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1일 목요일

무신론자 친구를 도우려면

어떤 자매님이 신실하던 친구가 무신론에 빠져 슬퍼하며 어떻게 도울지를 물었다. 그에 대한 짧은 답변이다.

저도 저를 처음으로 교회에 데리고 간 친구가 있는데, 정작 자신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간 친구가 있습니다. 자매님의 슬픔이 얼마나 휘청거릴 정도의 무게를 가졌을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참으로 교회도 잘 알고 하늘의 은사까지 맛본 분들이 떠나간 이후에 돌아오는 것은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히브리서 기록자의 말처럼 얼마나 희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무신론의 경우, 제가 친구분의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좇다가 믿음에서 벗어낫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처방은 결코 지식적 변론일 수 없습니다. 자매님도 잘 아시듯이 사랑은 지식보다 강합니다. 진실한 사랑의 변론이 거짓된 지식을 꺾습니다. (물론 사랑이 무지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그 친구분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해 주시는 게 최선일 듯합니다. 

생명과 구원은 분명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정하신 뜻을 이루시는 방식으로 늘 수단을 쓰십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 말입니다. 우리는 친구분의 결국을 모르지만 사랑으로 주님의 제자됨을 끊임없이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은 분명히 우리에게 있습니다. 담당 목사님과 대화하며 도움을 구하며 지치지 마시고 지속적인 사랑을 수혈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피흘리신 심정을 가지고요.

혹 도움이 되실지 모르지만, 무신론의 입장과 어법과 공격이 궁금하면 그리고 친구분의 생각까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돕기를 원한다면 다음 [한국 무신론자 모임] 사이트가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절대 거기에 빠지지는 마시구요...^^;) 자매님, 오래 걸릴지도 모릅니다. 돌아오는 순간까지 어쩌면 죽는 그날까지 친구분을 향한 그 사랑을 접지 마시기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한국 무신론자 모임

베일리의 바울

이집트 선교사의 아들로 그리고 선교사로 중동에서 40년이 넘도록 성경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연구한 석학이다. 이번에 Worship Symposium 주강사로 칼빈에 와서는, 이미 381년부터 신학적 해게모니 아랫묵을 차지하게 된 서구적 방식의 신학에 동방적인 접근법과 중동적인 배경이 접목된 '통합적인 신학'을 역설했다. 성경 자체가 신학의 오리지날 방식이며 당연히 신학적 교리에 대한 이야기의 우선성을 존중해야 한단다.

이번 심포지엄 기간동안 난 그분의 강의만 다 들었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었고, 특별히 시대성과 문화성에 대한 강조가 필요는 하겠으나 지나치면 오히려 신학의 범시대적 보편성과 범문화적 포괄성의 희생을 자초할 수 있다는 경계심도 가졌으며, 동시에 신선한 접근법과 색다른 시각과의 만남은 그분에게 집중한 시간들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하여 그분의 주저라고 할 Jesus Through Mediterranean Eyes와 Paul Through Mediterranean Eyes를 질렀다. 저렴한 가격에...

Kenneth Baillie, Paul Through Mediterranean Eyes (IVP, 2011)

2013년 1월 30일 수요일

작은 영웅들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32:32)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확고히 정하신 뜻의 불변성이 아니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신적인 뜻의 유연한 가변성을 떠올리는 분들도 계시겠다. 생명책에 이름을 기입하고 지우는 것은 우리의 행동거지 정도에 달렸다는 추정을 지나 구원의 여부가 우리 개개인이 자기하기 나름이란 '합리적 궤변'으로 직행하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니겠다. 이는 사실 우리의 성정에 어떠한 갈등이나 주저함도 없이 쫘악 달라붙는 친숙한 사유의 흐름이다. 오히려 이에 대한 반론과 저항이 우리에겐 낯설고 거북할지 모르겠다.

다윗과 바울도 모세와 유사하게 '생명책 삭제' 멘트를 내뱉었다. 마치 영생의 여부가 나의 결정에 달렸다는 인상을 솔솔 풍기듯이 말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들을 바글바글 긁어모아 성도의 이름은 철필이 아니라 연필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심기가 틀어지면 얼마든지 삭제될 수 있으니까 까불지 말라는 가당치도 않은 협박용 카드로 악용하는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목회를 성공으로 이끌고 성도들의 주머니를 털어 짭짤한 소득만 올릴 수 있다면 소설도 가히 흉내낼 수 없는 면죄부 발부와 매매도 '적법한 제도'로 둔갑하는 일들이 교회사의 갈피마다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나는 본문을 읽으면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계명이 떠올랐다. 전적인 은택으로 택함을 받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하게 된 최고의 복마저도 수단으로 삼을 정도로 백성들을 사랑하는 모세, 하나님의 백성이 광야에서 암울한 최후를 맞이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는 치명적인 흠이 생길지도 모를 가능성과 맞서서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라고 할 영생마저 소모적인 방편으로 과감히 내던지는 모세의 결연한 사랑과 희생이 보여서다. 이렇게 모세는 '처럼'이란 몸의 수단성을 넘어 영생조차 수단으로 여길 정도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했던 거다.

이는 모세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고귀하신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입으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구원의 수단으로 생명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전혀 손색이 없는 구약적 모델이다. 이런 지도자가 목마르다. 그러나 어떤 대리만족 차원의 출중한 영웅을 기다리는 것보다 우리 각자가 작은 영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성경의 요청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삽비라와 아나니아 정도의 헌신 앞에서도 실천의 손이 떨리는데 어찌 모세의 모델을 감히 넘볼 수 있느냐는 반론이 각자의 목젖에 매달려 출고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여 알도록 의도한 모델이고 이로써 그런 수위의 섬김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면 우리의 육신적 형편을 기준으로 가부를 결정하지 않고 거기까지 이르도록 용기와 지혜의 은총을 배푸시는 주님께 구하는 태도가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은혜로 말미암아 모세의 섬김은 과히 감동의 언덕을 지나 예술의 고매한 경지까지 등극했다. 세상의 기본적인 지탄만 모면해도 좋겠다는 척박한 기독교의 현실에 관념의 헛스윙질 같은 소리일 수 있겠으나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실 한 오라기의 희망마저 묵살할 필요까진 없겠다. 꺼져가는 불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소망보존 의지를 믿기에...

케플러, 멋지다!

성약 출판사가 벌써 9년째 성약출판 소식지를 보낸다. 보내주신 분도 참 성실하다. 고맙기가 이를 데 없다. 이번 87호에는 유해무 교수님의 [케플러: 신앙의 빛으로 우주의 비밀을 밝히다] 서평이 눈에 밟혔다. 읽으면서 도서구입 리스트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도의 개혁보다 전인의 개혁을 겨냥한 종교개혁 기운이 어떻게 케플러의 삶과 신앙과 학문과 직업을 강타하고 갔는지를 감미로운 필치로 묘사한 책인 듯하여서 독서 리스트 기입에 망설임이 없었다. 책의 두께도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는 분량이다.

케플러는 16세기 후반에 태어나 17세기 초반에 왕성한 활동을 한 독일배경 개신교 과학자다. 그는 성경에 비추어 칼빈의 성찬론이 옳다고 여겨 카톨릭과 루터파 두 진영에서 버림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타원 궤도의 법칙,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 조화의 법칙에 근거하여 지동설을 주장했고 행성의 운행이 고대부터 완전하다 여겼던 원이 아니라 타원이란 당시 '발칙한' 주장도 당당히 발설했던 대범한 과학자다. 그의 신앙적인 용맹은 황제가 로마교로 개종할 것을 전제로 프라하 대학 교수직를 제안했을 때에 거절했을 정도였다. 교황의 무흠을 인정할 수 없어서다. 심지어 보편적 교회의 강한 애착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고 높은 전문성도 구비했던 천문학을 배설물로 여길 각오도 가졌단다. 멋지다. 이런 학자, 보고프다.

케플러: 신앙의 빛으로 우주의 비밀을 밝히다 (유해무 교수 서평)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위클리프 De veritate sacrae scripturae

요한 위클리프, '성경의 진리(veritas sacrae scripturae)'라는 단일한 주제로 무려 1000여 페이지의 방대한 문헌을 남긴 최초의 인물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서 그는 성경의 전적인 충분성과 절대적 권위를 강조했고 성경을 자국어로 읽을 성도들의 권리를 외쳤으며 하나님이 성경의 유일한 저자라는 사실과 성경 자체가 성경의 해석이란 사실도 을 강조했다. 그것도 루터가 태어나기 이미 100년 이전에...

특별히 1권 389페이지에 등장하는 "교회의 모든 악은 성경 권위의 거절에서 비롯된다
(omnia mala ecclesie oriuntur ex deacceptacione autoritatis scripture)" 대목에서 요한이 왜 이렇게 방대한 문헌을 집필해야 했는지 그 동기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가독성을 높인 깔끔한 활자로 20세기 초반에 찍어낸 판본이 눈에 띄어 링크걸어 둔다.

