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30일 목요일

충직한 책망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잠27:6). 이 구절은 공개적인 책망이 숨은 사랑보다 났다는 말의 단서이다. 친구의 잘못을 침묵으로 덮고 지나가는 식의 어두운 사랑은 올바르지 않다. 비록 아프지만 공개적인 책망이 아름답고 지혜롭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친구"라는 맥락이 중요하다. 친구는 서로를 위하는 관계성을 일컫는다. 이러한 관계성을 고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정죄하고 파괴하고 부끄럽게 만들려는 책망은 지혜자의 권면과 무관하다. 책망은 충직해야 한다. 도움과 안위와 회복과 세움을 지향하며 아프도록 꼬집는 것이 친구의 충직한 책망이다. 가정이나 교회나 학교나 직장이나 정치계나 상대방이 무너져야 자신의 존립이 확보되는 듯한 파괴적 책망이 난무함을 본다. 책망의 입술을 열고자 하는 사람은 함께 아파할 친구의 심정을 구비하는 것이 우선이다. 

2016년 6월 29일 수요일

입맞춤의 균형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을 맞추었다 (시85:10). 하나님 안에서는 인애와 진리가 절친이고 의와 화평이 연인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을 따라 하나님의 섭리도 양상은 동일하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이 공존한다. 홍해의 갈라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평의 입구였고 애굽 백성에게 공의의 출구였다. 섭리의 절정인 말씀의 성육신도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가리킨다. 즉 믿는 자에게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인 동시에 거부하는 자에게는 거치는 반석이다. 하나의 대상일 때에도 그러한 공존이 있다. 아들에 대한 징계의 경우, 아버지의 사랑과 의가 공존한다. 판단이나 헤아림의 경우에도 우리는 이러한 입맞춤을 고려해야 한다. 비난은 사랑이 없는 공의의 과잉이고 음비는 공의가 없는 사랑의 과잉이다. 무엇을 하든지 균형이 필요하다. 균형이 구비되지 않았다면 침묵이 상책이고 무위가 최선이다.

2016년 6월 28일 화요일

바른 관계의 정수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요일1:7). 진정한 사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림이고 그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없어지고 사람들 사이의 사귐도 온전함을 상실한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동거하는 사귐을 원한다면,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를 원한다면, 빛 가운데 거하여야 한다. 어두움 가운데서 이루어진 관계는 진정한 사귐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과 빛은 분리될 수 없는 사귐의 토대이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주님도 거기 계신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사귐을 의미한다. 어떠한 관계이든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원인들 뒷조사에 들어가기 이전에 내가 빛 가운데에 거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게 상책이다. 

목격자적 증인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1). 이처럼 사도들은 증인의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생생한 목격자적 증언을 신뢰한다. 그러나 사도들의 글을 신뢰하는 것에 과도히 만족하면 안되겠다.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우리도 그런 증인의 자리로 나아올 것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천지에 충만한 분이시다. 온 세상의 그 어떠한 미물도 그분의 충만한 영광을 침묵하지 못한다는 칼빈의 관찰은 정확하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목격해야 한다. 그분의 영광, 그분의 자비, 그분의 긍휼, 그분의 참으심, 그분의 통치, 그분의 주권, 그분의 섭리, 그분의 사랑, 그분의 공의, 그분의 심판, 그분의 진노, 그분의 지혜, 그분의 능력을 보고 만지고 들어서 증언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지각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2016년 6월 23일 목요일

영광의 거부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시115:1). 이 시인은 참으로 희한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광의 보다 큰 조각을 챙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는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오는 것을 극구 거부하며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라고 간구한다. 위대한 경건이다. 시인은 아무리 놀라운 업적을 이루고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고 할지라도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관찰하고 인정하는 경건의 사람이다. 사람의 눈에는 내 땀방울이 묻은 성취처럼 보여서 자칫 뻣뻣한 목을 세우며 자만의 폼을 잡기 십상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안다.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근거가 제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선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님이 이루신 일들이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사실의 인정이다. 그래서 영광은 그에게만 돌려져야 마땅하다. 

