 첨부된 신앙고백 목적은 믿음을 견고히 구축하고 공적으로 고백하는 방식으로 제네바의 종교개혁 토대를 확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지는 신앙 고백서에 분명하게 반영하되 성만찬의 개혁파적 실행은 교황주의 미사끔찍한 불경건 및 미신적 요소들과 대조를 이루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하고 무용한 것으로 느끼게 만든 말씀의 로마 카톨릭적 남용과도 대조를 이루게 하였다. 그 고백서 안에는 미신이 제거되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경건이 고양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6개의 장들은 특정한 교리문답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인 것으로 칼빈의 1537 1538년 교리문답은 33개의 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율법으로 시작하지 않고 종교와 하나님 지식에 대한 서론적인 논의로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 자유선택, , 삶으로의 회복으로 논의가 전개되며 이 모든 주제들은 율법에 대한 논의보다 선행하고 있다. 율법을 논하고 사도신경 논하기 이전에 칼빈은 믿음, 예정, 칭의, 성화, 회심, 중생, 선행 등에 관한 논의를 제공하되 이 논의들은 1536년판 『기독교 강요』나 루터의 교리문답 안에서는 없었던 것들이다. 교리문답 안에서 거론되는 주요 주제들의 절반이 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는 없었던 것들이며 1537-1538년에 처음으로 칼빈에 의해 충실한 논의로 제시된 것이었다. 1537-1538년에 저술된 두 문헌들의 논의 흐름을 유지한 채 두 문헌을 결합하면 우리는 1539년과 1559년 사이에 증보된 칼빈의 원숙한 『기독교 강요』의 주제들을 거의 동일한 순서대로 얻게 될 것이다. 『기독교 강요』의 1536년 초판과 그 이듬해에 나온 교리문답 두 문헌을 일괄해서 생각할 때 그것들은 칼빈 신학의 개요를 간략한 형태로 제공하고 있으며 비록 이후에 추가될 정밀한 부분들은 생략되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 사상의 범위 혹은 윤곽을 묘사하고 있다.

2. 칼빈의 초기 신학에 있어서의 이슈들과 테제들

종교의 중요성과 하나님을 아는 문제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 종교와 하나님 지식으로 곧장 돌입하는 대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칼빈은 1537년 교리문답을 아무리 잔인하고 야만적인 자라도 종교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칼빈이 고전학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즉 그 언어는 키케로의 논문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De natura deorum, 45 BC)를 투영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창조의 고유한 목적이 그 창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자인 하나님 사이의 바른 관계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경배하는 관계라는 논의로 이동한다. 이후 작품에서 주로 언급되는 주요 주제들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칼빈은 너무도 불경해서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 지식을 부러 잊으려 하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덧없는 본질을 깨달아야 하고 불멸에 대한 깊은 사색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들은 종교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각인된 하나님 지식, 즉 그들로 하여금 세상적인 가치에서 천상적인 것으로 주의를 돌리게 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칼빈이 첫장에서 예리하게 언급하고 지나간 불경건 혹은 무종교성 문제가 현저한 주목을 받으며 등장하게 된다. 교리문답 첫장에서 칼빈의 관심을 장악했던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각인된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위해 태어난 것이다는 논거는 참종교와 거짓종교구분으로 규정되는 인간의 문제로 곧장 연결된다. 모든 사람들은 종교의 필요성과 종교가 없는 삶의 극단적인 비참을 인정하고 있다. 누구도 자신을 하나님과 분리하려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건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을 전혀 무익한 방법으로 달래려고 노력하며 동시에 죄악된 삶으로 이끌린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의 무한한 위대함을 따라 경배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추어진 다른 하나님을 만든다. 그들은 하나님의 그릇된 형상을 숭배하고 부정한 두려움 속에 스스로가 상실될 것을 발견하며 신적인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두려워 할 줄 알고 경외하며동시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한다. 이것은 인간에 의해 고안된 경건이나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를 어떠한 자라고 보이신 대로 알며 신자에게 자신을 제시하신 대로 아는 하나님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 칼빈이 제시하다(present)혹은 제공하다(exhibit)단어를 사용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본성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선포하신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제시하고 제공하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확히 이런 의미로 사용된 제공하다단어는 칼빈의 초기 성찬론 신학 안에서도 발견된다. 거기에서 그 단어는 그리스도 예수가 성찬에 임재하는 방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그것은 단순히 보인다는 것 혹은 전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제시하는 것 혹은 제공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특별히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받을 수 있도록 그 무언가를 그 사람 앞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말씀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한 것으로서 신자들 앞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칼빈을 유명론 지지자로 규정하는 자들 혹은 그의 신학을 20세기의 신 정통주의 렌즈로 이해하는 자들이 직면하는 주요 장애물들 중의 하나는 칼빈이 처음부터 크게 강조하며 그의 신학에 등장한 하나님 지식, 특별히 그가 하나님을 창조자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서신,’ 1536년판 『기독교 강요』 1537년 『교리문답』 같은 칼빈의 초기 저작에 그러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나타나는 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그 지식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칼빈의 사상에 대한 신 정통주의 학자들의 패배를 가리키는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주제별 색인은 칼빈의 율법연구 도입부에 있는 주제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인간의 본성을 아는 지식, 그리고 자연법(lex naturalis) 등임을 보여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안에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과 관련된 긍정적인 설명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두신 자연법을 그 지식의 한 국면으로 특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아는가란 주제를 다루는 교리문답적 논의를 시작할 때 알버트 대제(Albert the Great)가 언급하고 중세후기 신학에서 두루 회자된 하나님은 완전히 이해될 수 없고 다만 포착될 뿐이라는 경구를 떠올리게 하는 신적인 초월성 문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하나님의 위엄은 그 자체로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하여 그 지성에 의해서 완전히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위엄을 탐구하는 것보다 그 위엄의 탁월함을 찬미하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처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하나님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면 인간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숭고한 위엄을 찬미할 수 있는가? 칼빈의 답변은 바로 다음 문장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투영이라 하였고 주님에 대하여 우리가 다른 방식으론 알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고 그 발자취를 추적해야 한다.’