John Wickliffe, De veritate sacrae scripturae

Volum I, Volume II, Volume III

2013 봄학기

논문 초안을 제출한 지금, 다시 클라스로 들어갔다.

이번 학기에는 Richard Muller의 Divine Decree와 Ronald Feenstra의 Theology of Karl Barth를 듣는다. 멀러 교수님의 이번 강의는 조만간 출간될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주의 교의학] 제5권의 최종적인 리뷰에 해당되는 만큼 신간의 맛배기 강의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알차고 신선하다. 칼빈에서 처음 시도되는 핀스트라 교수님의 바르트 강의도 상당히 기대된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열번이나 읽으신 분의 내공이 자유롭게 펼치질 것 같아서다. 바르트가 비록 계시론과 성경론과 역사론과 예정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신학과의 위험한 단절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신학적 포스는 거기에 빠져본 사람만이 안다.

16/17세기 이해가 비록 헤페의 컬렉션에 의존한 흔적이 다분히 보이지만, 바르트는 한국이든 외국이든 그 시대에 대한 바르트의 독서량을 능가한 신학자가 참으로 희귀할 정도의 인물이다. 바르트의 신학적 저력의 배후에는 이런 탄탄한 문헌 섭렵력이 떠밭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핀스트라 교수님은 최소한 이런 지식과 균형을 가지고 있는 분이어서 플러스 알파가 더해질 그의 강의가 더욱 기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클라스에 들어가도 이젠 코스워크 느낌이 별루 없다는 거다.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까' 라는 마인드셋, 낯설지만 뿌리치기 힘들도록 야릇하게 밀려 온다. 

확신

성령께서 확인시켜 주기 전까지는 성경의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확신에 이르지 못한다는 칼빈의 언급(verbum ipsum non valde certum nobis esse nisi Spiritus testimonio confirmetur)이 달콤하다. 아무리 객관적인 설득도 성령께서 제공하는 확신의 최종적인 근거를 허물지는 못한다. 성경의 권위가 사람이나 교회가 아니라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 자신이 보존하고 계시다는 증거겠다. 물론 타인과의 가시적인 공유는 불가능한 일이어서 안타깝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를 스스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 변덕스런 사람의 손에 맡겨지지 않도록 그렇게 의도하신 섭리라는 사실이 분명하니 그리 안타까울 일도 아니겠다. 성경이 말하는 모든 내용을 믿겠다는 다짐도 은혜이고 믿어지는 것도 은혜이다. 

2013년 1월 28일 월요일

베드로의 역사이해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행2:23)

성령의 특별한(talis) 강림으로 모든 민족들과 땅끝까지 이르는 본격적인 증인의 시대가 출범하는 시점을 목격한 사람들의 당황과 의혹과 조롱이란 반응의 뒤범벅 속에서 사태를 수습하는 해명의 입술을 베드로가 열었다. 여기서 베드로는 역사를 푸는 열쇠 및 그것의 구체적인 사용의 대표적인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먼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언급한다. 요지는 새 술의 취기처럼 보이는 오순절 현상이 급작스레 벌어진 충동적인 사건이 아니라 선지자로 미리 알리신 '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역사해석 열쇠는 예언과 성취라는 구신약 사이의 시차적인 인과를 넘어 영원한 작정의 시공간적 실현이란 차원까지 언급한다. 이는 역사의 근원이 역사 자체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보다 넓어진 안목의 반영이라 하겠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기름 부으심을 받은 메시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고 하였으나 자신도 깨닫지 못한 고백을 내뱉었던 인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언급하자 앞장서서 저지했던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던 베드로의 안목이 성장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의 결과란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유대인의 종교적 정치적 희생양이 되신 게 아니며 식민지로 전락한 약자들의 해방을 위한 자유 민주주의 이념의 분신으로 산화되신 것도 아니라, 인간의 시공간적 문맥에서 그 궁극적인 원인이 해명될 수 없도록 만세 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 특정한 시점에 이르러 펼쳐진 결과라고 보았다. 이를 근거로 인접한 원인들의 가치를 무시하고 생략하는 건 과도하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인류든 역사를 이해하고 해명하는 틀이 범사에 하나님과 그 뜻을 인정하는 식이어야 한다는 거다.

가까운 문맥을 푸는 감동적인 이론들이 없지가 않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도전과 응전'이란 유명한 토인비의 도식일 것이다. 상황과 인간이 확대된 관점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으로 '두려움'과 '수치'를 키워드로 거론하는 사가들도 있다. 물론 그런 관점들도 그것대로 유용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의 소임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가 생략된 설명은 기껏해야 철지난 훈시를 제공하고 심하게는 사실과 진리의 왜곡도 초래한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베드로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인정하되 그분의 속성과 영원과 시간을 모두 고려해야 하겠다. 이는 요한과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 전체가 공감했던 역사관 되시겠다.

그런 안목으로 오늘의 교회와 세상을 읽고자 하면, 교회와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충동적인 무리들의 경박한 광기가 슬프도록 적잖게 포착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 교회를 유린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일들이 제도적 정당성과 이성적 정합성을 확보한 시대처럼 보여서다. 오늘은 베드로를 통해, 영원이란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안목도 기르고 거기서 축출된 교훈들도 바르게 깨달아 교회를 보다 잘 섬기도록 준비해야 하겠다는 소박한 각오를 다져본다. 

2013년 1월 27일 일요일

생명보다 나으므로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63:3)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댔다. 이런 생명의 소중함은 그것이 제거될 때에 모든 것들이 소멸되고 만다는 사실에서 다시 확인된다. 확실히 죽음은 일반은총 전체의 종식이다. 그래서 다른 모든 댓가를 지불한다 할지라도 피하고 싶어하는 두려움과 근심의 인류 보편적인 원흉이다. 그러나 그런 생명도 하나님의 인자 앞에서는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된다. 우리의 합리적인 상식이 마비되는 지점이다. 보다 편하고 근사한 인생을 일평생 추구하고 생명의 연장을 다른 모든 가치들에 우선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우리에게 그런 판단의 즉각적인 중단을 요청하는 말씀이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경건조차 이익의 방편으로 이용하는 분들에겐 더더욱 배알이 뒤틀리는 말이겠다.

본문은 우리에게 성경의 모든 '모순'과 '혼돈'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풀어진다 했던 루터의 심장이 급히 박동하게 만드는 구절이다. 천지에서 가장 소중하신 분이 육체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으셨다. 이로써 땅에서의 모든 으뜸가는 가치들의 총합을 가지고도 설명할 수 없도록 측량을 불허하는 무게의 가치가 인생에게 주어졌다. 피조물에 의해서는 그 어떤 최첨단 저울로도 측량이 불가능한 삶의 지고한 가치가 주어진 배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이유는 피조적 가치의 총합 이상으로 높아진 인생의 가치에만 초점을 맞추면 십자가의 의미는 절반으로 삭감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주님의 죽음으로 지고의 가치가 부여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고자 할 때에 그런 섬김의 원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방법론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죽지 않으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머물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관찰에 투영된 삶의 원리가 십자가의 또 다른 절반이다.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구원을 받았다는 희열을 넘어 그러한 구원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의 원리로서 죽음조차 수단으로 삼아 주의 인자를 증거하는 지복의 차원까지 이르러야 하겠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를 외치며 살았다. 예수님을 뒤따라, 사망은 내게 생명은 너희에게 역사하는 인생을 질주했다. 일평생 주는 자로 살아가되 생명도 기꺼이 내어주는 인생을 경주했다. 주께서 걸어가지 않으신 '휴거'의 방식보다 주님처럼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기를 원할 정도였다.

바울의 그러한 삶은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귀하다는 확신이 없다면 단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삶이었다. 시인도 바울과 동일한 판단에 익숙했던 것을 본다면, 진리의 본질에 있어서 신구약은 아무런 차이가 없으면 명료함과 경륜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곁다리 교리도 확인하게 된다. 살인과 자살이란 개념들이 거북하고 섬뜩한 살기를 광적으로 구현하는 현시대에 죽음이 수단으로 요구되는 생의 보다 높은 목적과 원리가 있다는 목소리의 공적인 출고가 분명 쉽지는 않은 일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주께서 보이신 삶의 가치와 원리는 복음의 노른자다. 하여 그리스도 예수와 그가 달리신 죽음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도 자랑치도 않겠다는 바울의 확고한 고백이 나에게도 목젖을 털고 즐거이 출고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2013년 1월 25일 금요일

사람에게 증거를 취하지 아니한다

나는 사람에게 증거를 취하지 아니한다 (요5:34)