2016년 6월 22일 수요일

사랑을 사랑하라

인자를 사랑하며 (미6:8). 이 구절의 탁월한 해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하는 책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사랑을 사랑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cum diligimus caritatem, aliquid diligentem diligimus). 어떤 대상을 사랑하면 그것은 개인의 기호이고 특정한 대상만을 향한 제한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 자체를 사랑하면 그것은 성향이고 체질이며 특정한 대상에게 국한되지 않는 무제한적 사랑이다. 미가 선지자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라고 한다. 즉 인자를 사랑함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요구하신 선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체질과 성향에 자리잡은 사랑의 사람이고 싶다. 판단이나 정죄나 대결이나 증오나 격분이나 보복의 묶음에서 놓여 그런 사랑에 결박되고 싶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 사랑에 뿌리가 박힌 책망을 하고 분석을 하고 지적을 하고 징계를 하는 선행자요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람이고 싶다. 

2016년 6월 21일 화요일

우리의 실상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않으시니 (시103:10). 태초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필경 죽음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 때문에 그들은 즉각적인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지금도 이러한 긍휼은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생존은 하나님의 긍휼을 증거하는 입술이다.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억울해도, 아무리 답답해도, 아무리 공허해도, 아무리 참담해도, 아무리 비참해도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가늠된 죄의 심각한 무게와 우리의 여전한 생존을 생각하면 그래도 감사가 쏟아지고 하나님의 긍휼을 노래하게 된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확인되는 것이 실상이다. 주변과 비교하면 그 실상은 가려지고 망각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바로 우리의 실상이다. 이는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항상 감사해야 하는 근거이다.

"하루"라는 택배 (펌글)

하루.jpg
아침에 눈을 뜨니
밤새 배달된 귀한 택배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수 신; 나
발 신; 천국우체국
내용물; 하루

‘하루’라!
상자를 여니 하루 분량의 시간과,
각자에 맞는 달란트와 움직여 섬길 수 있는 건강이 들어 있었다.

신기한 것은 매일 아침 배달되어 지는 이 선물들은
벳세다 광야의 오병이어 바구니처럼
축복과 감사로 쓰면 자꾸만 내용물이 생겨나고
가나안 혼인잔치의 물 항아리처럼
순종과 섬김으로 사용하면 더 좋은 재질로 변한다는 것!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선물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다른 이들이 상상도 못한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선물을 시들시들 말려버린다.
선물이 선물로 보이지 않고 누가 보낸 것인 지에도 관심이 없다.
매일 받으니 시들해한다.
매일 만나를 먹으며 질려버렸던 광야의 사람들처럼
인생이란 날만큼 많이 배달된 이 선물을
하루도 감사와 기쁨으로 꽃피우지 못하고
불만과 짜증과 원망과 한숨으로 썩혀버린다.

똑같은 선물을 가지고 어떤 이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누리고
어떤 이는 감옥을 만들어 스스로 갇혀 지난다.
어떤 이는 천국의 분점을 계속해서 열고
어떤 이는 지옥의 가맹점을 확장해간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이 ‘하루’라는 선물상자는 계속 배달된다.
선물이 오는 동안의 하루하루는 영원한 나라와 연결되는 기회이다.
편지에 답장을 하듯이 선물에 대한 각자의 반응은
천국을 얻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다.
영원으로부터 와서 매일 단 한 번씩 주어지는 이 귀한 선물!
당신은 ‘하루’라는 이 선물을 어떻게 쓰고 계십니까?

출처: http://article.joins.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3272298

진정한 금수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6:10).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구분이 현실을 상당부분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동의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은 수저의 정확한 구분을 따라서는 분류되지 않는 이들이다. 수저의 모든 차이를 일거에 소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은 혹시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흙수저와 같더라도 모든 것을 가진 하나님의 금수저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은 인간문맥 안에서 고안된 수저 개념으로 슬픔과 절망과 낙심과 분노와 불평에 빠진 이들에게 유일한 소망이다. 그런데 교회마저 금수저 쟁탈전에 뛰어들면 그나마 한 가닥의 소망마저 사라진다. 하나님의 자녀는 참으로 금보다도 더 사모할 진정한 금수저 신분이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는 어떠한 불평과 시기와 질투도 그 명분을 상실하고 만다. 