칼빈은 강조하여 말하기를, 자연의 질서에 대한 이런 경건한 탐구는 신자들의 마음을 신적인 것들에서 계속 구별하는 헛되고 무의미한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경건에 있어서 중차대한 의미를 가진 연습이라 하였다. 자연적 질서에 대한 깊은 사유는 신자에게 완전한 경건을 일으키며 육성하며 강화한다.’ 요약하면, 그런 사유는 주님에 대한 신앙과 올바른 경외에 유익하다. 칼빈은 자연적 질서에 대한 숙려가 신자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며 신적인 속성들에 대한 묵상은 어떻게 참된 경건에 도움을 주는지를 언급하며 논지를 확장한다.

우리는 이 물질적 우주에서 모든 것들의 토대와 근원이 산출되는 우리 하나님의 불멸을 관조하며, 땅의 물질을 창조하고 지금도 그것을 보존하는 그의 능력을 관조하며, 다양성과 혼돈을 하나의 정연한 질서 속으로 모으시고 영원토록 그것을 통치하는 그의 지혜를 관조하며, 그 자체가 창조된 사물과 그 사물이 지속되는 원인이 되는 그의 선하심을 관조하며, 경이로운 방식으로 경건한 자를 지키시고 악한 자에게 보응함을 통하여 보이시는 그의 의로움을 관조하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시고 우리의 불의함을 놀라운 온유로 덮으시는 그의 자비를 관조한다. 우리의 우둔함이 그렇게 눈부신 빛으로 말미암아 더 캄캄해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우주에서 그것이 제공하는 만큼 하나님이 무엇과 같은 분인지를 풍성하게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과 패역함 때문에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일관되게 오독되고 곡해되어 왔으되 심지어 하나님의 지혜가 분명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천상적인 지혜 전체를 뒤집는 극단까지 보인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그의 행하신 일들로 말미암아 올바르게 묘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되 인간의 패역한 기준을 따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규범을 따라서 돌아가야 한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삶과 의로움과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과 자비의 영원하고 궁극적인 출처 혹은 원천(fons)임을 배운다.