왜 그러실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으로 차오른 증인들의 뜨거운 사기에 싸늘한 찬물을 끼얹는 듯하여서 드는 의문이다. 이는 굳이 해석학적 마사지를 가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주님은 사람의 증거를 취하지 않으신다. 이는 서글픈 실상이긴 하나, 그 실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깊은 배려 및 위로와의 절묘한 입맞춤도 확인되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사람의 모든 행위를 모두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이 알고자 하는 극거시나 극미시 세계를 원하는 정도만큼 아는 기관으로 눈과 귀를 지으시지 않으셨고 관찰과 청력에 근거해서 진리에 이르도록 사람의 지각을 조성하신 것도 아니다. 당연히 사실들을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태도를 취하는 회의주의 역사는 인류사의 길이만큼 장구할 수밖에 없었겠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오관은 물론이고 사람의 이성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며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번역이요 해석이란 사실에 의문의 갸우뚱 수준을 넘어 거부할 수 없는 보편적 수긍의 고개를 떨구게 만든다. 극미시 세계는 알고자 하는 대상이 너무도 작고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방법은 이런 극소성에 비해 비대하여 대상에게 접근하는 순간 그것에 영향을 주는 방법론적 한계에 봉착했다. 극거시 세계에 대해서도 (비록 관찰의 천문학적 방법론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수억광년 이전의 과거를 지금 확인하는 셈이어서 무지의 두텁고 단단한 껍질은 좀처럼 벗겨지질 않는다.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도 사실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다는 방법론적 회의가 급기야 하나님의 존재와 진리의 객관적 인식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가 하나님의 존재와 진리를 폐하지는 못한다. 애초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과 진리는 교회나 사람이 확증하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에 담으신 주먹 사이즈의 말랑하고 뒤틀린 이성을 기독교 진리의 판관으로 임명하신 적이 없으시다. 성경은 자체의 진리를 스스로 증거하고, 성경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성경의 진정성을 증거한다. 당연히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손에 맡겨지지 않았고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한계와 변덕스런 본성의 멱살을 거머쥐며 성경을 인간적인 오류와 무지의 거적때기 산물이라 간주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 시대인가. 주께서 사람에게 증거를 취하지 않으시는 게 얼마나 큰 지혜이고 위로인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증거하는 증인의 과분한 소환장을 받은 것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지 모른다. 진리는 실패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맡겨지지 않아서다. 이렇게 말하면, 내 일이 아니니까 그럼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삐딱한 짝다리 자세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의 일환으로 인간의 본성적인 반응일 수 있겠다.

그러나 영광스런 증인의 소명을 받았다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가감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태도가 비록 우리의 죄악된 본성에는 위배되는 것이지만 그게 마땅히 취해야 할 우리의 합당한 태도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큰 은혜로 진리를 증거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고 해서 그게 마치 내게서 나온 것인 것처럼 그래서 나의 증거로 주님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설익은 자긍심도 합당하지 않다. 목회자가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부르심 자체가 이미 영광이고 감사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에게 증거를 취하지 않으신다. 하늘의 아버지와 성령과 그가 행하신 일 자체가 그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증인의 삶에 게을러도 된다는 태만의 면죄부를 챙긴다면 우리의 죄성에 손을 들어주는 셈이리라.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증인으로 부르셨다. 도와 달라는 게 아니다. 영광과 은혜로의 초청이다. 당연히 생명이 닳도록 주를 증거하는 삶의 동기는 도무지 합당하지 않은 과분한 영광과 은혜에 대한 감사여야 하는 거다. 사람에게 증거를 취하시지 않는 주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실상과 영광을 동시에 보여주고 계신다.

2013년 1월 24일 목요일

의로우신 하나님

1) 아담 이후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2)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는다.
존재가 행위에 우선하기 때문에 전자가 더 끌린다.

1)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행하시는 일마다 의롭다.
2)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의로우신 분이시다.
동일한 맥락에서 전자의 진술을 더 선호한다. 

1)번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그가 행하시는 일의 의로움을 가늠하는 기준이 
하나님 밖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2)번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하나님 밖에서의 어떤 기준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판정하고 그런 판단을 따라 하나님도 의롭다는 평가에 도달하는
다소 무례한 사유의 흐름이 포착된다.

하나님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나 기준이 없다는 차원에서
나는 하나님 자신과 그의 행하시는 섭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신적인 속성의 의로움을 전제로 섭리의 의로움을 이해한다.

지구촌 전역에서 전쟁과 폭풍과 쓰나미와 지진과 독재 등으로
중다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고통에 시달렸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성의 필름이 끊어지는 듯한 비극들이 마치 하나님의 부재를 공포하고
사람들도 신존재를 향한 뿌연 동경마저 깔끔하게 지우고픈 일들이 태산이다.

허나 아무리 슬프고 안타까운 일들이 지구촌을 뒤덮어도
그런 일들을 근거로 하나님의 의로운 속성을 판단하진 않으려 한다.
그런 섭리가 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의로움을 근거로
의미의 실타레를 풀어가는 이해의 수순을 고수하려 한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움은 무엇에 의해서도 폐하여질 수 없어서다.
비록 세상에는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답답한 지적 빈곤을 
창조주의 신적인 속성에 안다리를 거는 방식으로 풀어서는 안되겠다.

그러니 나는 믿기 위해서 이해하지 않고 (intellego ut credam)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 (credo ut intelligam) 입장에 서 있는 셈이다.

악의 문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악(malum)도 창조한다 (사45:7)

이는 궤변의 달인들이 하나님을 악의 출처 내지는 악의 저자로 떳떳하게 규정하는 성경적 근거로 입맛을 다지는 구절이다. 악의 문제는 젊은 어거스틴 발걸음을 키케로의 충동과 마니교의 이원론적 늪으로 빠져 들게 했던 주제기도 하다. 허나 마니교의 이원론은 악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주께로 돌아와 어두움이 어떤 실체가 아니라 빛의 결핍이듯 악도 어떤 실체(substantia)가 아니라 선의 결핍(provatio boni)이란 개념에 도달한다. 이는 유희용 관념이 아니라 현실 설명력이 너무나도 높은 관찰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경우, 사람들은 그를 선의 결핍이란 소극적인 이미지로 이해하지 않고 적극적인 악의 원흉으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지나치게 높이는 해석이다. 오히려 히틀러와 같은 인물조차 '선'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큰 것이며 '선의 결핍'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인으로 봄이 훨씬 실상에 가깝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죄나 악의 근원이나 기원과 직결된 본문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악'이 선이 아니라 '평안'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대조되고 있어서다. 여기서의 '악'을 고난이나 전쟁이나 어떤 고통스런 내용들을 일컫는 것으로 간주하며, 칼빈은 당시 통용되던 구분(vulgaris distinctio)을 따라 하나님을 죄의 저자가 아니라 형벌의 저자(autorem non culpae sed poenae)라고 하였다. 지혜자의 기록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라는 맥락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지으셨고 모든 것들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시되 악인조차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다. 죄악을 저지르는 것 자체가 이미 형벌의 성격이 있다는 로마서의 문맥도 고려해 볼 일이고, 세상에서 죄의 출입이 이루어진 근원과 관련하여 한 사람의 불순종이 그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대목이다.

나는 악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성경의 보다 명백한 본문으로 애매하고 난해한 본문을 푸는 성경의 자기해석 원리를 선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행하심을 그의 성품에 근거해서 이해하는 순서도 최대한 존중한다. 성경의 가장 명백한 선언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천지창조 이후에 하나님이 그 모든 만드신 것들을 신적인 안목으로 보시고 '심히 선하다'고 평가하신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선하신 분에게서 선한 것들이 나오는 건 지극히 합당하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도 하나님은 정직하게 지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문맥에서 일어나는 불행과 고통과 아픔과 눈물과 절망과 슬픔과 고독과 범죄와 재앙과 같은 악들이 하나님의 섭리 바깥에서 벌어지는 우발적인 사건들이 아님도 분명하다. 스스로를 부인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불변성에 근거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선하심은 시간 속에서 변경되지 않는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경의 분명한 사실들에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죄나 악의 저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할 수 있겠다. 오히려 심술궂은 악의 저자가 아니라 인간의 악조차 선으로 바꾸시는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다. 악조차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쓰시는 이유는 '정녕 죽을 것이라'는 즉각적인 진멸을 접으시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서 비롯된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게 된다'는 사실도 아시지만 길이 참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본 후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는 전도자의 고백이 심히 정직하게 들리는 아침이다. 

2013년 1월 23일 수요일

말스덴의 에드워드 강의

오늘은 교회에서 조지 마스덴 교수님의 특강이 있었다. 주제는 에드워드 신학과 순종에 대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신학은 우주와 인간과 인간 개개인의 관계성과 더불어 시작이 되었단다. 특별히 아름다운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그 위엄과 영광에 감격한 것이 결정적인 단초란다. 에드워드 시대의 화두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느냐란 질문이다.