2016년 6월 20일 월요일

길에 대한 무지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20:24). 자기의 길에 대한 이해 불가능은 사람의 걸음이 하나님께 있어서다. 인생이 그러하다. 모르면서 산다. 그래서 자랑과 교만이 있을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다수의 변수들로 들러싸여 있다. 날마다 끝자락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를 모르는 미지의 길에 걸음을 내딛는다. 그나마 인생의 가장 완성된 지도는 성경이다. 그런데 성경의 결론이 바로 시인의 고백처럼 사람은 자기의 길을 알지 못한다는 거다. 내일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이 아무리 높은 진리의 경지에 이르고 최고의 성취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저 바울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함은 섭리적인 무지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를 위함이다. 너무 많이 알려고도,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도, 너무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도 말라. 성경의 결론에 머물러 있음이 언제나 인생의 최선이요 최상이다. 

2016년 6월 18일 토요일

신적인 진노의 두려움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시90:11). 인간의 방자함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즉 코로 호흡하는 인생의 연약함은 어떠하며, 거기에 신적인 진노의 바람이 불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다. 이것이 시인의 설명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생각과 판단이 달라진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는 하나님의 일성을 경청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멸망과 멀어진다. 하나님을 경외하되 그분의 격에 맞도록 두려워할 대로 경외해야 한다. 이런 경외심이 없어지면, 생각의 방자함과 판단의 불의함과 언어의 경박함과 행실의 문란함이 뒤따른다. 경건의 총체적인 고삐가 풀어진다. 달리 말하면, 여호와 경외가 모든 것에서 질서를 잡아준다. 생각과 마음과 삶의 질서가 흐트러져 있다면, 여호와를 경외함이 회복의 첩경이다.

첫학기, 종강했다

전주대에서의 첫번째 학기, 종강했다. 은혜가 너무나도 컸다. 환경의 중요성도 절감했다. 종합대학 안에서의 한 학기는 신학교의 문맥 안에서 가르쳤던 경험과 판이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부족함과 옹졸함을 절감했다. 주 앞에서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도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주님은 정말 위대하고 자비로운 분이심을 경험했다. <사진> 전주대의 일대일 제자양육 모임이다. 신앙으로 소통할 수 있는 분들이 계셔서 더욱 행복했다.

2016년 6월 17일 금요일

신앙의 지향점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시81:14). 이는 주의 백성이 주의 말씀을 경청하고 주의 도를 따른다면 원수의 정복이 급속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속히"라는 말은 시간의 빠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미의 무게는 원수가 제거되는 속도에 있지 않고 말씀의 경청과 순종의 중요성에 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정하신 도를 따른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기독교 신앙은 원수의 정복을 중심으로 구축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순응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는 귀신의 쫓겨남을 기쁨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아야 함과 일반이다. 원수의 넘어짐과 엎드러짐 때문에 기뻐하지 말라는 지혜자의 교훈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신앙의 지향점을 위해 하나님은 원수도 적당히 지으시고 적합하게 쓰신다. 원수에 대한 우리의 부수적인 지향은 제거가 아니라 오히려 회복이다. 

2016년 6월 16일 목요일

기를 꺾으시는 하나님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며 (시76:12). "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한 사람의 가장 은밀하고 깊고 중심적인 존재의 심연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가 물리적인 법칙으로 환원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루아흐"는 그것의 변동은 감지되나 변동의 원인은 그런 환원주의 방식으로 추적되지 않는 영역이다. 물론 "루아흐"의 상태는 뇌나 신경이나 신체나 호르몬과 같은 내부적인 요소들과 날씨나 온도나 풍량이나 지형과 같은 외부적인 요소들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시인은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궁극적인 원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비물질적 원인이 있음을 고백한다. 즉 하나님은 고관들의 기를 꺾는 분이시다. 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영과 혼을 찔러 쪼기시고 일반의 영혼을 멸하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2016년 6월 15일 수요일

미가의 완전한 지혜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 (미1:5). 주께서 땅의 높은 곳을 밟으셨다. 그리고 낮은 곳의 총체적인 초토화가 이어졌다. 이는 야곱의 허물 때문이다. 이스라엘 족속의 죄 때문이다. 야곱의 허물은 사마리아, 유다의 우상숭배 좌소는 예루살렘, 가슴이 철렁한 진단이다. 가장 은밀하고 치명적인 죄는 예루살렘 안에서의 죄다. 거기서의 죄는 의식도 못하고 고발도 못하고 그래서 돌이키지 않아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눈에는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미가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참으로 유사하다. 억장이 무너지는 난국을 타개하는 미가 선지자의 교훈은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 바로 완전한 지혜라는 거다. 경외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위협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개인이나 교회가 가장 긴급하게 주목하고 돌이켜야 할 지점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다른 모든 것은 후순위다.