죄에서 구원에 이르는 문제를 논외로 접어둔 채,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두 가지 출처를 밝히고 있다. 죄인된 인간들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배워야 하지만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첫번째 출처로서 세계의 질서이고, 둘번째 출처는 그 동일한 진리들을 권위 있게 가르치는 성경이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재껴두지 않으면서 칼빈은 추가하여 말하기를, ‘이 모든 것들이 하늘과 땅 도처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할지라도그것들의 궁극적인 중요성은 오직 우리가 스스로 낮아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고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의로움과 선하심과 자비 행하시는 방식을 상고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칼빈은 성경적 계시와 자연 안에서의 하나님 계시가 대립되는 것처럼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죄 문제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계시의 중요성과 유용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연적 계시와 성경적 계시를 나란히 두었으며 그들의 관계성을 강조했고 죄문제와 성경적 계시의 필연성을 알았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한 진리가 자연적 질서에 나타나 있다는 지점으로 돌아오고 그리고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내적인 수용과 묵상이 없다면 성경적 진리가 비록 자연적 계시의 보조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무용할 것임을 주장했다.

죄 문제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계시적인 광채를 포함한 계시의 두 출처의 이러한 이해는 칼빈의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에서 칼빈은 타락 이후에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을 떠남에 대해 언급하고 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 속에서 자신의 말씀을 바꾸심이 없이인간에게 신령한 것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를 추구하고 느끼고 찾고 알아서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도록 하셨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계시는 모든 곳에서와 모든 것에서얻으며 너무도 명백하게 주어져서 어떠한 사람도 무지한 척 할 수 없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지혜와 영원함영광은 우주적 질서의 모든 부분에 새겨져 있다. 사도 바울이 확증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세상에 결코 증인이 없도록 하지 않으신다. ‘궁창에 있는 것들로 땅의 중심에 있는 것들까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인간에게 증거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고 그를 발견한 이후에는 그를 묵상하되 주님은 너무도 선하시고 능하시고 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께 그의 권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자연 전체에 있는 하나님의 증언에 대해 다소 열광적인 언설을 지속한 이후에 칼빈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존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그렇게 오래동안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설명함에 있어서 칼빈은 죄에 빠진 인간의 무감각에 대한 언급에서 자신의 논지를 제한함이 없이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한 선하심과 인자함을 보다 충만하게 보이시기 위해 땅의 열방들 중에서 특별히 택하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소리를 듣도록 하셨다고 덧붙인다. 반대로 이방인은 비록 세계의 질서에서 그들에게 계시된 내용이 있고 은택의 감추어진 궁극적 수여자가 모든 선의 원천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자신들을 위해 우상들, 헛됨과 속임수를 따라 고안된 신들을 만들었다.

칼빈은 어떤 곳에서도 자연적 계시의 가치를 축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완전히 상실된 가능태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칼빈이 자연적 계시를 독립적인 자연적 혹은 철학적 신학의 기초로 격상시킨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유의미한 계시가 자연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칼빈은 자연적 계시를 유한한 것들의 우주적인 질서의 창조자요 보존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에 대한 계시라고 하였다. 칼빈은 이 자연적 계시가 하나님의 구원적 지식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특별히 밝히지는 않았으며, 자연적인 계시와 구원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구원의 유일한 기초로 이해하는 지식의 근원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창조된 질서와 더불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을 아는 지식의 근원도 되며, 죄문제를 고려하면 죄가 일관되게 창조된 질서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우상적인 것으로 수용하게 하고 우상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모두에 대해서 중요성을 가지는 필연적인 근원이다.

함축적인 의미를 보자면, 성경이 제공하는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자연 안에서도 계시된 하나님과 그의 속성들에 대한 동일한 진리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함의는 주제를 다루는 칼빈 자신의 방법론적 접근법에 의해 강화된다. 즉 칼빈은 인간적인 지식의 결함과 자연적 계시의 한계와 우상의 문제를 처음부터 경계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범위와 특성에 대한 광범위한 찬양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나아가 칼빈은 앞에서 다룬 참종교와 거짓종교 사이의 차이를 배운 신자에게 전달된 교리문답 안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며, 타락과 죄문제를 규명한 이후에 자연에 있었지만 [죄와 타락으로] 제거되고 만 긍정적인 진리에 관한 충실한 논의를 제공하는 신약성경 서문 경우에도 이런 방식으로 시작한다. 칼빈은 이러한 자연적 계시가 다만 인간으로 하여금 핑계치 못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신약성경 서문에선 논하지 않았다. 칼빈은 이방인이 자연적 계시를 비우상적 방식으로 수용할 어떠한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마음에 새겨진 신적인 것들에 대한 인간의 초보적인 이해는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건대, 그는 타락한 인류 전체에게 미친 자연적 계시의 제한적인 영향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되 은혜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눈이 열린 신자들에 의해서 지각된 자연의 하나님 계시라고 찬양했다.