천지와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도록 계시된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감격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단다. 만물에 숨을 멎게 할 정도의 설명할 수 없도록 편만한 하나님의 미(beauty)를 보고도 주체할 수 없는 경건의 열정(religious affections)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의심해야 된단다. 순종은 만물에 펼쳐진 하나님의 질서와 영광의 지극한 미에 동참하는 것이며 당연히 불순종은 그것을 뒤틀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란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만물이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보인 그것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사랑의 미로에 열정적인 적극성을 가지고 뛰어들게 되는 것이 순종의 의미란다. 명령과 준행의 기계적인 만남이 아니라는 거다. 오늘은 강의 때문인지 평소보다 말쑥해 보이셨다. 깔끔한 곤색 V자 세터와 덥수룩한 흰 수염이 만드는 특이한 보색대비 효과까지 겹쳐 노학자의 포스도 물씬 풍겼다. 은혜로운 설교도 듣고 학문적인 특강도 듣는 서번트 교회...^^

Novum testamentum 1633

제목은 라틴어 신약인데 실상은 우리의 출판 명문가 Elzevir 집안이 1633년에 출간한 헬라어 신약이다. 서문에는 다른 어떤 판본보다 정확하게(accurarius) 기록했기 때문에 어떠한 간과나 결함도 가미하지 않았단다. '이리하여 현재 모든 자들에 의해 수용되고(receptum) 변경이나 부패가 가해진 어떠한 것도 가미되지 않은 텍스트(textum)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1633년 헬라어 판본을 '공인본(Textus receptus)'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이라 주장한다. 이전 용례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현재로선 정설이라 하겠다. 여튼 무진장 귀중한 사본인데 역쉬 우리의 구글이 긁었다. 허나 아래 사진에도 보이듯이 흉물스런 알바의 핑크빛 고무장갑 손가락이 마구마구 등장한다. 가끔씩은 손바닥 전체가 나오기도...ㅡ.ㅡ 게다가 페이지가 역순이다. 이렇게 귀한 문헌이 저렇게 홀대를 당해다니...

에효~~ 그래도 공짜잖아. 덮어주자.

Novum Testamentum (1633)

마그데버그의 세기들

Centuriae Magdeburgenses Seu Historia Ecclesiastica Novi Testamenti (1559-1574) 

기독교 교회사의 본격적인 출범을 알리는 문헌이다. 루터주의 신학자 마띠아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Matthias Flacius Illyricus) 착상으로 기획된 이 문헌은 요하네스 비간트(Johannes Wigand)의 손에서 완성된다. 무려 1500년의 기독교 역사를 다루었다. 이 작업에 뛰어든 인물들은 모두 멜랑톤의 학문연구 방식을 배웠으며 당연히 진술과 얼개에 있어서 멜랑톤의 손떼가 짙게 묻었다. 이 문헌의 핵심은 진리의 도도한 줄기와 흐름은 영속적인 동의 속에서 교회사를 관통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당연히 개신교의 가르침은 새롭거나 조작된 것이 아니라 깊은 고대성을 가졌으며 참되다고 주장한다.

루터 사후의 반카톨릭 논쟁은 교리적 성격을 상실하고 불똥은 역사로 튀었다. 로마 카톨릭적 역사기술 방식을 거부한 플라키우스는 먼저 교황주의 이단성을 입증하는 믿음의 선배들 목록(Catalogus)을 출간한다. 그리고 [마그데부르크 교회사]를 기획한 것이다. 당연히 온건한 멜랑톤의 입장에 예리한 비수를 던진 일리리쿠스는 엄격한 루터주의 정신을 이 문헌에 가미했다. 그러나 이 문헌의 합본이 만들어질 1624년에는 루드비히 루키우스(Ludwig Lucius)가 개혁주의 관점에 입각하여 텍스트에 다양한 수정을 가하였다. 세번째 판본 출현은 1757-1765의 일이었다.

문제는 1권과 2권은 구할 수 없고 3권도 두번째 부분만 그것도 1763년판만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쉬웁따...ㅡ.ㅡ 3권으로 된 1624판본 가지신 분이나 찾으신 분 재보해 주시라...부탁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도

그러므로 무엇이든 사람에게 행함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모든 것들을 행하라 (마7:12)

왜? 이 사랑의 황금률이 율법이요 선지자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율법과 선지자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다른 버전의 강령이 소개되고 있는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계명이다. 하여 사랑의 황금률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계명의 보다 구체화된 설명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다만 '이웃'이 '사람들'로, '네 몸과 같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사랑하라'는 '행하라'로 표현상의 미세한 변화가 있을 뿐 요지는 동일하다.

즉 타인이 나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내용과 방식대로 모든 것들을 타인에게 해 주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나'라는 인간적인 기준에 맞추어진 사랑처럼 보여 각자의 주관적인 사랑에 성경적 면죄부를 발부하는 듯하여 뭔가 낯설다는 갸우뚱 인상을 제공할지 모르겠다. 이를 테면, 강하고 풍요롭고 독립적인 사람들은 타인에게 바라는 게 없을 수도 있고 당연히 타인에게 뭔가를 해 주어야 하는지도 모를 수 있고 아예 타인과의 소통 자체가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서다. 가학적인 사람의 경우에는 더더욱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사랑이 각자의 기호에 의존하고 있다면 '사랑'이란 명분으로 빚어질 무질서와 혼돈이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도하신 본문의 뜻은 사랑을 개인의 검증되지 않은 기호가 발산되는 출구로 여기자는 게 아니다. 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문맥의 협조가 필요하다. 본문에 선행하는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시다.' 이 구절에서 자녀의 구하는 자발성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좋은 것을 주시는데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시기에 '좋은 것'을 주신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을 풀어보면, 수혜자 편에서의 자율적인 기호도 존중해야 하면서, 주어지는 것의 상태도 하나님의 신적인 안목으로 보기에 좋아야 한다는 사실도 고려하며 '타인이 내게 해 주기를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타인에게 해 주라'는 의미이다.

내가 타인에게 해 주기를 기대하는 대로 타인에게 해 주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과 기호에 더 정통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실제로 내 기호여야 한다는 생각, 득하였다! ㅋㅋ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하나님이 사랑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요일4:8)

사랑은 언어의 사용적인 성격이 그대로 발휘되어 그 의미가 사람들의 머릿수 만큼이나 다양해서, 사랑의 진위와 유무를 확인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사랑만 그러한 게 아니다. 원래부터 이 땅에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기준이란 게 도무지 존재한 적이 없었고 때때로 독단과 대체로 합의가 있었을 뿐이다. 기준의 부재는 언제나 혼돈의 온상이다. 그 혼돈은 각자의 소견에 옳은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제 길을 걸어가면 그게 익숙해져 그만 질서로 둔갑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사랑도 예외가 아니어서 사람들은 사랑의 개념과 대상과 방법을 자신이 정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들 정한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도록 중다한 사랑의 현상들로 터져버릴 지경이다.

본문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아가페'란 말로 서술한다. 여기서는 사랑이 어떤 기능이나 역할이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나님 이외에 아가페의 대명사 혹은 사랑과 동격으로 불리워질 만한 어떤 피조물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랑의 근원과 본질은 하나님 자신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랑'이란 단어의 본래적인 의미와 기준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문장은 'What is love?'란다. 가장 흔하고 목마른 것인데도 가장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고 모르는 게 바로 사랑이란 사실의 작은 증거겠다. 어쩌면 사랑의 비밀이 하나님께 눈길을 돌리지 않고서는 알려지지 않도록 주께서 의도하신 게 아닌가를 유추해 보게 된다.

사랑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랑이다. '사랑은 무엇이다,' 이런 게 통상적인 답변의 양태일 것이지만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ὁ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는 그 사랑의 의미가 표상되는 방식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함'이라는 진술이 이어진다. '하나님이 사랑'이란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풀어지며, 동시에 뒤집어서 생각하면 하나님 사랑의 실상이요 유일한 표현형인 그리스도 예수를 임의의 사사로운 방식이 아니라 오직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이렇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알려지신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소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요한은 단언한다. 내가 원하는 대상을 고르고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amor sui)'의 무의식적 투사일 뿐이며 그걸로는 하나님 지식을 취득하지 못한다. 주께서 명시해 주셨듯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란 사랑의 원리가 배제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빙자한 거래나 투자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리대로 사랑하지 않고서도 획득한 하나님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는 무관한 이성의 분비물일 뿐이다.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성경 전체가 증언하고 가르치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했다. 사랑 이외에 하나님을 알게 할 다른 방법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칼과 창으로 복음화를 시도했던 과거의 난폭했던 오류로 인해 역사는 긴 고통의 댓가를 지불해야 했고 지금도 그 후유증에 여러 모양으로 시달리고 있다. 그런 오류들이 이단 발생사와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세월의 이맛살을 오랫동안 찌푸리게 만들었다. 복음을 알고 복음을 전하는 유일한 방식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체요 참 형상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유일한 새 계명으로 '사랑'을 명하신 것은 그것만이 하나님을 알고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에게 전하라는 말씀이 실현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법 밖에서는 하나님을 알지도 전하지도 못한다. 기적적, 지식적, 일시적 신앙의 달콤한 유혹과 해악에 대해서는 이미 어거스틴 교부가 믿음의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아픈 경험담을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다. 이빨이 황금으로 거듭나고 죽은 자가 무덤에서 뼈다귀를 일으켜 아침마다 '굿모닝' 할지라도 복음의 정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가리기 십상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다.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은혜의 충만 속에서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10)

예수님의 말씀이다. 율법의 완성이라 할 사랑에 도달하는 원리가 조건문 형태로 제시된 구절이다. 요한복음 15장을 비롯하여 성경의 상당한 지면이 이런 조건문 계명으로 채워져 있다. 당연히 묵상의 시간마다 순종과 보상, 불응과 형벌 구조가 의식으로 전이되고 그 전이는 해석학의 골격과 삶의 준거틀로 굳어지는 단계까지 서서히 진행된다. 말씀과 동행하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유형을 취한다는 것에 이의가 없다. 이는 분명 주님께서 명하신 것이며 기뻐하실 명령의 결과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율법적 성과주의 불청객의 출입을 주님께서 허하시는 듯한 오해가 불식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삶에 치명적인 왜곡이 빚어질 수 있겠다는 긴장은 필요하다. 

