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0일 토요일

전주대로 간다!

주께서 전주대로 이끄셨다. 기독교 진리의 정수를 가르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학생들의 복음화에 집중하려 한다. 어제는 전체교수 연수회가 있었는데 가슴도 뜨거웠고 선배 교수님들 전체를 동역자로 얻는다는 것도 무척이나 나를 설레에게 했다. 선배들의 노하우를 잘 배우고 주께서 부족한 종을 부르신 소명의 고유한 부분에도 충실하려 한다. 2월 29일부터 전주대의 삶이 시작된다. 많이 설레인다. 주님과 교회와 세상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충성된 종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발견되고 싶다. 전주대의 로고가 아래와 같이 JJ이다. 나는 이것을 "Jeonju in Jesus"로 해석하고 싶다. 한편으로 사랑하는 아신대와 예수가족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한국에 들어와 사랑의 띠로 묶였던 믿음의 공동체가 부족한 나에게 배푼 사랑을 늘 기억하려 한다.

2016년 2월 11일 목요일

걸음의 주관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

약함의 비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연약함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경제적, 신체적, 정서적, 인지적, 사회적, 정치적 연약함들 중에 어느 하나일 수 있다. 바울은 신체적인 연약함이 있었는데 제거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답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을 설득하지 않고 그 응답을 기뻐했다. 기도와 응답의 다소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기쁨이 산출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생소하고 희한하다.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이 바울 자신에게 머물게 하려고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바울의 진술에서 이유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바울은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주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는 것을 선호했다. 그런 기호가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도 기쁨으로 맞이하게 했다. 참으로 놀랍다. 

상한 심령의 제사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시51:17)

제사는 물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을 가리키는 그림자다. 동시에 신자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순간 황소를 드림으로 제사를 다 드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율법적인 제사의 물리적인 실행은 그저 제사의 본질을 담아내는 형식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의 제사를 하나님은 받으신다. 그분께 향기로운 제사를 올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시인이 증거하는 마음의 제사여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또는 삶의 현장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과연 주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제사인지 돌아보게 된다. 교회의 사회적인 냉대만이 아니라 이 세대의 끊없는 곤두박질 현상도 상한 심령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비밀 누설자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11:13)

기도도 많이하고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봉사에도 비지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출입에 의식이 없고 입술은 경박한 경우가 종종 목격된다. 남의 비밀을 숨겨주는 자가 신실하다. 비밀의 누설로 정보력을 과시하며 사람들을 주변으로 모으는 사람들의 눈빛과 행실에는 신실함이 없다. 먼저는 나 자신이 그러한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고, 그런 사람을 친구로 두었다면 그와는 비밀을 공유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2016년 2월 10일 수요일

시편 50편의 일부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악인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율례와 언약이 합당하지 않다. 그 이유가 잘 묘사되어 있다.

2016년 2월 5일 금요일

성경과 신학

하나님은 만물과 만사의 처음과 나중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기준이나 원리나 의도나 시초로 삼는 모든 것들은 우상이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목적이나 기쁨이나 소망이나 영광으로 삼아도 우상이다. 성경은 신학의 처음과 나중이다. 성경이 아닌 다른 자료나 생각이나 행동이나 현상에서 신학을 시작하면 거짓된 신학이고, 성경을 대체하는 체계나 지식이나 규범이나 질서라는 결과물을 산출해도 거짓된 신학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시고 성경의 실체라는 사실을 존중하고 성경과 더불어 시작하고 성경과 동행하며 성경 안에 머무는 것이 최고의 참된 신학이다. 

2016년 2월 3일 수요일

비열함의 추앙!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시12:8). 비열함이 짐승도 아니고 인생 중에서 높임을 받는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얼마든지 있다. 인생의 성공이 마치 비열함에 의존하고 있다는 듯, 비열함이 처처에 횡횡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제계와 정치권은 적당한 비열함이 성공의 기본기다. 이것이 교회의 정치에도 기본기로 자리잡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하겠다. 괜찮은 동역자의 뒤통수를 치고 부유한 성도를 이용하는 것이 암암리에 성공의 기본기로 둔갑할 수 있어서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이 곳곳에서 날뛴다고 시인은 탄식한다. 오늘은 아침이 많이 차갑구나...

2016년 2월 2일 화요일

자녀양육

자녀를 키우면서, 마음의 일거수 일투족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으면 행위도 읽어진다. 행위로는 반듯한데, 속으로는 비틀어진 자녀들이 있다. 아이들이 아무리 행위로 속을 감추려고 해도 부모의 눈에는 아이들의 마음이 그냥 읽어진다. 읽었다고 부모가 내색하면 아이들은 그게 아니라고 부인한다. 그렇게 부인한 이후에 아이들은 곧장 알리바이 확보에 들어간다. 이것은 현상의 단순한 재구성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최면을 걸고 진정성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확신하는 작업이다. 이런 확신이 마련되면 급조된 진정성을 안면에 걸고 논쟁의 기선을 제압하려 한다.

부모가 되면 이러한 내면의 은밀한 움직임이 공공연한 관찰의 내용으로 포착된다. 문제의 핵심은 아이들이 애초에 가졌던 정확한 동기를 추적하여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품어주는 사랑으로 그런 아이들의 인격적 건강도를 높이는 것에 있다. 이러한 상황을 경험할 때마다 부모의 한계가 느껴진다. 첫째는 나 자신의 모습을 자녀의 일상에서 확인하는 것이 괴롭고 그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자녀의 못마땅한 모습을 감정으로 억압하는 자신을 관찰하게 된다. 둘째, 자녀의 은밀한 거짓이 사람의 손으로는 교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에 엎드리게 된다. 양육은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