성경과 전통

칼빈의 초기 『기독교 강요』와 그의 첫번째 교리문답 중 어떠한 것도 신앙과 신학의 규범들에 대한 충분한 진술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리문답 영원한 진리의 규범항목을 따라 만들어진 언급으로 성경 혹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 지식의 유일한 소스라는 사실을 이미 살폈다.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하여진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언급하고 나아가 계시의 역사를 율법과 언약과 그리스도 (메시야) 계시 맥락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분명하게 성경을 기독교 가르침의 궁극적인 규범으로 가정하고 있으며 초기 『기독교 강요』에서 그는 일관되게 성경을 인간적인 전통과 의견에 맞서는 건강한 교리의 토대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들 중 어떠한 것에서도 성경을 규범으로 이해하는 온전한 교리적 체계화 혹은 교리적 진술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고백』 서두에서 그러한 진술을 발견한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신앙과 경건의 규범으로 성경만을 따를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적인 의견으로 고안된 어떠한 것도 성경과 혼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에서 산출된 것 외에는 우리의 영적인 통치권에 대해 다른 어떠한 교리도 용납하지 않음으로 성경에 어떠한 것도 더하거나 감하지 않도록 할 것인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금령을 따라 배웠기 때문이다.

나아가 칼빈은 성경의 올리베탄(Olivetan) 불역본의 라틴어 서문에서 왕정이나 교회의 검열관이 부여하는 특권이 없어도 텍스트의 권위에 의존하여 번역본을 출판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했다. 성경은 인간에 의해서 새롭게 발명되지 않았으며 그것의 유효성을 얻기 위해 인간적인 증언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칼빈은 기록한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주인이며 왕중의 왕이신 분의 예언과 영원한 진리가 성경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초기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또한 신성에서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과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적인 지혜사용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배운 것들 외에는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경고한다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진리에 관하여 혼란을 느끼는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방식을 배워야한다.

신학의 다른 원천들과 관련된 성경의 권위 및 사용에 관한 칼빈의 초기 입장은 다소 명확하다. 성경에 대한 그의 진술들은 성경을 종교와 신학에 있어서 필수적인 진리의 유일한 근원으로 간주하고 성경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서 연구되고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중세적 전통의 큰 줄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칼빈이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문맥에서 이해한 것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이전 전통들을 존중하고 지원하되 특별히 어거스틴 같은 교부들을 주목하게 하였고 초기의 교회 공의회의 결정들을 주목하게 하였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여러 오류들과 이단들을 대적하는 데에 지원을 받는 정도였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어떤 성명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종교 개혁자들 같이 칼빈도 자기 시대에 이루어진 전통의 변화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개혁을 위해 성경을 그러한 오류들과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로잔(Lausanne)에서 이루어진 첫번째 강연에서, 칼빈은 자신과 종교개혁 지지자를 묘사할 때 그들이 로마 카톨릭 대적보다 교부들을 더 신중하게 탐독한 자들이며 그러므로 그러한 초기 교회 선생들의 목소리에 올바른 주의를 기울임도 없이 초기교회 권위에 호소하는 로마 카톨릭 학자보다 교부들을 더 존경한 자들로 묘사했다. 비록 교부들은 합당한 관심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 주님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는그런 차원의 권위를 부여하는 정도까지 높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사야와 사도 야고보가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에는 오직 왕과 입법자만 있어야 한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만약 교황이 악마적인 교만을 부리며 이 권세를 패하고 그 권세를 자신에게 돌리고자 한다면 그는 적그리스도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부에게 지나치게 높은 권위를 부여하여 적그리스도 기준을 따라그들을 가늠하고 그들로 그리스도 예수의 대적자요 원수가 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교부들을 읽되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인식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의 초기 인물들과 그들의 사역을 주목하며 그들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교부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 진리를 찾되 최종적인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 두었다.