요한복음 15장은 성화의 부실이 구원의 취소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의 근거로 거론되는 경우도 있으나, 주로 구원보다 성화의 열매를 주목하는 본문으로 이해된다. 여튼 본문을 펼치는 우리의 머리에는 구원의 무조건적 은혜와 성화의 조건적인 성취라는 개념이 곧장 투입된다. 그리고 대체로 15장은 성화의 조건적인 성취 개념의 정당성에 예수님의 최종적인 권위가 실린 종지부를 찍는 텍스트로 채택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 한 소절이 즐비한 조건문들 틈 사이에서 발견된다.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일단 구원의 출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택에 있단다. 그리고 정하여진 구원의 선택이 세상 끝날까지 폐하여질 수 없다는 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의 준엄한 약속이니, 하나님께 속한 구원을 인간적인 판단의 입술로는 왈가불가 마시라.

그리고 16절 후반부는 성화와 연결된 표현으로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을 항상 있게 하여'가 이어진다. 우리에게 맺어지는 과실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되는 형식을 정하시고 그 과실이 실제로 우리를 통해 맺어지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며, 그 과실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란 사실이 고스란히 계시된 대목이다. 이런 문맥은 이미 요한복음 1장에 요약되어 나타난다.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권세를 누리는 삶이라는 내용은 '믿는다'는 조건에서 흘러나온 결과가 아니라, '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로 난 것'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한복음 이해의 결정적인 열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그 근원으로 두었다는 사실이다. 믿음과 구원과 성화 구절들이 단독으로 언급되는 경우에도 이 사실에 입각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 여부가 전면에 부각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 사실이 생략되면, 시공간 속에서 발생하고 등장하는 여러 부수적인 2차 원인들이 과도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궁극적인 근원에 돌려야 할 영광에 불법적인 군침을 흘리며 가당치도 않은 영광 탈취전을 벌일 가능성이 짙어진다. 내가 믿었고 내가 순종했고 내가 노력하고 땀흘린 결과를 내가 마땅히 취한다는 자기 중심적인 맥락에서 비록 입술은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일 수 있겠으나 우리의 중심에는 주님께 그런 입술의 표현형 정도만 떼어주고 나머지 영광은 자기 몫으로 챙기는 일들이 마치 적법한 것처럼 뻐젓이 벌어진다. 소위 성공한 목회자의 모습에서 이런 증상이 보다 심각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도 동일하다. 심지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분들도 의외로 그런 마인드의 족쇄에서 자유롭지 않다. 예수님의 계명을 내가 지켰다는 가시적 원인이 우리의 의식을 장악하면 아무리 입술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도 의식의 저변에선 그 영광을 탈취하는 틀 속에서 연출되는 그런 체면치레 차원의 영광 돌리기일 뿐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주님의 약속이다. 순종과 보상, 불응과 형벌이란 구조를 지닌 약속이긴 하지만 주님께서 택하시고 이루시는 선행적인 은혜의 충만 속에서의 조건형 계명이란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겠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도 감사하고 그 일에 내가 주체가 된 형식을 취하면서 여전히 친히 이루신 것도 감사하다.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계시 의존적인 사색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욥38:36)

사태의 본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유의 틀은 변화, 운동, 혹은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을 분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중적 인과율에 주로 의존한다. 이는 모든 사물과 사태에는 발생을 결정하는 형식적 원인(causa formalis), 재료가 되는 질료적 원인(causa materialis), 결과를 야기하는 힘으로서 유효적 원인(causa efficiens), 그리고 목적을 의미하는 궁극적 원인(causa finalis)이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도식이다. 어떤 지식이 객관성과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중적 원인은 해명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성경의 인문학적 연구는 주로 사중적 인과율이 충족되는 선까지 추구한다. 이를 위해 육하원칙, 무게, 질량, 부피, 압력, 색깔, 촉감, 밝기, 온도, 위치, 속도, 시공간적 인접성 등을 꼼꼼하게 살핀다. 이러한 단위들과 층위들의 촘촘한 그물망에 걸러진 지각의 건데기를 근거로 추론에 들어가고 구성과 재구성을 거듭한다. 물론 지각 자체가 사물과 사태의 순수한 내용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이미 구성적인 속성이 내재되어 있어 객관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태생적 한계를 가졌다는 사실도 지적할 수 있겠다. 영혼과 의지의 방향 자체가 이미 객관성 상실의 원흉이란 지적은 더욱 기분 구겨질 일이겠다.

인간이 소유주로 간주되고 모두가 그걸 공감하는 가슴 속의 지혜와 마음 속의 총명은 사중적 인과율을 마르고 닳도록 적용해도 그 출처가 벗겨지지 않을 대표적인 사례 되시겠다. 우리가 지혜와 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듯한 문제제기 자체가 우리에겐 낯설고 거북하다. 우리 자신보다 우선하는 지혜와 총명의 근원이 있다면, 보이지도 않고 인과의 지문이 전혀 채취되지 않는 무형, 무취, 무색, 무감의 세계이며 아무리 날카로운 지각의 촉수를 뻗어도 접지할 수 없을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각을 나노(nano)의 세계보다 정밀한 피코(pico)와 펨토(femto)의 세계를 넘어 아토(atto, 10의 마이너스 18승) 세계의 변화까지 읽어내는 수준까지 넓힌다고 할지라도 그 영역은 여전히 이방인의 느낌에서 해어날 수 없는 지점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지금 지혜와 총명의 원인을 물으신다. 무수한 물음의 벡터처럼 서두에 제시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는 추궁이 전두엽에 말린 욥의 지성을 더욱 뒤틀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의 물음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는 스스로 내뱉은 고백의 실상을 절감했을 것이다. 욥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고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했다'는 백기를 들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지식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면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차는 참으로 천양지차 수준이다. 계시 의존적인 사색의 필요성과 탁월성이 또 다시 겸손을 추궁하는 아침이다.  

성경 해석학

어떤 분이 질문을 하셨어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과 도구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성경의 주어라는 사실은 성경 해석학의 등뼈와 같습니다. 고의든 망각이든 이 사실이 생략되면 아무리 성경의 무오성을 엄밀한 차원까지 고수했다 할지라도 성경은 고문자와 역사적 정보와 윤리적 처세술의 문헌적인 출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비록 인간의 머리에 적응된 것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계시라고 한다면 하나님에 의한 계시이며 하나님에 대한 계시이며 하나님을 위한 계시이기 때문에, 만약 지금 살아서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이 빠진다면 그 해석학은 인간 문맥에서 걸러지는 유한한 가치에만 매달리는 해석학적 퇴락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이는 제도권 속에서 신학의 전방위적 훈련을 받으신 분들도 때때로 놓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2. 성경의 중심에 하나님이 주어와 내용과 목적으로 계시다는 사실이 전제되면 그것에 상응하는 방법의 선별이 차순위가 될 것입니다. 저는 "부분과 전체의 선순환적 통합"이란 접근법을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 접하게 되는 부분들은 단어, 구절, 문장, 절, 장, 권, 구약, 신약 등일 것입니다. 시간에 있어서도 시간, 날, 월, 년, 시대, 규범적 계시사와 일반사 같은 부분들을 만납니다. 전체에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신구약 전체이며 하나님의 역사라 할 인류사 전체일 것입니다. 선순환적 통합이란 부분과 전체가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 유기적 관계성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분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에 만족의 환호성을 지르고는 더 깊은 뜻으로의 광범위한 탐구를 중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설정한 문맥의 규모에 충실하고 정직성을 기한 해석일 것이라는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른 분들은 신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교리의 단단한 뼈다귀만 씹으면서 성경의 오묘하고 세미한 디테일을  물렁물렁 하다며 가소롭게 여깁니다. 그런 분들은 방향과 속도만 있는 안타까운 자동차와 같습니다. 전문성 혹은 전공이란 이름으로 그런 부분이나 전체의 일방적인 해석학에 면죄부를 주는 제도적인 환경의 혁신도 문제지만 환경이 받쳐주지 않더라도 각자의 필요를 스스로 해소하는 노력이 개인별로 경주해야 할 때인 듯합니다.