언술: 인격의 표출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15:28). 사람의 입술에서 출고되는 말에 늘 귀를 기울인다. 악인과 의인의 차이가 언술에서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도 그런 기준으로 성찰한다. 하루동안 배설하는 언어의 종류와 질과 분량이 내가 누구임을 말하는지 솔직하게 돌아본다. 언술은 평면적인 정보의 전달을 넘어 입체적인 인격의 표출이다. 물론 언술에는 실수가 개입하고 그로 인하여 실체와 언술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자세히 들어보면 왜곡 너머의 실체가 읽어진다. 그 실체가 숙고인지 아니면 악인지가 감별된다. 지혜자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께서 내 안에 사시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무진장 간절하다. 

2016년 6월 13일 월요일

입단속의 핵심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13:3). 입의 위력이 대단하다. 입을 지키면 생명이 보전되고 입술을 경솔하게 벌리면 명망으로 치닫는다. 마치 인간의 사활이 입술에 달려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입단속은 중요하다. 동시에 입술에서 출고되는 모든 내용은 마음에 누적된 것들이다. 그래서 입단속의 핵심은 마음 관리이다. 입술에서 선이 나오도록 마음에 선을 축적해야 한다. 마음에 충만한 선의 축적이 없다면 침묵이 최선이다. 

2016년 6월 11일 토요일

자식자랑...(ㅡ.ㅡ)

미대사관 주관 영어대회, 전주영생고가 우승했다. 처음이다. 아들 녀석은 개인전 우승까지 했다. 무엇보다 한국에 잘 적응해 주어서 고맙기만 하다.

2016년 6월 8일 수요일

예수님의 인사 기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21:17). 예수님의 인재등용 방식이다. 세번이나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에게 저주까지 퍼부은 배신자를 다시 등용했다. 실패처럼 보였던 제자발굴, 베드로의 값없는 재등용을 통해 완성된다. 실패가 아니었다. 제자들의 배신과 떠남과 저주는 끝이 아니었다. 주님처럼 순교의 길을 걸어갈 제자도의 과정이며 준비였고 일부였다. 제자답지 않은 사람을 변화시켜 제자답게 만드시는 주님의 방식이 그러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 사역자의 유일한 조건이다. 그 사랑 안에 모든 것이 다 이루었고 성경이 다 함축되어 있고 그 사랑은 신앙과 인격과 삶의 종합적인 표출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과거의 비참한 실패와 선명한 전력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삼지 않으셨다. 실패와 약점과 수치와 오류로 얼룩진 과거가 없는 완전한 사람은 없다. 상대방에 대한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이 그를 향한 오늘의 객관적인 판단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처신을 본으로 삼으련다.

지혜의 기막힌 섭리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잠8:15). 기막힌 섭리이다. 지혜가 없는 왕들과 방백들은 시체에 불과하다. 치리도 못하고 공의도 세우지 못한다. 치리와 공의를 생산하지 못하는 왕들과 방백들은 반대편의 내용을 산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순리에 역행하고 불의를 양산한다. 그래서 방백들과 왕에게는 지혜가 생명이다. 지혜에 의해서만 치리의 존재감을 확보한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를 요청하고 지혜에 순응해야 한다. 결국 치리와 공의는 지혜에서 나오고 그런 방식으로 지혜는 세상을 주관한다. 만유의 통치자, 그리스도 예수는 바로 그 지혜시다. 세상의 섭리와 주님의 통치와 계시는 이렇게 연동되어 있다.