여기에서 칼빈의 교리적 체계화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개혁을 초기의 교회가 신실하게 성경을 읽었던 전통 안에 위치시켜 두었으며 그는 또한 오버만(Heiko Oberman)전통 I’이라고 명명한 모델을 고수했다. 교회의 전통은 성경과 동일한 혹은 거의 동일한 지위를 가진 두번째 권위로 여겨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은 성경의 진실한 읽기와 해석에 관계된 문제이다. 게다가 칼빈이 신약성경 서문에서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성경을 읽기 위한 교회적 문맥은 개혁을 반대한 로마 카톨릭 대적들이 규정한 교회적 문맥보다 넓었으며 (더 넓어질 필요가 있으며) 그 문맥이란 교회의 위계질서 및 대학의 신학부 교수진만 해당되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은 일반인도 포함할 정도로 넓었었다.

믿음과 연관된 교리들

구원하는 믿음과 은혜와 칭의에 관한 주제는 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 안에 등장하며 사실 그의 논제식 색인에는 장들 안에 발견되는 주제들 중의 하나로 표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에 대해서는 가장 간략한 논의만 있었다. 이 교리가 다른 중요한 교리적 논점들과 다양한 연관성 속에서 보다 명료하게 선언된 것은 교리문답 안에서다. 거기에서 칼빈은 믿음의 정의를 제시하고 믿음을 예정 및 은혜와 먼저 연결하고 그 다음에 칭의 및 성화와 연결하고 그런 다음에 회심과 중생과 선행으로 이동한다. 교리문답 안에서 발견되는 설명의 순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순서에 따르면 나중에 개혁주의 인물들에 의해 은혜의 집행혹은 구원의 서정으로 규정되는 것들에 해당되는 다른 주제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로마서 8 28-30의 소위 황금사슬주제들을 연결하는 열쇠로서 믿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일련의 교리들 중 교리문답 첫 장의 제목에서 간단하게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안다는 언급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자비로운 아버지하나님은 복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제시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인정하는것도 복음에서 비롯되는 것인 반면, 불신과 강퍅함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진 인류의 보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를 맞이하고 그의 부르심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유효하게 영접된다.

1536년 『기독교 강요』는 선택을 사도신경 주제와 연관시켜 언급하고 유기에 대해서는 단지 이 땅에서의 교회에서 어떠한 사람도 택자와 유기자를 분리할 수 없다는 문맥과 관계하여 매우 간략하게 다루었던 반면, 1537-38년 교리문답은 『기독교 강요』의 나중 판본들에 훨씬 가까운 방식으로 그 문제에 접근한다. 즉 칼빈이 선택과 유기에 대한 교리로의 전환점을 발견한 대목은 바로 복음이 모든 자들을 불러 그리스도 안에 참여할 것을 말하지만 단지 일부만 반응할 뿐이라는 사실에 있다. 일부는 그리스도 부르심을 따르지만 다른 일부는 따르지 않는다는 이 차이신적인 의논의 심오한 비밀에 대한 숙고로 곧장 이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주님께서 그의 영원한 선택을 따라 자녀로 예정하고 천상적인 왕국의 상속자로 정하신 자들 안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동일한 의논을 따라 제외된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진리의 가장 분명한 선언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른다는 악취에 의해서다.

 택자들과 유기자들 사이의 이러한 구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논 이외에 더 소급되는 원인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개념을 따르면서 칼빈은 신적인 것들의 신비에 대한 인간적인 지식의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 교리문답 안에서 가장 긴 장들 중 한 장의 나머지 부분을 할애한다. 왜 하나님은 어떤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다른 이들에겐 그렇지 않는지에 대한 물음은 감추어진 상태로 두어야만 한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신적인 신비를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그렇게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깊은 근심만 만들어 낼 뿐이라고 하였다. 신자들이 해야 할 모든 것은 바로 신비를 수용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판단에서 언제나 의로우며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후에 칼빈은 빠져나올 출구가 없는 작정의 미로에 대한 [과도한] 탐구를 경계했다.