3. 부분을 다루는 해석학적 수단들은 성경을 히브리어 헬라어로 부지런히 꼼꼼하게 반복해서 읽되 기존의 좋은 주석들을 대화 상대자로 곁에 두는 것입니다. 주석의 종류도 문법적 주석, 상황적 주석, 어원적 주석, 심리적 주석, 역사적 주석, 비평적 주석 등 대단히 많아 선별하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의 객관성 확보가 요구되는 경우에 참조하는 것이 좋을 듯하고 보다 주목할 신학적 주석으로 존 칼빈, 매튜 헨리, 존 길, (그리고 제네바 바이블) 등과 지금 계속해서 간행되고 있는 교부주석 시리즈와 종교개혁 주석 시리즈 등을 권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열심을 내자면, 교부들이 성경을 권별로 주석한 것들 중에 성경을 있는 그대로 가장 잘 보존한 주석들을 선별하고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에 저술된 탁월한 권별 주석들을 66권 엄선해서 필요에 따라 조언자로 두고 성경을 읽으시면 좋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제대로 건드리고 싶은 과젭니다.

4. 전체를 다루는 해석학적 도구들은 성경의 핵심 주제들을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모아서 한 구절의 의미가 다른 구절에 의해 제어되는 방식으로 분석하여 성경의 한 이오타도 가감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만큼 말하고 성경이 말했으면 간과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침묵의 경계는 함부로 범하지 않도록 체계적인 틀에 담아 성경의 통합적인 의미가 고스란히 존중되는 목적을 지향한 교의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교의학적 문헌들은 20세기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17세기 프란시스 튜레틴의 [변증신학 강요 (영역본)],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16세기 칼빈의 [기독교강요], 그리고 4-5세기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등이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신앙의 분기점을 마련한 문헌이기 때문에 21세기의 세기적 상대성을 극복하고 우리 시대의 과제도 인지하고 해소시킬 통찰력과 대안을 선사할 소중한 유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5.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말씀의 영원성과 보편성을 놓치면 안됩니다. 이는 청중과 관계된 것으로서, 말씀은 영원하며 세상 끝까지 이른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청중은 특정한 민족이나 지역이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한 구절을 해석할 때에 세상 모든 사람들의 귀를 의식하며 그 구절의 의미가 땅끝까지 이르도록 나아가 세상 끝날까지 이르도록 규모와 분량 면에서 임의적인 잣대로 제한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특수한 상황에 있는 특정한 개인들을 위한 적용의 구체성을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해석의 보편성과 적용의 구체성은 충돌이나 대립이 아니라 보완과 조화의 관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규명한 진리의 보편적 내용들은 과거라고 해서 불필요한 퇴물로 여기거나, 우리의 형제로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의 지체들과 무관한 해석에 천착하는 일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의식하는 해석의 규모는 우리의 지켜야 할 과젭니다.

6. 하루하루 쉬지 않고 말씀과 씨름하며 해석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말씀을 (가능하면 원문으로) 읽으면서 묵상하고 교의학적 주석적 문헌들을 참조하며 계속해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단순히 머리 속에서 무형의 해석으로 남는 것보다 언어의 옷을 구두와 문자로 입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죽을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꾸준히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조금씩... 자신의 해석에 어떤 단절적인 질적 비약을 기대하는 것은 정도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일들이 특별한 은총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요행의 부작용이 사소하지 않습니다. 해석의 진일보는 하루하루 성실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듯이 진리의 깨달음은 그에 걸맞은 속성대로 전인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설겆이도, 심부름도, 운동도, 봉사도, 호흡도, 존재도 해석의 도구로 요청되고 있습니다.

7. 진리의 깨달음과 전달은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는 겸손이 해석학적 독선의 결박을 느슨하게 만듭니다. 진리의 규모는 너무도 깊고 높고 넓고 길어 한 사람의 짧은 일대기로 쉽게 커버될 분량이 아닙니다. 땅의 시간이 종결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께 속하였고 인간에 대한 그 진리의 적응적인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한 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진리를 알았다고 해서 자랑할 수도 없고 분량과 차원에 있어서 다 알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당연히 뻗뻗한 목과 거만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건 가당치도 않으며 타인의 해석에 비판의 손가락을 거누고 정죄의 독설을 퍼붓는 것도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해석의 정통성은 인격과 태도와 언어와 행실로 계속해서 입증하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은 주먹질이 없어도 거짓과 오류의 어둠을 몰아내는 속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이 정도의 기본기만 존중해도 성경의 진리를 크게 훼손하는 일은 방지할 수 있을 듯합니다.

선지자의 눈과 선견자의 머리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 지리라 (사29:14)

지혜와 총명의 부재가 주께서 조치하신 형벌의 내용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원인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태도가 입술의 형식적인 존경이 전부였고 마음은 아득히 멀어졌기 때문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해서다. 백성의 마음이 멀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그들의 여호와 경외함이 사람의 계명으로 인한 가르침에 그 뿌리를 내려서다. 이는 단순히 말과 행실의 표리부동 문제도 아니고, 머리와 가슴의 따로국밥 상태를 꼬집은 것도 아니다. 행실의 경건도 화려하고 가슴의 종교적 온도도 뜨거울 수 있겠으나 그 뿌리가 인간의 가르침에 있다는 출처의 부실에 대한 지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가르침을 주신다. 이사야도 밝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당한 방법,' 때로는 몽둥이로 때로는 막대기로 당신의 백성을 '적당히 견책'하며 이끄신다. 진노의 막대기요 분한의 몽둥이로 쓰인 난폭한 앗수르와 교만한 바벨론이 대표적인 사례겠다. 정복과 항복의 거친 역사가 세계사의 상당한 지면을 채우고 있는 것도 이런 섭리사적 문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나운 광풍의 시대 끝자락에 지혜와 총명을 겸한 인물들을 세우셔서 고요한 호수의 평화를 이루시고 보다 깊은 가치에 대한 갈증을 일으키며 주님과의 깊은 질적 교제의 환경도 베푸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 형벌과 축복의 무수한 교차를 이끄신다.

그러나 인간적 가르침의 수단성을 목적과 영광의 종착지 개념으로 대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다. 사람은 두려움의 대상도 추종이나 숭배의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적당한 견책 차원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위적 환경은 지나가는 수단이다.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목적만 달성하고 지나가야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수단은 하나님의 쓰심을 입었다는 영광으로 이미 만족이고, 백성들은 그 수단을 장중에 붙드시고 임의로 쓰시는 하나님께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 수단이란 인과의 중턱에 머물면 그들의 하나님 존경과 경외가 아무리 뜨겁고 진실해도 입술의 분주한 형식일 뿐이라는 평가를 모면하긴 어렵다.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피조물에 한번도 양도하신 적이 없고 양도할 의사도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본질상 어울리는 않는다. 우리의 믿음이 사람들의 교훈에 정박해 있으면, 하나님은 지혜자의 지혜와 명철자의 총명을 가리시고 치우신다. 인간 의존적인 마음을 가지면 성경을 읽어도 '나는 무식하다' 고백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에게는 주께서 선지자의 눈을 감기시고 선견자의 머리를 덮으시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믿음의 거인들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것은 사람의 교훈이 목말라서 학구적 광기를 부리는 게 아니다. 주께서 때때로 선지자의 눈과 선견자의 머리를 여셔서 하나님의 교훈이 화려하게 꽃피운 시대를 목격하며 하나님의 도도한 견책의 역사를 더듬기 위해서다. 혹 지금은 가리워져 있으나 그 시대에는 보이셨을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 시대를 조명하기 위해서다.

지혜와 총명의 봉쇄가 이사야의 문맥에서 보면 분명 재앙이요 형벌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축복과 소망이 역동한다. 사람의 가르침에 뿌리를 둔 형식적인 경건의 득세와 창궐을 방치해 두시는 게 더 무서운 재앙이요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런 형벌과 재앙의 카드를 뽑았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과 주권적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에 무지와 우매의 캄캄한 어두움이 세상을 덮더라도 이를 지혜와 총명의 전적인 소멸로 보아서는 안되겠다. 살다가 보면 형광등이 꺼져 사방이 캄캄함에 뒤덮히는 때가 있다. 형광등의 수단성을 깨달으면 되겠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의 빛이 되신다는 사실의 후레쉬한 환기 차원에서 신적인 사랑의 숨결을 흡입하는 때라고 여기시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난 주변에 눈부신 형광등이 너무도 많아 어찌할 줄 모르겠다...거인들의 틈새에 낀 유쾌한 새우등 신새랄까...ㅋㅋ

2013년 1월 15일 화요일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창3:22)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시었다.
이에 사단은 뱀의 옷을 취하고 하와에게 다가와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반론을 개진했다.
사단은 불순종의 길을 앞서간 선배요
그런데도 죽지 않았다는 반론의 '산' 증인으로 그리한 것이었다.