2016년 6월 7일 화요일

사랑이 충만한 세상

세상에는 여호와의 사랑으로 충만하다 (시33:5). 이것이 시인의 안목이다. 놀랍고 부럽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관찰할 안력이 나에게는 없다. 내 안구에 걸러지지 않는다고 그 사랑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충만한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존중해야 한다. 그 사실을 볼 안목의 소유가 우리의 과제이다. 우리에게 선명하게 감지되는 불의와 부조리와 모순과 불법이 가득한 세상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정의는 그런대로 보이는데, 여기에 공존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은 잘 읽어지지 않는다. 정의와 사랑을 상이한 것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문제인가?

2016년 6월 5일 일요일

베풂, 부자의 처신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5:1). 부자가 여전히 부자인 것은 그들에게 맡겨진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히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 중에 주어지지 않은 것들이 하나도 없다면, 이는 주신 자의 의도가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것들에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다시 말하면, 부는 소유에서 만족과 희락을 누리도록 주어지지 않았고, 사용에서 가치와 의미를 산출하여 주신 분의 뜻이 실현되고 기념되게 하는 방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다산 정약용의 경제관는 베풂이 부를 관리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진실로 베풂은 동일한 액수로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되 어떠한 부작용도 없고 안전한 방법이다. 이 방법에 무관심한 부자들의 종국은 고생과 통곡이다. 여기서 부는 돈이든 지식이든 건강이든 젊음이든 가문이든 환경이든 기회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포괄한다. 울고 통곡하는 일이 없도록 실컷 나누어야 한다. 귀담아 들어야 할 야고보의 교훈이다.

정약용: "무릇 재물을 비밀스레 간직하는 것으로 베풂만한 것이 없다. 도둑이 뺏어갈까 염려하지도 않고, 불에 타 없어질까 걱정하지도 않는다. 소나 말에 실어 운반하는 수고로움도 없다. 그런데도 내가 능히 죽은 뒤에까지 지니고 가서 아름다운 이름이 천년토록 전해진다. 천하에 이 같은 큰 이익이 있겠느냐? 단단히 잡으려 들면 들수록 미끄럽게 빠져나가니, 재물이란 미꾸라지다."

2016년 6월 4일 토요일

만족의 근거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17:15).

하나님의 형상을 만족의 근거로 삼은 시인의 마음이 아름답다. 그런 체질의 소유가 경건의 능력이다. 인간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다. 그런데 천하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여줄 근거 찾기에 급급하다. 혹 찾았다 하더라도 그 근거의 희열은 찰나이다. 금새 불만족이 고개를 내민다. 그러면 보다 자극적인 만족의 근거에 헐떡인다. 혹 찾았다 하더라도 짧은 희열을 지나 불만족이 반복된다. 결국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찾지 않으며 금으로 좋아하는 자는 금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전도자의 교훈만 입증하게 된다. 만족의 근거는 인간보다 못한 것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근거는 유일하게 인간의 존재보다 크고 높으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누워 자고 깰 때마다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는 사람이고 싶다.

2016년 6월 3일 금요일

내 걸음의 주인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6).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과 이어지는 구절이다. 내일 무엇을 할 것이다, 내년에는 여기에 머물 것이다 등의 표현을 야고보는 자랑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악함을 지적한다. 형제도 판단하지 못하지만 나 자신의 삶도 내가 규정하지 못한다. 주께서 뜻하시면 우리는 살고 머물며 무언가를 한다. 우리는 종이고 하나님은 주인이다. 주인의 계획과 뜻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는 내 행보의 주관자가 아니라 순응자다. 주님만이 내 걸음의 주인이다. 

2016년 6월 1일 수요일

정약용의 금언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한 마리 가을매가
하늘을 박차고 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

눈은 건곤을 작게 보고,
손바닥은 우주를 가볍게 보아야만 한다."

이득이 없는 자리로~!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1:19). 존경하는 한 목사님은 갈등의 기로에서 늘 이익이 없는 자리에 서 있으면 뒷탈이 없다고 하시더라. 지혜로운 교훈이다. 이익에 무심한 역방향 행보를 취하는 목회자의 모습, 부지런히 연습하자. 지혜자의 말처럼, 이익을 탐하는 것 자체가 생명의 위협이다. 이익이 없어서 아무도 흠모하지 않는 그런 자리가 어디일까? 그곳으로 가자고 의식과 성향과 습관과 시선과 기호를 설득하자.