신자들은 신비를 불평하고 탐구하는 것보다 인류 전체를 당연한 권리에 의해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을 경외해야 한다. 로마서 9장 본문을 떠올리며 칼빈은 자신의 독자들로 하여금 택자는 긍휼의 그릇으로 유기자는 진노의 그릇으로 인정하되 그것이 전적으로 의롭다는 것을 깨닫길 원하였다. 선택과 유기는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바탕을 제공한다. 칼빈은 선택의 확실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 하였다. 나중에 『기독교 강요』에서 이 주제들을 발전시킬 것을 내다보며, 칼빈은 그리스도 예수를 신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거울로 규정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단순히 거울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모든 자들에게 선택의 보증이요 증거도 되신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한 모든 자들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더 파고들 필요성이 없다고 하겠다.

믿음의 정의를 논한 초기의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믿음의 두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구분한다. 두 의미는 모두 고유한 것이지만 오직 하나의 의미만이 은혜와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와 연결된다. 믿음[의 첫번째 의미]은 단순히 사도신경 안에 발견되는 그런 믿음의 조항들을 뜻한다. 이 믿음은 교회가 공통으로 진리라고 확증하는 교회의 교리이다. 그러나 믿음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내적인 신뢰를 뜻하기도 한다. 그것은 구원과 관계된 믿음의 두번째 의미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내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누구나 언제든지 받아들일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너무도 확실하여 그것이 행하기로 보증한 것들은 반드시 성취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정하는 마음의 견고한 확신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다.’ 교리문답 안에서 발견되는 참믿음의 정의라는 짧은 장은 칼빈의 원숙한 개념을 지향한다. [그 원숙한 개념의] 믿음은 뇌리를 맴돌며 가슴에는 아무런 영향도 못미치는앙상한 하나님 지식 혹은 성경의 민밋한 이해가 아니며, 믿음은 또한 이성을 따라 그럴듯한 것이라고 확인되는 견해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마음의 확고하고 견실한 확신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복음이 약속한 하나님의 자비 안에 안식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1536년과 1537-38년 사이에 일어난 개념의 변화는 개념의 초점과 관련되어 있다. 즉 믿음의 개념이 단순한 지적 동의와 궁극적인 의미에서 마음에 즉 의지의 영역에 있는 구원하는 믿음 사이의 구분을 강조하는 강한 주의주의(voluntarism) 성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그 안에서 성취되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의 고유한 대상으로 규정한 이후에, 칼빈은 믿음 자체에 대한 언급과 함께 구원의 근원 문제로 돌아간다.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느냐의 물음이 예정의 문제를 제기하듯, 믿음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란 문제를 제기한다. 믿음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에 속한 것이 아니다. 칼빈은 믿음이 하나님의 탁월하며 고유한선물임에 틀림이 없으며, 믿음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견고히 확증하며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고 영혼의 설득으로 마음을 확고히 세우시는조명적인 성령의 능력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약속하신 것을 행하실 것이라는 논점은 1536년판 『기독교 강요』 언사의 반복이며, 교리문답 앞 부분에서 언급된 지성과 의지의 균형은 칼빈이 나중에 이룰 교리적 체계화를 지향하는 논점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의 원숙한 가르침은 칭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곧장 이어진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데 이는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의로움이 스며들기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의로움을 취하였고 그들 자신의 불법은 그들에게 돌려지지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의로움의 수용은 죄용서와 동시적인 것이라고 칼빈은 주장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신자들을 위해 자신의 의로움을 전가했기때문에 사도 바울은 행위의 의와 그것을 전복하는 혹은 파기하는 믿음의 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칼빈이 비록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우리의 보증인이 되신다고 간단히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리스도 의로움이 어떻게 신자들의 구원에 공로가 되는지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사도신경 해석에서 할 것이라고 칼빈은 밝힌다.

교리문답 안에서 이러한 칭의의 전적인 법정적 설명 다음에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처럼 그들의 성화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선언이 뒤따른다. 성령의 조명케 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선물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간주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함을 인하여 성화되고 모든 청결함과 순전함에 이른다.’ 성화를 경험함이 없이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속은 자들이다. 그리스도 의로움은 우리가 성화를 맞이함이 없이도 우리가 믿음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에 속하지 않았듯이, 율법에 대한 순종도 인간의 어떤 능력과 대응되지 않는다. 오히려 순종은 율법의 실행을 위한 영적 능력을 요청하고 있다. 파렐 교리와의 유사성이 여기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즉 율법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능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믿음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라고 파렐은 주장했다.