당연히 사단이 하와의 대화 상대자로 서 있다는 것보다
더 확고한 증거와 설득력이 없었겠다.
불순종의 첫발을 내디뎌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호흡하며
대화하고 있는 사단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음의 시커먼 운명이 그 결과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여
그녀에겐 더 이상의 구차한 의심과 논박이 필요하지 않았다.
곧장 불순종에 굶주린 손을 뻗었고
모든 감각들의 경쾌한 만장일치 속에서 '죽음'의 실과를 취하였다.

그러나 죽지 않는다는 '사실'은 불순종의 소극적인 이유였을 뿐이다.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럼 먹어도 되겠네' 정도였을 것이지만
하와의 눈에 선악과는 그런 정도의 실과가 아니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보다 적극적인 결정적 이유가 있어서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어서 완전하고 절대적인 자유를 가지신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건
선악과 자체의 물리적인 당분이 제공하는 맛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사단이나 인간이나 이 맛에 한번 중독되면 해어나질 못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희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되었다고 하신다.
주께서 사단의 반론에 항복의 백기를 든 듯한 발언이라 당황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자존과는 무관한 언사다.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에 해당한다.
가인에게 하신 '죄의 소원이 네게 있다'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건 본성의 DNA처럼 본성적인 기호로 굳어졌다.
불순종은 법의 위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겠다는 소원의 발로였다.
선악의 기준과 판단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않겠다는
피조물의 발자욱이 찍혀서는 안되는 '신적 행보'의 일환으로 저질러진 일이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되게 해달라는 것은
창조 당시의 피조물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을 보이신 것이라 사료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는 게 제대로 사는 거다.
임의로 더하고 빼는 '하나님과 같은' 행실을 버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취하는 삶!
본성의 기호를 꺾고 하나님의 뜻 그대로를 내 뜻으로 삼는 삶 말이다.
놀랍게도 그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방식으로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베드로는 귀띔해 준다. 

2013년 1월 14일 월요일

빌퀴스의 I Dared to Call Him Father

한 무슬림 여인이 53세가 되던 해에 예수님 꿈을 꾸었다. 그런데 아버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단다. 알라에게 나아갔다. 그리고는 그 느낌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아버지라 부르기로 했다. 그 실체가 궁금하여 코란까지 펼쳐 주경야독 했단다. 하지만 뽀족한 해답을 찾지 못하여 성경에 이르렀다. 코란과 성경을 양손에 들고 깊은 기도에 들어갔다. '아버지, 어느 것이 당신의 메시지입니까?' 그 아버지는 '어느 것이 나를 아버지로 보여주고 있느냐?'는 반문을 던졌다는 이야기다.

성경은 그 자체로 진리됨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궁금하면 성경으로 돌아가면 된다. 교회의 교회다운 모습이 궁금하면 성경으로 돌아가면 된다. 생과 세상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는 성경이다. 이는 '너희에겐 모세가 있지 않느냐'는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일 것이다.

Bilquis Sheikh, I Dared to Call Him Father (Baker, 2003)

2012년도 생각의 편린들

웃기는 짓을 저질렀다.

2012년 1년동안 문자로 번역하여 블로그에 걸어 두었던 생각의 편린들을 하나의 PDF 파일로 만들었다. 물론 나에게는 주께서 허락하신 1년치의 시간이 남긴 의미 모음이다. 허나 퍼부으신 은혜의 분량에 비해 거둔 수확이 턱없는 흉작이라 적잖은 민망함을 무릎써야 했다. 부족해도 일상과 의식을 출입했던 생각과 의미의 면면들을 이렇게 매년마다 긁어 모아서 돌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만들었다. 사실 긁어서 모으는 시간이 아깝다는 압박 속에서 생산된 파일이다. 소장가치 없다는 불편한 진실도 압박을 한 몫 거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필요하신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궁색한 명분'과 최소한 나 자신에겐 성찰의 좋은 자료도 되겠다는 어거지 생각으로 끝까지 만들었다. 다시 읽어보니 예상했던 대로 여물지 못한 인격과 사상의 빈곤이 짙게 느껴진다. 그러나 꾸미거나 수정하지 않고 모자란 생각 그대로를 모으기만 했다. 2013년에는 성숙한 생각과 인격적 도약에 달려들지 않으면 안되도록 정신이 버쩍 들게 하는 자극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겠다 싶어서다.

파일의 장점이 두어가지 있다. 본문에 링크가 걸린 부분을 누지르면 연결된 사이트가 곧장 열린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공짜라는 거... ㅋㅋ  이 파일에는 별 생각들이 다 들어갔다. 하여 굳이 분류를 하자면, 잡동사니 에세이집 되겠다.

2012년도 생각의 편린들 (미시건 촌구석 남루한 개인 서재에서: 한병수, 2013)

2013년 1월 13일 일요일

예일대학 온라인 강좌

예일 대학에서 강의된 수십개의 과목들이 무료로 제공되는 사이트다. 들을만한 내용이 대단히 많다. 유학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영글었다. 예전에 누군가가 포스팅한 한국대학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각 분야에서 최고의 석학들이 제공하는 강의를 원하기만 하면 청취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에 대비해 한국의 학자들이 보다 연구에 전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예일대학 온라인 강좌 사이트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라 (고린도전서 15:26)

부활이 없다는 일부의 도발적인 주장에 흔들리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견고히 세우고 격려하는 문맥에서 지나가듯 언급된 구절이다. 본문에 따르면, 사망이 삼키운 바 되는 때는 맨 나중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거되지 않는 원수라는 뜻이기도 하다. 뒤집어서 보면, 지금은 사망의 위력이 왕성한 때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의 종노릇 멍에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사회에나 교회에나 멀쩡하게 살다가도 생계에 위협이 가해질 분위기가 조성되면 본성적 직관에 가까운 속도로 스스로를 검열하고 절제하며 몸을 움추리고 동태를 살핀다. 목숨이 달아나지 않을 생존의 틈새를 찾기 위해서다.

반면 믿음의 사람들은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투옥과 죽음의 투석과 톱질 및 짐승과 더불어 썩어가는 가죽옷 착용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한다. 세상적인 가치관의 지축을 뒤흔드는 이러한 용맹의 원인은 그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아서"다. 그 증거는 "더 좋은 부활'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서는 억울하고 사악한 참수형도 구차히 면하려고 하지 않았단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생명의 피를 쏟으며 마지막 호흡을 떠밀어 우리에게 내뱉은 한 마디의 증언은 '더 좋은 부활'이 있다는 거다.

바울은 부활의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그게 없으면 우리를 온 인류에서 가장 비참한 자(ἐλεεινότεροι πάντων ἀνθρώπων)로 만드는 게 부활이며, 다른 하나는 그 부활이 사망의 결박과 위협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죽음과 부활의 관계로 설명한 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 자랑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는 것이라고 '자랑'한다. 부활은 오늘의 고통을 인내하며 '나중에 잘 되겠지'란 보상심리 차원에서 마지못해 복용하는 진통제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부활은 우리의 자랑이다. 가장 비참한 듯한 인생을 살지만 가장 큰 영광의 핵심이기 때문이고, 죽음의 날카로운 사슬에 얽매여 종노릇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갇힌 인생의 해방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모든 원수들 중 맨 나중에 멸망으로 처리될 원수가 사망이라 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승리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무장은 부활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부활이 핵심이다. 그러나 부활의 삶 노른자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역설적인 어구로 진술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2013년 1월 11일 금요일

거짓과 정직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사도행전5:4)

거짓말의 사도적 기준은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크고작은 거짓이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이는 거짓의 실체가 인간의 지각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문맥 속에서 상황에 따라 은폐나 망각으로 상대화될 그런 것이 아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이름이 밥상의 찬꺼리로 씹히지만 않는다면, 법의 물리적인 제재만 가해지지 않는다면, 안도의 숨을 배출하는 거짓된 흉물들이 의외로 많다. 물론 나 자신도 자유롭지 않다.

인간의 합의된 기준치만 충족하여 양심에 흠집이 생기지만 않는다면, 정직의 끈을 훌러덩 풀어 버리는 판단의 배후에는 보다 은밀하고 음흉한 사단의 속샘이 개입되어 있다. 거짓의 주체도 거짓인 줄 모르는 경우이기 때문에 은밀하고 음흉한 거다. 이런 경우, 거짓이 지적되면 부끄러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이키는 겸손보다 양심의 기준을 앞세우며 주님과도 맞짱 뜨는 거만한 대립각 세우기에 들어가기 십상이다. '죄 없다고 하는 자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든다'는 말씀이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자신의 양심을 하나님의 기준과 대등한 수준으로 설정하고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진정성 대결로 돌입하는 *** 못가리는 무모함은 사단의 전유물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인간문맥 안에서 이루어진 가치의 합의로 하나님의 신적인 차원을 넘보는 일들은 눈길이 접지하는 곳마다 편만하다. 사단의 음흉한 미소로 뒤덮혔다. 삽비라와 아나니아 부부는 현대인이 엄두도 못낼 액수의 댓가성 없는 구제금을 결심하고 헌납했다. 그런데도 엎드러져 혼이 떠나갔다. 양심에 비추어 죄나 흠결이 없다는 떳떳함의 결과였다. 은밀한 거짓은 상식이나 양심의 헐렁한 그물망에 쉽게 걸러지지 않는 법이다.