그러므로 율법은 새로운 기능을 취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졌기 때문에 한 때 인간의 죄를 정죄만 했던 율법이 신자들의 발걸음을 이끌어 의의 길로 인도하는 빛이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은 악의 길을 출입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의로운 훈련을 제공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멜랑톤의 개념에 수정을 가하며 도출한 칼빈의 제3사용 개념의 섬광을 경험한다.

칼빈이 성화를 마음의 정화와 새로운 순종으로 이해한 것은 그로 하여금 다음 장의 주제인 회심과 중생으로 넘어가게 한다. 여기서는 칼빈이 도입한 용어들이 중요하다. 즉 여기에서 참회(poenitentia)와 중생(regeneratione)은 회개와 함께 조정되어 회심(conversio)으로 규정되기 시작하고 중생은 우리의 부패한 자아의 죽임(mortificatio)과 영적인 살림(vivificatio)으로 구분된다. 이 이중적인 중생, 즉 새로운 삶과 결부되어 육체에 맞서 싸우는 지속적인 전쟁 개념은 파렐의 특징이다. 여기서 그 유형 혹은 모델은 『기독교 강요』 후기 판본에도 계속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칼빈의 사상에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기독교 강요』의 문헌형성 과정에서 추가된 방대한 분량의 자료들을 고려할 때 그 모델을 이후의 판본들 안에서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는 가장 기초적인 형태를 따라 진술되어 있다.

회개는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과 결부되어 있으며중생됨 혹은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전제와도 결부되어 있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회심으로 정의되는 회개는 중생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 전체에 관계된 과정이되 한편으론 죄와 부패의 잔재들을 죽이고 다른 한편으론 인간의 본래적인 상태가 은혜로 회복되게 하는 수단으로 영적인 살림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칼빈은 또한 논의의 순서에서 왜 회개와 중생을 성화 다음에 두었는지 밝히기를, 거듭남 혹은 새로운 피조물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생에서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회개는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삶은 구원의 필연적인 부분이다. 중생에서 비롯되는 선행은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음직한것이다. 선행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이러한 강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기초를 결단코 제거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기초한 의로움의 어떤 형태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말미암는 인간적인 의로움은 율법 아래에서 전적인 완전함이 필히 뒤따르지 않으면 안되는데 칼빈은 인간에 의해서 산출된 행위들 중에 전적으로 완전하고 무흠한 행위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의는 우리 자신 바깥에서(extra nos), 즉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우리에게 전가하신 의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와야만 한다. 이 교리는 선행의 필요성을 결코 제거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독교적 삶에서 가지는 그것의 고유한 중요성을 긍정하고 있다. 신자의 불완전한 의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의로움에 의해 가리워질 때 하나님은 순종하는 인간의 행위를 의롭다고 여기시며 받아들여 주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을 약속해 주신다.

결론

칼빈의 초기 신학은 (그가 작가에게 합당한 방식이라 주장하는 글쓰기의 특질로서) 명료성과 간결성 때문에 주목할 만하며, 전 생애를 걸쳐 칼빈의 사상에 중요한 내용으로 보존될 일련의 괄목할 만한 주제들을 제공하고 있다. 칼빈의 초기 신학은 그 근본적인 의도에 있어서 성경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입장에서 성경 텍스트를 주목하고 교회에서 분명한 지지의 목소리를 추구할 때에는 특별히 교부들을 주목하되 교회를 괴롭히는 진리의 학대가 창궐하기 이전에 저술된 보다 오래된 전통으로 이해한 신학이다. 요약하면, 칼빈의 초기 신학은 그 의도에 있어서 정통적인 동시에 교회적인 것이었다. 교황적인 미신에서의 해방이란 칼빈의 관념과 독자들과 청중들로 하여금 그 미신에서 경건과 배우고자 하는 성향으로 전환되게 만들려는 그의 의도는 칼빈의 초기 저작들 전반을 관통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을 포괄되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