정직은 하나님의 고유한 선물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량생산 가능한 제조물이 아니다. 거짓에 근성 수준으로 중독되어 본 사람들은 안다. 거짓은 인간의 손아귀에 쉬 놀아날 만큼 녹록한 상대가 아니다. 그런 상대로 여기는 건 거짓의 깊이와 복잡성을 몰라서다. 인간 자신이 의식과 생각과 말과 행실의 마지막 인자로 남아있는 이상 제거되지 않는다는 능구릉이 같은 거짓의 실체를 얕봐서다. 주님은 정직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인자 외에는 아무도 그분을 본 자가 없다신다.

주여, 우리에게 정직의 은총을 주옵소서. 이 땅을 정직으로 물들이게 하옵소서.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나는 누구인가?

객관식: 나는 누구인가?

1. We are what we eat
2. We are what we read
3. We are what we think
4. We are what we worship or love

1번의 사실성은 모두들 경험하는 바다. 사람은 먹는대로 된다. 이 문구는 다이어트 서적을 펼치면, 동서고금 막론하고 얼마든지 언제든지 발견된다.

2번, 독서는 생각의 휘발유다. 입으로 음식을 먹는다면 머리는 정보를 먹는다. 음식이 우리의 몸과 연합하듯 정보도 나와 연합한다. 과연 우리는 읽는대로 된다.

3번은 잠언이 변론한다.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독서도 많이해서 똑똑하고 언어적 배경도 화려한데, 여전히 가난한 사유에 인격의 목덜미가 잡힌 분들을 만난다. 물론 유유상종 경우일 수도 있겠다. 여튼 우리는 생각이다.

4번은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진실이다. 배가 경배의 대상이면 먹어도 비만이고, 생각의 지향점이 나 자신이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이고, 지적 탐욕이 독서의 커서라면 그 사람은 아무리 근사해도 교만 덩어리기 때문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생각이든 독서든 그 결과는 마음의 중심이 무엇을 경배하고 있느냐,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이 누구냐에 좌우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개인적인 바램은 4번이다. 어거스틴 사상처럼, 땅의 모든 것들은 사물이든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이든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다 기호(signa)로 분류해도 되겠다. 모두 궁극적인 '사물(res)'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기호 말이다. 기호가 종점이면 그 기호를 경배하는 사람이다. 먹는 것 자체를 좋아하고, 독서 그 자체를 좋아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면 탐식가, 독서가, 사색가는 되어도 여전히 기호의 잔치일 뿐이다. 그러나 지어진 만물이 분명히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 자신을 경배하면 그는 '하나님의 본성에의 참여자'가 된다.

그런 사람, 되고프다. 

초안제출

계획된 챕터 하나를 포기하고 학위논문 초안을 제출했다. 
교수님은 이를 두고 이제 '본격적인 스텝'을 밟았단다. 아흨!
이어질 첩첩산중 과정을 애둘러 암시하는 말이었다.
초안제출 이후 통과까지 할 게 너무 많다던 선배들의 말이
느닷없이 의식을 덥치더니 신경을 마구 후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단계 끝냈다는 안도감만 잠시 즐기련다~~~^^

중세의 책갈피

중세를 공부하고 있다. 대체적인 평가는 함흑기다.
하지만 역사에 절대적 '단색'은 존재한 적이 없다.
중요한 발견과 발전이 부패의 분량 못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주목하면 부패 '일색'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허나 놀랍게도 중세연구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부패와 타락이 바닥을 친 그 지점이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역사에 가장 강력하게 심어지는 기회는
불법이 공인되고 공의가 인진으로 변하는 때에 주어진다.

중세를 모르면 종교개혁 시대의 가치도 무색해 진다.
교회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는
인간이 어디까지 부패할 수 있는지와 동일하다.
어쩌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타락과 부패여서
인간의 죄성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둡다고 해서 관심의 고개를 돌리고 외면의 등을 보이는 건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건강하고 적극적인 자세는 못된다.
구속사든 일반사든,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악취가 진동해도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죄성을 관찰해야 한다.
이런 자세로 중세의 책갈피를 한장 한장 넘긴다.

2013년 1월 9일 수요일

바르트 한역 저술들

이상웅교수님의 글입니다.

1. 한글로 번역 소개된 바르트의 저술

『그리스도인의 생활』,(서울:사상계사,1954)
『교회와 예배』,(서울:사상계사,1955)
『바르트의 교의학 개요』,(서울:대한기독교서회,1956)
『로마서 소강해』,(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6)
『성서안의 새로운 세계』,복음주의신학총서1(서울:한국신학대학교,1964)
『은총의 선택/ 복음과 율법』,복음주의신학총서2(서울:한국신학대학교,1964)
『휴머니즘과 문화』,복음주의신학총서3(서울:한국신학대학교,1964)
『그리스도와 아담』,복음주의신학총서15(서울:한국신학대학교,1976)
『칼 바르트와의 대화』,(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7)- d. 갓세이 편집
『죽은자의 부활-고린도전서 15 연구』,복음주의신학총서22(서울:한국신학대학교,1979)
『설교학 원강』,(서울:전망사,1981),=『칼 바르트의 설교학』,(서울:한들,1999)
d. 갓세이(),『바르트 사상의 변화』,(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1)
『하나님, 교회, 예배』,(서울:기민사,1987)
『복음주의 신학 입문』,(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1989)
『의인과 성화』,복음주의신학총서33(서울:한국신학대학교,1990)
『공동체, 국가와 교회』,(서울:엠마오1992)
『말씀과 신학- 바르트 논문집i,(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5)
『교의학 개요 / 사도신경 해설』,(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7)
『로마서강해』,(서울:한들,1997)
『자연신학』,(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1997)-브룬너의 "자연과 은혜"/바르트의 "아니오" 합본 『마지막 증언들』,(서울:한들,1997)
『주의 기도 /사도신조』,(서울:다산글방,2000)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 이야기』,(서울:한들,199 )

2. 한글로 소개된 바르트 관련 서적들

>g. c. 버카우어(조동진),『칼 빨트의 신학』,(서울:청문사,1962)-최근 재판/네덜란드에서는 1954년에, 영역본은 1956년에 간행되었으며, 바르트는 본서에 대하여서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격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윤성범,『칼 바르트』,(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8)-바르트의 유일한 한국인 저자의 작품으로 스승 바르트에게 헌증한 작품은 스승이 죽기 불과 전에 출간되었다.
>한국바르트학회,『바르트신학연구-바르트기념논문집』,(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0)-바르트 사후 바르트 추모 논문집으로 만든 것이다.
>오토 베버(김광식),『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6)
> 쿠피쉬(박종화),『칼 바르트』,(서울:한국신학연구소,1977)
>김영한,『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2)
>토마스 오든(이기춘),『바르트 신학과 로저스 심리학의 대화』,(서울:전망사,1983)
>김균진,『헤겔과 바르트』,(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3)
>박순경,『하나님 나라와 민족의 미래』,(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4), 27-229
>d. l. 뮬러(이형기),『칼 바르트의 신학사상』,(서울:양서각,1986)
>s. w. 사익스(이형기),『칼 바르트의 신학 방법론』,(서울:목양사,1986)
>백철현,『은총의선택-「교회 교의학」ii-2 중심으로 바르트의 선택론 연구』,(서울:기민사,1986)-저자가 한신대학교 th.m.논문으로 제출한
>에버하르트 윙엘(백철현),『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속에 있다』,(서울:기민사,1988)
>이신건,『칼 바르트의 교회론』,(서울:성광문화사,1989)-저자가 1987 튀빙겐 대학 신학부에 제출한 박사논문을 번역한 =(서울:한들,2000)
>김애영,『칼 바르트 신학의 정치·사회적 해석-f. w. 마르쿠바르트를 중심으로-,(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1)-현재 한신대학교 신학교에서 여성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의 이화여대 박사논문을 출판한 것이다. 지도교수는 박순경 교수였다.
>울리히 단네만(이신건),『칼 바르트의 정치신학』,(서울:한국신학연구소,1991)
>박봉랑,『신학의 해방』,(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1)- 속에는 저자가 1958년에 하바드 대학교에 제출했던 학위논문이 번역 수록되어 있고, 바르트에 대한 소개글도 실려 있다.
>조르쥬 까잘리(최영),『칼 바르트의 생애와 사상』,(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3)
>제프리 브로밀리(신옥수),『칼 바르트 신학 개론』,(서울:크리스찬다이제스트,1994)
>t. f. 토랜스(최영),『칼 바르트-성서적 복음주의적인 신학자』,(서울:한들,1997) >전성용,『칼 바르트의 성령론적 세례론』,(서울:한들,1999)
>c. 밴틸(김해연),『신현대주의』,(서울:성광문화사,199 )
>김재진,『칼 바르트 신학의 해부』,(서울:한들,199 )
>한종희,『정통주의 신학에서 바르트 신학』,(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